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미친 짓이다 - 2000 제2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만교 지음 / 민음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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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 소설을 두고, 심심한 일요일에 읽어보라 했었던가, 어제가 바로 그 심심한 일요일이었기에, 나는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구한 이 책을 읽었다. 그 지인은 '이 책 어떼?'라고 묻는 나에게 '그냥그래.'라고 답해 주었다. 내가 물었듯, 누군가가 나에게 이 책을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말해보라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거 같다. '별로야.'

'별로인데, 왜 서평을 쓰고 앉았다지.' 라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나는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궁색한 변명을 대신할까 한다.

최근에 알게 된 한 친구가 말하기를,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책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단 자기 얘기를 하기 위한 핑계라고 했다. 그리고 책을 읽는 행위는 바로, 어떻게 해서든 타인의 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무의적 본능의 반복이며 지극히 생물학적인 노력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이런 독서 행위를 한 마디 쉬운 말로 정의하면 '혼자 노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했다.

각설하고, 책 읽는 행위가 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 했던 거였다면, 나는 도데체 조금은 파격적이고 과격한 제목의 이 소설에서, 어떤 글귀가 나에게 말을 걸어 오길 바라며,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작가가 나에게 '결혼은 이러이러하기에 미친 짓이라고 하는거야, 나의 이러이러하기에를 들을 소감이 어떼? 내 말이 살벌하게 들어 맞지?'라는 목소리를 내지르기를, 아니면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사실은 엄청 울겠다는 의미이면서도 겉으론 죽어도 눈물 안 흘리겠다고 했던 그 방식대로, 이 소설의 제목이 '결혼은 미치(도록 행복한)ㄴ 짓이야. 라고 말해주길 바랬나... .

사실, 이 소설에, 소피스트들의 괘변같이 인문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독특한 언어 유희 또한 곳곳에 보임에도, 나에게 별로 남을 게 없는 소설쯤으로 전락되어버린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인간이 만나 티격태격이나마, 결국에는 하나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의미의 (결혼) 생활에 대한 어떤 함축이나 은유 같은 것은 쏙 빠진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시니컬한 입장을 보인다는 점. 둘째, 주인공 나(그 남자) 포함, 모든 등장 인물들은 진실(적어도 사랑의 유무에서)되어 보이지 않는 남녀 관계망(일례로, 주인공 남자의 친구인 규진은 유리와 결혼을 한 상태이고, 신혼이다. 표면적으로는 유리와 어떤 불만과 갈등이 있는지 독자인 나는 정보 하나 주어듣지 못한채, 옛친구인 지영과 바람을 피고 있는 규진을 보게 된다. 게다가 아내인 유리는 임신 중인데...)을 갖는다는 점.

성인에게 있어, 결혼이란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선택 사항이긴 하다. 그럼에도 성인 남녀라면 누구나 당면한 현실이다. 따라서 글을 쓰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누차 다루고, 공공연하게 말해지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의 모순'과 같은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 것에 대해 작가가 풀어낸 방식이 어쩐지 한물 간 농담처럼 여겨지니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아무리 그럴싸한 문학적 장치로 포장하여 내놓았다해도,) 재탕삼탕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하는 내 내부의 소리를 듣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그렇다.

이 소설에서 보면, 주인공 그 남자가 또다른 주인공 그 여자(두 주인공 모두 작중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아, 옮길 수 없음.)에게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봤어? <정사>는? .....'

이 소설 또한 영화로 만들어졌다하니, 아마도 위의 작중 인물들이 나누던 대화 속에 열거된 우리 나라 영화의 아류작 한 편이 또 나온 모양이다. 비디오로나 나오면 소설과 비교도 해 볼겸 한번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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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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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요일 저녁, 마지막 장을 덮은 책은 아마존의 밀림을 배경으로 하는 이 책,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이고, 어제 오후에 본 비디오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부제 : 부에노스아이레스)'이며, 어그제 본 텔레비젼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파라과이에서 있었던 한인 남매 살인 사건(파라과이의 졸속 형사 사법 처리 제도에 관한 고발이랄까)에 관한 것을 다루었다.

지리적으로, 우리 나라와 가장 반대편에 있는 남미는, 인천에서 출발하는 비행길 직항 노선으로 그 거리감을 따지자면 대략 서른두 시간이라는 간격을 두고 있다. 이런 남미는 당연히 나에게는 신비로운 미지의 영역이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 책의 작가 루이스 세풀바다에게 붙는 수식어는 무척 많다. 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망명길에 올랐다가, 연극단도 꾸린 적이 있으며, 기자로도 활동했고, 왕성한 여행가에다가 환경 운동가이기까지 하다니. 작가가 무척 바쁘고, 고단하며 험난하고 모험적인 인생을 살아왔으리란 건 눈감고도 알 거 같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의 문체는 약동적이며, 플롯은 분명하고 선이 굵다. 한마디로 읽는 재미가 나는 소설이랄까. 게다가 마지막 부분의 노인과 살쾡이의 대결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아마도 두 등장 인물(?)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으로 대변되는 참으로 매력적인 한 사람(노인)과 동물(살쾡이)이 나온다. 노인은 그림 속에나 남겨진 다정했던 몇십년 전에 죽은 마누라를 가슴 속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순애보이자,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읽을 수는 있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방식의 연애 소설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는 아내가 죽자, 이후 수십년을 인디오들과 함께 자연과 어울려 살아온 탓에 밀림과 자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 소설에 언급된 것 중,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는, 소리에 민감한 박쥐들이 위험을 느끼면 재빨리 몸을 가볍게 하고 날기 위해 뱃속에 있는 걸 몽땅 쏟아낸다는 거였다. 즉, 박쥐들을 놀래키면 여지없이 배설물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매력적인 두 번째 주인공(?)은 읍장 뚱보나 밀렵군 양키들 같은 시종잡배, 여타의 인간들보다 훨씬 위풍당당한 살쾡이이다.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살쾡이가 노인과 생사를 가름하는 사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엔 살쾡이의 죽음으로 이 대결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싸움은 지구상에 잡다구리하게 존재하는 오만한 인간들의 치졸한 대결들과는 비할 수가 없다. 이 싸움의 발단은 무엇이었나? 싸움을 먼저 걸어온 쪽은 암살쾡이의 어린 자식들과 수컷살쾡이 마저도 무심코 쏘아 죽게 만든 개발업자이자 밀렵꾼들인 양키들이다. 이 동물은 인간들이 걸어 온 싸움에 맞서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인 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하고 있다. 이 싸움에서 살쾡이는 짐승들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지혜를 소유하고 있음을 몸소 보여 주고 있다. ('양키들 대 살쾡이'의 대결이면 대결이지, 왜 우리의 다크 호스인 '노인'과 위풍당당 '살쾡이'의 대결이 되어야 하는지 이 역설적인 모순은 이 책을 읽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다.)

이 책을 번역한 정창이라는 역자는 꽤 실력있는 번역가인 것 같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 취향의 견해이다. 그럼에도 내가 실력있는 번역가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번역서 바르가스 요사의 <궁둥이>와 로사 몬테의 <시대를 앞서 간 여자들의 거짓과 비극의 역사>를 그의 무난한 번역 덕분으로 꽤 수월하고도 쉽게 읽어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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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이산의 책 8
조너선 스펜스 지음, 정영무 옮김 / 이산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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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겨울이었나보다. 'TV 책을 말한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조너선D 스펜서의 저작 <현대 중국을 찾아서1, 2>를 소개해 준 적이 있다. 그때 잠깐 저자의 인터뷰도 함께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량하고 성실해 뵈는 학자의 모습을 한 조너선D 스펜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중국의 장구하고 도도한 현대 역사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는 사람이 중국인도 아니고, 동양인도 아니고, 한 서양 역사학자라는 것, 그 학자가 중국의 현대사를 시원시원하고도 문학적인 필치로 서술한 이 책을 읽어내는 일은 정말이지 아이러니였던 것이다.

중국이 이웃 나라이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너무나도 중국에 대해서 몰랐던 듯 싶다. 예를 들면, 태평천국의 난은 왜 일어났는지, 청나라는 어째서 그토록 무기력하게 서양 열강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는지,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마오쩌둥의 공산당군에게 왜 패하여 타이완으로 쫓겨났는지, 뿐만 아니라 신해 혁명이나 5, 4 운동 또는 사회주의 혁명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도.

그러나 단순히 이 책은 위의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책 속에서 빛나는 부분은 바로, 매우 복잡한 상황에 처해 매일 같이 대단히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는 데에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여러 인물들 중에서도 중심 인물로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인물은 유교 교육을 받고 19세기말 청조가 쇠퇴할 무렵 급진적인 개혁의 대변자 노릇을 하다가 정치적 실패를 겪고 망명 생활을 한 뒤에 유토피아적 사변 속에서 삶의 애환을 달랬던 유학자 캉유웨이이며, 두번째 인물은 젊은 시절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문학에 빠져 든 뒤 1920년대 국민과 학생들의 좌절된 열망을 가장 또렷이 표출한 루쉰이다. 세번째 인물은 청조의 멸망으로 등장한 해방된 `새로운` 중국이라는 세계 속에서 성장한 딩링이다. 작가이자 정치행동주의자인 그녀는 국민당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강요한 창작활동의 기준이 자신의 창작 의욕과 얼마나 맞지 않는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스펜서의 서문에서 발췌

위의 세 인물을 중심으로 또다른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 중국 역사에 대한 웬만한 관심이 아니었다면 알수 없었을 많은 빛나는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여 중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면 관통한다. 아!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힘주어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표지 디자인이 갖는 통찰력이다. 쏠티디자인 스튜디오의 작품이라는 이 책 표지는 다음에 이어지는 이 책의 구성 방식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미리 집약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천안문 광장을 멀리 뒷배경으로 하고, 루신과 딩링 캉유웨이의 사진을 크게 배치하였다. 셋의 주변으로 쑨원, 량치차오, 원이둬, 추진 등의 인물 사진을 곳곳에 배치한 것이다.

나는 역사서를 읽는데 확실히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드라마도 사극은 보질 않는다. 현재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고루함에서 쉽게 흥미를 잃고 마는 것일텐데, 그런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던지. 이 책에서는 중국 현대 인물사가 시와 소설의 인용 글들 즉, 문학과 만난다. 게다가 단 몇 줄로 소개되는 인물이더라도 실체를 만나 눈빛을 주고 받은 것과 같은 실존감을 불어넣고 있다는 데에 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울러 문학과 문화에도 조예가 깊으면 이렇게 훌륭한 저서가 나올 수 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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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유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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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까지만도 모진 황사 바람 때문에, 목구멍이 깔깔해지고, 눈이 뻘개져 오는 나날을 보냈었다. 텔레비전을 틀면, 해가 갈수록 중국의 내몽고 지역에 사막화되어 간다고 뉴스 앵커는 전한다. 덧붙여 이 사막화의 원인은 피할 수 없는 자연 재해가 아니라, 산림의 남벌 때문에 숲이 사라지는 등의 어디까지나 인재(人災)임을 강조하여 전하고 있다. 땅이 지탱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땅에 사람들과 가축들이 살고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이 사막화 현상을 내몽고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탓으로 돌려야 할까,

하지만 이들은 다른 곳에서는 식량이나 땔감을 구하기 쉽지 않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다. 아프리카의 숲들이 서서히 사막으로 변해가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런 수난을 겪지는 않는 선진 국가들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을까?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무지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한편의 사람들과, 잔인함과 탐욕스러움으로 지구 환경의 오염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무리들이 있는 것이다.

제인 구달은 이 양대 그룹, 나아가 지구상의 (사랑과 연민과 심지어 잔혹성까지 우리 인간과 흡사한) 침팬지보다는 (감정과 감정에 따른 행동에 대한 의미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면에서) 나은 족속인 인간들에게 깨달음을 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사랑과 연민과 자기 희생의 자질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정말 잔인하고 악해질 수 있다.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행동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도 서로를 고문하고 싸우고 죽인다. 하지만 또한 가장 고결하고 관대하며 영웅적인 행동들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지구 환경이 위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나 하나의 힘으로 도데체 무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제인 구달은 말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순히 기도만을 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 자신을 투신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도 주변의 생명들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제인 구달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몸소, 행동은 말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책은 40년간 야생 침팬지들과의 생활과 동물 보호 운동을 등을 행하며 겪는 실천적인 깨달음 보여 주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한 권의 책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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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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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서 굴지의 영화 잡지로 씨네21을 키워 낸, 어느 편집장의 성공 스토리 때문이라기보단, 전 씨네21의 독자로서 이 잡지의 편집장에게 갖는 호감의 발로로 이 책을 사 읽었다. 만약에 뉴스 투데이의 앵커 손미나 씨가 이런 류의 책을 냈다면, 책 내용의 부실의 여부를 떠나서 누구보다 먼저 사 읽었을 것처럼 말이다.

물론 팬이 스타를 훔쳐보고 싶은 마음 비슷하게 읽은 책이지만, '그녀가 직장 여성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 줄까', 내지는 '박수 받을 때 떠나는 이유가 다름이 아니라 소설가로 입문하기 위해서 라니, 왜 하필 소설을 쓰고 싶어했을까' 라는 호기심도 이 책을 읽게 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

나는 지금껏 5년여의 직장 생활을 해 왔고, 적지 않은 동성의 선배들을 보아 왔다. 업무적인 면에서보다는 인간적으로 좋은 교감을 주어, 힘든 시기에 많은 위로가 되어 준 선배도 있었고, 업무적으로 매섭게 질타하고 긴장시키는 덕분에 일을 배우긴 했지만 그다지 좋지 않은 앙금을 마음에 남겨 준 선배들도 있다. 그럼, 후배들에게 선배로서의 나는 어떤지 돌아보자니 그것도 시원찮은 것이 얼굴이 붉혀지게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책 중, 조선희 씨가 직장 생활을 함께 하는 여성들끼리 자매애를 갖아야 한다는 부분에서 깊이 공감했다.

이렇듯 조선희 씨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직장 선배로 볼 수 있다. 허심탄회하게 '잘난 척 해라, 욕심부려라, 수다스러워져라, 뻔뻔스러워져라'식의 직장 생활에 대한 노화우를 들려 주는 선배를 만나기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 특유의 '집요한 승부 근성으로 밀어 부쳤을 뿐인데 보수나 지위가 뒤를 따라오더라'로 귀결되는 이야기를 한다. 조금은 식상하고, 조금은 부담이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현재의 연하 남편을 만났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한번은 글로 풀어 내야 할 것 같다는 마음 속의 암시로 소설가의 길을 걷고자 했다는 조선희씨 개인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좋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그동안 씨네 21에서 나갔던 '편집장이 독자에게'라는 섹션만 발췌하여 모은 부분으로, 이 책의 맥락상 읽지 않아도 좋은, 군더더기 부분이다. 정 궁금하면 책으로 읽을 것 없이 인터넷에 들어가 지난 호 기사만 찾아봐도 되는 정도의 수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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