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의 한 고등학교에서 여학생이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이후에 임신한 사실을 알고 학교를 자퇴하고 낙태했대요. 그래서 강간당한 사실을 학교도 모르고 언론에 보도되는 일도 없었어요. 선생님들은 이번 사건으로 시끌벅적하지만, 그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건 모를 거예요.



교사나 부모가 모를 뿐, 혹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을 뿐, 미군과 관련된 성폭행사건이 얼마나 일어나고 있을까. 현재 드러나 있는 성범죄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하는데, 그게 맞는 말인 듯하다. 이런 식으로 쓰면 성범죄는 미군들만 저지르는 게 아닌데 미군 사건만 크게 다루는 건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미군에 의한 범죄가 전국 어디에서나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것은 아니다. 이를 무시하고 그렇게 말하는 건 오키나와가 처해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외면하는 것이다.
전후 60년 이상 미군기지와 인접한 생활을 하다보면 기지가 있는 것도 미군이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도 당연한 풍경이 된다. 오히려 미국식 거리 분위기를앞세워 관광객을 대상으로 연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피해자를 걱정하는 말들이 나오는 한편, 거리의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말도 나오고있다. 그렇게 당연한 풍경처럼 보이는 일상이 사실은 비정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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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은 부지사용료조차 내지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떠오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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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파 추리소설의 선구자였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안갯속의 교과서‘라는 평론이 있다. 부인공론 1962년 6월호에 발표된 것으로 46년 전의 글이지만, 교과서검정제도의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어 지금도 읽을 가치가 있다. 문부성당시 조사관에 대해서 마쓰모토 세이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문부성 조사관이다. 이는 비상근 조사원과 달리 분명한 문부성 관리이며 (중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주관이 자칫 검정에 영향을 미칠 수있다는 인식이 퍼져 현재 매우 논란 중이다. 즉 문부성 공무원 조사관의 주관이 교과서서술에 영향을 미친다면, 검정은 이미 검열화되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사회과 일본 역사에 한해서 생각해 볼 때 이 조사관의 전력에 상당한 의혹이 제기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예를 들어 전쟁 전
‘황국사관‘에도 유명한 학자의 제자가 조사관으로 있거나 혹은 신궁황학관이라든가 선린협회, 몽고문화연구소, 동아연구소와 같은 곳에서 근무했던 경력조사관도 있다. 이 모든 조직은 전쟁 전에 화려한 황국사관을 주창하며 활동했다.
이미 학습지도요령 기준에 따라 교과서가 만들어진 이상, 그것은 실질적인 통제이다. 또한 조사관의 주관이 미묘하게 교과서 제작에 영향을 미친다면 한층 더 그 통일은 강화되고, 내용 면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국정과 동일하다고 해도 좋다. 

‘마쓰모토 세이초사회평론집, 고단샤문고, 47~50쪽

사회파 추리소설의 선구자였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안갯속의 교과서‘라는 평론이 있다. 부인공론 1962년 6월호에 발표된 것으로 46년 전의 글이지만, 교과서검정제도의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어 지금도 읽을 가치가 있다. 문부성당시 조사관에 대해서 마쓰모토 세이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문부성 조사관이다. 이는 비상근 조사원과 달리 분명한 문부성 관리이며 (중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주관이 자칫 검정에 영향을 미칠 수있다는 인식이 퍼져 현재 매우 논란 중이다. 즉 문부성 공무원 조사관의 주관이 교과서서술에 영향을 미친다면, 검정은 이미 검열화되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사회과 일본 역사에 한해서 생각해 볼 때 이 조사관의 전력에 상당한 의혹이 제기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예를 들어 전쟁 전
‘황국사관‘에도 유명한 학자의 제자가 조사관으로 있거나 혹은 신궁황학관이라든가 선린협회, 몽고문화연구소, 동아연구소와 같은 곳에서 근무했던 경력조사관도 있다. 이 모든 조직은 전쟁 전에 화려한 황국사관을 주창하며 활동했다.
이미 학습지도요령 기준에 따라 교과서가 만들어진 이상, 그것은 실질적인 통제이다. 또한 조사관의 주관이 미묘하게 교과서 제작에 영향을 미친다면 한층 더 그 통일은 강화되고, 내용 면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국정과 동일하다고 해도 좋다. 

‘마쓰모토 세이초사회평론집, 고단샤문고, 47~50쪽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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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교과서 검정 의견 철회와 집단자결‘에 일본군의 강제가 있었다는 기술의 완전 부활.명기를 결코 양보할 수 없는일선으로 두고 애매한 형태로 타협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가 있고 나서 현 내 신문사들은 수많은 전쟁 체험자의 증언을 실었다. 그것들을 읽으면서 만약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건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령 지시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현민이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전진훈은 군인의 행동규범을 나타낸 것이다. 군인도 아닌 일반 주민에게도 ‘포로(전쟁 난민)‘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수류탄을 준 일본군의 행위는 죽음의 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교과서 검정 의견 철회와 집단자결‘에 일본군의 강제가 있었다는 기술의 완전 부활.명기를 결코 양보할 수 없는일선으로 두고 애매한 형태로 타협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가 있고 나서 현 내 신문사들은 수많은 전쟁 체험자의 증언을 실었다. 그것들을 읽으면서 만약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건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령 지시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현민이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전진훈은 군인의 행동규범을 나타낸 것이다. 군인도 아닌 일반 주민에게도 ‘포로(전쟁 난민)‘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수류탄을 준 일본군의 행위는 죽음의 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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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의 이야기만들어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오키나와전의 실상이 있다. 오키나와의 ‘위안소‘에는 한반도에서 끌려온 여성들도 많았다. 그 사람들도 포함해서 더욱 자세하고 적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피해문제뿐만 아니라 가해 문제에 대해서도 더 깊이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전을 조사하고 고민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단지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정이 아니다.


미군에게 제압당한 이후, 일본군은 낮에 산속에서 유격전을 벌인다고 하고는 산속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어 미군이 사라지면 마을로 내려왔다. 주간 미군과 접촉한 주민들을 일본군에게 알리는 협력자들이 주민들 속에 조직되어 있었다. 협력자들에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우고 학살하는 사건이오키나와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일본군에 대한 공포와 반발을 낳았다.
미군보다 패잔병이 된 일본군이 더 무서웠다는 이야기는 나도 조부모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다. 친척 집에 숨어있던 남성은 다행히 일본군에게 발각되지 않았다고 한다. 벽장 안에 숨어있던 남성이 갑자기 생각난 일이라며 고모에게 말해 준 이야기는 중국에서의 자기 체험이었다. 일본군으로서 중국 대륙에서싸우고 있던 남성은 어느 날 스무 명 정도의 여성과 아이들만 숨어있는 참호를발견했다. 당시 마을에는 불쏘시개로 쓰기 위해서인지 각 집에 수확한 콩을 건조한 줄기와 잎이 있었는데, 일본군들이 그것들을 호 입구에 쌓아 올린 뒤 불을지펴 여성과 아이들을 불태워 죽였다고 했다. 벽장에 숨어있으면서 그는 당시 참호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을 여성과 아이들을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에게 목숨이 노려지는 몸이 되자, 남성은 자신이 한 행위의 의미를 살해당하는입장에서 깨닫게 된 것 같았다. 그때는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고 고모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 P15

최근 몇 년 사이 오키나와전에 대한 역사수정주의의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특히 일본군의 ‘명예 회복‘이라 칭하며 일본군이 저지른 주민 학살과 ‘집단자
결‘의 명령·강제를 은폐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히메유리 학도대와 철혈근황대 학생들의 죽음을 순국 미담으로 만드는 작위도 반복되고 있다. 우리 아버지도 14세에 철혈근황대로서 전장에 동원되어 총을 들고 미군과 싸웠지만, 직접말해준 그 체험은 순국 미담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그러한 역사 수정주의의 횡행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오키나와 전투에 대해 알고, 체험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모의 이야기만들어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오키나와전의 실상이 있다. 오키나와의 ‘위안소‘에는 한반도에서 끌려온 여성들도 많았다. 그 사람들도 포함해서 더욱 자세하고 적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피해문제뿐만 아니라 가해 문제에 대해서도 더 깊이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전을 조사하고 고민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단지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정이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오키나와전에 대한 역사수정주의의 움직임이현재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미군 ‘재편‘에 따라 전국의 미군기지 및 자위대 기지가 대 중국 및 대 테러 전쟁을 목적으로 재편성·강화되고 있다. 그런가운데 미·일 양 정부는 오키나와에 마치 기지의 ‘부담 경감‘을 하려는 듯한 리액션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억지력 유지‘라는 이름으로 미군의 기지 기능을 효율화하고, 나아가 ‘남서방면 중시‘를 내세운 자위대의 강화도 추진하려 하고 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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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를 통해 색을 해방시킨마티스는 이번에는 고갱의 원시주의를 자신의 그림에 적용했습니다. 두 예술가의 스타일을 차례로 흡수하여 자신의 미술에 합쳐놓은 것입니다. 마티스의 대표작 <춤>에서 인물의 몸짓은전체적으로 과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갱의 원시주의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집돌이였던 마티스는 고갱처럼 프랑스를 떠나 제3세계로 모험을 떠나지는 못했지만 고갱에게 원시주의를 배웠습니다.
원시주의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마티스의 그림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티스의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 화가가 미술 교육을제대로 받았느냐고 의구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마티스가 유명하다고 해서 전시를 보러 갔는데 색도 시뻘겋고 형태도 마치 어린이가 그린 것처럼유치해 보였으니까요.
마티스는 프랑스 최고의 미술학교를 졸업했으니 당연히 사실적으로그릴 능력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마티스의 그림에 나타난 원시적인 느낌은 ‘실력‘의 문제가 아닌 ‘의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티스는 원시적인 형태를 그리기 위해 수십 장이나 스케치를 했습니다. 서양식 미술 교육을 받은 마티스가 원시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오히려 원시적인 미술들을 찾아서 연구해야 했던 것이죠. <춤>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대충 그린 것 같지만 수십장의 스케치를 거쳐 형태를 다듬은 것입니다.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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