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이 모든 것을 멈춰 세웠어도 구유를 꾸며야 하는 성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세상의 구원자가 온다면 가장 먼저 찾을 곳은 어디일까. 모두 하나같이 요양병원을 떠올렸다. 전염병 대유행 이후 매달 성체聖體, Ostia 를 모시고 찾던 그곳을 한 번도 방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화로 드문드문 생사만 확인할 뿐이었다. 매일 다를 것 없는 고만고만한 하루를 보내는 처지에선 비록 한 달에 한 번뿐이지만 본당 신부는 무척이나 반가운 손님이었으리라. 직접 찾아가지는 못해도 완성된 구유를 사진 찍어 성탄 선물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방역 단계 격상으로 제대로 모일 수 없으니 평범한 구유만 간신히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얼마 후 지척의 한 요양병원으로부터 집단감염 소식이 들려왔다. 비교적 저렴하다고 알려진 그곳은 상가 빌딩 한 층에 세 들어 있었다. 집단 격리 조치 후 연일 사망자가 나왔다. 격리된 건물에서 밖으로 나올수 있었던 것은 시신 39 구뿐이었다. 주검이 마지막으로 나오던 날에도 병원이 자리한 상가 빌딩에서 사람들은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시간이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무심히흘렀다. 누구도 대로변 상가 건물에서 돈으로 밥과 물건을 사듯 제 삶의 마지막을 이런 식으로 구매‘ 하리라곤, 또 그렇게 마감하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테다.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믿었던 죽음은 이제 더는 평등하지 않았다. 생로병사마저 시장에 포섭된 것이다. 이대로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소비자로 끝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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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08 13: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는 카유보트의 그림이죠?
그림때문에 들어왔어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어요.

chika 2022-01-08 13:55   좋아요 2 | URL
낯설지않은 그림들이 많이 있는데 새로운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좋더라고요 ^^
 

예술이 농부 등, 서민들의 일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고 반드시 서민을 위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상승의 욕구를 가진 억압되고 헐벗은 계층은 현실이 아닌, 동경하고 꿈꾸는 세상을 보길 원하고, 소박한 생활에 어떤 감상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은 역으로 대개 그런 처지를 넘어선, 나름 자족한 삶을 누리는 상류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학자다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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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사고‘는 정말 좋은 ‘긍정적인 말‘이다. 하지만 진실의 바탕 위에서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그 진실이 불편하고 아프더라도 마주하고 인정한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소망을 가지고 싸워나가야 한다. 이런 힘든 과정이 생략된 긍정적 사고는 언젠가 무너질 모래성과 같고 근본적인 치료가 없는마취제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안의 연약함과 상처들을 마주하고 있는가?
"나는 항상 행복하려고 노력하고 행복해요. 모든 게 좋아요" 라고말하며 내면의 불편함은 무시한 채 무조건 긍정적으로 살려고 하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자. 불편함을 피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도망 다니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을 마주해야 할 순간이 온다. 억지로 끌려가 진실앞에 마주 서기 전에 용기를 내어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진실과 마주하자.

- P23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경우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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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라 심장이 더 나대며 뛰고있기는하지만 그래도혈압이 175 를 찍다니. 미쳤나보다. 평소 이십오에서 삼십오 사이를 찍어 그리 낮은건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건 ...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는것이 아니라 어찌될지 모르기때문에 더 불안하고 무서워지고있다.
마음을 많이 내려놨다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나보다. 이걸 어찌할건가.

예약시간보다

......

기다리다 진료받고 나왔는데 검사결과는 괜찮다는!
엄청 쫄렸는데 다행이다. 혈압이 높고 백신접종후 한달쯤 후 심장이 갑자기 맹렬히 뛰었다고하니 기저질환과는 별개로 심혈과의 문제일지 모르니 심장내과 진료를 받으라해서.
마침. 어머니 모시고 온 내과가 심장전문의시니 같이 진료받으려고 기다리는 중. 오늘은 종일 병원에서 기다리느라 시간을 보내는 날이다. 그래도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있다면야.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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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호퍼 작품의 중심 주제로 기다림과 고독을 꼽지만 내게 그것은 그런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깃들지 못함이라는인간 존재의 비참함이다. 자연으로부터 단절되고 문명이라는 공간에 유폐된 인간은 과르디니의 표현대로 뿌리내릴 곳 없이 쉼 없이 부유할뿐이다. 카페, 술집, 극장, 휴양지, 호텔 객실, 주유소처럼 모두 언젠가는 떠나야만 하는, 결코 주인일 수 없는 공간에 계류할 뿐인 호퍼의 그림속 주인공들처럼.

- P35

존재할 이유

갈릴레오 재판은 가톨릭교회가 2000년, 대희년大年을 기해 인류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 교회의 과오다. 누군가 이 재판을 두둔한다면분명 맹목적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비판하겠지만 과르디니는 재판의 다른 측면을 바라보길 제안한다. 그는 재판의 부정적 측면을 간과하지않되, 왜 교회가 갈릴레오에 대해 그토록 완고한 태도로 일관했는지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교회가 보인 반응은 단지 교리와의 논리적 충돌 때문이라 보기엔 과도하게 폭력적이고 신경질적이었다. 과르디니는 기존 세계관의 붕괴 이후 벌어질, 인간에게 찾아올 끝을 알 수 없는 허무와 상실감을 교회가 무의식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아니, 인류의 무의식이 교회를 통해 발현된 것이라 보는편이 더 낫겠다.
창조의 중심에 땅이 있고 스스로를 그 동심원 한가운데의 존재라고여겼던 인간에게 돌연 지구가 다른 별들과 다를 바 없이 태양을 중심이로 돌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주관의 변화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상실을 초래할 것이라 예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심원 한가운데의 인간은 땅에 대한 권리와 함께 그만큼의 책임도 느꼈지만, 이제부터 그에게 땅은 있는 대로 쥐어짜고 빼앗아도 상관없는 대상이자 자원이고 그 자신도 창조의 우연적 존재일 따름이다. 기원도 목적도 없이 부유하는 그저 소비하고 생존하는 존재 말이다.
사실 모든 것을 어떤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하고 환원할 때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단지 신화나 낭만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존재할 이유, 삶의 가치와 같은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더 근본적인 것들의 상실일 테다. 기계문명의 도래는 자신만만히 ‘인간의 시대‘를 열어젖혔지만, 인간은 실상 호퍼의 군상처럼 더 고독하고 허무해졌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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