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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평점 :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다.
공선옥의 유랑가족은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진 연작소설이다.
하나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그래서 서럽기가 매일반인 사람들이 모두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농촌 사람이거나 뱃사람이고 어머니가 집을 나갔거나 부인이 집을 뛰쳐나갔고, 남편은 술취하면 부인을 개패듯 패고, 누군가는 장애인이고, 누군가는 조선족 처녀이며 필리핀 처녀다. 팔순 노인은 태풍이 몰아치고 난 자리에서 무너진 집에 깔렸고, 태풍이 불던 날 배가 뒤집혀 가난한 뱃사공은 가족을 남겨두고 죽었다. 가족들을 책임져준다는 결혼 소개업소의 말을 믿고 시집온 조선족 처녀 명화는 가난한 남편이 싫어 서울로 도망을 왔지만, 자신을 꼬드긴 남자에게 속아 방값만 떼였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살다가 어느날 길에서 칼에 찔려 비명횡사한다. 그 명화의 부추김으로 같이 서울로 도망 온 용자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준 카센터 수리공이 말을 믿고 살림까지 차렸다가 아이만 가진 채 버림받는다. 자신을 찾아 서울을 헤매고 다닌 남편과 마주쳤지만, 그녀는 결국 다시 남편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녀가 도망친 것은 사람으로부터였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가난'이었다. 가난했기에 자식들도 새엄마 만나 잘 살라는 무책임한 말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려고 한다.
가난뱅이 사진작가 한은 전국을 돌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필름 속에 담지만, 그 사진을 잡지에 기고할 수 없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사주가 보고 싶어하는 사진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그런 사진들은 모두 그의 가슴 속의 짐이 되고 만다. 겨울의 정경이나 아름다운 경치 뒤에 매몰된, 그리고 감춰져버린 사람들의 고단한 표정은 그에게 업처럼 남고 말지만, 그 자신도 한 가정의 가장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인 까닭에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할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던 영주가 할머니의 죽음으로 홀로 되었을 때, 그 아이를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다그치는 아내의 물음은 차라리 솔직했다. 그런 아내를 위선적이라고 욕했던 한도 사실은 자신의 이중성에 괴로워한다. 다시 아내가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을 때 괜찮다고, 고모댁에 맡겼다고 울먹이는 한의 목청 끝의 떨림이, 나는 내 목소리마냥 아프고 괴로웠다.
사실, 농촌만 그러랴, 산간만 그러랴, 어촌만 그러랴, 도시의 변두리만 그러랴 싶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참으로 휘황찬란하고 번쩍번쩍거리지만, 실상 곳곳에 가난이, 빈곤이, 범죄가, 비양심이 살아 있다. 빽빽히 들어선 아파트가 있던 자리에 살던 사람은 어딘가로 가서 더 빈한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천재지변에 서울 사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들은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는다. 그저 텔레비전 뉴스의 피해 현황을 보며 혀를 차고, 좀 더 마음이 닿는다면 성금 몇푼 입금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피해를 온 몸으롱 맞으며, 그것도 해마다 겪는 사람은 늘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가난은 대개 대물림하여 이어진다. 사회가 그렇다. 딱히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구조상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다. 원래 가난 구제야 나랏님도 못한다고, 사람들은 원래 그런거라고 체념하고는 만다. 다만 그 가난의 주인공이 나만은 아닐 거라고, 아니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살 뿐이다.
나는, 가슴이 많이 답답했다. 어줍잖은 희망을 제시하며 '사랑'만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영약이라고 포장하지 않은 것은 고마웠으나, 그러나 서툰 희망마저 갖지 못하며 사는 이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아파 나는 숨쉬기가 괴로웠다.
이틀 전에는 학생 하나가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머리가 깨졌다. 담임 선생님이 걱정을 하며 하는 얘기가, 집이 가난하여 전화도 없는 집 아이인데 크게 상했을까 봐 발을 동동 구르신다. 아이가 다쳤는데 집에 전화해서 부모님께 알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모든 학비를 고모댁에서 대고 있다는 이야기... 꼭 이 책 속 영주의 입장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다. 가난한 학생이 곁길로 빠지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우리는 다행으로 여기곤 하지만, 그 아이가 더 자라 만나게 될 세상과 그 불평등함과 소외감에 나는 미리 안타까움이 앞선다.
내 나이 열여섯에 오만과 편견을 읽었었다. 그 때 작가가 쓴 후기에 그런 글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가난 때문에 결혼하는 것은 어리석다. 허나, 가난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기가 막히게도, 열여섯 나이에 나는 작가의 그 말에 공감이 갔다. 어린 나에게도 가난은 무서운 것이었다. 어리석고, 또 미련하게 보일 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이제 열여섯 때가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지금의 나는, '가난'이 더 무섭다. 사회적 가난과 물질적 가난이, 정신적 가난이 모두 무섭다. 그런데 물질적 가난이 사회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을 같이 불러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소울 메이트 같은 시트콤은 매우 감각적인 대사와 상황 연출로 웃음을 자아내고 현대인의 모습을 담아내지만, 나는 또 사랑 타령만 하는 그들의 모습에 한숨이 나온다. 세상에는 나의 '소울 메이트'를 찾기는커녕 당장 오늘 하루와 내일 하루를 걱정해야 해서, 한달 뒤 일년 뒤의 내 모습을 그려보고 준비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데 또 이율배반적으로, 이 지독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만 한다면 답답하고 우울함에 몸서리 친다. (그 둘을 적절히 배분한 작품이 '굿바이 솔로'였다.)
나로서도 답이 없는 갈증이다. 요즘은, FTA 이후의 대한민국을 상상하다가 소름끼칠 때가 많다. 지금보다 더 갑갑한 경쟁 사회, 줄지어 늘어설 비정규직, 실업자... 그저 넋두리만 하며 한숨만 쉬는 내 모습도 가히 마땅치 않다.
나로서는 공선옥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어본 것이지만, 그녀는 꾸준히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왔다고 알고 있다. 그들을 향한 따뜻하고 애처로운 시선, 그러나 때로는 잔인한 현실 고발을 보며, 나는 어쩐지 고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총대를 멘 것만 같아서... 그렇게라고 알리려고 애쓰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정말 아프다. 모두가 안 아플 수 있는...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는 그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제발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대~한 민국!!!을 외치며 열광할 내일 새벽에도 누군가는 제발 덜 아플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