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책 권하는 휴가

여름은 덥다. 제대로 된 여름나기는 더위와 더불 때 완성된다. 더움의 저 끝은 차거움 또는 서늘함. 그 거리가 짧을수록 더위는 제맛이다. 그래서다. 바다로, 산으로 떠남은 잠시의 서늘함을 거쳐 더위로 돌아오기 위함이다. 그때 더위는 비로소 더위가 된다.

굳이 몸을 옮겨야 맛인가. 책의 그늘은 깊어 그 속에 접어들면 더위는 아랑곳 없다. 에게해, 에베레스트 이야기는 어떤가. 에스에프, 팬터지, 호러는 아예 더위가 없는 세계다. 전문가가 권하는 스물 네권을 모았다.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좋다. 책의 뒷장을 덮고나서 더위세계로 귀환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릴 거다. 그리고 참더위다.

만화평론가 박인하씨가 권하는 만화는 어떤가. 명불허전 <바람의 파이터>, 배꼽잡는 <게임방 손님과 어머니> 등등. 여기에 음악이 있다면 금상첨화.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 해바라기의 ‘뭉게구름’, 아니면 디제이독, 팻보이 슬림도 더위맛을 돋운다.

단숨에 읽히는 1800쪽짜리 ‘국산 스릴러’

책이 안팔리면 가장 손해보는 사람은? 경제적 측면으로 보면 작가가 아니라 출판사다. 따라서 책이 권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출판사가 위험을 감수했다는 이야기다. 곧 일단 책의 재미에서는 자신있어하는 책이라고 보면 대충 맞는다.

장편 스릴러 소설 <팔란티어>(김민영 지음·황금가지 펴냄)의 두께 때문에 겁먹을 분들을 위해 미리 드리는 말씀이다. 이 책은 ‘겨우’ 세 권짜리지만 그 두께가 책 읽을 용기를 가로막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원래 6권짜리였던 것을 3권으로 펴냈기 때문에 권당 600쪽씩인 두께가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부담스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같은 쪽수의 다른 소설에 견줘 읽는데 걸리는 시간이 절반 정도면 충분할만큼 진도가 잘 나가는 소설이기 때문에 컨디션만 좋으면 하루만에도 모두 읽을 수 있다. 적어도 여름철 읽을 거리 특유의 긴장감과 단숨에 읽어나갈 수 있는 줄거리의 속도감면에서 이 책은 단연 최고 수준이란 평을 듣고 있다.

<팔란티어>는 ‘게임중독 살인사건’이란 부제를 달고 있듯이 게임이란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속 살인의 관련을 추적하는 내용이 줄거리다. 독특한 점은 스릴러와 팬터지가 절묘하게 절반씩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팬터지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도 부담없이 접할 수 있을만큼의 팬터지인데, 그나마 팬터지 부분이 길어진다 싶으면 바로 현실의 살인사건 추적장면이 바톤을 이어받아 교대로 펼쳐진다. 게임속에서 벌어지는 팬터지 줄거리와 실제 현실의 줄거리가 정교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야말로 이 책의 묘미다.

기발한 발상이나 치밀한 줄거리의 정교함이 스릴러의 생명이라고 할 때, 아직 스릴러의 제 맛은 외국 소설들에서만 맛볼 수 있다고 여기는 독자들이 많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분명 뛰어난 국내 작가의 스릴러는 있다. <팔란티어>는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에 이른 정말 몇 안되는 ‘국산 스릴러’라고 볼 수 있다. 1999년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이란 제목으로 나왔다가 새 이름을 달고 다시 돌아왔다. 당시 여러가지 사정으로 책의 재미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한 열성팬들이 이 책의 ‘부활’을 출판사에 독촉해 이번에 되살려낸 것이다.

여름 한철을 책 하나에 빠져 보내고 싶은 분들께는 같은 이름의 소설을 그린 일본 역사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AK펴냄)을 추천한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의문에 대한 다양한 답을 제시하는 듯한 만화다.

반대로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요즘 인기 높은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박현욱 지음·문이당 펴냄)가 어떨까. 월드컵은 끝났지만 축구의 여운을 잠시 더 음미할 수 있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SF가 싫다고? ‘편견의 두개골’을 후려칠걸

도서관 지하창고에서 먼지에 덮인 낡은 고문서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문서를 어렵게 해독해 보니 ‘영생불멸의 비밀’이라는 황당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즈음 지역신문에 났던 조그만 기사가 얼핏 떠오른다. 어떤 수도사 집단이 사막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들이 채택하고 있다는 문양이 고문서에서 묘사된 신비스런 상징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전율한다. 이건 그 누구도 알아채기 힘든, 오로지 역사의 더께에서 우연과 탐구의 결과로만 마주칠 수 있는 기회처럼 보인다. 실로 삶에서 한 번도 마주치기 힘들 법한.

그래서 미국의 남자 대학생 네 사람은 애리조나 사막으로 결말을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난다. 스무 살, 스물 한두 살의 파릇파릇한 청춘들로서 각각 갑부의 아들, 시인 지망생, 모범적인 의대생, 그리고 언어학 장학생이다. 그런데 그들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영생은 그들 중에서 단 두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나머지 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동료들에 의해 생명을 빼앗겨야만 한다. 물론 누가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미리 정해진 바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위와 같은 설정이라면 으레 떠올릴 법한 액션 어드벤처나 암투, 갈등과는 거리가 멀다. 젊은 지성들의 내밀한 자기 고백이자 탈피의 성장담으로서, 끝 부분에 가면 독자의 내면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자기반성의 클라이맥스가 기다리고 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어느 출판평론가가 몇 달 전에 이런 글을 썼다. 그동안 ‘SF’ 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솔직히 부정적인 선입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텔레비전의 어떤 책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계기로 <빼앗긴 자들>(어슐러 르귄 지음) 등을 읽어 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두개골의 서>도 인문학적, 주류문학적 감성에 익숙한 독자 대중들의 왜곡(?)된 ‘SF’관을 바꾸기에 충분한 멋진 작품이다. 작가 로버트 실버버그는 숱한 SF문학상들을 휩쓸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로, 저명한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오늘 실버버그가 간 길을 내일 다른 SF작가들이 간다’ 라고까지 평했던 인물이다.

<우주전쟁>같은 SF의 전통적인 설정을 다루면서도 깊이가 있는 괜찮은 작품을 원한다면 <스타쉽 트루퍼스>의 안티테제격인 <영원한 전쟁>(조 홀드만 지음·행복한 책읽기)을 권하며, 인문학과 과학이 결합된 정말 반짝반짝하는 SF의 정수를 맛보고 싶다면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지음·행복한 책읽기)를 놓치지 마시길. 특히 후자는 ‘당신 인생’에 오래오래 여운이 남을 것이다.

박상준/서울SF아카이브 대표

반전도 트릭도 없다 하지만 무지 재밌다

얼마 전에 지인들과 드라마와 탤런트의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말이 나왔다. “정말 대단한 배우들의 연기를 볼 때면, ‘저 배우 정말 연기 잘 한다.’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아요. 그런 말들이 나온다면 배우의 연기가 아직 부족한 거죠. 정말 훌륭한 연기 앞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요. 캐릭터에 몰입되어서 그가 연기하는 시공간 속으로 완전히 빠져버리기 때문이에요.”


훌륭한 작가 또한 그렇다. 훌륭한 작가들은 독자들을 이야기 안으로 붙잡아 들여 놓치지 않는다. “이 소설 멋진데.”라고 말하는 순간 작가는 패배하기 때문에. 미야베 미유키는 그런 의미로 훌륭한 작가에 포함된다. 그가 하루키와 함께 일본 최고의 대중작가로 꼽혀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이야기’를 다룰 줄 아는 흔치 않은 작가이며, 중간에서 책에서 손을 떼게 만들 만큼 독자들을 지루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용은 잠들다>는 사물이나 사람에게 접촉하는 것만으로 대상의 사념이나 기억을 읽을 줄 아는 초능력자(사이코메트러)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미야베 미유키는 초능력이라는 비일상적인 소재에서 오락적인 면을 걷어내고 오히려 대단히 상식적이며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신 안에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용을 키우고 있다면, 그리고 그 용이 만약 깨어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식은 스티븐 킹의 <캐리>와 닮아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캐리>가 호러의 길을 따랐다면, <용은 잠들다>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의 장르 안에서 따뜻한 시선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사건과 등장인물의 행방에 정신없이 뒤를 좇다 보면 어느새 뭉근한 감동이 곁에 남아 있다. 이렇듯, 미야베 미유키의 미스터리는 매우 독특하다. 결말을 위한 반전이나 독자들의 예상을 깨는 트릭 같은 잔재주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가 갖는 진정성에 호소하여, 장르소설이 갖는 재미를 담뿍 담고 있으면서도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는 “휴우” 하는 작은 한숨을 내뱉게 만들고는 한다.

<용은 잠들다>를 너무 빨리 읽어 치웠다면 <라비린토스>(케이트 모스 지음·해냄 펴냄)에 도전해 보자. 몰입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성배 전설과 미궁 신화를 결합한 신선한 설정과 비밀의 책을 둘러싸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벌어지는 사건들은, 지적 만족감과 말초적 자극을 동시에 선사한다. 복잡하게 뒤얽힌 머리를 쉬게 하고 무작정 스릴을 즐기고 싶다면 <탈선>(제임스 시겔 지음·비채)도 훌륭하다.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고전적인 미스터리의 재미와는 또 다른, 온몸을 뒤흔드는 흥분을 만끽할 수 있다.

임지호/서평사이트 readordie.net 운영자

접기 아쉬우면 등장인물이랑 ‘결말 놀이’

내가 가장 먼저 소개할 만한 피서용 책은 잭 런던의 <암살 주식회사>다. 일단 책이 가볍고 작아서 가방 안에 넣고 다니며 읽기 딱 좋다. 이야기도 구차한 군더더기 없이 빨리 읽히는 편이고.

제목의 <암살 주식회사>가 가리키는 건 이반 드라고밀로프라는 러시아 이민자가 만든 살인청부회사인 ‘암살국’이다. 이 회사는 돈만 받으면 아무나 죽이는 곳이 아니다. 직원 모두가 엄격한 도덕주의자이고 철학자인 이 단체에서 암살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몇 년 동안 완벽하게 운영되던 이 단체에 위기가 닥치니, 드라고밀로프의 정체를 알아낸 사회주의자 윈터 홀이 드라고밀로프 자신의 암살을 의뢰한 것이다. 며칠에 걸친 토론 끝에 자신의 유죄를 인정한 드라고밀로프는 동료들에게 자기 자신의 암살을 지시하고 사라진다. 그 뒤로 그와 암살국의 1년에 걸친 숨바꼭질이 이어진다.

런던이 미완성으로 남긴 원고를 추리작가 로버트 L. 피시가 완성한 이 소설은 박진감 넘치는 서스펜스 소설이기도 하지만 그만큼이나 노골적인 사변소설이기도 하다. 모든 암살자가 철학자인 이 소설에서 정치적 암살과 사회 정의는 진지한 토론과 분석의 대상이다. 이들은 동료들을 죽이고 암살하는 동안에도 토론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그러는 동안 자기네들이 세운 규칙과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 것도 물론이다. 교묘하게 가슴을 잘라내고 머리만 남겨놓은 미치광이 소설이랄까. 책을 다 읽은 뒤에도 자기만의 결말을 새로 쓰고 등장인물들의 토론에 주석을 달며 남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 다음에 추천하고 싶은 책은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의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꽤 무겁고 큰 책이니 방콕족들에게 추천한다. 국내 번역 제목에 속지 마시길. 이 책은 그냥 성실한 전기일 뿐 괴벨스의 대중 선동 테크닉을 따로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호러물로 근사하게 먹힌다. 비교적 멀쩡하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똑똑한 청년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던 일련의 자기기만의 과정을 거쳐 피투성이 독재자의 혓바닥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종종 소름이 끼친다.

마지막 책은 산토 실로로의 <우리는 몰바니아로 간다>. 거의 초현실적으로 여건이 나쁜 몰바니아라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를 소개하는 가짜 여행안내서인 이 책은 여행자들과 방콕족 모두에게 맞는다. 여행자들은 아무리 형편없는 피서지에 가도 몰바니아보다는 낫다며 자신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방콕족들은 가봐야 몰바니아 같을 게 뻔한 피서지에서 돈을 날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안심할 수 있을 거고.

듀나/영화평론가·소설가

해수욕장의 그대여 에게해로 오라

때는 1982년 여름,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진작가 스다 신타로는 렌터카와 배를 갈아타며 40일 동안 에게 해를 종횡으로 일주했다. 렌터카에 찍힌 주행거리는 8천㎞. 여행의 목적은 에게해 주변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유적을 답사하는 것. 유적 답사를 제대로 하자면 반드시 역사지식이 필요할까?

‘유적을 즐기는 데 꼭 지식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 자리에 잠자코 잠시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잠자코와 잠시이다. 가능하다면 두 시간쯤 잠자코 앉아 있는 것이 좋다. 그러면 2천년, 혹은 3천년, 4천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이 눈앞에 굴러다니는 것이 보인다.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수도원 자치공화국인 아토스 반도. 동물도 암컷은 입국이 금지되는 곳으로(암코양이를 좋아하는 수도사들이 많아져서 암코양이만은 예외),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20개 수도원이 흩어져 있다. 이 각별한 성산(聖山) 다음으로는 아폴론의 신역(神域) 델피, 델로스 섬 등과 디오니소스 신을 숭배하는 신전들이다. 다치바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땅한 관계는 ‘공존과 보완이지 한쪽만의 일방적인 해방은 아닐 것’이라 말한다.

다치바나는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지중해 세계가 공통적으로 숭배하던 여신의 ‘무서울 만큼 강한 흡입력’을 느끼고 지모신(地母神)의 계보, 곧 여신상을 더듬는다. 성(聖)스러운 신의 계보가 근원적으로 성(性)스러운 신에 닿아있다는 것. 이 대목에서 다치바나는 인류학, 역사학, 고고학, 종교학 지식을 푸짐하게 베푼다.

스다의 사진과 다치바나의 글이 서로 완강하게 자기를 주장하면서도 서로를 보완하는 이 책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청어람미디어 펴냄)에서 다치바나가 결코 ‘책상물림의 먹물’이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해수욕장에 갇힌 피서의 상상력을 책을 통해서나마 문명사적 차원으로 넓혀준다고 할까. 그 상상력은 영원에 닿아 있다. ‘인적없는 바닷가 유적에서 잠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것이 바로 영원이라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아무런 의문도 없이 똑똑히 느껴지는 때가 있다.’

한여름 밤 심심파적으로는 귀신 이야기가 제격이니, <조선의 신선과 귀신 이야기>(임방 지음·성균관대출판부 펴냄)에서 기이하고 다채로운 조선의 환타지 세계와 만날 수 있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하인들에게 주는 지침>(평사리 펴냄)에서 일급의 풍자를 즐길 수 있다. 18세기 하인들의 이기심, 사리사욕, 기만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것이기도 하다.

표정훈/출판칼럼니스트

‘불량남자’ 내 인생에서 골라내기

여자의 인생에서 남자만큼 중요한 게 없기 때문에 휴가철에도 남녀관계에 관한 책을 읽으라는 건 절대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책으로 엮이기보다는 여성잡지의 밀봉 페이지로 적당했을 법한 <이런 남자 제발 만나지 마라>가 실감나게 재미나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에게 신용카드를 빌려줬다가 사기당한 친구, 잘나갔던 과거에 갇혀 사는 남자와 사귀는 후배, 새끼재벌과 결혼했으나 지금은 30만원자리 월세에 사는 선배 등 싹수가 노란 남자를 만난 주변 사례(더불어 나의 경우까지)를 크로스오버하다 보면 책은 단숨에 읽힌다. 동창회에만 갔다 오면 양말짝을 집어 던지며 신경질을 내는 엄마와 바보같은 남자 때문에 고민하는 동시대의 여자들이 모두 모여 공부할만하다.

지금껏 남녀관계를 다룬 책들은 남자가 방향감각이 좋은 반면 여자가 주차를 못하는 건 생리학적 이유라고 하거나 스킨십을 원하지 않는다면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며 남자의 본성을 들이대는 식이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남자 제발 만나지 마라>는 남자를 돈으로 설명한다. 저자 김지룡과 이상건은 “돈은 가치가 없다. 그런데 사람에게 돈이 붙으면 가치가 생긴다. 그래서 평소에 남자가 돈을 어떻게 다루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싹수가 있는 인간인지 혹은 평생 여자 고생만 시킬 놈인지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입만 열면 아버지의 돈만 이야기해대는 남자라면 술이나 같이 마실 놈이지 함께 뭔가를 도모할 놈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책에는 남자친구가 돈을 꿔달라고 하면 더 이상 볼 것도 없다거나, 남자친구의 이번 달 신용카드 값이 얼마인지 물어보라거나, 비싼 선물을 하는 남자라면 조심하라거나 하는 등 돈에 관한 습관을 체크하는 조언이 가득하다. 남자가 이야기하는 만큼 남자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남자의 시각에서 남녀관계를 보기 때문에 치명적 약점 또한 지니고 있다. 마초적 입장에 근거한 발언과 태도가 책 속에 여기저기 등장한다.


살아보니 인생은 의외로 길다. 남자의 진정한 매력이 단지 젊은 날의 외모에만 있는 건 아니다. 긴 안목으로 남자를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즐겁게 귀기울일만하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로 우리에게 친숙한 가네시로 가즈키의 신작인 <스피드>(북폴리오 펴냄)에서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분신이자 힘과 지성을 갖춘 소설석 인물 박순신의 수줍은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백수라 자처하는 이들이라면 <백수생활백서>(박주영 지음·민음사 펴냄)와 놀아봐도 괜찮겠다. 이 정도라면 백수를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시인은 스물한 살에 죽고 혁명가와 로큰롤 가수는 스물 네 살에 죽지만 스물 여덟 살이 되어도 아무것도 아닌 이들의 이야기다.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에베레스트’에 오르진 못할지언정

‘초모랑마’, ‘사가르마타’ 등 경외의 대상이었던 산. 지상의 잣대로 높이가 재어지면서 에베레스트(식민지 인도의 측량국장)라는 인간의 이름이 붙여졌다. 당연히 그 산은 식민주의자들에게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에드먼드 힐러리는 맞춘듯이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 사흘 전에 등정하면서 영국의 콧대를 부풀렸고 자신은 양봉업자에서 기사로, 국민적 영웅으로 변신했다(1953년). 그로부터 53년이 흐른 지금, 몬순이 불기전 잠깐 그 속살을 드러내는 5월 초에는 등산로에 체증이 생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쓰레기를 더하고 있다.

1996년 5월도 다르지 않아 39개 등반대가 쇄도해 힐러리가 밟은, 가장 무난한 코스인 동남능선은 미어터졌다. 10~11일 뉴질랜드의 로브 홀이 인솔하는 등반대는 7명이 정상을 등정하고 내려오다 대장을 포함해서 4명이 죽었고, 스코트 피셔가 이끄는 등반대 역시 대장 이하 11명이 등정하고 하산하다 대장과 대원이 사망하는 등 8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황금가지)는 로브 홀 팀의 일원이었던 미국의 주간지 <아웃사이드>의 기자 존 크라카우어가 그 사태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이날 사고를 당한 로브 홀 팀은 한사람 당 6만5000달러를 낸 고객 8명을 정상에 올리기 위한 상업등반대. 고객들은 돈을 낸 만큼 본전을 뽑으려 했고, 로브 홀은 정상에 올리는 것이 장사 밑천인 만큼 기를 썼다. 함께 사고를 당한 피셔 팀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안전하게 마지막 캠프로 돌아갈 수 있는 반환점 시간을 훨씬 넘기도록 등산을 계속한 것은 그들이 상업등반이었고, 비슷한 패거리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벌어진 체증에 기인한 것. 갑작스레 닥친 강풍, 고산증으로 인한 리더의 판단미숙이 겹치면서 최악의 참사를 빚었다.

우체국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 어렵게 참가한 사람, 커피기계를 셰르파한테 지워 커피향을 즐긴 여성 백만장자, 일곱 봉우리 정복을 목표로 했던 일본의 중년여성 등 고객의 사연이 갖가지인 만큼, 영하 60도, 70노트의 바람 등 극한상황에서 보여준 맨살의 인간이 보여준 행태 역시 갖가지다.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마음의 눈으로 오르는 나만의 정상>(시공사)은 세계 4대륙 최고봉에 선 시각장애인인 에릭 와이헨메이어의 인생이야기. <돌아오지 않는 봄>(평화출판사)은 5대륙 최고봉에 섰고 일본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우에무라 나오미의 모험인생. 더워서 느른할 때, 사는 게 힘들다고 느껴질 때 오싹할 만큼 긴장하게 만든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잠시 멈춰서서 ‘죽음’을 떠올린다면

김훈 소설집 <강산무진>은 드물게 완성도가 높은 책이다. 그렇지만 <강산무진>에 대한 <한겨레>의 최초 기사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름 휴가에 읽을 만한 책으로 이 책을 꼽는 일이 마냥 모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강산무진>에 대한 비판은 작가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강산무진>에 대한 불만은 무엇보다 그것이 철저하게 작가 자신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소설집에 수록된 여덟 단편에 하나같이 ‘김훈 표’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듯한 형국이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달리 보면 그것은 그만큼 소설집의 집중도와 완성도가 높다는 뜻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의미있는 태도로서 존중해야만 옳다. 다만 <한겨레>의 기사는 <강산무진>에 관철된 작가의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필요는 있다는 취지였다.

<강산무진>이 죽음과 소멸에 바쳐진다는 사실은 익히 지적되어 왔다. 많은 작품들이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으며 그러할 때 작가의 어조는 냉정하기 짝이 없다. 죽음이란 기절초풍하거나 안달복달할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목숨 받아 태어난 것들의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것, 그렇다면 생명이니 존재니 하는 것도 궁극적 소멸의 운명 안에서 잠깐 반짝이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 작가의 굳은 믿음이다. 가령 이상문학상 수상작 <화장>에서 작가는 주인공 아내의 죽음과 부하 여직원 ‘추은주’의 싱싱한 젊음을 대비시켜 서술하고 있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죽은 아내란 곧 추은주의 필연적인 미래라고 해야 옳으리라. 이처럼 인간의 근원적 조건으로서의 허무를 인정하고,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강산무진>)을 직시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집 <강산무진>은 한번쯤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중국 출신 프랑스 여성 작가 샨사가 얼마 전 방한했다. 그의 가장 최근작인 장편 <음모자들>은 중국의 여자 첩보원과 미국인 남자 첩보원이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상대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황동규 시집 <꽃의 고요>를 추천한다. <강산무진>에 비해서는 한결 촉촉하고 따뜻하게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만날 수 있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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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7-15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 내 책상에 쌓인 밀린 책부터 해결을...;;;;
 

 

 

 

 

슈퍼맨 리턴즈를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한반도를 보게 됐다.  그나마도 표 끊는데 문제가 생겨 앞에 10분 정도 잘리고 봤다ㅠ.ㅠ

앞 부분을 못 보고 시작해서 잘 몰랐는데, 중간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사진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지금보다 미래 시점인가 보다.

게다가 지금 네이버 검색해 보니 통일을 전제로 경의선 철도 완전 개통... 뭐 이런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니 확실히 2006년도는 아니다.

플롯을 보건대, 영화는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내게도 그랬다.

보는 내내 떠오른 것은 '태풍'을 보았을 때의 느낌으로, 혹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보았을 때의 불편함이 있었고, 그러면서도 은근히 부아가 치밀고 울화가 터지며 대통령 만만세!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 공존..ㅠ.ㅠ

드라마 명성황후의 영향일런가?  명성황후가 죽기 직전에 대례복을 입었다는 게 정설처럼 나온다.  실제로도 민비가 저렇게 '장렬히' 죽었다면 약간의 미화야 봐줄 만하겠지만, 역사 속 그녀의 행적을 살펴보건대, 이건 많이 오버다...;;;;

그리고 고종 황제가 영화 속 인물처럼 그렇게 똑똑했더라면, 그렇게 결단력이 있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몸부림쳤던 인물이라면 이 영화는 눈물 뿌리며 보았을 영화가 됐을 것이다.

나는 이미 아니었던 역사 속 인물들간의 괴리에 씁쓸했고, 문성근이 연기한 총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너무 많다는 사실에 절망스러웠다.

과연 한반도의 통일을 일본이 바라겠는가, 미국이 바라겠는가, 중국 러시아가 바라겠는가.  심지어 자국민들 안에서도 왜 통일을 해야 하는데? 라는 반응이 많은 것을...ㅠ.ㅠ

위험한 영화였지만 나는 그래도 이번은 강우석의 손을 조금 들어주고 싶다.  오히려 실미도 보다는 보기 좋았다.  둘 다 감정을 뒤흔들어서 미혹시키는 데에는 마찬가지지만.(ㅡㅡ;;)

그런데 현실적으로, 과연 안성기 같은 결정을 내릴 만한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까?

설령, 그런 국새가 진짜로 있다 한들 그것을 가지고 대일본과의 관계를, 왜곡되었던 지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할 것인가?  그 물음을 던져보고 우울했다.

너무 오버하면서 감정을 이입했나?

음... 강우석 특유의 유머러스한 장면도 많았다.  이한위씨 연기가 특히 좋았고6^^;;;

차인표의 부족한 연기력은 이번에도 확인되었으나, 사람이 괜찮으니 이번에도 역시 용서한다.^^

안성기는 이번에도 멋있어~ 사람의 표정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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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7-14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참참, 윤도현이 작사, 작곡하고 부른 노래 너무 좋았다. 지금 듣고 있는 중... ^^

비로그인 2006-07-16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하는 작품이기는 한데.. 흠...너무 말이 많아서 계속 고민만 하고 있어요..;;;;;;
어떨런지요!?!?!?!?

마노아 2006-07-16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궁금하잖아요. 보고 판단하는 게 낫죠^^ 전 좋았던 부분이 싫었던 부분보다 약간 많았답니다. 그러니 실패는 아닌 것 같아요^^
 

어제 보내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는데 오늘 도착했다.

햐, 빠르기도 하여라.

두배의 배송비를 지불한 알라딘에게 어쩐지 미안해짐....

미안하니까 새로이 책 또 주문? ^^;;;

사신 치바 할인 쿠폰이 내일까지던가? 음... 지름신 슬그머니 또 하강 중.

사둔 책이 너무 많아서 이번 달은 조신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7주년 기념 이벤트가 빠방해서 가만 있을 수가 없다. 

알라딘은 블랙홀이다.  헤어날 수가 없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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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화면에 신작 표시로 나오질 않았던 터라 모르고 지나쳤는데 6월 말에 나왔다니...(>_<)

게다가 데스노트도 9권이 나왔고... 오오옷... 갑자기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된다. 음하하핫. 어서 주문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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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시위대가 농성을 벌이고 전경과 대치중일 때, 난 경복궁 역에 위치한 매장에서 언니 대신 가게 일을 봐주고 있었다.

비는 무섭도록 쏟아지고 버스도 끊기고 지하철도 막아 놓은 상태.  그 비어버린 도로를 전경들이 무섭게 달려간다.  청와대 방향으로.

잠시 뒤 이번엔 시위대가 무섭게 달려간다.

그리고 또 잠시 뒤 전경들이 그 뒤를 쫓는다.  가만?  그럼 샌드위치 되는 건가??  슬슬 걱정이 된다.

좀 더 지켜보니 이젠 반대 방향으로 시위대가 달려나가고 다시 또 그 뒤를 전경들이 쫓는다.

청와대 방향까지 갔다가 뚫지 못하고 돌아온 듯하다.

이미 시청 광화문 종로 사직 터널 방향까지 모두 꽉 차 있을 게 분명하다.

가게에 방문한 몇몇 시민들은 버스도 지하철도 없어 비를 맞으며 엄청 고생했다고 툴툴 거린다.

그래도 생존권이 걸린 문제인데 이만큼도 안 하면 그게 더 바보인 거잖아요.... 하니, 그건 그렇다고 한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시위대에 끼어 있는 게 아니라 비 피할 수 있는 곳에 남아있는 게 많이 미안했다.

가게 문을 닫고 돌아올 때에는 시위대도 해산을 한 모양이었지만 전경들은 비 맞으며 계속 대기중이다.

그들도 불쌍하다.  그들도 한미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올라오는 시위 동영상을 보니 방패? 같은 걸로 사람 밀쳐낸다.  곤봉으로 때리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 정도도 무섭다.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뭔가 씁쓸하다.

전경들조차도 시민들 편에 서서 한마음을 모아줄 수 있다면... 이런 상상은 너무 공상적인가...

그냥...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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