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에 읽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2008년판 '전태일 평전'이라고 가름되는 두 노동자에 대한 평전의 서평이고, <당신은 나의 영혼>(삶이보이는창, 2008)이 그 평전의 이름이다(검색해보니 <전태일 평전>도 절판됐다!). 말미에 "2008년 한국 사회의 쓰디쓴 자화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 눈에 밟힌다...

시사IN(08. 12. 15) 대한민국에는 지금도 ‘전태일’이 존재한다

1983년. <전태일 평전>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지금과는 다른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전태일’과 저자 이름(조영래)은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고, <전태일 평전>은 고전이 되었다.



2008년, 여기 책 한 권이 있다. <당신은 나의 영혼>. 2003년 세상을 등진 두 노동자 이해남·이현중에 대한 평전이다. 충남에서 노조 활동에 열심이었던 세원테크 노조원 이현중은 암으로, 노조위원장이었던 이해남은 분신해 사망했다. 노조가 결성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있었던 일을 담았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불편하다. <전태일 평전> 때처럼 48년 전 일도 아니고 고작 7∼8년 전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첫 대목을 보자. 2001년 이해남이 노조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은 이현중이 작업반장에게 맞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작업반장은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난 후 회사에 와서 한 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는데도, 농땡이를 쳤다’면서 욕을 하고, 두들겨 팼다. 이해남이 이를 말리자 관리자들의 반응은 이랬다. “아니꼬우면 그만두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차이조차 알지 못하던 노동자 이해남이 노조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계기였다.

잔업을 강제로 해야 하고, 시급이 고작 2160원인 회사. 조합원이라고 해봐야 겨우 60명인 이 작은 노조는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전쟁 같은 일을 겪었다. 용역깡패, 손해배상, 가압류…. 소설가 윤동수씨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관련자 70∼80명을 취재했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그들의 증언을 그대로 수록했다. 오랜 수배 생활을 겪던 이해남은 계열사 공장에서 분신한다. 그리고 2004년, 회사 측과 가까운 이들이 노조를 ‘접수’했다. 이 아픈 패배의 기록에 마음이 시리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저자가 맨 앞 장에 왜 이 한 줄을 적어놓았는지 알 수 있다. ‘오, 놀라워라! 우리가 인간이라니!’

책을 다 읽고서 ‘세원테크’에 대한 보도를 찾아보니 이 투쟁을 다룬 기사가 거의 없다. 무관심이 철저했다. 그리고 올해 12월, 수출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이 회사 대표의 인터뷰가 여럿 눈에 띈다. 이 책에서 ‘노조를 없애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사람’으로 기술된 이 경영자는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회사 경영은 경영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이 하는 것이다. 종업원이 자고 일어나면 좋은 회사에 출근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두 극단의 기록은 2008년 한국 사회의 쓰디쓴 자화상이다.(차형석기자)

08. 12. 18.

P.S. 서평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터뷰기사를 찾아봤다. 눈에 띄는 건 아래 기사다. '두 극단의 기록'이 어떤 것인가를 대비해보기 위해 옮겨놓는다.

주간무역(08. 12. 04) '사람이 재산' 인재경영 불황 모른다

“Best for you.” 시대에 한발 앞선 경영감각과 사람중심의 경영철학으로 글로벌경제위기 속에서도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세원물산 김문기 회장.



그는 다양한 생산성 향상 프로그램을 도입해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베스트 & 워스트’ 제도를 통해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 운동을 뿌리내리게 했다. 사원의 역량 개발을 위한 ‘멘토링제도’를 운영해 정착시키고 ‘이모셔널 비지트’, ‘아빠가 쏜다’ 등 직원 가족의 회사 방문 프로그램을 통해 애사심을 향상시키고 창립 이래 무 분규 사업장을 일궈왔다.

김 회장은 현재 자동차 부품 전문 업체인 세원물산을 비롯해 계열사 세원정공, 세원테크, 세원E&I, 삼하세원(중국법인), 그리고 착공 중에 있는 세원아메리카(미국법인)를 경영하고 있다. 스폿로보트, 대형프레스 등의 시설을 갖추고 현대차로부터 원재료인 철판 등을 구입해 FRONT SIDE MEMBER, COWL CROSS MEMBER, DASH PANEL, RADIATOR 등의 자동차 차체부품을 주로 생산하여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등에 납품하고 있다.

지난 해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 후, 올해 글로벌경제위기 속에서도 꾸준한 수출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들어 10월까지 우크라이나 등지에 3600만 달러, 미국에 2000만 달러, 사우디아라이바,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에 1600만 달러를 수출하는 등 향후 매년 20% 이상의 수출 증가세가 이어질 것으로도 전망된다. 김 회장에게서 45회 무역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은 소감과 앞으로의 기대에 대해 들었다.
 
-먼저 금탑산업훈장을 받으시게 된 것을 축하한다. 글로벌시장 악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장한 비법이 있다고 들었다.

적극적인 신규시장 개척 노력이 주효했던 것 같다. 회사 자체 기술연구소를 통한 독창적인 신기술 개발 노력, 품질향상을 위한 투자도 한몫했다. 생산 공정을 자동화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우선 신시장개척을 위해서는 영어와 중국어로 된 카탈로그와 홍보영화를 제작해 해외바이어에게 발송했다. 시장개척을 위해서는 먼저 해외시장을 알아야한다고 판단하고 각종 해외 산업박람회에 참여했다. BMW구매본부장을 비롯, 인도 마루티, 포드 등의 해외 주요바이어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우리 제품과 생산과정을 직접 보여줬다.
 
-세원물산만의 비법이 있다면?

제품개발에서부터 생산기술까지 차별화된 능력 확보뿐 아니라 Best&Worst 제도 도입, 불량률 제로에 도전하는 single PPM 및 6시그마를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또 생산 공정의 95%를 자동화하여 생산성향상을 이뤘다.
 
-회사를 운영하다보면 어려움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람이 재산이다. ‘인재 경영’ 이라는 기업 이념을 실천코자 경비원, 환경미화담당자에서부터 경영진에 이르기까지 전 임직원에게 TPS(TOYOTA Productivity System)연수 기회를 부여 하는 등 인재 역량 강화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오고 있다. 지난 98년 IMF의 한파로 동종의 기업들이 쓰러져 갈 때에도 ‘사람이 재산’ 이라는 원칙으로 모든 임직원이 단결해 단 한 명의 해고도 없이 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올 들어 글로벌시장 환경악화로 어려움이 크지만 저만의 경영소신을 믿고 갈 생각이다.
 
-최근 글로벌경제위기에 대한 견해, 향후 대책은?

현재의 위기가 1년, 아니면 그 이상도 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최근 급격하게 나빠진 글로벌 무역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척노력이 필요하다. 1월도 아끼는 절약경영을 실천해야겠지만 투자는 과감히 해 새로운 기회에 미리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처럼 어려울 때일수록 ‘정도경영’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투명한 경영으로 직원들이 상생의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수상소감 한마디.

대내외 악재 속에서 ‘세원’의 이름을 지켜주고 있는 세원그룹 임직원들과 이 영광을 함께 한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자동차 업계가 처한 어려운 경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책임과 노력을 다 할 것이다. 더 큰 변화와 혁신으로 21세기 자동차 산업을 이끌어 가는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8-12-19 15:19   좋아요 0 | URL
세원그룹 사장 같은 이들이 걸핏하면 가족경영 운운하지요.시실은 가축보다 못하게 대접하면서...가죽을 벗겨먹고.

로쟈 2008-12-19 23:29   좋아요 0 | URL
아침에 읽은 88만원 세대의 칼럼도 '가족주의'의 허울을 잘 벗겨내더군요. '가족'이면 경영권도 넘겨줘야죠...
 

낮에 교수신문에서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 지성의 죽음, 어떻게 볼 것인가 3'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정현백 교수의 칼럼이다. '경방고수'들에 대한 언급이 눈길을 끌었는데, 짐작엔 두 주 전 한겨레21 표지기사를 참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3895.html). 그래서 일부를 같이 옮겨놓는다. 대학사회의 반성을 촉구하는 칼럼과 함께 일독해볼 만하다. 더불어, 돌이켜보면 '자료'가 될 날도 오겠지...

교수신문(08. 12. 15) 정신적 긴장과 비판정신이 사라진 시대, 당신들은 왜 침묵하는가

한국 지성을 논할 때에, 이를 대학으로만 한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교수신문>이라는 지면의 특성을 ‘고려해, 이 글에서는 논의를 대학과 대학인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지난 10년 사이에 정보통신의 발달과 세계화의 압력 속에서 한국 사회 곳곳이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는데, 그중에서도 대학은 가장 큰 변화를 강요당한 곳의 하나일 것이다. 치열한 대학 간의 경쟁, 위로부터의 개혁 압박, 대학의 양극화, 교수평가, 대학 및 학술행정의 전산화, 국제화의 압박 등이 그것이다. 대학은 이제 분주함이 그 일상이 됐고, 교수들은 게으를 권리를 잃어버렸다. 나는 이런 대학의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지는 않는다.

과거의 대학이 ‘지적 자유’라는 명분아래 안일함을 추구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대학에서 학문연구의 열기가 넘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기계획에 근거한 대학개혁 몰아붙이기, 연구업적이나 평가의 계량화 등은 학문의 생산성은 높이되 ‘지성의 천박화’도 증가시키는 기이한 양상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60년을 돌아보자면, 한국의 지성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이중기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사례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 더불어 지식인들의 치열한 자기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대화 따라잡기’를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유학을 통해 서구의 지적 수준을 따라잡고자 했고, 국내에서는 국내대로 ‘한국적 아카데미즘’을 부르짖으며 비판적 학술운동이 전개됐다.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과정에서 이런 지성계의 활동은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비판적인 지성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현실화하면서, 한국 사회에 지적 역동성을 부여했다.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자기희생은 한국에 관심을 가진 국제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은 한국의 지성이 그 지적 긴장감과 역동성을 잃어가는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한 단계 비약해야 할 시점에서 한국의 지성은 주저앉아 버린 것이 아닐까. 대학평가, 학술지 평가, 연구논문에 대한 엄격한 심사시스템 등을 통해서 과거처럼 치밀한 연구 없이 그저 글을 써대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연구윤리도 강화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연구도 정밀해졌다. 그러나 쏟아져 나오는 지적 연구물들은 양적, 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구 중심부 학계의 모드에 끌려 다니고 있다. ‘왜 이 땅에서 이런 연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그다지 있는 것 같지 않다.

출판 분야에서도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 옥석을 가릴 수 없는 춘추전국의 시대, 백가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상업주의와 선정성이 판을 치고, 국내 학계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다. 그래서 저명한 외국서적의 번역서가 여전히 날개 돌린 듯 팔리고 있다. 나 스스로도 독서대중에게, 아니 보다 정확히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어떤 서적을 권장해야 할지가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거기에다가 서적들은 내용보다는 디자인과 크기로 한 몫을 보니, 저렴한 작은 문고판을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쉬엄쉬엄 읽은 것도 목가적인 시대의 이야기가 돼 버렸다. 

바로 이런 현실 앞에서 한국의 지성계는 피로감에 젖어 있다. 양적 연구업적을 강요하는 대학의 현실에 쫓길 뿐 아니라 몰아치는 전지구화(globalization)의 급류 속에서, 지고의 도덕성을 부르짖으며 함께 해온 동료들이나 나 자신이 어느덧 ‘욕망의 주체’로 변신해버린 것을 발견하며 선뜻 놀라는 모습이 오늘 날의 한국 지성인일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에 뒤이은 자기성찰의 과정은 거의 부재하다. 소비자본주의의 끝없는 추구가 우리를 구원해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에 대해 회의하는 의식혁명이나 문화혁명은 왜 우리에게 떠오르지 않는가. 생활세계의 식민지화에 대한 하버마스의 글은 곳곳에서 출판되고 인구에 회자되지만, 왜 폭력적인 일상생활에 대한 변화는 시도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성장 중심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한국 지성의 인습성은 매일매일 대중매체를 메우는 진보-보수논쟁에서도 확인된다. 여전히  정치적, 문화적 갈등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해석된다.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핵심은 교과서 필자의 저작권, 공권력이 교과서 내용에 개입하는 절차민주주의의 문제지만, 이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문제의 본질을 다시 보수-진보의 이분법으로 호도한다. 올해 들어와 급격히 후진하는 민주주의 문제에 지식인들은 침묵한다. 거기에다가 보수/진보논쟁을 채우는 논리는 얼마나 천박한가.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이 지닌 합리성과 체통을 우리 지성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보수논객들의 주장은 20년 전에 비해서 달라진 것이 없는 ‘녹음테이프 돌리기’이다. 진보적 지식인들도 변화된 사회, 변화된 대중의 모습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촛불시위는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 새로운 세대의 요구와 욕구들, 그리고 새로운 운동의 방식에 대해 지식인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이는 한국 지성의 성찰성 결여에서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현에서 한 단계 나아가 경제민주화를 실현해야 할 8,90년대에 이르러 비판적인 지성의 목소리는 죽어버렸다. 그리고 경제민주화의 모든 부담은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에 주어지고, 이들은 좌익세력으로 폄하된 채 고립돼 있다. 이쯤 되면 경제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성계의 목소리가 도처에서 나와야 하지 않는가.

자본주의 자체가 구조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요즈음, 구조적 한계를 넘어 분배정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지성계의 목소리가 크게 나와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한국의 지성계는 침묵하고 있다. 그 대신에 언론을 메우는 것은 모든 문제를 정치적 이해관계로 계산하는 정치세력에 의한 보수-진보 편 가르기의 천박한 논리들이다.

나는 최근 세간에 화제가 된 미네르바와 관련한 경제논객들의 이야기를 읽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인터넷의 경제토론방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경(제토론)방고수들은 50~60명 정도라고 한다. 모두가 계급장을 뗀 인터넷에서 하루 10~30만 명이 들어와 읽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각고의 글쓰기 노력과 경제지식을 요한다. 이들은 경제학이나 경영학 전공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하고 글을 쓴다고 한다. 정체를 밝힌 한 보험회사 직원은 자신의 일과를 밝혔다. 아침 6시 30분에서 출근 두 시간 공부를 하고, 다음에는 직장생활, 그리고 다시 밤 10~12시에서 그는 인터넷을 찾거나 글을 쓴다.



그들은 왜 이런 피나는 노력을 하는가. 한 경방고수는 1997년 경제위기 때 줄 서서 아들이 돌잔치에 받은 금붙이까지 바친 이후 겪은 씁쓸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경제지식을 챙기고 또 가능하다면 無知로 피해를 보는 서민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는것이다. 이들 경방고수들이 염려하는 것은 ‘서민’과 ‘공동체의 미래’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민의 관점에 설 것을 선언한다. 나는 이들에게서 희망을 읽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학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정신적 긴장과 비판정신은 사라졌는가. 전문성과 대학의 경쟁력 제고를 표방하며, 지식인은 침묵해야 하는가. 역사교과서에 대한 공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저항하고 있는 역사교사들의 안간힘을 지켜보면서 당신들은 침묵해도 좋은가. 경제위기 속에서 존재를 위협당하는 작은 자들의 잔혹한 현실에 당신들은 침묵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 적어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학 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에 전임교수들이 계속 침묵해도 좋은가. 이제 이 위기의 시대는 다시 한국 지성인의 건강한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정현백 성균관대·사학)

한겨레21(08. 12. 05) 독하게 독학한 제2의 미네르바들

강호에 황톳바람이 인다. 검객의 칼날이 예사롭지 않다. 잠깐 허공을 갈랐을 뿐인데, 주변의 허수아비들은 하나둘씩 쓰러진다. 새로운 고수의 출현이다. 이름하여 ‘경방고수’(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의 고수). 백성들은 탄탄한 논리와 정보, 윤리적 자본주의관을 갖춘 그들의 신도가 되기를 마다 않는다. 광케이블을 타고 공간을 넘나드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모피어스’이기도 하다. 그들이 묻는다. “네가 있는 곳은 매트릭스다. 허상의 세계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것인가, 아니면 매트릭스를 넘어 현실의 세상인 시온으로 발을 내디딜 것인가.”

경방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미네르바’는 실제로 지난 11월13일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1차 타격은 역시, 소득 5분위 가운데 가장 밑바닥 계층부터 지금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있다. … 다만, 이런 구조적 매트릭스 쳬계에 대한 시각이 없이 매트릭스 안에서 사육만 당하고 있었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자신들을 둘러싼 구조를 인식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또 다음 아고라에서 ‘미네르바’와 함께 경방고수로 군림하고 있는 ‘SDE’가 최근 ‘서지우’라는 필명으로 낸 단행본 <공황전야>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공황의 원인은 대중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찰스 킨들버거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황혼녘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듯 경방고수들이 최근 비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매트릭스에 갇혀 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선지자’, 경방고수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네티즌 추천받아 ‘경방고수’ 인터뷰
<한겨레21>은 다음 아고라 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토론방 ‘한토마’에서 경방고수로 통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전자우편으로 인터뷰했다. 각 토론방에는 “이 사람이 경방고수”라고 추천하는 네티즌의 글이 많은데, 복수의 추천을 받은 논객들을 경방고수로 보고 접촉을 시도했다. 이들 가운데 ‘미네르바’는 끝내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필명을 떨치고 있는 ‘SDE’ ‘상승미소’ ‘헝그리울프’ ‘양원석’(이상 아고라 필명), ‘명사십리’ ‘마포강변’(이상 한토마 필명)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경방고수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직업적 기반이 없다는 점이었다. ‘SDE’는 금융 쪽은 물론 일반 기업의 근무 경력도 없다. 그는 학부에서 박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줄곧 공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대운하 1천조설’을 제기하며 한때 경찰의 수사선상에까지 오른 ‘명사십리’ 또한 마찬가지다.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한토마를 오가며 정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그는 서울에서 부동산 상담을 하면서 전자상거래 회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는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양원석’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회복지사고, ‘헝그리울프’는 동시통역사다. ‘상승미소’가 그나마 예외였는데, 경영학을 공부한 그는 현재 보험회사의 라이프플래너다. 경방고수 대부분이 자생적 비주류 비판경제론자들인 셈이다.

다양한 이력 가진 30·40대 많아
비전공자들의 경제 고수 등극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SDE’는 ‘비선형 확률제어’를 공부했다. 주로 로켓·미사일·우주항공 등에 적용되는 학문이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불특정한 변수의 입력값이 달라질 때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한다. 이런 모델 연구에는 수학이 중요한 도구로 쓰이는데, 결과적으로는 계량경제학이나 파생금융과 유사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는 외환위기 때 금융 분야에서 일했다. 동시통역을 하려면 관련 분야를 충분히 이해해야 했다. 외신을 중심으로 경제 공부를 꾸준히 했다.



» 경방고수 가운데 정부 발표를 쉽게 정리하기로 이름난 ‘상승미소’. 본명이 이명로인 그가 11월24일 다니는 회사에서 얼굴을 공개했다.

그러나 고수가 된 진정한 비밀은 성실성과 천재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승미소’는 경방고수 가운데 유일하게 구체적 신원을 기꺼이 공개했다. 푸르덴셜생명 라이프플래너인 이명로(39)씨다. 그는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6시30분에 사무실에 도착한다. 2시간여 동안 집중적으로 블로그와 토론방에 올릴 글을 쓴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회사 고객들을 시간 단위로 만난다. 지방 출장도 잦다. 상담이 끝나면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 저녁 9시까지 다음날의 업무를 준비한다. 밤 10시께 집에 들어와 2시간 정도 인터넷을 검색한다. 국내 언론은 물론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국 언론과 국내외의 경제 관련 ‘파워블로그’를 찾아다닌다. 잠은 5시간 정도 잔다. “하루 종일 나 자신과 싸운다”고 이씨는 말했다.

‘SDE’는 <한겨레21>과 인터뷰 때 1997년 이후 한국 경제의 주요 사건을 줄줄이 기억해냈다. 따로 메모를 보지 않고서도 거침없이 연도와 사건과 숫자를 이야기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98년 12월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안이 나왔는데, 나는 찬성했어요. 당시 대우차는 90조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거든요. 외환위기 때 한국의 부실채권이 120조원이었는데, 대우가 파산하면 그에 육박하는 부채가 발생할 수도 있었지요. 결국 99년 4월에 빅딜이 무산됐어요. 그해 7월에 대우는 4조원의 협조융자를 받았고 8월에는 결국 파산했지요….” 비선형 확률제어를 전공하는 그의 머리에는 지난 10년에 걸친 주요 경제 사건과 논쟁의 세밀한 결이 두루 입력돼 있었다.

제아무리 천재적이고 성실하다 해도 내공을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경방고수의 대부분은 30·40대였다. ‘SDE’는 정확한 나이를 밝히길 꺼렸지만, 여러 경력으로 볼 때 40대 초·중반으로 추정된다. ‘명사십리’와 ‘마포강변’은 40대 후반, ‘헝그리울프’는 40대 초반, ‘상승미소’는 30대 후반, ‘양원석’은 30대 초반이었다. 이들의 연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의 연습 과정이다. ‘명사십리’는 조세 관련 전문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경제 쪽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는데, 각종 예규와 판례 등을 쉬운 말로 바꿔 기사화하는 3년의 기자생활 동안 글쓰기의 바탕을 익혔다. ‘상승미소’도 2000년 무렵부터 <오마이뉴스> <서프라이즈> 등에 글을 써왔다.

‘SDE’는 가장 혹독하게 글쓰기를 연마한 경우다. 경제 분야 글쓰기 이력이 벌써 10년을 넘겼다. 1996년 말부터 PC통신 하이텔에서 활동했다. 이듬해 7월 ‘기아사태’가 났을 때,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기아자동차를 다른 대기업에 넘기는 데 반대했다. 결국 몇 달 못 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그는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꾸준히 온라인을 통한 글쓰기를 계속했다. “2005년 이후에는 한국 사회의 경제 성격을 놓고 좌파 논객들과 논쟁했다”고 한다. 부동산 투기 대책으로 나온 민주노동당의 세금정책을 비판하는 논쟁도 벌였다. 거시 이론을 앞세우는 좌파를 논파하기 위해 그 역시 치밀한 글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네티즌들의 검증 속에서 명망을 얻은 고수들이다 보니 나름의 ‘비기’(秘技)를 하나씩 갖고 있다. 환율 분석과 예측에 관한 한 ‘미네르바’는 지존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미 7월에 환율 폭등을 예견했고 나중에 그대로 들어맞았다. 전문가들조차도 ‘미네르바’가 인용하는 정보 수준을 최고 경지라고 평가한다.

“이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 공통점
‘헝그리울프’는 <블룸버그> <로이터>를 비롯해 국외 사이트에 뜬 한국 관련 뉴스들을 신속하게 토론방에 올리고 간단한 번역까지 해주며 명성을 얻고 있다. ‘양원석’은 일종의 지식중개인을 자처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용어와 개념이 자주 출몰하는 경방고수들의 글을 초보자용으로 쉽게 풀어준다. 이를 위해 각종 사이트들을 뒤져 자신이 이해할 때까지 공부하고 있다.

‘SDE’는 수학을 바탕으로 한 공학적 지식으로 거시경제 모델을 분석·예측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부동산 폭락론’을 제시했는데, 그 뒤 부동산 가치는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상승미소’는 정부 정책의 의미와 효과를 정리하는 데 달인으로 손꼽힌다. 실물경제의 흐름을 잘 이해하면서 펀드나 주식 등 일반인들의 관심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게 강점이다. “거시경제를 알리는 동시에 번 돈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런 모든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힘없는 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천민의 관점에 서야 한다”고 촉구한 대목을 연상시켰다. ‘SDE’는 인터넷에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무엇보다 ‘이건 아니다’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대로 가면 전 국민이 재앙을 입게 된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글을 쓴다”고 했다.

‘명사십리’는 지난해 9월부터 경제 논객으로 활동했는데, 그 무렵부터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회사 인근 재래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한국 경제의 위기 구조에 대한 ‘계몽작업’을 벌이고 있다. 당연히 자신에게 이문이 남는 일은 아니다. ‘상승미소’는 특별히 개인과 가족에 대한 관심이 많다. “경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펀드나 주식에 투자할 때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더라고요. 신문에는 무조건 (증시에 투자해도) 된다고 기사가 나오니까, 더 그런 거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글을 쓰게 됐어요.”

‘양원석’은 “경제 관련 서적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다”고 말했다. 그로서는 경방고수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경방고수의 글을 소개하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 간극을 내가 메웠다는 생각이 들 때의 뿌듯”한 맛 때문에 그는 작업을 멈출 수 없다. “올해 초 미국·영국·인도 등 각국 정상의 신년사가 ‘미국발 위기의 파장이 올 테니 허리띠 매고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한다’였는데, 정작 우리 대통령은 ‘주가 3천 간다’고 하더군요. 이거 큰일 나겠구나 싶었죠.”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고라 경제방에 글을 올리는 것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활동
지난 7월 이후, 고급 정보와 치밀한 분석을 대중친화적 언어로 풀어쓰는 경방고수가 속속 등장하면서, 그동안 강호를 지배했던 경제관료나 학자, 애널리스트들은 한발 물러서 숨죽이고 있다. 암울한 전망을 그대로 내놓을 수 없는 ‘제도권’의 한계 때문에 이들의 은인자중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경방고수들은 내다봤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조직 논리 때문에 정부 정책을 비판하지 못하고, 경제학 교수들은 학문적 위신 때문에 몸을 사리고, 언론은 주식이 잘돼야 광고가 잘되는 탓에 위기설을 숨긴다고 ‘헝그리울프’는 분석했다. 그는 현역 애널리스트 가운데 ‘미네르바’와 논쟁할 만한 경쟁력을 갖춘 이가 과연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상승미소’는 “인터넷은 진짜 전문가를 키워내는 시장”이라며 “인터넷 덕분에 진짜 진실이 통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방고수의 진정한 내공은 따로 있다. <한겨레21>과 만난 경방고수들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강조했다.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본뜻을 살리는 글쓰기가 자신들이 몰두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포강변’은 “결국 철학의 문제”라며 “경제라는 게 인간을 위한 것이고, 지금의 위기는 인간과 국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건데, 그걸 자제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게 내 논리”라고 밝혔다. ‘SDE’도 “경제는 말 그대로 경세제민일 뿐 개인의 부귀와는 관련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양원석은 “중산층 이하 서민이 이 상황을 알고 생존의 방법을 찾고 새 패러다임을 찾는 걸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며 경방고수들의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상승미소’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못박는다. 경방고수, 그들은 지금 인간 대신 자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기존 경제학의 ‘매트릭스’에 파산선고를 내리려 하고 있다.

08. 12. 1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8-12-16 13:56   좋아요 0 | URL
인터넷 공간이니 자유롭게 하는 거죠.제도권 학자들이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점도 감안해야 할 겁니다.

로쟈 2008-12-16 15:29   좋아요 0 | URL
제도권 학자들이 자기 몫을 했던 적이 있으니까 '지식인의 죽음'이란 말도 나오는 거겠죠. 아마도 이젠 기대할 수 없는...
 

월요일 아침부터 씁쓸한 기사를 읽는다. 안 그래도 4대강 정비사업 예산이 내년에 책정되어 대운하 사업을 재개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는 차에(하긴 현 정부의 말을 '신뢰'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긴 하다) 지난 5월 '대운하 양심선언'을 통해 4대강 정비사업이 실제로는 대운하 사업이라는 걸 폭로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김이태 연구원에 대한 징계를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이 역시 당초 징계는 없다는 당국의 말을 뒤집은 것이다. '재앙의 물길'이라며 관련 전문가와 국민 다수가 반대하고 있지만, "대운하 물길 따라 돈이 보인다"는 권력과 권력유착 집단의 탐욕은 꺾일 기세가 아니다. 그들의 의지대로 된다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노예제 과두정 사회다(이런 발언도 조심스럽다.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는 걸 가장하는 듯싶어서다). '주인'의 눈밖에 났다고 내쫓기는 사회의 다른 이름을 나는 알지 못한다. 지난 1년간 민주주의가 진전됐다고 보는 여론이 30%에 육박하는 조사결과도 뜻밖이다. 90%가 반대해도 개의치 않을 정권인데, 30%나 지지한다니...

한겨레(08. 12. 15) '대운하 양심선언’ 김이태 연구원 ‘징계’ 추진

한국건설기술연구원(건기연)이 지난 5월 대운하 관련 양심선언을 한 김이태 연구원(48)을 7개월이나 지난 지금 뒤늦게 애초 약속과 달리 징계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건기연 관계자는 14일 “지난 11월28일부터 12월12일까지 김 연구원 1명에 대해서만 내부 특별감사가 있었다”며 “이르면 이번주 김 연구원에 대한 내부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지난 5월 양심선언 파문 때는 ‘징계 계획이 없다’고 하다가 조용해지자 다시 약속을 어기고 징계 절차를 밟는 걸 보면 외부의 압력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건기연 내부에서는 권력기관의 압력이 있어서 파면 등 중징계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사자인 김 연구원도 “지난 금요일까지 보름간 감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원이 수주한 용역(연구 주제, 성격 등)이 외부에 유출됐고 이는 ‘원규’(연구원 규정) 위반이라는 취지의 감사였다”며 “징계를 전제한 감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양심선언 당시 징계하지 않겠다고 정부와 건기연이 밝혀 그런 줄 알았는데 믿은 내가 바보였다”고 덧붙였다. 건기연은 지난 5월 김 연구원의 양심선언이 파문을 일으킬 때, 당시 공석이었던 원장을 대리해 우효섭 부원장이 “김 연구원을 징계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 연구원은 지난 5월23일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 ‘대운하에 참여하는 연구원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건기연이 국토해양부로부터 연구용역 의뢰를 받은) 한반도 물길잇기 및 4대강 정비계획의 실체는 운하 계획”이라고 폭로한 바 있다.

지난 9월 부임한 조용주 연구원장은 “특별감사는 감사가 하는 것이고 나는 내용을 잘 모른다”며 “징계 여부는 징계위원회를 열어봐야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근철 건기연 노동조합 위원장은 “감사는 비상임이며, 우리 노조 집행부조차도 감사 이름을 잘 모른다”며 “모든 감사와 징계는 연구원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져 왔다”고 반박했다. 연구원의 조순제 감사, 김석진 감사실장과는 전화 통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때마침 국토해양부는 15일 ‘4대강 종합 정비 마스터플랜’을 발표한다. 국토부는 또 이번주 안으로 건기연과 ‘4대강 정비방안’에 대한 25억원짜리 용역을 체결하려 하고 있다. 건기연 내부에서는 이 때문에 정부가 4대강 정비와 대운하를 추진하는 데서 걸림돌이 될 제2의 양심선언에 대비해 김 연구원을 희생양 삼아 미리 경고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송창석기자)

경향신문(08. 12. 15) '대운하·형님 예산’ 기습복원… 與지도부도 몰라

새해 예산안 파행처리가 남긴 그림자는 ‘대운하·형님 예산’ 논란이다. 당초 하천 정비 예산과 경북 포항지역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중 1000억원을 삭감키로 한 여야 합의가 막판 뚜렷한 이유없이 무산되면서다. 민주당이 즉각 “여당의 사기극”이라며 반발, 정국의 변수로 떠오른 양상이다. 여당 내부에서도 ‘갈등’의 조짐이 엿보인다.

당초 여야는 12일 오전까지만 해도 소위 ‘대운하 의심 예산’, ‘형님(포항) 예산’에서 500억원씩을 삭감키로 잠정 합의한 상태였다. 그 결과 SOC 예산 총삭감 규모는 6000억원이었다. 하지만 13일 새벽 민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열린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에서 이들 예산은 대부분 정부 원안대로 통과됐다. 포항 예산의 경우 일부(167억5000만원) 줄었지만, 모두 4370여억원으로 전년 대비 95%가 증가했다. 하천 정비 예산도 삭감없이 1조6500여억원으로 확정됐다.

이 같은 ‘대운하·형님 예산’의 ‘기습 복원’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열쇠를 쥔 이한구 예결위원장과 여당 예결위원들의 ‘독주’로 정리되는 흐름이다. 이들은 당 지도부의 권고도 무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이 “이한구 예산”(우제창 예결위 민주당 간사)이라며 이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장 여야 협상이 최종 결렬된 12일 밤 10시 무렵만 해도 ‘대운하·형님 예산’ 1000억원 삭감은 불변이었다. 당시 예결위 관계자는 “이미 이 위원장과 정부가 협의해 안을 정리한 것이 있다. 그 속엔 하천정비·포항 예산 1000억원 등 모두 3조7000억원을 삭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여야 협상은 깨졌지만, 향후 정국 부담 등을 감안해 그 시점까지 합의된 내용은 존중한다는 취지였다. 다만 이들 예산을 예비비로 돌려 민생예산에 쓰도록 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자정 무렵 기류가 갑자기 흔들렸다. “합의가 깨진 만큼 한나라당 방침대로 SOC 예산은 5000억원 삭감한다”(이사철 의원)는 예결위 내부 기류가 전해졌다. 명분은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민주당 요구가 “구체성이 없는 정치공세일 뿐”(이한구 위원장)이란 지적도 덧붙었다. 이들 예산의 경우 국토해양부 소관이어서, 보건복지가족부 소관의 민생·복지 예산으로 전환하는 것이 예산 원칙상 불가능하다는 요지였다. 그 때문에 원내 지도부의 삭감 방침을 전하자, 김광림 의원 등 예결소위 위원들이 “절대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이다.

실제 홍준표 원내대표 등 원내 지도부는 마지막까지 ‘기습 복원’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13일 새벽 3시쯤 홍 원내대표는 부대표단으로부터 관련 보고를 받고 당황한 채 이한구 위원장을 찾아가 격론을 벌였다. “이런 식으로 하면 여야 관계가 완전히 망가진다”고 격한 항의의 목소리도 새어 나왔다.

홍 원내대표는 14일 “그(형님 예산 복원) 부분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이 위원장에게 물어보라”고 불쾌감을 표출했다. 이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의 ‘배후설’도 제기된다. 여야 관계 파탄까지 감수한 중대 사안을 예결위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1차적으로는 마지막까지 이한구 위원장과 예산안 조율을 해온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의혹의 눈초리가 가고 있다. 안 그래도 이들 SOC 예산 삭감에 대해 기재부가 줄곧 난색을 표해온 터다. 여기에 더해 “이 위원장이 ‘형님 예산’과 ‘대운하 위장 예산’을 지킨 것은 청와대에 충성하기 위한 행태”(최인기 민주당 예산심사위원장)라는 청와대나 이상득 의원 쪽의 ‘개입’ 의혹도 제기된다.(김광호깆자)

경향신문(08. 12. 15) “이명박 1년, 민주주의 후퇴” 국민 63%가 응답… “진전됐다”는 29.3%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난 1년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전반적으로 후퇴했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지목했다. 분야별로는 ‘사회적 평등’에서 민주주의가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이 후퇴한 것으로 평가됐다.

경향신문이 연말을 맞이해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진전 여부를 평가하기 위해 현대리서치에 의뢰, 지난 13일 전국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95% 신뢰 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 결과 응답자의 63.2%(매우 후퇴 21.0%, 다소 후퇴 42.2%)가 지난 1년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답했다. 민주주의가 진전됐다는 답변은 29.3%(매우 진전 3.3%, 어느 정도 진전 26.0%)로 나타났다.

지난 1년간 민주주의 후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부문(집단)은 이명박 대통령으로 25.2%였으며 이어 정부(21.7%), 한나라당(13.6%), 야당(8.4%) 순이었다. 지난 1년간 분야별 민주주의 진전 여부를 묻는 조사에서는 언론자유, 인권, 사회적 평등, 시민권리 등에서 모두 후퇴했다는 답변이 진전됐다는 것보다 많았다.

먼저 언론자유에 대해서는 ‘후퇴되었다’가 50.0%(매우 후퇴 16.3%, 다소 후퇴 33.7%)로 ‘진전되었다’ 43.4%(매우 진전 7.5%, 약간 진전 35.9%)보다 6.6%포인트 높게 나타났다. 인권 민주화에 대해서는 후퇴가 48.8%(매우 후퇴 13.2%, 다소 후퇴 35.6%), 진전이 41.4%(매우 진전 6.9%, 약간 진전 34.5%)로 집계됐다. 사회적 평등은 후퇴 의견이 60.0%(매우 후퇴 20.4%, 다소 후퇴 39.6%), 진전 의견이 33.0%(매우 진전 4.6%, 약간 진전 28.4%)로 나타났다.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 행사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63.7%가 ‘비민주적’이라고 답했다. ‘민주적’이라는 의견은 30.8%였다. 또한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계층(부문)은 부유층으로 55.0%였으며, 다음으로 대기업(23.6%), 중산층(4.4%), 일반 서민층(4.0%), 중소기업(3.8%) 순이었다.(안홍욱·선근형기자)

08. 12. 15.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08-12-15 10:23   좋아요 0 | URL
다른짓은 다해도 되는데 운하만은 안했으면 좋겠네요..
후손에 후손까지 가도 완전히 수습할 수 없는 일을 어쩌려고..
정말 밤에 잠이 안옵니다.

로쟈 2008-12-15 23:39   좋아요 0 | URL
체념과 냉소를 단련시키나 봅니다...

연두부 2008-12-15 10:47   좋아요 0 | URL
다른짓도 안됩니다....쩝

로쟈 2008-12-15 23:4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이코패스들이 따로 없어요...
 

박홍규 교수의 칼럼 두 편을 읽었다. '한국 지성의 죽음'과 '노숙자 인문학강좌'를 소재로 하는데, 둘다 오늘 읽은 것이어서 한데 묶어보았다. 나름대로 말이 되는 듯싶어 제목은 '지성의 죽음과 노숙자 인문학'이라고 붙였다. 그때 '지성'은 '한국 지성', 더 좁히면 '한국 대학의 지성'을 뜻한다. 그 지성의 죽음을 비분강개하는 필자의 어조가 조금은 장황하게 여겨지지만 "전공학과의 입문 수준을 비빔밥처럼 섞은 현재 교양교육의 전면적 부정 위에 자유인을 양성하기 위한 전인적, 학제적 교양교육으로 전면 개혁"해야 할 필요성에는 공감하기에 옮겨놓는다(한국 대학의 반지성적 풍토에 대한 일갈도 후련하다).  

교수신문(08. 12. 01) 한국 지성의 죽음,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지성의 죽음’이란 이 글의 제목은 주말 잠결에 부고처럼 나에게 찾아왔다. 무심코 받았다가 눈을 부비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기껏 ‘나의 죽음’뿐이다. 물론 내가 한국 지성의 대표는커녕 지성 축에 끼인다고도 절대로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 지성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이 글은 그런 이유로 내가 지성이라는 가정 하에 쓰는 지극히 서글픈 개인적 유서 같은 것에 불과하다. 나 자신을 지성이라고 말하기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음은 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는데, 지성을 ‘권력과 자본을 위시한 모든 권위와 압력으로부터 독립한 자유로운 아웃사이더 아마추어 자유인-교양인-全人의 심성과 실천’이라고 보면 더욱 그렇다. 지성을 이와 다르게 정의하는 예도 많지만 이 글에서는 그렇게 정의하도록 하겠다. 이는 그 지성의 개념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매우 특별한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개인적인 독백이기 때문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지성의 개념에 따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지성이 있는가. 그런 지성이 있었다가 죽었는가. 아니면 애초부터 없었고 지금까지도 없는가. 적어도 나는 그런 지성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지만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자 한다. 가장 원시적인 혈연, 지연, 학연과 폐쇄적인 전공의 장벽으로부터 벗어나기도 너무나 힘든 오늘의 대학과 학계와 사회에 사는 전문가란 뜻의 직업인인 교수 신세지만 말이다. 그래서 흔히들 오늘의 우리 지성에 대한 특별한 위협이 권력과 자본, 대학을 비롯한 학문기관과 저널리즘의 가공할 상업주의라고 하는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사뭇 부끄럽다. 나 자신 그런 상업주의 속에 살고 있고 그런 상업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싸움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이후 상업주의는 더욱 거세어져 전체주의를 방불케 하고 있어도 나는 여전히 그렇다. 그런 상업주의 대학이 싫으면 아예 그곳을 떠나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비겁한 탓인지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상업주의에 반하는 지성을 말하려는 지금 나의 그런 직업적 제약이 치명적 약점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서글프고 부끄럽지만 조금이라도 노력할 수밖에 없다.

사실 대학을 비롯한 소위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곳들은 처음부터 상업주의의 지배를 받았고 그 자체가 상업주의에 의해 운영돼 왔다. 학생 머리수를 돈으로 센다는 사립대학은 물론이고 국공립대학도 지성의 산실이 아니라 취업학원이 된 지 오래다. 이러한 상업주의는 국가 주도의 관료주의 교육정책과 야합해 국가적 정통성마저 부여받는 천박한 관제전문가를 양산하고 있다. 그런 대학에 권력과 자본 등의 모든 압력으로부터 독립한 자유로운 아웃사이더 아마추어 지성은 존재하기 어렵다. 우리의 대학현실은 너무나도 反지성적이다. 독재적인 족벌 이사회나 시간강사의 노예적 처지나 교육의 계급화를 초래하는 과도한 등록금 문제를 포함한 대학경영의 수많은 원시적 문제점들이 최소한의 합리적인 상업주의라는 측면에서도 해결되지 못해 지성의 최저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업주의의 제도적 측면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은 정신적 상업주의인 전문주의다. 이는 지성의 참된 敵이 우리나라에서 지성이라고 흔히 말하는 전문가의 절대교리인 전문주의 자체이므로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우리 지성의 척도라고 하는 현 교육제도 하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좁은 전공 지식 영역에 갇혀 전공 분야라는 직접적 관심사 밖에 있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게 되며, 전인적인 교양을 철저히 희생시켜 특정한 권위나 규범적인 생각에만 영합하도록 만든다. 전인적 교양 없이 오로지 권력에 봉사하도록 교육된 전문가는, 철저히 비판적이고 왕성한 독립정신으로 분석과 판단을 내려야 하는 지성이 아니라 도리어 그 적이므로 그런 전문주의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전문가가 또 다른 유사 전문가를 양성하는 현 대학제도는 지성의 전당이나 산실이 아니라 지성의 적이자 지성의 무덤이다.

이러한 상업적 전문주의는 수많은 반지성적 행태들, 즉 이기적 출세만을 위한 이익과 권력에 대한 계급적 집착, 연고주의에 뿌리박은 집단적 이기주의, 사회적 책임의 포기와 철저한 무관심, 정치적 위험을 의식한 고의의 침묵과 민중 무시, 개인보안과 비판 부재, 애국주의적인 호언장담 횡행, 철저한 자기 규제와 현실도피,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사상의 불모, 사대적이고 추상적인 유행 외국 학문에 대한 피상적 의존, 개성의 부재와 획일화, 회고적이고 스스로 연극화하는 변절 등등 지성의 죽음을 초래하는 현상들을 끝없이 낳고 있다. 무비판, 무책임, 무현실, 무사상, 무개성, 무지조, 무품위 등등의 각종 無의 행렬이나, 반사회, 반민중, 반민족, 반인류, 반인간, 반생태, 반인권, 반현실 등등의 각종 反의 행렬이 지금 우리 지성의 죽은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지성이란 본질적으로 반권력적이고 비판적인 것이다. 지성은 근본적으로 결코 안이한 공식 견해나 기성의 상투적 표현, 권력이나 전통의 무조건적 추인을 거부하는 비판정신이다. 이는 언제나 정부 정책을 비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해 끝없이 경계하고 거부하는 태도 자체를 뜻한다. 특히 지성은 그 일상생활의 측면에서도 그 어떤 권력이나 권위와의 유착을 거부하고 그것을 위한 어떤 연고주의와도 단절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이른바 지성이란 오로지 지연, 혈연, 학연 등을 통해 지성계의 보스나 권위자의 승인을 얻으려하고, 철저히 폐쇄된 전공의 장벽에 숨어서 자기 보안을 일삼으며, 균형과 객관성과 온건성이 지성의 척도라고 보는 허위의 보수적 평판 척도를 유일한 가치인양 수호하고 있다.

이러한 반비판적인 풍토에서는 어떤 창조적 지성도 나올 수 없다. 그들의 희망은 자기 전공분야에서 국내외 저명학술지에 전문가들만이 보는 논문을 많이 실어 명성을 쌓고 돈까지 벌며, 대학의 총장을 위시한 각종 보직을 갖거나, 회사 임원이나 정부 각료의 일원이 돼 주류 지배계급에 속하는 것뿐이다. 그런 명성과 직위가 지성의 척도이자대명사로 통하는 우리 지성계라는 천박한 반지성의 공간에서 참된 지성은 소외돼 있다. 물론 그 소외는 그렇게 출세하기를 꿈꾸다가 실패한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벼락출세한 자들이 한국 최고의 지성이니 하고 뽐내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함도 패자의 콤플렉스 탓일지 모른다.

명색이 지성이라는 자들이 부끄러움조차 아예 모르니 최소한의 품위가 있을 리도 없다. 남녀노소 모두 당연한 먹이인 양 서서 집어먹는 시식코너처럼 주위의 사소한 이익까지도 허겁지겁 집어삼키고 권력을 쫓아 철새처럼 방랑한다. 나라를 망쳤다고 폐기처분된 옛 지성 중에는 그래도 그렇게 품위 없이 살지는 않았고 자결한 선비도 있었다 하나, 선비가 사라지고 대신 등장한 전문가는 품위를 아예 상실한 상업적 욕망의 덩어리일 뿐이다. 물론 옛 선비 대부분도 권력과 부를 향한 과거시험의 노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외국 책들을 신주 삼아 외제 지식을 과시하는 점도 고금의 전문가가 너무 닮았다. 우리의 전문가는 그런 광신자이기는 해도 자신의 사상은 없는 점에서 죽기커녕 아직 태어난 적도 없다. 丹齋 말처럼 유사 이래 온갖 동서양 사상의 신을 모셔왔지만 자기 사상은 없다.

이런 무사상을 부끄러워하기커녕 자신의 전공 외국 지식 신들이 절대적이라고 떠벌리고, 그런 미명으로 실제의 목표인 권력과 부를 쫓는 꼴도 유사 이래 변함이 없다. 그 모든 종교 신이나 지식 신이나 우리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는 점도 같다. 이런 식민지적 절대주의 광신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학문이 패션처럼 외국 유행의 사대주의에 젖어 추상화되고 피상화되며 노예화되는 한 그런 광신은 끝나지 않으리라. 이러한 반지성의 풍토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자본을 위시한 모든 귄위와 압력에 대한 여러 가지 심층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전인적 교양의 지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만 강조하기로 하자.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대학을 지성의 공동체로 만들어보고자 지난 30년간 몸담은 법학부를 떠나 교양학부로 옮겼다. 내가 경험한 법학부란 반지성적인 전문주의 교육체제의 전형이었는데, 그것이 다시 더욱 계급화된 전문주의 교육체제인 로스쿨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밥학’이라고도 하는 출세 지향의 법학, 어용학문이니 암기수험기술이니 하는 법학을 30년이나 하면서 나는 전인적인 교양의 회생이 대학은 물론 지성의 회생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절감했다. 물론 그것은 전공학과의 입문 수준을 비빔밥처럼 섞은 현재 교양교육의 전면적 부정 위에 자유인을 양성하기 위한 전인적, 학제적 교양교육으로 전면 개혁하는 것을 뜻한다. 전문주의 장벽은 너무나도 높아 어떤 교양교육 개혁의 시도도 결코 쉽지 않지만 대학을 권력과 자본을 위시한 모든 귄위와 압력으로부터 독립한 자유로운 아웃사이더 아마추어 자유인-교양인-전인의 공동체로 만들지 않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상업주의와 출세주의와 기회주의 따위에 젖어 거미처럼 사방에 발을 뻗치면서도 정작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현실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문가만이 있기에 아예 지성을 거부하고 지성에서 해방되자고 역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권력과 이익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파악과 개혁에 대한 열정으로 분열된 전문 전공의 장벽을 가로질러 보편적 사상을 추구하는 유기적 교양 전인의 심성이자 실천인 지성은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 극도로 편향된 권력에 아첨해 타락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전공의 장벽을 뛰어넘어 학제적인 비전문의 전인적인 교양의 지성은 살아야 한다. 나는 지성이 인류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식의 헛소리를 할 생각은 추호도없지만, 그것을 잠결에 날려버릴 정도로 무가치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이 글을 썼다. 혹시 자기 지성의 죽음에 대해 나처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하소연하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경향신문(08. 12. 04) [박홍규 칼럼]노숙자 인문학강좌

어제, 올해 마지막 노숙자 인문학강의를 했다. 괴상망측한 우익 역사교육 소동으로 시끄러운 탓만은 아니었지만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제로 관련 영화와 예술작품들을 함께 보았다. 북한 배경의 007영화에 동남아의 집과 물소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처럼 함께 웃은 것을 시작으로 서양의 동양침략을 정당화한 수많은 영화나 그림들을 노숙인들은 정확하게 보고 비판했다. 그 대부분은 그들이 생전 처음 보는 것임에도 그러했다. 아는 만큼 본다고? 아니다. 보는 만큼 안다. 아니다. 아는 게 중요하지 않다. 이해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여러 인간, 계급, 민족, 나라들이 서로 이해함이 중요하다.

올봄, 그 강의를 의뢰받자마자 즉시 수락한 것은 1970년대 노동야학 이후 그런 수업이 가장 즐거웠기 때문이다. 물론 돈 없이 말이다. 최근 수강료가 1000만원이 넘는 CEO 교양강좌 같은 것이 유행하고, 소위 우익만이 아니라 좌익이란 사람들까지도 엄청난 강사료를 받으며 그곳에서 CEO들을 가르친다고 화제지만, 교양이란 게 유한 지배계급의 특권적 사치로 타락한 게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게다가 교양 있는 좌우익이 함께 노닌 것도 어제오늘인가. 그래서 노숙인들은 ‘무식하기’ 이전에 ‘흉측한’ 사람들이고, 그런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에게는 철학할 기본적 능력이 없으니 그런 강의는 무익하며 기껏 허황된 자기만족을 부추길 뿐이라고 냉소한 진보적 철학자도 있었다. 특히 최소한의 논리적 능력이 있어야 인문적 사유가 가능하고 그 능력이란 여유에서 나오는 것인데, 삶의 여유가 전혀 없는 그들에게 논리나 사유는 아예 있을 수 없고, 그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고문이라고도 했다.

서로 이해하는 마음이 교양
나는 물론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교재 선택은 고민이었다. 지난해 서울에서 비슷한 강의를 주최한 사람들에게 의뢰받은 강의가 몽테뉴여서 비슷한 고전을 검토하기도 했지만 마땅치 않았다. 그런 강좌의 원조라는 미국인은 교도소에서 플라톤을 강의한다지만 나에게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철학자 왕의 독재를 주장한 자에 불과했다. 그 미국인도 CEO 교양강좌를 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우리 노숙인들에게 플라톤은 물론 어떤 서양인에 대해서도 강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겨우 한 시간 강의를 위해 한 달 이상을 고민하기는 생전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은 것도 처음이었다. 최소한 그들에게 도덕 설교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반성, 회개, 근면, 공부, 직장, 가족, 부모 따위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첫 시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만나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과 세상을 알고 아름다움을 느끼니, 문학자, 철학자, 역사가,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문학, 철학, 역사, 예술을 할 수 있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해야 그것이 비로소 가치 있는 우리의 인문학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 30분 질의응답 시간은 30년 대학수업 전부보다 훨씬 열띤 분위기였다. 이렇게 각자 생각을 말하고 그 사이에 남의 생각을 자기 생각과 비교하면서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으면 고쳐 하나의 결론에 이르거나, 또는 그렇지 못해도 남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임에 모두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인문학자다-우리 모두 철학자고, 문학자고, 역사학자고, 예술가로서, 책을 통해 말하는 것은 참된 인문학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토론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끝말에 나 스스로 흥분하면서 강의를 마쳤다.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마침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문제를 잘못 찍었다는 둥, 교수가 외우라고 줄쳐 준 것을 잊었다는 둥, 스펠링을 잘못 썼다는 둥 쌍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조금 전 만났던 노숙인들과는 전혀 다른 우리의 대학생들. 그 암기시험과 욕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오로지 암기만으로 시험을 치르고서는 곧 망각하게 하는 우리의 교육. 그리고 그 기계적인 허무함에서 나오게 마련인 욕지거리. 이런 것을 위해 최소한의 여유와 논리능력이 필요하다고? 아이들을 저렇게 기계화시키고 그 결과로 오로지 욕설밖에 못하게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대학이니 교육이니 교양이니 학문이라고?

암기를 학문이라 가르치는 대학
그런 교육을 시키는 자들은 그런 기계적인 짓을 그렇게 멋지게 교육이니 교양이라 치장하고 부와 명예와 권력까지 쥐고 살면서 자신처럼 돼라고 치열한 경쟁을 요구한다. 게다가 이제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며 남을 이해하는 인문적 사고와 전혀 무관하게 철저히 남을 지배하는 보수골통 CEO로 살아온 자들이 언론과 방송을 위시한 문화, 그리고 역사교육까지 쿠데타처럼 점령하고 있다. 그들이 정치나 경제를 지배하는 이상으로 문화와 교육을 지배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일이다. 문화와 교육, 인문과 교양, 학문과 예술은 그런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박홍규 영남대교수·법학)

08. 12. 04.

P.S. "우리 모두 인문학자다-우리 모두 철학자고, 문학자고, 역사학자고, 예술가로서, 책을 통해 말하는 것은 참된 인문학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토론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끝말에 나 스스로 흥분하면서 강의를 마쳤다."는 대목에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책은 이번에 출간된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궁리, 2008)이다.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이 그 부제다. 흠, 이 '지적 해방'의 문제에 대해서 뭔가 써봐야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드팀전 2008-12-05 10:52   좋아요 0 | URL
<노동법>보다 더 두꺼운 THE LEFT가 눈에 띄네요. 나원 책을 저렇게 두껍게 만들어서야

로쟈 2008-12-06 09:52   좋아요 0 | URL
독서용이라기보다는 장서용에 가깝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05 17:24   좋아요 0 | URL
저는 지금도 초중고교 때 참고서 교과서 문제집만 읽다가 성인이 된 게 억울해 죽을 지경입니다.그런데 요즘은 아예 고등학교 1학년부터 저녁늦게 잡아두니...그래도 제가 학교 다닐 땐 2학년까진 6시 안에 끝났는데요.

로쟈 2008-12-06 09:55   좋아요 0 | URL
밤 9시까지의 '야자'가 기본이었죠. 요즘은 심야학원에까지 다니니까 돈 주고 몸 망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제 천정환의 <대중지성의 시대>(푸른역사, 2008)를 손에 들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이는 요즘 한창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였다. 이 익명의 지식인이야말로 '대중지성'의 가장 전범이 아닌가 싶어서다. 물론 이때 미네르바는 한 개인이 아니다. 미네르바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국가기관까지 동원되었다고 하지만 존재하는 건 미네르바'들' 아닌가? 그런 생각에서 공감하며 읽은 기사들을 스크랩해놓는다('미네르바'란 기호는 2008년 가을의 한국사회를 가리키는 지표로서 기억됨 직하다). 

시사IN(08. 11. 19) 미네르바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1848년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쓰며 들머리로 사용했던 말이다. 저 유명한 문장이야말로 오늘 한국 사회의 풍경을 얘기하는 데 가장 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는 메타포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이렇게 적을 수 있으리라.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미네르바라는 유령이.” 정보당국과 경제수장, 청와대 관계자는 이 유령의 입을 막기 위해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지금 당장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미네르바’란 다음(DAUM) 아고라에 경제 관련 글을 쓰며 유명해진 논객의 필명이다. 스스로 ‘고구마나 파는 늙은이’로 칭한 것 외에, 지난주까지만 해도 미네르바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실체 없는 유령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그(녀)의 글은 거칠고 요령이 없으며 자칫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령의 ‘수상한’ 글은 누리꾼의 지지를 전폭 얻었고, 미네르바는 ‘사이버 경제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얻기에 이른다. 그(녀)가 쓴 글은 각종 게시판에 퍼 날라졌으며, 글에 거론된 경제학 서적은 여러 인터넷 서점에서 ‘미네르바 추천 도서전’과 같은 형식으로 유명해져 절찬리에 팔리고 있다. 한 카페에서는 자발적으로 모인 누리꾼이 그(녀)의 글을 책으로 묶어 원하는 이들에게 제작비 정도의 비용만 받고 보내준다.

급기야 11월11일, 정보당국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미네르바는 ‘50대 초반의 나이, 증권사에 다녔으며 해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남자’라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최근 미네르바가 아고라에서 활동을 중단하자 정부와 청와대는 그에 대해 손을 대지 않기로 했지만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한다고 판단할 경우 적극 대응”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과 함께 말이다.

이에 대한 누리꾼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미국발 서브프라임의 불똥이 한국으로 튀리라는 예상을 비롯해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부동산 거품, 주식 폭락 등을 예측한 그를 손봐주기 전에, 신문이나 <100분 토론> 등에 나와 장밋빛 전망을 떠들어댄 관료와 애널리스트부터 손봐주어야 할 것이다”라거나 “대다수 국민이 궁금해하는 것은 미네르바의 정체가 아니라, 쌀 직불금을 부당 수령했음에도 사생활 보호라는 미명 아래 공개되지 않은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명단이라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다”라는 어느 누리꾼의 말은, “겨우 몇 개의 글로 위기감을 느끼는” 우리 정부의 딱한 오늘을 잘 보여준다. 한편 미네르바는 기사가 나오기 일주일 전인 11월4일부터 글쓰기를 중단한 상태다.(김홍민_출판사 북스피어 대표)

프레시안(08. 11. 21) "문제는 메시지다, 이 바보야!"

지금 대한민국의 최고 이슈메이커는 바로 익명의 누리꾼 미네르바다. 미국발 금융 위기를 족집게처럼 맞춰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을 이유로 절필을 선언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절필을 선언한 후에도 TV, 신문할 것 없이 모든 언론은 그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있다.

진보, 보수를 가릴 것 없이 각 언론사마다 ''미네르바의 정체''를 밝히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한 기자는 미네르바가 올린 글의 IP를 추적한 후, 자신의 블로그에 "미네르바는 1971년생으로 야구, 렉서스를 좋아하는 남성"이라는 추측을 했다. 한 진보 성향 언론사는 기자에게 "미네르바를 찾아 ''정기 기고''를 청탁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동아> 12월호에 절필을 선언한 미네르바의 장문 기고가 실리면서 ''미네르바 신드롬''은 극에 달한 듯하다. 이번 <신동아> 기고는 미네르바가 제3자를 통해서 먼저 제안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 눈치를 보는 사주의 방침과 정반대의 기고가 <신동아>에 실린 까닭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네르바가 <신동아>를 선택한 것은 훌륭한 판단이었다. 긴 분량의 기고를 가감 없이 실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친정부 성향의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오프라인 잡지를 선택함으로써 ''반정부 성향의 인터넷 논객''의 이미지도 상쇄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의 기고는 곧바로 온갖 매체로 옮겨져 수많은 시민에게 그 내용이 전달되었다.

갈 데까지 간 미네르바 신드롬
<신동아> 기고를 끝으로 미네르바는 절필을 선언했지만, 정작 미네르바 신드롬은 더 불이 붙었다. 20일 오전 언론이 서화숙 <한국일보> 편집위원의 ''패러디'' 칼럼을 놓고 벌인 해프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서 위원이 이명박 정부를 조롱하고자 언급한 ''미네르바 경제 관료 기용설''을 <조선일보>, <중앙일보>, <오마이뉴스>, <데일리서프라이즈> 등이 사실로 알고 인용 보도한 것.

심지어 민주당 최재성 대변인은 이날 오후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미네르바를 경제 각료로 기용하겠다는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가 누구인지 밝히라"는 논평을 냈다가 황급히 취소하는 코미디를 연출했다. 이런 상황을 놓고 서화숙 위원은 <프레시안>과의 전화 통화에서 "한국 사회의 독해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혀를 찼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지극히 비이성적이다. 물론 미네르바가 등장부터 퇴장까지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적절한 요소를 두루 갖춘 것은 사실이다. "그는 대중이 불안해 할 때, 갑자기 ''메시아''처럼 등장해 현실과 부합하는 진단과 대안을 내놓다, 권력의 탄압을 못 이겨 퇴장했다."(최영묵 성공회대 교수)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러나 정부, 언론이 혈안이 돼 미네르바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호들갑을 떠는 상황을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게 정부, 언론이 미네르바 신드롬을 부추길수록 정작 대중은 더욱더 미네르바에게 쏠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작 미네르바가 한국 경제를 위해서 쏟아냈던 수많은 고언은 사라지고 없다.

미네르바 신드롬, 누가 만들었나?
그렇다. 지금 정부, 언론은 미네르바의 진단의 옳고, 그름을 따져서 취할 대목은 취해서 그가 그토록 걱정하는 파국이 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네르바가 누구인가, 이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차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행태야말로 미네르바의 충정을 무시하는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자칫하면 그의 경고를 듣고서도 대비를 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미네르바를 만들어낸 당사자는 바로 정부, 언론이다. 한 경제평론가는 미네르바 신드롬을 놓고 이렇게 평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전 국민이 알 수밖에 없는 걸 정부가 자꾸 숨기다보니, 이런 신드롬이 생긴 것이다. 정부가 제2, 3의 미네르바의 등장을 막으려면 금방 드러날 거짓말 대신 솔직한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의 말은 계속된다. "사석에서 정부에 몸담고 있는 공무원, 전문가를 만나면 모두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다 알고 있다. 그렇게 정책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시그널을 줄 수 있는 이들이 입을 꾹 다물고 직무유기를 하고 있으니 미네르바가 대신 그들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통령은 현실을 모르고, 공무원·전문가는 침묵하고, 이들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생겨난 현상이 바로 미네르바 신드롬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미네르바 신드롬이야말로 위기에 취약한 한국의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단적인 증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네르바는 없다
이제 미네르바는 없다. 이제 우리는 미네르바 대신 다른 미네르바''들''이 필요하다. 익명이 아닌 실명의 미네르바''들''이 공적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때 바로 시민은 미네르바 대신 정부, 언론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당당히 자신의 실명을 밝히는 미네르바''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채은하 기자)

08. 11. 2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8-11-21 14:07   좋아요 0 | URL
이번 신동아를 읽어야겠군요.그런데 미네르바 같은 이를 대상으로 정부 고위관료가 직접 나서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건 권력의 경제학이라는 면에서도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 않는군요.여하튼 현정부의 이념적 경직성은 지나쳐서 자기 점수만 깎아먹고 있습니다.

로쟈 2008-11-21 22:14   좋아요 0 | URL
'이념적 경직성'이란 것도 과대평가 같은데요. 그냥 '무개념'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탐욕적인...

2008-11-24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24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