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줍는 아이들 1
로자문드 필처 지음, 구자명 옮김 / 김영사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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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으로부터 딱 10년전에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나보다. 대학 1학년 때 선물 받은 책이었지만, 그간 내 손을 한번도 타지 않고 책장에서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 10년간 이 책을 읽지 않은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이 책이 재밌다'는 이렇다할 입소문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당시 나는 '외국 번역 소설을 읽히지 않더'라는 편협한 취향을 갖고 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재미를 아직 보장 받지 않은 두 권짜리 장편의 소설은 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독서에 게으른 사람이었던 때문이다. 난 그냥 이 소설이,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어느 바닷가의 무명씨의 어린 딸들과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ㅡ.ㅡ;;

그러던 최근 어느날엔가 영풍 서점에 갔다가 스테디셀러 쪽에 여전히 떠억 하니 자리잡고 건재하고 있는 이 책을 발견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책들은 쏟아지고 그래서 가판대에 오르는 책들도 늘상 바뀌게 마련이며, 또 너무나도 쉬이 절판이 되는 요즘 같은 때에, 10년전에 나온 책이 표지 디자인도 바꾸지 않고 여전히 나오고 있다는 반가움 때문이었을까..... 그 길로 집에 돌아와 부랴부랴 이 책을 찾았는데, 1권은 어디로 갔나 보이지 않고, 2권만 있었다. 그래서 다시 1권을 구입하고는 밑져야 본전이니 읽어보기나 하자며 잡기 시작한 책이다.

정말 밑져야 본전인가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페넬로프 할머니.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전쟁의 와중에 그리 유복하지만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간 인물로, 고집스럽지만 고루하지 않은, 사람내 물씬나는 주인공이다. 참 멋진 사람이다.

이 소설은 영국 특유의 시골 생활이 그려진다. (특히, 여기에서 그려진 2차 대전 당시 영국 시골은 궁핍하지만 마음 씀씀이들은 넉넉했다.) 그리고 주인공 페넬로프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세 남매와 페넬로프의 인생과 관련된 또다른 인물들 삶의 스타일을 그린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주인공 페넬로프가 화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림 '조개줍는 아이들'(훗날에 화가의 역량이 재조명되고, 큰 재산 가치를 갖게 되는)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를 두고 스토리를 펼쳐가는 구도이다.

이 책을 통해 느낀 것.

부모의 무엇보다도 큰 역할은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알아서 살 수 있는 자립심을 어릴 적에 키워주는 것이 아닐까. 고기를 잡아다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 말이다.

페넬로프의 세 자식 중 두 자식은 어머니(페넬로프) 소유의 그림 '조개줍는 아이들'에 대한 처사에 전전긍긍한다. 어머니에게서 더 얻어낼 것이 무엇인지 집착하는 자식들이다. 페넬로프는 멋지고 훌륭한 어머니였지만 자식 농사의 산물은 부모의 심성과는 무관했던 듯 싶다. 어미의 생각과는 달라 늘 부딪치고마는 탐욕적인 낸시와 노엘이 안타까웠다.

이 책의 지은이 로자문트 피처는 영국의 박경리 쯤 되는 작가로 보인다. 장편을 풀어가는 역량이 대단하달까.

인상 깊은 구절....

....주사위는 던져졌다.
설명은 나중에 햇살도 나중에
모든 것은 나중에 답이 주어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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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꼬네집에 놀러올래
이만교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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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에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읽고, 서평을 썼던 일을 떠올려 본다. 막상은 재미있게 읽고도, 서평으로는 별로라고 써지던, 정말 이중적인 모습을 연출했었다.

이번에는?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꿈꾸는 것은, 책을 덮고 났을 때 그 글의 작가가 친구처럼 느껴져 언제든지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라고. 그렇다면 소설가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요. 다소나마 작가님 꿈에 근접하신 듯 보입니다.

이 소설... 앞부분은 진짜 재밌었다. 벽에 기대앉아 가볍게 만화책을 넘기는 거 보다 더 발랄하고 박진감 있게 책장이 넘어갔다. 주인공네 가족들이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나중에 그것이 미국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모텔 켈리포니아로의 여행인 걸 알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게 된 이후부터 어쩜 저렇게 재밌게 쓰냐...감탄을 연발했지만, 서서히 끝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결국, 여자 친구 해연이가 주인공을 떠나는 장면에 가면 페이소스랄까. 웃음의 정체는 서글픔으로 둔갑해 버렸다. 내 느낌이 그랬다. 게다가 여자 친구의 결별 선언을 듣고, 여자 친구가 교통 사고를 당하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든지, 사실은 친구와 결혼한 여자 친구를, 멀리 유학 가서 가끔 엽서를 보내는 것으로 받
아들이는 주인공의 이러저러한 모습들.... 허허...

이런 소설은 읽을 땐 유쾌해서 좋지만, 다 읽고 나면, '왜, 나는 저 소설보다 나은 상황에
살면서도 항상 찌들어든 모양새로 살까' 하는 자책이 들곤 한다. 저 속의 세상은 넉넉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못한 형편이긴 하지만 '소설' 속의 세상이기에 유쾌한 건가. 아..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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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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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쓰는데 꼬박 6년이 걸렸다고 했다. 350권의 책과 1천여 편의 논문 등이 동원됐다하니 말이다. 그러니 독자 또한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내기에는 양으로보나 질로보나 무리가 따를 법.

이 책은 리프킨이 펴낸 '미래 사회 가상 시나리오'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인데, 이 글이 본래의 시나리오라는 장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미래 사회를 내다 보는 그의 상상의 밑바탕에는 바로, 조목조목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의 현 상황을 들어 그의 가상을 충실하게 뒷받침하는 사례들과 실천적 지식들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는 더 이상 소유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온갖 물건을 빌려 쓰고 인간의 경험 세계까지 돈을 주고 사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리프킨의 말대로 '더 이상 일해서 번 돈을 재산의 형태로 차곡차곡 쌓아두는 데서 얻었던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될 거' 라는 생각을 하면 웬지 세상이 재미없어질 것 같기도 하다.

독자의 이런 볼멘소리가 나올 것을 예상이라도 하듯 리프킨은 다음과 같이 또 말한다. '접속의 삶의 양식으로 변화하면서 재산을 축적하는 데는 별다른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다시 놀이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이다. 산업 경제에서 일이 중요했던 것처럼 문화 경제에서는 놀이가점점 중요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인생을 미완의 예술품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했다. 접속의 사회에서는 이래저래 쇼가 횡행하게 되는 셈이다. 모든 기업들은 쇼비지니스를 하고, 각 개인은 연기자가 되어 인생의 매 상황을 연기로 구현하며 사는 삶을 즐기게 된다고 말이다.

얼마 전에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아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베트남 여행에서 배낭 여행족들은 크게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백인들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양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그런데 두 부류 간에는 여행을 즐기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데. 미국인들은 주로 이벤트적 성격이 강한, 몸으로 하는 리조트를 일테면 엿을 직접 고아 본다든지, 뗏목을 직접 몰아 본다든지 하는 것들에 열광하는 반면, 일본인들은 지방색이 두드러지는 기념품들을 구경하고 그것들을 사들이며 챙기는 것에 유독 흥미를 보인다고 했다.

리프킨의 말처럼 세계가 재산과 물질의 소유에 의미를 두는 사회에서 경험을 접속하는 사회로 나간다는 이론에 대입해 보았을 때, 일본인들이 더 세계화 되거나 문명화가 된다면 결국엔 미국인처럼 되게 된다는 공식이 나온다. 글쎄...'저자인 리프킨이야말로 미래 사회를 예언하는 저술가이기 이전에 전형적인 미국인이었군.'하는 본말이 전도된 생각부터 든다.

네트워크는 새로운 시대에 펼쳐질 인간의 행로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다. 이 관문 앞에서 접속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구나가 접속할 수 있도록 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여 모든 이가 컴맹을 면하게 만든다고 해서, 접속의 시대가 갖고 있는 거시적인 문제(네트워크의 관문 앞에서 접속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가 풀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접속을 할 수 있을지, 아닐지'를 판단하는 주체가 바로 누구냐는 문제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리프킨은 이 주체를 '정치적, 상업적 영역'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접속 관계의 사회학적 정치적 의미를 정의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고 여운을 남기며 끝내 단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나는 리프킨이 암시한, 이 '접속의 여부를 결정하는 판단관(정치적 상업적 영역)' 때문에 그의 가상 시나리오에서 보여 지는 미래 세계가 어쩐지 디스토피아처럼 여겨진다.

나 독자는 앞으로 도래할 미래 사회에서 어떤 형태의 접속을 해야 할까. 리프킨 씨가 '깊은 심연'까지는 보여 주었는데, 나 독자에게는 그에 상응할 만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전망을 찾는 건 둘째치고, ... 이 책과 여러모로 닮은 꼴의 모습을 하고 있을 듯한 '노동의 종말'부터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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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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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육백 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책을 다 읽었다는 사실이 기쁘다. 다 읽었음에도 나는 인간 마르크스를 잘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 책 이외의 마르크스를 다룬 다른 전기들을 읽은 적이 없으므로 가타부타 비교를 할 수도 없는 실정. 그럼에도 이 책에서 유일하게 와 닿는 것은 마르크스도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가 죽는 그날까지 물심양면으로 우정을 배풀던 절친한 벗인 엥겔스. 그런 엥겔스의 사랑하는 동거녀의 죽음을 위로하는 마르크스의 편지에는 그런 말이 있었단다. '애인을 잃은 너도 슬프겠지만, 나도 나의 찢어지는 생활고 때문에 죽겠다.... 너의 애인보다는 아버지의 유산을 웅켜 쥐고 한 푼도 풀지 않고 있는 우리 어머니가 먼저 하늘 나라에 가시는 것이 맞는 순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내용을 담은 조심성 없는 편지를 엥겔스에게 보내서 한때 둘 사이가 소원해졌던 적이 있었을 정도다.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강한 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천한 자들을 높일 수 있을까를 골몰한다. 그리고는 마치 뒝벌(공기 역학의 모든 법칙에 따르면 뒝벌은 날 수가 없는 데도 용케 날아다닌다. 마르크스는 이 벌과 비슷하게 중력에 도전하는 재능을 지녔다.)과도 같은 기질을 발휘하여 자신의 의지들을 피력해간다.

-마르크스가 집필한 글에 나온 것 중에서 섬뜩하게 들리던 똑똑한 닭 이야기

똑똑한 닭(이런 생물이 존재할 가능성이 없지만)은 수십 개의 알을 낳은 뒤 온기가 식기도 전에 탈취당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생산력이 가장 풍부할 때 자신의 무능을 가장 먼저 의식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한 말 중에 곡해되어 알려진 문장 하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기쁨을 기대할 수 없는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내세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약속으로 위안을 삼는 것은 당연하다. 국가가 그들의 울부짖음과 탄원을 들어 주지 않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모든 기도에 응답하겠다고 약속하는 더 힘센 권위자에게 호소하지 않겠는가.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제후는 왕에 대하여 투쟁하고, 관료는 귀족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부르주아지는 이 모두에 대해 투쟁한다.

-훌륭한 저작에 숨은 안타까운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

마르크스의 자본론. 당시 그 책을 가장 높이 평가할 만한 사람들은 그 책을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할 사람들이었던 반면,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교육받은 엘리트는 그것을 읽고 싶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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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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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움베르트 에코의 <전날의 섬>을 집어 들어 읽다가, 에코가, 중세 이후의 프랑스 왕정에 대해 그야말로 해박한 썰을 푸는 부분에서 나의 짧은 지식이 글줄을 따라가질 못하여, 그만 앞부분에서 그대로 책을 덮었다. 나의 세계사적인 지식이 어느 순간 안개 걷히듯 환해지는 날이 오면 그때나 읽어 볼까 하고, (그런 날 안 올거다...아마..)

그리고는 언제나 그렇듯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았다. <하루키의 여행법>이 눈에 콕 박힌다. 이 책의 표지는 노몬한 전쟁의 전장터였던 어느 몽고의 내륙에서 찍은 사진이라는데, 녹슨 탱크 위에 서서 찍은 것이 아주 가관이다. 양손을 허리에 놓고, 엉거주춤하게 잡은 포즈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그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 뵈는 썬글라스하며, 약간 심술스럽게 쳐진 볼의 사진 속 하루키는,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나오는 기타 등등의 사진들은 이 모든 여행(고베 도보 여행제외)을 하루키와 함께한 사진사 마스무라 에이조가 찍었다는데, 이 사람은 하루키의 편안한 여행 동반자처럼 보인다. 복받았네 하루키)

이 책은 차례부터가 참 두서없다. 뉴욕의 이스트햄프턴으로의 여행이 처음 장에 나오다가 그게 끝나고, 일본의 어느 무인도 체류기 다음은 멕시코 여행기가 나왔다가 또 느닷없이 일본의 우동 맛 기행을 했다가 다음 편에 몽고 여행, 그 다음에 또 아메리카 대륙 횡단 등이다. 여정 순서가 아니라, 잡지에 기고한 연대 순서에 따른 차례라서 이런가 하고 살펴봤더니 그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편이 엮인 것이 특별히 읽는 데 지장을 주진 않는 것 같다. 워낙 전체적으로 널널하고 편안하게 투덜 댄 그야말로 에세이(잡글)이라 그런가보다.

그 일곱 편의 여행기 중에서도, 아메리카 대륙 횡단기가 제일 싱거웠고(읽는 사람은 싱거운 재미로 읽었지만, 글을 쓰는 하루키는 퍽이나 지루하기 짝이 없어 하고 있었다.), 맛있는 우동집을 찾아 다닌 기행들과 고베까지의 도보 여행 기록이 읽는 맛이 있었다.

왜 재밌다고 생각됐을까? 먼저 우동집 순례는 그 내용을 보조하는, 코믹하고 자세한 삽화가 곁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던 거 같고, 고베 여행은 그야말로 자신의 유년의 기억을 찾아 떠난 도보 여행이라, 마치 맑은 우물에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담담한 필치의 문장이기에 그랬던 것 같다.

하루키는 물건들을 수시로 도난당하고, 연거푸 식중독에 걸려 혼쭐이났던 멕시코 여행을 기록하면서 '여행의 본질'이라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 중의 물건 분실과 구토와 설사 등 인간을 피곤하게 하는 온갖 것들을 자연스럽고 묵묵히 받아들여 가는 단계가 바로 여행의 본질'이라고. 그런데 이 말은 너무 극단적이다. 왜냐 하면 이런 종류의 피곤은 구태여 멕시코까지 오지 않더라도 어디서든 얻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멕시코까지 왔던가. 그 물음에 하루키는 또 다음과 같은 명쾌한 답을 내린다. '왜냐 하면 그런 피곤은 멕시코에서 밖에 얻어낼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해 보면 여행은 환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환상을 좇아 어딘가로 가서 그 환상을 손에 넣는다. 그들은 그 환상을 좇기 위해 적잖은 돈을 쓰기도 하고 시간을 들이기도 한다. 환상을 좇아 다니는 그 사람들. 잘못 되었나? 아니지. 사람들에겐 물거품 같은 그 환상을 누릴 권리가 있다. 있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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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3-31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냐하면 그런 피곤은 멕시코에서 밖에 얻어낼수 없는 종류의 피곤이기 때문에' 라는 말이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은 여행지에서 밖에 얻어낼수 없는 종류의 경험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