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서 기획기사 '러시아의 20세기'를 옮겨온다. 지난 3월에 출간된 사진집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3 - 러시아의 세기>(북폴리오, 2007)의 자료사진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유익하고 생생하다. 6차례에 걸쳐 소개될 예정이라는 이 기사는 모두 옮겨놓을 계획이다. '러시아 이야기'이니까.

 

한겨레 (07. 04. 30) 러시아의 20세기 ①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

» 네 명의 어린 로마노프 공주들. 왼쪽부터 황녀 올가, 타탸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사진/K. E. 한 <북폴리오> 제공
네 명의 어린 로마노프 공주들 = 살해되기 전만 해도 공주들은 유럽에서 신붓감으로 첫째 손가락에 꼽혔다. 1906년 9월 페테르고프의 여름 궁전에서 찍은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왼쪽부터 황녀 올가, 타탸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다. 가족에 대한 니콜라이의 헌신은 포로로 사로잡은 로마노프 왕조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볼셰비키를 빼고 많은 혁명가들의 찬양을 받았다. <북폴리오> 제공

중국과 영국에 이어 지난 20세기 러시아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3-러시아의 세기>(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장무도회에서 1917년 혁명으로, 스탈린의 잔혹한 시대에서 냉전의 시대로, 글라스노스트에서 1993년의 제2차 혁명으로,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혼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솔제니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그들의 놀랍고도 극적인 모습들이 실려있다. 여기 대부분의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는 것으로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 2. 붉은 혁명 3. 볼셰비키 4. 예술의 꽃 5. 노동자의 삶 6. 사회주의의 죽음 등이다.

» 황후 알렉산드라. <북폴리오> 제공
황후 알렉산드라 = 1910년 7월 황실 요트 스탄다르트호로 니콜라이와 함께 항해하는 동안 보기 힘든 미소를 짓고 있다. 혁명 지도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니콜라이가 “멋진 푸른 눈말고는 유쾌하고 조금은 어색한, 아주 평범한 근위대 대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자신의 통치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굽힐 줄 모르는 타고난 황후”임을 발견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인 알렉산드라는 영어 억양이 섞인 러시아어로 말했으며, 일관된 목표는 ‘아이’, 즉 황태자를 위해 전제정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황제 부처는 매우 친밀했다. 강한 성적 관심이 알렉산드라의 종교적 열정과 결합했다. <북폴리오> 제공

» 특별 개조한 자전거 위에 올라탄 황태자 알렉세이. <북폴리오> 제공
황태자 알렉세이 = 특별 개조한 자전거 위에 올라탄 황태자 알렉세이. 이 자전거는 알렉세이가 쉬 피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병 조수 데레벤코가 설계했다.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앓았으며 체내 출혈은 그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 충성을 바치기로 되어 있던 데레벤코는 혁명 이후 젊은 혈기에 넘쳐 알렉세이를 조롱하고 새로 획득한 자신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어떤 임무도 수행하기를 거부했다. <북폴리오> 제공

» 1912년 황실 사냥터인 벨레베슈 푸샤의 니콜라이와 사촌 드미트리 대공. <북폴리오> 제공
니콜라이와 드미트리 대공 = 1912년 황실 사냥터인 벨레베슈 푸샤의 니콜라이와 사촌 드미트리 대공. 나중에 라스푸틴 살해에 참여하게 되는 드미트리는 차르가 좋아한 몇 안 되는 로마노프 왕가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사슴, 순록, 곰, 여우 사냥은 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락이었다. 몰이꾼 수십 명이 포수들 쪽으로 사냥감을 몰아주었고, 하얀 옷을 입은 이들 포수는 겨울 눈 때문에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북폴리오> 제공

» 간호복을 입은 황후와 알렉세이. <북폴리오> 제공
간호복을 입은 황후 = 옆에는 알렉세이다. 알렉세이의 병에 기반을 둔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니콜라이가 총사령관이 되어 모길료프에 있는 군 본부로 떠나자 더욱 커졌다. ‘독일의 압제’가 러시아인의 영혼에 깃든 반유대주의를 대체하고 다름슈타트 태생의 황후에게 따라붙었다. 카페에서 떠돌아다니는 우스갯소리에 따르면, 어린 황태자가 궁전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궁정을 방문한 장군이 “무슨 일이세요, 알렉세이?” 하고 묻는다. 황태자가 말한다. “러시아군이 지면 아빠가 울고, 독일군이 지면 엄마가 울 거예요. 난 언제 울어야 되요?” <북폴리오> 제공

» 그레고리 라스푸틴. <북폴리오> 제공
그레고리 라스푸틴 = 1916년 가을 러시아 정부를 지배한 사람은 라스푸틴이었다. 머리는 장발에 윤기가 없었고, 턱수염은 기름이 번질번질한 냅킨 같았으며, 이는 돌보지 않아 검게 변색되었다. 발레리나 타마라 카르사비나는 거리에서 라스푸틴을 지나치다가 “농민의 얼굴에, 이상한 눈빛을 지닌, 이해할 수 없는 두 눈을 가진, 바로 광인의 눈을 한”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 불가사의한 치료사를 황실에 소개한 사람은 황후의 절친한 친구이자 “비스킷 반죽의 거품처럼 평범한” 여자 안나 비루보바였다. 라스푸틴은 음탕한 언행으로 예절 바른 숙녀들을 흥분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 차르의 후계자, 혁명 러시아의 초대 수상 게오르기 리보프 공. 나이아가라 폭포만큼이나 혁명에 무감각했던 둔한 인물이었다. 그는 말했다. “강물은 흘러 떨어진다. 그것뿐이다.” <북폴리오> 제공
» 전직 차르 니콜라이가 유폐 중인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피에르 질리아르와 함께 나무에 톱질을 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전직 차르 니콜라이 = 유폐 중인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자녀들의 가정교사인 피에르 질리아르와 함께 나무에 톱질을 하고 있다. 니콜라이는 항상 육체노동을 즐겼다. 그와 가족은 유폐되어 있는 동안 자진해서 일했다. 그는 “2시에 우리 모두 정원으로 갔다.”고 일기에 적었다. “다들 아주 열심히, 심지어 즐거워하면서 땅을 파기 시작했고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시계가 5시를 가리키는 줄도 몰랐다.” <북폴리오> 제공

» 1917년 5월 차르스코예 셀로의 정원에서 일을 마친 올가, 타탸나, 아나스타시야, 마리야(왼쪽부터) <북폴리오> 제공
감금당한 공주들 = 1917년 5월 차르스코예 셀로의 정원에서 일을 마친 올가, 타탸나, 아나스타시야, 마리야(왼쪽부터). 2월 쿠데타 이후 그들은 차르스코예 셀로에 감금되었으며 여기서 집안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10월 쿠데타 후 가택연급은 거의 투옥에 가까웠다. 1918년 4월 그들은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되었고, 7월 16일 이곳으로 암호화한 ‘처형 명령서’가 전달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07.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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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5-03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되는 시리즈네요. 담아가요.

이름없는괴물 2007-05-0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노프 황가에 대한 책은 없을까요? 마지막 황가에 대한 낭만 탓에 책을 찾아 보고 싶은데 잘 없더군요.

로쟈 2007-05-03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노프 황가의 운명>(2003) 같은 책이 있는데(657쪽) 국내에도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첼리스트이면서 국내에는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제 바람구두님의 페이퍼를 읽고 처음 알게 됐는데, 관련 부고기사들을 옮겨놓는다. 클래식에 특별한 취향이 없는 탓에 그의 죽음에 별다른 감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정도를 갖고 있나 보다). 다만, 과거 절친했던 한 친구가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첼리스트 정도로 기억이 날 따름(그녀는 로스트로포비치의 내한 공연을 빼놓지 않았다).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건 지휘자로서의 데뷔작이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것. 1968년이었고 볼쇼이에서였다...

한국일보(07. 04. 28) '천상의 선율' 러 첼로 거장 로스트로포비치 '천상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러시아 출신 첼리스트 겸 지휘자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로스트로포비치는 간장 질환으로 입원 치료 중이었다. 1927년 구소련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음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첫 첼로 공개 연주를 했다. 16세 때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배운 피아노와 첼로 외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지휘도 공부했다.



23세 때 소비에트 시절 최고의 영예인 스탈린상을 받으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서방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반체제 인사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글을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보냈다가 요주의 인물로 찍혀 국내 활동과 해외 연주여행을 제한 받자 7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파리에 머물던 78년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나 90년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에 의해 복권돼 모스크바로 금의환향했다.

냉전시절 구소련의 예술적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도 잘 알려진 그는 91년 민주화에 저항하는 구소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에 맞서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그 앞에서 즉흥 연주를 했고, 99년 다시 그 자리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첼리스트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닉과 깊이를 보였을 뿐 아니라 첼로의 레퍼토리를 넓히는 데 누구보다 힘써 수많은 곡의 작곡을 위촉하고 직접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브리튼, 루토슬라브스키, 펜데레츠키, 뒤티외 등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첼로 곡을 썼다. 한국 첼리스트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수많은 어린 첼리스트들의 정신적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1968년, 볼쇼이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지휘하면서부터다. 망명 후 첼로 연주와 지휘를 병행한 그는 77년 워싱턴의 내셔널심포니 음악 감독이 되어 17년간 이끌면서 지휘했고,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했다. 프랑스의 레종도뇌르 훈장 등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최근에는 아내인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와 함께 아제르바이잔 어린이를 위한 건강 재단을 만들어 운영해왔다.(오미환 기자)

동아일보(07. 04. 28) "거장, 천상의 현을 울리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별세"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지난해 말 간 질환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나 이날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그는 지난달 27일 80세 생일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달 들어 건강이 악화됐다.



1927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태어났으며 모스크바 국립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뒤 1945년 소련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황금상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를 사사했으며 리히테르(피아노)의 반주로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에밀 길렐스(피아노)와 레오니트 코간(바이올린)과 트리오로도 활동했다.

1974년에는 반체제 인사인 솔제니친과 사하로프를 공개 지지했다가 추방당했다. 공민권을 박탈당한 뒤 서방에서 자신의 역사를 다시 만들었다. 첼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 연주를 선보인 그를 위해 작곡가들은 앞 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생전에 세계 초연한 작품은 240곡이 넘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벽돌 더미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1990년 소련 체제 붕괴 후 복권된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는 1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첫 무대에서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은 세기의 명연으로 손꼽힌다.

러시아인들은 그를 ‘슬라바’(영광)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므스티슬라프’를 짧게 줄인 이 애칭은 최고 연주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4, 5차례 공연을 가졌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김치와 갈비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에서 나를 부르면 언제든지 가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전승훈 기자)



■ 애제자 장한나의 추모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24·사진) 씨는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그의 애제자가 됐다. 장 씨는 27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린 느낌”이라며 스승에 대한 애도의 뜻을 밝혔다. 이를 정리했다.

선생님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첼리스트였다. 처음 만난 것은 11세 때였다. 선생님 앞에서 연주하고 싶어 선생님이 파리에서 여는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나갔다. 선생님은 “처음에 첼로가 혼자 걸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아 놀랐는데 뒤에 조그만 여자애가 있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연주를 마친 뒤 선생님은 나를 번쩍 안아 주셨다.

이후 15세 때까지 워싱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선생님을 찾아가 레슨을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지막 레슨을 받던 날 선생님은 “네게 음악의 열쇠를 주었다. 이제 그 문을 열고 나가 너만의 음악을 만들어라”고 말씀하셨다.



1996년 첫 음반을 녹음할 때 선생님께서 지휘를 해 주셨다. 선생님은 “첼리스트 음반의 녹음을 지휘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나이 들면 그 뜻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첼리스트로서의 대물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음반은 선생님께서 지휘한 유일한 첼리스트의 음반이 됐다.(전승훈 기자)

07.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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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4-29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스트로보피치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들어봤는데, 로스트로포비치가
매우 공들인 연주라고는 하지만 (요요마가 20대에 한 녹음한 곡을 60대에 했으니깐요..)
저한테는 별로 안 땡기더군요. 안너 빌스마나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를 더 좋아한다는...

(p.s)그나저나 이 분 녹음도 30년만 지나면 모두 저작인접권이 풀리겠군요.흐흐흐...ㅡㅡ;; (돌아가신 분에게 이 무슨 망발..ㅡㅡ)

필라멘트 2007-04-2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 관심분야가 아님에도 음악관련 기사를 소개해주신 로쟈님에게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60대에 와서야 바흐전곡을 녹음했는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거장의 겸손함과 신중함을 느끼게 합니다. 미샤 마이스키, 요요마.. 푸르니에.. 다들 훌륭한 첼리스트들이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완벽한 경지에 이르기엔 아직.. 이번 3월에 푸틴 대통령이 크렘린궁에 초청해 팔순을 기념했는데.. 최고의 거장에 대한 입증이랄까요 예우랄까요. 아무튼 20~21세기 최고의 음악가를 잃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로쟈 2007-04-2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ravinsky님/ 거장의 경우에도 호오는 갈리더군요...
juin님/ 그렇군요.^^
ysp988님/ 음악은 관심분야가 아니지만 '러시아' 음악가라서요.^^
 

알다시피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 후보자 두 사람이 작년에 선발되어 현재는 러시아의 가가린우주인훈련센터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발사는 내년 4월로 예정돼 있으며 올 8월에 최종 후보자 한 사람이 가려질 것이라고 한다. 관련기사를 예전부터 모아놓으려고 했으나 시간을 내지 못했었는데 마침 잘 정리된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영어공용어론에 관한 대담을 어제 옮겨놓았지만, 우주인이 되기 위해선 (현재로선) 러시아어를 배워야 한다(영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언젠가 모스크바의 문화공원에서 최초의 우주왕복선을 본 기억이 떠오른다(모형이 아니라 실물이다). 정비중이어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던 게 약간의 아쉬움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내년 이맘때쯤엔 '한국 우주인' 이야기로 좀 들썩거리겠군... 

교수신문(07. 04. 23) 소련·미국의 우주인 선발과 한국인의 활약

해마다 4월 12일이 되면 러시아에는 국경일처럼 여겨지는 하나의 중요한 기념일이 찾아온다. 길에는 이 날을 축하하는 많은 게시물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신문에는 특집기사가 실리고, 텔레비전에는 이 날에 대한 각종 다큐멘터리들이 주요시간대에 방영된다. 이 날은 ‘우주인의 날’, 바로 인류가 최초로 우주를 나간 날이다. 유리 알렉세이비치 가가린(1934-1968). 1961년 4월 12일 지구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는 우주로 나감으로써 가가린은 지구를 벗어난 최초의 인류, 즉 우주인 1호를 기록하게 된다.



누가 먼저 우주에 로켓을 보낼 것인가. 누가 먼저 인공위성을 쏠 것인가. 누가 먼저 생명체를 우주로 보낼 것인가. 누가 먼저 사람을 우주에 보낼 것인가. 누가 먼저 여성을 우주로 보낼 것인가. 누가 먼저 우주선의 문을 열고 우주유영을 할 것인가. 누가 먼저 달에 갈 것인가. 50~70년대를 걸쳐 미국과 구소련간 진행된 당시의 이러한 일련의 우주개발 경쟁과정은 과학적, 공학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냉전이라는 시기에 상대진영에 비해 보다 우월한 과학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서 탄생하게 된다. 또한 우주발사체와 인공위성 기술은 대륙 간 타격능력, 우주로부터의 첩보능력 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단순한 기술적 과시를 넘어 군사적 우월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초기 우주인 선발은 기본적으로 군에서 후보자들이 선발되었다. 혹독한 훈련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체력, 임무에 대한 보안, 그리고 그 임무가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임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당시 군에서의 선발은 어쩌면 당연한 조치로 여겨진다. 사실상 최초로 인류를 우주로 보내기 위해 노력하던 시점에서는 인간에게 무슨 훈련을 시켜야 하는지도 몰랐고, 인류가 우주에 나가면 어떤 신체변화가 올지 그저 추측만 할 뿐이었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고난도 훈련을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소련에서의 최초의 탑승에서 살 수 있는 기대확률은 양측 모두 반반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총성 없는 미소간의 우주개발전쟁은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우주라는 전선으로 우주비행사를 보내게 된다.

소련은 공군조종사 중 20명을 후보로 선발하였다. 선발은 워낙 극비로 진행되었던 일이라 후보들은 당시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선발되고 있었는지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훈련과정 중 가장 유력한 후보는 게르만 티토프(1935-2000)였다. 그러나 그는 소위 말하는 집안 좋은, 부르주아에 가까운 출신이었다. 이에 비하여 가가린은 스몰렌스크의 가난한 농노 가정에서 태어났으므로 진정한 인민의 자식이라 말할 수 있었다. 재정러시아, 소련의 시기에는 대부분의 국민이 농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소련 우주개발의 최고 수장이었던 까랄료프와 마찬가지로 그는 직업학교(우리나라로 말하면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점은 까랄료프에게 상당히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다른 가장 중요한 최종선발 원인 중 하나는 그의 외모와 성격이었다. 대중을 향해 어필할 수 있는 잘생긴 얼굴,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그의 쾌활한 언변은 결국 그를 최초의 우주인으로 선발되도록 한다.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귀환한 가가린은 대중 앞에 서게 되었고, 소련은 “소련의 위대한 과학기술로 우리의 아들이 우주를 다녀왔노라”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하였으며, 국민은 그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게 된다. 티토프는 같은 해 8월 6일 우주에 다녀옴으로써 결국 세계에서는 4번째, 러시인으로는 두 번째 우주인이 되었다. 티토프는 우주비행사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말하지 못하였으나 훗날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성적이 좋았음에도 최초의 우주인으로 선발되지 못한 불만을 토로하곤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은 공군 시험비행사 중에서 7명을 선발했다. 알랜 셰퍼드(1923-1988)가 1961년 5월 5일에 준궤도비행에 성공함으로써 세계에서는 두 번째, 미국인으로는 최초의 우주인으로 기록된다. 실제로 준비상황은 소련에 비해 미국이 좀 더 빨랐으나, 유인발사 전 시행한 무인발사의 실패로 인하여, 이를 검토하기 위해 발사가 연기되면서 최초 우주인의 영광은 러시아인 가가린에게 돌아가게 된다. 또한 러시아가 성공한 비행은 우주선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아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귀환한 비행이었으나 미국은 완벽한 궤도진입을 하지 않고 우주를 잠시 나갔다 오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우리나라도 고산, 이소연 두 명의 우주인 후보가 현재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의 가가린우주인훈련센터(www.gctc.ru)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이곳은 ‘별의 도시’라고도 불리며, 모든 러시아우주비행사와 러시아발사체에 탑승하는 우주비행사는 이곳을 거쳐 가게 된다. 과학기술부는 2008년 4월로 예정된 발사를 위해, 금년 8월에 두 명의 후보 중 최종 1명을 선발할 계획이라 한다. 노보스찌 코스모나브티끼(우주비행뉴스)에 따르면 현재 두 후보는 러시아어수업, 이론수업, 가속도 및 무중력 훈련을 받고 있으며, 우주발사체인 소유즈 및 우주정거장 조정훈련 역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주단위로 그들의 생활모습을 한국으로 보내오고 있으며, 한국우주인배출사업 홈페이지(www.woojuro.or.kr) 등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 둘 중 선발된 최종 후보는 소유즈 발사체에 몸을 싣고 우주정거장에서 약 8일간 머물게 된다.



누구를 우주인이라 부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으나 공통적으로 크게 두 부류를 말하곤 한다. 첫 번째는 우주비행을 위해 훈련받은 자를 말한다. 훈련받은 모든 사람이 우주를 나갈 기회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주인 후보로 선발되어 훈련을 받는 것 역시 대단히 어려운 일이므로 이들 모두를 우주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번째 기준이 보다 보편적인데 우주를 나갔다 온 모든 사람을 우주인이라 칭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통상 FAI(www.fai.org)의 기록을 따르는데, 여기서는 지구로 부터 100km 이상 벗어난 모든 사람을 우주인, 즉 우주를 다녀온 자로 인정한다. 미국의 경우 자국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50마일(80km)을 그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2006년 9월까지의 집계를 보면 미국기준으로는 454명이, FAI기준으로는 448명이 우주를 다녀온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한국계로는 미국국적의 폴란스키(50)가 이미 두 차례나 우주를 다녀온 바 있다. 그의 어머니가 한국인 2세로 하와이출생이며, 어머니의 부모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다른 한국계와 같은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폴란스키의 경우 비록 한국계라고는 하나 사실상 미국인이므로 최초 한국우주인이라는 타이틀이 부여되기에는 적합지 않다. 그러나 고산, 이소연 후보 외에도 또 다른 한국인인 허재민 씨(25) 역시, 현재 러시아에서 훈련 중인 두 우주인 후보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의 우주비행을 앞두고 있다. 그는 지난 2006년 1월 컴퓨터업체인 오라클에서 진행된 프로그램에 당첨되어, 준괘도우주비행을 올해 말 예정하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우주에 먼저 나가는 사람은 허재민 씨가 될 예정이다.

아직까지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우주로 나가는 한국인이 나올지 러시아에서 나올지는 미지수이다. 일정대로라면 허재민 씨가 앞서있지만, 민간우주프로그램이라는 특성상 예정대로 진행될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미국에서의 프로그램이 단순히 며칠간의 훈련으로 수 분간 우주를 다녀오는 프로그램이므로, 허재민 씨가 먼저 우주를 나가더라도 우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이미 스페이스쉽원(SpaceshipOne)을 타고 허재민 씨가 예정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민간우주비행을 한 마이크 멜빌(Mike Melvill)은 전 세계적으로 433번째 우주인으로 인정되고 있고, 우주인 명단에 등재되어 있다.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 역시 이와 유사한 비행이었다. 만일 허재민 씨가 예정대로 고산 혹은 이소연 후보보다 먼저 우주비행을 할 경우,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사람보다 위쪽에, 전 세계가 인정하는 또 다른 한국 국적의 한국우주인이 등재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최초’라는 단어는 언제나 매력적인 단어이다. 아직 누가 ‘최초’의 한국우주인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과거와 다른 점은 예전에는 단순히 우리나라에도 우주인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였다면 현재는 곧 출산을 앞둔 어머니와 같은, 잠시 후를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최초’라는 것은 그 이후 지속적인 노력과 발전이 있을 때 그 의미가 더욱 존중되고 기억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제 첫걸음을 떼다시피 한 한국의 우주개발에 한국인 우주인의 배출이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하성업/ 러시아통신원· 모스크바국립항공대 박사과정)

07. 04. 27.

P.S. 가가린훈련센터를 다른 책도 재작년에 출간된 것이 눈에 띈다. 국내에서 출간된 우주인 관련서는 의외로 드문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우주로부터의 귀환>(청어람미디어, 2002) 정도가 아닌가 싶다.

다치바나는 이렇게 적었다. "우주비행사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우주 체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때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그것이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우주 비행사들이 오랫동안 가슴 속에 감추어 두었던 본심에서 우러난 메시지를 세계 최초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된다. 우주 비행사들의 전언은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놀랄 만큼 깊고 큰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그것이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마음 속 깊은 곳을 자극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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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7-04-2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로부터의 귀환]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 아저씨는 논픽션을 쓰는 데에 일가견이 있어 보여요.
그나저나 오랜만입니다 로쟈님. 어제 중간고사가 끝난 페일레스였습니다. :)

로쟈 2007-04-2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치바나의 장기겠죠. 저는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그나마 지난주에 한주 쉬는 과목도 있었는데.--;
 

명품극단의 고골 3부작에 대해서 몇 달 전에 소개한 바 있는데(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1909487&paperId=1049610) 이번에 국립극장에서 재공연된다고 한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의 연출자와 배우들이 중심이 되어 새롭게 해석한 고골을 무대에 올린 작품들이고 그간에 호평을 받아왔다.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한 작품이라도 구경을 좀 해봐야겠다. 

한겨레(07. 04. 07) 국립극장서 만나는 러시아 대문호

러시아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연극 ‘고골 3부작’이 4일부터 잇달아 관객을 찾아간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으로 구성된 명품극단은 고골의 우크라이나를 다룬 소설 가운데 <비이(4~7일)>,  <광인일기(18~22일)>,  <행복한 죽음(13~17일)>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라는 부제 속에 녹였다. 올 1월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공연 당시 평단과 관객의 호평에 힘입어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서 재공연하는 것인데,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고골의 대표적 단편소설을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부작의 서막인 <비이(4~7일)>는 키예프신학교에 재학 중인 어린 신학생 호마부르뜨의 하루 일과를 그렸다. ‘봄’이라는 부재처럼 호마부르뜨의 일과는 참을 수 없도록 졸리운 봄날의 꿈처럼 장난스럽기도 하고 괴기스럽기도 하다. 세트의 구성보다는 배우의 신체행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소도구를 통한 다양한 공간변화, 러시아 전통 민속음악과 한국의 전통악기 가야금의 조화를 엿볼 수 있다.

<행복한 죽음(13~17일)>은 노부부의 삶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하고 따뜻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노부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와 쁠리헤리야 이바노브나는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있지만, 일상에서 전원의 목가적인 무료함이나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배우자의 죽음이나 자신의 죽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광인일기(18~22일)>는 페테르부르크의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의 고독한 삶을 표현했다. ‘여름’이라는 부제처럼 작품 속 주인공 뽀쁘리신의 일기는 한 여름의 열정이 만들어 낸 사랑과 그것에서 비롯된 절망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조하석의 간결한 마임연기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이 시대적 분위기를 한껏 살린다.

기치스 모스크바 연극예술 아카데미에서 유학한 뒤 현재 명품극단 상임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원석씨가 세 작품의 연출을 맡았고, 그가 상임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베르니사쥐 극장의 러시아 스태프와 배우가 결합했다.(김미영 기자)

07. 04.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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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과두재벌'로도 불리는 러시아의 신흥 부유층이자 경제권력인 '올리가르히'에 대해서 이전에 두어 번 페이퍼를 띄운 적이 있다. 가령, '러시아의 부자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836891)이나 '러시아 백만장자들의 사치'(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1909487&paperId=989306) 같은 페이퍼들이 그렇다. 해마다 봄이 오면, '포브스'지는 전세계 억만장자들의 리스트와 랭킹을 발표하곤 하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레시안에서 이에 관한 비판적인 분석기사를 기획기사로 소개하고 있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억만장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전체 타이틀이므로 러시아 편은 '러시아 억만장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되겠다. '올리가르흐' 혹은 '올리가르히'(복수형)는 소비에트 이후,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키워드 중 하나이다(같은 제목의 영화도 만들어졌었다. 감독은 <택시 블루스>를 만들었던 파벨 룬긴).

프레시안(07. 04. 02) '억만장자 1000명 시대'의 그림자

미국의 경제 주간 <포브스>는 지난달 초 전 세계 억만장자(billionaire)의 분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며 "2007년은 인류역사상 가장 부유한 해"라고 선포했다. 재산이 10억 달러(9500억 원 상당) 이상인 억만장자가 작년 대비 153명이 증가한 946명으로 집계된 데다 이들 억만장자들이 보유한 재산의 총액도 작년 대비 35%가 늘어난 3조5000억 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 60억 인구 중 소득 수준 하위 55%의 재산은 줄어들었거나 그대로인 형편을 감안한다면 억만장자가 많아졌다고 해서, 혹은 갑부들이 소유한 재산이 급증했다고 해서 2007년이 "가장 부유한 해"가 된다는 <포브스>의 시각은 다분히 '부자 중심적'이다(*물론 이건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모두가 부유하다면 아무도 자신이 부유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진보 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제임스 페트라스 빙햄튼대 교수(사회학)는 억만장자의 급증 자체에 감격해 하는 <포브스>의 태도를 비판하며 이들이 전 세계 인구 중 1억 분의 1만 누린다는 '집중된 부'를 향유하게 된 과정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억만장자들의 대부분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혁신을 통해 기업을 키워 나가거나 또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대신 주식, 부동산 등을 통해 있는 재산을 불리거나 천연자원을 내다 팔아 돈을 버는데 골몰해 왔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비생산적 경로를 통해 '그들만의 부'가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나머지 인류는 '역사상 가장 가난한 해'를 맞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억만장자들에게 부를 축적할 '기회'를 제공한 쪽은 '권력'이다. 지배계급과 결탁한 억만장자들은 재산 증식을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경우에 따라선 범죄도 서슴지 않는다. 
이에 페트라스 교수는 신흥재벌들의 급성장세가 두드러진 러시아와 '검은 돈'이 넘치는 남미의 경우를 예로 들며 억만장자들과 그들의 부가 늘어나는 현상은 오히려 전 세계가 경계해야 할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프레시안>은 페트라스 교수가 이같은 주장을 담아 지난달 21일 미국의 진보성향 매체 <카운터펀치>에 기고한 <억만장자와 세계 지배 계급의 결탁 과정: The Billionaires and How They Made It Meet the Global Ruling Class>을 '러시아편', '남미편', '억만장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등 3부로 나누어 요약, 게재한다. 그 첫 회 '러시아편'은 서방언론들에 의해 '자수성가형'으로 미화된 러시아 신흥재벌, 올리가르히의 실상과 그들이 억만장자 반열에 오르기까지 러시아 정부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옐친 민영화 정책의 최대 수혜자, 올리가르히

젊은 억만장자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로는 러시아를 따를 데가 없다. 러시아의 신흥과두재벌인 올리가르히는 권력을 이용해 부의 축적을 이룬 억만장자의 상징이다. 러시아 억만장자들의 3분의 2는 20대 중후반에 재산을 증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불명예스런 10여 년 간 보리스 옐친과 '미국의 지시를 받는' 그의 경제 보좌관 예고르 가이다르, 아나톨리 추바이스는 현실적인 가치보다 훨씬 낮은 '정치적인 가격'에 러시아의 국유재산들을 몽땅 팔아먹었다.
  
국가의 재산이 민간으로 이전되는 과정에는 예외 없이 암살, 대대적인 절도, 불법 주가 조작, 사재기 등 '깡패들의 전술'이 동원됐다. 미래의 억만장자가 될 재목들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공장, 교통시설, 석유, 가스, 철, 광물 등 1조 달러가 넘는 가치의 국가 재산들을 탈취해 갔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와 달리 러시아의 억만장자들 중에서는 전직 공산당 간부였던 인물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공산주의는 비효율적'이란 항간의 주장과는 달리 올리가르히들의 손에 넘어가기 전까지 국영기업들은 저마다 이윤을 창출하고 경쟁력을 평가받고 있었다는 것도 러시아만의 차별점이다.


  
이같은 사실은 올리가르히들이 이 막대한 재산을 넘겨받은 지 10년도 채 안 돼 명백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모든 억만장자들이 부를 축적하는 원천은 건설이나 혁신, 혹은 생산적인 기업 건립에 있지 않았기에 민영화된 기업들은 오히려 경쟁력이 떨어진 것이다. 민영화의 과실을 따먹은 것은 고위 공산당 간부들이 아닌 막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었다. 자본주의에 재빨리 적응한 이들은 정부 고위관료를 매수하거나 협박하고 필요할 경우 암살까지 해서 보리스 옐친 정권이 서방의 '시장개방' 조언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내놓은 민영화 정책의 혜택을 독식해 버렸다.
  
최근 억만장자들의 수를 집계해 발표한 <포브스>는 러시아 '올리가르히'들이 마치 자수성가로 성공한 청년 기업인들인 것인 양 소개했다. 70년 간 러시아 인들의 땀과 피로 지켜온 국영기업들을 강탈한 것이 마치 20대 젊은 '기업정신'의 산물인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최대 부호 8명은 모두 경쟁상대의 재산을 강압적으로 빼앗거나 '유령 은행'을 만들거나 알루미늄, 석유, 가스, 니켈, 철강제품 등 국가소유의 천연자원을 탈취하거나 보크사이트, 철 등 광물을 수출해서 부자가 된 경우다. 공산주의 시절 국가가 경영했던 산업 중 어느 한 부분도 이들 올리가르히에 탈취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건설, 텔레콤, 화학, 부동산, 농업, 보드카, 식료품, 경작지, 언론, 자동차, 항공 등이 모두 이들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올리가르히 성장, 러시아의 성장과는 무관
  
올리가르히들이 최대 부호로 성장한 바닥을 얘기하기 위해선 옐친의 민영화 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빠른 시일 내에 최고의 자리 혹은 최고에 가까운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구 소련 정부 관계자들이나 자기 사업의 경쟁자들을 협박하기도 하고 말 그대로 살인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약탈이나 탈취를 가능토록 한 '핵심 정책 기반'은 추바이스와 가이다르가 설계한 러시아 공기업의 광범위한 민영화 정책이었다. 이 '충격요법'은 크렘린의 경제 자문을 받았던 '하버드 팀'과 클린턴 미 대통령이 전격 지원 아래 추진됐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흐름을 돌이킬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민영화는 러시아 이 '기업 포식자'들 간의 전쟁을 촉발하는 동시에 러시아 경제의 관절을 꺾어버렸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생활경제 수준이 80% 이상 하락했고 루블의 가치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석유, 가스 등 그 가치를 따지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전략적 자원'이 약탈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온 억만장자들이나 미국·유럽 등의 석유·가스 다국적 기업에 헐값으로 매각됐다. 마피아와 결탁한 올리가르히들은 일 년에 1000억 달러 이상의 돈을 세탁해 뉴욕, 런던, 스위스, 이스라엘 등지의 제도권 은행으로 보냈다. 이 돈은 미국과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의 부동산을 사는 데 쓰이거나 영국 축구팀을 사거나(대표 올리가르히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영국 첼시 축구팀 구단주임) 이스라엘 은행이나 광물 자원 개발에 투자됐다.
  
옐친 정권 아래에서 이 전쟁의 승자들이 새로운 경제 섹터의 팽창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았다면 푸틴 정권에 이르러서는 이 깡패 같은 올리가르히가 조직을 병합해 몸집을 불리게 됐다. 백만장자 여럿이 뭉쳐 억만장자로 성장한 셈이다. 거들먹거리는 젊은 폭력배이거나 지방의 사기꾼이었던 이들은 급기야 서구의 홍보업체의 도움을 받아 존경할 만한 기업인들로 새로 태어났다. 신흥 올리가르히들은 금융 전문 언론들의 지원을 업어 세계 금융 시장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올리가르히와 푸틴 정권, 사이가 나쁘다고?

그러나 푸틴 대통령의 최근 지적대로 이들 신흥재벌들 앞에는 광대한 선택지가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업 투자나 혁신에는 실패하고 있다. 원자재 생산을 제외하면 올리가르히가 외화를 벌어들이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들의 생산품들이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된 수익은 생산이 아닌 주식투자, 은행 예치, 광산 매점 등에서 나오기에 당연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서방 언론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옐친 시대에 성장한 올리가르히와 푸틴 정권 간의 불화, 그리고 푸틴 정권에 새로이 재산 불려가고 있는 억만장자들의 성장에 주목을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식 증명은 결국 옐친 아래에서 성장한 부호들과 푸틴 아래에서 결합한 부호들 간의 불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상호간 살인이 줄고 대신 정부 규제 아래 경쟁이 제도화되는 등 푸틴 대통령이 요구한 '새로운 게임의 룰'이 작동을 하자 기업들 간의 병합이 성사되는 '커다란 행운'도 잦아진 것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문학가 오노레 발자크는 프랑스 부르주아 그룹이 급성장한 미심쩍은 기원에 대해 "큰 운 뒤에는 큰 범죄가 있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대량 약탈과 출혈을 통해 억만장자가 된 21세기 러시아 부호들에게도 가능한 설명이 아닐까.(이지윤 기자) 

07.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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