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귀가길에 조간신문을 야간신문으로 읽었다. 아직 한편의 영화도 보지 못했지만 모스크바 영화학교를 졸업했다는 '학력' 떄문에 기억해두고 있는 영화감독 민병훈씨의 두번째 작품 <괜찮아, 울지마>(2001)가 6년만에 개봉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고 바로 페이퍼로 옮겨질 거라고 직감했다(이런 판단에는 0.1초도 걸리지 않는다). 해야 할 다른 일들을 잠시 미뤄두고 '작업'을 하는 이유이다.

전철에서 읽은 기사를 인터넷에서 찾다보니 소박한 홈피도 눈에 띈다(http://www.letsnotcry.co.kr/). 예고편을 감상했는데, 나로선 무엇보다도 첫번째 영화 <벌이 날다>와 마찬가지로 우즈베키스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옮겨놓은 스틸사진들만 보아도 영화의 소박한 진심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봐둘 만한 영화이다. 인터뷰기사가 정작 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고 있지 않아 아쉽지만 더 나은 기사도 눈에 띄지 않기에 일단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8. 22) "예술영화도 '한뼘 설 땅'은 필요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한국에서 예술영화, 혹은 독립영화를 한다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작업을 이렇게 표현한다. 영화를 오락의 수단으로만 찾는 대중 앞에 ‘예술’ 타이틀이 붙는 영화를 찍는 사람들은 늘 외롭다. 이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흥행 실패도, 평단의 혹평도, 인터넷 ‘악플’도 아니다. 영화판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관객의 무관심이다.

민병훈(37)도 그런 고독에 몸부림치는 감독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두 번째 작품 <괜찮아, 울지마>가 30일 개봉된다. 이 영화는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은 뒤 2002년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비평가상, 테살로니키 영화제 예술 공헌상 등을 휩쓸며 일찌감치 작품가치를 인정받은 수작이다. 그러나 제작완료부터 개봉까지 꼭 6년이 걸렸다. 마케팅비만 수십 억원씩 쏟아 붓는 영화계에서, 총제작비 10억원 미만의 예술영화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_오랜 만의 개봉이라 감회가 남다르겠다.
“100만 관객이 들든 단 1명이 보든,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만든 영화인데 어떻게든 개봉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70% 정도 찍었는데, 제작사가 돈 떨어졌다고 철수하라고 그러고…. 개봉관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세 번째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2004년)가 먼저 개봉되기도 했다. 원래 영화를 만들 때는 세상 사람들에게 ‘괜찮아, 울지마’라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는데, 결국 나 자신을 위한 말이 됐다.”

_대부분 사람들이 영화를 대중문화 상품으로 ‘소비’한다. 예술영화의 대중성, 또는 상업성 확보가 가능할까.
“나도 상업영화를 하고 있다. 투자를 받아서 작품을 만들고, 극장에 걸어서 관람료로 수익을 낸다. 다만 다른 영화들과 색깔이 달라 조금 생소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학원 이상의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적 사기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이나 <향수> 같은 영화도, 정작 그 영화를 즐긴 것은 농민들이었다. ‘너 정말 이 영화 이해해?’라는 평론가들의 질문에, 농민들은 ‘시(詩)를 왜 분석해’라고 대답했다. 이른바 예술영화라는 작품들이 결코 소수를 위한 지적 자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_그렇다면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와 <괜찮아, 울지마>는 어떻게 다른가.
“오락영화는 마케팅적인 계산을 먼저 하고 철저히 거기에 맞춰 기획한다. 시작부터 관객의 반응까지 정답이 있는 영화다. 하지만 난 답이 아니라 질문을 주는 영화를 만든다. 관객이 스스로 생각할 여백과, 고통을 이겨내고 답을 찾게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 <트랜스포머>는 그런 것이 생략된 영화고…. 이를테면 장르의 차이지, 영화라는 본질의 차이는 아니라고 본다.”

_<디 워> 신드롬을 어떻게 보나. 그리고 그런 신드롬을 만들어낸 영화산업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디 워>든 그것보다 훨씬 못한 영화든, 관객이 거기에 열광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다만 다양성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계 전체, 특히 폭력적인 배급시스템의 책임이다. (소수 상업영화의) 독과점이 분명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득이 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영화에 20개 관이라도 잡아 줄 수 있지 않는가? 스크린 쿼터 문제에는 거리에 나서지만, 스크린독과점 문제에는 침묵하는 영화인들도 문제다. 언론도 오락영화를 소개하는 양의 5%만이라도 독립영화를 소개해줬으면 한다.

_ 예술영화가 살아 남을 대안은 무엇일까.
“배급 상황이 나쁠수록 작품에 공을 들여야 한다. 좋은 영화는 결국 관객과 만나게 된다. 영화시장 3%의 관객이 소문을 내 1%의 관객을 더 데리고 올 수 있도록, 그래서 한국영화계의 쏠림현상을 관객 스스로가 거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외국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도 장 뤽 고다르 특별전이나 이마무라 쇼헤이의 회고전에 1만명 정도의 관객이 들지 않나. 한 나라에 1만명씩, 100개국이면 100만명이 영화를 보는 것이 된다.” 

●괜찮아, 울지마
모스크바에서 도박빚을 지고 우즈베키스탄의 고향 마을로 도망쳐 온 남자의 이야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심리를 통해, 모든 사람들의 내면 속에 감춰진 두려움의 실체를 직면하게 한다. 전작 <벌이 날다>(1998년)처럼 우화적이고 키치적인 소재로 자칫 사변적으로 흐를 수 있는 영화에 운율을 더했다. 탈무드의 한 토막 같은 전설로 현실의 번민에 빠진 주인공에게 슬며시 희망의 빛을 던져 준다. 서울 종로 미로스페이스 단관 개봉.(유상호 기자)

07. 0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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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08-2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박한 돌집을 보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여백이 있어 보이는 영화, 보러 가고 싶네요.

로쟈 2007-08-23 11:25   좋아요 0 | URL
보고 소감 올려주실 거죠?^^

philocinema 2007-08-2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 부여는 개봉관 자체가 없으니...
아니 있어도 이런 시골에 개봉을 하긴 하려는지...
예술영화를 개봉관에서 보려면 서울로 이사를 해야하는건지...

예술영화의 개봉이 서울에 집중되는 것은 또하나의 폭력은 아닌지...

로쟈 2007-08-23 19:17   좋아요 0 | URL
저도 보고 싶다는 것이지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philocinema 2007-08-23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렴요!

책읽기는즐거움 2007-08-24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기다린지 6년째 이제야 개봉이 되네요. 하재봉씨가 나왔던 <시네마 월드>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걸 보고 정말 보고싶은 영화가 되었는데 기다리다 정말 지쳤다는ㅋ
그때 민병훈 감독과 저 외국배우도 같이 나와서 하재봉씨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하여튼 이제라도 개봉되어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저 영화를 보고 자꾸 예술영화 예술영화 하는게 오히려 저 영화가 난해하다든가등의 잘못된 신비감만 조성하는 듯 하는 느낌이 드네요.
어디서 민감독이 이야기하는것을 읽었는데 자신의 영화가 그렇게만 보여지는게
싫고 자신도 예술영화를 하는게 아니라고 한 것 같아요
(정확히 기억이 안나네요-_-;;)
어떻게 생각하면 저 영화도 이세상의 수많은 감동적인 영화중 한개라고 볼수도 있는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저 작품의 가치가 낮다는게 아니고요ㅋ
일단 보고나서 어렇다 저렇다 말하는게 우선일듯 하네요ㅋ
8월 30일 개봉이라 되어있으니 계획을 잡아야 겠어요

로쟈님 좋은 정보 정말 감사합니다ㅋ
잘못하면 까먹고 가지 못할 번 했네요

로쟈 2007-08-25 01:57   좋아요 0 | URL
정보야 널려 있는 걸요. 다만 보는 눈들이 다를 뿐이지요.^^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의미가 증폭되고 있는 영화 <디워> 신드롬에 관한 좌담기사를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영화이지만(나는 극장에서건 TV에서건 심형래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고, 더불어 '괴수'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디워 현상' 혹은 '디워 신드롬'은 올해의 문화사회학 주제가 될 만하다(관객 천만을 돌파한다면 문제는 좀더 '심각'해진다. 이 경우는 관객층의 분포에 대한 데이터가 요구된다. 아무래도 <디워>는 '방학특선'이란 성격이 강하기에). 굳이 페이퍼로 '기록'해두는 이유이다. 아래 좌담 내용 중 개인적으로는 "<디워>를 굳이 비평적 입장에서 접근할 필요는 없다. 그럴 경우 얻는 것도 적고…. 반면 산업적으로 접근할 경우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의견에 동감한다. 더불어 "<디 워> 신드롬은 심형래 감독이 건드린 대중 심리, 영화 감상의 주체로 나서고 싶다는 대중의 욕구가 결합한 현상"이라는 진단에도. 오르테가 이 가세트라면 '대중의 반역'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물론 그 반역은 이제 '용가리에서 이무기로'만큼 버전-업됐다. 그런 의미에서도 '디워'는 징후적이다...

한국일보(07. 08. 16) '디워' 관객만큼 논란도 폭발… 영화평론가의 이유 찾기

심형래(49) 감독의 <디워>가 역대 한국영화 흥행 ‘톱 10’에 진입했다. 배급사 쇼박스에 따르면 14일까지 총 613만 8,000여명이 <디워>를 관람, <투사부일체>(610만)의 10위 자리를 빼앗았다. 15일 광복절과 뒤이은 주말을 감안하면 <디워>는 이번주 <쉬리>의 기록(9위ㆍ620만)까지 넘으며 1,000만 관객을 향해 맹렬히 돌진할 것 같다.

<디워>의 눈부신 흥행질주 이면에서는 논란도 뜨겁다. 과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괴물>의 흥행을 두고도 충무로 안팎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그러나 <디워>가 생산하는 논란은 차원이 다르다. 네티즌 대 평론가, 인터넷 토론공간 대 기존 언론매체, 심형래 감독 대 충무로라는 중층적인 전선을 형성하며 하나의 ‘현상’을 낳고 있다. 한쪽에서는 사이버 테러 수준의 막말이 분출되고, 다른 편에서는 부르디외와 그리스 희곡의 이론까지 동원된다.

괴수가 등장하는 SF오락영화 한편이 이처럼 커다란 담론의 원천이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화평론가 전찬일(46ㆍ숙명여대 겸염교수), 오동진(43ㆍ동의대 초빙교수), 심영섭(41ㆍ대구사이버대 교수) 씨가 모여 <디워> 신드롬의 겉과 속을 분석해 보았다.(진행= 이대현 문화대기자)

좌담회에 참석한 평론가들은 "<디 워> 신드롬은 심형래 감독이 건드린 대중 심리, 영화 감상의 주체로 나서고 싶다는 대중의 욕구가 결합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대중은 왜 <디워>의 사수대가 됐는가
<디워>에 대해 대중들이 보이는 반응은 ‘열광’보다는 ‘보호심리’에 가깝다. 과거에도 <인디펜던스 데이> <투모로우> <고질라>처럼 평단의 혹평을 받고도 많은 관객이 든 영화가 있었다. 그러나 <디워>에 대한 반응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뜨겁고 감정적이다.

심영섭= 이 영화의 흥행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승자가 모든 것을 갖고, 대중도 그런 승자에 환호한다. 미식축구를 봐도 점수를 딴 선수에게 공을 한번 더 찰 기회를 준다. 반면 한국사람들은 패자에 애착과 동질감을 느낀다. 씨름경기에도 ‘패자부활전’이라는 게 있다. 진 사람에게 떡 하나라도 주고 싶은 무의식이랄까. 심형래 감독은 그런 대중의 심리를 건드렸다. 심형래는 꼴찌 인생이라고, 나보다 나을 게 없는 패자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일등이 된 거다. 그래서 장하고 대견한 거다. 영화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그런 잠재된 대중심리를 격발시켰다.

전찬일= 나는 다르게 본다. 심형래 감독이 꼴찌였고 패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다른 신화고 이데올로기다. 한국 연예 역사에서, 가요계에 조용필이 있었다면 코미디계에 심형래가 있었다. 누구보다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런데도 TV속 바보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약자로 인식됐고,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의 무의식 속의 심형래는, 심형래가 아니라 아직 영구다. 그걸 이용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심형래 감독은 심할 정도로 악용하고 있다. 이미 <디워>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할 지경이 돼 버린 배경에는 분명 그런 이미지 조작의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다.

오동진= 언제부턴가 대중이 영화산업의 주류에서 밀려났다는 피해의식이 있었다. 누구보다 한국영화를 사랑했고, 영화산업이 성장할 수 있게 힘을 준 것이 관객이다. 하지만 평론가와 영화 담당 기자들에 의해 무식한 대중, 즉 꼴찌로 밀려나 버린 것이다. 여기에 대한 반감이 <디워>라는 영화에서 표출된 것이다. 가혹할 정도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관객 600만명까지 가면서, 나의 정서적 취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픈 욕구가 생긴 것이다.

<디워>의 한계와 가능성
비록 원치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영화적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들에게 <디워>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돼 버렸다. ‘심형래 대 충무로’라는 갈등의 실체, 애국주의 마케팅, 유사 할리우드(카피우드) 전략 등이 모두 도마에 오른다. 그런 가운데 정작 주목받지 못하는, 혹은 애써 피해가는 주제는 영화로서의 <디워>의 가치다.

= 한국 관객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스토리다. 이 원칙은 모든 영화에 적용됐으나 <디워>만 제외된다. 다른 영화는 볼 만한 부분이 있어도 스토리가 약하면 깎아내렸는데, 유독 이 영화만 다른 부분으로 스토리의 허약함을 덮고 있다. 이것이 언론매체를 이용하는 심형래 감독의 파워다. 다른 감독들은 절대 하지 않는, 눈물 마케팅 전략을 썼다. 같은 개그맨 출신이라도 이경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화는 신파가 아닌데, 본인은 신파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게 먹혔다.

= 모두들 ‘특수효과는 뛰어나다’라고 말하고 끝나는데, 특수효과는 사실 시각적 만족을 위한 도구다. 이 영화는 시각적 스펙터클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제외하고도 이 영화가 로우틴(10대 초반)에 먹혀 드는 이유는 영웅신화다. <용가리>와 <괴물>은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지만, <디워>는 미국이 배경이다. 그런데 그것을 물리치는 것은 전생에 한국인이었던 주인공이다. 엉성하고 감동을 주지는 못하지만, 호기심을 줄 수 있는 이야기다.

= <디워>를 굳이 비평적 입장에서 접근할 필요는 없다. 그럴 경우 얻는 것도 적고…. 반면 산업적으로 접근할 경우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다른 영화 얘기지만,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이라는 영화가 나왔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 영화나, 또 <디워> 같은 영화는 영화산업에서 일정한 영역을 차지할 것이라고 본다. <디워>는 비주얼의 스펙트럼만으로 7,000원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한국 영화산업과 <디워>
그렇다면 <디워>가 한국영화산업에 미칠 영향은. 그리고 심형래가 앞으로 선택할 길은?

= 한국영화의 위기의 큰 원인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라면, <디워>는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두 편의 영화가 잘 된다고 해서 영화계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 투자확대 측면에서는 영화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구아트무비는 영화제작보다는 특수효과에 집중하면 좋을 것 같다. 예컨대 동남아시아 영화제작자들이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수출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지 루카스의 ILM(특수효과 전문회사)처럼 아시아의 특수효과 인프라가 되면 어떨까. 다른 영화인들이 SF에 도전할 때 찾게 되는. 하지만 그것이 영화계 전체가 심형래 감독을 도와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왜 봉준호 강우석은 아니고 심형래는 도와줘야 하는가? 그러면 과대망상에 빠질 수도 있다. 다음 작품에서도 심형래라는 이름이 <디워>처럼 먹힐지도 의문이다.

= <디워>는 영화 자체보다 심형래의 인간승리를 보러 극장에 간 관객들이 많다. 심형래 감독의 작품이 계속 성공하려면 콘텐츠가 믿음을 줘야 한다. 제리 브룩하이머처럼, 좋은 제작자가 됐으면 좋겠다.

문화 프로슈머시대의 영화평론
<디워> 논란의 가장 첨예한 전선은 언론과 평단의 혹평과 그것을 반박하는 네티즌(대중)의 목소리다. 대중은 더 이상 평론을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비평의 방법에도 변화가 모색돼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 관객은 더 이상 영화에 있어서 수용적 입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디워>는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영화를 소비하는 입장이지만, 텍스트의 가치를 평가하고 싶은 강한 욕망과 자신감이 있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플랫폼으로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자긍심이 기존 평론가들의 권력과 충돌해 이번의 논란이 발생한 것이다. 평론가들이 더 이상 텍스트 자체만을 분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문화적, 산업적 측면에서 다양한 비평을 해야 한다.

= 네티즌과 평론가의 역할이 다른데,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대중은 비평가를 인정하고 비평가도 대중을 낮춰봐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엔터테이너가 아닌 스페셜리스트의 영화평을 싣는 언론의 자세도 필요하다.

07.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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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충무로는 왜 "d-war"를 인정하지 않는가..?
    from 깔끄미(입주청소) 2007-08-16 20:51 
    현재 우리나라 영화계는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d-war"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영화비평가들이나 전문가들은 디워를 혹평을 한다. 아니다..이정도 수준이면 혹평의 정도를 떠나서 거의 말살이라는 표...
 
 
수유 2007-08-16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조카가 보자 그래서 보게 되었는데, 관람객들은 가족단위가 있긴 했어도 이전의 용가리 때처럼 초등학생들만 들어온 영화는 아니었구요, 다른 영화들 관객층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어요. 대중이 그의 영화에 반응하는 것은 용가리나 그 외 심형래의 괴수영화들과는 확 달라진 CG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편견과 선입견이 작용할 수 있는 평단의 잣대로 그를 평가하지 말라는 대중들의 욕구가 드러난 것 같아요. 위의 오동진 교수의 어떤 스페셜리스트로 보자는 말과도 연결이 되는데 그런 암묵적 동의가 대중들에게 있었던 것 같아요, 신지식인 선정에 관련된 뒤늦은 사회시선도 그랬고.. 그것이 정치적이었거나 우둔한 지도자의 즉흥이라든가..또는 정당하거나 옳거나 비판을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문제와는 다르게 말이죠..여하튼 영화자체의 완결성 같은 건 대중에겐 그리 크게 어필하지 않았다는 점, 애초부터 대중은 심형래에게 그런 기대는 안했을 수도 있어요.. 그게 평단과 대중의 갭 일수도 있지만서두...어린조카도 내용은 좀 이상하지만^^ 그래픽은 좋았고 괜찮았어요 라고 말하더군요^^
영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군데군데 짧은 박수도 있었고.^^

로쟈 2007-08-16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여름방학에 남녀노소 같이 볼 영화가 별로 없기도 하구요. 그나저나 오늘따라 갑자기 서재 방문객이 많아진 게 아무래도 '디워' 탓인가 봅니다. 말로만 신드롬이 아니네요.^^;
 

한겨레 북리뷰란에 연재되고 있는 '김윤식의 문학산책'의 이번주 이야기는 '콰이강의 다리'에 관한 것이다(영화는 http://www.youtube.com/watch?v=7DWlVNCiM8E 참조). 칼럼을 읽다가 의문(호기심)도 생기고 개인적인 기억까지 겹쳐서 '조사'를 좀 해보았다. 몇 마디 보탠다. 모처럼 비가 시원스레 오는군...

한겨레(07. 08. 04) '콰이 강의 다리’의 조선인 포로감시병

휘파람 행진곡의 익살스러움을 아시는가. 그럴 수 없이 경쾌한 행진곡에 누더기 군복 차림의 영국군 포로의 행진이 화면 가득 펼쳐졌소. 차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 두목 니콜슨 대령의 당당함, 그를 따르는 병졸들의 해맑은 표정. 영화 <콰이 강의 다리>(1957, 데이비드 린 감독)를 보고 있노라면 연합군 포로 수만 명의 희생 위에서 가까스로 이루어진 태국·미얀마 접경 철도 건설(1942~43)의 비극은 가뭇없고 문득 저 헤겔의 주인·노예의 변증법만이 커다란 얼굴을 내밀고 있소. 다리 건설 과정을 통해 포로수용소 소장 사이토 대령이 노예로 전락하는 과정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지지 않겠는가. 설계도를 작성할 수 있는 노예란 벌써 노예일 수 없는 것. 이 점을 1930년대 코제브는 파리고등연구원에서 메를로 퐁티, 조르주 바타유 등에게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기껏해야 행진곡의 경쾌함이 가까스로 남았을 뿐. 


원작소설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원작자 피에르 불의 소설 <콰이 강의 다리> 제1부에는 이런 대목이 있소. “니콜슨 대령은 두 사람의 거인에게 끌려갔다. 그들은 둘 다 조선인으로 사이토의 호위병이었다”(오징자 역)라고. 잇달아 이렇게도 적혀 있지 않겠는가. “한 주일 동안을 그는 고릴라 같은 조선인 보초병의 얼굴밖에 볼 수 없었다. 그 보초병은 자기 개인의 특권으로 매일같이 쌀밥에 소금을 덧쳐주는 것이었다”라고. 또 썼군요. “니콜슨 대령은 또 다시 얻어맞았다. 그리고 그 못생긴 조선인은 처음의 그 비인간적 대우를 다시 하라는 냉혹한 명령을 받았다. 사이토는 그 호위병까지 때렸다”라고. 일본군은, 포로 감시원으로 조선인을 사용했음이 조금은 드러나 있소. 8년간 말레이시아에서 토목기사로 종사한 작가이고 보면 이 점이 썩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오.

어째서 일본군은 포로수용소 감시병에 조선인을 사용했을까. 이 물음은 혹시 전범으로 연합군에 의해 처형된 홍사익(1900~46) 중장에도 이어질까(*사진에서 오른쪽 끝). 조선인으로 별을 셋이나 단 이는 홍사익뿐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일. 육사 26기이자 조선인으로 유일한 육대 출신의 홍사익이 필리핀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간 것은 1944년 10월. 처형 당한 것은 종전 이듬해 9월. 그렇다면 사이토 대령에게 모질지 못한 탓에 얻어맞은 고릴라처럼 생긴 조선인 감시병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실마리 하나를 잠시 볼까요. 조선인 학병으로 비극의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귀환한 이의 기록에 따르면 귀국선 캠벨호엔 병정 40여 명이 위안부 5백여 명 그리고 포로감시원 7백여 명이 탑승했다 하오(이가형, <버마 전선 패잔기>). 기억에 의한 기록이기에 그 숫자의 정확성 여부까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요컨대 기록자의 말 그대로 ‘모두가 불운했던 민족의 제물들’임엔 분명합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 중 전범으로 처형된 조문상(趙文相)의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유령으로라도 지상에 떠돌 것이다. 그도 불가능하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라도 떠돌 것이다”라고.

<콰이 강의 다리>란 우리에겐 새삼 무엇일까. 하나는 영화이고 또 하나는 소설이다, 라고 스스로 묻고 대답해 봅니다. 환각으로서의 스크린이고 환청으로서의 휘파람 소리이다, 라고. 동시에 사실이고 역사이다, 라고. 그렇다면 실체란 없는 것일까. 만일 실체란 것이 있어야 한다면 거기에 놓인 실체란 저 헤겔이 말하는 주인·노예의 변증법이 아니었을까.(김윤식 / 문학평론가, 명지대 석좌교수)

07. 08. 04.

P.S. 몇 가지 조사해본 내용이란 건 원작자 페에르 불과 <콰이강의 다리>의 국역본에 관한 것이다(홍사익 중장에 대해선 이규태 칼럼을 인터넷에서 읽을 수 있다). 일단 시중에서는 <콰이강의 다리> 국역본을 구할 수 없다는 것.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만 좀 의외이다. 칼럼에서 '오징자 역'이라고 돼 있는 것으로 보아 번역본이 나왔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한데 '오징자'? 불문학 번역자인 '오증자' 교수와 동일인인 듯싶은데 어째서 '오징자'일까, 하며 찾아보니 '오징자'로 검색되는 책들이 있다. <콰이강의 다리>는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었는데, '오징자 역'으로 돼 있는 건 삼진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12권(1976)이다(같은 번역의 다른 판본들도 나와 있다). 징후/증후에서처럼 한자 음독의 문제일까?  

원작자 피에르 불(1912-1994)은 이름이 말해주듯이 프랑스 작가이다('피에르 불레'로도 표기돼 왔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게 바로 <콰이강의 다리>(1952)와 <혹성탈출>(1963)이다(팀 버튼이 리베이크하기도 했던 바로 그 영화). 얼핏 같은 작가의 작품일까 싶지만, '탈출' 모티브로 묶이는 것도 같다.

이 <혹성탈출>도 예전에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승산서관, 1979) 등으로 번역된 적이 있다. 아마도 일역본에서 중역된 것이 아닐까 싶고, 그 일역본의 제목이 '혹성탈출'인 듯싶다(원제는 '원숭이의 혹성'이다). 이 정도면 대중적인 지명도를 갖춘 작가/작품인데 도서관에서나 찾아 읽어볼 수 있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 아닐까...

P.S.2. <콰이강의 다리>는 내게 언제는 초등학교 2학년 때를 떠올리게 해준다. 갓 전학온 학교의 담임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들려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의 줄거리였다. 덕분에 별다른 기억을 따로 갖고 있지 않은 이 선생님의 인상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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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8-0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색도 좋구요. 첨 들어보는 작간데 작품은 영화로 둘 다 본 적 있습니다. 그 두 작품 원작자였구나.

로쟈 2007-08-04 18:29   좋아요 0 | URL
저도 작가의 이름은 이번에 처음 확인했습니다...

2007-08-05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06 00:14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가능한 일이긴 한데, 그랬다면 좀 쑥스럽군요.^^;
 

'지아장커'란 이름으로 내겐 더 익숙한 중국 감독 자장커의 영화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의 근작 3편을 상영한다는 '자장커 스페셜'이 그것이다. 작년에 워낙 호평을 받은 영화 <스틸 라이프>는 나도 구해놓은 지 오래됐지만 차일피일 미루면 못 보고 있었는데, 이 참에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러니까 '나대로 스페셜'이다).  

 

문화일보(07. 07. 26) 고속성장 뒤편의 고허한 소시민, 중국의 ‘속살’을 본다

중국 내 독립영화의 흐름을 일컫는 ‘지하전영(地下電影)’.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 감독으로 분류되는 자장커(賈樟柯) 감독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행사가 열린다.

서울 낙원동 소재 필름포럼이 26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개최하는 ‘자장커 스페셜’은 국내에선 다소 낯설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중국 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소시민들의 공허함과 혼란 등을 주제로 한 작품을 잇따라 선보여 세계 영화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그의 작품 3편을 모았다. 자장커 감독은 ‘플랫폼’ ‘소무’ ‘임소요’ 등 그동안 만들어온 작품들이 중국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친 탓에 중국 내 영화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우선 2006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스틸라이프’는 중국 양쯔(揚子)강 중상류 싼샤(三峽)지방을 찾은 두 남녀를 통해 해체와 파괴가 엇갈리고 있는 지금 중국사회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영화. 세계 최대 규모로 지어지고 있는 싼샤댐이 오랫동안 쌓아온 역사와 흔적을 지우는 현장을 담아낸다. 지난 6월 필름포럼에서 개봉했던 작품은 특히 단관 개봉임에도 현재 1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장기 상영되고 있다.

이번 행사에선 또 ‘스틸라이프’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동’도 소개된다. ‘동’은 신도시 개발과 함께 댐 건설로 2000년 고도가 무너지는 현장을 찾아간 현대화가 류샤오둥의 여정을 자장커 감독이 담은 것. 신도시 건설현장의 노동자들, 그리고 방콕의 젊은 여자모델들을 화폭에 담는 화가의 뒤를 쫓으며 현재의 중국을 예리한 시선으로 고발하는 작품이다. ‘동’은 이번 행사 후 국내에 정식 개봉된다.



이와 함께 상영될 2004년작 ‘세계’는 베이징의 ‘세계공원’에서 댄서로 일하는 타오와 공원 순찰관인 타이셩 등 청춘남녀의 일상을 통해 현재 중국이 안고 있는 모순을 지적하는 작품. 에펠탑, 피라미드로 가득한 공원은 지구의 축소판이며, 현재 중국의 모습이다.

자장커 감독은 행사기간에 맞춰 방한해 관객과의 대화시간(28일 오후 3시) 등을 가질 예정이다. 자세한 상영작 정보와 행사일정은 필름포럼 홈페이지(www.filmforum.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강연곤기자)

경향신문(07. 06. 21) [영화 가로지르기]스틸 라이프

‘스틸 라이프’(감독 자장커)는 가족을 찾아 먼길을 떠난 두 사람의 이야기다. 산밍(한산밍)은 자신의 아내와 딸을 찾아 16년 만에 산샤로 돌아온다. 그러나 산밍이 도착한 산샤는 건설되는 댐 때문에 많은 지역이 수몰된 상태다. 한편 2년 동안 남편과 연락이 끊어진 셴홍(자오 타오)도 남편을 찾아 산샤로 온다. 셴홍은 달라진 남편의 모습에 실망하며 혼자 산샤를 떠난다.

자본주의의 물결은 제일 먼저 인간관계를 이해관계로 대체해 버린다. 영화에는 산밍과 셴홍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두 사람은 모두 보상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웃들간의 격렬한 아귀 다툼을 우두커니 지켜본다. 이처럼 개발의 광풍은 오랜 인간관계에까지 개입하고 간섭한다.

수몰된 지역을 바라보는 산밍의 눈길에 포착된 풍경은 스산하다. 그 풍경에 스며든 적막은 삶의 벼랑으로 내몰린 서민들의 무력한 침묵으로 이어진다. 산밍과 아내의 대화는 서먹하다. 그 대화의 간극을 채우는 것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가난한 자들의 슬픈 침묵이다. 그 침묵에는 개발의 이름으로 삶의 뿌리가 뽑힌 사람들의 울분과 회한이 서려 있다.



번영의 이미지로 치장한 건설과 개발은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을 ‘합법적’으로 추방한다. 이제 오래된 건물들과 거주하는 사람들은 개발의 걸림돌로 여겨질 뿐이다. 그들은 그 개발의 축제에 초청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발의 횡포 앞에 정직한 육체로 맞설 수밖에 없는 자들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줄타기를 하는 어느 노동자의 모습은 일하는 사람들의 정직한 육체가 처한 위태로운 처지를 상징한다. 이제 그들은 다시 낯선 도시의 가난한 주변부를 향해 떠나야 한다. 산밍도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 노동자들과 함께 산샤를 떠난다.

개발의 과정은 그곳에 터잡고 살아온 사람들을 냉혹하게 추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정처없는 유랑민이 되어 현대판 유배 생활을 떠나는 것으로 완성된다. 가난한 자들을 추방하여 그들에게 유랑을 강요하는 개발의 논리는 아무리 합법을 가장하더라도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스틸 라이프’의 산밍이 개발 예정지에서 목격한 것도 소외와 폭력이 아니었던가.

우리 사회 역시 신도시 개발을 둘러싼 풍문 한마디에 요동치는 ‘개발 지향적 사회’다. 한국 사회야말로 개발을 구원으로 맹신하는 ‘개발 강박증’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개발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추방당하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낯선 곳으로 ‘자본에 의한 유배’를 떠나야 하는 것일까.

치밀한 사실성으로 무장했지만, ‘스틸 라이프’에는 초현실적 장면들도 등장한다. 하늘로 발사되는 기이한 건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발의 논리 앞에서는 결국 그 건물도 언젠가는 철거를 위한 쇠망치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초현실적 장면에는 한꺼번에 하늘로 사라지지 않는 한 그 건물 역시 철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과 그런 공상을 통해서라도 철거를 막고 싶은 주변부 주민들의 절박감이 섞여 있다.

개발의 논리 앞에서는 ‘개발된 곳’과 ‘개발되지 못한 곳’의 구분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삶의 체취가 묻어 있는 공간들은 가차없이 서열화된다. 하지만 개발의 폭력은 단지 자연적 풍광만을 수몰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추억도 더불어 수몰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공간이 수몰될 때, 그곳에 깃든 사람들의 숨결과 자취도 함께 사라진다.

가난한 자들의 기억, 개발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자들의 추억은 그렇게 폐기된다. 그들의 추억은 공권력이나 자본에 의해 기록되거나 보호되지 않는다. 사탕과 차를 통해 겨우 자신들의 추억을 되살려 내야 하는 그들의 막막함은 개발에 어울리지 않는 기억들을 모두 수몰시키려는 자본의 위세 앞에서 이내 절망감으로 변한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산밍과 동료 노동자들의 눈에는 일하는 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온기가 담겨 있다. 그 담담한 온기는 가난한 자들 간의 우정이자 유대감일 것이다. 건설현장에 버려진 하숙집 청년의 주검을 수습하는 것도 결국 그 노동자들이다.

산밍은 딸과 아내를 데려 가기 위해 산샤를 찾는다. 하지만 산샤를 떠나며 그가 동행한 사람은 딸과 아내가 아니라 산샤에서 만난 노동자들이었다. 함께 땀방울을 흘린 노동자들과 길을 떠나는 산밍의 모습에는 일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에서 작은 희망을 찾으려는 감독의 의지가 녹아 있다.(황승현|영화평론가)

07. 07. 27.

P.S. 영화 <스틸 라이프>에 대해서는 작년 가을 씨네21에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42355). 영화를 보고 나면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P.S.2. 이번 '스페셜'을 위해 내한한 지아장커와의 인터뷰 한 꼭지도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7. 30) 중국 독립영화 대표주자 지아장커 감독 내한

중국 독립영화의 대표주자 지아장커(賈樟柯ㆍ37) 감독이 서울에서 진행 중인 자신의 특별전을 맞아 방한했다. 감독은 28일 ‘지아장커 스페셜’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 필름포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속 성장의 그늘에서 소외되고 파편화된 소시민들의 이야기”라고 자신의 작품들을 설명했다.

“싼샤(三峽) 댐 건설로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람의 터전을 떠나야 했고, 7,8개의 도시가 사라졌어요. 도시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도 해체되고 있어요. 너무도 빠른 속도로.” 데뷔작 <소무>부터 그의 시선은, 일관되게 현대화의 광풍 속에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있다.

이 시선은 세계 최대의 댐 공사인 싼샤공정(三峽工程)에 멎어, 최근작 <동>과 <스틸라이프>를 낳았다. “2,000년 된 도시가 2년 만에 사라지고 있다고.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거야.” <스틸라이프> 속 수몰민들의 이 대사에, 감독의 안타까운 절규가 겹쳐진다. 이 영화는 감독에게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겼다.

“중국에서 점점 ‘현실’을 얘기하는 작가들 사라지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더 (현실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감독은 최근 중국영화의 경향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첸카이커(陳凱歌), 장이머우(張藝謀) 등 중국영화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선배들이 상업영화로 전환, 판타지에 가까운 사극만 만들어 내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심의를 쉽게 통과하기 위해, 또는 해외에서 팔리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두들 사극만 찍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그런 영화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지하전영(地下電映)’이라고 불리는, 중국적 인디영화의 정신을 이어 나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감독의 뜻이 얼마나 반향을 불러 올 수 있을까. 그는 지극히 개인화, 자본주의화하는 중국 젊은이들의 모습에 종종 울분을 토해 왔다. “<스틸라이프>의 DVD가 60만장 정도 팔렸어요. 인터넷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고요. 이 영화를 보고 싼샤로 여행을 가는 젊은이들도 생겼다고 들었어요.” 세계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에서 상영관을 찾기 힘든 그이지만, 3,4년 전에 비해서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희망적이었다.

감독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UFO 등 초현실적 이미지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 변화 속에서, UFO의 등장도 그다지 비현실적이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며 “모두들 행복을 쫓아 정신없이 달려가지만, 그 행복은 UFO 같은 존재가 아닐까”라고 말했다. 영화의 호흡이 매우 느리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우리 생활이 너무 빨라지고 있다. 생활의 과정을 보여 줄 새도 없이 지나가 버린다. 원래 그대로의 ‘시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로우예(婁燁ㆍ42) 등과 함께 6세대 감독으로 분류되는 지아장커는 <임소요> <플랫폼> <소무> 등, 화려한 성장의 외피에 가려진 중국인들의 아픈 내면을 영화에 담아 왔다. 그의 영화는 중국 정부의 개발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 때문에 2004년까지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다음달 2일까지 진행되는 지아장커 스페셜에서는 싼샤댐을 다룬 다큐멘터리 <동>과 극영화 <스틸라이프>, 세계화 흐름 속에 중국 민중의 현실을 우화적으로 그려낸 <세계> 등 3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자세한 정보는 필름포럼 홈페이지(www.filmforum.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유상호 기자)

07. 0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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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7-2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과 <세계>를 <스틸라이프>와 함께 필름포럼에서 아주 짧게 올리더군요. 난 <스틸라이프>를 보았고 그것은 꼭 <동>과 함께 보아야 한다는 정성일의 말대로 <동>을 볼 생각입니다.
뒤늦게 지아장커의 팬이 되었어요..

로쟈 2007-07-28 17:30   좋아요 0 | URL
나중에 감상을 좀 들어야겠네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근작 <폭력의 역사>(2005)의 국내상영 소식은 예고된 바 있는데, 곧 상영되는 모양이다(데이비드 린치의 신작 <인랜드 엠파이어>와 함께 최근 가장 주목되는 개봉작이다. 상업적으로가 아니라 영화적으로). 이번주 '씨네21'에서는 이 두 감독의 영화세계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지만 아직 온라인에서는 읽을 수 없기에 대신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동시 상영관'에서 <폭력의 역사>에 대한 리뷰만을 옮겨놓는다. 분량이 읽기에 적합한 것도 옮겨오는 이유이다(기사에는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문화일보(07. 07. 24) 가정을 지키려는 ‘家長의 폭력’

‘비디오드롬’과 ‘플라이’, ‘크래쉬’와 ‘엑시스텐즈’ 등의 영화로 기억되는 캐나다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인간의 육체와 기계가 결합해 이루어지는 하이브리드(hybrid)한 영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영화는 공포와 공상과학(SF)을 오가며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극단적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인간이 얼마나 혐오스러울 수 있는 존재인가를 파헤친다.

‘비디오드롬’에서는 인간이 텔레비전과 몸을 합치고 ‘크래쉬’에서는 주인공들이 결국 자동차와 섹스를 나누는 식이다. ‘플라이’같은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기계 대신 다른 생명체, 곧 파리의 유전자를 합쳐 결국 파리인간이 되고 만다.

이 해괴망측할 만큼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얘기들을 통해 크로넨버그는 의도적으로 반(反)휴머니즘의 노선으로 자신을 내모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반인간주의의 목표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인간형,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탐구 곧 진짜 휴머니즘에 대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인간다움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야말로 그의 기이한 상상력이 닿으려고 하는 지점이다.



국내에서 뒤늦게 단관상영되는 크로넨버그의 2005년작 ‘폭력의 역사’는 전작들에 비해 에피소드들이 상당히 ‘인간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기계인간이나 파리인간 따위는 이번 작품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크로넨버그는 이제 극단적 사유의 관념론자라는 평가를 벗어나려는 듯 인간 삶의 구체적 행태를 뒤좇는 데 주력한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소박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톰 스톨(비고 메텐슨)은 변호사인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중년 가장이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의 평온한 일상은 어느 날 이 식당에 별다른 이유없이 살인을 일삼고 다니는 두 남자가 침입하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두 악당의 이미지는 마치 트루먼 카포티가 쓴 ‘콜드 블러드’의 두 악한들을 연상시킨다) 톰은 여종업원의 목숨을 위협하는 두 악당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자신도 다치게 된다.



이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톰은 사람을 구한 영웅으로 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가 악몽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왔다는, 언뜻 보기에도 마피아로 보이는 칼 포가티(에드 해리스) 일당은 톰 스톨의 식당과 집을 오가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칼 포가티는 톰이 20년전 필라델피아에서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킬러 조이 리치였다며 그에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강요한다. 자신은 절대 조이 리치가 아니라고 부인하던 톰 스톨은 이들의 집요한 추궁에 조금씩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폭력의 역사’라는 다분히 학술적 분위기의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폭력에 대한 역사적 이론이나 사회정치적인 거대담론을 내세운 작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폭력의 일상성 혹은 그 순환성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영화는 우리가 얼마나 폭력적인 삶에 노출돼 살아가고 있으며 폭력적인 문제에 얼마나 근접해 살아가고 있는가, 그 굴레에서 자유롭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폭력은 결국 폭력으로 계속해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말하려는 폭력의 일상화는 9·11 이후 전세계에 만연돼 있는 테러의 공포와 무관치 않다. 주인공처럼 일단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되면 자신이 그동안 지키려 애썼던 현재적 삶의 가치가 무엇이든, 잊고 싶은 과거가 어떻든 그 구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가 가해자였고 누가 피해자였으며 궁극적으로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폭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기생명력을 가지고 운행되며 그럼으로써 결국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아내 에디는 20년 가까이 과거를 속여 온 남편 톰을 용서하지 않는다. 톰으로 하여금 과거의 킬러, 곧 조이 리치의 삶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건 결국 누구인가. 칼 포가티 같은 마피아 일당인가 아니면 톰에게 마음의 벽을 쌓는 아내 에디인가. 폭력의 공모자는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이다.(오동진 영화평론가)

07. 07. 24.

P.S. 폭력에 관한 책 몇 권을 독서목록에 올려놓고 있다. 그러다 공연히 톰의 경우처럼 '폭력적인' 나 자신을 '재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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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7-2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흐. 이런 영화는 CGV 강남 같은 데에서는 개봉 안하나열?

로쟈 2007-07-2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그런 게 보이지 않는 폭력이지요. 대신에 쓸데없는 영화들만 주변에 널려 있는 현실...

수유 2007-07-28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데이비드의 영화는 즐기진 않으나 봐두어야 할 영화로 분류하고 날짜를 정하는 중입니다..그러고보니 즐겨 달려가 행복하게 봐야 할 영화들과 <폭력의 역사>같은 영화와 여유를 가지고 음미하듯 천천히 걸어가 볼 영화들로 내 방학의 영화들이 나누어지네요..^^

로쟈 2007-07-28 21:27   좋아요 0 | URL
방학의 '여유'가 느껴지네요.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