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구달 - 침팬지와 함께 한 나의 인생
제인 구달 지음 / 사이언스북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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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래 동물을 무서워한다. 날카로운 이빨로 물리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있어서 일까.. 한달 전 동생이 오래도록 집을 비우게 될 사정이 생긴 자기 친구 집의 요크셔테리어를 데려왔다. 등어리는 까만털을 갖고 있고... 얼굴과 다리는 황금색 털을 갖고 있는 요크셔테리어.. 개를 무서워하는 내가 만하루만에, 이 강아지의 등어리를 쓰다듬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나의 유심히 내려다보는 눈길을 느끼면 얼른 배를 하늘로 향하게 발다랑 드러누워서, 자기 배를 쓰다듬어 주기를 기다리는 이 녀석.

이 강아지 때문에 애완견에 대한 정보를 찾아 인터넷 싸이트도 뒤져보게 되고, 개샴푸를 사러 길건너 멀리까지 나가 보질 않나, 나의 일상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내 곁을 스치는 강아지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동물들까지 유심히 보게 되었다. '저 강아지는 나이가 몇 살일까?'에서부터 뭘 좋아하고, 싫어할까?'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이 책의 성격을 굳이 구분하여 딱 잘라 말하자면, 청소년을 위한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어떤 연유로 침팬지를 연구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어릴 적에 어떤 소망을 간절히 갖고 있었고,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해 왔던 것들에 대한 얘기들이 쉽고 간결하게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침팬지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 제인 구달이라는 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결혼, 출산, 이혼, 재혼에 대한 인생 역정이 정말 담담한 필치의 술술 읽히는 문체로 그려져 있다.

어릴 적에 그녀가 이웃집의 개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관찰하고 돌보았던 것, 그리고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는 두리틀 박사의 이야기책을 옆에 끼고 살았던 것 등이 그녀가 어른이 되어 침팬지를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며 동물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마음을 갖는 데에 발로를 마련한 것 같다.

제인 구달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거창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공포나 불안, 통증, 그리고 행복과 만족을 느낄 줄 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불안에 떨고 통증을 느끼며 죽어가게 되는 걸 원하는가?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제인 구달은 동물과 인간이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을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그리고 제인 구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루츠와 슈츠라는 단체를 만들어 환경 운동의 실천을 몸소 보여 주기에 이른다.

제인 구달의 침팬지 연구 방식은 기존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기존에 방식대로 라면, 동물들을 일단 실험실의 철창에 가두고, 단번에 결과를 보기 위해, 급기야 동물에게 약물 투여 혹은 절단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제인 구달은 야생의 상태로 들어가 동물들의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며, 인내심과 사랑을 갖고 그저 관찰하고 동물들에게 도움을 준다. 이런 방식은 연구 업적에 있어서 단번에 어떤 결과물을 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생태계의 흐름을 파괴하지도 않고, 동물들을 불안에 떨게 하거나 가혹하게 죽이지 않으며, 환경을 오염시키지도 않는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부탁의 말을 남긴다. 환경의 오염을 막고,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거창하거나 힘든 일이 아니라고, 작은 것 하나부터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동물들과 인간들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백과 사전에서.. 6주 된 인간의 태포에 갇힌 태아와 4주 된 태포 안의 여우원숭이 그리고 3주 조금 지난 태포 안의 닭의 모습이 아주 영락없이 구분을 못할 만큼이나 흡사하단 걸 본 적이 있다. 그렇게 발생 단계에선 비슷하게 생겼던 것들이 별개의 차원에서 자기의 생을 꾸려간다. 그런 인간은 단지 자신이 발생 단계에서 사람의 배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지구상의 생물체들에게 너무나 오만하게 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무자비하게 대량으로 산림을 채벌하여 야생 동물들이 오갈 곳 없이 만들어버리거나, 생체 실험으로 동물을 대용하고, 인간들의 호사스런 취미에 부흥하도록, 한낱 사냥감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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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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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살 보조업자'이다. 그는 고객이 될 만한 의뢰인을 검색한다. 도서관에서, 미술 전시회에서, 극장에서, 길거리에서 그는 의뢰인에게 접근하여 계약을 맺는다. 의뢰인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의뢰인에게 맞는 자살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것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친절하게, 따뜻하게.. 그래서 의뢰인은 자신이 원한 대로의 죽음을 맞이하고, 그는 그것을 한 권의 소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주인공이 자살 보조 일을 하는 이유는?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나'는 압축할 줄 모르는 자들을 뻔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너저분한 인생을 하릴없이 연장해 가는 자들도 그러하다.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10쪽--

이 부분이, 이 소설의 맹점이자, 매력이라고 생각된다.

맹점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정말로 너저분한 인생을 압축의 미학(죽음)으로 승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와 같은 주인공들에게서 죽음의 미학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게다가 등장 인물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인생의 비의 품은 듯 비련 어린 면모를 보여 주고 있지 못한데 말이다. 너무 억지스럽다.

그렇다면 이것이 이 소설의 이러한 설정이 매력이 되는 이유는?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살 보조업'이라는 설정 자체가 세상 속에서 상식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고 믿는 통념상 '살인'의 의미,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는 '자살'의 의미의 그 경계를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즉 이 작가의 이런 방식은 기존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접근과는 달리 새로운 방식인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려 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던 맨 처음 얘기로 되돌아가 본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금은 냉정을 찾게 되었다. 아무런 교훈도 훈계조의 따끔한 충고도 찾아 볼 수 없는 이 소설 속에서 '냉정함'이라는 요소를 꼬집어 내어 내 것으로 취하다니.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느끼고 있는 무기력증, 집착증은 '멈춰져 있는 기억' 속에서의 허우적거림이 아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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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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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중간 소위 88년도 77년도에 유행했던 게그들도 이합집산 하였고... 그래서 시종일관 사람을 키득거리게 만드는 재주를 발산해 내는 책이다. 거기에 나오던 우스겟 소리 중에서 아직도 뇌리에 떠나지 않는 유머가 있는데...

당시 친구들 중에 유행하던 게,, 그런 거였단다. 팝송을 한국말로 유사하게 부르는 거였는데.. 올리비아 뉴튼존의 physical의 가사 중 일부.. Let me hear your body talk, your body talk, let me hear your body talk 냄비 위에 밥이 타.. 밥이타.. 냄비 위에 밥이 타... 와 같은 게그를 언급한 것...

어느날 똑같이 숙제를 해오지 않아서 나란히 체벌을 받은 “하찮은 인연”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4인방'으로 얽히게 된 형준 승주 조국 두환이 주인공들이다. 소설 제목은 학급의 주류로 부각되지 못하고 외곽에서 겉돌기만 하던 고등학교 시절 이후, 성인이 된 뒤까지도 미미한 사회적 위상에 자족해야 하는 이들의 비주류적 처지를 가리킨다. 어쩌면 그들의 그런 처지야말로 `58년 개띠'라는 말의 함의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전반부는 화자인 형준의 초등학교 동창인 예쁜 여고생 소희를 둘러싼 네 친구의 각축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처음에 소희는 넷 가운데 가장 잘 생긴 승주의 파트너가 되지만, 결국은 아마추어 깡패나 다름없는 두환과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그 뒤 소설은 소희가 교통사고로 횡사하는 87년까지 나머지 세 명의 이야기만으로 이어진다.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는 한마디로 끝까지 자신들이 메이저라 믿고 싶어하는 마이너 군단에 속한 사람들의 성장 소설이다. 형준, 승주, 조국, 두환의 삶이래 봤자 지방 출신에다가 보잘것없는 학력, 반복되는 실직, 실패한 결혼, 정치적 무감각 등 마이너리티로서의 모든 요소들을 구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단 책을 덮고 나면 - 읽는 내내는 가벼움으로 유유자적 재미있게 읽어 냈으나 - 뭔가 허전한, 미진한 느낌이 밀려 들어온다.

왜일까..

그것은 어쩌면, 작가가 주변의 남자들로부터 여러 에피소드를 듣고 그것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묶어 놓은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네가지 유형마저도 경박한 무엇처럼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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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의한 사랑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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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소설을 읽고 나면 꼭 드는 생각이 하나가 있다.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을까. 대학 시절에 서로가 갖고 있던 소설책을 바꿔 가며 읽던 나의 친구 하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다고. 우울함을 우울한 이야기로 극복해 보려던 나의 얄팍한 마음이 나에게 이 소설을 집어 들게 했듯이.....

아무개가 쓴 문학 개론을 보니 문학의 효용성에는 쾌락과 교훈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은 한마디로 각성이나 깨달음 갖은 걸 주지 못한다. 어떤 교화의 목적으로 이 소설을 권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배수아의 어느 작품을 읽어 보아도 쉽사리 발견되는 주인공들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낮에는 백화점이나 호프집 혹은 주유소에서 일하고, 밤이면 검은 늑대의 무리처럼 떼를 지어 도시의 어둠을 배회하거나, 카페에서 밀러를 마시면서 한없이 길고 우울한 심포니의 마지막 쯤을 듣는다. 또한 아무런 자의식 없이 사랑을 나누며, 목적도 없이 한데 어울려 갑작스럽게 바다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조금, 아주 조금 다르다. 일단은 배경 부터가 6.25 직후이며, 주인공들은 가난하고 황량한 삶을 꾸려간다.

어린아이이기도 하도 어른이기도 한 '나'는 주문진의 초라한 병원에서 긴 머리칼을 가진 미숙한 아이로 태어난다. 그런데 '나'는 병들고 늙은 친어머니 맡에서 아버지가 누군지 밝힐수도 없는 부도덕의 상징으로 태어난 아이였기에 이모의 집으로 보내진다. 그래서 '나'는 모유가 아닌 우유만 먹고 자라게 된다. 이모이면서 어머니가 된 사람의 집에는 이미 '나'의 친언니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사촌인 되는 연연이 살고 있다. 그리고 연연은 이모부이자 아버지인 사람과 연인 사이이다. 이모이자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고 낭만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불만과 불행만을 경험하게 된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이른 결혼으로 학교 선생이 된 이모부이자 아버지 또한 상실과 불안의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이모는 이모부보다 여섯살이나 연상이고, 그들 부부사이의 꿈과 현실의 괴리가 불행을 낳는다. 그러던 어느날 이모이자 어머니가 병에 걸려 죽게 되고 언니이자 사촌인 연연도 숲에서 도끼에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심지어 이모부이자 아버지가 그 범인으로 지목되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곤 감옥에서 미쳐버린다. 그래서 나는 그들 형제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부유한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그 집에서 성장하게 된다.

커 가면서 나는 대학에서 만난 욱이라는 남자아이를 사귀다가 그의 사촌인 유부남 택이와도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나'가 이런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양어머니는 양아버지와 이혼한 후 암으로 유료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죽는다. 그리고 사촌은 자신의 세번째 아이가 태어나자 '나'의 곁을 떠나고 '나'는 나의 남자친구의 자살을 통해 사촌과의 이별을 실감하면서 허무함을 느낀다.

그러나 참 이상하다. 이 소설 전면에 흐르는 부도덕함이 하나도 부도덕하다고 느껴지지 않고, 위험하고 처절한 이미지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말처럼 모든 아름다움은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일까? 결락과 허무를 실현되지 않을 꿈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일까? 삶이 우연에 지배되는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부주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우연에 지배되는 농담 같은 삶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재미로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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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나는 인생
성석제 지음 / 강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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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교정을 보고 편집을 하는 선배 언니 중에 도가 지나칠 정도의 특유의 꼼꼼함과 완벽주의로, 함께 일하는 상대방을 두손두발 다 들게 하는 놀라운 마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래서 그 언니를 완전주의자라고 부른다. 물론 소리내어 불러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성석제의 이 소설집에 <완전주의자를 위하여>라는 단편이, 마치 '나를 읽어보라'는 듯 내 눈앞에 버젓이 있는게 아닌가.

소설 속에 묘사된 주인공 '완전주의자'는 이런 식이다.
'류 박사' 로 불리는 이 분은 무슨 학위를 갖고 있는지 모르겠으되, 텔레비전의 심야 토론에 나오는 어떤 박사보다도 더 박사처럼 생겼다. 그는 그가 사는 동네의 문관의 제왕이자, 배지없는 보안관에 정치평론가, 경제사가, 거기다가 유일무이한 언어학자이다.
특히, 언어학자의 면모가 돋보이는 것이, 그 동네의 약수터 옆에 만남에 광장이라는 푯말을 동사무소에 호통을 쳐서 '만남의 광장'으로 바꾸게 하였다. '뇌쇄(惱殺)'를 '뇌살'로 읽은 어떤 사람을 된통 망신을 주기도 하고, 그 동네 음식점의 차림표에서, '떡복기'를 '떡볶이'로, '김치찌게'를 '김치찌개'로 '육계장'을 '육개장'으로 일일히 지적하여 바꾸게 해 놓는다. 심지어 동네 미용실의 '스트레스 파마'가 '스트레이트 파마'로 까지 바르게 고쳐지도록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압권은 이런 완전주의자의 완전치 못한 일화를 하나 챙기는 데 있다. 드라마 <전원일기>를 <저녁 연기>로 잘못 알고 있는 일화와, 빨대를 영어로 '스트롱'으로 발음했던 일이다.

이 글을 읽고, 나에게 변한 게 있다면, 우리 회사의 완전주의자에게 전에 없던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완전한 사람은 진짜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것. 우리 회사의 완벽주의자 언니도 내가 보지 않는 어느 곳에서 가끔 이런 가당치 않은 실수도 하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게 아니겠느냐는, 다 그렇게 완벽하지 못하니깐 서로 부족한걸 채워 주며 어울리고 살아가는 게 아니겠느냐는 생각 말이다.

40편의 소설이 묶어져 있는 소설집이지만 총 페이지가 200페이지도 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짧은 글들이 뒤틀리고 우스꽝스럽기까지한 우리들의 일상을 코믹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혹시, 이 작가 놀라운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혹세무민에 천박해질대로 천박해져서 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누가 재미없음을 말하는가..
그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단편적이고 가벼운 꺼리로서의 재미가 아니라, 요절복통할 인생의 아이러니로서의 재미를 위하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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