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서 김영명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한국에 한국 경제학자가 있는가?'(http://blog.aladin.co.kr/mramor/2370604)란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에 한국 정치학이 있는가?'란 물음도 가능하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문의 정체성'이란 화두가 꽤 오래전 '유행'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제껏 별다른 진전이 없어 보이는 현실은 이래저래 씁쓸하다. 가을 탓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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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08. 10. 29) [김영명 칼럼/10월 29일] 짝퉁 장사

"4ㆍ19 이후 50년 동안 서울대가 한 일이라곤 반역사적이고 비도덕적인 엉터리 권력에 빌붙어 곡학아세를 하거나 외국 이론을 들여와 '짝퉁 장사'를 한 것밖에 없다." 김지하 씨가 서울대 세미나에서 한 발언(한국일보 10월 10일자)이다(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810/h2008101003005722020.htm).

아직 요원한 학문의 정체성 확립
동감이다. 글쓴이도 꽤 오래 전부터 한국 지성계의 짝퉁 장사를 비판해 왔고, 자기 나름대로 대안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김지하 씨는 자신이 모색하는 생명사상을 학계에서 알아주지 않아 섭섭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그는 유명인사이니 나 같은 사람도 그런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유명하지 않은 내가 <신한국론>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단일사회론'은 아는 사람조차 없다.

그런데 실상 우리 학문의 정체성을 찾자는 소리는 옛날부터 있었다. 철학자 박종홍(朴鍾鴻ㆍ1903~1976) 선생이 젊었을 적인 1933년에 이미 그런 말을 하였다. 그 뒤 75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무것도 없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말은 하는 사람들이 좀 늘었다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서양 중심주의 고발, 탈식민성 모색 등의 담론들은 무성하다. 쉽게 말하여 "이런저런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렇게 해보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은 드물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왜 그럴까? 답은 위 김지하 씨의 말에 다 나와 있다. 권력과 명성과 지위에 도움 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 것을 옮기지 않으면, 다시 말해 짝퉁 장사를 하지 않으면 그것이 장악하고 있는 지식 권력에서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탈식민성 모색'이라는 담론 자체가 탈식민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식민적'인 기묘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김지하 씨의 생명사상이 한국에서 힘을 얻으려면 오히려 미국 사람들이 먼저 알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인들이 그게 좋은 것인가 보다 하고 관심을 쏟을 것이다. 그래서 김지하 씨도 글을 영어로 써야 한다, 이렇게 되나?

학문의 식민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처럼 학자들이 비겁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무능해서 그렇기도 하다. 남의 것을 베끼거나 옮기지 않고 자기 것을 만드는 일은 원래 어려운 법이다. 자기 이론이나 철학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분석틀을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어렵게 만들어놓은 분석틀을 미국 사람 것이 아니라고, 또 주류 학계의 것이 아니라고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더더욱 힘은 빠지게 되어 있다.

또 다른 까닭은 능력에 비해 턱없이 눈만 높아졌기 때문이다. 세련되고 치밀한 미국 이론들을 보니 이에 필적할 만한 자기 이론을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나의 분석틀도 이런 점에서는 유치한 수준인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나서서 만들어 놓으면 다음 사람이 그것을 다듬고 덧붙이고 하는 일을 하면 된다. 아무도 시작을 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 것이 나올 리가 없다.



자기 것ㆍ우리 것 모색 실행해야
우리 것을 만들자고 하는 말을 지금 있는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무슨 대단한 이론을 만들자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외국 학문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속에서나마 우리 것을 가미해 볼 수도 있다.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 것이 조금씩 나올 수 있다. 정치학자인 글쓴이는 외국 사람에게 내놓을 만한 '한국 정치학'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럽다. 다른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천하지 않으면 이런 모든 말들이 다 부질없다.(김영명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08. 10. 29.

P.S. 우리 이론을 만들어내는 일이 어렵다면 외국의 이론이라도 한국적 현실에 제대로 적용하고 활용하는 일이 차선책은 되지 않을까 싶다. 강준만 교수의 신간 <지방은 식민지다>(개마고원, 2008) 때문에 든 생각이다. 책의 부제가 '지방자치.지방문화.지방언론의 정치학'이다. 한국 사회의 '지방' 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해 강교수가 끌어오고 있는 것은 '내부 식민지' 이론이다.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것이다.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은 남미의 도시화를 ‘종속적 도시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남미의 도시 형태는 남미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잉여가치의 송출구 역할을 함으로써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1970년대 남미에서 ‘내부식민지(internal colony)’ 또는 ‘내적 식민지’ 이론이 대두되었다. ‘제4의 식민지(the 4th colony)’ 또는 ‘식민지 속의 식민지(colonies within colonies)’라고도 한다. 식민지는 국가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 국가 내에서도 극심한 지역간 불평등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록 내부식민지론이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저자는 그것이 지금의 지방문제를 들여다보는 데 유용한 잣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적용이 이론의 보강/강화로 나타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이론적 시야를 확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학문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한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좀더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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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현실에 어두운 한국의 경제학자들 얘기를 옮겨놓고 보니 조금이라도 위안거리가 없을까 찾게 된다. 마침 지난주에 출간된 송기호 변호사의 책 <곱창을 위한 변론>(프레시안북, 2008)에 눈길이 간다. 저자는 알다시피 지난 촛볼 정국 때 가장 돋보이는 활동을 펼친 바 있다. 프레시안에서는 우석훈씨의 발문을 옮겨놓았는데, 그걸 스크랩해놓는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6155813). 생각해보니 곱창 전골을 먹어본 지도 오래됐다. 오늘처럼 좀 쌀쌀한 날씨엔 딱 좋은데, 어쩌다가 그런 사소한 즐거움도 포기하게 되었는지...

프레시안(08. 10. 26) "송기호는, 대한민국의 '에이스'다"

송기호 변호사가 <곱창을 위한 변론>(프레시안북 펴냄)을 펴냈다. 송 변호사는 이 책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를 일방적으로 추종한 결과 우리의 농업, 먹을거리가 얼마나 위기에 처했는지를 고발한다. 송 변호사가 고군분투하며 막으려고 애를 썼던 한국 정부의 광우병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그 결과일 뿐이다.
  
송기호 변호사는 이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행동할 때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 "평화를 해치는 차별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북돋는" 통상법이 가능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지난 촛불 집회는 이런 통상법을 향한 시민의 열망이 얼마나 큰지 잘 보여줬다. 송 변호사가 이 책을 다음 이들에게 받치는 이유이다.
  
"이 책이 미국산 쇠고기 검역 기준을 바로잡는 정당한 활동을 하다가 부상당하고 연행되고 수배되고 처벌받은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희망한다. 특히 2008년 9월 9일 서울 조계사 앞에서 회칼에 피습을 당하신 분의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큰 충격을 받았을 가족에게도 깊은 위로를 드린다. 그리고 미국 정부가 주저앉는 소의 도축을 완전히 금지하는 입법예고를 하는 데 이바지한 <PD수첩>에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 나는 허물 많은 신앙인의 한 사람이지만,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다음은 이 책에 실린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의 '발문' 전문이다. <편집자>

송기호는, 나의 벗이다
  
나도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알거나 친구를 사귀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을 느낀다. 개인적으로만 보자면, 직장 시절부터 나는 '친구'와 '적', 이렇게 두 부류만으로 주변이 구성된 듯한 삶을 산 것 같다. 현대, 에너지관리공단, 총리실, 이렇게 안정된 직장들에 다니던 시절에도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다. 나는 하극상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의 상사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예의는 갖추었지만 거침없이 얘기를 하는 편이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수많은 적과 아주 약간의 친구들이다. 그리고 대인기피증이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깊은 교류를 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말로 내 마음에 있는 얘기를 하기가 무섭다. 좌파로 살아온 사람들은, 크든 작든 나와 유사한 대인기피증을 삶의 증표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녹색당 창당 운동을 포기한 채 더 이상 활동가가 아니던 시절, 그래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조금씩 가르치고 글을 쓰던 시절을 기억하겠지만, 나는 두 번의 직업 활동가로서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유학 가기 직전,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다음.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또 황당한 정부를 만나서 "이건 도저히 아니다"라고 글을 쓴 걸 보면 나도 곱고 편하게 산 편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스무 살 넘어서 싸운 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는가 보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가슴 한 편에 담고, 되도록이면 명랑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또 웃기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하는 편이다.
  
송기호 변호사는, 그렇게 내가 초록정치연대의 정책실장으로, 직업 활동가로 일종의 정치운동을 하던 시절에 국회 토론회장에서 내 앞의 발제자로 처음 만났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일부러 누가 짠 것은 아닌데 자연스럽게 토론회의 발제자로 여러 번 나서게 되었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정부에서 주관한 토론회에 역시 앞뒤 순서의 발제자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송기호는 한국이라는 땅에서 내가 등을 기대고 쉬는, 거의 유일한 벗이고 동지인 셈이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나는 훨씬 더 많은 법률적 분석까지 떠맡아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차분하게 이것저것 생각해볼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송기호 덕분이다. 그는 유능하고, 진지하고, 꼼꼼하다. 이 세 가지 전부, 내가 갖추고 있지 못한 덕목이다. 나는 대체적으로 무능하고, 장난기와 짓궂음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덜렁덜렁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는 나와는 정반대의 인간형이고, 법학과 경제학 이 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그와 내가 같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식품은 안전해야 한다, 그리고 농업이 살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점이다. 전혀 다른 조건에서, 전혀 다른 학문으로, 그리고 전혀 다른 스타일로 각각 진화해왔지만, 같은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그는 농업이라는 문으로 들어왔고, 나는 생태학이라는 문으로 들어왔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나는 '쌀나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서울 내에서만 살았고,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서울 밖에 나가본 완전 '서울 촌놈'이다.


  
우리 모두는 송기호에게 빚지고 있다

송기호의 눈은 언제나 농업에 가 있는데, 나는 솔직히 농민보다는 논과 밭 그리고 과수원과 같이 소위 '농업 생태계'에 먼저 눈이 가고, 그 후에 농민들을 보는 편이다. 송기호의 눈은, 나와는 달리 농민들을 먼저 보고, 그 후에 농업을 보는 것 같다. 그 차이점은, 우리가 걸어왔던 다른 길만큼이나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생겨난 농산물들이 유통을 거쳐서 소비자에게 넘어가는 식품안전이라는 단계에서, 나와 송기호는 서로 등을 대고 지난 정권을 버텨왔다. 노무현 정권은 한국에서 최초로 '농업 포기 정책'을 공식화시켰고, 그 정권 내내 나와 송기호는 "농업이 뭐 그리 중요하냐?"라는, '타칭 좌파'―한나라당이 그렇게 불렀다―혹은 '자칭 진보 세력'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으며, 그 포위를 끝끝내 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정권이 바뀌었을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빠른 시점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문제가 터지면서 우리 사회는 중요한 변곡점 하나를 넘었다. 그 변곡점의 최정점에 바로 송기호가 서 있었다. 그 유명한 <100분 토론>에서의 미국 농림부 서류의 오역 사건에서부터, 농림부 장관 고시의 오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송기호가 집어낸 것들은 이 우스꽝스러운 공화국의, 기본기도 갖추지 못한 양아치들의 난장판 사건에 대한 거울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전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단단히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믿어라, 그리하면 쇠고기는 안전해질 것이다"라고 외치는 나라에 살고 있었다. 쇠고기는, 어쩌면 다가올 한국의 비극에 대한 예비자, 마치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모래 위에 성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 협상 문헌에 대한 엄밀한 검토는 고사하고, 원문 번역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믿어라, 국민들아!"를 말하는 현실. 이 우울한 현실은 송기호의 손에 의해 하나씩 벗겨져 나갔고, 그 진실이 발가벗고 우리 앞에 현실로 드러났을 때, 내가 협상가로 참여하던 시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인데, 이것은 실수라기보다는 우리나라 행정 자체가 그렇고, 협상도 그렇고, 무엇보다 지금 진행되는 많은 정책들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엄청난 파국 앞에 혼자 서 있던 사나이, 그가 바로 송기호였다. 그가 보여준 현실의 드라마는 위대한 문학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


  
송기호는, 한국의 에이스다
  
한국이 거대한 야구단이라고 한다면, 좀 미안한 얘기지만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혹은 고려대학교 교수님들의 그룹은 2부 리그쯤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학문적으로는 20~30년 전에 은퇴하였지만, 그래도 시민 야구단에서는 강속구를 뽐낼 수 있는, 그런 2부 리그이다. 그렇다면 공무원 집단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한국 야구팀의 에이스는? 류현진이다. 그는 카스트로도 감탄할 정도로, 세계 최강의 쿠바팀에도 '지대로' 통하는 한국 국가대표팀의 에이스다. 정말 감탄스러운 투수이다. 그렇다면 진짜 한국의 에이스는 누구인가? 노벨문학상에 도전하겠다는 시인 고은인가, 아니면 노벨평화상 후보에 거론된 적이 있는 시인 김지하인가? 아니면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주는 엄청난 공로를 세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의 에이스인가? 아닌 듯싶다.
  
제대로 된 연봉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팀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고 있는지, 혹은 관객들이 충분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올해 한국에서 위기의 한국을 구해내고 다음 번 등판을 위해서 숨을 고르고 있는, 그리고 가장 많은 등판을 기록한 투수는 바로 송기호다. <100분 토론>을 비롯한 빅 매치들, 신문을 포함한 매체에 대한 기고, 그리고 실제 만루 위기를 병살타 처리한 깔끔한 명투구를 가장 많이 기록한, 한국의 실질적 에이스는 바로 송기호이다(이에 비하면, 나는 8점차 이상 차이 난 경기에서 패전 처리로나 가끔 등판하는, 꽈배기 변칙 좌완이다.)
  
그런 송기호가 맹활약했던 지난 게임에 대한 복기의 기록을 한국의 독자 여러분들에게 선보인다.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어지간해서는 복기를 하지 않고 "진 것은 잊어버려" 혹은 "다음 게임이 더 중요하지"라고 말하는 좀 나쁜 습관이 있다. 진 게임이나 이긴 게임이나, 어떻게 졌고 어떻게 이겼는지를 잘 복기해서 분석하는 것은 에이스가 되는 투수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습관이다.


  
만약 독자 여러분 중 송기호처럼 이기는 게임을 하고 싶고, 좋은 분석을 하면서 토론에서 절대로 소리 지르지 않고 상대방을 케이오시키는 게임을 하고 싶으신 이가 있다면, 한국의 에이스 송기호의 복기본을 잘 분석해보시기 바란다. 우리가 그의 글을 읽어야 하는 것은, 재미를 위해서나 감동을 위해서나 혹은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이기는 방법을 배우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송기호가 펼쳐 보인 지난 촛불 정국의 분석은 감동스러운 드라마이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흔히 말하듯 "팬들의 성원과 사랑" 덕분이 아니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말하듯 "죽도록 열심히 했"기 때문도 아니다. 조용하지만, 그는 한국 최고의 승부사이고, 또한 최고의 국제 통상 분석가이다. 송기호는 통상 조문과 법적 절차를 분석하지만, 제발 여러분들은 송기호를 분석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팀을 꾸릴 만한 송기호 급의 에이스가 아직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내 리그나 해외 리그나, 전혀 꿀림 없이 게임을 소화할 수 있는 좋은 선발 투수 혹은 좋은 수비수들이나 의미 있는 진루타를 칠 수 있는 선발 선수들이 독자 여러분 중에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명박 시대의 어둠을 딛고 흥미롭고 재밌는 게임을 펼쳐볼 수 있을 것 아닌가?(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88만 원 세대 저자)

08.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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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28 17:33   좋아요 0 | URL
농업보다 농민을 먼저 생각한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그러기가 쉽지 않죠.인류보다 인간 개인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듯이.

이중결합 2008-10-28 20:27   좋아요 0 | URL
'역사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한다'는 비유도 어울릴 것 같습니다.

로쟈 2008-10-28 22:55   좋아요 0 | URL
'송기호 휴머니즘'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난주초에 시사IN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12#). 금융 위기와 함께 불황 국면으로 접어든지라 경제와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정작 한국 대학에는 한국경제를 연구하는 경제학자가 없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기사다. 이유는? 연구업적을 평가받기 위해서는 미국 경제학지에 논문을 실어야 하고 그러자니 주로 그쪽 경제학의 이슈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다들 자기 자리 보전하기도 바쁘다는 얘기다). 경제 호황기라면 으레 그려려니 하겠지만, 사정이 안 좋다 보니 제법 한심하게 보인다. 사실 다른 분야에도 '한국 학문'이 있느냐고 하면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지만서도... 

시사IN(08. 10. 21) 한국 경제학계에 ‘한국경제’ 학자 없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경제학은 그렇게 무력하냐고”(복거일, 10월13일 조선일보 칼럼), “시장 만능을 외치던 그 많은 경제학자들은 다 어디에 숨었나”(이정우, 9월30일 한겨레 칼럼) “배반의 경제학”(김순덕, 10월10일 동아일보 칼럼).

미국발 금융위기로 신뢰를 잃은 것은 투자은행만이 아니다. 사회과학의 꽃이라던 경제학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있다. 왜 오늘날의 경제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느냐며 질타하는 목소리가 보수·진보 모두에서 나온다. 이런 비판은 특히 세계를 주름잡던 미국 경제학계에 대한 실망으로 모아진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 경제학계는 한국 경제학계에 비하면 체면을 세울 만하다. 10월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55)를 선정했다. 폴 크루그먼은 2000년 1월부터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로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해왔다. 이미 2005년에 부동산 거품 붕괴로 인한 미국 경제위기를 예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연일 블로그·인터뷰 등을 통해 미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대폭로> 등 그가 쓴 수많은 대중 경제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작보다 더 베스트셀러가 됐다. 크루그먼은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비판적 지식인’에 가깝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이틀 전 조선일보는 “경제가 대공황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학계에서 무슨 체면으로 누가 노벨상을 받을 것인가, 받은들 그 따가운 눈총은 어떻게 피할 것인가?”라는 칼럼을 게재했지만, 노벨상 위원회는 폴 크루그먼을 선정해 그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있었다.

폴 크루그먼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한국에도 화제가 됐다.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긍정하는 케인지언 학파가 부활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민주당은 크루그먼을 빌려 ‘MB노믹스’를 비판하기도 했다. 크루그먼은 감세 정책과 규제완화 정책을 비판해왔다. 기실 크루그먼이 노벨상을 받은 명목은 ‘신무역이론’ ‘무역이론과 경제지리학의 통합’에 관한 공로다. 부시 비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곱씹어봐야 할 것은 경제학자의 사회적 역할일지도 모른다. 

“한국 현실 경제 연구자, 존중받지 못해”
금융위기에 경제학자가 무기력하고 무능하다는 비난이 높지만, 여전히 미국 경제 담론을 이끄는 것은 경제학자이며 특히 대학 교수들이다. 뉴욕 대학의 루비니 교수(<시사IN> 제54호 참조)가 좋은 예다(*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17). 그는 과거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예측했을 뿐만 아니라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도 정확히 예언한 바 있다. 그는 매일같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쓰고(58쪽 상자 기사 참조) 방송에 출연해 경제 위기 대책을 설파한다.

부시 대통령이 처음 구제금융법안을 의회에 상정했을 때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미국 경제학자 166명이 반대 서명을 했다. 그 짧은 시간에 신속히 서명을 받은 것도 놀랍고 대부분 대학 교수인 것도 눈에 띈다. 미국 정부의 은행 국유화 정책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도 교수들이 주도한다. “공적 관리는 손익계산에 관심을 두지 않으므로 잘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의 방침은 경제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틀렸다”(케이시 멀리건 시카고 대학 교수) “영국처럼 은행  지분을 매입하는 방식이 옳다”(폴 크루그먼)라는 식이다. 

한국 경제학계의 경우, 한국 경제가 가야 할 길이나 위기 탈출구를 제시해 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한국 경제의 현안이 주류 학계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 일간신문 경제부 기자인 ㅇ씨는 요즘 연일 쏟아지는 경제위기 기사를 쓰느라 바쁘다. 그는 “경제 전문가 조언을 구할 때, 대학교수 말보다 차라리 삼성경제연구소를 인용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라고 말한다. 대기업 경제연구소가 대학교수가 해야 할 몫을 대신하는 것이다.

한국인 경제학자 중에 경제 현안을 연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 집단에 관한 연구로 한국 사회 변화에 큰 울림을 준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라든지,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88만원 세대’ 담론을 처음 제기한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공약을 비판했던 이준구 서울대 교수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장하준 교수는 서울에서 9000km 떨어진 영국에서 활동하며 한국 학계에 몸을 담은 적이 없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학자가 한국 경제학자보다 더 자주 인용된다.

김상조 교수는 “미국은 학풍이 다양한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폄하할 수 없다. 한국에도 현실 문제를 연구하는 교수가 꽤 많다. 미국도 폴 크루그먼 같은 비판적 경제학자는 소수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경우는 자신들의 생각과 다를 때 이념적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학자로서의 연구 활동으로 인정하지 않고 ‘색깔론’으로 몰아붙인다.

홍훈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현실을 말하는 경제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학계의 중심에 있거나 이런 내용이 연구나 교육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학 연구와 교육이 한국 경제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경제뿐만 아니라 경제학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사람이 더욱 적다”라고 경제 학계의 풍토를 전했다.



홍훈 교수가 2007년 발표한  논문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변화와 한국학계의 수용(1960 ~2006년)>은 경제학계의 자화상을 뼈아프게 묘사하고 있다. 논문은 말한다. “한국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해외 학계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은 정당화하기 힘들다” “달리 말해, 한국의 경제학은 한국의 경제와 지속적으로 유리되어 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경제 문제에 대한 진정한 전문가로 자처하기 힘들다.” “주요 대학의 이른바 일류 경제학자의 연구일수록 외국 학술지를 지향해 한국 경제의 현실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주요 대학의 이른바 일류 경제학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서울대 교수들이 대표 사례가 될 듯하다.  한국 언론이 가장 인용하기 좋아하는 서울대 경제학 교수진은 어떤 모습일까. 전체 31명 교수 가운데 29명(94%)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이 중에 젊은 교수일수록 그의 논문 목록에서 한국 경제와 관련 있는 단어를 찾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국 경제학계 내에서 한국 고유의 경제 문제, 즉 재벌, 아파트·부동산, 세금 정책 등이 논쟁이 되는 일이 드물다.


 
미국 학술지 논문 게재가 최고 목표

왜 이럴까? 부교수·정교수 승진 등에 필요한 연구 업적 평가의 기준이 해외 SCI급 저널에 실린 논문 횟수이기 때문이다. 국내 학술지보다 미국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3~5배 이상 높은 점수를 받는다. 미국 경제학지에 논문이 실리려면 미국 경제학계의 이슈를 따라가야 한다. 이준구 서울대 교수는 “젊은 교수 처지에서는 한국 경제를 연구하는 것보다  미국 현안에 관한 논문을 쓰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한국 경제를 연구해야 할 동기부여가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드물게 나오는 한국 경제 관련 논문조차 미국적 방법론을 숫자만 바꿔 한국에 대입한 경우가 많다.

폴 크루그먼은 올해 6월 쓴 칼럼에서 한국의 촛불집회에 대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신 여론 가운데 일부는 비합리적인 면이 있지만, 쇠고기 문제는 볼썽사나운 미국 외교에 모욕당했다는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심과  뒤엉켜버렸다. 한국인을 비난하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어느 한국 경제학자가 쓴 미국 쇠고기 칼럼보다 이 짧은  문장이 더 화제가 됐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앞으로 기자들이 한국 경제를 알기 위해 외국 경제학자에게 물어봐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신호철기자)

08. 10. 26.

P.S. 경제 현안과 관련해서는 강단 경제학자들보다 인터넷 시민논객들이 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젠 새삼스럽지 않게 되었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10. 25) 경제학자 뺨치는 ‘인터넷 스타 논객’

금융당국이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에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인터넷에선 경제학자를 뺨치는 시민 논객들이 속속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대표적인 시민 논객은 다음 <아고라>에서 활동하는 ‘미네르바’다. 미네르바는 금융위기가 본격화하기 전인 지난 8월 말 아고라에 산업은행이 인수하려던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부실화를 정확히 예견한 글을 올려 주목을 받았다. 그는 쉬운 경제이론과 통계 등을 적절하게 활용해 정부의 잘못된 경제 예측과 처방, 언론의 부정확한 보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글은 수만 건의 조회를 기록하고, 게시판이나 블로그에 삽시간에 퍼지면서 경제 관련 토론을 위한 ‘필독 항목’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미네르바 신드롬’ ‘미네르바 효과’라는 말까지 떠돌고 있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미네르바는 9월 중순 “10년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며 절필을 선언했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함께 다시 아고라로 돌아와 하루 5개 이상씩의 글을 쏟아내고 있다. 그는 외환시장 대책과 관련해 22일 “최소 500억~ 700억달러 규모의 외부 달러 차입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며“이제 남은 것은 일본 달러 공수뿐”이라고 거침없이 주장했다.

<인터넷 한겨레> 토론방인 <한토마>에서도 스타 논객들이 속속 탄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논객으로 <아고라>에서 활동하던 ‘SDE’, ‘명사십리’와 <한토마> 토종 논객인 ‘삼성해체’ 등이 있다. 거시경제 전망을 주로 하는 ‘SDE’는 “앞으로 지엠, 포드 등 미국 자동차 회사의 부도-유럽 은행의 부도-미국 지방은행의 부도-한국 저축은행·건설회사·캐피탈사 유동성 위기-한국 외환부분 신용 위기 등 9가지 위기가 시차를 두고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삼성해체’는 주로 ‘금융위기에 서민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주제로 글을 쓴다. 그는 최근 <한토마>에 올린 글에서 “조금이라도 여윳돈이 있는 서민이라면 빨리 달러로 바꿔야 한다. 지금 막차라도 타야 하는 이유는 ‘자산보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권유했다.

김상종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시민 논객의 등장은 정부의 경제위기 대책이 건설경기 부양 등 특정기업과 ‘강부자’를 위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며 “시민 논객의 분석이 정부정책보다 더 많은 신뢰를 얻고 있는 이상 ‘미네르바’ 같은 시민 지성은 계속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박종찬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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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26 16:01   좋아요 0 | URL
외환위기 때문에 외국의 핫머니까지 급전으로 가져다 쓴 직후인 1998년 봄 당시의 시사월간지를 보니 외환위기에 대처하지 못한 한국지식인의 죄 운운하는 기사가 있더라구요.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군요.

로쟈 2008-10-26 19:24   좋아요 0 | URL
변한 게 없으니 반복되는 거겠죠...

루쉰P 2008-10-26 16:15   좋아요 0 | URL
정말 문제가 크네요... 어떻게 한국 경제문제에 대해 같은 땅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일까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일까요. 황색 피부, 흰 가면을 쓴 우리나라 경제 교수들이 문제군요. 도대체 한국 경제에 대해 배울려면 누구 책을 봐야 할지 참으로 문제네요. 흠...그렇다면 로쟈님의 추천대로 '아고라'의 미네르바님을 찾아가서 한국 경제의 해답이란 무엇인가를 구도를 해야겠네요. 음하하하

로쟈 2008-10-26 19:25   좋아요 0 | URL
네, 학자들에게 대단한 걸 기대하면 안됩니다...^^;

비로그인 2008-10-26 21:04   좋아요 0 | URL
이 글 담아갈게요.

로쟈 2008-10-26 21:42   좋아요 0 | URL
네, 제목은 수정했습니다...

바보 2008-10-28 09:54   좋아요 0 | URL
저도 이 글 담아갈께요. ㅇㅇ

로쟈 2008-10-28 23:03   좋아요 0 | URL
^^
 

한글날이니만큼 관련기사를 하나 스크랩해놓는다. '한글날 영문학자 도정일을 만나다'가 기사의 컨셉이다(웁스, '컨셉'이라니!). 대부분 지당한 말씀이며 몇 가지 지적은 곱씹어볼 만하다...

한겨레(08. 10. 10) 도정일 “영어 몰입교육은 사고력 부족한 반거충이 만들 뿐”

영문학자인 도정일(67) 경희대 명예교수는 한국인 가운데 ‘서구 계몽주의 지식인’의 전형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평을 듣는다. 지난 7일 그를 만나 모국어에 대한 철학과 최근의 영어교육 논란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9일 한글날이 계기가 됐다. 영문학자와 웬 한국어? 얼핏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이런 이유에서다. 우선 그는 ‘가장 정확하고 유려한 우리 문장을 구사한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모국어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각별하기로 유명하다. 다른 한편으론 이명박 정부의 ‘영어 몰입교육’ 파동으로 우리말을 둘러싼 논의 지형의 한가운데에 영어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학 권위자들께서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도 교수는 조심스러워 했다. 그러나 이 비상한 ‘국어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지혜를 구하는 데 관할구역을 따질 여유가 어디 있을까. ‘영어로 초래된 지금의 혼미 상황에선 영문학자이면서도 모국어로 글을 써 문필가의 명성을 얻은 선생께서, 더 냉철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할 적임자인지 모른다’는 요청에 그가 입을 열었다. 영문학자인 자신에게 모국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서부터 그는 시작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실현 행위 그 자체입니다. 40년 넘게 영문학을 해 왔지만 저에게 ‘제1의 언어’는 한국어입니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체득했고 나이 들어 치매가 와도 망실되지 않을 언어가 한국어니까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도정일의 집’은 한국어인 셈입니다.”

‘광풍’으로까지 불리는 영어교육 이상열기에 대해 그는 거침이 없었다. 몰입교육 같은 섣부른 시도가 ‘반거충이’(무엇을 배우다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를 양산해낼 뿐이라는 쓴소리가 이어졌다. “요즘 대학의 공통된 고민이 이른바 ‘국제화’ 한답시고 경쟁적으로 받아들인 특례 입학생들입니다. 어린 시절 외국에 건너가 살다가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인데, 이들 상당수가 한국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에서도 실용 회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생각하고 개념화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성장기에 하나의 언어에 깊이 몰입해볼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읽고, 쓰고, 사고하고, 표현하는 고등의 언어 활동이 취약한 게 당연하죠. 몰입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교육에 모든 교육자원을 집중시키는 초·중·고등학교의 풍토도 도마에 올랐다. 영어교육도 좋지만 모국어와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인문 교육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지금 초·중·고등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교육청의 지원을 받기 위해 기존의 도서관이나 학생 자치공간에 영어학습 시설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사서도 없는 학교에 한 해 1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원어민 교사를 초빙하겠다는 겁니다. 통탄스런 일입니다.”

영어 광풍의 배후로 그는 지난 10여년 새 우리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시장전체주의’를 지목했다. 그가 볼 때 교육은 시장이 요구하는 ‘맞춤형 인간’을 양성하는 것으로 목적이 변질된 지 오래다. 학교에서 국어보다 영어가, 읽고 생각하는 영어보다 듣고 소통하는 실용 영어가 강조되는 것도 ‘시장의 언어’가 ‘삶의 언어’를 압도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습니다. 영어를 못하면 깡통 차고 지하도에 나앉아야 할 것처럼 협박하는데, 이것을 견뎌낼 간 큰 국민이 얼마나 있겠어요. 공포에 나포된 국민들이 영어라는 ‘생존 복음’에 너 나 없이 매달리는 형국입니다.”

영어 문제에 대처하는 진보진영의 자세에도 일침을 놓았다. “1980년대 ‘반제투쟁’하듯” 해선 안 된다는 충고였다. “영어가 지배적 언어가 된 데는 정치·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영어 자체가 갖는 포용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시대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필요한 법입니다. 영어를 인류의 소통을 가능케 한 공유자산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의 ‘영어론’은 국어학계의 폐쇄성에 대한 지적으로 귀결됐다. “우리말 우리글이 최고라는 자만은 버려야지요. 우리말의 표현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말에는 영어의 룩(look)이나 심(seem)처럼 ‘~인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속된 말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사물의 거죽과 속알맹이가 같을 수 있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비가시적 본질을 구분하는 표현법이 불가피한데도, 이를 무조건 ‘영어식’이라 배척해선 곤란합니다.”

누구보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기로 정평이 난 그였지만, 우리말의 문장구조에 한계를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고백도 들을 수 있었다. 한때 영어의 관계대명사가 가능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논법 구조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학자나 작가 등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우리말이 갖는 표현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을 고민해야지요. 이웃 언어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자기갱신하는 노력을 방기하는 것도 일종의 직무유기입니다.”

이날 도 교수는 책읽기 운동을 위한 협약 체결 문제로 경남 김해를 방문했다 막 상경한 터였다. (그는 독서 활성화와 공공도서관 확충운동을 벌이는 ‘책읽는 사회 만들기’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출장의 피로가 덜 풀렸을 법한데도 한마디 한마디 공들여 풀어놓는 말을 옮기니 곧 글이 되었다.(이세영기자)

08.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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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스 2008-10-10 09:12   좋아요 0 | URL
"서구 계몽주의 지식인의 전형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도정일선생은 이 표현을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8-10-10 22:52   좋아요 0 | URL
'계몽주의'란 말도 스펙트럼이 넓으니까요. '가장 정확하고 유려한 우리 문장을 구사한다'는 평도 인용해놓았기 때문에 '손해'는 아닐 듯싶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0 15:58   좋아요 0 | URL
국어라든가 국사라든가 하는 단어도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이상한 게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다루면 국사인데 한국 근현대사는 국사 근현대사라고 하지 않더러구요.

로쟈 2008-10-10 22:54   좋아요 0 | URL
내부자, 외부자 시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일본에서는 자기들의 국사를 일본사라고 한다지만... 학교에서 '국어'를 배우는 것과 '한국어'를 배우는 건 감이 좀 다른데, 가령 '국어'가 필수과목이라면 '한국어'는 선택과목 아닐까요?^^;
 

내일자 한겨레에서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릴레이 기고를 스크랩해놓는다.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 사태를 신자유주의의 '거픔'이 터진 것으로 규정하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얻어야 하는 교훈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는 칼럼이다. 경제전문가들조차도 이번 사태의 끝을 가늠할 수 없다고 하니(당연히 임기응변식 처방 외에 마땅한 대책도 제시되지 않을 터이다) 두고볼 밖에.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예언대로 본격적인 '이행기' 모드로 진입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겨레(08. 10. 01) [특별 릴레이 기고] 신자유주의 ‘거품’이 터졌다

미국 금융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7000억달러의 공적자금 투입 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됐다. 최악의 금융 위기가 크나큰 경제위기로 확대됐다. 경제는 이제 막 길고 캄캄한 터널로 진입했다. 언제 어떻게 그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확실한 것은 터널 속의 세월은 길고 추울 것이며, 그 출구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금융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거품에 있었다. 오랫동안 주식과 부동산에 조성된 거품이 지난 8월부터 계속 터지고 있다. 거품이 터짐으로써, 개인과 금융기관이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개인소비가 줄고 기업의 수익이 격감했다. 약 일주일 동안 미국전역에서 회사채 발행이 한 건도 없는 상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어떤 미국 국회의원의 말을 빌린다면, 미국경제는 곧 심장의 고동이 멈춰질 지경이었다. 우선 심장마비는 막아야 하기 때문에, 7000억달러 구제금융 법안이 나온 것이다.


미국은 원래, 금융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나라였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 흥청망청하는 국민이 아니다. 그런 미국에 왜 이런 거품이 생겼는가. 그 이유는 1980년대 말부터 경제정책의 중점이 ‘메인스트리트’로부터 ‘월스트리트’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월가출신 인물이 계속 중앙은행 총재 자리를 지켰다. 재무장관도 월가 출신이 많았다. 경제정책의 기조는 월가의 이익이 되도록, 가급적 유동성을 많이 공급하여 자산시장을 부추겼다. 종래 경제정책의 중점이었던 산업구조, 국제수지, 사회보장, 서민생활 등은 사각지대로 물러났다.

월가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금융에 대한 기본을 망각했다. 원래 금융업이란 남의 돈을 가지고 차질없이 운영해야 하는 기업이다. 때문에 좋은 금융가는 보수적이어야 하고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월가 사람들은 너무 자유롭게 자기 이익만 챙겼다. 그러다가 이번의 덜컥수에 걸렸다. 그린스펀 전 연준의장은 최근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금융에 작동해야 경제가 잘 된다는 말을 했다. 19년이나 중앙은행 총재직을 지킨 사람이 이런 글을 쓰다니,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였다. 아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소련이 망한 후로 1990년대 미국에는 장밋빛 도취감이 감돌았다. 이제, 전쟁과 혼란의 역사는 끝났다, 자유방임을 하면 다 잘 된다,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 경상수지 적자 따위는 문제 없다, 기업은 주가를 올리면 된다, 이런 식이었다. 자유화, 개방화, 민영화, 작은 정부면 그만이라는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 확산됐다. 남미, 아시아, 러시아 등의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월가의 금융꾼들은 많은 이익을 챙겼다.

아! 그러나, 인간의 시야는 짧은데 비해 세상은 빨리 변한다. 환락이 지나치면, 비애가 온다. 미국경제가 부메랑 효과를 맞았다. 개도국이나 맞아야 할 ‘국제통화기금(IMF) 폭탄’을 미국이 맞은 셈이다.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했다. 5대 투자은행이 거의 다 몰락했다.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 에이아이지(AIG)가 ‘구제’를 받았다.

문제는 장래이다.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다. ‘구’자유주의의 난맥을 처리한 1930년대 ‘뉴딜’식 정책이 나올 것인가. 그 가능성은 원래는 없었다고 나는 보았지만, 이제는 모종의 ‘뉴’ 뉴딜이 불가피해진 것도 같다. ‘신’자유주의는, 많은 자유주의자들의 뜻과는 달리 숨통이 막혀버렸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가지고는 경제의 실물부문의 문제들, 이를테면, 국내총생산(GDP)의 6%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 0%의 개인 저축, 70년대 이후로 실질적인 증가 없는 근로자 소득, 의료혜택 없는 4700만 미국인, 깊어가는 양극화 등의 현실을 바로잡을 수 없다.

7000억달러는 미국 당국이 가지는 마지막 카드였다. 그것은 사실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미봉책으로 붕괴된 시스템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사실 7000억 달러를 가지고 충분할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의회도 모르고 있었다. 매케인도 오바마도 이 카드에 찬성했다. 앞으로의 경제에 대한 아무런 의견도 그들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영·미의 금융모델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계를 위해 우선 미국이 바른 길을 찾기 바란다. 심리적인 공황을 벗어나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심기일전, 상상력을 발휘하기 바란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각론은 아직 논할 단계가 아니다. 총론은 명백하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못 쓴다. 미국도 이 과정을 졸업했다. 둘째, 나라가 잘되자면,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이 잘돼 있어야 한다. 민간이 정부를 대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셋째,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넷째, 금융가는 용감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이노베이션을 해서도 안 된다.(조순/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 부총리)

08.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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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10-01 10:00   좋아요 0 | URL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이 사람은 천상 학자인데 왜 정치판에 뛰어들어 그 험한 꼴들을 봤나 싶은 거예요. '원로'만이 쓸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분석이 참 좋네요. 고맙습니다.

로쟈 2008-10-01 20:27   좋아요 0 | URL
인간 자체가 정치적 동물이라면 '정치판'이 따로 있는 건 아닐 테지요. 한국어의 '정치'란 그냥 권모술수의 동의어가 돼버렸지만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1 22:26   좋아요 0 | URL
그린스펀도 아담 스미스를 중학교 사회교과서로만 배웠나 보군요.

로쟈 2008-10-01 22:34   좋아요 0 | URL
저금리 기조 때문에 부실 대출이 급증했다고 하니까 그린스펀도 면책 대상은 아니죠...

노이에자이트 2008-10-01 23:13   좋아요 0 | URL
미국 플로리다 어느 동네는 완전히 유령마을이 되었더군요.빈 집에 차압딱지 붙은 집 투성이...그나마 사람사는 집도 이사갈 준비를 하는데...이러려고 소련을 무너뜨렸나요?

로쟈 2008-10-02 22:22   좋아요 0 | URL
미국도 무너지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