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어린이날 행사'를 하느라 한 극장에서 어린이 뮤지컬을 보고 덕수궁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아이는 뮤지컬보다는 덕수궁을 더 마음에 들어했다). 그렇게도 하루가 간다. 누적된 피로 탓인지 별다른 의욕 없이 오래전 파일들을 뒤적이다가 <도스토예프스키: 인간의 심연>(신구문화사, 1974)를 읽고 몇 대목 옮겨적어둔 걸 발견했다. 책은 아마도 6-7년전에 읽은 듯하다(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형서점들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었다).

 

 

 

 

책은 저자와 역자가 모두 눈에 띄는데, 먼저 역자는 소설가이자 국문학자였던 백사 전광용(1919-1989) 선생이다. <꺼삐딴 리>의 작가 말이다(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꺼삐딴'은 '캡틴'의 러시아어이다). 그리고 저자는 겉표지에 '마아크 스로닐'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아무런 소개가 덧붙어 있지 않지만 짐작엔 '마르크 슬로님(1894-1976)'의 오기이며 아마도 일역본을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착오가 빚어진 게 아닌가 싶다. 가령 영역본이라도 참조했다면 'Marc Slonim'을 '마아크 스로닐'이라고 옮기긴 어려웠을 터이다.

러시아문학자인 슬로님의 책은 20세기 러시아 문학사인 <소련의 작가와 사회, 1917-1977>(열린책들, 1986)이 번역/소개된 바 있다. 그가 러시아어로 쓴 책 중의 하나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여인>(1953)이며, 그 영역본이 'Three Loves of Dostoevsky'(1955)이다(나는 3년전 모스크바 체류시 러시아어본을 우연히 구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전기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그 연인/여인을 바로 꼽아볼 수 있는데, 첫번째 아내였던 마리야 이사예바, 잠시 염문을 뿌렸던 여대생 아폴리나리야(폴리나) 수슬로바, 그리고 두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그들이다. 슬로님의 책은 주로 이 세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를 살핀다. 아래는 그 중에서 내가 옮겨적었던 대목들인데, 다시 대조해보지 않은 탓에 표기나 인용쪽수 등에서 착오가 있을 수 있다.   

 

"흥미진진한 것은 결혼 직후부터 물질적인 곤궁과 걱정으로 눈코 뜰 새 없었을 소설가가 다시 베르그노프(*베르구노프)에게 뛰어다니며 「그는 친형제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일이다. 청년 교사에 대하여 소설가는 호기심과 호의가 섞인 기묘하고 무언가 육체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여자든 남자든 자기의 배우자를 그 전에 사랑했던 사람에 대하여 자주 느끼는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질투심과는 상반되어 어떤 때는 질투심과 함께 실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 특별한 애욕적인 인척관계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병적인 힘을 수반하여 나타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제자인 로자노프라면 다분히 이 감정을 「만인의 친척」이라는 근친 간통에 가까운 성적 육체적인 공유의 감각으로 설명하고 한량없는 성감정을 가지는 사람들에 특유한 생각이라고 말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참말로 이러한 종류의 인간에 속하였다."(71)  

 

 

 

 

 

 

 

 

 

도스토예프스키는 첫번째 아내가 되는 이사예바와는 시베리아의 유형지에서 만나게 되며 간곡한 구애 끝에 1857년에 결혼하게 된다(사진은 1850년대말에 찍은 것으로 돼 있다). 첫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된 이사예바에게 베르구노프란 청년 교사가 새로운 등장함으로써 한동안 도스토예프스키의 애를 태우게 되는데, 그와 이 연적과의 '기묘한' 관계에 대해선 모출스키의 평전에서도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자연스런 일이지만 작가의 경험은 창작에도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모출스키는 <영원한 남편>과 <네토츠카 네즈바노바> 같은 작품을 거명한다.

 

거기에 덧붙여 <죄와 벌>에서 마르멜라도프의 아내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이사예바를 모델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카테리나와 마찬가지로 이사예바 또한 폐병을 앓았으며 그 때문에 1864년 세상을 떠난다. 참고로, <영원한 남편>에 대한 가장 뛰어난 분석은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한길사, 2001)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제자'로 언급된 로자노프는 <고독>(문학과지성사, 1999)의 저자 바실리 로자노프를 말한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숭배하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연인이었던 수슬로바와 결혼한다(물론 불행한 결혼이었다).    

 

 

폴리나와의 여행: "많은 남성들은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를 배반하고 딴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증오를 느끼기보다 더 그 여자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이다. 마치 타락이 그 여자에게 일종의 특별한 신비적인 부끄러운 애욕적인 매력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설가는 가장 중요한 그 일만 빼놓고는 마치 신혼부부와 같은 이 여행에서처럼 여자로서의 폴리나에게 모욕을 당한 일은 없었고, 또 이처럼 그녀를 그리워한 일도 없었다... 발에 키스하고 싶었다는 에피소드나 폴리나의 「안타까운」 발바닥의 표현은 참말 도스토예프스키답다. 확실히 그는 페티시즘(fetishism)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여성의 발이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불타는 애욕의 흥분의 대상이었다."(119)  

 

 

 

 

 

 

 

 

 


그녀는 소설가를 상대로 자기의 권력을 시험하고 자극적인 즐거움을 느끼면서 육체관계를 거부하였다. 하기는 육체관계의 거부는 특별한 노력의 소산은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녀는 바덴에 도착한 후 일기의제일 첫줄에 썼다. 또 그녀는 다음과 같은 레르몬토프의 말을 되새기고 있다. 「인생은 냉정하게 조심하여 내다보면 허무하고 어리석은 농담이다.」... 차디찬 모멸 짙은 조소로써 그녀는 자기를 소유하려고 하는 소설가의 가냘픈 행동을, 그의 정욕의 발작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를 희롱하고 또 할 수 있는 데까지 유혹하면 갑자기 즐거워져 견딜 수 없었다. 사실 거기에는 독특한 쾌락이 있었고, 그 쾌락도 소설가는 맛보았다. 그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늘 이중이었으나 이 때만은 문자 그대로 잔인성과 전제주의에 짙게 물들어 있었다.(120)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이들이 벌을 받거나 매를 맞는 모습을 몇 번이고 그렸다. 아이들의 완전한 무방비, 꼬집든가 매질하든가 폭행하든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방심이 악의 없는 즐거움을 유박하고, 어두운 본능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저항하지 못한다. 어른들은 애들 상대로 한없는 포악의 욕망을 실현한다. 도덕적 정신적인 사디즘이 육체적인 사디즘으로 바뀐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즐긴 테마의 하나이다. 루소의 <참회록>을 비롯하여 세계문학은 체형의 에로틱한 성질이나 죄와 성적인 쾌락의 결합을 때때로 그리고 있으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테마가 그밖의 모든 그의 테마가 그러하듯이 아주 깊게 파들어가고 형이상학적으로 된다. 그는 매질이나 발길로 차는 폭행을 인간의 기초적인 잔인성, 인간의 죄 많은 저주스러운 본성에 대한 악의, 어쩔 수 없는 지배력이라고 생각하여, 아이들에 대한 고문을 아담의 원죄 탓이라고 한다.... 이 소설가 자신은 유년시절에 한번도 체형을 받은 경험이 없다. 의사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정에는 체형이란 볼 수 없었다. 그와 같이 아버지가 된 소설가도 아이들에게 손가락 하나 건드려본 일이 없다.(165)  

 


그녀(안나)는 선량하고도 그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고독에 고민하여 결혼에다 정신적인 의지를 구하였다. 그와 동시에 결혼만이 그를 육욕의 동요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그는 결혼을 교회와 신에게서 축복받은 동서(同棲)라고 믿고 종교적인 근거와 애욕의 정당성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결혼은 배신과 기만에 대한 최상의 보증이기도 했다... 현재의 그에게는 새로운 이탈이 필요하였다. 아내와 가정을 가지고 환영과 이념의 세계, 끊임없는 정열과 불타는 고뇌의 세계에서 사적이고도 가정적인 작은 세계에로의 도피가 필요하였다... 자신의 병적인 것을 버리고 천재라든가 간질병 환자라든가, 구신주의자도 유형수도 방탕자도 이상주의자도 아닌 것이 되고 싶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같이 평범하고 싶었다. 결혼은 꼭 필요하였다. 그는 그것을 자각하고 안나와 「주판 따짐」으로 결혼할 각오를 하였다. 그는 의식적인 계산과 본능적인 지향의 교착을 「주판 따짐」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 그의 늘 있는 전격적인 사랑이란 볼 수 없었다. 소설가가 고지식하고 단정한 여비서 속에서 여자를 알아본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187)


정신분석학자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미친 듯한 도박열 속에서 그의 성적인 콤플렉스나 불만의 토출구를 무조건 발견한다. 그러나 룰렛이 그를 꼭 붙잡아매 놓은 것은 불합리 속으로의 도피였었고 우연한 세계와의 접촉을 위한 것이었다. 룰렛의 성공, 불성공은 논리의 법칙에 대한 모독이다. 그것은 도덕도 유클리드 기하학의 유한 공간도 아직 없었던 인간세계의 애매한 어두컴컴한 근원에 통하는 것이다. 도박 속에는 탄생이나 빈곤, 신분, 경우 등의 불공평을 행운의 멋진 일격, 운명에 대한 도전에 의하여 시정하는 무한의 가능성이 있다... 안나는 이러한 일을 부분적으로 막연하게 느꼈다. 그녀는 「그것」을 고질이라고 부르고, 그 병에 연관되는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억지로 남편을 완쾌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217)


도스토예프스키가 좀 침착하여 가정생활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50고개를 훨씬 넘어서였다. 그는 여전히 조용한 밤, 쌍촛불 밑에서 일을 하는 것을 즐기고 아침에는 늦잠을 잤다. 그는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고 조반상에 나타났고 줄곧 옷에 묻은 때를 걱정하였다. 그는 차를 잘 마셨으나 그 차 만드는 방법에 조건이 많았으므로 안나조차도 거절하는 정도였다. 그러면 그는 손수 주전자와 더운 물을 가져다 몹시 달고 진한 차를 두 잔 연거푸 마시고 석 잔째는 서재로 가지고 들어가서 일을 하면서 마셨다. 그의 방안은 늘 같은 상태로 있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매일 아침 안나는 가구나 책상 위의 서류, 신문, 책의 위치를 점검한다. 간밤 소님이 왔을 경우는 더 한층 심하다. 책상이나 서류의 먼지를 터는 것도 그녀만의 일이었다. 만일 무어 하나라도 모습이 다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반드시 한참 떠들썩했다. 또 그의 책상과 나란히 연필과 수첩을 놓은 안나의 조그만 책상이 있어 여기서 그녀는 속기나 교정을 한다. 도스토에프스키는 원고를 새까맣게 가필하고, 여백에는 사람 얼굴이나 집이나 물건 모양을 그렸다. 그의 책상 서랍에는 사탕과자(과일과 설탕으로 만든과자), 건포도, 호두 같은 것이 들어 있어 애들이 어머니의 눈을 숨어가면서 서재로 뛰어들면 그것을 뿌려주었다. 4시 가까이 그는 산책을 나간다. 돌아올 때는 초콜릿, 튀김, 통조림 등을 산다. 6시에 저녁을 먹고 9시에는 온 가족이 같이 차를 마신다. 그리고서는 그는 일을 하거나 외출하거나 한다. 때로는 손님을 부른다. 손님은 거의 극친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친구들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였다.(234-5)


스트라호프는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은 인간이라고도 행복한 사람이라고도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질투장이이고 방탕자이고, 일평생 자신을 비참하게 할 만한, 그가 그처럼 심통 사납고 영리하지 않았다면 우스꽝스럽게 밖에 보이지 않았을 흥분 속에서 지냈다. 그 사람은 루소처럼 자신을 가장 뛰어난 인간, 가장 행복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위스에서는 내 눈앞에서 하인을 무참하게 막 부렸다. 하인은 끝내 성을 내며 󰡔저도 인간입니다󰡕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이러한 광경은 늘상 일어났다. 그가 자신의 악의를 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236)    

 

글이 길어져서 다음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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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연속이다. '소련 공산당 정치가'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역대 공산당 서기장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흐루시초프부터 옐친까지인데, 옐친만이 '서기장'이란 타이틀에서 열외이겠다. 대신에 그는 대통령이었다... 

한겨레(07. 05. 14)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③-1 소련 공산당 정치가

» 니키타 흐루시초프. <북폴리오> 제공
» 니키타 흐루시초프. <북폴리오> 제공
니키타 흐루시초프 =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1963년 다차 정원에 앉아 있고 그 옆으로 정치국원들이 보인다. 감성적이고 간혹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 흐루시초프는 1956년 스탈린 체제에 맹공을 가했다. 수백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나거나 사후에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소련의 신념체계에 의심을 품지 않았으며, 1956년 봉기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제거하려 한 헝가리인들을 야만적으로 진압했다. 1963년 흐루시초프를 대신하게 될 레오니드 브레주네프가 떨어져 걷고 있는 모습이 사진에 보인다. 흐루시초프는 불같이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녔고, 예전의 당 지도자들에게는 없었던 대중에 영합하는 재간도 있었다.

» 니키타 흐루시초프. <북폴리오> 제공

» 브레주네프. 사진/V. 무사옐랸. <북폴리오> 제공
브레주네프 = 다차에서 손녀와 함께 있는 가정적인 인물 브레주네프. 농촌과 숲 속에 있는 이런 집들은 노멘클라투라의 큰 특권 중 하나였으며 서열이 높을수록 크기가 더 커졌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외곽에 수수한 목조 다차를 가지고 있었다. 브레주네프는 다섯 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크림에 있는 차르의 리비디야 궁처럼 그루지야의 흑해 연안에 있었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 사진/J. 토레가노. <북폴리오> 제공
미하일 고르바초프 = 붉은광장의 레닌 영묘 위에 서 있다. 야심 많고 카리스마가 뛰어났던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공산주의자였고 당의 죽음을 주재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관용에서 분출된 힘에 희생당한 마지막 소련 지도자가 되었다.

» 보리스 옐친. 사진/G. 핀하소프. <북폴리오> 제공

보리스 옐친 = 대통령인 그의 권위는 건강 악화와 급작스러운 수상 경질, 불규칙적인 공식 석상 등장 등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거의 종말에 가까운 경제 몰락, 국내 분리주의자들, 해외 영향력 붕괴 같은, 그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끔찍하였고 비정상적인 대응은 문제들을 더욱 악화시켰다.(<북폴리오> 제공 )

07.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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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서 옮겨오고 있는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세번째 꼭지는 '볼셰비키 혁명가'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08093.html). '레프 트로츠키'란 이름이 좀 낯선데, 흔히 '레온 트로츠키'로 알려져 있지만 러시아어 이름은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이다.

한겨레(07. 05. 09)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③ 볼셰비키 혁명가

»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 <북폴리오> 제공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 = 1897년 시베리아로 유형 가기 전 모습이다. 조숙하고 대담한 중앙의 블라디미르 레닌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율리 마르토프가 그의 오른쪽에 앉아 있다. 레닌은 법률가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경찰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895년 파업 물결에 연루될 때까지 실제적인 봉기가 아니라 경제이론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그들을 방치했다. 본명이 체데르바움인 마르토프는 오데사 출신의 유대인 지식인이었다. 시베리아 유형이 끝난 뒤 그들은 서유럽으로 갔다. 그들은 이상한 동료들이었다. 마르토프는 자신이 사랑한 파리의 혼잡한 ‘라 로통드’ 카페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레닌은 파리를 혐오했고―“제길, 어떤 놈이 우릴 여기에 데려다 놓았는가!”―사도들을 도를레앙 대로에 있는 형편없는 카페로 데리고 가서 그레나딘과 소다를 병적으로 마셔댔다. 그들은 곧 레닌의 볼셰비키와 마르토프의 멘셰비키로 분열했다. 1918년과 1919년에 마르토프는 대담하게 레닌의 테러를 비난했으며 망명지로 쫓겨나 1923년 사망할 때까지 볼셰비키 물결을 중단시키기 위해 애썼다.

» 시베리아의 망명 정치가 그룹. <북폴리오> 제공
시베리아의 망명 정치가 그룹 = 1916년, 그들은 이따금 가장 가까운 기차 종착역에서 1,10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르쿠츠크 주변의 거대한 지역에 위치한 마을에서 생활했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모자를 뒤로 눌러쓴 사람이 요시프 스탈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대원수는 어릴 때 왼팔이 약해져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의무 복무를 면했다. 나중에 스탈린에게 처형당하는 동료 볼셰비크 레프 카메네프가 뒷줄에서 그의 왼쪽에 서 있다. 황실 가족 살해를 명령한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는 앞줄의 납작 모자를 쓴 사람 바로 뒤에 서 있다. 그는 대부분의 구볼셰비키가 겪은 운명을 모면했다. 스탈린보다 앞서 독감이 그를 데려간 것이다. 시베리아로 추방된 정치 망명객들은 다가올 볼셰비키 체제보다 차르 체제하에서 훨씬 형편이 좋았다.

» 7월 봉기에 연루된 볼셰비크들. <북폴리오> 제공
7월 봉기에 연루된 볼셰비크들 = 7월 봉기에 연루된 볼셰비크들이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1917년 7월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기도한, 실패한 쿠데타에 가담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도주했다. 레프 트로츠키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니콜라이 크릴렌코가 앞줄 중앙에 앉아 있다. 4개월 뒤에 “가장 혐오스러운 타입의 타락자”인 이 전직 소위는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북폴리오> 제공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어려운 정치 사건을 전문으로 담당한 서른여섯 살의 법률가. 혁명은 케렌스키를 러시아의 지도자로 밀어 올렸으니, 처음에는 임시정부의 육군 장관, 그 뒤에는 수상이 되었다.

» 변장한 레닌(왼쪽)과 레닌의 말년. <북폴리오> 제공
변장한 레닌 = 1917년 7월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 레닌은 잘 알려진 턱수염을 없애고 대머리를 숨기기 위해 가발을 썼다. 그는 유능한 음모가가 아니었다. 가발이 벗겨져 동료 정치인들은 쉽게 그를 알아보았다.

레닌의 말년 = 레닌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23년 여름 이 사진을 찍을 즈음에는 업무를 처리할 수 없었다. 의사와 간호원 40명으로 이루어진 의료팀이 그를 돌보았다. 레닌이 제일 좋아한 여동생 마리야 울리야노바의 간호도 받았다. 사진에서는 신경외과 전문의가 뒤에 서 있는 동안 마리야가 레닌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레닌의 다차에 근무하던 한 정원사가 사진을 찍었다.

» 레프 트로츠키. <북폴리오> 제공
레프 트로츠키 = 영국의 비밀첩보원 로버트 브루스 로커트가 묘사했듯이, 레프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의 정신적 지도자인 레닌과 더불어 “기질 전체가…… 부르주아 혁명가를 서투르게 모방한 모습 그 자체였다.” (왼쪽)

군복을 입은 레프 트로츠키 = 군복을 입은 레프 트로츠키가 트레이드마크인 코안경을 걸치고 10월 쿠데타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그의 오른쪽에 레닌이 서 있다. 트로츠키는 쿠데타를 고무했다. 그의 열정과 웅변은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의 달필은 나중에 쿠데타를 붉은 10월의 영웅적인 신화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상하게 생긴 장갑차량만이 무관심한 대중에게 정부가 전복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 혁명의 변호. 레프 트로츠키. <북폴리오> 제공
혁명의 변호 = 레프 트로츠키가 붉은광장의 공원 벤치를 이용해 만든 임시 연단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볼셰비키 쿠데타 이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트로츠키는 쿠데타로 인해 발발한 내전에서 적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특별 열차를 타고 전선에서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볼셰비키 군대를 규합하고 다그쳤다. 적군은 부르주아 장교와 전문가에게 많이 의존했다. “일부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 쪽으로 왔고, 일부는 새로운 것을 찾아왔으며, 일부는 대안이 없어서 왔다. 그들은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것이다.”라고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썼다. “그리고 일부는 배신을 하고 왔다.”

» 스탈린. 사진(왼쪽)/G. 페트루소프. <북폴리오> 제공
강철 인간 스탈린 = 강철 인간을 뜻하는 스탈린에게는 코바, 니샤라제, 멜리캰츠, 치지코프 등 많은 가명이 있었다. 그루지야의 한 오두막에서 요시프 주가시빌리로 태어난 소년은 1927년경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곧 수많은 테러를 가하고 사람들을 살해했으며, 편집증으로 인해 사진에서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로이 산책을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왼쪽)

가정적인 스탈린 = 스탈린이 아들 바실리와 딸 스베틀라나와 함께 있다. 독재자의 사생활은 가혹하고 비극적이었다. 1932년 한 파티에서 스탈린은 부인 나데주다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봐, 한잔해.” 나데주다는 “제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라고 날카롭게 외치고 파티를 빠져나와 크렘린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스탈린의 무례함은 나데주다를 부러뜨릴 마지막 한 올 지푸라기였고, 그리하여 그녀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1941년 또 다른 아들 야코프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스탈린은 러시아가 포로로 잡고 있던 독일군 장교들과 야코프를 맞바꾸자는 독일의 제안을 거절했다. 러시아 포로들에 대한 독일군의 대우는 이 거절을 사형선고로 만들었다. 스베틀라나는 젊었을 때, 스탈린이 “병적으로 박해를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 악당들 사이에서. 1936년 모스크바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있는 스탈린. <북폴리오> 제공
악당들 사이에서 = 1936년 모스크바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있는 스탈린. 맨 앞줄 왼쪽 끝에 앉은 흐루시초프는 훗날 스탈린의 학살행위를 비난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흐루시초프의 왼쪽에 검열관 안드레이 주다노프, 집단화 책임자 라자르 카가노비치, 삼류 국방인민위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앉아 있고 엉터리 관료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별 볼일 없는 미하일 칼리닌이 스탈린의 왼쪽에 앉아 있다. 또 다른 생존자들인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니콜라이 불가닌이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다섯 번째에 앉아 있다. 지나치게 비굴했던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는 몰로토프의 부인이 수용소로 보내지고 카가노비치의 형이 처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스탈린에게 아첨했다. 맨 앞줄 오른쪽 끝에는 내전의 영웅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가 있는데, 그는 안장에서 턱걸이를 할 수 있다고 전해졌다.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데 열중했다. 1937년 투하체프스키는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북폴리오> 제공)

07.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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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서 연재되고 있는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의 두번째 편이다. '붉은 혁명'은 물론 1917년의 10월 혁명을 가리킬 텐데, 사진은 1945년 2차 대전의 종전 무렵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고 보니 다음주면 종전(러시아로서는 승전) 62주년이 되는군...

 

중국과 영국에 이어 지난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3-러시아의 세기>(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무도회에서 1917년 혁명으로, 스탈린의 잔혹한 시대에서 냉전의 시대로, 글라스노스트에서 1993년의 제2차 혁명으로,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혼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솔제니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그들의 놀랍고도 극적인 모습들이 실려있다. 여기 대부분의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 2. 붉은 혁명 3. 볼셰비키 4. 예술의 꽃 5. 노동자의 삶 6. 사회주의의 죽음 등이다.

한겨레(07. 05. 04)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② 붉은 혁명

» 정치범들. <북폴리오> 제공
정치범들 = 2월 쿠데타가 시작되고 처음 며칠 동안 페트로그라드의 슐루셀베르크 요새에서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볼셰비키는 유능하지 못한 음모가들이어서 차르의 비밀경찰이 쉽게 침투했다. 혁명 36시간 전에 레닌의 여동생을 포함한 수도의 마지막 대규모 그룹이 체포되었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거의 어떠한 역할도 못 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모든 사태가 종결된 뒤 망명지에서 돌아왔을 뿐이었다. 깃발에 적힌 문구는 이렇다. “감옥 문을 연 인민 만세”, “모두 다 인민을 위해 : 공장, 토지, 자유.”

» 제국을 끝장낸 사람들. <북폴리오> 제공
제국을 끝장낸 사람들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병사 분과가 국가두마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모든 색깔의 좌파 대표들을 포함한 소비에트는 사진의 플래카드에서 보듯이 아직 볼셰비키의 도구가 아니었다. 제일 위 왼쪽에 있는 플래카드에는 “레닌 타도”라고 쓰여 있다. 또 다른 플래카드에는 “민족의 자유를 위한 전쟁…… 독일 군국주의를 완전히 파괴할 때까지”라고 적혀 있다.

» 내전의 결정적인 해. <북폴리오> 제공
내전의 결정적인 해 = 1919년 서부 러시아에서 부상당한 적군들. 몇몇 전선에서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한 백군은 근거지를 벗어나면서 약해진 반면, 적군은 전선이 압축되어 전선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더욱 강해졌다.

» 내전의 붉은 영웅. <북폴리오> 제공
내전의 붉은 영웅 = 1918년 기관총 사수 안톤 블리즈냐크. 소매의 줄무늬가 보여주듯이 블리즈냐크는 13번 부상당하고 한쪽 눈을 잃었다. 손에 든 시가는 보상이다. 트로츠키의 장갑열차는 내전 기간에 구하기 어려웠던, 특별히 마련한 담배와 시가들을 싣고 다녔고 트로츠키는 이것들을 우수한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 당 활동가. <북폴리오> 제공
당 활동가 = 검은 셔츠를 입은 당 활동가가 추바쉬 공화국에서 농촌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활동가들은 쿨라크, 즉 부농에 대해 일종의 히스테리 상태를 조성한다. “그들은 마술에라도 걸린 양 꼬마들을 ‘쿨라크 짐승들’이라 부르고 ‘흡혈귀’라고 소리치면서 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곤 했다.”라고 한 목격자는 썼다. “그들은 이른바 쿨라크를 혐오스럽고 역겨운 소, 돼지로 간주했다. 쿨라크는 영혼이 없었다. 쿨라크는 악취가 났다. 쿨라크는 모두 성병에 걸렸다. 쿨라크는 인민의 적이었다.”

» 코러스 라인. <북폴리오> 제공
코러스 라인 = 1936년 선전팀이 투르크메니스탄의 마을들에 당 노선을 보여주고 있다. 당은 끊임없이 선전을 해댔다. 그것은 피할 수 없고 계속 되풀이되었으며 바다 위에 있는 배의 엔진 소리처럼 끊임없이 지속되는, 모든 당 활동의 배경이었다. 깃발과 슬로건 없이는 어떤 추수도 어떤 파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 베를린 상공의 붉은 깃발. 사진/Y. 할데이. <북폴리오> 제공
베를린 상공의 붉은 깃발 = 제국의회 의사당 꼭대기를 오르는 러시아 병사. 1945년 4월 30일 이른 오후 베를린 상공에 붉은 깃발을 내걸기 위해 러시아 병사가 제국의회 의사당 꼭대기에 오르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은 파괴된 도시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살했다. 주검은 러시아군 카츄샤 로켓의 일제 포격으로 쓰레기장에서 불탔다. 이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독일군은 제국 의사당 지하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그들은 5월 2일 새벽까지 버텼다. 러시아군의 총성은 그날 오후 3시에 멈췄다.

07.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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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세상을 떠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 관한 기사를 하나 더 옮겨온다(지난주에는 주로 부고기사들이었다). 프레시안의 이 기사에서는 현대 러시아의 '최악의 지도자'였던 옐친의 과오들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르바초프의 사회주의 개혁노선이 쿠데타와 뒤이은 옐친의 급진주의 노선에 의해 좌초당한 사실을 항상 유감스럽게 생각해왔는데, 기사에 따르면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은 지난달 러시아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보리스 옐친이 아니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정당하게 평가했다고. 사실 그런 대목이 눈에 들어서 스크랩해놓는 기사이다.

프레시안(07. 05. 01) 옐친이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옐친은 정녕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인가? 지난 달 23일 사망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서방 언론, 특히 미국 언론들의 과장된 평가가 줄을 잇고 있다. 언론들은 옐친을 '소련을 붕괴시키고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가져온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며 그의 생애를 반추하고 있다. 한국의 언론들의 평가도 미국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경제 개혁은 실패했다' 혹은 '영욕의 삶을 살았다'며 균형을 잡긴 했지만, 그가 1991년 강경 공산주의 군부 쿠데타 당시 탱크에 직접 올라갔던 일에 대해서는 '맨주먹으로 쿠데타를 저지했다'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지난번 페이퍼에서도 지적했지만, 옐친은 이 이미지 하나로 10년을 집권했다).


  
옐친 전 대통령이 러시아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1991년 6월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99년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하기까지, 의회를 포격하고 알짜배기 국유기업들을 마구잡이로 민영화하는 등 9년여 동안 옐친이 보여줬던 소위 '충격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옐친의 정치의 1991년 12월 소비에트 연방 해체 결정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의회와의 협의는커녕 법적 절차도 제대로 밟지 않은 채 소련 해체를 선언해버렸다. 소련의 해체가 아무리 역사의 대세였다고 할지라도 절차적 정당성을 결여한 독단적 결정은 국민들을 아연케 하는 것이었고 이후 보여준 비민주적인 정치행태의 시발점이 됐다.
  
소련의 해체 과정에 대해 미국의 정치평론가 스티븐 코헨은 지난해 시사잡지 <네이션>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사회적 합의 및 헌법 중시 태도로부터 이탈한 것"이라며 '위로부터의 변화'라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짜르식 전제정치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고 혹평했다. 옐친의 그같은 조치는 또한 그에 앞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6년간 실시된 글라스노스찌(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과정에서 이룩한 민주개혁을 뒤흔드는 것으로 대중들의 분노를 샀다.
  
1992년 초부터 시작된 옐친의 이른바 '충격 요법' 정책도 러시아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미국의 경제학자들, 특히 하버드대 경제학자들에 의해 사실상 강요되고 클린턴 미 행정부에 의해 지원을 받은 이 정책은 물가 통제 장치를 없애는 동시에 대규모 국유기업들을 민영화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옐친 주변의 '젊은 개혁가'들에 의해 의욕적으로 추진된 이 정책은 그러나 결과적으로 러시아 경제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또 서민들의 화폐 자산의 가치를 추락시켜 러시아 국민들의 절반 가량을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게 했다. 그러나 서구의 언론들은 이를 가리켜 '개혁'이라고 선전했다.

1993년 10월 옐친이 의회 건물에 탱크로 발포했던 일은 철권통치를 방불케 했다. 옐친은 자신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1991년 쿠데타 당시 자신을 비호했던 의회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반대파를 제거한다는 명목이었다. 이 사건으로 187명이 목숨을 잃었고 5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더 중요한 것은 합법적 선거에 의해 선출돼 행정부로부터 독립적 자세를 견지했던 러시아 의회가 이후 정부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형성된 러시아의 헌법적 질서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러시아 대통령이 정당하고 독립적인 선거를 통해 수립된 의회에 대포를 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와 대부분의 미국 언론들은 옐친의 '치어리더'로 활약했다. 당시 미국의 한 고위 관리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옐친이 더 폭력적이더라도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체첸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멈췄던 1996년까지 수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헌법에 보장된 연방주의는 공공연히 조롱당했다. 또 핵무기를 가진 국가에서 일어난 첫 번째 내전이라는 위험천만한 전쟁으로도 기록됐다.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가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에 폭격을 퍼부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옐친을 링컨 대통령과 비교하며 찬사를 쏟아냈다.
  
영국에 망명한 러시아 억만장자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등 소수의 올리가르히(과두재벌)에 의해 자금을 조달받고 친(親) 옐친 언론의 도움을 받아 치른 1996년 대통령 선거 운동은 불법과 탈법으로 점철됐다.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높은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자금을 대주는 올리가르히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시장개혁'이라고 불렀으나 러시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그같은 조치는 또 러시아의 올리가르히를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의 한 저널리스트는 이를 두고 옐친은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아니라 '올리가르히의 아버지'라고 비난했다.


  
1998년 8월 실시한 루블화 평가 절하와 채무 상환 유예(디폴트), 은행 계좌 동결 조치 등의 정책은 서민들의 저축을 또다시 몰수한 셈이 됐고 1991년 이후 형성된 중산층을 몰락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옐친 치하의 러시아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만을 가져오는 반동적인 정치에 불과했다. 러시아인들의 70% 가까이가 권위주의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답했던 지난해 여론조사는 옐친의 유산이 러시아 민주주의에 얼마나 해로운 것이었는지를 반증한다.
  
올리가르히에게 러시아의 재산을 독점토록 한 '경제개혁' 역시 씻을 수 없는 실정이다. 유엔개발계획(UNDP)는 1999년 보고서에서 "구 소련에는 현재 사상 유례 없는 위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으나 미국을 위시한 서방 언론들은 이를 깡그리 무시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대다수 국민이 고등교육을 받은 주요 산업국가가 이룩한 수십년간의 경제 개발 결과를 해체하는 현상이 현대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평가했으나 미국의 언론들은 옐친과 그의 '젊은 개혁가들'을 찬양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이에 대해 <로이터> 통신의 한 기자는 "고통이 편집됐다"고 촌평했다.
  
일각에서는 옐친의 충격요법적 경제개혁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옐친이 무모한 정책을 추진하던 당시에도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러시아의 경제학자들은 옐친의 정책이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시장경제로의 보다 점진적인 이행을 목표로 하는 '제3의 길'을 주장했다. 시간은 그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옐친의 유산을 물려받은 푸틴에 의해 러시아는 더 가난해졌고 양극화는 더 심각해 졌다(*양극화가 심각해진 건 사실이지만 더 가난해졌다?). 푸틴이 권좌에 오르자마자 했던 일은 옐친을 부패 혐의로 기소하지 말라는 포고령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은 지난달 27일 "언론의 건망증이 심한 건 알겠지만 1985년 소련의 지도자가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진정한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기억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며 "옐친은 언론 검열 철폐, 시장 개혁, 자유선거를 실시한 고르바초프 개혁의 최대 수혜자였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자유선거에서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된 반면, 옐친은 자신의 부패에 따른 징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인 푸틴을 후계자로 지명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언론이 옐친을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극찬하는 것은 그가 서방의 입맛대로 행동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관측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고르바초프에 대한 인색한 평가, 나아가 푸틴에 대한 적개심은 민주주의보다는 러시아의 이익을 지키려는 이들의 독립적인 태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옐친의 비민주적인 정치행태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가 '옐친 개혁'의 후원자가 됐던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대세로 굳히려 했던 미국의 조바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옐친 사후 나타난 미국 언론, 그리고 우리 언론의 태도는 그같은 서구우월적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황준호 기자) 

07.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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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5-0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쇼군'이 대표작인 제임스 클라벨의 다른 장편소설 노블 하우스를 읽다가 소설 안 소련사람이 -참고로 노블 하우스의 시공간적 배경은 1963년 홍콩입니다- Matyeryebytz란 욕을 하는 걸 봤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죠? 짐작으로는 개새끼 내지는 18놈 같은데. 어떻게 소리내는지도 궁금합니다. 마톄례빗츠 쯤 될까요?

로쟈 2007-05-03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질문만 하시는데요.^^; 한국어도 그렇지만 제가 욕에는 과문해서 실제로 러시아 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흔히 하는 욕은 아닌 거 같고. 앞부분은 '어머니'란 뜻이 맞습니다). 스펠링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심술 2007-05-04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컨데 로쟈님은 몹시 건전한(?) 삶을 살아오신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