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문예이론가이자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바흐찐)의 <밀의 미학>(길, 2007)과 미국의 바흐친 연구자인 게리 솔 모슨과 캐릴 에머슨의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2006)은 나도 책소개를 몇 차례 한 적이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910803) 이 분야에서 근래에 출간된 가장 무게 있는 번역서들이다. 연세대학원신문에 이 두 번역서에 대한 본격적인 리뷰('바흐찐 소설론의 재검토'가 부제이다)가 게재되었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아카넷, 2001)의 공역자이기도 한 최건영 교수이다(기사 말미에도 언급돼 있지만 필자의 책임편집하에 15권의 바흐친 전집이 하반기부터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기사는 학술저널 담비에서 옮겨왔다.

연세대학원신문(07. 06. 04) 시학(詩學)과 맞장 뜨는 산문학(散文學)의 출현

바흐찐 저작 출판과 재출판 붐
구간들이 대부분 절판된 상태에서 한동안 소개가 뜸했던 미하일 바흐찐 관련 저작들이 다시 번역 출판 붐을 맞게 된 것일까.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바흐찐의 소설론 모음집 『장편소설과 민중언어』는 쇄를 거듭하여 인문학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고,『언어와 이데올로기』(푸른사상, 2005)와『도스또예프스끼 창작론』(중앙대출판부, 2003)이 새롭게 재출판 됐다. 전자는 1929년 러시아에서 나온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이 원제목이고, 후자는 ‘도스또옙스끼 시학의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1963년 출판된 바흐찐 도스또옙스끼론의 개정증보판이다. 라블레론(『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아카넷, 2001)과 이번에 나온 『말의 미학』을 포함하면 현재 다섯 권의 한국어판 바흐찐 단행본이 유통 중인 셈이다.

『말의 미학』은 1919년부터 1970년대까지 바흐찐의 전체 시기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논문집이다. 기존의 소설론과 작가론(도스또옙스끼론과 라블레론)을 제외한 바흐찐의 중요 저작들을 드디어 우리말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바흐찐 초기의 저작 중 「행위의 철학」과「내용 소재 형식론」등은 빠져 있지만 「작가와 주인공」이라는 미완의 대작이 포함돼있다. 구체적 시공간으로 한정된, 즉 ‘신체화된 정신’이라는 측면의 인격에 관한 논의를 통해 사실상 부정신학적 종교론까지 촉발시키는 이 문제작은 비록 미완의 초고로만 남아 있지만, 기존의 대화성, 폴리포니 등으로 요약되는 바흐찐의 핵심사상을 종교적 인격론을 중심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기도 하는 문제작이다.

바흐찐 생존 시 본인 명의의 단행본으로는 도스또옙스끼론(1929, 1963)과 라블레론(1965)만이 출판되었고, 그의 사후 보차로프와 꼬쥐노프라는 두 학자가 두 권의 논문 모음집을 편집하여 각각 1975년 1979년에 출간한 바 있다. 『말의 미학』의 원저는 이 두 권 중 1979년에 나온 논문집으로(역자들은 이 책의 1986년판을 사용한 듯하다), 원제목은 ‘언어(예술)적 창조의 미학’이다. 여기에 실린 가장 길고 중요한 논문「작가와 주인공」(필자의 번역으로는 ‘작자와 작중인물’)은 1920년대 초에 집필된 것이다.

이 육필원고는 1979년 논문집이 출간된 이후 일부 단어들이 추가로 해독되고, 누락된 앞 장이 별도로 공개되어, 러시아어판 전집에는 최종적으로 바로잡은 ‘결정판’이 수록되었는데 이번 한국어판에는 그러한 보정 내용이 반영되어 있지 않고, 역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해설에서도 밝혀주지 못하고 있다. 추가된 앞 장은 ‘서정시에서의 작자와 작중인물’에 관한 매우 중요한 내용인데, 현재로서는 영어판으로 보완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영어판에는 그 논문 맨 뒤에 별도 항목으로 이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초기의 대작 「작자와 작중인물」
문예학의 이론, 혹은 작품과 창작에 관한 미학적인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작자와 작중인물」이 갖는 흥미로운 점은, 작품을 ‘작중인물과 작자’라고 하는 각각 고유의 가치를 지닌 두 능동성의 만남으로, 일종의 미적 사건으로 파악하는 그 접근 방법이다. 바로 그 관점에서 바흐찐은 당시 미학의 지배적인 두 조류를 비판하고 있다. 미적 활동이라는 것을, 대상을 향한 감정이입 혹은 공통체험으로 해석하는 감정이입의 이론이 그 하나이고, 포르말리즘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 소재주의 미학이론이 다른 하나인데, 문제는 이 두 가지 경향 모두 미적 가치를 한 개의 의식에 의해 내재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감정이입의 이론에서는 결국 작자의 부재가, 소재주의 미학에서는 주인공의 부재가 지적되어야 하는데, 이는 두 가지 경우 모두 미적 사건이라는 개념 자체가 설정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바로 최근까지도 문예학만이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나타났던 문제들의 기저에 암초와 같이 상존하고 있었다. 사실 구조주의든 기호론적인 접근이든 할 것 없이 그 연구대상이 텍스트인 이상 이제는, 그 텍스트라는 장이 결국 ‘나와 타자’라는, 결코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단 한번만 존재하는 사건(가치, 의미)의 관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함을 ‘바흐찐 이후(After Bakhtin)’의 연구자나 작가나 모두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바흐찐의 1950년대 ~ 1970년대 저작은 바로 그러한 문제를 아주 구체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저작을 90년대 전후해서야 접하게 되었고, 그러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인 이 논문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사실상 지금 막 접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상세한 편자 해제가 담긴 러시아어 원서 결정판이 최근에야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단일 의식에 근거한 모놀로그적 인식의 원리를 비판하면서, 대화의 원리를 내세우고 작품을 작자와 작중인물의 능동성이 만나는 장으로 파악하는 방법론은 이후 바흐찐 전 저작을 통해 여러 형태로 확장, 변주된다. 「생활의 언설과 시의 언설」(1926)이나 『프로이트주의』(1927)에서는, 언설이 ‘발화의 장’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검토되고,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1929)에서는 악센트, 인토네이션, 화법(타자의 말)의 문제들이 원리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1929년 나온 도스또옙스끼론 초판에서는 바로 이 언설(言說)의 개념, 목소리의 문제를 도입하면서, 전권을 쥐고 있는 의식들의 대화가 만들어내는 폴리포니적 소설로서의 작품세계의 본질이 그려지게 된다. 이어 30년대의 소설론, 시공간론으로 가면 서술자, 타자의 말, 장르의 문제가 재검토되고, 40년대의 라블레론으로 가면 그로테스크, 카니발적 세계의 문제가 문명론적, 문화론적 스케일로 전개된다. 이렇게 바흐찐은 평생 전 저작을 통해, 현실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이데올로기적 기호의 차원에서, 근대의 독백적 세계인식을 비판하는 역동적인 논의를 하게 되는데, 이 모든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바로 이 논문이고 이 논문에 이 모든 문제의식들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끝으로 이번 한국어판에서는 누락된, 이 논문의 맨 앞에 오는 ‘서정시에서의 작자와 작중인물’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이 글은 미래의 소설이론가 바흐찐이 서정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논하는 초기의 희귀한 단편 초고이다. 서정시에서는 작자의 영역과 주인공의 영역이 융합하게 되고, 작자는 주인공의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기에 주인공은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되고, 따라서 주인공은 자기 자신하고만 관계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고독하고 타자에게는 의식되지 않고 있는 듯한 외관을 표출한다는 지적은, 서정시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면이 있다 하겠다.



바흐찐의 산문학

한편 영어권을 대표하는 러시아문학자 모슨과 에머슨의 1990년 연구서『바흐친의 산문학』의 한국어 번역은 기념비적인 연구번역으로 평가할 만하다. 홀퀴스트와 클락에 의한 전기 형식의 연구서와 함께 바흐찐 연구의 대표적인 저서로 널리 읽히고 있는 이 책은 우선 그 제목부터가 도전적이다. 언어예술 작품을 포함하는 인류의 모든 예술형식론을 말할 때 마치 대명사와 같이 사용되고 있는 ‘시학’이라는 용어와는 별도로, 일상의 산문적 언어를 소재로하는 소설이라는 장르는 새로운 방법론에 의한 새로운 명칭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바흐찐의 소설론 출현 이후, 소설적 구축학, 언설(담론)의 유형학, 소설적 철학 등 여러 형태로 불리던 것을 두루 수렴할 수 있는 대안적 가능성도 생각하게 하는 용어라 하겠다.

바흐찐 자신이 소설을 논하면서 ‘시학’이라는 용어를 ‘불가피’ 사용했던 사실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바흐찐을 응용해서 산문의 이론을 구축한 또도로프 같은 연구자가 ‘산문의 시학’이라는 표현을 ‘근사하게’ 사용한 것을 떠올려 볼 때, ‘산문학’이라는 용어는 매우 대담한 제안이라 하겠다. 게리 모슨이 이미 80년대 말부터 사용한 이 용어는 사실 그의 19세기 러시아 소설 연구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 용어는 단순히 산문에 관한 접근 방법론적 측면만이 아니고 문화적 세계관을 동시에 표현하는 개념으로, 그가 인문학과 똘스또이의 소설(특히「안나 까레니나」!)을 논하는 과정에서 언급하기 시작한 개념이다.

바흐찐이나 모슨만의 의견은 아니겠지만 특히 그 두 학자에게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매우 커다란 소설적 우주라 하겠다. 바흐찐이 뿌슈낀이라는 ‘소설’의 행간을 읽으며 살았던 학자라고 한다면, 모슨은 바로 그 바흐찐의 행간을 읽으면서 도스또옙스끼, 똘스또이, 그리고 체홉을 통해 자신의 ‘산문학’ 논의를 도출한 학자라고, 지난 수년간 19세기 러시아 소설을 강의하면서 필자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소설 연구의 ‘악동’이라고 불러야 할 모슨의 생각은, 그의 전 저작을 두루 살펴볼 때 19세기 러시아 사상사, 러시아 정교의 종교철학, 그리고 상기의 세 소설가를 배경으로 형성된 것 같다. 과학이 인간을 설명할 수 있으며, 과학적 논리와 같이 역사의 법칙이 설명 가능하다는 사상이 19세기 러시아 지식인과 작가들의 논쟁사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밝히면서, 바로 그러한 러시아 사상사의 주류에 도스또옙스끼, 똘스또이, 체홉이 어떠한 소설과 어떠한 세계관으로 도전하고, 반박하고, 전복시켰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모슨 작업의 핵심인 듯하다. 바로 현재 이 순간의 무게를 논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가 존재하고, 결국 시간은 닫혀 있는 것인가 열려 있는 것인가에 관한 논쟁으로 19세기 러시아 지식인과 작가의 대립을 요약한다.

우리의 관심이 인문학이든 소설연구든 영화나 기호학이든 상관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는 역사성과 그 현재적 위력에 ‘맞장 뜨는’ 장면을 맛보는 것, 바로 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독파에 도전할 가치가 있다.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가 어쩌면 인류역사의 모든 예술적 장르와도 다른 새로운 세계관과 세계감각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거창한 문제의식 없이, 그저 왜 우리는 소설이라는 작은 언설에 이끌리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서 이 책을 집어 든다면, 분명 모슨과 에머슨의 바흐찐 독해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가 알게 될 것이다. 국문학도들의 번역으로 그 용어 선택이나 해석에 논쟁적인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가령 금년 말부터 출간이 시작되는 한국어판 바흐찐 전집의 책임편집을 맡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전집의 번역팀 모든 구성원에 커다란 타자가 되는, 연구번역의 모범이고 역작이라고 확신한다.(최건영/ 외국어문학부 교수)                                   

07. 06. 22.

P.S. 본문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산문학'이란 말은 모슨의 독창적인 창안이다. 이 용어가 갖고 있는 '대담성'을 좀더 밀어붙이자면, 나는 문예이론의 패러다임이 '시학 vs 산문학'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이건 세계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늬만 소설인(그래서 실상은 시에 더 가까운) 소설들이 주변에 많아지면서 '산문학'에 대한 이해와 음미가 우리에겐 좀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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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타계한 러시아의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수제자로 잘 알려진 첼리스트 장한나의 '책과 인생'을 옮겨온다(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06912 참조). 12살때 스승의 부인 갈리나의 권유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런 권유를 건넨 사람이나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사람이나 아무튼 놀랍다. 초등학교 5-6학년 때가 아닌가(아마도 그맘때라면 나는 <삼국지> 같은 걸 읽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다. 영어도 마스터하고 통찰력과 표현력도 길렀다지 않는가. <죄와 벌>도 읽기 힘들어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좀 각성할 일이다.

경향신문(07. 06. 16) 12살때 읽은 영문판 '백치'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으면 너의 마음이 열릴 것이다." 지난 4월 타계하신 나의 스승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의 부인 갈리나가 해준 말이다. 그때 난 열두살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인가. 세계 동화 전집 등을 통해 독서를 너무나도 좋아하게 됐다. 등장 인물들의 다양한 성격,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들의 흥미진진한 삶, 그리고 정의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동화 속 세상에 푹 빠졌다.

재미있는 책을 잡으면 밥 먹을 때는 물론, 첼로 연습 시간에도 읽기를 중단하기 힘들어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처음 읽는 책에서 긴장과 스릴을 느꼈다면, 다시 읽는 책에서는 이야기 속 의미들을 찾고 즐기는 맛을 알게 됐다. 뉴욕으로 건너갔을 때 열 살이었던 나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공립학교의 ESL 프로그램은 체계적인 영어 공부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12세부터 다닌 사립학교에는 그나마도 없었다.

11세 때 파리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만난 갈리나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영어판 <백치>를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2세 소녀에게 <백치>를 권한 갈리나도, 그 말 한마디에 바로 <백치>를 읽은 나도 참 순수했던 것 같다. 인생을 바꾸는 힘이 책 안에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 게 아닐까 싶다.

만일 지금 내가 12세 어린이에게 책을 권해야 한다면 <백치> <안나 카레니나> <파우스트> 같은 명작을 권하기 전에 여러 번 생각할 것 같다.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작품의 위대함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도 내가 느낄 수 있는 만큼만 느끼고 이해하듯이, 어린이도 나름대로 어떤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런 명작들은 독자의 그릇 크기에 관계없이 어떤 충격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런 충격을 통해 나의 그릇이 성장하고, 그 책을 다시 읽거나 다른 책을 읽었을 때 더 큰 감동을 받는 것이다.

서툰 영어로 <백치>를 읽은 후 과연 내 마음이 열렸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 때부터 거대하고 복잡한 사연들이 많은 러시아 문학에 반해서 톨스토이,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순수문학, 그리고 소설이란 장르에 빠져 영국, 프랑스, 독일 문학으로 폭을 넓혔다. 내용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단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문장의 형태부터 표현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영어의 비밀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고등학교 무렵에는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으며 에세이를 제출할 만큼 영어 실력이 늘었다.

독서를 통해 영어를 쉽고 즐겁게 마스터했을 뿐 아니라 통찰력과 표현력을 기르는 데도 더 없이 좋은 훈련이 됐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은 언어 자체의 폭에 비해 너무나도 좁다. 표현력이 좁은 만큼 우리의 생각도 단순해지는 건 아닐까. 책을 통해 언어의 풍요로움을 접한다면 우리의 시각이 더욱 넓어지고 성장하리라 믿는다. 또 이런 과정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지름길을 찾게 되리라 믿는다.(장한나)

07.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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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인간 2007-06-16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을 '만국의 언어'라고 정의한 속설에 따르자면, 음악의 신동인 장한나는 결국 어학의 신동이 되는 것이겠지요. ^^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거의 25년이 되어 가도 영어 소설 하나 읽기가 버거운 저로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위로가 됩니다. 쿨럭~ ^^

로쟈 2007-06-1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영어를 잘 하려면 먼저 첼로를 배워야겠습니다...

수유 2007-06-16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영특한 이미지가 어려서부터의 독서에서 왔군요. 저도 요즘 조카에게 다소 두꺼운 책들을 사주고 있는데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하더라도 격려를 해주렵니다. :)

작은앵초꽃 2007-06-1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또 어떻게 성장할까 늘 기대되는 첼리스트에요.
그나저나 저 너무나도 많은 영어의 비밀이라는 것, 저도 몇 개 알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네요 ^^
 

러시아의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 오페라단이 내한 공연을 갖는다. 기간은 이달말부터 내달 7일까지이고 장소는 고양 아람누리 아람극장이다. 공연 소식은 이달초에 접했는데, 자세한 일정은 오늘자 기사를 보고서 알았다. 변수들이 있긴 하지만 한편 정도는 관람하면 좋겠다.

이번에 내한 공연을 갖는 극단은 '스타니슬라프스키'(혹은 스타니슬랍스키)란 이름을 갖고 있는데 군말이 필요없는 러시아의 저명한 연극 연출가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라프스키(1863-1938)를 가리킨다. 그는 지난 19세기말과 20세기초 러시아 최고의 연출가였으며 안톤 체호프의 여러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린 바 있다. 그의 연출론은 이미 국내에 다수 번역/소개돼 있으며(소위 '메소드 연기론'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자서전 <나의 예술인생>(이론과실천, 2000) 또한 나온 지 오래이다. 겸사겸사 러시아 공연문화의 정수를 감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한겨레(07. 06. 15) 나이트가운 입은 금발의 ‘카르멘’이 왔다

치렁치렁한 긴 검은 머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정열적인 집시 여인이 금발 단발머리에 아슬아슬한 은색 나이트가운 차림의 도발적인 신세대 여성으로 파격적인 변신을 한다. 볼쇼이극장과 마린스키극장과 더불어 러시아 공연예술의 중심축으로 꼽히는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 오페라단이 오페라 <카르멘>을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으로 해석해 1999년 초연한 작품의 여주인공 모습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 오페라단이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오페라하우스)에서 ‘고양아람누리 개관 예술제’ 하이라이트를 꾸민다.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은 20세기 사실주의 연극 이론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 러시아의 배우 겸 연출가, 제작자인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라프스키(1863~1938)의 의지를 60년 넘게 지켜오며 혁신적인 무대작품을 꾸준히 올리는 공연예술센터다. 이번에 방한하는 공연단은 오페라단을 비롯해 합창단, 발레단, 오케스트라, 무용단 등 210여명에 이른다.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이 선보이는 오페라는 비제의 <카르멘>(6월28~30일)과 차이코프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7월5~7일) 등 두 작품이다. <카르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의 걸작으로 국내에서도 한해 최소 2~3차례는 무대에 오르는 인기 작품이지만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은 ‘이제까지의 <카르멘>은 잊어라’고 요구한다. 집시 여인 카르멘이 신세대 여성으로 변신하는 등 배역 해석부터 파격적이다. 또한 대부분 기존 오페라들이 화려한 세트와 의상의 시각적인 부분, 그리고 가창력과 연관되는 청각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데 견줘 스타니슬라프스키식 카르멘은 배우(성악가)들이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섬세한 내면 연기가 도드라진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지난 2000년 볼쇼이극장이 국내에 첫선을 보였으나 자주 접할 수 있는 오페라는 아니다. 차이코프스키는 1890년 동생 모데스트가 푸시킨의 소설을 토대로 쓴 오페라 대본을 읽고 44일 만에 3막짜리 <스페이드의 여왕>을 완성했다. 부귀와 명예를 찾아 도박에 빠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허망한 인생의 최후를 다룬다.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의 <스페이드의 여왕>은 지난 20여년간 극장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레프 미하일로프가 성악가들에게 심리적인 연기 부분을 강조해 해석한 버전으로 1976년 초연됐다. 이번 공연에서는 현 예술감독인 알렉산드르 티텔이 연출을 맡아 레프 미하일로프의 해석에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을 더해 <카르멘>과 함께 첫 외국나들이에 나선다. 알렉산드르 티텔은 함께 내한하는 노지휘자 볼프 고렐리크(74)와 함께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민예술가 지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볼쇼이극장 오페라단 주역 가수로 활동했던 손성래(39) 서울종합예술원 외래 교수는 “모스크바에서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이 공연한 <카르멘>과 <스페이드의 여왕>을 자주 봤는데 작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아 독특한 공연 경험을 맛볼 것이다”라며 “앞으로 한-러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져 수준 높은 공연이 꾸준히 소개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연단은 특별공연으로 1일에는 노루목 야외극장에서 ‘러시아 음악의 밤’(전석 무료), 2일에는 아람음악당에서 ‘오페라 갈라 콘서트’도 연다.(정상영 기자)

07. 06. 15.

P.S. 참고로, 오페라 <카르멘>보다는 덜 알려진 <스페이드의 여왕>의 공연 시놉시스를 옮겨놓는다(나는 예전에 영국에서 공연된 작품을 DVD로 본 적이 있다). 아래에는 주인공이 '헤르만'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영어식 표기이며 러시아 이름은 '게르만'이다. 그리고 결말은 주인공의 자살로 돼 있지만 푸슈킨의 원작에서는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오페라 외에 이 작품은 러시아와 영어권에서 여러 차례 영화화된 바 있다.   

 

제1막
1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정원
여름철의 정원, 태양은 빛나고 유모가 어린아이를 재우고 있다. 꼬마들은 군대놀이를 하고 있다. 헤르만은 그의 친구인 톰스키 백작(바리톤)에게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때 헤르만이 사랑하는 바로 그 여자 리자(소프라노)의 약혼자인 에레츠키 공을 만나 2중창으로 감정의 평행선을 긋고 뒤이어 정원에 리자와 그녀의 조모 백작부인(메조소프라노)이 나타난다. 톰스키는 헤르만에게 백작부인이 젊었을 때 대단한 도박꾼이었고 미녀여서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매혹되었다고 이야기해준다. 그 남자들 중 한 명이 백작부인에게 도박에서 반드시 등장할 수 있는 ‘3장의 카드의 비밀'을 가르쳐 주었고 그 후 그녀는 그 비밀을 다른 두 명의 남자에게 전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만약 그 비밀을 제3의 사나이에게 전하려고 하면자신이 죽게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헤르만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암울한 운명을 느끼며 리자에 대한 사랑의 의지를 다진다.

2장: 리자의 방
조용한 저녁. 백작부인의 저택 리자의 방. 리자는 친구들과 함께 쓸쓸한 자신의 심정과 애수를 노래한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즐거운 러시아 민속무용을 노래하며 춤추다 가정교사에게 들켜 일단 소동은 가라앉는다. 쫓겨 나간 친구들을 뒤로하고 혼자 남은 리자는 는 집요하게 다가오는 헤르만의 형상에 안타까워한다. 그때 갑자기 나무 그늘에서 나타난 헤르만. 발코니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의 아리아를 부르며 서로의 애틋한 사랑을 확인한다.

제2막
제1장 : 화려한 무도회장
어느 귀족의 가면무도회장. 헤르만과 리자는 무도회에서 만나고 그녀는 헤르만에게 백작부인의 방 열쇠를 건네준다. 3장의 승리의 카드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다짐하는 헤르만.



제2장 : 백작 부인의 침실, 늦은 밤
백작부인의 침실. 헤르만은 백작부인의 방에 몰래 들어가 3장의 카드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간청한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권총으로 그녀를 협박하고 그녀는 공포에 질려 숨을 거둔다. 리자가 그 자리에 들어와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카드의 비밀이었군요” 라고 말하며 절망적으로 외친다.

제3막
제1장 : 막사의 헤르만의 방
헤르만은 테이블에 앉아 리자의 편지를 읽고 있다. 죄책감과 아쉬움에 어쩔 줄 모르는 헤르만 앞에 백작부인의 망령이 음산한 음악과 함께 나타난다. (3, 7, 에이스) 라는 카드의 비밀을 가르쳐주고 리자와의 결혼을 요구하며 떠나는 망령. 게르만은 넋을 잃고 망령의 말을 반복한다.

제2장 : 한방의 강둑
짐니 운하의 기슭. 리자는 슬픈 아리아를 부르며 게르만을 기다린다. 뒤이어 나타난 헤르만과 함께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만 헤르만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 3장의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도박장에 가겠다고 하는 헤르만. 그에게 밀쳐진 리자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제3장 : 도박장
시끄러운 소음과 노래들. 헤르만이 나타나 테이블에 앉는다. 3장의 카드의 비밀을 사용해 2번을 내리 이기는 헤르만. 마지막 큰 승부의 상대는 연적 에레츠키 공. 마지막 카드 에이스로 승부를 내려는 게르만에게 주어진 카드는 에이스가 아니라 스페이드 퀸. 게르만은 그 스페이드 퀸에서 백작부인의 망령을 보고 그 자리에서 자살하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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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6-1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싸서 다 보지는 못하겠고, <스페이드의 여왕> 정도는 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6-1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빙고입니다.^^

수유 2007-06-1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은 아주아주 멀군요. 외삼촌댁이 있긴 하지만.. 놀토도 아니고. 그나저나 저 이파리는 깻잎? 아님 수국 이파리일까요? 열 때마다 녹색의 하늘과 이파리가 시원합니다.

로쟈 2007-06-1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겐 더 멀지요.--; 그리고 이파리는 깻잎이란 설이 있지만 깻잎은 아니고 비슷한 종류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모스크바대학 산책로에 널려 있었는데 깻잎인 줄 알고 따먹으려고 했지만 먹는 건 아니라더군요...

sophie 2009-12-07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나 하고 검색해봤는데 스페이드의 여왕이 있네요. 저번에 <보리스 고두노프>는 짤즈부르그에서 상연된 비디오 클립으로 봤는데 무대며 코러스 신에서 나오는 러시아 전통민요, 주인공 보리스 고두노프, 사제 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주에도 역시 푸쉬킨의 작품이네요. 선생님이 푸쉬킨을 무척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이번 주엔 빠질까 했는데 아무래도 가게 될 것 같아요. 공연 시놉시스 고맙습니다. ^^
 

레디앙에서 이샤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애플북스, 2007)에 대한 리뷰 하나를 옮겨놓는다. 나는 책이 나오자 마자 원서와 함께 대조해 가면 절반쯤 읽었더랬다. 그 이상은 다른 일들에 치어 잠시 미뤄졌는데, 번역돼 나온 것이 반갑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좀 무성의한 대목들이 자주 눈에 띄는 번역서이다. 항상 사정권 안에 있던 책이 당장 눈에 띄지 않아서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지적하기로 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란 부제대로 책은 일단 톨스토이와 그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고급스런 에세이로 읽혀야 한다. 무슨 경영서나 처세서로 포장한 출판사측의 '기획'에 대해서는 거듭 유감을 표하고 싶다(그런다고 책이 더 팔리지도 않는다). 아래 리뷰 또한 그런 지적을 포함하고 있다.    

레디앙(07. 06. 09) "톨스토이, 고슴도치라 생각한 여우"

인간은 크게 보면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이런 시스템은 모든 것을 조직시키는 하나의 보편 원리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시스템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느낀다. 다른 한 부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 목표들은 흔히 서로 관계가 없으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물론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이유에서 사실적인 관계를 갖지만 도덕적이고 미학적 원리에 근거한 관계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행동지향적이며, 생각의 방향을 좁혀가기보다는 확산시키는 경향을 띤다.”(p.7~8)

이사야 벌린, 우리에게는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로 잘 알려진 저자는 전자를 고슴도치형 인간, 후자를 여우형 인간이라고 명명한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 단테, 파스칼, 헤겔,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입센, 프루스트가 고슴도치형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몽테뉴, 에라스무스, 몰리에르, 괴테, 푸슈킨, 발자크, 조이스는 여우형이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이사야 벌린은 이 질문으로 『고슴도치와 여우』를 시작한다. 곧 “톨스토이가 일원론자인지 다원론자인지, 결국 톨스토이가 하나의 비전을 추구했는지 다양한 비전을 추구했는지”(p.11)를 묻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의 작품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평화』를 텍스트로 삼는다. 『전쟁과 평화』는 문학적 작품성은 높지만 작가의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언설이 결정적인 흠으로 지적되는 작품이다. 곧 톨스토이의 장점과 단점이 다 담겨져 있는 셈이다. “젊은 지식인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특징답게 설익은 지식으로 가르치려는 (그 결과로 예술적 가치를 손상시키는) 톨스토이의 성향 탓…중략…일탈의 전형적인 예” “톨스토이가 훌륭한 사상가라기보다 훌륭한 작가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이다” 등등.(p.19) 하지만 이사야 벌린은 접근을 조금 달리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전쟁과 평화』를 톨스토이의 진정한 작품으로 말하고자 한다. 결론을 줄여 말한다면, 톨스토이는 스스로를 고슴도치라고 믿었던 여우다. 근원적인 질문에 근원적인 대답을 원했지만 그 질문과 대답은 늘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것들 속에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톨스토이의 모습을 한낱 한계라는 짧은 단어로 규정해 버리면 안 된다. 그것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작가의 정직함이자 성실함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자아와 세계를 묻지 않는 작가가 그 얼마나 많은가?

“톨스토이 식으로 말하면 삶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구성 요소인 ‘생각, 지식, 시, 음악, 사랑, 우정, 증오, 열정’을 기록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할까?”(p.45)

그렇다면 톨스토이를 “여우냐 고슴도치냐”라고 묻는 이사야 벌린 자신은 여우일까 고슴도치일까? 책을 번역한 강주헌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지지자였으며, 다원주의를 신봉했다. 사회를 조직하는 문제에 단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라는 벌린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며 “여우형에 가깝다”라고 평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 책 『고슴도치와 여우』는 어떤 유형의 책일까? 책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색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방어형의 고슴도치 경영과 공격형인 여우 경영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말씀이시다. 이건희의 멘트가 등장하니 경제경영서? 띠지 뒤쪽에는 “당신은 여우로 살 것인가 아니면, 고슴도치로 살 것인가? 이 책은 톨스토이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당신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쯤이면 자기계발서가 될 노릇이다.

한마디로 『고슴도치와 여우』는 겉과 속이 다르게 포장된 책이다. 카피문구나 책의 장정과 편집 스타일은 경제경영이나 자기계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지만 그 속 내용은 톨스토이라는 대작가의 역사관과 내면을 짧지만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는 인문서이기 때문이다. 상술이 본질을 압도하고 있음이다. 형식이 내용을 앞지른다.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가시가 되어 찌른다. 자본주의라는 고슴도치가 여우를 찌른다.(김용필/ 텍스트)

07.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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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인연'을 갖고 있고 강의에서도 자주 다루게 된다. 이번 학기에는 특히나 오랫동안 자세히 읽기를 시도했는데, 그렇다고 아직 연구서 한권 낼 만한 형편은 안되기에(석달 정도의 자유시간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읽을 거리들을 참고자료로 제시하곤 한다. 가장 최근 자료로 참고할 만한 것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저자 김용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통해서 본 ‘죄’와 ‘벌’의 의미'로 얼마전 한겨레에 2회 걸쳐서 분재됐다. 아마도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의 속편에 포함될 듯하다.

 

한겨레(07. 05. 19) 인간의 경계 뛰어넘은 ‘자만의 죄’ 고발

1849년 12월 22일, 러시아 세묘노프스키 광장에서는 사형이 집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의 특사가 내려 사형 직전의 한 청년이 살아났다. 그는 시베리아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져 4년간 혹독한 강제노동을 했다. 간질발작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청년이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의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히기 전, 청년은 무신론적 사회주의자과 어울렸다. 그들과 함께 황제를 모독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왠지 사회개혁을 위해 무릎을 세우고 일어서는 혁명가들보다 쓰러진 자들을 일으키려고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이 더 선하게 여겨졌다. 이성과 과학을 숭배하는 합리적 지식인들보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바보 같은 민중들이 더 지혜롭게 생각되었다. 그는 그 이유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청년은 소설가였다. 그래서 남은 생애동안 바로 이 문제, 오직 이 문제와 싸우며 글을 썼다. 그 결과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청년의 이름이 도스토예프스키이고, 바로 그 문제를 다룬 첫 장편소설이 <죄와 벌>이다.

이제부터 ‘죄’와 ‘벌’ 둘로 나누어 살펴볼 이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사는 법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우연히 알게 된 창녀 소냐의 권고를 받아 자수하게 된다는 게 전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이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심리학자들마저 격찬할 만큼 뛰어나게 인간의 심리를 그려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죄와 벌이 과연 무엇인가를 신학자들마저 경탄할 만큼 심오하게 파헤쳐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선 죄를 보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인이다. 이견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왜 죄인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이 다른 생각이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이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인가 보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리적 억압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인 모출스키의 주장처럼,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무더운 날씨,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돌보지 못하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분명 그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을까? 아니다. 더 중요한 동기가 따로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가 나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자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끔 학비로 사용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와 같이 <비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솔로몬과 마호메트, 그리고 나폴레옹을 예로 들어 자기를 정당화했다. 이들이 그랬듯이 새로운 사회와 법률을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이 당연히 허용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점 죄의식조차 없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했다. ‘초인사상’으로 일컬어지는 이런 생각을 도스토예프스키는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이 이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범죄 이전의 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사실인즉 <죄와 벌>을 썼다.

그는 ‘범죄 이전의 죄’라는 개념을 기독교 종파인 러시아 정교에서 얻었다. <구약 성서>에 서 아담은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따먹었다. 그리고 죄인이 되어 낙원에서 쫓겨났다. 원인은 “하나님같이 되리라”였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자만’이라고 부른다. 자만이 곧 ‘범죄 이전의 죄’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진 죄가 바로 이것이다.

<죄와 벌>에서 ‘죄’라는 의미로 사용된 러시아어 ‘prestuplenie’는 본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단어를 ‘법률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우 그의 죄에는 죄의식이 없다. 그의 이성이 모든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이 무참한 죄를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고발하고 또 경고했다. 그런데 돌아보자. 우리가 그로부터 과연 무엇인가 배웠는가를. 20세기 들어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일 나치나 러시아 공산당이 어땠는가를. 그리고 생각해보자. 21세기인 오늘날에는 이처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를.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 없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한겨레(07. 06. 02) 죽음보다 끔찍한 벌 벗는 길은 희생

<죄와 벌>은 죄보다 벌에 관한 작품이다. 분량만 보아도 그렇다.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모두 7부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죄는 1부에 다 드러난다. 나머지는 모두 지옥 같은 벌에 대한 설명이다. “단테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지옥의 모든 단계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모출스키의 말이다. 돌아보자. 죄가 무엇이었는지. 그래야 벌을 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자만이었다. 그것은 원초적 죄로서 모든 악행과 범죄가 여기에서 나온다. 기독교적 사변이다. 그럼 벌은 무엇인가? <구약성서>에서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벌로 “정녕 죽으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막상 선악과를 따먹자 죽이지 않았다. 추방했다. 그럼 성서는 처음부터 신의 거짓말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생명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죽음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빛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어둠에 속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진리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거짓에 서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선함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악함에 머무는 것이다. 신은 이러한 벌들로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켰다. 이것이 성서에 나오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던 벌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총 6부에 걸쳐 고발한 그 벌이다. 모출스키가 <신곡>의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는 그 지옥 체험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받은 바로 그 벌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벌을 살인이라는 범죄로, 그 범죄에서 오는 심리적 어둠으로, 그 범죄를 숨기려는 거짓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악행을 차례로 체험함으로써 받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지를,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지옥 체험인지를, 오직 그것만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백 쪽에 걸쳐 묘사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한 것은 결코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괴로워한 것은 단지 악을 체험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 때문이었다.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 때문이었다. 이 벌의 성격을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도망가면 어쩌죠?”라고 묻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넨 도망가지 않을 거야. (…) 자네가 도망간다 해도 아마 스스로 되돌아올걸? 자넨 우리 없이 지낼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지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차라리 자수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에는 같은 벌을 받는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다른 악의 짝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사회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지었다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유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짓는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기 부인을 살해하고, 하인을 학대하여 자살하게 하고, 14살 어린 소녀를 능욕하여 자살하게 했다. 그의 범죄는 개인적인 정욕과 쾌락에서 나왔다. 범죄 동기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르지만, 원인은 같다. 그에게도 욕망과 쾌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있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개인적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든, 사회적 이익과 개혁을 위해서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지옥에 갇힌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라스콜리니코프는 차라리 수용소에 가려고 자수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쏘았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미국에 가기 위해서야”였다.

그렇다면 이 죄와 그 벌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가? 있다. 의외로 간단하다. 자만이 원인이면 겸손이 해법이다. 날 세운 이성이 원인이면 바보 같은 신앙이 해법이다. 타인 희생이 원인이면 자기 희생이 해법이다. 창녀 소냐가 그 일을 맡았다. 그녀는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간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유로지비’라고 불렀다. 러시아 정교에서 ‘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죽은 나무에 수년 동안 물을 길어다 부어 마침내 어느 날 푸른 잎을 피워낸 어떤 수도사를 일컬은 말이다. 눈뜬 이기주의와 눈 먼 합리주의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성스러운 자유를 가졌던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소냐가 바로 그다. 소냐는 이 방법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구했다.

그럼 생각해보자. 오늘을 사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누군가를. 그리고 우리가 속한 시대와 사회를 구할 진정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07. 06. 09.

P.S. '유로지비'는 '성스러운 바보'를 뜻하지만 작품에서는 문맥상 '광신도', 곧 '신에 미친 여자'란 뜻도 내포한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를 대립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형식논리적이며 이 작품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있다. '날 세운 이성'뿐만 아니라 '바보 같은 신앙' 또한 인류사에서 많은 죄의 근원이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물론 '새로운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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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 2007-06-1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처럼 주 독자층을 청소년으로 생각하고 쓴 글이라 구도가 좀 더 단순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자"도 같은 맥락일 것 같고요.^^

로쟈 2007-06-1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층에 대한 고려도 있겠도 분량 제한도 있겠지요. 한데, 모든 해설이 갖는 함정이지만 작품읽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