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기획연재는 지난주에 끝난 '디아스포라의 문학'이다. 곧 책으로 묶여도 좋을 만한 분량이 다루어져 있기에 은근히 출간을 기대하고 있다. 그 중 문학평론가 정은경씨가 러시아의 한인 작가 아나톨리 김을 다룬 꼭지를 옮겨놓는다. 아나톨리 김에 대해서는 재작년인가 (삼성이 후원하는)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자여서 한 차례 소개했던 기억이 있다. 아나톨리 김은 국내에도 주요 작품들이 번역되고 또 서너 명의 전공자가 있을 정도로 많이 연구되고 있는 작가이다.    

아니톨리 김은 '영원한 한국인'임을 피력해왔지만 그의 전작에서 드러나는 주요한 철학적 사유는 자연예찬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이다.

컬처뉴스(06. 02. 11) 러시아적 영혼의 한인작가

한 사람의 영혼과 기질, 나아가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계 문화사의 편의적 가름이 아니더라도 민족성 또는 각국의 문학적 특성을 상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기원하는 것일까? 이러한 어리석은 질문으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것은 아나톨리 김의 문학에서 지극히 러시아적인 영혼을 보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적 영혼, 딱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익숙한 몇몇 예술가의 이름들에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아우라를 통해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다. 위대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에서부터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화가 샤갈, 칸딘스키, 그리고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예술은 그들이 나고 자란 유라시아 대륙만큼이나 광활하고, 백야만큼 신비로우며, 긴긴 겨울밤과 혹한 만큼이나 심오하고 종교적이다(*이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최근에 복사한 책은 데일 페즈맨의 <러시아와 영혼>(코넬대출판부, 2000)이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한번 ‘지형과 풍광, 그리고 날씨가 문학작품에 미치는 영향’이라 제목으로, 과학적(?)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그려보겠다는 맹랑한 생각도 품고 있지만, 나는 개개인의 기질과 영혼, 나아가 공동체의 심성을 형성하는데 자연조건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한 개인의 심성은 그가 매일 마주하는 풍광과 기후를 닮는다. 이를테면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같은 서해와 동해 출신 작가는 같은 바닷가일지라도 기질과 작품 성향에 있어 그 물빛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이 나의 얼치기 ‘문학지리지’이다.

아나톨리 김. 정확히는 아나톨리 안드리에비치 김(Anatoli Andreevich Kim). 이 기다린 러시아식 명명법에 따르면, 아나톨리는 안드리에비치의 아들이자 ‘김’의 후손이다(*약간의 착오인데, '안드레에비치'의 아들이 아니라 '안드레이'의 아들이다). 이름에도 나타나있듯 그는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한인 3세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김’이라는 유전적, 문화적 형질보다는 러시아로부터 더 많은 자양분을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러시아적 영혼의 탄생의 연혁은 그의 할아버지 대로 올라간다.

빈농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땅을 잃고 벌이를 위해 1906년경 국경을 넘어 만주를 거쳐 러시아 땅에 당도한다. 한국에 이미 가족을 두었으나, 그는 그곳에서 새 아내를 맞아 아들 삼형제를 두고 살게 되는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18년, 그는 뜻밖의 손님을 맞는다. 고향에서 가난과 슬픔에 찌들린 형수와 조카들을 보다 못해 한반도를 가로질러 형을 찾아온 동생. 그의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동생의 설득과 러시아의 가족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덜컥 병에 걸려 죽고, 할아버지의 동생은 얼결에 조카 셋을 맡아 키우게 된다.

어린 조카들이 장성하여 정작 고향의 자신의 가족을 찾아가려했을 때는, 이미 험악한 국제정세로 인해 월경이 불가능하게 되어 영영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는 그의 가족사는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김’으로 상징되는 이 한민족의 수난사는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버지 대로 이어지는데, 극동에서 살았던 그의 아버지는 1937년 당시 일본인들이 한인을 스파이로 이용할 가능성을 두려워한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던 것. 그리하여 1939년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또 한 명의 ‘김’이 아나톨리였던 것이다.

아나톨리 김은 작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비롯하여 러시아의 각종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노벨 문학상에도 거론되었을 정도로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하였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는 그의 가족 수난사만큼이나 굴곡 많은 여정을 거쳐야 했다. 초등학교 노어교사인 그의 아버지를 따라 ‘극동의 캄차카에서 우수리 강 지역, 사할린 등지’로 러시아 각지를 전전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목격한 그는 모스크바 미술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퇴한다. 그 뒤 군생활과 크레인 기사, 보일러 공에서 선전 포스터 제작 미술 감독관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 틈틈이 습작을 하고, 5년제 고리키 문학창작 대학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창작 수업을 받지만 작가의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의 글쓰기는 대학 시절 때부터 스승이었던 단편소설의 대가 블라지미르 리진으로부터도 인정받은 수준이었지만, ‘8년간 단편을 들고 편집부 문턱을 드나들었다’라는 회고에서 볼 수 있듯, 기나긴 절망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그것은 물론, 당시 여전히 공식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옹호하는데 충실했던 소련의 문학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 있는 것으로, 이러한 풍토 속에서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색하며 환상과 신비주의적 색채를 보여주었던 그의 단편들은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 경직된 사실주의적 경향과 엄격한 검열의 빗장을 서서히 열기 시작한 러시아 문단의 변화와 함께 아나톨리 김의 문학 또한 차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73년『오로라』에 「수채화」와 「묘코의 들장미」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아나톨리 김은 그때까지 축적된 원고와 글쓰기의 저력을 봇물처럼 터뜨렸고, 그의 독특한 미학의 단편들은 독자들과 비평계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다. 7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표된 그의 작품은 대략 90여편의 단편과 9편의 중편, 4편의 장편에 이른다고 하니, 이 방대한 분량만 보더라도 그간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문학 전공들은 아나톨리 김의 대표작으로 흔히 장편『다람쥐』이나『아버지 숲』혹은 중편 「연꽃」, 「꾀꼬리의 울음소리」 등을 꼽는다. 아마도 러시아의 현대적 환상문학의 대가로 인정받게 된 그의 독특한 서사기법 - 다성악적 화법, 서정성과 환상성, 변신과 변형의 모티브, 비선형적 시간의 병렬구조 등등-과 철학적 사유들이 이들 작품에 중요한 의미망으로, 혹은 총체적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본들만을 피상적으로 접한 필자의 일천한 독서 경험으로는, 다소 난해한 이 북구적 환상 서사들보다는 초기 대표 단편들을 모은 단편선집『사할린의 방랑자들』이 가장 흥미로웠다.

한국어 번역본『사할린의 방랑자들』은 1983년 러시아에서 출판된 중편집『사할린의 사람들』과는 다른 책이다. 첫 번째 단편집인『푸른섬』(모스크바: 소비에트 작가, 1976)과 두 번째 단편집『동틀녘의 자두맛』(모스크바: 청년근위대, 1985)에 수록된 작품들을 선별하여 번역 출간한 이 단편선집은 문제작『다람쥐』를 내기 이전까지 주로 단편 장르에 천착했던 아나톨리 김의 단편 미학의 진수를 보여줄 뿐 아니라, 중장편 전반에 흐르는 그의 철학적 사유와 환상적 서사 기법의 단초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가령, 러시아 문단에 비평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작가적 명성을 확고히 했던 장편『다람쥐』의 문제의식-인간 세계와 다람쥐로 상징되는 동물 세계의 대립과 이들의 변형을 통해 보여주는  예술정신의 파탄과 영혼의 구원 문제-이나『아버지 숲』에서 전달하고 있는 ‘자연’을 통한 신화적 시간의 희구와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켄타우로스의 마을』의 문명 비판, 그리고『신의 플루트』의 불멸과 초월에 대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이 매혹적인 단편모음은 다성악적으로 흘러넘치는 슬라브적 휴머니즘의 시원을 담고 있다.

아나톨리 김의 사회문화 평론적 성격이 강한 장편들이 궁극적으로 ‘동양적 신비주의와 자연을 바탕으로 한 ‘전 인류의 합창’이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지향하고 있다면, 단편들은 보다 소박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삶의 비애와 영혼의 고통, 그리고 그들의 ‘세심한 인정과 극진한 사랑’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아나톨리 김의 단편에 대해 러시아 비평가 안드레이 바씰리예프스끼는 “예술가의 사명은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삶에 애착을 지니게 해주는 것”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을 빌어 고평하고 있는데, 필자 또한 이 작품집의 감동을 매우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총 13편의 단편(혹은 엽편)이 수록된 이 단편집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사할린’의 한인들의 삶의 애환과 수난사를 그린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강도손’ ‘덕수’ ‘봉기 아범’ 등의 한인들은 사실주의 창작방법론에 의해 형상화된 작품들의 주인공들이 아니라, 한인 공동체가 공유하는 설화, 민담, 신화, 또는 심지어 귀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자 화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단지 이야기 자체의 흥미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삶의 비애와 비의, 그리고 어떤 진실된 삶의 국면을 환기시키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할린의 방랑자들」은 사할린의 한 공동묘지 근처의 고갯마루에 출몰하는 유령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남자 혹은 여자, 일본인 혹은 조선 여자로 둔갑하는 괴기담을 통해 이 땅 위에서 벌어졌던 전쟁과 비극적 역사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이밖에도 이 작품에 실린 작품들은 대개 단일한 서사로 요약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인데, 가령 보쌈해간 남자와 벌이는 묘한 애증(「아가씨」), 형제간의 경쟁(「형제」), 친구의 아내를 욕했다가 새벽에 그 여자를 연상시키는 ‘불여우’를 만난다는 이야기 (「불여우의 미소」), 시골로 내려간 작가가 느끼는 평화로움(「동틀녘의 자두맛」) 등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플롯들은 아나톨리 김의 단편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은 아니다.

오히려 아나톨리 김의 단편 미학의 핵심은 그의 서정적 문체가 창출하는 독특한 분위기와 어떤 계기들을 통해 보여주는 삶에 대한 통찰,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적이라 할 수 있는 자기 희생적이며 순결한 영혼으로 가득찬 인물들이다. 예를 들어, 산술적 이익만을 생각하고 갓난 손녀딸을 5일제 탁아소로 보내는 집안 식구들에게 용감하게 맞서는 「사랑」의 주인공 빠벨 이바노비치, 그리고 그토록 마셔대던 술을 어느날 '그냥 마음먹고 끊어버렸다‘는 「동틀녘 자두맛」의 예고르 찌모훼예비치 등은 톨스토이가 그의 민담집에서 제시했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므이스킨’(『백치』)를 통해 보여주었던 숭고한 ‘백치’들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외투」(고골리)에서 나왔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처럼 이들이야말로 ‘아까끼 아까기에위치’들의 진정한 후손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적 휴머니즘과 더불어 아나톨리 김 전작에 나타나는 중요한 철학적 사유의 하나인 자연 예찬과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을 우리는 「쥐가 우유를 마시다」 「동틀녘의 자두맛」 「도시의 벼락」 「쯔나미」 등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파 공학 기사인 「쥐가 우유를 마시다」의 주인공 드미뜨리가 도시를 떠나 숲에서 느끼는 다음과 같은 마음의 평화.  

“젊은 기사는 문득 이것이야말로 완전무결한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강, 황금빛 태양, 자작나무 숲, 버섯, 한없이 긴 여름의 하루, 처와의 재회에 대한 담담하고도 참기 힘든 때로는 부길처럼 타오르는 기대감, 또한 숨막힐 듯하면서도 차분한 기쁨, 잔잔한 행복감, 확신에 찬 희망의 감미로움...”(97쪽) 

자연에서 느끼는 이러한 생의 기쁨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겪는 인간 영혼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나톨리 김이 삶과 인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원천이며, 또한 인류애로 확장되는 고결한 예술혼의 고향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켄타우로스의 마을』로 대변되는 추악한 인간의 욕망과 문명 세계를 급진적으로 풍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급작스러운 비를 피해 키오스크 처마 밑에서 인도 시인과 러시아 노인이 본심과 달리 서로 데면데면해 있다가 벼락 맞은 나무를 보며, 기쁨과 감사의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도시의 벼락」 같은 작품도 결국은 이러한 대우주적 자연 속에서 하모니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의 공감과 생의 기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톨리 김은 문학의 첫 번째 역할이 '인간의 삶의 가치 고양시키는 데 있으며’ 그것은 ‘전인류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얼마나 고결하고, 그들의 인내가 얼마나 감탄할 만한 것인지 보여줄 수 없는 작품들’은 예술이 아니며, 자신의 고독감을 반영하기 위하여 거울을 세워놓는 작가들은 ‘면서기 같은 사람’(257쪽)들이라고 비판한다.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인간은 완전히 행복할 수 없다’(258)고 말하는 이 작가, ‘자신의 진정한 뜻에 대한 의지가 견고하며, 강한 신념 무엇보다 문학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작가를, 온갖 문학 위기의 담론과 혼탁한 회의의 소음 가운데 놓여있는 나는 불에 덴 듯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이 오래고 낯선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여러 지면과 대담을 통해 자신은 ‘영원한 한국인’임을 피력해왔지만, 그 말은 작가로서의 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가 거듭 강조했듯 그의 진정한 조국은 ‘지구’이며 그가 속한 민족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의 진정한 정체성은 ‘세계 시민’이기 때문이다. 흰 당나귀와 나타샤, 그리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난다면, 무엇보다 영혼을 적시는 한 권의 책을 갈급한다면, 이 신비와 환상, 사랑으로 가득 찬 아나톨리 김의 단편선을 펼쳐보길 권한다. 
 

*아나톨리 김의 서지와 전기적 사실은 김현택의 글 (「우주를 방황하는 한 예술혼」,『재외한인작가연구』, 고려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2001)과 최건영의 글 (「아나톨리 김은 누구인가」,『사할린의 방랑자들』, 남명문화사, 1987), 그리고 그의 자전적 에세이(『문학사상』1996년 4월호부터 1998년 4월호까지 김현택에 의해 번역 연재)를 참고한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아나톨리 김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사할린의 방랑자들』(최건영, 손명곤 역, 남영문화사, 1987),『연꽃』(김대경 역, 한마당, 1988),『페자의 통나무꽃』(김현택 역, 동쪽나라, 1993),『다람쥐』(권철근 역, 문덕사, 1993),『아버지 숲』(김근식 역, 고려원, 1994),『켄타우로스의 마을』(심민자 역, 문학사상사, 2000),『신의 플루트』(이혜경 역, 문학사상사, 2000),『꾀꼬리의 울음소리』(심민자 역, 한국통신돔닷컴, 2004),『해초 따는 사람들』(심민자 역, 한국통신돔닷컴, 2004)


07.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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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4-0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첨 댓글 남겨 봅니다.
로쟈님의 문학지리지 얘길 읽으니 다이아몬드 교수의 총,균,쇠가 생각나네요.
지리적 요인이 역사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해 주는 역작이었죠.

로쟈 2007-04-0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은 자주 남기셔도 됩니다.^^
 

지난주인가 드라마 '주몽'이 종영됐다. 어쩌다 몇 장면 본 적은 있지만 내가 아는 건 그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의 면면 정도이지 줄거리도 재미도 알지 못한다(주제가는 수준급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한 드라마의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 없는 건 '고구려'에 대한 이런저런 관심들을 이끌어낸 점.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아래의 기사도 그런 배경이 아니라면 기사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향신문(07. 03 . 13) “연해주에 고구려 성곽 산재” 러시아 학자 밝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동북해안 부근에 고구려 계통의 산성이 산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과학원 내 고고민족역사연구소 O.V. 디야코바 박사가 고고학 계간지 ‘한국의 고고학’(주류성) 최신호에 발표한 ‘연해주 중세시대 성지에 보이는 고구려의 전통’에서 확인됐다.



이 글에 따르면 말갈·발해·여진 등 퉁구스-만어민족이 거주했던 연해주에는 중세시대에 축조된 산성 40여개가 존재한다. 중세시대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발해에서 요·금·동하국에 이르는 시기로, 당시 축조된 산성에 고구려의 영향이 보인다는 것이 디야코바 박사의 주장이다.

디야코바 박사는 산성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주변 계곡이 한눈에 보이는 고지에 축조된 석성(石城·사진)은 주로 말갈과 발해에 의해 축조되었고 외부를 조망하기는 쉬우나 접근이 어려운 산비탈의 성곽은 여진과 동하국(東夏國, 1217~1234)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디야코바 박사는 고지에 산 정상의 평지에 축조된 석성은 “접착제가 될 만한 다른 자재는 전혀 쓰지 않는 등의 축조기법이라든가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고구려 성곽과 매우 흡사하며 심지어는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런 축성 기술은 나라가 멸망한 고구려인이 발해로 유입되는 시기에 도입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여진과 동하국 시기에 조성된 산비탈의 성곽은 연해주에서 26곳이 발견되었는데 진흙을 다져서 쌓는 판축 기법으로 축조됐으며 고구려·발해계 석성보다 분포 범위가 훨씬 넓다.

이 논문을 번역한 러시아 고고학 전문가 강인욱 부경대 교수는 “종래 한국에서는 만주지역에 견주어 거의 주목하지 않은 연해주 동북 산악지역 성곽 조사 성과를 중간 결산하는 한편, 그 전통을 고구려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자못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윤민용기자)

07. 03. 13 - 14.

 

 

 

 

P.S. 언젠가 러시아 고고학 팀과 함께 스키타이 유적 조사에 참여했던 분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근세사 이전에 한국과 러시아가 공히 연루돼 있는 대목은 그러한 고대사 관련이 아닐까 싶다. 국내에는 한때 러시아의 고고학(주로 시베리아 지역 고고학)에 관한 저작들이 몇 권 나온 적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건 시베리아와 극동지역 연구현황과 과제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러시아의 고고학>(학연문화사, 1993)이다. 책을 엮은 최몽룡 교수는 시베리아 선사고고학에 공동 발굴과 연구를 주도했던 듯싶다. 연구성과는 <시베리아의 선사고고학>(주류성, 2003)으로도 묶여 있다.

그밖에 번역서로는 몰로딘의 <(고고학 자료로 본)고대 시베리아의 예술세계 : 서 시베리아 오브-이르띠쉬지역을 중심으로>(주류성, 2003)가 소개돼 있다. 역자는 러시아 고고학 전문가인 강인욱 교수. 그리고, 책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최무장의 <우리문화의 원류를 찾아: 한국고고학의 제문제와 러시아 고고기행>(백산자료원, 2005)도 이 분야의 최근 연구성과를 다룬 책으로 보인다. 참고로, 고고학 분야의 기본서로는 한국고고학회에서 엮은 <한국 고고학 강의>(사회평론, 2007)과 콜린 렌프류 등이 쓴 <현대 고고학의 이해>(사회평론, 2006)가 있다. 후자는 65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입문서로서 책이 나왔을 때 '소장도서'로 꼽아본 기억이 있다. 아직은 '소장할 도서'로 남아 있지만.  

Археология Северной, Центральной и Восточной Азии

러시아쪽 자료를 찾아보니 알렉세이 오클라드니코프(1908-1981)의 <북, 중앙, 동아시아의 고고학>(2003)이란 책이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로 뜬다. 러시아 학술원 회원이었던 것으로 보아 저자는 러시아 고고학계의 거목인 듯하다. 그의 논문들을 집약해놓은 책으로 역시나 660쪽이 넘는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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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7-03-14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고고학까지 손을 뻗치시는 군요. 예전에 처음이자 마지막 고고학 학회 같을때 순수 학회 분위기만 배우고 갔었는데... 그때 마침 고구려 산성에 관한 주제 였습니다. 집에 그대 받아온 연구집 달랑 장서하고 있습니다만^^:

로쟈 2007-03-14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고학' 일반에 대한 관심은 아니고 러시아 관련 기사로 일단 퍼왔습니다. 시베리아 청동기에 관한 내용엔 얼마간 흥미를 갖고 있지만...

소경 2007-03-1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베리아 흑요석 석기는 정말 매력적이더군요. 거기에 날카롭게 다듭어진 세공이며.. 고고학 계간지 소식에 흥분 했었는데 덕분에 좋은 책도 찾아 볼수 있었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얼마전 <레디앙>과 <프레시안> 등의 온라인 저널에서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서평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바 있는데, 그에 대해 정리하면서 겸사겸사 몇 가지 생각을 얹어놓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개강이 코앞인지라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던 차에 마침 그 논쟁을 잘 정리해놓은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덕분에 수고를 덜게 되니 고마운 일이다(하기야 같은 정리라 하더라도 내가 하면 무급이다, 곧 무가치하다!). 나는 나중에 얹어놓을 생각만 추려놓으면 되겠다.

한겨레(07. 03. 02) '트로츠키주의’냐 ‘자율주의’냐

트로츠키주의냐, 자율주의냐? 스탈린주의적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반자본주의 혁명 대안을 놓고 좌익 진영에서 심심찮게 제기되는 이분법적 질문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인터넷 매체 <레디앙>과 <프레시안>을 통해 트로츠키주의 문제가 몇 차례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21세기 사회주의 전망’ 이분논쟁

올해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90돌을 맞은 해다. 그 혁명의 주역 가운데 한사람인 레온 트로츠기(본명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스테인·1879~1940)의 혁명노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반자본주의 혁명 운동 안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됐다. 최근의 국내 논쟁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 책은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가 쓴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아카데미 펴냄)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광범위한 경제학적 주제를 다루는 전반부에 이어, 후반부에서 트로츠키 사상을 재평가하고 거기에 근거해 ‘21세기 사회주의’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논쟁의 불씨를 제공했다.

그 뒤에 나온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은 트로츠키주의 논쟁을 ‘트로츠키주의 대 자율주의’라는 구도로 바꿈으로써 불씨를 키우는 구실을 하고 있다(*나중에 적을 테지만 별로 새로운 내용이 없는 좀 부실한 책이다). 국내 트로츠키주의 단체 ‘다함께’의 운영위원인 최일붕씨가 쓴 이 책은 제1장에서 국내 자율주의 운동의 이론가인 조정환(갈무리 출판사 주간)씨를 실명으로 불러들여 대립지점을 명확히하고 있다(*본격적인 것도 아니고 각주에서 조정환, 황광우 씨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1970년대 후반 아우토노미아(자율) 운동을 벌이면서 형성된 자율주의 운동은 혁명 주체, 혁명 전략, 혁명 전망에서 트로츠키주의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반자본주의 운동이다. 트로츠키주의와 자율주의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1921년 러시아 크론스타트(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에 대한 평가다.

1917년 10월혁명 뒤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내전이 휩쓸고 간 러시아는 산업시설이 거의 다 붕괴된 황폐한 땅으로 변했다. 10월혁명의 주역인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인 레닌·트로츠키·스탈린은 ‘전시 공산주의’ 상황에서 혁명의 유산을 막으려 가혹한 억압적 조처를 시행했다.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고 볼셰비키의 전위독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러시아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상트페트르부르크 요새지역 크론스타트의 수병 부대원 1만5000명은 1921년 3월 1일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요구하며 임시혁명위원회를 결성했다. 빵과 자유, 민주주의를 달라는 요구를 볼셰비키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당시 트로츠기는 볼셰비키 정부의 군사인민위원(국방장관)이자 적군(붉은군대)의 총사령관이었다. 크론스타트 진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혁명을 구하기 위한 피할 길 없는 유혈사태였는가, 10월혁명 이상의 파국을 알리는 조종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그런 주장은 트로츠키 자신이 먼저 내놓았다. 뒷날 국외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는 이 반란 진압을 ‘비극적 필요’라고 불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전은 휴머니즘의 학교가 결코 아니다. 이상론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은 언제나 혁명의 ‘극단성’을 비난한다. 그러나 ‘극단성’은 혁명의 본성 자체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혁명 자체는 역사의 ‘극단성’을 뿐이다.”

트로츠키주의자 최일붕씨는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에서 크론스타트 반란을 백군(반혁명군)이 개입한 반혁명적 봉기로 규정한다. “만약 크론스타트 반란이 성공했다면, 그리하여 안 그래도 약화된 볼셰비키 정부가 타도됐다면 그 즉시 혼란과 그걸 틈탄 공산주의자 학살, 국외로 도주한 백군의 귀향, 그리고 마침내는 극우 독재의 수립이 그 자리를 메웠을 것이다.”

혁명 극단성 비난하지만 불가피

정성진 교수도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진압의 불가피성’을 이해하는 쪽에 선다. “트로츠기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크론스타트 봉기의 진압을 트로츠키가 직접 지휘했다면서 트로츠키의 잔인성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트로츠키는 비극이지만 크론스타트 봉기를 불가피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안에 찬성했을 뿐이다.” 트로츠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진압 당시 트로츠키가 현장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비판자들은 5·18광주항쟁에서 전두환이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반박한다.

크론스타트 문제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질문은 자율주의 진영에서 나왔다. 자율주의 운동과 흐름을 같이하는 책 <무엇을 할 것인가?>(워너 본펠드·세르지오 티슐러 외 지음, 갈무리 펴냄)는 크론스타트 봉기를 러시아 볼셰비키 독재에 대항해 10월혁명의 이념을 실현하려 한 ‘제3의 혁명’으로 묘사한다. 이 책은 크론스타트 반란자들이 자신들의 신문에 쓴 글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노동계급은 10월 혁명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쟁취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좀더 심한 억압이다. 볼셰비키 정부는, 정치 위원과 관료들의 편안한 삶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 국가의 유명한 상징인 망치와 낫을 총검과 감옥으로 바꾸었다.”

책의 지은이들은 트로츠키가 제시한 ‘영구혁명론’에 빗대어 “역사의 아이러니에 걸맞게, 영구혁명이론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존경받는 대표자인 트로츠키는 1917년 10월 이후로 혁명을 영구화하기 위한 가장 진지한 시도를 저지했다”고 트로츠키를 비판한다.

자율주의 진영에서 크론스타트 봉기가 중요한 것은, 볼셰비키 독재라는 전위 중심의 혁명이 아닌 노동자를 비롯한 피억압자 자신들의 자율적 혁명의 가능성을 봉기 참가자들이 보여주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가 아니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코뮨(공동체)으로써 그리고 자유롭게 선출된 자신들의 평의회(소비에트)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자 권력의 원형을 제공했다.”

 

말하자면, 트로츠키주의와 자율주의는 전혀 다른 혁명의 공식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트로츠키주의는 볼셰비키 혁명과 볼셰비키 독재를 역사 발전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인정한다. 트로츠키는 이 혁명 과정의 주역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의 역사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뒷날의 소련을 혁명의 배반이자 탈취라고 보기 때문이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트로츠키는 스탈린 일파와 벌인 권력투쟁에서 밀려나고 볼셰비키당에서 제명당한 데 이어 국외로 추방당한 뒤로 스탈린의 소련을 ‘혁명을 배반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저주했다. 스탈린이 혁명을 배신했으며 권력을 강탈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이 빼앗아 파멸시킨 혁명을 원점으로 되돌린 뒤 거기에서부터 혁명을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스탈린 폐해 트로츠키 안에 내재

반면에 자율주의는 스탈린주의의 폐해가 트로츠키 안에 벌써 내재해 있다고 본다. 러시아 10월혁명을 프롤레타리아의 자율적 혁명이 아니라 볼셰비키라는 전위들의 독자적 혁명이었다고 보는 데서 이들의 관점은 뚜렷이 드러난다. 10월혁명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하나라고 볼 수는 있지만,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된 혁명,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크론스타트 봉기는 볼셰비키의 독재를 뚫고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자기를 지배하겠다고 일어선 ‘혁명의 혁명’이었다.

트로츠키의 사상은 혁명정당이라는 전위를 중심으로 하여 혁명세력을 철저한 규율에 복속시키는 경향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율주의라고 할 만하다. 자율주의의 자율은 이렇게 외부에서 부과하는 규율, 다시 말해 타율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 타율이 근본적으로는 당이라는 조직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따라서 자율주의 운동은 어떤 형태의 당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그렇다면 ‘어떻게 혁명을 이룰 것인가’하는 문제가 불거진다. 전통적인 혁명 도식을 따르면, 혁명세력은 당을 중심으로 하여 뭉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주의자에게 자율주의는 관념적으로 보일 것이고, 자율주의자에게 트로츠키주의는 억압적으로 보일 것이다.(고명섭 기자)

07. 03. 02.

P.S. 자칭 트로츠키주의자인 최일붕씨는' 크론슈타트 봉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크론슈타트 반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반란의 주동 세력은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라고 본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상이한 계급 이해관계가 충돌한 것이엇다.(...) 1917년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농민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과 인근 페트로그라드 공업 노동자들로 이뤄졌었다. 그러나 내전 동안 그들은 앞장서서 전투를 이끌었기 때문에 대부분 죽거나 부상했다. 그래서 1921년 크론슈타트 요새는 새로 징집된 농민 신병들이 메우게 됐다. 크론슈타트 주둔 발트해 함대 수병들의 4분의 3 이상이 이런 농민 신병들이었다."(52쪽) 즉, 반볼셰비키 농민반란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트로츠키의 진압 책임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당시에 우랄산맥 지방에 출타중이었다. 그곳에서 곧바로 모스크바로 가서 제10차 당대회에 참가했다. 그가 크론슈타트에 가지 않은 이유는 노동조합 논쟁에 연루돼 있었기 때문이다. 진압 책임자는 서부전선 담당 적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다. 그러므로 트로츠키가 진압 책임자였다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은 순준히 지어낸 얘기다."(54쪽)

이러한 주장을 펼치면서 저자가 가장 많이 참조하고 있는 책은 아나키스트이기도 한 폴 아브리치(애브리치)의 <크론슈타트 1921>(프린스턴대출판부, 1970)이다.

  

정다신/러시아 과학아카데미사회학연구소 연구원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0216114040&s_menu=문화

다함께가 '국제사회주의자(IS)'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던 시절, 그들은 그나마 학계에서는 유일하게 자신들의 이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정성진에 대해 IS 그룹에 속해 활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만 살아있는 지식인 분자'로 취급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이토록 정성진을 옹호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바로 관념론의 소산이자 자신들의 지주 격인 국가자본주의론을 자신의 조직원도 아닌 이가 풍부하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 분자의 입은 어느새 범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그 누구보다도 저들에게 힘을 실어 줄 이데올로그로 전화하여 칭송받게 됐다. 이번에 <프레시안>을 통해 제기된 논쟁에 이들이 이렇게 핏대를 세우게 된 이유도, 그 동안 타 정파나 집단들이 무시해 오던 다른 때와는 달리,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다함께가 신주처럼 모시는 국가자본주의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토니 클리프에 의해 발명된 국가자본주의론은 저들이 항상 자신들이 트로츠키 교조주의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애호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건, 자신들이 비판에 열려 있고 심지어 트로츠키주의 그 자체까지도 비판하는 융통성 있는 활동가들임을 보여 주려고 애용하는 부분은 철저하게 클리프와 그 계승자들인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교과서에 나온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 진정 역사를 왜곡하는가?
  
  이정구를 비롯한 다함께 그룹, 아니 저들이 암송하는 영국 SWP의 이데올로그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의 모든 혁명을 국가자본주의 혁명으로 만들기 위해, 유일무이한 노동자 혁명이었다는 러시아 혁명을 계속 왜곡해 왔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늘 혁명 계급이 노동자 계급인지, 또 '무슨 무슨 주의'에 오염된 이들인지가 강조돼 왔다.
  
  노동자 계급은 거의 예외 없이 볼셰비키를 지지했고 문맹에 가까운 농민을 비롯한 여타 계급은 철저하게 무슨 주의에 물들고 무슨 주의자들인 양 과장, 왜곡하는 나쁜 습관은 이런 왜곡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 시기 러시아 혁명의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은 볼셰비키 지지 세력이고 농민을 비롯한 여타 계급은 철저하게 반 볼셰비키였다는 특유의 이분법 논리로 역사를 과장, 왜곡하는 일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이전 수병들과는 다른 농민 출신 신병들이 주가 되었던 것은 맞다. 그런데 이정구는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 운운까지 하며 이 점을 무슨 엄청난 일인 양 하고 있다. 바로 그 비밀문서에 나와 있는 당시 노동자 계급 주도의 수많은 반 볼셰비키 파업, 반란 등에 대해서는 아예 침묵하고 말이다.
  
  페트로그라드에는 푸틸로프 공장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반도의 수십 배는 더 되는 러시아에 도시가 페트로그라드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페트로그라드에는 노동자 계급 중에 상대적으로 볼셰비키 지지 세력이 많았다. 그럼에도 심지어 최대의 볼셰비키 지지 기반인 푸틸로프 공장마저 잔혹한 전시 공산주의 기간 내내 반 볼셰비키 파업이 진행된 사실을 이정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이유를 주로 식량 부족에 있는 것으로 축소, 왜곡시키는 버릇도 영국 이데올로그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소비에트 선거에 대한 부분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박정희까지 빗댄 부분을 보며 이정구가 진정으로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인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크론시타트 반란은 일부 반 볼셰비키 세력에 철저하게 조종된 농민 출신 신출내기들의 반란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 당시 전국적으로 줄을 이었던 노동자 계급의 요구였다는 사실은 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되었다. 당시 푸틸로프 공장은 친 볼셰비키 노동자들의 주도 하에 간신히 파업이 마무리되었지만, 그 외 수많은 페트로그라드 공장들에서의 파업은 이정구의 주장과는 달리,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에도 이어졌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이 때 내전은 유럽, 러시아 지역에서는 거의 종결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을 아사 직전으로 몰고 가던 곡물 징발은 계속되었고, 볼셰비키가 주장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비롯한 민주주의 약속은 파괴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을 비롯한 일련의 파업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지극히 정당한 노동 대중들의 항의 행동이었다.
  
  지지하기 애매한 집단마저도 '비판적 지지' 운운하는 다함께가 감히 굶어 죽어 가는 생존권과 관련된 항의 행동을 억지로 노동자와 농민으로 나누어 한 쪽을 반동으로 몰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해 당시 여타의 공장에서의 파업과 시위에는 볼셰비키 지지 노동자들의 볼셰비키에 대한 항의 행동이 즐비했다는 것만은 꼭 알아 두기를 바란다.
  
  이정구가 정직한 활동가이고 진정한 유물론자라면 크론시타트 반란은 크론시타트에서만의 일부 농민 출신 수병의 반란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크론시타트 반란은 크론시타트 외의 전 러시아에서까지 벌어졌던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반란은 정당했다. 진압 이후 볼셰비키가 전적으로 전시 공산주의를 폐지하고 수병들의 주장 중 중요한 부분인 농업과 가내 공업 등의 자유시장경제 요구 등의 맥락에서 시장 요소를 도입한 신경제 정책을 채택한 것은 이정구의 말과는 정반대로 그들의 요구가 옳았음을 증명해 준다. 농민뿐 아니라 노동자들 역시 볼셰비키에 대한 실망과 반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완전한 흑백 논리로 이 당시부터 소련 붕괴 때까지 지속되었던 크론시타트 반란에 대한 거짓을 그대로 인용하여 크론시타트 반란을 왜곡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이기는커녕 스탈린주의의 교조에서 한 발 자국도 못 벗어났음을 보여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약 크론시타트 반란의 주역들이 노동자 계급 출신이면 다함께 동지들은 또 무슨 이유를 댔을까? 혁명의 대의를 이해하지 못 한 후진 노동자들, 멘셰비키 영향 하 노동자들 뭐 이런 게 아니었을까?
  
  제발 현실로 돌아오라!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자의 군대화, 노동조합의 국가 기관화 등등 명백한 반사회주의적 조치들을 옹호하려거든 똑같은 맥락에서, 아니 맥락은 그만 두더라도 역사적 사실만이라도 알고 주장하기 바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영국 SWP와 같은 외국의 이데올로그가 발행한 교재가 아닌 사료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며,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에 대해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며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초를 갖는 것이다. 영국에서 내려 온 거 그냥 아무거나 무조건 외지 말고 사료를 근거로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영국 SWP의 이론은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가장 핵심적인 주장들과 거리가 멀다. 트로츠키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고 자평하는 클리프의 주장만 절대적으로 따르는 다함께에 그들이 좋아하는 '~주의'를 갖다 붙이자면, 트로츠키주의자라기보다는 클리프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하루라도 빨리 국가자본주의를 비롯한 관념론의 극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을 클리프주의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라고 치장하는 데에도 조금 더 나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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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2 0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b 2007-03-02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안녕하세요. 한겨레 기사를 스크랩 해두려고 접속했는데, 벌써 올리셨군요. 퍼갑니다. ^^;
 

영어권 최고의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 리스트를 다룬 책이 영국에서는 다음주에 출간된다고 한다. 작가들에 대한 이 설문조사에서 최고 중의 '최고 작품'으로 선정된 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이다(그래서 이 페이퍼는 '러시아 이야기'로 분류해놓는다). 사실 영어권 작가들의 톨스토이에 대한 선호와 경탄은 20세기 내내 지속돼 온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놀라운 결과는 아니다. 이미 비평가 F. R. 리비스가 자신의 비평집 제목을 <안나 카레니나와 기타 에세이들>(1967)이라고 붙였을 때도 징후적으로 드러난 게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강의시간에 자주 다루는 작품들이 상위권에 랭크돼 있어서 반갑다. <롤리타>가 4위, 체홉의 단편집이 9위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의외로 좀 처져서 17위이다. 흥미로운 건 독어권 작품이 탑10은 물론, 20권 안에 한 작품도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 20위까지를 보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영문학에 이어서 러시아문학 5, 프랑스문학 2,  스페인/남미문학 2, 그리스문학 1의 순이다. 영문학 작품 가운데는 동시대 작품이 단 한편도 포함돼 있지 않아서 특이한데, 작가들의 안목이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일보의 관련기사와 함께 '더 타임즈'의 원기사를 옮겨놓는다. 우리에게도 소개된 몇몇 작가들의 탑10 리스트도 붙여놓았다.  

한국일보(07. 02. 26) 영어권 작가들 “톨스토이 최고"

영어권 최고의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러시아 대문호 레오(*레프)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리나>가 선정됐다. 톨스토이는 역사소설 <전쟁과 평화>로 3위에도 이름을 올려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됐다.

출판사 W W 노튼이 노먼 메일러, 피터 캐리, 스티븐 킹, 톰 울프 등 미국, 영국, 호주의 유명 작가 125명에게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문학작품 10권을 물은 결과 이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가 3월1일 발매되는 신간 <톱 텐(The top 10)>을 인용해 23일 보도했다.

125명의 작가들이 뽑은 544권의 작품 중 2위는 구스타프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차지했으며, 4위에는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뽑혔다. 러시아 소설은 세계 3대 단편작가로 꼽히는 안톤 체홉의 <체홉 단편선>을 9위에 올리며 톱 10 중 4개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영어권 소설 중에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5위에 올라 작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영어소설의 영예를 차지했다. 여성 작가로는 <미들 마치>의 작가 조지 엘리엇이 10에 올라 톱10에 턱걸이했다.

설문에 응한 작가들은 근ㆍ현대 고전을 선호한 반면 동시대 작가들에겐 인색했다. 이안 머큐언의 <속죄>, 마틴 에이미스의 <런던 들판>, 살만 루시디의 <한밤 중의 아이들> 같은 현존하는 작가들의 걸작은 1표밖에 얻지 못했다. 설문에 참가한 미국 하버드대 강사 스벤 버커츠는 “작가들이 꼽은 최고작은 감각적 문장과 함께 사랑과 죽음의 드라마를 이끌고 가는 강렬한 등장인물들이 나온다는 게 공통점”이라고 분석했다.(박선영 기자) 

최고 작가들이 뽑은 최고 작품

1.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2. 구스타프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3.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4.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5.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6. 셰익스피어 <햄릿>

7. 스콧 F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8.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안톤 체홉 <체홉 단편선>

 

10.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11.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12. 허먼 멜빌 <백경>

13.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14.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

15. 호머 <오디세이>

16.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17.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18. 셰익스피어 <리어왕>

19. 제인 오스틴 <엠마>

20. 가브리엘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자료 : 더 타임스(07. 02. 23) 

When serious writers relax, they’re always in the mood for a romance

Leo Tolstoy

Have you ever wondered what books your favourite author would choose as their favourites? Well, here is your chance to find out. Leading writers from Britain, America and Australia have been asked to list their top ten works of literature, and the results will be published in a book next month.

The top-rated work was Anna Karenina by Leo Tolstoy. His other great epic, War and Peace, came third. Two other Russians also made the top ten. Vladimir Nabokov’s infamous novel Lolita came fourth and the stories of Anton Chekov ninth.

Gustave Flaubert’s Madame Bovary came second. Shakespeare was the highest rated British author, coming sixth with Hamlet.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by Mark Twain was voted the greatest American novel. The only woman to make the top ten was George Eliot with Middlemarch.

The 125 authors selected 544 titles. Contemporary authors were conspicuous by their absence. Ian McEwan’s Atonement, now being made into a film starring Keira Knightley, had only one nomination, as did Martin Amis’s London Fields. Even Midnight’s Children by Salman Rushdie, which won the “Booker of Bookers”, gained only one nomination.

Peter Carey, the Australian author who won the Booker Prize twice — for Oscar and Lucinda and True History of the Kelly Gang — picked Madame Bovary as his favourite novel. Margaret Drabble, author of 17 novels, was the only author to name Shakespeare’s Antony and Cleopatra. Thomas Keneally, who won the Booker for Schindler’s Ark, his historical novel about the Holocaust, picked Brontë’s Wuthering Heights.

The horror writer Stephen King chose as his favourite book The Golden Argosy, an anthology of 55 short stories from authors including Hemingway and Fitzgerald, first published in 1947 and reissued in 1955, which he bought in a sale for $2.25. He tells the editors of The Top Ten: “At that time I only had $4 and spending over half of it on one book was a hard decision. I’ve never regretted it. [It] taught me more about good writing than all the classes I’ve ever taken.” Independent People, a chronicle of endurance and survival by the Icelandic Nobel laureate Haldór Laxness, appeared on 19 lists.

J. Peder Zane, editor of The Top Ten, said: “We live in a Golden Age. Never before have so many books been within such easy reach. But when anything is possible, choice becomes torture. What to pick? Where to start?” The premise of the book was simple, he said: “Who knows more about great books than great writers?”

Sven Birkerts, a lecturer at Harvard University and one of the book’s contributors, said: “One thing that stands out so clearly in the list of top choices is the outsized vividness of the characters. . . They are our representatives in the world of life imagined — Prince Andrei and Natasha, Pierre, Anna and Vronsky, Levin and Kitty, Tom and Huck, Emma, Gatsby and Daisy, Hamlet, Ophelia, Humbert Humbert and Lolita, Dorothea Brooke and Casaubon. Even to name them is to recall their compact human resonance. To read their lives is to be forced to reconsider our own.”

He said that he was surprised that classics such as Joyce’s Ulyssesdid not make the overall top ten. “There is no disputing tastes,” he said. “But there is also no disputing that collective preferences exist. The collective preference reflected in the list of greats is clearly for memorable character-driven dramas of love and death delineated in sensuous nuanced prose.” The Top Ten is published by W W Norton on March 1, price £9.99.

Norman Mailer

1 Anna Karenina Leo Tolstoy

2 War and Peace Leo Tolstoy

3 Crime and Punishment Fyodor Dostoevsky

4 The Brothers Karamazov Fyodor Dostoevsky

5 Pride and Prejudice Jane Austen

6 U.S.A. (trilogy) John Dos Passos

7 Moby-Dick Herman Melville

8 The Red and the Black Stendhal

9 Buddenbrooks Thomas Mann

10 Labyrinths Jorge Luis Borges

Stephen King

1 The Golden Argosy edited by Van H. Cartmell and Charles Grayson

2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Mark Twain

3 The Satanic Verses Salman Rushdie

4 McTeague Frank Norris

5 Lord of the Flies William Golding

6 Bleak House Charles Dickens

7 1984 George Orwell

8 The Raj Quartet Paul Scott

9 Light in August William Faulkner

10 Blood Meridian Cormac McCarthy

Margaret Drabble

1 Antony and Cleopatra William Shakespeare

2 Emma Jane Austen

3 Madame Bovary Gustave Flaubert

4 The Three Sisters Anton Chekhov

5 The Aeneid Virgil

6 The Divine Comedy Dante Alighieri

7 Germinal Émile Zola

8 The Golden Notebook Doris Lessing

9 To the Lighthouse Virginia Woolf

10 The Old Wives’ Tale Arnold Bennett

Thomas Keneally

1 Wuthering Heights Emily Brontë

2 Treasure Island Robert Louis Stevenson

3 The Scarlet Letter Nathaniel Hawthorne

4 Great Expectations Charles Dickens

5 War and Peace Leo Tolstoy

6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James Joyce

7 Mrs Dalloway Virginia Woolf

8 The Great Gatsby F. Scott Fitzgerald

9 Voss Patrick White

10 The Tin Drum Gönter Grass

The Top Twenty

1 Anna Karenina Leo Tolstoy

2 Madame Bovary Gustave Flaubert

3 War and Peace Leo Tolstoy

4 Lolita Vladimir Nabokov

5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Mark Twain

6 Hamlet William Shakespeare

7 The Great Gatsby F. Scott Fitzgerald

8 In Search of Lost Time Marcel Proust

9 Stories of Anton Chekhov Anton Pavlovich Chekhov

10 Middlemarch George Eliot

11 Don Quixote Miguel de Cervantes

12 Moby-Dick Herman Melville

13 Great Expectations Charles Dickens

14 Ulysses James Joyce

15 The Odyssey Homer

16 Dubliners James Joyce

17 Crime and Punishment Fyodor Dostoevsky

18 King Lear William Shakespeare

19 Emma Jane Austen

20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Gabriel GarcÍa Márquez

07.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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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2-2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톨스토이와 스티븐 킹은 알겠는데. 체홉은 그럼에도 숙제군요.
톨스토이가 그랬다죠. "체홉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글쓰기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올 해 전작으로 나가볼까 '벼르고만' 있답니다. 당근, 백년의 고독이 대기중입니다. 붉은 왕세자빈 평은...표지는 거창한 시늉을 했지만.

해적오리 2007-02-2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의 고독은 예전부터 봐야지만 하면서 못보고 있는 책이네요. 한 일년 책만 볼 수 있을 수 있을 까요?

기인 2007-02-26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작가들이 '백년동안의 고독'을 뽑은 것. '포즈'가 아닐런지. 이런것은 무기명 투표로 해야 하는데 ㅋㅋ 고전의 정치성!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호메로스의 오디에우스보다 앞서네요. 유명한 영문학자들에게 물으면 다르게 나올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2-2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임/ 톨스토이가 체홉의 몇몇 단편들을 높이 평가한 건 사실이지만 드라마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죠. '저게 뭔가?'
해적님/ 책읽기 가장 좋은 곳은 '빵'이라고들 합니다...
기인님/ 작가들의 '포즈'라니요? <고독>이 졸작이라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작가들이 안 읽었을 거라는?(참고로 영역본은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그리고 작가들이 학자들보다는 아무래도 '실전적'이죠. 문학연구자들도 대개 동의하는 것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소설이 더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쓰기 어려운 소설은 톨스토이적인 소설이지요...

콜필드 2007-02-2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나라별로 조금씩 틀린 거 같기도 합니다.
전에 각국을 대표하는 문학가들에게 의뢰했을 때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제일 인기가 좋았었어요.
유일하게 4편이 포함된 작가였으니까요.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순위야 그렇다치더라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안 들어간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 되네요.
그리고 문학연구자들 사이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를 좀 낮춰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하는 사람도 많이 봤거든요.
문학의 '객관성'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부류라면 플로베르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 작품 말미에 나오는 그 '결론'이라는 게
영 부담스러워서요. 부활 같은 예를 들 수 있겠죠.
톨스토이가 높게 평가되었던 건 지금보다는 예전 같고
현재는 그 작법이 다분히 근대적이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폄하되고 있는 듯 합니다.

물론 문학계에 몸담고 있는 분이니
제가 틀린 말을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제가 본 작가나 지망생
혹은 평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대개 도스토예프스키였어요.

콜필드 2007-02-2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예를 하나 들자면
몇년 전에 김원일 선생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얘기를 하시며 열변을 토하시더군요.
자기는 전쟁을 겪었는데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그것보다
더한 충격이었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콜필드 2007-02-26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미국은 서사와 '이야기의 힘'이 중요시되고 있어서
관념적인 작품들이 배제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디킨스가 포함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닌가 싶구요.
핀천이야 그렇다치더라도
포크너가 없다는 것이 그런 특성을 말해주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로쟈 2007-02-2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말씀드린 톨스토이에 대한 선호는 영어권의 얘기입니다. 물론 소비에트 시절에도 톨스토이는 좀 다른 이유에서 높이 평가되긴 했지요(도스토예프스키가 퇴폐적인 작가로 폄하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우리의 경우에도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선호는 1950년대(전쟁)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박경리, 김원일 선생 같은 연배의 작가들이 도스토예프스키에 공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지요(톨스토이는 상류 사교계를 배경으로 다루니까 '우리'의 실감과 거리가 멀지요). 첨언하자면, <부활>은 소설가 톨스토이와는 상대적으로 무관한 작품인데(작가 자신이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유독 한국에서 많이 읽히고 과대평가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소설가 톨스토이의 작품은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하지 무라트> 정도입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2-26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잘 봤습니다, 퍼갈게용.
3월달엔 새판 출간 기념으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려 했는데,
톨스토이부터 읽어봐야겠군요 ㅎ

기인 2007-03-06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백년동안의 고독'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말하고자 한 건데, 해적님 때문에 '백년동안의 고독'이라고 쓰게되었네요! 이런 오타가;;;;

로쟈 2007-03-06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듯하네요. <잃어버린 시간>도 작가들이 좋아하는 소설이니까요...
 

개인적으로 TV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억지로 안 보는 건 아니지만 굳이 찾아서 보지는 않는 만큼 별로 볼일이 없다고 해야 맞겠다. 시트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데 요즘 상종가를 치고 있는 '거침없이 하이킥'도 우연히 한 차례 20여 분 정도 본 게 전부이다. 그래도 덕분에 대강의 인물 구성은 알고 있다. 그건 아래와 같은 기사를 '재미있게' 읽는 수준은 된다는 얘기이다. 러시아/러시아어에 대한 홍보도 할 겸 어제 방영됐다는 '거침없이 하이킥'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뉴스엔(07. 02. 24) '하이킥’ 친절한 해미씨 러시아어로 신지에 복수 “푸틴과도 오케이?”

‘사육해미’ 박해미가 러시아어에 도전장을 던졌다. 23일 방송된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완벽녀 해미(박해미 분)가 러시아어를 독파하는 내용이 그려졌다. 사연인 즉, 평소 해미와 앙숙인 동서 신지(신지 분)는 해미를 골리기 위해 러시아 유학 시절 친구와 러시아어로 해미의 험담을 한다. 하지만 눈치 백단인 해미가 이를 모를 리 만무하다. 러시아어로 험담을 하는 것에 기분이 상한 해미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독학, 러시아어 책을 펼쳐들고 완벽한 독파에 들어갔다.

러시아어에 빠져 드디어 말문까지 열게 된 해미. 복수의 기회는 예상 외로 빨리 찾아왔다. 신지가 러시아 친구를 데리고 해미의 병원을 찾은 것. 신지는 러시아 친구의 허리가 안 좋다며 치료를 해달라고 부탁하면서도 또 해미의 험담을 시작한다.

이 때 유창한 러시아어로 “내가 아무리 러시아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둘이 그러면 듣는 사람 기분 나쁘지 안 그런가요?”라고 쏘아대는 해미. “그런데 준이 엄마는 발음이 좀 아니다. 그래 갖고 자유롭게 대화가 돼? 공부 좀 더 해야겠어. 오케이?”라고 이어진 멘트는 신지를 넉다운 시키기에 충분했다.

한편, 해미는 러시아어의 매력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듯하다. 3개월 후 해미는 ‘한방교류를 위한 재러시아 한방의료인 세미나’ 강단에서 유쾌 통쾌한 웅변을 토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병원에 걸린 해미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기념사진은 마지막까지도 웃음을 멎지 못하게 했다.(고홍주 기자)

07. 02. 24.

 

 

 

 

P.S. 러시아어는 각 대학이나 학원별로 지정된 교재를 사용하기 때문에(러시아어나 영어로 된 교재도 많이 쓴다) 내가 알기엔 '강추' 교재라는 게 따로 없다. 또 '러시아어' 강좌를 맡은 적이 없어서(한두 번 맡을 뻔했지만 모두 인원 미달로 폐강됐다) 시중에 어떤 교재들이 나와 있는지 조사해본 바도 없다. 대략 '초급자'라면 열거한 교재들을 선택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몇 달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완벽녀 해미'처럼 '하이킥'은 못 날리더라도 '로우킥' 정도는 선보일 수 있으리라. 공부는 소질에 앞서서 얼만큼 흥미를 갖느냐의 문제, 혹은 해미처럼 복수심의 문제이다...   

참고로, 이종격투기에서 사용하는 러시아어 전문술어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이킥'은 (사전적으로 말하면) "븨소끼 우다르"라고 발음하면 된다('븨소끼'가 '하이'이고 '우다르'는 '타격'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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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4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는 이거 딱 한편 봤는데 재밌더군요. 흐흐 이것도 보고 싶다. 로쟈님 대학에서 그럼 러시아어 말고 어떤거 강의하세요? 궁금.

하이드 2007-02-24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동창회를 나가면, 전공도 아니면서 러시아어를 하는 애들이 꽤 있어요. ( 전공도 아닌데, 왜 그런지;;) 영어 제대로 하는 사람도 없는데, 러시아어로 얘기하는 애들 보면 신기. 배우기가 아주- 어렵단 것만 알고 있습니다. 흐- , 그러고 보니, 그중의 한 놈은 고려인과 결혼도 했네요. 카자흐스탄 호텔 카지노에서 일했었는데, - 일어, 독어, 불어, 더 나아가서 스페니쉬, 이탈리어까지도 공부해보고 싶지만, 원서로 읽어볼 엄두도 안나는게 러시아작가들이에요.

기인 2007-02-2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에 후배 한명이, 러시아어로 논자시 보는데, 자기 혼자만 볼 것 같다고, 제발 쉽게 출제하라고 빌고 있었는데요 ㅎㅎ 이거 정말 요즘 상한가인데, 한번 봐바야 겠네요.

로쟈 2007-02-24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주로 문학과 문화쪽 강의를 합니다. 아르바이트로는 미학과 국문학쪽 강의도 하구요. 요는 닥치는 대로 다 합니다.^^;
하이드님/ 아랍어보다는 쉬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론 중국어보다도 쉬운 게 아닌가 싶고. 외국인들이 배우기엔 물론 한국어보다 훨씬 싶다고 하네요...
기인님/ 그 후배는 누군지 알 것도 같네요.^^ 논자시야 붙여주려고 보는 시험인데요...

2007-02-25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5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런 '전설'이 또 있군요. 통쾌하면서도 좀 씁쓸한 '하이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