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술이랑
SUN KIM 지음 / 그린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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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 이란 말이 있다(?). 딱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저자 말마따나 10년 넘게 단어장, 숙어장 만들어서 죽어라 외우고, 토플, 토익 책에 밑줄 세 번 쫙쫙 긋고, 동그라미 치고, 별표 쳐 봤자, 시험 점수야 잘 나올지 몰라도 미국애 앞에 가서 '이 콜라 김빠졌다, 가서 바꿔와.' 이 한마디도 못한다. 다시 말해,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살아 있는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는 현재, 외대 어학원의 강사로,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LA에서 보냈다. 그 때 보낸 미국 생활을 여섯 편의 이야기(왜곡된 금융 구조 속에서 빛더미에 오른 어느 지점장이야기, 부모님 때문에 영화 제작자의 꿈을 포기해야 할 기로에 놓인 어느 청년 이야기,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미국에 도피했다가 결국에 군대로 빠지게 된 어느 머슴아 이야기 등등 씁쓸한 세태를 냉소적으로 코믹하게 다룬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로 깔고, 시트콤에서나 나오는 우스겟 영숙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엮은 드라마 대본 책이라, 그야말로 점수 따기용(?)의 진지한 영어 공부를 하려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저질 표현들 배워서 어디다 써먹겠어.'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책이다. 그러나 슬랭(Slang)을 미국인들의 문화와 독특한 사고 방식의 결정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슬슬 넘겨 읽는 것만으로도 유쾌하게 만족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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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1 - 부자들이 들려주는 '돈'과 '투자'의 비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로버트 기요사키, 샤론 레흐트 지음 | 형선호 옮김 / 민음인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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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은 정확히 말하면, 고등학생들이 보는 학습지를 만드는 일이다. 문제를 출제하는 필자 선생님들은 따로 계시고, 나는 선생님들의 원고를 검토하여 하나의 책으로 엮어내는 일은 하고 있다. 그 책들 중에, 교과서 만드는 작업 같은 것을 할라치면, 근 반년 가량 정기적으로 필자 선생님들과 편집 회의를 거치게 된다. 내가 그 작업을 할 당시, 필자 선생님들 중에 한 분이 상당히 괴짜이셨다. 회의를 하다보면 교재 내용과 무관한 세간에 회자되는 이야기도 나오고, 책 이야기들도 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이 선생님의 독서량이 장난이 아닌 듯 보였다.

선생님 본인도 항상 자신의 다독 취미에 대해 열변을 늘어놓곤 하셨었다. 이 선생님 말씀 중에 지금도 인상 깊었던 것이 하나 있는데, 현재의 사모님과 결혼을 하기 전, 연애 시절에도 한쪽 팔은 애인(현재 부인)이 끼고 다른 한쪽 손엔 항상 책이 들려져 있었다고까지 했다. 한번은 이런 선생님께 최근 읽는 책들 중에서 권해 주고 싶은 책이 없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러자 이 선생님 한술 더 떠 하시는 말씀이, 요즘 젊은 여성들 경제 관념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주식투자 입문에 대한 책들을 나열하신다. 그리고는 끝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이야기하셨다.

우리 나라는 사농공상이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근대화되지 못한 탓에 학력 자본이 집중적인 투자 대상이 되었고, 여기에다 20세기 내내 일제 침략기와 6.25라는 전시 속의 현대사 학력 자본은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는 열쇠와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의사, 변호사와 같은 '사'자 들어간 직업에 껌뻑 죽는 시늉을 하고, 못 먹고 못 입은 부모 세대의 피같은 돈이, 자식 세대의 일류대 진학을 위한 학자금으로 쓰이곤 하였다.

세계 다른 나라, 멀리 갈 것 없이 이 책에 나오는 미국도 과거지사에는 '사'자 들어가는 직업이 돈을 가져다주는 직업을 선망하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러한 가치 체계를 대대적으로 전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난한 아빠로 대표되는 정통 노선의 학력 자본 집단이, 부자 아빠라는 비정통 노선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는 사회 및 세계 전반적인 최근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정통 노선이란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어릴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으로, 오로지 열심히 공부하면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는 것이며, 가장 적은 시간과 돈을 들여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으로 학력 자본을 생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러한 정통 노선이 더 이상 정통성을 가질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부모님들의“놀지 말고 공부하라”라는 말은 더 이상 상징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 변호사가 되었지만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즉 이제까지의 자본 투자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는 노선은 더 이상 정통성을 갖지 못하며, 오히려 이러한 노선이 바로 잘못된 한마디로 자본을 쫓아내는 구습이 되는 것이다. 자본의 투자는 고도로 집중성을 요하는 총력전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이 총력전에 발빠르게 대처하고, 자본에 대해 선입견과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 곧 신흥 부자가 되는 길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이 학력 자본 집단이 권력 자본 집단과 등가라는 공식을 깨고 있다는 데에선 반가운 징후로 읽었다. 비록 흐르는 자본을 거머쥐는 구체적인 방법론 측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 실정에 적용하기 곤란한 부분 많이 보여 약간 아쉽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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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중국견문록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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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여 개에 가까운 폭발적인 양의 리뷰에다가 또다시 리뷰 하나를 더하려니, 이 걸 써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팀에서 무람없이 일하던 후배 하나가 얼마전 사표를 썼다. 입사한지 딱 1년이 되던 즈음이었다. 퇴직 사유는 어학 연수차 캐나다에 가기로 했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뒤늦은 어학 연수에 대한 계획을 확고히 해 준 책이 한비야의 이 책이었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이전 같았으면 '나까지 읽을 필요야,' 라고 생각했을터인데 최근 중국에 한껏 관심이 올랐던 차이기도 했으므로, 뒤늦게 나도 이 책의 붐에 합류를 하게 되었다.

바람의 딸 한비야라 했던가. 붙여진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속에다 바람을 무진장 집어넣고 있다.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양새에 대해서 자꾸만 주눅이 들게끔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성격을 갖는다. '교훈적인 효용성'과 '구태의연함'이 그것인데, '구태의연함'이란 이런 것이다. 너무나 빈번히, '긍적적인 사고를 갖고, 열심히열심히 하자, 이렇게 나이 먹은 나도 열심인데 젊은 너희들이?'를 외치는 둥 캠페인성 구호(?) 일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더 많은 좋은 점들이 보이는 책이기도 하다.첫째, 평이하게 잘 읽힌다.둘째, 기존에 갖고 있던 중국이라는 대륙의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한층 누그려 뜨렸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는 말이 역시 만고의 진리임을 재확인.
셋째, 교통수단이자, 발이라고도 할 수 있는자전거를 빈번히 도둑맞거나, 심지어 예약해 놓은 첫날 하숙집에서 쫓겨나는 둥, 곤란한 일들을 많이 겪으면서도, 특유의 할달하고 낙천적인 대처법은 역시 한비야 멋지다 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한다.- 이런 점은 배워야 겠단 생각이 든다.

넷째, 중국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조선족 중국 동포들의 모습이나, 화교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살갑게 그려져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마음과 머리가 동(動)하면, 주위에 이랑곳하지 않고 몸이 저절로 마음을 따라가는 사람과 마음이 동(動)해도 주변부터 살피며, 마음을 억누르는 사람. 한비야의 경우는 전적으로 전자의 사람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 그녀는 국제NGO에서 케냐나 캄보디아의 에이즈환자나 난민 아동들을 위해 활동하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 그녀의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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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한길로로로 6
얀코 라브린 지음 / 한길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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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 로로로 시리즈에서 나온 인물서들은 일단 표지 장정이 근사하다. 인간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헌사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다. 루카치의 유명한 <소설의 이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서론 격으로 쓰인 것이라 한다. 그 책의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루카치의 말인즉, 소설에서 본질은 시간과 함께 주어지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시간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 따라서 그의 소설은 시간이 변수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과는 또 다른 장르라는 것.  1997년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 그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서사시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나이 28세 때,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 비밀 단체의 회원으로 기고 활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총살형을 언도 받게 되었다. 1849년 12월 22일 아침 3인씩 2조로 처형하게 돼 있는데, 앞 조가 총살되고 뒷 조에 속했던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을 때 황제 니콜라이 1세로부터 처형 중지령이 통달된 것이다.

이렇게 죽음 직전까지 가보았던 그는 이후에 인간의 선악 문제, 도덕의 이율 배반, 사회적 역사적 문제에 방대하고 심오하게 천착하여 극도의 내면 심리까지 파헤치는 불후의 명작들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 책을 읽고, 나는 그의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한 개인으로서의 삶과 인생에 대해 주목을 하게 되었고, 그의 일대기를 제대로 담아낸 책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도스토예프스키 관련 서적들은 출판사<열린 책들>에서 다수의 좋은 책들을 고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작품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한 인간의 개인사에 더더욱 치중했던 만큼, 일대기와 사진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는 책을 고르려 했었고, 한길로로로 시리즈에서 나온 이 책은 나의 구미를 제대로 맞추고 있었다.

이 책은 그가 작품을 쓰던 당시 상황과 작품을 서로 연결하여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투옥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가까스로 풀려난 후에 그는 <학대받은 자> <죽음의 집의 기록>을 집필한다. 첫결혼에서 실패한 후, 도박에 빠져 있을 당시에는 <지하실의 수기>를, 재혼을 하였을 때는 <죄와 벌>을, 마지막이자 세 번째 부인으로 그가 죽는 날까지 함께 했던 내조자 안나를 만나,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았을 시기에 너무나 모순되게도 다시 도박에 빠지게 된다. 이 때 그의 작품 <악령>과 <백치>는 그가 도박 자금을 담보로, 원고료부터 가불 받고 쓰기 시작한 작품들이다. 기한 내에 탈고하지 않으면 저작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계약에 서명하면서까지 그는 갈급히 도박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잘 읽히는 것은 그의 평생의 화두가 돈이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작가 일기> 집필에 관한 부분에서는 그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신을 떠받치는' 러시아 민중의 종교적 본능을 신뢰했다. 그런 그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 보편적인 사랑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보편적인 죄책감 또한 강조하였던 것이다. 죽음 직전까지 그는 신과 인류에 대한 주제에 골몰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도박이다. 그의 도박 행위는 전형적인 도박 중독자의 일면을 갖고 있었다. 도박 중독자들은 억제할 수 없는 도박 충동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비결'이나 '전략'을 믿는 특징이 있다. 그는 단순히 '정신을 바짝 차리고 흥분하지 않음으로써' 룰렛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돈을 땄을 때 계속하지 않고 도박장을 떠날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던 그는 결국, 천문학적인 수에 가까운 돈을 잃었다. 둘째, 그는 시시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그의 작품 <백치>에서도 간질병 환자인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자신의 인터뷰에서 곧잘 이렇게 이야기한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아무데나 펼쳐 놓고 읽기 시작합니다. '라고 마치 글쓰는 사람들에겐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작들이 성경이라도 되는 양 싶게 말이다. 한 줄 읽기만 해도 영감을 주는 소설이라니 말이다. 그러나 참, 내 주제에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의 힘은 그의 문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가 겪어냈던 지병과 굴곡많은 체험들에서 나왔던 것일 거라고. 그리고 나는 이 책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로 대신할 수 있겠다. '유일한 심리학자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증언으로부터 나는 무언가를 배워야 했다. 그를 발견한 것은 스탕달을 발견한 것 이상으로 나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운이었다.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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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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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은, <한국 문학의 위상>에서 문학을 해서는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고, 출세를 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따라서 문학이 모든 형태의 억압에 자유롭게 대항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문학이 억압에 대해, 권력에 대해 자유로우면서도 순수하게 항거할 수 있다는 것을 비평을 통해 보여 주었다. 이런 김현을 우리 또래들은 마음의 큰 스승으로 받들지 않을 수 없었던 분위기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 나라 세기의 비평가 김현이 아닌, 다분히 소시민적으로 납득이 될 수 있는 인간적인 김현 선생을 보게끔 하는 책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고 와서는 미국 놈들이 밉더라고 그의 아내와 서로 토로하는 부분이나, 김혜순의 시 <도솔가>를 읽으면, 서유석의 노래 <타박네>가 생각난다라는 표현이나, 산행 중에 설사를 일으키고 주차장 근처의 화장실에서 황급히 볼일을 보면서, 머리보다 육체가 더더욱 사유를 주체라고 말하는가 하면, 이제는 갈수록 긴 책들이 싫어진다며 짧고 맛있는 그런 책들에 마음을 끌리고, 두껍기만 하고 읽고나도 무엇을 읽었는지 분명하지 않은 책들을 읽다가 맛좋은 짧은 책들을 발견하면 매우 기쁘다는 말이나, 사회학자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로 읽지 않고 자료로 읽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회학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폄하하는 것은 사회학적 인식이 덜 됐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한다.

그의 저작들을 좋아했던 독자로서, 자뭇 진지하고 엄격하기까지 한 비평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한 인간의 내밀한 독백과 사사로운 기호를 엿보는 즐거움은 아주 크다.그의 일기이자, 이 책 제목인 <행복한 책읽기>에서, 나를 강력하게 매료시킨 문구가 하나 있다. 여기에 옮기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1988년 1월 7일의 일기 - 내 존재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잊음(oubli)이다. 나는 잊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잊음이다. 내 활력은 잊음에서 나온다. 모든 존재가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알집과 같은, 거푸집과 같은 구멍으로서의 잊음.

한때 나는 우리 나라의 큰 선생님인 김현의 저서 <한국 문학의 위상>을 읽고, 밥빌어먹는다는 문학의 언저리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까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생각은 이 짓(문학)을 왜 하려 할까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주위의 환경에 대한 자신의 일차적이고 피상적인 무력감에서 갖게 된 질문인 거 같다. 사실상 모든 예술, 학문은 인간을 위해서 봉사하고 인간에게만 봉사한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제시하는 유일한 분야는 아니지만, 가장 대표적인 분야임에는 분명하다.-한국 문학의 위상 중에서-' 

 

"구멍의 공에 제일 깊게 사유한 최초의 인물은 노자이다. 그는 항아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항아리의 텅빈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빈 곳이 있어야 채울 마음이 생겨난다. 공은 행위, 욕망의 행위의 밑바닥이다.

장자는 그것을 더 논리화해서, 구멍을 뚫으면 혼돈은 죽는다. 라고 말한다. 그것을 뒤집으면, 구멍이 있으면 혼돈은 없다. 그 구멍은 질서 , 사회 생활의 기본틀이다. 구멍이 없는 존재는 완전자--신, 악마, 자연.....뿐이다. 구멍이 있는 것은 모두 인간적이다. 인간은 구멍의 모음이다. 채워도 채워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구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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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8-05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오래 전에 너무도 아껴서 읽던 책인데 님 서재에서 보게 되니 다시 꺼내볼까 봐요. 가끔 이런 책 있죠, 읽어서 뒷부분이 점점 적어지는 게 너무 아쉬운...

icaru 2004-10-01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책을 사랑하시는군요...저두 그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