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미국의 저명한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의 <영화의 내레이션1>(시각과언어, 2007)이 번역돼 나왔다. 원저는 'Narration in the Fiction Film'(1985)이고, 380여쪽 분량이다. 국역본은 분량상 두 권으로 나뉘어 출간된다고 하며 그 첫권이 얼마전 서점에 깔린 듯하다.

나는 주중에 교보에서 발견하고 바로 계산대로 갔다(러시아 영화이론서를 번역하고 있는 중이라 영화학 서적들을 챙겨두기 때문이다. 번역서는 짐작에 2009년에 나올 듯하다). '전문서'로 분류된 탓인지 이 책에 대해서는 관련리뷰들이 뜨지 않는다. '보드웰'을 검색해보다가 몇 년전 방한시에 홍상수 감독과 나눈 대담을 다시 읽게 되었다('씨네21'의 지면에서 당시에 읽었던 것 같다). 눈에 띈 김에 스크랩해놓는다(이창동, 허진호 감독들의 신작을 올해는 기대하게 되지만 내게 홍상수의 영화들은 언제나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다).

씨네21(02. 12.14) 보드웰, 홍상수를 만나다

<영화예술> <세계 영화사> <영화스타일의 역사> 등 영화 연구 입문서를 비롯한 다양한 저서를 내놓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교수가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씨네21>은 모종의 ‘공작’에 착수했다. 그것은 보드웰 교수와 홍상수 감독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었다. 영화의 언어구조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온 ‘구조주의자’ 보드웰 교수가 남달리 눈여겨본 영화인 목록에 홍상수 감독이 자리해 있다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홍상수 감독의 내러티브와 비주얼이 보여주는 미학적 특성이 허우샤오시엔과 차이밍량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미니멀리즘 유파에 속해 있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개성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계 영화사>의 개정판과 그의 새로운 저서에 이러한 연구내용을 담아낸 바 있다. 지난 9월 공항 검색 강화로 비행기를 놓쳐 USC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불참한 보드웰 교수가 발표하려던 주제 또한 “홍상수: 아시아의 미니멀리즘을 넘어서”였다. 세밀한 분석가로 이름난 세계적인 영화학자, 그로부터 ‘사랑의 메스’를 받은 감독은, 따라서 늦게나마 서로 만나야 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부산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 11월17일,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도 강연이 예정돼 있던 보드웰 교수, 그리고 뉴커런츠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은 홍상수 감독을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셨다. 마침 이들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고, 이 사실을 먼저 알았던 보드웰 교수가 자신의 새 저서 <세계 영화사> 개정판을 홍 감독 방에 선물로 남긴 뒤였다. 이에 홍상수 감독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긴 두권짜리 <화인열전>을 답례 선물로 준비해 들고 나타났다. 그는 보드웰 교수에게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다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펼쳐 보여주며, 영화의 영감, 그 원천에 대한 힌트를 흘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 시간 남짓 얼굴을 마주한 이들은 엄청난 속도와 밀도로, 영화 만들기와 영화 분석에 대한 속깊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보드웰 | 어제 강연에서 나는 ‘아시안 미니멀리즘’을 이야기했다. 롱테이크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이뤄진 어떤 미학적 경향은 아시아영화에서 매우 보편화돼 있다.당신 영화의 미니멀리즘적인 특성으로 <오! 수정>의 무대화 방식을 예로 들어보면, 한 여자와 두 남자가 함께 앉아 술 마시는 장면이 있다.재훈이 자리를 뜬 다음 수정이 그 자리로 옮겨 앉고 나서, 옆에 있던 두 남녀가 화면의 전면에 자리잡게 되는 상황부터가 흥미롭다. 그 남자와 여자는 메인 캐릭터들의 메아리처럼 그들의 행동을 모방해 보이고 있다.영수가 수정에게 술 마시기를 강권하고 있을 때 앞에 앉은 여자가 코냑병을 기울인다.난 늘 궁금했다.이런 장면을 구상할 때 사전에 얼마나 계획하고 또 얼마나 우연에 의존하는지.

홍상수 | 신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몇개는 촬영 전에 이미 결정되고 나머지는 촬영 중에 현장에서 만들어진다.그리고 그렇게 의식적으로 선택된 요소와는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촬영 중에 만들어져 영화 속에서 어떤 일관성을 갖고 존재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촬영 직후에 모니터링과 편집 중에 발견하게 되고,그때 그곳에 놔두느냐 아니면 버리느냐, 하는 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이런 무의식적으로 컨트롤되는 요소들이 신 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은 언제나 내게 약간은 신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그것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우연보다 훨씬 많은 우연의 중첩과 깊은 저층에서 어떤 목적을 가진 힘이 요소들간의 연결을 의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현상이다. 어쩌면 이런 요소들이 의식적으로 집어넣는 요소들보다 내가 더 비밀스럽게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특히 배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요소들은 가장 가치있게 받아들여진다.

보드웰 | 숏을 어떤 순서로 구성하는지도 궁금하다.배우들의 위치를 정한 뒤에 카메라 포지션을 정하는 것인가, 아님 카메라 포지션을 정한 다음에 배우들의 위치를 정하는 것인가.

홍상수 | 카메라 포지션을 먼저 정하는 편이다.그런 다음에 연출부들이나 스탭들을 대역으로 해서 정확한 움직임을 결정한다.배우들은 다른 곳에서 리허설을 거의 마치고 마지막 순간에 카메라 앞으로 데리고 나온다.배우들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는 이 테이크가 단 한번의 테이크라는 느낌을 갖도록 최대한 배려하려고 한다.

보드웰 | 그러려면 테이크를 많이 가진 않겠다.두세 테이크 정도.

홍상수 | 일반적으로 서너번 정도의 테이크를 가고, 어떤 경우는 열번 넘게도 가는 것 같다.연기의 선도는 테이크가 갈수록 당연히 떨어진다.그러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다른 요소들, 꼭 타이밍이 맞아야만 맛이 나는 요소들, 연기의 신선도와 상관없는 이런 요소들 때문에 테이크가 많아지는 경우가 꽤 많다.

보드웰 | 차이밍량이나 허우샤오시엔처럼 당신과 비슷한 감독들의 경우, 모두가 작은 디테일에 충실한 것 같다.이런 방식의 장점은 신을 리얼타임으로 전개해 나간다는 것인데, 그러고는 배우의 작은 제스처와 사물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이야기를 채워나간다.<강원도의 힘>의 금붕어 장면이나 서로 술을 따라주는 장면이 그렇다.당신은 캐릭터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디테일을 풍부하게 발전시켜 나가는데, 그런 부분들은 아까 말한 리허설의 연장과도 같은 촬영 방식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인가.

홍상수 | 영화 만들기의 전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작은 발견들이 이루어지고, 그것들이 계속 전체라는 구조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

보드웰 | 당신은 배우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카메라를 고정해놓고 촬영하는 경우가 많다.이런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들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세밀히 관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미국영화, 심지어 유럽영화를 둘러봐도, 그렇게 배우들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기다려줄 만큼의 인내심이 엿보이는 예는 없다.

홍상수 | 한신에 10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그중 적어도 3∼4가지는 모든 관객이 관람 중에 꼭 알아차려야 하는 요소일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이 누구냐, 그 한 관객의 그 순간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도 그런 관객의 의식의 필터를 피해서 스며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은 3∼4가지보다 많은 요소들이 다수의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드웰 | 맞는 얘기다.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감독들은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중요한 포인트는 명시하는 동시에 일부는 이해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그렇지 못할 작은 디테일들을 함께 배치한다.내가 당신의 영화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서너번씩 반복해 보길 즐기는 이유는 처음 볼 때 모르던 것들이 다시 볼 때는 보이기 때문이다.나는 이것이 시야를 넓게 잡은 화면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숏 속에 많은 것들을 담아내 단번에 볼 수 없는 요소들도 다시 보면 보이게 하는 그런 장치 말이다.

보드웰 | 당신의 영화는 많은 요소들로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매우 생략적이기도 하다.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부 보여주지 않으면서, 드라마틱 포인트를 넌지시 알려주는 식이다.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이런 갭을 채워주고 있다고 생각한다.최근의 아시아영화를 보면 미니멀리즘적 스타일로 접근하면서도 기본적인 것들을 채우지 않는다.당신 영화에서 보이는 것 같은 조밀함은 없다.

홍상수 | 언뜻 보면 단순한 이야기이고 어떻게 보면 단순한 상황 속에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중첩되고, 그런 요소들이 시간상의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서 발견한 영화의 형태였던 것 같다. 맨 처음 영화를 만들 때 첫 촬영날부터 이런 식의 형태가 마치 내 속에 오래 존재했던 것처럼 나의 모든 영화적 결정들을 지배해왔다.

보드웰 | 영화학교 출신인 걸로 알고 있는데, 학교에서 콘티 그리는 법이나 스토리보드 작성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나.그리고 학교에서 만든 습작들은 어떤가. 장편영화와 유사한가.

홍상수 | 학교에서 실험영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스토리보드 같은 건 만들어본 적이 없다. (웃음) 2편인가 장편을 만들고 나서, 학교 때 만든 습작들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장편에서 시도했던 거의 모든 것이 이미 그 단편들 속에 존재했다는 걸 알고 무척 놀랐다.

보드웰 | 그 작품들을 DVD에 넣을 생각은 없는지.

홍상수 |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다.(웃음)

보드웰 | 한국에 돌아와서 장편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홍상수 | 돌아왔을 때 나는 일단 생활을 위한 돈을 벌고 여유가 생기면 16mm 카메라를 사고, 그래서 최소한의 경비를 쓰는 단출한 독립적 형태로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4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그때 갑자기 충무로 안이건 밖이건 힘들 테니 일단 충무로쪽부터 시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영화사를 찾아갔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인터랙티브’하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관객은 스토리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주어진 요소들을 통해 ‘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게이머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런 효과는 다른 아시아영화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다.당신이 이런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절한 모더니스트인 것 같다. 표면적인 장치들이 거대한 전체 구조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둘 사이의 밸런스가 기막히다. ”

보드웰 | 매우 인상적인 데뷔였다.내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본 것이 96년 홍콩영화제에서였을 거다.그러니까 그뒤로 2년에 한편씩 작품을 만들어온 셈인데, 최근 <생활의 발견>을 보고 좀 놀랐다. 놀림당한 기분이랄까. (웃음) 이전 세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어떤 트릭 같은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그런데 이 영화는 뭐랄까, 소설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홍상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 교차 시점이 동원된 지점은 호수에서 오리배 타면서 라이터 빌리던 남자와 골목길에서 다시 마주치는 장면 정도인 것 같다.나머지 부분에선 다중 시점을 동원하진 않았다.이전 세 작품에서 당신은 다중 시점을 동원했고 시점의 변화 형태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늘 궁금했는데, 당신은 왜 그런 방식에 관심을 갖는가.

홍상수 | 내게는 어떤 상황이나 아주 구체적인 대사나 신이 먼저 떠오르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영화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의 과정이 뒤따랐다. 그건 보통의 형태나 논리로는 끼워넣어지지 않는 것들이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형태가 만들어진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형태가 먼저 내 속에 존재해 있었고, 그런 형태가 그런 상황이나 대사나 신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생활의 발견>에서는 그전의 영화 속에서 구조가 하던 기능을 인물 행위 속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서, 그러니까 반복과 모방의 모티브를 통해서 나타내려고 했다.

보드웰 | 요즘 아시아영화들은 지나치게 생략적이라 때론 그 스토리가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다. 드라마의 단계를 무시하고, 캐릭터의 백그라운드에 침묵하며, 개개의 에피소드가 자기충족적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내러티브의 역할이 적다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인터랙티브’하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웃음) 관객은 스토리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주어진 요소들을 통해 ‘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게이머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런 효과는 다른 아시아영화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다.당신이 이런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절한 모더니스트인 것 같다. 표면적인 장치들이 거대한 전체 구조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둘 사이의 밸런스가 기막히다. 개개의 신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찾아내게 할 뿐 아니라, 신과 신 사이의 연결점도 생각하게 한다. 이런 식의 영화 만들기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매우 신선하다. 그런데 혹시 <생활의 발견>을 만들 때 관객이 당신의 전작들을 다 봤을 거라는 가정을 했나.

홍상수 | 그런 가정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는다. 매번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내게는 다른 종류의 동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주 막연한 영화에 대한 느낌과 구체적인 형식에 대한 실험 욕구 같은 것이다. 인물 전반에 대한 느낌도 나이가 들수록 천천히 변해가는 것 같다. 전작보다 가벼운 느낌을 생각했던 것 같고, 좀전에 말한 구성의 기능을 모티브화한다는 것 정도가 처음에 있었던 것 같다.

보드웰 | 당신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캐릭터들이 미디어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남자 주인공은 영화배우이고, <오! 수정>의 인물들은 TV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나는 이것이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 영화 만들기의 자기 반영적 작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홍상수 | 지금까지는,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공간이건 상황이건 직업이건 간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선택한 것 같다. 그것은 영화를 만들면서 해야 하는 수많은 결정들이 어떻게 잘못돼 갈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익숙함이 판단에 어떤 직감적 레퍼런스로 존재하길 바랐기 때문인 것 같다.

보드웰 | 혹시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옛날 문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역사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아님 다른 장르영화라도.

홍상수 | 많은 다른 가능성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지금까지 내 안의 영화적 욕망은 두 가지로 나뉜다.한쪽 욕망은 지금까지 해온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어떤 정수에 도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머티리얼(material)이나 틀 속에 나를 집어넣고 어떤 것이 나올까를 보고 싶은 욕망이다.이 두 욕망은 계속해서 공존해왔다.

보드웰 | 당신 세대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 다른 영화를 참조하거나 언급하는 경향들이 있다. 그런데 당신 영화는 그렇지 않다.시네필적인 요소나 분위기가 없다고 할까.

홍상수 |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 중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영화는 거의 없는 것 같다.내가 대가들로부터 따라하고 싶고 실제로 배웠으면 하는 것은 그들의 밸런스 감각이고, 어떤 최선의 의미의 진정성이고, 자신의 삶과 영화, 그리고 영화 작업의 현실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었던 것 같다.대가의 영화에서 어느 부분을 선호하게 되는 건, 거기서 바로 그런 능력을 확인했거나 아니면 내 속에 이미 있는 어떤 경향을 표현해내는 훌륭한 예가 되었기 때문인데, 그런 선호가 나를 틀로서 기억으로서 억압하게 하지는 않았다.

보드웰 |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팜므파탈>을 보면, 자신의 영화를 비롯한 다른 영화에 대한 인용으로 가득하다.흥미롭긴 하지만, 섞어놓기 게임 같다고나 할까. 다른 영화를 인용하지만 정작 자기 이야기가 없는 영화들이, 이젠 지겹다.당신이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식 영화구조와 보드웰식 영화 분석 ‥‥‥‥‥‥‥‥‥‥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 중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영화는 거의 없는 것 같다.내가 대가들로부터 따라하고 싶고 실제로 배웠으면 하는 것은 그들의 밸런스 감각이고, 어떤 최선의 의미의 진정성이고, 자신의 삶과 영화, 그리고 영화 작업의 현실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었던 것 같다.”

홍상수 | 내 영화 속의 여러 요소 중 특히 집중하는 요소들이 있고, 다른 요소들은 따라오게만 하는 식인데, 그런 다른 요소들이 어떤 때는 집중해온 요소들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그런 변화가 일어날 때 가장 큰 만족감을 느낀다.나는 모르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 같고, 호기심만이 진정한 진정성의 근거라고 생각한다.나는 영화작업의 과정에서 많은 것을 모른 채 시작하고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보드웰 | 사람들은 일정 부분은 의식적으로, 또 일정 부분은 직관을 통해 영화를 만든다.계획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섞여 있게 마련이고, 이들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이런 것들이 결국엔 영화‘구조’라는 결과물로 나타난다.무엇이 계획된 바고 무엇이 우연한 결과인지 정확히 가를 순 없겠지만, 내가 영화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서 관객에게 매우 강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홍상수 |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건 그건 결국 나의 선택인 것이다.그것이 계획을 통해서 일어났건 발견을 통해서 일어났건.그리고 그런 두 종류의 선택이 내 영화의 두 동력을 이루는 것 같다.

보드웰 | 영화를 컨트롤하는 일은 꽤 다층적이다.이거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을 끊임없이 마주치게 된다.그 선택의 결과가 풍부한 구조로 형상화되고 분석할 수 있는 것이 된다.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다고 해도, 우연히 얻은 효과라고 해도, 어쨌든 자의에 의해 선택됐고 영화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홍상수 | 어떤 영화감독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내가 영화를 만들기 전에 모든 걸 계획하고 준비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더이상 영화를 만들고 싶어지지 않을 것 같다.

보드웰 | 흥미로운 생각이다. 히치콕은 스크립트와 스토리보드를 준비하는 것이 한편의 영화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멍청한 배우들이 대사를 버벅거리고 카메라가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촬영 현장이 지겨워진다고 말하곤 했다.그는 완벽한 통제를 원했고 그런 욕망을 과장한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당신 생각에 동의한다.많은 영화감독들이 영화 만드는 과정을 ‘계획’은 물론 ‘발견’에도 비유한다.

홍상수 | 그 두 단어를 좋아한다.나는 영화 만들기의 모든 단계에서 ‘과정’을 믿고, ‘발견’을 믿는다.

보드웰 | <오! 수정>을 흑백으로 찍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홍상수 | 무엇보다 내가 흑백 시절의 고전영화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꼭 한번은 흑백을 찍고 싶었고, 촬영 시간대인 겨울과 흑백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또 다른 이유는 흑백이라는, 컬러보다 조금 더 단순한 자극체 속에서 영화 속에서 필요로 하는 작은 디테일간의 비교가 좀더 쉽게 이루어졌으면 했다.

보드웰 | 당신의 영화를 보면 매번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는 네 사람의 시점을 서로 다르게 교차시키고 있고, <강원도의 힘>에서는 두 사람의 시점으로 전개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는 점에서 좀더 복잡한 시도를 하고 있다.<오! 수정>은 또 다르다. 두 사람이 겪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표현해낸 것이다.한 버전은 마일드하게 또 다른 버전은 터프하게 담아냈는데, 관객은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워진다.양립 불가능한 신을 통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 저의는 무엇이었나.

홍상수 | 그런 혼란을 통해서 관객을 매혹시키는 동시에 그 혼란이 바로 영화가 중심으로 삼은 질문을 관객에게 체험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드웰 | 경이로운 시도라고 생각한다.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혹시 릴을 잘못 끼운 건 아닌지, 아까 제대로 못 본 것인지, 못 볼 걸 본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둘 중 어느 것이 맞는 버전이라고 단정하지 않은 것 또한 신선한 시도였다.40년대 미국영화를 보면 이른바 착각을 유도하는 플래시백이 유행했었다.플래시백을 두어번 동원하는데, 대개 나중 버전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장치였다.유명한 예로 <크로스 파이어>를 들 수 있다.살인 용의자의 증언에 따라 상황이 재연되고 나서 같은 상황을 다른 시점으로 다시 보여주는데, 이전과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라쇼몽>도 마찬가지다.플래시백이 동원될 때마다 이전 버전을 수정하는 경향이 있고, 결국엔 마지막 버전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곤 하는 것이다.당신의 영화에선 플래시백이 아니라 시점의 교차라고 해야 맞겠지만 말이다.

홍상수 |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 상황에 따라그 사람의 욕망에 따라 변질되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따라서 의문을 남기는 것이어야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정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보드웰 | <롤라 런>의 경우는 서로 다른 미래 상황들을 나열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SF적이라고 볼 수 있다.그 작품에선 앞의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버전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에피소드간의 상관관계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반면 당신의 영화는 두 상황이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모호한 느낌을 준다.그런 의미에서 매우 소설적이라고 느껴지는데, 혹시 문학 작품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나.

홍상수 | 영화만큼이나 문학과 미술 작품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문학이나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많이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는 것 같다.

보드웰 | 최근에 롱테이크를 즐겨 쓰고 화면의 심도를 중요시하는 감독들에 대한 연구서를 집필했다.루이 푀이야드, 미조구치 겐지, 테오 앙겔로풀로스, 허우샤오시엔 등이 주된 연구 대상이다.당신도 해당되는데, 첫 번째 챕터에서 <오! 수정>의 화면 구성을 분석했고, 마지막 챕터에서 <생활의 발견>에 대해 썼다.다른 유럽 감독들과 비교해 보이기도 했다. 오타르 요셀리아니(<월요일 아침>) 같은 감독.요셀리아니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건 유감이다.그 역시 롱테이크를 좋아하고 독특한 코미디를 구사한다.캐릭터도 당신 맘에 들 거다.만날 술 마시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웃음)사회의 낙오자들이랄까.그를 비롯한 몇몇 유럽 감독들을 당신과 비교해봤는데, 모두 느리고 사려 깊고 심미적인 영화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이 저서는 말하자면, 최근의 영화들이 무작정 컷 수를 늘려가고 있는 데 대한 저항인 셈이다. 당신도 당분간은 갑자기 컷 수를 엄청나게 늘린다든지 하는 변화는 시도하지 않길 바란다. (웃음) 당신의 영화를 언급할 수 있어서 기뻤다.특히 나는 <오! 수정>의 먹는 신을 언급했는데, 당신 영화엔 특히 먹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그것은 다른 아시아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허우샤오시엔도 그렇고, 홍콩영화를 봐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만, 감독 개인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재미난 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예다.그의 영화엔 먹고 마시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그건 그가 그런 장면들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란다.<하나비>에서 사내의 눈에 젓가락을 꽂는 장면은, 먹고 마시는 장면에 대한 혐오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웃음)세상엔 두 종류의 감독이 있는 것 같다.오즈나 브레송처럼 비슷한 걸 시도하면서 그 안에서 정련의 과정을 거치는 쪽과 오시마 나기사처럼 매번 전혀 다른 작품을 내놓는 쪽.당신은 어느 쪽을 지향한다고 생각하나.

홍상수 | 막연하게 느끼는 것은 한시적으로는 당신이 말한 오즈 식의 파고듦과 정련을 해나갈 것 같다.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만든 틀이라고 생각드는 것이 억압적으로 작용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그런 경우를 사실 많이 상상하곤 한다.서서히, 그렇지만 같은 강도를 가진 움직임으로 변해나가고 싶다.

보드웰 | 오즈는 닫힌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영화를 다듬었지만, 서서히 벗어나는 것 역시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아주 좋은 생각이다.

07. 04. 21.

P.S. 번역돼 나온 보드웰의 책을 나는 모두 갖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영화의 내레이션> 외에도 몇 권의 책이 더 번역/소개됨 직하다.

그 중에서도 현대 영화에서의 이야기와 스타일을 다룬 <헐리우드가 말하는 방법(The Way Hollywood Tells It)>(2006)이 가장 최신작이면서 가장 흥미를 끄는 책이다(<제리 맥과이어>의 한 장면이 표지로 쓰였군). 번역을 기다리느니 그냥 원서를 읽는 게 더 빠른 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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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영화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최근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영화 <우아한 세계>에 대한 영화평론가 오동진씨의 리뷰이다. 이미 기대 이상의 '물건'이라는 평판이 자자한 이 영화는 <연애의 목적>(2005)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한재림 감독의 두번째 영화이다. 데뷔작으로 사고 친 감독들의 경우 흔히 '두번째 영화 징크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한감독의 경우엔 예외인 듯하고 여러 인터뷰 기사들을 보건대 앞으로 더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필름2.0'에서 한 평자는 "한재림에게서 홍상수를 봤다"고 했는데, 왠지 '장르 영화의 홍상수'가 될 거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예감은 그렇다. 요즘 영화 <300>이 중년 남성 관객들로 만원사례라고도 한다. 나는 그 '근육질적인 세계'나 소위 '우아한 세계'의 이면을 이 영화가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환상의 횡단' 같은 것 말이다(문득, 동시대 문학이 이런 몫을 해주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여러 리뷰들을 읽어봤지만 아래의 기사를 옮겨오는 건 '짧아서'이다.

문화일보(07. 04. 10) 조폭이나 화이트칼라들이나 약육강식에 휘둘리는 家長들

명백하게, 미국의 인기 TV시리즈 ‘소프라노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는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사실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거나 아예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소프나노스'를 나는 본 적이 없다. 하니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들어갈 때는 ‘소프라노스’였으나 나올 때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됐다. 모방과 창조는 종이 한 장 차이란 얘기는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우아한 세계’는 그 사이의 얇은 막을 건너옴으로써 자칫 그렇고 그런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작품을 근래에 나온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게 했다.



‘소프라노스’처럼 ‘우아한 세계’ 역시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꿈꾸는 한 조직폭력배 중간 보스의 좌충우돌 삶을 그린다. 중산층 가장과 조폭이라는 직업이 상충되듯이 영화의 이야기는 안과 밖이 사뭇 다르다. 바깥의 이야기는 이렇다. 들개파의 부두목급 중간 보스 강인구(송강호)는 얼마 전 수백억원의 이권이 걸린 건축 사업권을 가로채는 데 성공한다. 이 일로 그는 보스 노 회장(최일화)에게 다시 한번 두터운 신임을 얻지만 조직 내 또 다른 중간 보스이자 노 회장의 친동생인 노 상무(윤제문)로부터 심각한 견제를 받게 된다. 그런 와중에 인구는 오랜 고향친구이자 상대편 조직인 자갈치파의 부두목 현수(오달수)로부터 사업권을 돌려달라는 압력을 받는다.

이 같은 바깥이야기와는 달리 인구의 집안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축으로 달린다. 집밖에서의 생활에는 살벌한 회칼과 각목, 쇠파이프가 난무하지만 일단 집안으로 들어오면 여타의 중년 가장과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인구는 자신의 직업적 콤플렉스 때문에 보통의 가장들보다 더 주눅든 생활을 한다. 아이는 조폭인 아버지가 확 죽어버렸으면 하는 데다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 온 아내 미령(박지영)은 그에게 줄곧 이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몸에 손도 대지 말라고 하고 그러면 그는 투덜투덜 옷장에서 여분의 이불을 꺼내들고 마루로 나가기 일쑤다. 바깥에서도 칼 맞을 일 투성이지만 안에서 아내와 딸아이에게 맞는 마음의 칼이 그를 더 아프게 한다.



조폭영화(갱스터 영화)와 스크루볼 코미디형의 가족드라마를 뒤섞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사실 우리 사회의 중층적 모순을, 한 남자의 우울하고 우스꽝스러운 삶을 통해 보여주려는 일종의 리얼리티 드라마다. 영화는 특히 우리의 사회체제 자체가 가족의 해체를 유도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드러내려 애쓴다. 주인공 인구가 불안정한 자신의 직업을 생각해 스스로 기러기 아빠의 삶을 선택하는 건 그 때문이다. 인구가 몸담고 있는 조폭의 세계는 우리 사회 자체를 은유하며 영화에서 ‘조폭세계=사회’는 그를 자꾸 궁지에 몰아넣는다.

또 다른 중간보스 노 상무가, 새로 따 낸 이권의 일부를 떡고물로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자 인구는 이렇게 얘기한다. “거 알잖아. 회장님 드리고, 캐나다에 학비보내고, (조직) 애들한테 좀 주고, 그러면 나도 남는 게 거의 없다는 거. 알면서 왜 그래?” 조폭의 삶이든, 시장통 날품팔이의 삶이든, 아니면 고급스러운 척 유세를 떠는 화이트칼라들의 삶이든, 알고 보면 그 원칙에는 큰 차이가 없다. 위의 놈한테 떼이고, 아랫놈들한테 떼이고, 자식과 마누라한테 떼이고 나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남는 것이 없는 법이다. 극단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가장의 삶은 피곤하다.



영화는 주인공 인구가 조직에서도 살아남고 동시에 집에서도 인정받는 가장이 되는 식의 상투적인 전개와 결론을 거부한다. 송강호의 독특한 난센스 유머감각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는 더 진실되게 느껴진다. ‘우아한 세계’는 그저그런 상업영화가 아니다. 도덕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올바른 리얼리즘영화라는 평가가 훨씬 더 어울리는 작품이다.(영화평론가 오동진)

07.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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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4-1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기대 이상이라고 하니, 더 기대 ^^

로쟈 2007-04-1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체의 와중에도 좋은 영화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대견하기도 합니다...

hikrad 2007-04-1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밤에 산책을 하는데 제 앞에서 건장한 남자가 갓난 아이를 안고 부인과 다정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핸드폰 소리을 듣게 되었는 데 이 남자가 조폭아니면 양아치 였는지 온갖 쌍욕으로 상대방을 협박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이에게 까꿍까꿍하더라구요.

순간 느꼈던 공포스러움이란....


로쟈 2007-04-1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세계'의 속을 들여다보신 셈이네요.^^;

마늘빵 2007-04-11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세계 봤는데, 오 송강호가 영화를 제대로 빛나게 했더군요.

나비80 2007-04-1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곧 보려합니다. ^^

2007-04-11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2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사람들은 그 자신의 성격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 혹은 불행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행동을 통해서이다." 저라면 그냥 그렇게 옮길 거 같습니다...

2007-04-1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2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공부는 평생이죠.^^;
 

독일의 영화감독 빔 벤더스 특별전에 개최된다는 소식은 지난주에 영화잡지들을 통해서 접했다. 벤더스 자신이 7년만에 내한할 예정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어차피 영화제를 구경 가볼 만한 처지가 아니어서 무뚝뚝하게 전해듣고 말았는데, 한 관련기사에서 ''파리, 텍사스' 다시 만난다'란 타이틀을 보게 되니까 감정이 없을 수 없다.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았던 그의 초기작들을 대부분 보지 못했지만 <파리, 텍사스>(1984)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이자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대학 1학년때 한 변두리극장에서 이 영화를 혼자 보며 나는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10년만 젊었더라도 이런 영화제 같은 건 다 챙겨봤을 터인데 나로선 좋아하는 영화의 스틸사전을 몇 장 감상하는 정도로 입막음을 해둔다.

문화일보(07. 03. 12) '파리, 텍사스’ 다시 만난다

독일 출신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의 대표작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행사가 열린다. 영화사 스폰지와 독일문화원이 공동주최하는 ‘빔 벤더스 특별전’. 15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종로의 스폰지하우스(구 시네코아)에서 열리는 이번 특별전에 맞춰 벤더스 감독도 내한할 예정이어서 그의 영화를 사랑해 온 영화팬들에겐 더없이 희소식이 되고 있다.

벤더스 감독은 ‘페널티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1972)으로 데뷔해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주목 받았다.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은 ‘시간의 흐름 속으로’(1976),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파리, 텍사스’(1984) 등은 국내 영화팬들에게 그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들이다. 이후 그는 ‘베를린 천사의 시’(1987)로 다시 칸 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특히 주인공이 여정을 떠나는 ‘로드무비’ 형식을 통해 황량한 현대인의 내면과 소외감 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감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 상영되는 작품은 모두 10편. 벤더스 감독의 대표작들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어 그의 작품 세계를 한번에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우선 그의 ‘로드무비’ 가운데 초기 대표작으로 분류되는 ‘도시의 앨리스’(1973)와 ‘시간의 흐름 속으로’, ‘미국인 친구’(1977)가 상영된다. 한국 팬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작품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도 다시 상영되며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에게 바치는 다큐멘터리 영화 ‘도쿄-가’(1985)도 상영작 리스트에 올랐다.

또 쿠바 뮤지션들에 대한 헌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1999)과 감동적인 음악 다큐멘터리 ‘더 블루스:소울 오브 맨’(2003) 등을 통해선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도 확인할 수 있다.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을 그린 ‘랜드 오브 플렌티’(2004),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돈 컴 노킹’(2005) 등 최신작들도 다시 관객들을 만난다.



특별전에 맞춰 14일 내한하는 벤더스 감독은 17일까지 국내에 머물며 공식 기자회견, 무대인사, 감독과의 대화시간 등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지난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밀리언 달러 호텔’ 출품차 한국을 찾은 다음 7년 만의 방한이라 더욱 관심을 모은다.

빔 벤더스 특별전은 28일까지 서울 상영을 마치고 부산(국도극장·3월29일~4월11일), 광주(광주극장·4월13~19일), 대구(동성아트홀·4월26~29일), 대전(대전아트시네마·5월3~9일) 등 4개 도시를 돌며 지방 순회상영을 이어간다. 서울 상영에 관한 정보는 스폰지 홈페이지(www.spongehouse.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강연곤기자)

07. 03. 13.

P.S.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벤더스는 로드무비의 대가이며 <파리, 텍사스> 또한 로드무비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 지역 부근, 텍사스주의 어느 황량한 마을에 탈진한듯 보이는 한 남자가 걸어온다. 그의 이름은 트래비스. 의식을 잃은 트래비스의 소지품에서 '월트'란 이름을 발견한 의사는 연락을 취하게 되고, 로스앤젤레스에 살던 월트는 형 트래비스를 4년만에 만나게 된다. 그동안 형의 아들인 헌터를 맡아 기르던 월터와 그의 아내 앤은 헌터가 트래비스를 아버지로 인정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른 정에 얽매여 헌터를 잃게 되진 않을까 우려한다." 그 헌터에게 트래비스는 어릴 적 암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주며 함께 엄마/아내를 찾아나서기로 한다. 아래는 아들 헌터가 어렴풋하게만 기억이 남아있는 엄마의 사진을 건네받고 쑥쓰러워 하는 모습.

"기억을 잃어버린데다 실어증까지 걸려버린 트래비스는 아들과 함께 떠나버린 아내를 찾아나서게 되고, 그녀가 아들의 부양비를 매달 입금해 오고 있는 은행에서 무작정 기다리다 결국 아내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는 환락가의 여자가 되어 었다. 손님은 여자를 볼 수 있고, 여자는 손님을 볼 수 없는 유리벽이 있는 방에서 손님으로 가장한 트래비스는 아내를 만난다. 아내는 얼굴도 보지 못하는 이 손님의 사연을 기꺼이 들어주겠다고 하고, 트래비스는 자신과 제인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게 영화 포스터에 가장 자주 쓰이는 바로 그 장면이다. 트래비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인은 점차 이 '손님'이 자신의 남편이란 걸 알게 되고 흐느낀다. 이야기를 마친 트래비스는 헌터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고는 다시 정처없는 길을 떠난다. 아래는 은행에서 기다리는 동안 헌터가 다시금 엄마의 사진을 꺼내보는 모습.

저명한 극작가 샘 셰퍼드가 각본을 쓴 이 영화의 음악은 라이 쿠더가 맡았다(벤더스와 쿠더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서도 조우한다). 그 건조하면서도 서정적인 기타 소리가 다시금 듣고 싶군. 물론 제인역을 맡은 나스타샤 킨스키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참고로, 영화의 대본은 '샘 쉐파드'의 <파리, 텍사스>(예니, 1987)로 출간된 적이 있다. <아빠는 출장중> 대본과 함께 내가 고이 모셔두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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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3-13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리텍사스랑 도쿄-가를 볼까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난 필름으로 그것을 보지 못했다지요. 입막음 하셨네요...

자꾸때리다 2007-03-13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텍사스 저도 봐야겠네요.
 

올해는 1937년 난징 대학살이 일어난 지 70주기가 되는 해이고 이 사건을 다룬 영화들이 제작될 거란 소식은 작년 11월에도 전한 바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40276&paperId=1007817). 오늘자 프레시안의 '할리우드 통신'은 그 영화들이 대거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기사에서는 우리에게 '아이리스 장'이라고 소개된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원제는 <난징의 강간>)의 저자가 '아이리스 창'으로 표기되고 있다('Iris Chang'이니까 영어로는 그렇게 읽히겠다). 만지면 덧나는 상처 같은 역사적 상흔이지만 우리와 무관하달 수도 없기에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국내에서도 개봉되는 것인지...  

프레시안(07. 03. 08) 아이리스 창의 <난징대학살> 영화화

"미국 하원이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더라도 사과하지 않겠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 야당 및 진보세력, 그리고 미국 정가 일각에서도 아베 총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이 일본의 과거사 인식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데는, 올해가 난징 대학살(1937~38) 70주기를 맞는 해란 점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타임지는 최근호(12일자)에서 난징 대학살 70주기를 맞아 미국, 일본, 홍콩, 중국 등에서 관련 극영화, 다큐멘터리들이 대거 제작, 개봉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난징 주민은 무려 26만명. 강간 피해여성만 2만명이 넘는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보수파는 난징대학살의 실상이 왜곡됐거나 과장됐다는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난징대학살 관련 영화들이 속속 선보이는 것을 계기로 세계각지에서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고 타임은 전망했다.

난징대학살 관련 영화 중 가장 먼저 개봉되는 영화는 빌 구텐타그, 댄 스터언 감독의 <난징>. 지난 2003년 9.11테러 관련 다큐멘터리 <쌍둥이 빌딩>으로 아카데미 장편다큐부문상을 수상했던 두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우디 해럴슨과 마리엘 헤밍웨이가 1930년대말 난징에 거주하다가 일본군에 의한 현지 중국인 학살을 목격하게 되는 미국인들로 등장한다. 두 감독은 사건 당시의 기록필름, 생존자 및 목격자들의 증언, 극중인물들처럼 난징에 살았던 외국인들의 서신 및 일기 등을 기초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지난 1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 처음 선보여 호평받았으며, 이번달 말 홍콩 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될 예정이다.
  
<난징>제작 뒤에는 아메리칸온라인(AOL) 부회장 테드 레온시스의 재정적, 정신적 뒷받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2004년 카리브해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베스트셀러 <난징대학살(원제 : 난징의 강간)> 저자인 아리리스 창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됐다"며 "그때까지 내가 그처럼 끔찍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영화 <난징>제작에 뛰어들게 됐던 계기를 털어놓았다.


  
레온시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난징대학살>은 지난 97년 미국에서 출간돼 무려 10주간이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목록에 올랐던 저서. 중국계 미국인인 저자는 난징에서 직접 발굴한 광범위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건의 실상을 상세하게 재구성해냈다. 이 책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알지못했던 미국 독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아이리스 창은 당시 나이 29세로 유명 작가반열에 올랐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뒤인 2004년 아이리스 창은 갑작스럽게 자살로 생애를 마쳐 다시한번 독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다. 하지만 주변인물들은 창이 생존시 일본 보수우파로부터 많은 협박을 받아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그것이 그의 죽음에 한 원인이 됐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미국사회에 난징학살의 진상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창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현재 제작 중에 있다. 캐나다 감독 빌 스파힉의 <잊지 못하는 여자 : 아이리스 창 스토리>가 바로 그것. 그런가하면 창의 책도 곧 영화화된다. 제작자인 제럴드 그린은 <난징대학살>의 영화화 판권을 3800만달러에 구입, 곧 촬영에 들어갈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감독은 <툼레이더>를 만들었던 사이몬 그린.

이 밖에 올리버 스톤 감독, 홍콩 감독 스탠리 통, 중국감독 류추안 등도 난징 관련 영화를 준비중이거나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타임에 따르면, 아이리스 창의 어머니 잉잉창은 "영화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난징의 비극을 알리려는게 아이리스의 소원이었다"며 딸의 책을 기초로 한 작품 등 관련 영화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대해 감격을 나타냈다.
  
그런가하면 일본에서도 난징 영화가 만들어진다. 지난 1월 미시마 사토루 감독은 기자회견을 열고 빌 구텐타그 감독의 <난징>을 "중국의 조작된 자료만을 토대로 한 작품"으로 맹비난하며, 자신의 영화<난징의 진실>이 "사실있는 그대로"를 관객들에게 알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우파인 미시마 감독은 " 30년대 말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학살, 강간이 자행됐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편, 구텐타그 감독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법의학적 증거,수많은 사진증거, 수많은 필름 증거, 그리고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이 존재한다. 난징의 참상을 입증하는데 이 이상 더 어떤 증거가 필요한가"라며, 역사의 진실을 거부하는 일본을 날카롭게 비판했다.(신영 기자)

07. 03. 08.

P.S. 난징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http://www.youtube.com/watch?v=YoW2WYdOsvg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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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존 라베와 난징대학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17 22:01 
    난징대학살을 다룬 책이 오랜만에 출간됐다. 아이리스 장의 <난징대학살>(이끌리오, 1999), 혹은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미다스북스, 2006) 이후니까 3년만이다. 아이리스 장의 책은 난징대학살 60주년이 되는 해에 출간됐고, 국역본은 70주년을 앞두고 나온 것이었으나 정작 70주년이 되는 해였던 지난 2007년은 너무도 '조용히' 지나갔다. 중국과 일본 모두 이 '불편한' 과거에 대해서는 침묵하기로 합의라도
 
 
해적오리 2007-03-0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징에 갔을 때 난징 대학살 피해자들을 기리는 기념관을 다녀왔어요. 어디를 가나 그런 곳을 방문할 땐 마음이 참 쓰라려요. 영화도 책도 참 관심이 가지만 정작 직접 볼 수 있을 지는 모르겠네요.

로쟈 2007-03-0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책이나 영화 모두 읽고 보는 게 괴롭고, 그렇다고 무심할 수도 없는 그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yoonta 2007-03-0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군의 난징등에서의 학살이 농민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더군요. 만약 일본군의 학살이 없었다면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긴데 그럴듯한 가설이더군요.

로쟈 2007-03-09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럴 법하네요. 역사적 가정법이라는 게 대개는 호사담에 그치는 것이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보이지만요...

외로운 발바닥 2007-03-0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의 국력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 것을 보면 난징대학살도 어느정도 많이 알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로쟈님 말씀처럼 실상을 알기도 괴롭고 무심할 수도 없는 문제같습니다. 살짝 퍼갑니다.
 

저녁때 모더니티에 관한 책 한권을 꺼내들었다가 몇 시간째 오역과 씨름하고 있다(열댓 페이지 읽는 데 몇 시간이 걸리다니!). 모더니티/모더니즘에 대한 강의도 준비할 겸 집어들었던 것인데 오히려 혹만 더 붙인 셈이다. 이 난감한 번역에 대해 또 불평을 늘어놓으려다가 정신건강을 위해서 잠시 영화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지난 12월 개봉작으로 놓친 영화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영화는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황혼의 빛>(2006)이다. 그의 전작인 <과거가 없는 남자>는 챙겨보았었는데, 어쩌다가 이번엔 놓치게 됐다. 비록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로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성냥공장 소녀> 등을 더 본 정도이지만 카우리스마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다(나는 그의 모든 영화를 보고 싶다). 흔히 '노키아의 나라'로 불리는 핀란드가 내게는 '카우리스마키의 나라'일 정도이다. 뒤늦게(!) 그의 최신작에 대한 리뷰와 함께 감독 소개를 옮겨놓는다.

씨네21(06. 12. 13) 인생의 고독과 비애 <황혼의 빛>

영화관은 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가보지 못한 세상에 데려다주고, 현실에서는 해볼 수 없는 감정과 사건을 체험하게 해주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예술적 경험을 즐길 수 문화적 공간이다. 그런데 영화는 소비되는 지점에서는 서민과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되는 수준에서는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소비의 측면에서는 복제 예술이라는 점 때문에 가장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생산의 측면에서는 일단 제작되는 과정에서는 상당한 비용이 투자되어야 하고 더 많은 대중과 만나기 위해 실제에서 불가능한 꿈 혹은 달콤한 환상을 제공해야 하기에 대중의 현실과 멀리 떨어진 곳을 스크린 위에 담는다. 그래서 현실에 밀착된 우리의 삶을 담아내려는 감독들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 지경이다. <황혼의 빛>의 아키 카우리스마키도 그런 감독의 명단에 빠져서는 안 될 이름이다.

켄 로치가 하층민의 삶을 사회운동 차원에서 전투적으로 다룬다면,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그것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관조적으로 담아낸다. 그래서 켄 로치의 영화는 다소 직설적으로 관객에게 어떤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보다보면 주인공의 삶이 직면한 절박함에 시나브로 물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떠도는 구름> <과거가 없는 남자>에 이어 ‘빈민 3부작’의 마지막 편인 <황혼의 빛>에서도 동일한 정서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대도시의 야간 경비원인 코이스티넨(얀 히티아이넨)이다. 그는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에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허름한 집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금발의 여인 미리야(마리아 예르벤헬미)가 그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오고 꿈같은 데이트가 시작된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미리야의 배후에는 코이스티넨이 경비를 도는 백화점 보석상을 노리는 범죄조직이 있었고, 그녀는 코이스티넨에게서 경보장치의 비밀번호와 열쇠를 훔쳐내 조직에 알려준다. 사랑의 단꿈에 빠져 있던 코이스티넨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절도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빈민 3부작’은 공통적으로 상실의 과정을 다룬다. 세 작품 모두 서사적 시간의 진행과 더불어 주인공은 무언가를 잃는다. <떠도는 구름>에서 주인공 부부는 평범한 직장과 소박한 가정이 있었지만, 실직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에 처하고 가정까지 붕괴될 위험을 맞이한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는 영화 초반에 모든 기억을 잃는다. <황혼의 빛>에서 코이스티넨도 (애초에 거짓된 것이기는 했지만) 사랑은 물론 직장과 집 그리고 전 재산까지 잃게 된다. 세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원래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서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당하게 잃고 빈민화되는 과정은 신파적으로 소화될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감독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삶에 동정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눈물 한번 흘리는 법 없고, 절규 한번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사건들이 삶의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버텨내야하는 오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에 투정부릴 정도로 유아적이지도 않고, 울며 나뒹굴 감정적, 시간적 여유도 별로 없다.

스스로를 ‘마음 따듯한 아저씨’라고 평하는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무언가를 계속 잃고 끊임없는 좌절을 경험해야 하는 주인공들에게 ‘희망’이라는 출구까지 닫아두지는 않는다. <떠도는 구름>의 부부는 실직한 뒤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거나 어렵사리 구한 직장에서 월급을 떼어먹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꼼꼼하게 작성한 창업계획서가 자본문제로 폐기처분되기 직전 기적처럼 옛 직장 상사의 도움을 받아 ‘노동’(Work)이라는 레스토랑을 내게 된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남자는 기억과 함께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렸지만, 바닥부터 시작한 새로운 인생에서 사랑을 만난다. 점차 그에게 과거가 돌아오지만 그는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서 인생의 답을 찾는다.

<황혼의 빛>의 주인공 코이스티넨이 우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꿈을 꾸는 것이다. 그는 직원들의 따돌림과 상사의 무시를 경험할 때마다 경비업체의 사장이 될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금발 여인에게 농락당한 뒤 자신의 꿈을 지탱해줄 씨앗마저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코이스티넨은 유일한 말동무이자 감옥에 간 그를 기다려준 아이라(마리아 헤이스카넨)에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관객이 그럴 만도 하다고 고개를 주억거릴 즈음, 그는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아이라가 던지는 한마디. ‘희망을 안 잃었다니 다행이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주인공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자꾸만 솟아나오는 희망이다. 그것이 <황혼의 빛>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소 모호하게 처리된 코이스티넨의 생사에 대해 눈으로 본 것보다 ‘여기서는 안 죽어’라는 그의 말을 믿고 싶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크 오몽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재현하는 집약체로 ‘얼굴’을 이야기한다. 얼굴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가면인 동시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타자를 바라보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는 아무런 대사나 음악도 없이 인물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는 클로즈업이 많이 등장한다. <황혼의 빛>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우리는 고독하게 살아가는 코이스티넨의 무표정한 얼굴을 수시로 마주해야만 한다. 아무리 억울한 상황에서도 변명 한마디없이, 부당한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견뎌내는 삶의 태도가 그의 담담한 얼굴표정을 통해 끊임없이 상기된다.

감독은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설득의 과정을 생략하지만 화면을 가득 메운 얼굴은 관객에게 인물의 영혼과 바로 접속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러한 삶의 논리가 지배하는 하나의 우주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는 코이스티넨뿐 아니라 미리야의 얼굴에도 많은 시간을 허용하는데, 그것은 남자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일종의 팜므파탈인 그녀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뭔가 끊임없이 망설이고 주저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악행 뒤에 숨겨진 사연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운동이 정지되거나 청각적으로 음이 소거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템포 빠른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 인물의 얼굴만 멀뚱멀뚱 들여다보라는 감독의 요구가 때때로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황혼의 빛>은 말없는 얼굴이 쏟아지는 대사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김지미)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핀란드의 영화감독이자 전세계 예술영화관에서 가장 인기있는 컬트 감독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지금까지 한번도 미국 메이저 영화사를 통해 배급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뉴욕 맨해튼, 파리, 베를린 영시네마 포름 등에서 거의 ‘숭배’ 차원으로 열광하는 관객들을 만난다. <오징어 노동조합 Calamari Union>(1985),<햄릿, 장사를 떠나다 Hamlet Goes Busi-ness>(1987),<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Leningrad Cowboys Go America> (1989)와 같은 기상천외한 제목을 단 그의 영화들은 예상을 불허하는 블랙유머의 뇌관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작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심드렁하다. 88년 토론토영화제에서 <오징어 노동조합>이 상영됐을 때 관객과의 토론에 참석한 카우리스마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 최악이에요. 왜 자리를 뜨지 않지요? 당신들은 마조히스트인가요?”

1957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난 카우리스마키는 형 미카가 설립한 빌레알파영화사에서 첫 장편영화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1982)을 발표한 이래 비교적 다작한 편이다. 거의 해마다 한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햄릿, 장사를 떠나다>는 덴마크를 떠나 헬싱키로 장사를 떠난 햄릿이 사기꾼에게 속고, 강도에게 털리고 설상가상으로 부친이 남긴 회사를 숙부에게 빼앗길 뻔하는 위기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고전비극 <햄릿>의 배경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복판으로 옮긴 블랙코미디인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햄릿의 고뇌는 ‘터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바뀐다.

<죄와 벌>,<햄릿, 장사를 떠나다>가 고전문학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라면, <천국의 그림자 Shadow in Paradise>(1986),<아리엘 Ariel>(1988),<성냥공장 소녀 The Match Factory Girl>(1990)는 평단에서 ‘프롤레타리아 삼부작’이란 평가를 듣는 영화다. 계급적 위치면에서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이 삼부작의 공통된 주제다. <천국의 그림자>는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소녀와 중년의 남자가 사랑에 빠지고 외국을 동경하다가 결국은 에스토니아행 배를 탄다는 줄거리인데, 두사람은 배를 타고 나서도 자기들이 왜 망명을 결정했는지 모른다. <아리엘>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카스리넨은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무작정 길을 떠났다가 미혼모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사람은 우연히 살인사건에 휘말리며 남미로 가는 밀항선 ‘아리엘’을 타고 탈출하는 신세가 된다.

카우리스마키의 이런 국외자적 강박감이 가장 잘 녹아들어가 있는 작품이 <성냥공장 소녀>다. 무성영화처럼 대사가 거의 없는 이 영화는 작은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리스가 지긋지긋하고 전망이 없는 삶을 살다가 못된 세상에 복수하기로 결심하고는 쥐약을 넣어 주위사람들을 몰살한다는 이야기이다. 불행에 빠진 소녀가 운명을 극복한다는 동화적인 설정을 잔인하게 비튼 이 영화는 엄격한 무기교의 기교스타일을 통해 섬뜩한 감동을 전해준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는 <성냥공장 소녀>와는 달리 희극적 감성이 녹아 있는 블랙코미디로 북구의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핀란드 촌놈들이 미국을 여행하면서 겪는 해프닝을 담았다. 전형적인 로드무비지만 미국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불모의 땅임을 영화 속 황량한 풍경을 통해 자질구레한 설명없이 묘사한다. 60년대 유럽영화의 상투적인 스타일과 다른 것은 로드무비의 쓸쓸한 풍경에 슬랩스틱 코미디와 개그를 덧칠해 넣는 카우리스마키의 유머감각 때문이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뿌리는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고다르 영화의 60년대식 사랑과 무정부주의에 대한 향수, 새뮤얼 풀러와 로버트 올드리치류의 할리우드 고전영화에 대한 애착,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소설의 달콤한 냉소주의 등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화면에 배어 있다. 그러나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진정한 실체는 핀란드와 헝가리의 보헤미안 전통일 것이라고 영국의 평론가 피터 코위는 말한다. 이것은 자살할 용기가 없어서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가 낭패를 보는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 I Hired a Contract Killer>(1990)나 돈이 없어 밥을 못먹어도 돈을 빌려서라도 술잔치를 벌이며 호기있게 인생을 사는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보헤미안의 삶 La Vie de Boheme>(1992)과 같은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을 코미디로, 가끔은 비극으로 그려낸다. 이 괴짜 핀란드 감독의 좌충우돌하는 유머는 보헤미안 정신의 영화적 형상화라 할 것이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

07. 02. 11.

Аки Каурисмяки. Последний романтик

P.S. 그나마 부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알기로) 영어권에서도 나오지 않은 카우리스마키 연구서가 러시아에서는 작년에 출간됐다는 사실이고(러시아어 표기로는 '아키 카우리스먀키'이다), 아마도 이달안으로는 내가 받아볼 수 있을 거라는 점(어제 책을 발송했다는 메일을 인터넷서점측으로부터 받았다). 제목은 <아키 카우리스마키, 마지막 낭만주의자>(2006)이다. 296쪽이니까 분량은 그렇게 두껍지 않다(하지만 우리 번역본으로 하면 400쪽이 넘는다). 책값은 14,000원 가량(배송비 별도). NLO출판사에서 나오는 '키노텍스트' 시리즈의 한 권인데, 이 시리즈는 지난 2004년에 처음 나오기 시작해서 작년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세계>, <기타노 다케시, 유년시절> 등이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같이 출간됐다(<히치콕>도 같이 주문했다). 이럴 땐 러시아가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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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2-1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평, 2006년 겨울호에 박인환 특집을 읽었는데, 아래 글을 본 첫느낌이 박인환이 모더니즘을 추구했다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얘긴가? 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새로운 시어' '모더니티''모더니즘'이라는 단어들이 병렬적으로 눈에 들어오는데 아주 느슨하게 이해되는군요. 일단 박인환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지점이 '모더니즘'을 추구했다고 해서인지 알고 싶고요, 박인환 시가 '모더니즘 시가 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모더니즘/모더니티 관계도 짤막한 논평이 가능할까요^^

박인환의 시어에 대한 자세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그의 시세계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는 낯선 시어의 사용을 들어 전후 모더니즘의 기수라고 정리되고 있는데, 그가 새로운 시어를 통해 새로운 시 쓰기를 추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모더니즘을 추구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모더니티의 추구가 모더니즘의 시가 될 수는 있지만 모더니티가 곧 모더니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세계에 대한 편향된 인식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진정 박인환이 새로운 어휘에 지대한 고나심을 가진 것은 모더니즘의 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의 태도라고 봐야 한다.

로쟈 2007-02-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더니즘시의 대응어로 '전통시'나 '리얼리즘시'가 가능할 테니까 그와 견주면 될 거 같습니다. '모더니즘시'로서 함량이 좀 미달한다, 는 의견들을 자주 접했지만, 모더니즘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의 태도'로 봐야 한다는 의견은 드문 게 아닌가 싶네요. 구체적인 논변이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저로선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박인환은 김수영의 프리즘을 통해서 본 박인환이긴 하지만.

글구, 모더니티/모더니즘은 일반적인 정의를 따릅니다. 모더니즘은 모더니티(근대성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가 촉발하게 된 문학/예술사조이고, 각 나라별로 시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에서 보들레르, 미술에서 인상파부터 카운트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린(隣) 2007-02-11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하시나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감독들 중 한 사람이죠.
국내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영화는 다 봤고(한 10년 전 비됴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본 이후, 시네마테크에서 <죄와 벌>, <성냥공장소녀>, <개들에겐 과거가 없다(텐 미니츠 트럼펫)>, <과거가 없는 남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황혼의 빛> 등), 그의 신작이 있다면 항상 볼 준비가 돼 있지요. 물론 <오징어 노동조합>, <햄릿, 장사를 떠나다> 등의 예전 영화도 꼭 보고 싶은 영화 목록들 중에 올려져 있지요. 감독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잘 몰랐는데, 덕분에 잘 봤습니다. 어디서 보니 아주 자존심이 강하다고 하더군요(그런 점도 좋게 보죠). 칸느에서 <과거가 없는 남자>가 작품상을 못 받자 악수도 인사도 없이 바로 단상에 내려와 짐 싸서 비행기 타고 핀란드로 돌아와버렸다는..^^

특히 <과거가 없는 남자>에 대해선 어린 후배들이 내는 작은 영화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는데, 갑작스런 잡지 폐간으로 끙끙거리며 쓴 글이 빛을 보지 못했다는..^^;;
암튼, 그때 저도 오몽과 들뢰즈의 클로즈업을 빌어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소수자의 얼굴"을 다른 영화들의 얼굴과 비교했던 기억이 있네요.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는 적어도 희망을 얘기하는가 했는데, <황혼의 빛>은 더 암담하지요. 그렇다고 그가 비관적이라고 생각진 않습니다. 쉬운 타협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다시 암중모색 중이라고 보는 쪽이죠.

로드무비 2007-02-1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로쟈 2007-02-11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orsain님/ 네, 멕시코 영화감독 아르투로 립스테인과 함께 전작이 궁금한 몇 안되는 감독입니다. 제 취향이 그런 감독들과 잘 맞습니다. 카우리스마키를 좋아하신다니까 반갑네요. 전에 쓰신 글도 올려주시죠.^^
로드무비님/ 오랜만에 퍼가시네요.^^

2007-02-11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작년에 나온 전집 말고 또 나오는 건가요? 기이한 일입니다...

릴케 현상 2007-02-1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거 50주년이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