커피 브레이크에 아침에 읽은 칼럼을 옮겨놓는다(스크랩은 한번 더 읽는 효과가 있다).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김우창칼럼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에서부터 터진 이번 위기 국면이 과연 미국식 자본주의의 붕괴, 더 나아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종말을 가져올 것인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개연성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개인적으로 금융쪽에 대해서 아는 바도, 관심도 별로 없는지라(하긴 예금잔액이 별로 없기도 하다. 나는 '모기지'란 말의 뜻도 이번에 알았다, 아니 찾아봤다) 사태의 추이에 대해서는 기사나 칼럼에 의지하여 판단할 따름이다. 오늘 읽은 칼럼은 그래도 내가 다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었다.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 이유이다.  

  

경향신문(08. 09. 25) 금융위기 - 제도와 인간 가치

세계 굴지의 금융기관들이 줄지어 도산한다는 뉴스가 신문에 연일 보도되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한 도산과 파산의 폭풍이 영국과 기타 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를 흔들고 아시아에 밀려오고 있다. 무언가 대사변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물론 경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 원인이나 연계관계 그리고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이 일이 범상스러운 일이 아님을 몸으로 느낄 수는 있다.

소위 서브프라임 주택 융자 위기가 이야기되더니, 금융관계회사라는 프레디맥과 패니메이, 리먼브라더스에 이어 AIG 보험회사 등이 파산하거나 도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는 보도가 연이어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 다만 지금 말한 회사 중에 셋은 미국정부의 긴급조처로 파산을 면하게 되었고, 이어 미국정부는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위기로부터 금융회사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의회에 7000억달러의 긴급예산 배정을 요구하였다. 이 액수는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투입한 경비에 비교된다고 하니까, 그 규모의 크기가 얼마나 막대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처로 일단은 사태가 수습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의 위기는 몇 개의 큰 사고가 아니라 오늘의 국제 금융시장 체제 전체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내는 일이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종말의 시작을 가리킨다는 관점도 대두하고 있다.

- 공익을 망각한 美금융기관들 -

시장원리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지켜왔던, 미국의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는 금융회사 도산을 방지하기 위한 미국정부의 조치를 하나의 거대한 위선에 해당한다고 비판하였다. 지금까지 금융회사들이 위험도를 적당히 호도했던 것은 사기이며, 정부가 그것에 대하여 눈감아 왔던 것은 무능 무책임한 일이었다. 그 결과가 이번의 사건인데, 평소에 금융시장 규제를 반대해온 회사들이 이제 와서 정부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위선적인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스티글리츠 교수는, 그러니까, 오늘의 사태에 대한 책임은 해당 기업체가 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오늘의 경제 체제 전체가 그러한 기업들의 파산으로 붕괴할 것으로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선이라는 말의 진의(眞意)는, 적절한 규제 없이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시장인데, 그것을 감추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상품의 안전성 보장을 적극화하는 몇 가지 안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붕괴를 허용하기에는 너무 비대한 회사”가 출현하는 것을 방지하고 그것을 분할하는 것과 같은, 공정 경쟁 확보를 위한 법을 강화하는 안도 있고, 금융회사의 보수 규정을 엄격화하는 일도 포함된다. 후자는 기업 간부들의 보수가 단기적 수익률에 연결되어 그것이 부정직하고 위선적인 기업 운영의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 교수가 오늘의 금융시장을 대체할 전적으로 새로운 방안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가 비판하듯이, 금융업의 경영형태가 사기와 위선을 포함한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면, 금융업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문제이고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근본과제는 기업으로 하여금 윤리적 기준을 준수하게 하는 것이다. 거꾸로 보면, 그것은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요구를 경제 질서로 풀어내는 일이다. 물론 스티글리츠의 관점에도 윤리적 도덕적 고려가 들어 있다. 결국 그의 비판이 기초하고 있는 것도 정직성, 공정성, 공익성 등의 기준이다. 그리고 기업에도 그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윤리 도덕의 경제제도화를 보장할 수 있는 간단한 해결책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처음 주목을 많이 받았던 것은 주택 금융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회사이다. 패니메이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으로 저금리 주택자금을 일반 서민에게 대여하여 서민의 주택 소유를 용이하게 하고, 그로 인하여 자극된 주택 건설로써 30년대 공황기의 고용 확대를 기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회사의 소유주는 주주들이면서도, 정부로부터 여러 혜택을 받았다. 프레디맥은 앞의 회사와 비슷한 목적을 가졌으면서, 그 독점 방지를 위하여 60년대에 추가로 설립된 회사이다. 그러니까 두 회사는 사익보다는 공익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이 회사들은 본래의 목적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로 변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부 정책의 변화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회사들이 공익 회사로서 감독기관의 감독을 벗어나기가 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융재난 원인의 하나인 소위 ‘서브프라임 모기지’-상환 능력이 불확실한 서민에게 주는 주택 담보 융자-도 정부의 보호 아래 회사가 쉽게 들여 올 수 있었던 외국 자본과의 연결로 인하여 확대된 것이다.)

AIG가 위의 회사들과 같은 성격의 회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AIG의 명분상의 주업은 보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험은 원래 사회적 성격이 강한 사업이다. 그것은, 노동의 부담을 공동체가 나누어 지는 두레나 품앗이처럼, 사람이 겪게 되는 여러 위험을 협동적으로 분담하는 일을 기업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때 그것은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의 위험을 줄이는, 사회복지 기업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당초의 기능은 근래에 와서 많이 약화되고, 사실 AIG 같은 경우, 보험이 그 주업인지도 확실치 않다. 이러한 변화는 금융자본의 비대화, 공권력의 태만과 변질, 그리고 기업 활동을 공동체적 기반으로부터 분리해 낸 세계화와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 ‘인간성 실현’ 없는 제도는 몰락 -

이미 비친 바와 같이, 이번의 미국발(發) 세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자본주의를 대체하려고 하였던 것이 공산주의 실험이었는데 그것이 결딴난 지금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대안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대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거에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커다란 기획을 세운다면, 인간적 삶의 신장(伸張)을 위한 쉼 없는 조정과 균형의 노력이 필요 없어진다고 착각하는 제도가 실패하는 제도이다. 물론 사회에는 인간성 실현의 이상에 대한 기본적 합의가 존재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잊지 않는 한, 이 이상은 간단하다면 간단한 것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물음에 열려 있는 것이라야 한다.

물어야 할 물음의 하나는 무한한 경제발전 또는 부의 축적이 인간됨의 모든 것이라는 강박적 느낌을 향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도, 개인의 삶에 대하여서도 물어야 한다. 파산한 리먼브라더스 CEO의 작년 보수는 4500만달러였다. 미국의 최고 경영자와 일반근로자의 봉급 차이는 30년 전에 30배, 작년에는 344배였다. 작년에 하버드대학 4학년생의 47%가, 금년에는 37%가 금융업계로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돈의 폭풍이 오늘의 세계를 휘몰아간다. 규모는 다를망정, 그 폭풍의 위력이 우리 사회에서 덜 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폭풍이 어찌 마음에만 불고 제도를 휩쓰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무엇이 인간의 인간됨을 드높이는가를 묻는 마음은 제도에 균형을 주는 중요한 기제이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9. 25.

P.S. 가장 단순하게는 "미국의 최고 경영자와 일반근로자의 봉급 차이는 30년 전에 30배, 작년에는 344배였다"는 사실 자체의 문제성을 인지하는 것이 요점이다. 그것을 '승자 독식사회'의 자연스러운 룰로 용인할 때(사회적 빈곤을 개인적인 나태의 자연스런 귀결로 치부할 때), 그리하여 '20:80사회'를 넘어서 '1:99사회' 곧 '상위1%를 위한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사회는 파국으로부터 멀지 않다. '1%의 대한민국'으로 질주하는/내몰리는 정부의 행태와 사회적 분위기가 염려를 넘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황에서 자연스레 예견되는 '총체적 몰락'으로부터 과연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

P.S.2. 미국 금융위기('월가의 침몰')에 대한 이번주 시사IN의 특집기사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0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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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25 15:43   좋아요 0 | URL
사실 현재 미국정부의 조치가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오히려 이렇듯 '위선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위선적'이겠지만요). 예를 들자면 1930년대의 대공황 시기를 떠올려볼 때(당시의 뉴딜 정책과 현재 미국정부의 금융지원을 비교해보는 것, 그 안에서 거대 금융자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금융자본에게는 일종의 '전략적'인 역사-반복 체계가 존재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입니다. 위기를 창출하고 그를 통해 다시 이득을 얻는 기괴한 시스템으로서는 오히려 대성공인 것이죠. 어제(9월 24일) 중앙일보의 칼럼 면을 보니 김종수 논설위원이라는 분이 '미국식 자본주의는 결코 [이 정도 쇼크로는] 붕괴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다소 '자기암시적'이라 할 칼럼을 하나 쓰셨던데요('미국은 금융위기를 극복할 것이다'라거나 '비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진다'고 하는 등 거의 열렬하고 간절하게 응원하는 논조였지요...), 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그 요지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그 쇼크는 사실 수동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창출'된 면도 있기 때문이죠. 그 논설위원의 말이 맞을 겁니다, 아마도 '이 정도 쇼크로는' 결코(?) 미국식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겠죠...(사실 저로서는 이 점이 가장 '안타깝고 분한' 부분이긴 하지만요). 논설위원이라는 분이 금융자본의 논리를 너무 '순진무구하게'만 바라보고 있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로쟈님이 추신에서 "가장 단순하게는"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저 임금 차이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야말로 금융자본의 기형적 자기증식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가장 큰 '수혜'를 누가 입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해야겠지요.

로쟈 2008-09-25 22:51   좋아요 0 | URL
현재까지는 '위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니까 붕괴 여부에 대해서도 확언할 수는 없을 듯싶습니다. 다만 적어도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 정도는 합의가 되는 듯싶어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규제해야지만 제대로 돌아가는 자본주의라면 그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인지도 생각해볼 문제이겠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6:12   좋아요 0 | URL
김종수 그 양반 전형적인 중앙일보 사나이죠.중앙일보 냄새가 팍팍 풍기던데...
 

오랜만에 '김우창 칼럼'을 옮겨놓는다.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것인데, 지난달 말 방한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강연을 다루고 있다. 고려대에서 있었던 첫번째 강연주제인 '정화된 민주주의'(번역원고에 따라 언론에서는 '순화된 민주주의'라고 표기했었다)에 대한 논평을 겸하여 '나라 사랑'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나로선 '세계시민주의와 애국주의'에 대한 글을 얼마전에 작성하기도 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참고로, 누스바움 교수의 세 차례 강연원고는 원문과 함께 인터넷에서 입수할 수 있다(나는 세번째 강연을 직접 듣기도 했다). 간단한 관련 동영상은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OnAir/YIBW_showMPICNewsPopup.aspx?contents_id=MYH20080825004600355&bandwidth=700 참조.

  

경향신문(08. 09. 11) 나라 사랑과 인간 사랑

지난 8월27일부터 사흘간 학술진흥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 시카고 대학의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강연회가 있었다. 그는 지금 미국 철학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 가운데 하나지만, 거기에는 철학적 깊이 이외에도 미국 철학을 상아탑으로부터 공공의 공간으로 끌어 낸 철학자라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다. 브라운 대학의 고전철학 교수로 있던 그가 시카고 대학 법학대학원의 교수로 옮겨 간 것도 철학이나 문학 그리고 인문과학이 사회 현실 이해와 실천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학 교육에는 법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인문과학이 제공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건의 구체적 정황의 정확한 파악은 분석력과 함께 감성적 사고의 훈련을 거친 사람이라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스바움 교수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이다.

이번 방한 중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첫 번째 강연은, ‘정화된 애국주의가 가능한가?’라는 제목이었다. 나라 사랑에는 대체로 남의 나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에 대한 규범은 포함되지 않는다. 어떻게 나라 사랑을 더욱 보편적인 인간 사랑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있어서이다 - 누스바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 애국심·인간애 근원은 애향심 -

이때의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적 이권의 맹목적 추구를 옹호하는 체제를 말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민주주의의 이상은 모든 사람의 자율, 동등 그리고 위엄을 신장하고 보장하는 체제이다. 국가는 사회 일부에서 일어나는 지나친 탐욕과 이기주의의 추구를 억제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동기의 다국적 기업과 세계시장의 횡포를 막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인종, 성, 계급에 기초한 차별 또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폐지도 국가의 의무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어려운 상황에 있는 나라에 대한 원조, 인도적 배려, 그리고 평화와 전쟁 방지는 자연스러운 국가 목표의 일부가 된다. 누스바움 교수의 생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애국심은 이 모든 도덕적 규범을 포용하는 것이어서 마땅하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와 이상들이 반드시 나라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각될 필요가 있는가? 누스바움 교수에게 정서적인 것이 짜여 들어가지 않는 이성적 판단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결하게 된다. 애국심은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생겨난다. 거기에는 공동의 상징물과 기억과 시와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크게 작용한다. 이러한 것들이 전통과 문화가 되고 의례(儀禮)로 정립된다. 여기에서 길러지는 애국심에 보편적 인간 가치를 통합한 것이 정화된 애국주의이다.

누스바움 교수의 강연이 말한 애국심과 보편적 가치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과 통합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제시된 통합 방법이 모순을 충분히 참조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대 강연 후 청중으로부터 나온 질문의 하나는 “애국심에 정서적, 상징적 자산이 중요하다면 분단된 나라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질문은 이민자나 이주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있을 수 있다. 누스바움 교수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구태여 답변을 생각해 본다면, 소수자에 대한 일체의 차별을 거부하는 정치체제가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답이 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체제가 소극적인 의미에서 소수자 문화의 위엄을 보장할 수는 있겠지만, 이문화(異文化) 속에 사는 사람의 문제를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또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다른 나라와의 사이에 평화적 관계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라크 전쟁은 민주주의라는 명분이 전쟁의 구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또는 어떤 정치 이론가들이 말하듯이, 애국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전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쟁의 상태가 사람들이 가장 애국적이 되는 조건이라는 관찰도 있고, 집단 심리를 동원하기 위하여 가상의 적대국이나 집단을 조작 이용하려는 정치 정략도 가능하다.

어쩌면 모순은 모순대로 인정하면서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옳을는지 모른다. 2차대전과 독일 점령을 경험한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어떤 사람이 전선(戰線)의 저쪽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가, 국가를 위해서 거짓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옳은가 -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나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은 복잡한 현실 여건과의 관계 속에서만 저울질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국에 대한 누스바움 교수의 말에는 여전히 경청해야 할 사항이 있다. 메를로퐁티와 조금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그가 구체적 상황과 감정을 중요시한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화된 애국주의론에서는 이 입장을 조금 느슨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좁은 구체성이 관점과 생각을 좁히게 될 것을 우려한다. 그리하여 가족이나 지역 등의 좁은 단위가 마음을 좁히는 데 대하여 나라는 그것을 한껏 넓히면서 실효성을 갖는 테두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넓히는 것이 공간적 확대에 일치해야만 하는 것일까?

- ‘고향파괴’ 새도시 건설 멈춰야 -

영어의 애국심(patriotism)의 어원에 들어 있는 파트리아(patria)는 나라보다는 고향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애국심은 애향심의 확대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공간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내 가족이 나에게 중요하다면 다른 가족도 중요하고, 내 나라가 나에게 중요하다면, 남에게는 그의 나라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마음의 움직임이 여기에 관계된다. 자기의 일로 다른 사람의 일을 미루어 생각하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구체성의 심화는 마음의 확대 그리고 공간의 확대를 가져 온다.

국가가 실효성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은 그 강제력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보편성은 반성의 능력과 문화에서 온다. 그리고 그것에 토양이 되는 것은 고장과 고장 사람들의 교감이다. 누스바움 교수는 애국심을 말하면서,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 연설에서 미국의 국토를 - ‘뉴햄프셔의 광막한 구릉들’ ‘캘리포니아의 굽어진 해안’과 같이 -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을 칭찬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구체적인 사물이고 사건이다. 그러나 이 킹 목사의 언급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수사에 의존한다. 참으로 구체적인 것은 나와 이웃과 선조가 살았던 고장과 그 이야기이다.

우리가 그간 해온 일은 새로운 도시 건설의 이름으로 몸을 두고 살 수 있는 고장과 이웃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새 건설은 마음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지속적인 공동체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파트리아의 보존을 생각할 때가 되었지 않나 한다. 마음과 몸과 땅과 사람이 교감하며 정주하는 데에서 나라 사랑도 나오고 인간 사랑도 나온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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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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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2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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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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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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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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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이 국방부 '불온서적'에 포함됨으로써 화제가 됐던 장하준 교수의 인터뷰기사를 한겨레에서 옮겨온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6688.html). 이번주 시사IN의 불온서적 리뷰에서는 책 제목이 '붉은 사마리아인들'로 불린 얘기도 나온다. 불온한 책이니 '나쁜' 책이면서 '붉은' 책이기도 한 것. 좌우 양편에서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장하준 경제학이 '상식'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한다. 아니, '상식'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니 미국 따라하기가 아니라 그걸 경고하는 장하준 따라잡기가 우리에겐 일단 필요하다. '전망'이나 '대안'의 모색은 그 이후에 가능할지 모른다(장하준의 기본적 정향은 '자본주의 안에서의 변화와 개혁'이다). 

 

한겨레(08. 08. 26) "미국을 따라하지 말고 반면교사 삼아라”

“스위스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란 게 관광객에게 ‘뻐꾸기 시계’나 ‘소 목에 매다는 종’ 팔아서 돈 벌고, 좋게 얘기하면 금융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방학을 맞아 한국에 온 장하준(45·[사진])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지난 20일 한겨레신문사 초정 강연과 뒤이은 인터뷰에서 잘못된 관념과 신화를 깨야 한다며, ‘스위스를 탈산업화 사회의 표본’으로 여기는 통념을 한 사례로 들었다.

“사실은 1인당 제조업 생산량이 제일 많은 나라가 스위스다. 서비스로 먹고사는 나라가 아니다. 일본보다 24% 높고, 미국에 비해 2.2배 높다. 세계에서 제일 산업화가 된 나라인데, 우리는 그 나라가 서비스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잘못 갖고 있는 관념이 많다.”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의 흥미로운 사례는 줄줄이 이어졌다. 파나마모자는 에콰도르에서 만든 것이며, 뻐꾸기시계는 독일에서 발명했으며, 프렌치프라이는 벨기에에서 생겼고….

삶의 질 낮고 금융불안한 미국 ‘신자유주의 신화’ 본색 드러나

장 교수는 화두로 삼고 있는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가 전세계를 휩쓰는 대세이며, 대안이 없다는 것도 신화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전세계 이데올로기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자꾸 없다고 하니까, 찾아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한다”며 “안 보려고 하니까 대안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기업이면서 민간기업보다 훨씬 효율적인 데가 많으며 스웨덴처럼 (신자유주의 흐름과는 달리) 노사 대타협을 맺어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활력을 동시에 이루고 있는 예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흔히 미국이 제일 잘사는 나라라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신화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생활수준이 높은 게 아니다. 미국은 노동시간이 유럽보다 10~30% 길다. 노동시간당 국내총생산(GDP)은 구매력 기준으로 해도 세계에서 7~8위다. 그만큼 저임금 노동이 많다는 이야기다. 독일은 (오후) 5시면 (가게) 문 닫고, 미국은 24시간 가게 열고 늦게까지 일한다. 범죄율, 유아사망률, 기대수명 같은 ‘삶의 질’에 관한 지표가 선진국 중 최하위권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모델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미국을 따라갈 이유가 없고, 그것은 또한 위험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곧 외환위기 이후 펴 온 한국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외환위기 뒤 기업의 부채비율을 400% 수준에서 200%로 무리하게 낮추는 식의 정책이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고 일자리 감소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부채 비율 낮은 게 좋은 거라면 브라질이 세계 1위다. 브라질 기업들은 돈을 안 빌린다. 부채 비율이 50%다. 우리나라는 성질이 화끈해서 완전히 극단으로 간다. (외환위기 뒤 부채 비율을) 200%로 낮추라고 하니까, 100%까지 낮췄다. 미국이나 영국도 150% 정도인데….”

한국 사회에선 장 교수와 달리, 외환위기 뒤의 신자유의적 구조조정은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했다는 견해가 득세했다. 마땅한 대안이나 다른 방향을 채택할 수 없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장 교수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신자유주의적으로 하자면, (기업을 지원하는) 정부의 산업정책이라는 게 있을 수 없음에도 (신자유주의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산업정책을 펴고 있다는 점을 한 예로 들었다.

“미국처럼 (심하게) 산업정책을 시행하는 나라가 없다. 미국의 연구개발(R&D)비 지출이 대단히 많다. 우리나라나 일본도 국가 주도형이라지만, 총 연구개발비에서 정부가 대는 게 20%, 유럽이 30%인데, 미국은 50% 가까이 된다. 1990년대 중반에는 50~60% 사이, 해에 따라서는 70%까지 된다. 미국 기술 경쟁력의 기초는 정부의 지원을 통한 연구개발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산업정책을 구시대의 유물로 용도폐기하는 것은, ‘몰래 시험공부 미리 다 해놓은 친구 따라 영화 보고 미팅하러 돌아다니다가 시험을 망치는 바보’가 되는 길이라고 장 교수는 비유했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장 교수가 신자유주의자를 비유해 지칭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갑자기 착하게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걸 기대할 수도 없고, 그 반대에 서 있는 쪽에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을 착하게 고쳐먹도록 압박할 ‘힘’도 없는 게 현실 아닌가?

“두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하나는 소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들 가운데도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쪽이 있다. 예컨대 핀란드·노르웨이는 후진국에 원조를 활발히 하는데, 그런 나라마저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후진국에 부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신자유주의적 정책)가 가장 맞는 정책 아니냐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지칭된 이들 가운데서도 ‘아! 이게 맞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겨날 수 있다.” 그보다 조금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소탐대실이라고 느낄 것이라고 장 교수는 덧붙인다.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를 잘살게 해주는 게 (장기적으로는) 이익이라는 것을 안목 있는 사람들은 깨닫게 될 것이란 기대감이다.

신자유주의적 처방에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고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 대기업의 기능을 중시하는 장 교수의 견해는 종종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통한다거나, 한국 사회 재벌의 문제를 간과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장 교수와 두터운 교분을 쌓고 있는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또한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장 교수의 신자유주의 비판에는 공감하지만, 재벌의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바 있다.

한국사회 재벌문제 심각해도 대기업들 구실은 여전히 중요

장 교수는 이에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다 생각하니까 그것을 엮어서 (노사) ‘대타협’을 이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한국 경제 성장에서 재벌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은 유종일 교수님도 동의할 것이다. 다만,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냐 아니냐는 부분에 있어서 판단이 다른 것이다.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업(재벌)들이 책임 있는 행동만 한다면 스웨덴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장 교수는 같은 맥락에서 지난해 10월에 불거져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삼성 사태’는 잘못 가닥을 잡았다고 진단한다. 재벌 제도의 장점이라는 게 기획조정실을 중심으로 ‘계열사간 상호 연계’를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인데, 그 구조를 포기하는 대신 ‘가문의 승계 구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고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선 오히려 거꾸로 됐어야 한다는 게 장 교수의 견해다.

미국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비롯된 국제 금융시장의 혼란, 고유가에 따른 물가 급등세 등으로 현재 한국 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에 빠져 있다. 영국 학계에 몸담으며 넓은 식견을 갖춘데다 한국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장 교수에게 한국 경제의 앞날은 어떻게 비칠까?

“과거 10여년 동안 주식시장과 부동산 붐에 힘입어 잘나가는 듯했던 미국·영국·스페인 같은 나라들보다는 상황이 낫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수출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다. 주요 수출시장인 미국이 휘청거리고, 또 미국 때문에 먹고사는 중국이 휘청거리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한국이)흑자 낸 많은 부분이 중국에 기계와 중간재료 팔아서 번 것 아닌가. 무엇보다는 국제 금융시장이 불안하다. 앞으로 최소 1년 이상은 세계경제가 어려울 것으로 본다.” 장 교수는 “(외환위기 뒤) 경제 체질이 약화돼 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미국식 자본주의가 좋은 게 아니구나 하는 계기로 만들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미국식으로 더 나가려고 하니 걱정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했다.(김영배 이정연 기자)

08. 08. 26.

P.S. 장하준 교수의 최신간은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부키, 2008)와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산책자, 2008)이다. 전자는 아일린 그레이블과의 공저로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제시한다고 한다. 후자는 '새로운 좌파의 길'로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글모음인데(생각보다 자극적이고 유익한 글모음이다), <국가의 역할>,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를 우리말로 번역한 이종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참고로 <국가의 역할>(부키, 2006)에 대한 자세한 리뷰도 옮겨놓는다. 필자인 홍기빈에 따르면 장하준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은 '경제적 현실주의'로 정리될 수 있다.  

프레시안(06.12. 07) '신자유주의 경제학', 설 땅을 잃다

장하준 교수의 책 <국가의 역할>(이종태, 황혜선 역, 부키 출판사)이 출간되었다. 원저인 <Globalization, Economic Development & the Role of the State>(London: Zed Books, 2003)는 이미 세계의 많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요한 교재로 채택되어 명성을 얻은 책이다. 다행히도 500쪽에 달하는 이 역저가 이종태, 황혜선 두 분의 노고 덕분에 근래에 보기 힘든 훌륭한 번역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도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 실천적 파산과 그 폐해를 지적한 책들이 없지 않았으나,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그 중요성과 의의에서, 특히 난마와 같은 정치경제 구조변환의 혼란에 빠진 한국사회에 대해 갖는 함의에서 특기할 만하다.

사이비과학의 위험에서 정치경제학 구해내기
과학철학의 중요한 작업 중 하나는 과학과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demarcation)이다. 사이비 과학의 특징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 모호한 개념들을 기초로 하여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는 명제를 도출한 뒤 이를 보편적인 법칙으로 승격시킨다'는 데 있다. 한때 유럽을 풍미했던 연금술이나 점성술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이것들은 '5행성의 성질'이니 '여러 금속의 서열'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사용하여 예언과 주장을 내어놓은 뒤, 그것이 현실에서 어긋나게 되면 "이 경우는 특수한 경우로서…"라는 갖은 특수설명(ad hoc)으로 둘러대 논증도 논박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생과 사회의 나아갈 바라는 추상적인 법칙으로까지 그것들을 승격시킨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를 풍미하면서 전 지구의 정치경제 체제를 소위 '전지구적 시장 체제'로 바꾸어놓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 체계를 장 교수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 이후 벌어진 신고전파와 오스트리아 정치경제학파의 '정략결혼'으로 파악한다. '경제적 최적화의 계산'이라는 기술적 한계를 넘지 못한 신고전파 경제학이 오스트리아 학파로부터 자유, 시장, 국가 등의 개념에 대한 일관된 자유주의적 논리를 제공받는 대신, 그동안 주류 경제학에서 따돌림당하던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이론의 '과학성'을 인정해주는 일종의 '빅딜'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결혼이 신랑 쪽이나 신부 쪽이나 모두 100살이 넘었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본축을 이루는 이론들은 모두 파레토, 왈라스, 클라크, 혹은 그 이전에 나온 19세기 경제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 오스트리아 학파의 정치경제 사상이라는 것은 미제스나 하이에크 등이 이미 1930년대부터 끝없이 반복하며 설파했던 '19세기식 시장사회', 즉 "자유주의 정치경제 사상의 중심 가치는 신성불가침의 자연법"이라는 생각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20세기 100년 간의 역사는 시장도 국가도 사회도 자유도 후생도, 어느 것 하나 19세기 식으로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계대전, 파시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과 관련된 파란만장한 대사건들 속에서 계속 변모해 온 현대의 정치경제 체제를 과연 이 100년 묵은 이론 두 개를 합쳐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증손자, 아니 고손자를 기다리면서 학설사의 한 페이지로 그냥 조용히 늙어가야 할 이 할머니 할아버지 이론들이 과연 '회춘'하여 왕성한 생산력으로 새롭게 자손을 번창시킬 수 있을까. 혹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추상적 개념들로써 논박도 논증도 애매한 명제들을 마구 쏟아놓으면서 "한 나라, 아니 전 세계의 정치경제가 나아갈 바는 이런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거대담론으로 치닫는 '사이비과학'이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사태가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기에 의혹이 더 짙어진다. 이미 20세기 전반에 카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19세기식 자유주의 정치경제 사상의 패러다임이 지닌 '과학'으로서의 가치가 파산상태에 달하여 이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된 현실을 폭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 나아가 지식대중 전부가 그렇게 '이데올로기'로 변해버린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운데 현실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전 세계가 파시즘과 세계대전이라는 위기로 치닫는 기막힌 현실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런 사태에 부닥쳐 카아(E. H. Carr)와 같은 사람은 사회연구는 더 이상 '유토피아와 사이비 실증과학이 뒤섞인'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 현실을 재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회적 현실을 관찰하여 신중한 정책제안을 가능케 하는 '현실주의' 정신을 가지라고 제창한 적이 있다. 이 저서에서 장하준 교수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카아의 '현실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장 교수는 자신의 방법을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정치경제학을 사이비과학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하여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과학으로 재정립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 교수는 이런저런 현실의 폐해 사례를 극적으로 강조하거나 '사회적 관계와 가치의 파괴'와 같은 도덕적, 윤리적 명제에 호소하여 비판을 전개하고 있지 않다. 사상, 이론, 정책의 세 측면 모두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정면으로 맞서 씨름하면서 (1) 그 사상적 기초와 개념이 대단히 모호하거나 그릇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고 (2) 그것이 주장하는 숱한 이론들이 얼마나 실증적 기초가 박약하거나 현실적 사례에 의해 종종 논박되며 (3) 그 정책적 귀결이 비현실적이고 해롭기까지 함을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더욱이 이 저서 전체에 걸쳐서 장 교수는 한 순간도 글을 '날려서 쓰는' 법이 없다. 치밀하고 촘촘한 논리가 펼쳐지는 가운데 그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된 문헌과 데이터의 양과 규모도 실로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서는 21세기 초에 새롭게 역동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의 발전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경제적 현실주의'의 선언으로 자리매김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안으로서의 산업정책

이 책 1부의 1장과 2장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기둥이 되는 두 개의 핵심 개념, 즉 '시장'과 '국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보통 자유, 효율성, 정보, 자발성 등에 의해 작동하는 동시에 그런 것들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시장'이며 불필요한 규제, 정치적 왜곡, 비효율, 무지, 자유의 억압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국가의 경제개입'이라고 규정해, 전자를 최대한으로 확장하고 후자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운영의 나아갈 바라는 단순명쾌한 주장을 그 사상적 기초로 삼는다.

장 교수의 비판은 이런 식으로 단순하고 모호하게 정의된 '시장'과 '국가'의 개념이 실제 현실에서는 그 발생과 작동 및 운영에 있어서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결국 그러한 단순한 개념화에 기반을 둔 사상적 명제가 터무니없이 단순화된 현실의 희화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대신 시장도 국가도 인간사회 속에서 존재하며 숨을 쉬는 수많은 제도 중 하나로서 현실적으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두 제도에 대한 그릇된 환상이나 신화를 넘어서서 현실의 여러 제도들과 가장 잘 결합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러한 문제와 방안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경제학 방법론으로서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이 제안된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의 틀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주장과 정책적 제안 양자를 반박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2부에서는 먼저 대외경제의 측면, 즉 최근의 경제적 지구화의 담론 속에서 가장 예민하게 떠오르고 있는 세 가지 쟁점을 다루고 있다. 초국적기업, 지적소유권, 산업정책의 문제가 그것이다. 4장에서는 초국적기업이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초국적기업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경제를 개방하는 것만이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여지가 없는 선택이라는 명제를 실증적으로, 논리적으로 부수고 있다. 이를 통해 장 교수는 초국적기업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자대상국이 얼마나 건전하고 수익성 높은 내부적 경제 틀을 갖추고 있는가가 오히려 더 많은 외국투자를 불러들이는 데 관건이 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5장에서는 특히 '지식기반 경제'에서 초국적 지적소유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장치가 필수적이라는 명제가 근본적으로 비판된다. 지적소유권 보장과 경제성장의 관계는 대단히 의심쩍은 것이며, 개도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일방적인 손해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된다.

6장에서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어라 할 '산업정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지구적으로 확장된 세계시장의 역동성 속에서 하나의 국가가 자국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나 이룰 수 있는 산업정책이라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특히 일본, 프랑스 등 산업정책으로 성공한 나라들은 독특한 제도적, 사회적 환경이 그런 정책의 성공요건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경우이며, 따라서 산업정책을 보편적으로 시행할 수도 없고 시행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장 교수는 20세기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는, 서구에서나 제3세계에서나 순수한 '시장경제'보다는 오히려 국가에 의한 산업정책이 더 보편적이었음을 들어 반박한다.

이러한 6장의 논지는 곧 국내경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할 것인가를 다루는 3부의 논의로 이어진다. 2부에서 소위 '지구화로 인한 불가항력의 외적구조 변화'라는 담론을 비판하고 난 뒤 3부는 국내경제를 조직함에 있어서 바로 이 국가에 의한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산업정책 부활만이 오히려 이 지구화 시대의 세계경제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임을 역설한다.

실로 논쟁이 많은 이 주제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 쪽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은 '시장경제' 대 '산업정책'이라는 논쟁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본 뒤, 20세기의 대규모 산업경제에서는 산업정책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시장의 비효율성'을 피할 수 있는 필연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경제이론의 차원에서 입증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 논쟁에서 실로 가장 첨예한 전투장이요 가장 많은 사상자, 피해자가 발생한 장인 '공기업'의 문제, 즉 '공기업은 반드시 수익성이 낮을 수밖에 없는가'를 다루고 있다.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지난 몇십년 간 대학에서, 매체에서, 정계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휘둘러 온 일사천리의 주장,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시대착오에 빠져 있거나 경제법칙의 과학성을 무시하는 철없는 좌파"라고 하던 매도에 속절없이 말문이 막혔던 이라면 이 책의 출판을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그러한 지난 몇십 년 간의 '시장개방'이 과연 지구적 규모에서나 일국적 규모에서나 고도성장과 보편적 풍요와 효율성이라는 낙원으로 우리를 인도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이 우리의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경제성장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고 하던 IMF와 김대중 정부의 경제관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투자, 저성장, 양극화, 투기 붐, 고실업, 가계경제 파산 등의 현실을 모르쇠하지 않는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장하준 교수가 목 놓아 역설하고 있는 "문제는 산업정책"이라는 목소리에 전적으로 공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장하준 교수의 노고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굳이 몇 가지 비판적 문제제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자 한다. 첫째, 산업정책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국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빠져 있어 국가가 여전히 어떤 집권세력이든 자신들의 뜻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로 놓여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이는 프랑스의 정치학자 풀란차스가 지적한 바 있듯이 '제도주의' 정치경제학 일반에 나타나는 편향으로서, 국가를 다양한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과 이익대립과는 무관한,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는 중립적인 제도로 본다는 문제점이다. 1960년대 일본의 국가든 1970년대 한국의 국가든, 그러한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이라는 복잡한 정치역학과 무관하게 '중립적이고, 순수하게 경제적 효율성만을 모토로 하여' 산업정책을 추진한 국가는 없었다. 따라서 21세기의 환경에 걸맞은 산업정책을 추진할 국가는 어떠한 내용과 성격을 가진 국가여야 하는가라는 논의가 빠져 있다면, '국가의 산업정책이 효율성을 담보할 것이다'라는 명제는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이 최고의 효율성을 담보할 것이다'라는 명제나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차원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둘째, 장하준 교수가 제시하는 산업정책의 정의와 그 사례들은 사실상 1980년대 이전의 상황과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산업정책의 정의는 "국가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한 결과를 특정 산업-그리고 그 요소로서의 기업-으로 하여금 달성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 즉 '선별적 산업정책'과 유사한 것이다(265쪽). 하지만 이러한 산업정책은 199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을 필두로 하여 세계 곳곳에서 포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이 책에서 장 교수가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득세로 인한 이념공세가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포기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을 천착하여 그 실정을 좀 더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21세기형 산업정책의 정의와 원칙을 제시하는 작업이 추가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문제는 별개로 볼 수 없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사실상 국가와 기업 양자 모두에게 있어서 '새로운 축적전략'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처럼 효과적인 산업정책을 통한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이라는 축적전략이 포기된 대신에 금융적 기법을 통한 다양한 방법의 재자본화(recaptialization)가 주된 축적방식으로 떠오른 것이 1990년대 이후 지구정치경제의 현실임은 누누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곧 국가의 성격, 기업의 행태, 정책의 선호체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공세에 맞서는 대안은 곧 이러한 변화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성격의 국가, 대안적 성격의 경제주체를 형성하는 전략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책에 제시된 수많은 혜안과 지혜를 좀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벼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이 아닌가 한다. 지금 간절히 필요한 21세기형 산업정책을 수행하는 국가라면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의 공세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광범위한 경제주체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더 공격적인 경제정책을 펼 수 있는 성격의 국가일 수밖에 없다. 즉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국가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해서 시행될 산업정책의 내용도 단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예전의 산업정책과 같은 기술관료적 합리성의 좁은 틀을 벗어나야 한다. 작업장 민주주의의 실현, 노동과정의 인간화, 생태환경의 보전, 나라의 정신적·문화적 고양 등 한 나라의 살림살이인 경제를 운영하는 데서 국가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끌어안으면서 좀 더 포괄적인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하는 틀로 산업정책이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의 세계화를 앞세운 21세기 지구정치경제의 현실에 국가가 역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위한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관점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도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중요한 출발점의 역할을 해줄 것 같다. 이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갖은 '교조'들을 영구불변의 자연법이나 되는 것처럼 외쳐대는 '사이비과학'은 딛고 설 땅을 크게 잃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저서의 위력을 십분 증가시켜 준 두 번역자의 훌륭한 번역문장이다. 시중의 번역서에 나오는 알쏭달쏭한 문장들과 씨름하다 지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이번에는 걱정을 붙들어 매시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이 책을 만들어준 저자, 번역자, 출판사 모두의 노고가 값진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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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울바람의 생각
    from rifflewind's me2DAY 2008-08-30 11:32 
    재벌 제도의 장점이라는 게 기획조정실을 중심으로 ‘계열사간 상호 연계’를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인데, 그 구조를 포기하는 대신 ‘가문의 승계 구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고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선 오히려 거꾸로 됐어야 한다는 게 장 교수의 견해다.
 
 
마노아 2008-08-26 20:12   좋아요 0 | URL
책에서 받은 느낌과 장교수님 얼굴은 많이 다르네요. 좀 더 샤프해 보일 거라고 상상했어요^^;;
로쟈님 페이퍼의 책들은 큰책 링크라서 땡스투가 안 생기더라구요. 책 정보에서 페이퍼에도 안 뜨구요...

로쟈 2008-08-26 20:45   좋아요 0 | URL
옮겨온 글들은 상품 페이지에 노출하지 않습니다. 알라딘의 권고이기도 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6 22:28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 계열인 자유기업원에서 하이에크,미제스의 저서나 그 해설서를 많이 냅니다.아담 스미스의 경제사상도 그들은 신자유주의 식으로 해석하는 것 같더라구요.저는 신자유주의는 포장을 걷어내면 적자생존의 소샬 다위니즘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이기면 충신,지면 역적.

로쟈 2008-08-26 22:32   좋아요 0 | URL
장교수도 미국식 자유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게 순전히 '편의적 자유주의'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만 정당화하는. 그러니 적자생존도 아닙니다. 자기들이 불리한 쪽은 또 철저히 보호하잖아요...

드팀전 2008-08-27 11:45   좋아요 0 | URL
흑색이 아나키스트들의 색이고,녹색이 환경/생태주의의 색, 붉은 색이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의 색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을 '붉은 사마리아인'으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협소한가를 보여주는듯 합니다. 저 정도의 케인즈주의적 접근이나 조합주의적 성향마저 불온으로 파악하는 저열성을 보면 말입니다.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은 지난 번부터 보관함에 넣어놓고 있었습니다. 이념적 지향이 아니라 현실정치 내에서 가능성있는 움직임으로 사민주의를 고려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모든 이념이 정당이 될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예전에 사놓은 박호성의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이 먼저 기다리고 있어서...(사민주의의 역사와 논쟁..그리고 현 시점의 사민주의가 다른 지평을 갖고 있음에도 먼저 사놓은 책이니까 ^^)

언젠가 사민주의 관련 페이퍼도 한번 꾸려주시지요...진보 패셔니스트들 중에는 사민주의로 전향이 쉬울 사람들도 많으니까. 글로만 접하는 알라딘의 진보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사민주의적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우파가 갈 수 있는 최대치의 끝인지...자유주의로의 개량인지...케케묵은 논쟁은 뒤로 하고 현실적으로 만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면 해볼말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국보법이 살아있는 나라에서 그것도 요원해 보이긴 합니다만...

로쟈 2008-08-27 09:41   좋아요 0 | URL
'붉은 사마리아인' 얘기는 그냥 기자의 말실수입니다. 서평을 청탁하면서, "<붉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서평을 부탁한다고 했데요. '불온'하고 '붉은'이 연상작용을 한 것이죠. 장교수는 <붉은 사마리아인들>이라는 제목이 훨씬 좋다며 웃었다네요.^^;

따우리~* 2008-09-23 11:08   좋아요 0 | URL
이런 양질의 도서가 '불온 서적'이라니..
정말 이해가 가지않고요.
역시 군대에 있으면 숭미주의 정신교육에 돌아 버릴것 같았는데.
노무현 대통령 임기말부턴 어찌나 욕하던지..
당연히 군대에 가야만하는 이 사회 제도가 '이념'이라는 단어에 아직도 힘을 실어주는
결정적인 원인인 것 같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강압적인 정신교육을 받으니까요.
그런 교육을 받았던 자들이 결국 이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이 되니까..
이런 악순환이 당분간 계속되겠죠?
저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로쟈 2008-09-23 14:05   좋아요 0 | URL
아직 '생환'하신 지 얼마 안된 모양이네요.^^;
 

학교에 나오는 길에 읽은 경향신문이 기획기사를 옮겨놓는다. '정부수립 60주년' 기획기사로 이번주에는 '미국'을 주제로 하고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11903085&code=210000). 안 그래도 어제 하워드 진의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을 읽느라 내내 '미국' 속에 빠져 있었는데(벤야민의 구분을 따르면, 하워드 진은 패자의 역사를 장엄하게 기록하고 있는 뛰어난 '역사적 유물론자'이다), 아침부터 또 '미국'이어서 좀 신물이 나려고 했다. "미국(아메리카)에 간다"는 말이 '자살'을 암시하던 19세기 러시아소설들이 문득 그립다...  

경향신문(08. 08. 22) 전쟁·가난 구원 ‘藥주고’ 학살·독재 후원 ‘病주고’

한국을 일제에서 해방시킨 미국
한국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그래서 특수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두 나라가 있다. 하나는 북한이요, 다른 하나는 미국이다. 남북한이 따로 유엔에 가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외교관계로 설정하기 어렵다는 논란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대외관계에서 가장 특수한 국가는 미국이다.

1882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한국의 근·현대사는 미국을 빼놓고는 서술하기 어렵다.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기 위해 고종이 선택한 것은 ‘우호적 중재(good office)’ 조항을 협약에 넣었던 미국이었지만, 일본과의 밀약을 통해 한국과 필리핀에 대한 상호 지배를 인정한 것도 미국이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3·1 독립운동에 전 민족이 일어나도록 했던 것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였지만,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는 해당되지 않는 선언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결정적으로 이끈 것은 미국이었지만, 해방된 한반도의 남쪽에 미군정이 들어섰고, 미군정은 1948년 38선 이남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미군정이 해체되고 주한미군이 철수했지만,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군은 다시 한반도에 들어왔다.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에 의해 자행된 노근리 사건은 지금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표상이자 독재 후원자로서의 이중성
주한미군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한반도에 군사기지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주한미군이 대한민국의 안보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미국은 5·16 쿠데타와 12·12 쿠데타, 그리고 광주민주항쟁 등 역사의 고비에서 민주주의를 말살한 군부를 묵인 또는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전쟁의 피해로부터 복구하는 데 있어서 미국의 역할 역시 결정적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원조는 국내 자본 축적과 기업의 성장, 그리고 식량 공급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6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 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장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한국 경제에 가장 취약한 구조적 문제가 되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한국인들의 ‘신화’를 깨고 외국에 전투부대를 파견한 것도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전쟁 특수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명분 없는 파병으로 인해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민주주의 실현과정에서도 미국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4·19 혁명이나 6·10 민주항쟁에서 미국의 개입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과 함께 미국식 민주주의를 모토로 한 교육은 시민들의 민주적인 의식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4·3 항쟁과 광주민주항쟁에서의 미국의 역할은 반미의식의 확산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미국은 단순 외세 아닌 현대사의 주체
이렇게 한국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미국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약도 주고 병도 주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은 단순한 ‘외세’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서 주체의 하나로서 작동했다. 정치세력들의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잣대도 미국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구분되고,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집회에 성조기가 태극기와 함께 휘날리는 것도 한국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미국은 수많은 국가들 중에서 한국을 선택했을까? 역사·사회·지리 교과서에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듯이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지만, 한국만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터키나 파키스탄, 이란, 쿠바, 그리고 베트남 같은 경우 한국에서의 경우와 같이 미국이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특수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독재→민주화 불구 한·미관계 유지
또한 지정학적 위치만을 따진다면 냉전이 해체됨과 동시에 한반도의 가치는 바닥에 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냉전 해체 이후에도 한국은 미국과의 특수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주한미군이 감축될 것이라고 하지만, 미군 기지는 계속 유지될 것이며, 한·미 FTA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하나의 쟁점이 되고 있다. 독재시대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당선자는 가장 먼저 미국을 방문한다. 그러나 평범한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한국과 미국의 특수한 관계에 대한 비밀은 이제 다른 곳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바로 한국인들 스스로가 미국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의 문제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대부분의 독재정권들이 시민혁명이나 반대세력들의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미국의 깊숙한 개입은 내부의 반대를 불러왔고, 결국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정부가 수립됐다. 이란과 쿠바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독재정부가 무너져도, 민주주의 체제가 도입돼도 미국은 계속해서 특수한 존재였다. 결국 한국 스스로가 미국과의 특수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대한 뿌리깊은 우호적 인식
바로 여기에 한·미관계의 특수성이 존재하고 있다. 미국의 정책이 독재정부를 지원하고 때로 한국보다는 미국 자체의 국가이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지만,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한국 사회 내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경향신문의 광복절 특집 설문조사는 미국이 한국에 너무나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전체 설문대상자 중 두번째로 많은 23.8%가 한국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미국을 뽑았지만, 동시에 45.4%라는 압도적인 다수가 가장 호감이 가는 국가로 미국을 선택했다.

이 결과는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순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을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에 반감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들 스스로가 갖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이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즉, 한국 사회 내부에는 미국적인 것이 좋은 것, 또는 근대적인 것이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물론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호감이 한국전쟁과 전쟁구호, 그리고 남북대결이라는 냉전적 구조 등 역사적 경험에 기인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왜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됐을까? 여기에는 미국의 대외정책의 특수성이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 미국은 다른 열강 제국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근대화’에 기반을 둔 ‘연성권력(soft power)’을 대외정책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일본의 동화주의나 내선일체 정책이 또 다른 연성권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본 중심적인 사고였기 때문에 식민지에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와 ‘근대화’ 이념은 다원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개념이었다.

구한말 외교관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에서 ‘근대’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 한국의 주요한 인물들은 대체로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45년 이후 미국 원조의 중요한 부분은 교육원조였다. 1950년대 경영대학과 행정대학원 설립,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대한 미네소타대학의 원조나 한국 교육자들을 미국에서 교육받도록 했던 피바디 계획 등은 모두 교육 원조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서도 로스토의 근대화론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65년 한국을 방문한 로스토가 했던 ‘근대화’의 한 마디를 통해 한국 정부는 한국 사회 전체를 경제성장의 길로 동원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연성권력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인디펜던스 데이’, 드라마 ‘뿌리’나 ‘남과 북’을 통해 제3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의 역사와 사회를 다른 나라의 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미국에 대한 객관적 인식 증대
결국 이러한 과정은 현재까지도 미국이 한국에서 특수한 국가로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한·미관계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하는가? 겉으로 볼 때 한·미관계는 큰 변화 없이 계속돼 온 것 같지만, 모든 사물이 진화하고 발전하듯이, 한·미관계 역시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 한국 사회는 미국을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 한·미관계는 한 단계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세계의 변화는 한·미관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 기지의 재편도 그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세계의 변화에 걸맞은 변화가 오지 않는다면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과거와 같은 약소국이 아닌 한국이 오로지 미국만 바라보는 외교를 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며, 한·미관계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박태균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하나의 외국일뿐” 주체적 인식 확산 불구 이상국가 열망도 공존
지난 60년동안 우리의 대미인식은 가난과 전쟁에서 벗어나게 해준 ‘구세주’에서 우리와 대등한 하나의 외국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엔 미군정이 들어서 친미·반공체제가 구축됐다. 이후 한국전쟁 시기 ‘인천상륙작전’으로 상징되는 미국·유엔의 지원과 구호품, 필수품 원조는 ‘미국=세계평화의 수호자,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이렇게 형성된 미국에 대한 호감은 4·19 혁명 이후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전 파병 등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베트남 파병에 대해선 한·일 협정과 대조적으로 학생운동권 일부를 제외하고는 별 반대가 없었다.

대미인식의 변화가 감지되는 것은 80년대부터다. 80년 5월 광주항쟁에 대한 전두환 군부의 무력진압을 미국이 방조하면서 ‘반미’ 감정이 폭발했다. 특히 82년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요구하며 일어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최초의 공개적 반미 투쟁이었다. 90년대에는 ‘윤금이씨 살해사건’ 등 미군 범죄를 계기로 반미 운동이 일어났다. ‘노근리 사건’은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구원자일 뿐 아니라 학살자이기도 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2002년 ‘미선이·효순이 장갑차 사망 사건’과 ‘SOFA 개정운동’은 균형 있는 관계에 대한 욕구에 불을 붙였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로 인해 촉발된 ‘촛불 집회’ 역시 과거와 달라진 주체적 대미 인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메리칸 스탠더드’로 대변되는 이상적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열망 역시 크게 공존한다. 한국은 미국에 최대 규모의 유학생을 내보내고 있으며 미국시민권을 얻기 위한 원정출산, 조기유학·영어몰입교육 열풍 등도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이로사기자)

08. 08. 22.

P.S. 기획기사의 다른 꼭지로 '자유주의와 미국'을 다룬 기사도 참고해볼 만하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11908045&code=210000). 자유주의의 한국적 '굴절'에 대해서 잘 짚어주고 있다(한국에서는 사회주의자인 박노자에서 자유지상주의자인 복거일까지가 모두 자유주의의 스펙트럼에 포함된다. 대단한 오지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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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 2008-08-22 15:10   좋아요 0 | URL
최근 출간된 책 중에 다음 두권이 관련되는 주제에 관한 것이네요. 둘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들입니다.

왜 다시 친미냐 반미냐 - 전후 일본의 정치적 무의식
요시미 순야 지음, 산처럼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062241

아메리카나이제이션
김덕호, 원용진 엮음, 푸른역사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510671

로쟈 2008-08-22 19:48   좋아요 0 | URL
네,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이 있었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3 16:44   좋아요 0 | URL
해방이후 한미 관계사에선 미군정 통치기간과 역대 주한 미국대사들을 반드시 연구해야 합니다.특히 막후괴물 제임스 하우스만! 그의 증언록의 제목이 의미심장합니다.<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국대위>.미군정기 부터 박정희 시대까지 한미관계의 막후에서 미묘한 흥정을 하던 그의 증언에서 우리는 공식적 역사 뒤편의 역사의 진짜 속살을 볼 수 있습니다.

로쟈 2008-08-23 20:55   좋아요 0 | URL
그런 증언록도 다 소개가 된 모양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3 21:55   좋아요 0 | URL
네...사망 몇년 전에 나왔어요.박노자가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강추한 책이죠.(저는 하우스먼 증언록을 읽은 한참 뒤인 올해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었는데 하우스먼을 상당히 길게 언급한 것을 보고 역시 박노자의 독서범위가 대단하구나...하고 느꼈죠).절판되었는데 저는 당연히 헌 책방에서 샀어요.

로쟈 2008-08-23 23:21   좋아요 0 | URL
저는 주목하지 않고 읽었나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4 00:00   좋아요 0 | URL
저는 아무래도 한국 현대사 쪽 독서가 많다 보니 시야에 잡히네요.

로쟈 2008-08-25 00:10   좋아요 0 | URL
사실 최근 정세만 아니면 현대사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을 텐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6 17:19   좋아요 0 | URL
경향신문엔 사진 설명에 이상훈과 강영훈만 명기했는데 기자가 다른 사람은 몰라서 그랬을까요? 제일 오른쪽은 채명신(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제일 왼쪽 이철승(호남 강경우익의 원로).80이 넘었는데 엄청나게 건강하신 분들이죠.좌익들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앞장서시느라 지금도 바쁘고요.
 

아침에 경향신문에서 '정부수립 60주년' 기획기사 꼭지들을 읽었다. 최근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가 내세우는 '건국신화 만들기'에 '지배 엘리트의 승리만 있고 민중의 피나는 투쟁은 없다'란 지적에서 바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벤야민의 역사주의 비판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주의는 승자들의 역사만을 기록한다. 반면에 역사적 유물론은 패자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며 그들을 상기하는 것이다(벤야민의 경고는 따라서 진보주의적 역사관으로는 파시즘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벤야민의 유명한 경구이지만, 승자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다(그러니까 일면 부듯하더라도 양식이 있다면 큰소리로 떠들 것까지는 없는 역사다). 저들의 이승만 건국신화나 북한의 김일성 건국신화나 그러고 보면 한 통속이다. '기적의 역사' '승리의 역사'를 내세우지만 역사관에서만큼은 서로 식별되지 않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경향신문(08. 08. 19) 이승만 건국에서 성공 씨앗 찾는 뉴라이트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가 추진 중인 ‘건국신화 만들기’가 위험한 것은 현대사를 바라보는 몇 가지 인식틀 때문이다. 우선 이들은 한국 현대사가 예정된 성공을 위해 걸어온 과정으로 본다. ‘기적의 역사’ ‘승리의 역사’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이러한 ‘역사 결정론’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이승만의 건국에서 이미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성공의 씨앗이 배태돼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이승만의 건국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적화된 공산국가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라는 우익의 인식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최근 극우 논객 조갑제씨가 했던 “박태환의 올림픽 우승은 이승만, 박정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이 잘 보여준다.

역사 결정론은 한국 현대사가 건국,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이제 선진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단계론’으로 이어진다. 해방 직후 공산화와 북한의 침략을 이겨내고 건국을 달성했고, 이를 토대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며, 그렇게 해서 성장한 중산층이 물적 토대가 돼 민주화까지 성취했으니, 이제는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 다시 제2의 산업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러한 관점의 문제는 이 도식의 레이더 망에 잡히지 않는 모든 것은 역사에서 배제된다는 데 있다. 가령 1948년 제헌헌법의 균등 교육, 토지 균분 등 사회주의적 요소들과 친일파 처벌이라는 민족주의적 의제는 좌우 갈등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정부 차원에서 사라져버렸다. 진짜 건국 정신은 여기에 있는데도 이 정부와 뉴라이트는 그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주류 무대에서는 사라진 듯 했지만 끊임없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의 의제로 남아 이후 87년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는 토대가 됐고, 한국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하는 데 기여해오고 있다.

산업화가 먼저 있었기에 민주화가 가능했다거나 둘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었다는 주장도 그런 점에서 사후 합리화의 성격이 짙다. 민주화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누군가가 ‘빨갱이’로 지목돼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배제될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문제 제기하며 실천하려 노력했던 가치이며 그 결과로 민주화도 가능했다. 산업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민주화를 한 것이 아니다. 산업화가 일어나기 전의 4·19가 그렇고, 이명박 대통령도 참여했다는 6·3 항쟁이 그렇다.

신주백 국민대 연구교수(한국현대사)는 “뉴라이트 역사관으로는 이승만이 4·19 혁명에 의해 쫓겨난 일을 정면에서 주목할 수 없으며, 만주국군의 중위였던 박정희 같은 엘리트 장교 가운데 민족의 운명보다 일본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를 동일시했던 반민족적인 성실한 기회주의자가 여럿 있었다는 점도 문제 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들 역사관의 가장 큰 문제는 지배 엘리트 중심의 역사관, 승리의 사관이라는 점이다. 이는 현대사 논쟁이라고 하면 늘 이승만, 박정희 등의 정치 지도자 얘기로만 이뤄지는 것과도 관계있다. 여공과 식모, 건설노동자, 농민 등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또 짓밟힌 민초들의 삶은 간단히 무시해버리거나 그저 구색 맞추기 식으로 끼워넣는 정도의 인식이다.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한국현대사)는 “역사란 다양한 가능성의 갈등과 그 역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라며 “여러 가능성들 중 현실화된 한 가지 가능성만 보고 희생된 다른 가능성들과 그로 인한 갈등을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이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식의 역사 인식은 과거를 현재에 종속시키려는 태도”라고 말했다.(손제민기자)

08. 08. 19.

 

 


 

P.S. 오늘 읽은 기사의 나머지 두 꼭지는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체성과 건국신화 만들기'(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code=210000&artid=200808181834035)와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의 위험한 현대사 인식'(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code=210000&artid=200808181839225) 이다. 기사에서도 참고자료가 밝혀져 있지만, 이 주제와 관련하여 네 권만 꼽자면, 박찬표의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7), 참여사회연구소가 기획한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한울, 2007), 그리고 서중석 교수의 <한국 현대사 60년>(역사비평사, 2007)과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펴낸 <건국 60년의 재인식>(기파랑, 2008)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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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8-19 20:54   좋아요 0 | URL
이명박 정권은 수순을 원칙적으로 잘 밟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제가 부디 오해하거나 잘못 본 것으로 확인되길 바라지만
이 생생한 현실이 너무너무 무섭습니다.

로쟈 2008-08-19 22:56   좋아요 0 | URL
이번주 시사잡지들은 모두 인천공항 민영화 플랜을 다루고 있더군요. 그걸 읽으며 '무서운 놈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0 23:19   좋아요 0 | URL
이번 주에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의 최근 글을 읽으며 그들의 건국론을 파악해 보고 있습니다.특히 이승만 살리기와 관련해서 보고 있습니다.제 서재에 그 감상을 올릴까 생각중인데 상상 외로 읽을 분량이 많군요.

로쟈 2008-08-20 23:22   좋아요 0 | URL
돈 주고 사서 읽을 생각은 없는지라 노이에자이트님의 감상이나 고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