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축제기간에 노래자랑 코너가 있었다. 정확히 그 의도는 지금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단순히 즐기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대결이었는지는. 어쨌든 사람들이 모였고, 노래방 기계 같은 걸 가져다두고 지원자들이 순서대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명(학생1)이 한영애의 <누구없소>를 불렀는데, 진짜 잘 부르는거다. 모인 사람들 모두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나 역시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었고. 그 학생이 끝난 후 다음 학생(학생2)은 하수빈의 노래를 불렀던 것 같은데(이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갑자기 좀전에 한영애의 노래를 잘 불렀던 학생1이 일어나 마이크를 가져오더니, 본래 부르려던 학생2 보다 더 큰 목소리로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며 그 노래를 함께 부르는거다. 학생2는 자기가 불러야할 시간인데 온전히 주목받지 못했다. 학생1이 끼어들었기 때문이고 더 큰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곡가수의 특징을 잡아내서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모인 사람들중 일부는 학생1이 노래를 부를 때 더 크게 웃고 박수를 쳤다. 나는 불쾌했다. 이건 아닌데, 하는 느낌이었다.


학생1은 충분히 잘불렀고 뛰어나게 잘불렀다. 굳이 학생2의 순간에 끼어들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다 학생1이 잘 불렀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었다. 그런데 한 번 엄청난 환호를 받고나니 멈출 수 없는것이었을까. 왜 학생2의 무대에 자기가 끼어든걸까. 대체 왜. 그 순간의 주인공은 오로지 학생2여야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이 일은 내게 너무 강하게 남아있다. 다른 사람의 무대를 빼앗는 일, 다른 사람의 박수갈채를 빼앗는 일, 누군가의 성취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일로써.




이 과거의 일이 생각난 건, 내가 다큐 <미스 아메리카나>를 봤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가수인지라 그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사실 나는 테일러 스위프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노래를 들으면 한두곡쯤 내가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노래를 찾아 들어본 적도 없고. 이 다큐를 보고서야 그녀가 노래하는 장르가 컨트리 뮤직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매우 젊은 가수라는 것도. 또한, 매우 영향력 있는 가수라는 것도.



테일러 스위프트는 열세살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열여섯살에 데뷔를 하고 열일곱살에 '최우수 여성비디오상'을 수상하는데, 많은 사람들앞에서 그 상을 타게 된 기쁨을 발표하고 있던 순간에, 이미 너무나 유명한 '카니예 웨스트'가 무대 위로 올라완다. 그 상을 수상한 건 테일러 스위프트였고, 그러니 그 무대의 주인공은 당연히 테일러 스위프트인데, 카니예 웨스트는 '너는 잠시후에 다시 말하게 해줄게' 라며 그 무대의 시선과 분위기를 모조리 빼앗아 가더니,


"최고 영상은 역시 비욘세가 짱이다!"


라며 비욘세 칭찬을 하고 있는 거다. 맙소사.




테일러 스위프트는 고작 17살 이었다. 게다가 카니예 웨스트는 이미 유명한 가수였고. 거기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뭐라고 해야했을까?

그 자리에 참석한 관중들은 이 황당한 상황에 모두 카니예 웨스트를 향한 야유를 퍼붓는다. 그는 해서는 안될 짓을 했으니까. 어린 여자가수의 무대를 빼앗고 어린 여자가수의 성취를 빼앗았으니까. 그가 받는 야유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미 이름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 게다가 나이도 테일러 스위프트보다 12살이나 더 많은 남자가수가, 도대체 왜 그 무대에 들어와 그런 짓을 벌이는가. 그러나 그 야유가 카니예 웨스트를 향한 것이었을 지언정, 그 무대위에 서있던 사람은 테일러 스위프트였고, 이 열일곱살의 어린 가수는, 그 무대 위에서, 그 야유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절망한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야유를 했다.



카니예 웨스트 개인으로 테일러 스위프트보다 비욘세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다수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나 역시 좋아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러니 그 날 그 상을 탄 게 비욘세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카니예 웨스트가 서운하고 속상했을 수도 있다. 말도 안돼, 이건 비욘세 꺼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날 상을 탄 건 테일러 스위프트였다. 그가 혹여라도 자신이 역시 계속해서 비욘세를 최고의 가수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가 비욘세를 만나 직접 전했으면 될 일이다. 비욘세, 내 말좀 들어봐, 오늘 네가 상을 타진 못했지만 나는 네가 여전히 최고의 가수라고 생각해, 라고 말했으면 된다. 그 자리에는 비욘세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그렇게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성취를 빼앗음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전한다.



사실 그가 정말 비욘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걸 전하고 싶어서 그 무대에 올라온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가능성보다는 '잘 나가는 어린 여자가수'의 성취를 그저 빼앗고 싶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게 그에게 '가능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 자리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있었다거나, 샘 스미스가 있었다거나 했다면, 그가 감히 올라와서 마이크를 빼앗아 '나는 비욘세가 훌륭하다고 생각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는 '그래도 되니까', '그것이 가능하니까' 어린 여자가수의 마이크를 빼앗았던 것이다. 마땅히 그 가수의 몫이었던 것을 빼앗아간거다. 이 얼마나 괘씸한가.



게다가 그는 그 후에도 '테일러 스위프트랑 섹스할 수 있다고 생각해'같은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진짜 씨방새.. 이건 테일러가 알고 있었다 모르고 있었다로 말들이 오고간 모양인데, 설사 테일러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대체 그런 노래를 만든 게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실제 살아있는 젊은 여자가수를 가사에 넣어 섹스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같은 가사를 쓴 게 퍽이나 자랑스럽겠다. 그걸 노래랍시고 만들고 부르는 게, 뭐 그렇게 자랑할만한 일이라고 허락을 했네 안했네.. 허락 안받고 한거면 진짜 쓰레기고 인간 말종이지만, 허락을 받았다고 해도 그 노래 부르는 자신을 좀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나.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양반이...




이 어린 가수가 살아남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녀는 연애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카니예 웨스트의 노래에 들어간 일 때문에도 계속 사람들의 말에 시달려야했다. 남자든 여자든 텔레비젼에 나오는 엠씨들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사생활을 욕하고,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욕했다. SNS에는 테일러 스위프트 거짓말쟁이고 너무 싫다고, 카니예 웨스트덕에 유명해진 거라고 쉴 새없이 올라온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렇게나 싫어하는걸 순간순간 목격해야 했던 그 때 그녀는 고작 이십대 중반이었다. 세상은 젊은 여자 연예인에게 이렇게나 잔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라디오DJ 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이 일을 폭로한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오히려 DJ 로부터 고소를 당한다. 법정에 갔을 때 그녀는 가해자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란다. 법정에서 그녀는 '왜 소리를 지르지 않았냐, 왜 더빨리 반응하지 않았냐, 왜 그로부터 멀리 있지 않았냐'는 질문을 들어야 했다. 그녀에게는 이 성추행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일곱명이나 있었고 사진도 있었는데도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에 씁쓸해한다. 이 싸움은 이겨도 성취감이 없는 싸움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목격자가 있는 자신도 이런데, 아무도 못본곳에서 강간당한 여자들은 대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그녀는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믿지 않을까봐 차마 말하지도 못하고 있는 여자들에 대해 떠올린다.



그녀는 그간 정치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연애 노래만 부를 거예요, 로 자신의 태도를 유지한다. 부시 대통령에 반대한다는 '딕시 칙스'가 멍청하다, 창녀, 불타버려라, 등신, 무식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던 걸 본 까닭이다. 정치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성추행 사건을 겪으면서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더이상 참지 않겠어. 참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어.


이에 그녀의 가족이나 팀원들은 너의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지 말라고 한다. 투어티켓 판매가 반으로 줄어들거라고. 그러나 그녀는 진작에 그러지 못한 걸 후회한다며, 앞으로도 후회하고 싶지 않기에 1억명의 팔로워를 가진 자신의 SNS 에 선거 독려를 한다. 공개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음을 선언한다. 트럼프가 속한 공화당원이 테릴러 스위프트의 고향인 테네시주에서 당선될 확률이 높은 까닭이다. 그녀는 말한다. 여성폭력 방지법의 재승인에 반대하는 사람을, 동성애자의 결혼에 반대하며 성평등 임금에 반대하는 사람을 자신은 지지할 수 없다고. 그녀는 이제 말할 수 있어서 체증이 내려간 것 같은 기분이라 말한다. 그녀의 그간 침묵에 공화당원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편일거라고 생각했다가 놀라는데, 침묵은 이런 거다. 침묵은, 결코 약자에게 내 힘을 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의 선거 독려로 인해 선거율은 높아졌지만, 그녀가 지지하는 사람은 선거에서 패했다. 그녀가 진것이다. 그녀는 졌지만, 다음 세대들이 그걸 바꿔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그대로 담아 노래를 만든다. 다음세대들이여, 달리라고, 너희들이 바꿀 수 있다고.






그녀는 나이들면서 이제 침묵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겠다. 그녀는 매순간 노래에 대해 생각하고 만든다. 자신이 직접 곡도 가사도 다 쓴다. 그러다보니 그 순간에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라든가 감정에 대해 노래할 수 있었다. 그간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지 않아 잘 몰랐지만,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가 대중적으로 높은 인기를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잘 몰랐던 가수였는데, 이렇게 한 편의 다큐로 한 어린 여가수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는 게 좋았다.



만약 지금, 지금 다시 그녀에게 최고의 비디오상 수상자가 되는 영광의 순간이 온다면, 그런데 누군가 예전처럼 무대로 난입해 그녀의 성취를 가로채려 한다면, 그녀는 바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것봐, 당장 내려가, 지금 이 순간은 내 순간이야, 지금 이 무대의 주인공은 나야. 실제로 그녀는 최근의 무대에서 그때를 떠올리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자란다. 단순히 육체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함께 성장한다. 육체와 영혼이 함께 성장하면서 더 강해진다. 어릴 적에 뭣도 몰라 내가 이룬 성취를 빼앗겼다면, 빼앗기지 않을만큼 지킬 수 있을만큼 강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건 언제나 짜릿하다.


자신의 성취를 나이 많은 남자에게 빼앗겼던 어린 테일러 스위프트는 자랐고, 이제 자신의 성취에 대해 온전히 기쁨을 표현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성취를 빼앗기지 말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었다. 너무 짜릿하지 않은가.



요즘에는 오랜만에 음악을 듣고 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를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이것저것 들어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점심먹으러 나가는 그 짧은 길에, 이 노래를 자주 듣는다.









가사를 외워서 따라부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예전엔 좋은 팝송 있으면 가사 프린트해서 달달 외웠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젠 그만큼의 열정도 없고, 작은 글자는 보기도 힘들어... 노안이여.....




그래도 들어봐야지, 라고 음악 듣고 싶은 열정에 다시 조금이나마 불을 지펴준 가수가 생긴 게 너무 좋다 ㅋㅋㅋㅋㅋ 요즘 음악없는 삶을 살아왔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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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 2020-02-07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웃음과 예리한 비평에 겨울 시원한 냉면을 먹는 맛~~^^ 감솨여...

다락방 2020-02-10 14:24   좋아요 0 | URL
으하핫 별말씀을요! 평양냉면 먹고싶네요....

캐모마일 2020-02-0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욘세도 절래절랳하지 않았을까요.

다락방 2020-02-10 14:25   좋아요 0 | URL
관중석에 있던 비욘세도 갑자기 불린 자기 이름에 당황하더라고요. 어휴...

단발머리 2020-02-07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에게는 이 성추행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일곱명이나 있었고 사진도 있었는데도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에 씁쓸해한다.˝

아하.... 미국도 우리랑 별 차이 없다,에 절망스럽네요.
그런데도 캡처해주신 거 읽으니까 막 뭉클하면서 완전 감동적이네요. 테일러 스위프트 너무 멋져요!!!

다락방 2020-02-10 14:26   좋아요 1 | URL
이게 다 보고 자막 올라갈 때 테일러 스위프트가 소녀들에게 달리라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작사작곡한 노래가 나오거든요. 그때 진짜 눈물이 왈칵.. ㅠㅠ

이제 자기 입에 붙여졌던 테이프를 떼겠다고 하더라고요. 응원합니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여성 아티스트들이 계속 말했으면 좋겠어요!

비연 2020-02-08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일러 스위프트가 이런 사람이었군요. 멋지고.. 대단합니다!

다락방 2020-02-10 14:26   좋아요 0 | URL
저도 몰랐다가 이 다큐 보고나서 덕분에 그녀의 노래 몇 곡을 알게 되어 듣고 있어요. 후훗.
 

어제 친구랑 와인을 마셨다. 친구는 운전을 해야해서 웰치스 마시고 나는 와인 한 병 시켜놓고 홀짝홀짝 마셨는데, 한잔이상 정도가 남은 상황. 다 마시기는 힘들고 싸가야지, 했는데 병째 들고가자니 너무 거대하게 느껴지는 거다. 마침 내 가방 안에는 텀블러가 있었아. 오호라. 나는 텀블러에 와인을 따라가지고 백팩에 넣었다. 친구는 '음, 흘리진 않을까' 염려했지만, 내 가방에 책이 세 권 들어있었고, 그 옆에 텀블러를 넣은 거라 딱히 위험할 것 같진 않다며 나는 걱정하는 친구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양재역에 도착했는데, 마침 지하철이 도착한 게 아닌가. 그래서 계단을 다다다닥 뛰어내려가서 안전하게 똭- 타버렸고, 타자마자, '앗, 와인!' 하고 헐레벌떡 자리에 앉아 나는 백팩을 열었던 것이야.


그리고

이내

처참한 장면을 목격한다..






이게 뭐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세 권중 이 한 권만 이렇게 된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 책 아직 읽지 않은 새 책이고 게다가 선물받은 책인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슬픔의 새드니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는 가방 안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휴지를 꺼내서 열심히 열심히 닦아보려고 하지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잘 되질 않았고 ㅠㅠㅠㅠㅠㅠㅠ그렇게 슬픔을 가득 안고 집으로 갔던 것이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너무 사랑하는 책과 그에 못지않게 내가 사랑하는 와인이 만났는데, 왜 그 결합은 슬픈걸까. 좋은것과 좋은 것이 만나면 더 좋아져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가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모르겠어. 버터 맛있고 청경채 맛있으면 버터에 청경채 볶아 맛있게 나와야 하는데, 그 날 나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울면서 버터된장찌개를 끓였었지.. 아아, 앤 타일러 님의 명문이 생각납니다.








정말이지 폴린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건 마이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둘이 함께 사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앤 타일러, 아마추어 메리지, p.230)







나는 텀블러를 꺼내 들고 가기로 한다. 그러나 어제 날씨가 얼마나 추웠나. 장갑도 안가져왔는데 이걸 들고 바깥에 나갈 생각을 하니 너무 고통... 내가 이럴 필요가 뭐있나 싶어 오금역 화장실에 들러 텀블러의 와인을 다 쏟아 버렸다. 어차피 버릴 거면 그냥 남기고 올 것을, 괜히 싸들고 와서 책까지 슬프게 만들어버렸잖아. 어리석은 선택이여... ㅠㅠ 텀블러에 넣을 때만해도 세상 알뜰하고 천재적이라고 자부했건만.. 나여...

하아-

똥같은 세상..


점심에는 콩나물국밥에 돈까스나 추가해서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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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0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아 와인아 ㅠㅠ그래도 잘 말려 보면 와인향을 느끼며 독서가 가능하다..해도 위로가 안 되겠지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다락방 2020-02-06 11:32   좋아요 1 | URL
하아- 제가 무슨 짓을 한걸까요. 돌아서야 할 때를 알고 돌아서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다운것을.. 저는 아름답지 못하였습니다. 흑흑. 그래도 점심은 맛있게 먹어야지요. 훗.

잠자냥 2020-02-0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인가 했더니 역시 와인이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와인에 취하듯 저 작품에 흠뻑 취하시길 바랄게요~ ㅎㅎ

다락방 2020-02-06 11:32   좋아요 0 | URL
너무 사랑하면 집착에 이르게 되고 집착을 하면 끝이 이렇게나 안좋습니다. 집착을 버리자, 지나치게 사랑하지 말자...가 어제 제가 얻은 교훈입니다. 그럼 이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0-02-06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6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lobe00 2020-02-0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와 그다지 재미있지 않은 도서관책과의 만남보다 낫다고 위로드립니다..(상,하권 중 하권이라면 그야말로 비극 ㅜㅜ)
콩나물국밥 맛있게 드셨는지요~^^

다락방 2020-02-06 16:37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제 책이기에 망정이지 도서관책이었으면 정말 어쩔뻔 했어요 ㅠㅠ 조심 또 조심해야겠네요.
갑자기 마음 바뀌어서 점심에 칼국수 먹었어요. 김밥이랑 ㅋㅋㅋㅋㅋ

비연 2020-02-06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점심에 복어지리. 복어탕수육. .. 껍질무침 앤드 튀김... 배터질 듯 먹으니 잠이 쏟아지는.. 그러나 곧 회의.
와인과 저 책의 만남이 이리 된 것에 으흑. 으흑. 그래도 책 재미나게 읽으시길...

다락방 2020-02-06 16:38   좋아요 0 | URL
저는 점심에 마음 바뀌어 칼국수랑 김밥 먹었는데 먹고 나서 배불러서 엄청 졸았네요. 이제 잠이 좀 깼는데 곧 퇴근시간이네요? 으하하하하하하하.
지금은 일단 다른 책 읽고 있습니다. 저 책은 제가 영원히 소장해야겠어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20-02-0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만 너무 안타까워 마세요. 그 와중에 와인 연보락색 이쁘네요. 토닥토닥.
콩나물밥에 돈까스 추가되는 식당 좋으네요. 둘은 잘 어울려요^^

다락방 2020-02-06 16:39   좋아요 0 | URL
지금 생각해보면 도대체 그 어리석은 짓을 왜 벌인걸까 싶어요. 지금 하라고 하면 안할텐데 어째서 어제는 텀블러에 와인을 넣고 그걸 책 세권있는 가방에 넣은건지...어휴..... 바보바보 ㅠㅠ
저 오늘 칼국수에 김밥 먹었는데 ㅋㅋㅋ(순간의 변덕) 내일은 콩나물국밥에 돈까스 먹어야겠어요. ㅋㅋㅋㅋㅋ

초록별 2020-02-0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와인이 그리웠나봅니다~~ 나중에 <증언들>의 내용은 또렷히 기억하실겁니다. 그리고 텀블러 넘 믿지 마세요~~

다락방 2020-02-06 16:40   좋아요 0 | URL
아, 책도 와인을 마시고 싶었나보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너무 새로운 관점이네요. ㅋㅋ
그리고 텀블러는 너무 믿지 않기로 저 역시 어젯밤 생각했습니다. 히융..

han22598 2020-02-0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서..텀블러를 쓰지 않기로 했어요. ㅋㅋ 사실 텀플러 보다는 저의 덤벙대는 성격때문일 수도 있지만...저렇게 물들여진 책이면 가방이며....한두개가 아니에요. ㅠㅠ

다락방 2020-02-07 08:28   좋아요 0 | URL
저는 한 번 텀블러에 커피 넣고 가방에 다 쏟아져서 .. 세탁소에 가방 세탁 맡긴 적도 잇었는데.. 또 이랬네요. 아놔... 진짜 저도 텀블러 믿지 말아야겠어요. 마실 거 넣고 가방에 넣는 일은 이제 안해야지요 ㅠㅠ

moonnight 2020-02-0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 마시며 책 읽다가 엎질러서 책 많이 적셔본 일인..(체념-_-) 애트우드 여사님 안타깝네요ㅜㅜ 그나저나, 앜 와인을 버리셨구나 아깝ㅠㅠ 제가 곁에 있었음 원샷으로 해결해드렸을텐데용^^; 얼마전 영화 결혼이야기를 봤는데, 다락방님이 인용하신 글을 보니 다시 뭉클합니다ㅜㅜ

다락방 2020-02-07 14:42   좋아요 0 | URL
제가 안그래도 지하철안에서 ‘이 텀블러의 와인을 마셔버릴까..‘도 생각햇었는데, 그랬다가는 확 취할 것 같더라고요. 다음날이 쉬는 날이면 괜찮은데 또 출근을 해야해서... 으윽 버렸습니다 ㅠㅠ 아까워 ㅠㅠㅠ

저도 결혼이야기 봤어요!! 아내가 받게된 출연료를 극단돈으로 쓰자고 남편이 말할 때 엄청 빡쳤더랬어요. ㅋㅋㅋㅋㅋ

마태우스 2020-02-10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인사에 대해 답변을 오늘사 했어요 죄송해요 ㅠㅠ 글구 책 세권을 가방에 넣고 다니시다니, 두께도 상당한데 대단하세요.... 저는 요즘 책을 정략적으로 읽어요. 그러다보니 읽고픈 책이 있어도 그냥 흘려보냅니다 흑흑. 제 일이라서 그런지 와인 사건보다 그게 더 슬퍼 보여요 흑흑.

다락방 2020-02-12 16:42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백팩을 메고 다녀서 책 세 권이 가능했어요. 그렇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요. 무거워요 ㅠㅠ

읽고싶은 책이 있지만 그냥 흘려보내신다니, 너무 슬프네요 마태우스님 ㅠㅠ
 















소설을 쓴다면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사상을 드러낼 것이다. 사상이 너무 거창하다면 평소 자기가 지향하는 바 혹은 지양한 것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표시가 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적에 '버지니아 앤드류스'라는 작가의 삶이 그렇게나 궁금했더랬다. 다락방에 갇힌 남매들과 근친상간을 그려내는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았던걸까. 역자후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기에서는 버지니아 앤드류스가 사고로 어릴 때부터 휠체어 생활을 하며 바깥에 나가지 않았었다고 적혀있었다.


소설에는 나쁜 인물이, 악한 인물이 등장할 수 있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악한 인물로 작가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가는 다른 얘기다. 악한 인물을 등장시켜도 우리는 악에 대해 돌이켜볼 수 있고 딱히 악하지 않은 인물을 평범하게 등장시켜도 어떤 소설은 불쾌함을 던져줄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바로 생각나는 작품이 '사토 쇼고'의 [달의 영휴],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 이다.



박완서의 단편 10개가 실린 이 단편집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박완서란 작가는 사람들이 재미삼아 뒷말하는 걸 정말 진저리나게 싫어하는구나, 했다. 왜 다른 사람의 삶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들 멋대로 그렇게 숙덕댄담.

특히 여고동창들이 그랬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도 여고동창들이 그렇게나 결혼 세번 한 거에 대해 숙덕대고 캐묻고 싶어 오지랖이더니,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에서는 동네 여자들이 모여 한 노인에 대해 숙덕댄다. 새로 맞은 남편과 잠자리는 가졌을까 어쨌을까, 돈 때문에 들어앉았을까 어쨌을까. <대범한 밥상>에서도 동창들이 모여 이제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친구에 대해 얘기한다.




비행기 사고로 함께 여행하려했던 부부가 죽는다. 이 부부에게는 자식이 있었는데 여섯살,세살의 남매다. 졸지에 이 어린 남매가 부모 없이 남겨진 것. 이 부부는 각자 외동딸,외동아들이기도 해 이들이 죽고나자 이들의 부모는 역시 자식 없이 남겨져야 한다. 아내쪽도 어머니만 살아계시고 남편쪽도 아버지만 살아계셔 결국 살아남은 건 어린 남매와 이남매의 친할아버지,외할머니였다. 부부의 장례식장에서 아이들은 제 외할머니와 친할아버지 손을 꼭 붙잡고 있는데, 그 후로 이 넷이 함께 시골에 내려가 살게 되는 거다. 이 일에 대해서 동창들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고, 끊임없이 이들에 대한 새로운 소문을 가지고 와 이야기들을 한다.그들이 살림을 합쳤다더라, 사망 보험금 나왔을텐데 돈에 환장을 했다 등등.



나는 이들이 함께 사는 게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고작 여섯살 세살인데, 그러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물론 한 명이 키우는 것이 세상에선 평범하게 받아들여지겠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면 체력에도 경제력에도 한계가 있을 터. 둘이 한다면 오히려 더 낫지 않겠는가.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들이 함께 산다는 걸 혹여라도 듣거나 보아서 알게 된다면, '응, 그래 그럴 수 있지, 오히려 그게 낫겠네, 혼자 보다는 둘이 함께인 게 낫지 않겠는가' 라고 나는 생각할 것 같은데, 이 동창들에게 그건 꽤나 해괴망측한 일인가 보았다. 누구도 친구에게 어찌된 영문이냐, 어떻게 살고있냐 그 사정을 물어보지는 않고 자기들 추측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낸다. 그건 아주 그들에게 재미진 이야깃거리다.




소문을 물어들이는 건 여전히 혜자였다. 사고 당시 경실이 사돈 영감은 지방도시 C시에 인접한 C군 군청 주사였다. 나는 주사라는 직위가 어느 정도의 높이인지 가늠할 수 없는데 혜자가 만년 6급이라고 얕잡아 말하는 투로 봐서는 그다지 높은 자리는 아닌 듯했다. 경실이가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사돈집이 있는 시골로 내려가 홀아비 사돈영감하고 살림을 합쳤다는 것이다. 그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우리끼리니까 말이지 하도 해괴망측해서 입에 담기도 뭣하다. 그러면서 주위를 살피는 시늉까지 하면 세상에서 제일 고독하고 불쌍해 보이던 과부와 홀아비 사이에 느닷없이 썩어가는 과일 냄새 같은 부도덕의 낌새가 감돌기 마련이었다. (대단한 밥상, p.373-374)




손자손녀가 이제 고작 여섯살, 세살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제자식 잃은 설움을 삼켜가며 일단 눈앞에 놓인 아이들 키우는데 애를 써야한다. 놓인 상황 자체가 가슴이 턱 막힐 노릇인데, 그들이 함께 살기로 한 게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소설 속의 화자는 암선고를 받고 친구 경실이를 찾아 시골로 내려간다. 그리고 한껏 자기의 천박한 호기심을 채우고자 한다. 경실은 친구가 처음부터 그것이 궁금했을 거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게 척척 대답을 해준다. 그 안에는 어떤 천박함도 없다. 자식을 잃고 애끓는 부모가 있고, 어린 손주들을 돌보아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이 있을 뿐이다. 




"직접적으로는 아무 얘기도 한 것 같지 않네. 오늘 저녁에 뭐 해먹을까도 아이들을 통해 물어보고, 영감님도 오늘 점심땐 하니한테 수제비 해달랄까, 이런 식으로 말했으니까. 깊은 속내는 말이 필요 없는 거 아니니? 같이 자는 것보다 더 깊은 속내 말야. 영감님은 먼 산이나 마당가에 핀 일년초를 바라보거나 아이들이 재잘대고 노는 양을 바라보다가도 느닷없이 아, 소리를 삼키며 가슴을 움켜쥘 적이 있었지. 뭐가 생각나서 그러는지 나도 알지. 나도 그럴 적이 있으니까. 무슨 생각이 가슴을 저미기에 그렇게 비명을 질러야 하는지. 그 통증이 영감님이나 나나 유일한 존재감이었어. 그밖의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더라. 남이 뭐라고 하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내가 아닌데. 소문뿐 아냐." (p.391)




아, 소리를 삼키며 가슴을 움켜쥐는 영감님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덩달아 나도 울컥해졌다. 혼자라면, 차라리 혼자라면 소리내어 울 수라도 있을텐데,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들이 함께 있으니 그저 가슴을 움켜쥘 밖에.


이런 사정을 모르면서 그렇게나 타인들은 쑥덕쑥덕, 그러면서 재미있어 하는 거다. 아이고 징그러워라, 아이고 끔찍해라. 들여다보면 징그럽고 끔찍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자기들의 재미는 좋기만 하다.







<대범한 밥상>을 읽다가 며칠 전 본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가 생각났다. 소문과 천박한 호기심 혹은 더 천박한 재미.



재훈(김래원)은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고 그래서 함께할 살림집도 전세로 구해놓았지만, 어느날 말없이 일찍 퇴근했다가 약혼녀가 다른 남자랑 함께 집에 있는 걸 보고 파혼을 하게 된다. 그 뒤로 그는 매일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신다. 술을 마시면 전여친에게 자니? 문자를 보내기 일쑤. 그렇게 사랑해 결혼까지 생각했으니 쉬이 용서도 되지 않고 잊혀지지도 않는거지만, 답도 없는 메세지를 보내고 또 보낸다.


선영(공효진)은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워 자신도 맞바람을 피웠고 그리고 남친에게 헤어지자고 했지만 남친은 헤어질 생각이 없다. 싫다는 그녀의 회식자리에 찾아오고, 출근길에 억지로 데려다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으.. 정말 싫은 남자의 전형이다.


그런 재훈과 선영이 같은 직장의 선후배로 만나 같이 일하게 되면서 서로의 속사정을 알게 된다. 재훈은 술취하면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버릇이 있고, 게다가 술을 마시면 진짜 하염없이 마셔서 넘어지고 다치고 아무튼 정말 싫은 남자의 전형인데 선영은 왜 점차로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지 나는 정말 모를일이다. 나였으면 정말이지 1도 좋아할 수 없는 남자인데 으으.. 그렇지만 뭐, 다른 사람이 나같으란 법은 없으니까.. 아무튼,


재훈과 선영이 사이가 좋아질 무렵, 회사내의 사람들은 선영이 함께 있는 단톡방인줄도 모르고 선영에 대한 험담을 한다. 그녀는 전직장에서 유부남 꼬셔서 짤렸다더라, 이번에도 우리 팀장 꼬시는데 잘 안되는 것 같더라, 그녀가 꽃뱀이라는 게시글도 있더라, 하며 링크까지 주고 받는 것. 그 단톡방에 있던 선영은 그 모든 것들을 다 보게 되는 거다. 그리고 당연한듯 퇴사한다.


그 소문은 전혀 사실과 달랐다. 그녀는 억울한 피해자였다. 그러나 그녀가 피해자란 사실을 그녀가 아무리 말하고 다녀봤자 이미 자신이 꽃뱀이 되어있었던 게 돌이켜지질 않았다. 사람을 사서 게시물을 지우고 지우고 해봤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재훈은 그녀에게 '너가 그게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말해' 라고 하지만, 그녀는 이미 전직장에서 해볼만큼 해본 터였다. 이미 바깥으로 내뱉어지고 굳어진 그녀에 대한 이미지, 그 소문에서 사람들은 '사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거다.




그녀는 퇴사 후에 그 회사의 회식자리에 술을 마시고 찾아온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그들 각자에 대해 떠도는 얘기들을 폭로한다. 사장을 짝사랑하다 차여서 결혼도 못하고 있다더라, 남자들만 꼬시는 게이라더라, 고자라더라, 띠동갑 만나는 남자 전자발찌라고 부르는 거 알고 있니. 나만 그런 이야기가 도는 게 아니었어, 너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 하나하나 다 얘기하는 거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묻는다.



"진심으로 이게 재밌어요?"



소문의 당사자가 된 다음에야 그것이 재미있을 리 있겠는가. '그렇지않다'고 해명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고, 포기하고 체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더 오랜 시간들이 있을 뿐.


폭로에 앞서 선영은 그런 얘기를 한다. 초등학교시절 자신을 때린 남자애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렇다고 너도 때리면 너도 똑같은 애가 된다'고 했다는 것. 그런데 선영은 똑같은 사람 되기 싫어서 정신승리 하느니, 그냥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게 나은 것 같다고.



<대범한 밥상>에서 그리고 [가장 보통의 연애]에서 나는 나 역시 재미 위주로 흥미 위주로 누군가에 대해 어떤 말들을 듣고 전하지 않았는가 떠올려보았다. 거침없이 '아니'라고 말할 순 없다. 지금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해도, 내가 그런 순간들을 때로는 즐긴 적이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재미삼아 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천박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질낮은 험담의 대상이 되어 이리저리 튕겨다녔을 것이다.


모든건 아주 단순하다.

내가 소문속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면 다른 사람 역시 소문 속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면 된다.

누군가 나를 농담의 소재로 삼는게 싫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농담의 소재로 삼지 않으면 된다.

누군가가 괴로워하는데 나는 웃는다면, 그건 더이상 농담도 유머도 아니다. 그건 그저 괴롭힘일 뿐이다.



국민학교시절 열심히 교회를 다녔었는데, 그때 어쩐일인지 성경책을 펴본 일이 있다. 평소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 때는 왜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내가 무작위로 그냥 성경책을 확 펼쳤을 때 나온 부분은 마태복음  7장 1절이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마태복음 7장 1절(인터넷 검색으로 찾음)




어릴 적에 스스로 찾아본 때문인지 잊히지 않는 구절이다. 앞으로도 잊지 말아야겠다.


아침 해가 며칠전보다 빨리 뜨고있다. 저녁 해는 그전보다 좀 늦게 지고. 이런 변화가 나는 반갑다. 내가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어둠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환할 때 움직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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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5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02-06 08:5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비소가 뭘까... 궁금해하면서 결국 독약으로 이해한 것 같아요. 쥐약, 독약.
저는 다락방의 꽃들 읽으면서 섹스가 어떻게 하는건지 알게되었어요. 엄청 충격먹었던 기억이 있네요. 으..
그 책 읽은 게 저한테는 너무 강한 인상을 줘서 버지니아 앤드류스 책은 다 찾아 읽었더랬어요. 그리고 지금의 제가 되었지요.......... (응?) ㅋㅋㅋㅋㅋ

han22598 2020-02-0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박한 관심과 소문을 즐기는 사람일 수록 자신을 드러내길 두려워하지요 ㅎㅎ..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그럴까봐..ㅋㅋ

다락방 2020-02-06 09:00   좋아요 0 | URL
남얘기 하기는 너무 쉬운 것 같아요. 그냥 하면 되는거니까요. 그렇게 소문이 만들어지고 그 소문은 당연히 부풀려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당사자는 괴로워해야 하지요. 어휴... ㅠㅠ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 입니다.


실질적 해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청원입니다.

동의합시다.


https://petitions.assembly.go.kr/status/onGoing/9C11598F598C39B3E054A0369F40E8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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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텔레그램 단속강화
    from 퀸의 정원 2020-02-09 13:19 
    다락방님이 텔레그램 메신저에서 생기는 음란물 유통과 관련해서 국회청원 사이트를 알려주셨지요.텔레그램에서이 음란물 유통이 범람해서인지 경찰이 칼을 뽑아들었다는 기사가 났네요.n번방잡는다 경찰 텔레그램 TF 가동 66명 검거외국에 서버를 둔 음란물 사이트를 적발하기도 쉽지않고 폐쇄하기도 쉽지 않다는데 경찰이 국제 공조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단속해 나가길 바랍니다.by caspi
  2. 성폭력처벌법 개정안 통과
    from 마지막 키스 2020-03-09 08:39 
    청원 당시 숫자가 빨리 늘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여기, 알라딘에도 청원독려 글을 올렸었는데 흑흑 ㅠㅠ 청원 10만명 동의 얻었고 국회까지 가서 새로운 법안에 반영이 되었다고 한다. 흑흑 ㅠㅠ 정말이지 오랜만에 좋은 소식이야. 세상은 느리지만 조금씩 천천히 변하고 있구나. ㅠㅠ 계속 소리지르면 어떻게든 변하긴 하는 것 같다. 지치지 말아야지. 지치지 말고 계속 소리질러야겠다. 청원에 동의해준 분들, 감사해요 ㅠㅠ
 
 
단발머리 2020-02-05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원하는 건 청와대 홈에만 있는줄 알았는데 국회에서도 그런 제도가 있었네요.
동의하고 왔어요!

블랙겟타 2020-02-05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끄럽지만 국회에 청원제도가 있는건 처음 알았어요.
동의해씁니다!

비연 2020-02-05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게 있었군요. 동의하고 왔어요!

카스피 2020-02-0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국회 청원제도가 있는줄 처음 알았네요.그나저나 텔레그램은 단순 메세시 프로그램인줄 알았는데 동영상도 볼수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몰카 범죄는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네요ㅠ.ㅠ
 

일전에 [이수정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에서 2020년에 이 프로그램에서 다룬 내용으로 책이 나올거란 얘기를 들었다. 그 프로그램을 몇 개 듣지는 않았지만 내용들이 다 좋아서 책 나오면 좋겠다, 읽어보고 싶다 하고 있다. 사실 그보다는 이수정 교수님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간 공부하는 과정, 그리고 일했던 것들을 써준 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던 것. 이 나라에서 범죄심리학자로 살아간다는 것, 교수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써준 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수정 교수님을 넣어 검색해 보았지만 이미 내가 읽었던 [사이코 패스는 일상의 그늘에 숨어 지낸다]와 아마도.. 교재로 쓰이는 책만이 있는 것 같다.
















누가 이수정 교수님 에세이좀 내주세요...




어제부터 박완서의 책을 읽고 있다.
















이 책, [대범한 밥상]은 박완서의 단편집이다. 와, 진짜 너무 좋은게, 글이 담고 있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크- 글맛이 있는 거다. 이런건 내가 국내 작가의 책을 읽을 때 자주 느끼는건데, 진짜 처음부터 한글로 쓰여진 문장을 읽는 건 그것 자체가 주는 아주 큰 기쁨이 있는 거다. 내가 번역서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읽기는 번역서를 훨씬 더 많이 읽었고 그래서 내 문장도 사실 번역문에 더 가까울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어쨌든 이 한국어로 쓰여진 책이 주는 그 맛, 그 기쁨은 너무 최고되는 것이다. 게다가 박완서나 박경리, 이승우라면 한국어를 다루는 데 있어서 더 탁월한 것 같다. 막 문장 읽히는 데 되게 찰지다고 해야 하나. 제일 처음 단편 <부처님 근처> 읽으면서도 너무 좋았던게, 그 한국어 문장들, 그 맛깔나는 단어의 배열들로 인물의 섬세한 심리까지 드러내서 정말 크, 그래 이거야- 하고 감탄하면서 읽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는, 와, 할 말이 많아지는데, 그래서 결국 내가 이 단편집을 다 읽지도 않고 이렇게 페이퍼를 쓰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여자는 세번 결혼했다. 이 일은 동창들 사이에서도 비꼬는 화제가 되는데, 주인공은 세번이나 결혼한 여자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긋지긋해하고 그러나 위축되지 않으면서 깐깐하게 맞선다. 이런 것도 너무 좋은데, 그간 결혼한 남편들에 얘기하는 건 또 어찌나 재미있는지.



집의 입을 덜기 위해 엄마가 후딱 결혼시켜버려 맞이했던 첫번째 남편.



신랑은 무식하고 교만했다. 나는 여직껏 자기의 무식과 자기의 돈에 그렇게 자신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 외의 딴 사람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철저하게 막혀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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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리 먹고 건강했는데도 나는 아기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시앗을 보았고 나는 시집을 떠났다. 남의 집에 들어와 애 하나 못 낳는 주제에 시앗 좀 봤다고 시집을 아사는 년이 그게 어디 성한 년이냐고 시집 식구들은 욕을 했지만 나는 그렇게 했다.

이혼이란 확실히 결혼보다는 경사스러운 일이 못 되지만 나는 그 일을 내가 선택했고, 내가 생전 처음 어떤 선택을 행사했다는데 기쁨마저 느꼈다. (p.59-60)




둘째 남편은 그녀 스스로 택한 남편이었다. 지방대학 강사였고 지방 신문에 칼럼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그 글들이 참 좋았던 거다. 돈이나 명예나 하는 것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닌 터라 반했던 것. 그래서 그와 행복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곧 내가 속았다는 걸 알아야 했다. 그는 겁쟁이이고 비겁하고 거짓말쟁이였다. 순 엉터리였다. 그의 본심은 돈과 명예에 기갈이 들려 있었고 T 시와 T대학 강사 자리를 지긋지긋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런 곳에서 썩긴 너무 아까운 존재라고 억울해했고, 서울의 일류 대학에서 자기의 명성을 흠모하고 모시러 오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기도 했다. 그의 명성에 대한 자신이란 것이 또 사람을 웃겼다. 자기의 전공 공부에는 게으르고 자신도 없는 주제에 잡문 나부랭이나 써가지고 지방 신문을 통해 매명賣名을 부지런히 해쌓는 것으로 그런 엉뚱한 자만을 갖는 것이었다. 더욱 웃기는 것은 그는 그의 글을 통해 결코 도시 돈 명예에 대한 그의 절실한 연정을 눈곱만큼도 내비치는 일이 없이 늘 신랄한 매도를 일삼는다는 거였다. 도저히 구제할 수 없이 비비 꼬인 남자였다. (p.61-62)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어떤 남잔지 알겠는 건 왜때문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특히나 글쓰는 남자를 싫어라 하는 이유인데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박완서님 만세입니다.


자, 그러면 세번째 남편은 어떤가. ㅋㅋㅋㅋㅋㅋㅋㅋ


세번째 남편은 돈에 환장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남자였고, 여자는 위선적인 것보다 그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징그러..징그러운 것이다. 징그러...




"거 참 잘됐구려. 오래간만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와요. 사람은 그저 사람을 많이 알아놔야 되는 거야. 다 써먹을 데가 있다구. 있구말구. 줄이나 빽이 별건가. 그렇구 그런 거지. 당신 동창 중에라도 재벌이나 고관 사모님 없으란 법 없잖아. 하다못해 세리稅吏 마누라라도 있어봐. 그게 어디게."

공현히 흥분해서 눈을 번쩍이고 삿대질까지 했다. 그러곤 엄숙하게 덧붙였다.

"어떡허든 우리도 한밑천 잡아 한번 잘살아봅시다."

나는 울컥 징그러운 생각이 났다. 그러곤 아아, 아아,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남편을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주 나쁜 징조였다. 더 나쁜 것은 숨가쁘게 아아,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첫 남편과 헤어질 때고 그랬었고, 두번째 남편과 헤어질 때도 그랬었다. 남들이 알기로는, 내가 첫 남편과 헤어진 것은 애를 못 낳아서 쫓겨난 것으로, 두번째 남편과 헤어진 것은 그까짓 일부종사 못한 팔자 두 번 고치나 세 번 고치나지 하는 팔자 사나운 헌 계집이면 으레 그렇게 하는 빤한 소행쯤으로 되어 있을 터였다. 내가 겪은 아아 징그럽다는 아무도 모른다. (p.48)



아아, 그러나 제가 알겠습니다, 그 징그러움. 아마 다른 많은 여자들도 그 징그러움을 알 것 같습니다, 박완서 님이여..



이 세번째 남편은 참... 꼴보기 싫은데(다른 남편들처럼) 조금 더 옮겨보겠다.




그의 눈은 의욕 과잉으로 핏발이 서 있었고, 몸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마디로 눈부셨다. 그는 나도 자기의 손발처럼 덩달아 바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잘 되지를 않았다. 나는 그의 분망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아홉시에 중요한 용건으로 만날 사람이 있으니 서둘러야겠다고 시계를 골백번도 더 보면서도, 별로 급한 것 같지도 않은 전화를 몇 통화씩 거는가 하면, 통화중인 곳에는 욕지거리를 해가면서도 끈질기게 돌리다가 아홉시를 삼십 분도 못 남겨놓고서야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를 질러대면서 옷을 주워입고, 내가 골라주는 넥타이를 마땅찮아하고, 다시 고른 것도 또 신통찮아하고, 거듭거듭 그 짓을 하면서 그는 교묘하게 자기가 이렇게 늦고 만 것이 마치 내 탓인 것처럼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겨우 고른다는 게 내가 처음 골랐던 것을 다시 고른 것도 모르고 만족해하다가, 다시 시계를 보고는 불난 집을 뛰쳐나가듯 곤두박질을 치면서 뛰어나갔다간 오 분도 안 돼서 숨이 턱에 닿아서 되돌아와서 중요한 서류를 잊고 나갔다고 찾아내라고 고함을 쳐댔다. 그럴 때 만약 내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보관했던 서류를 단박에 첫째 서랍에서 꺼내주면 도리어 남편은 나를 핀잔주려 들었다. 답답하다느니 안차고 다라지다느니 하면서. 그런 핀잔을 듣지 않으려면 나도 덩달아 "어머머, 큰일났네. 이 일을 어쩌누. 글쎄 그 서류를 어디 뒀드라. 에구구 …… 내 정신이야"하며 하던 일을 내던지고 뱅뱅 맴을 돌며, 발을 구르며 이 서랍 저 서랍 날쌔게 빼보고, 말을 안 듣는 서랍을 냅다 빼동댕이치며, 콩 볶듯이 날뛴 끝에 서류를 찾아내야만 했다. (p.45-4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 서류를 어디 뒀드라. 에구구 …… 내 정신이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소설이 쓰여진 게 1974년이다. 남편이 아니라면 경제적 능력을 갖추기가 힘들었을 것. 소설 속 여자는 행복해지고 싶고, 돈을 부족함없이 쓰고 싶어서 다시 결혼을 선택해 여기까지 온거다. 그러나 지금 남편도 너무 징그럽다. 그래서 거울을 보지만, 이제 다시 결혼하기엔 너무 늙어버렸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물론 이 소설은 이렇게 남편 얘기만 하다가 끝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내용이 이렇게 진행되어 이렇게 끝나지, 하게 되는데, 박완서가 그려내는 남편들의 모습이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재미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은 바로 전에 실린 단편속 주인공과 달리 나이들어서까지 혼자 사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그녀에게 그게 가능했던 것은 그녀가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 그러나 전문의가 아니라서 동네 어디쯤 자리를 잡고 주로 소파수술과 성병치료를 하는 산부인과를 개업했다. 이 소설은 1980년의 소설이고, 주인공 역시 강간을 당해 낙태한 경험을 갖고 있는 걸로 되어 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소파수술을 하게한 것. 한 자리에서 30년간 산부인과 의사로 일해오고 있지만, 그녀가 출산된 아이를 받은 건 처음 딱 한 번 뿐이고 지금까지 계속 소파수술과 성병치료만 해왔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치를 떨고 억울해 하면서 세상에 대해 보복하고 싶어한다. 친절하거나 다정한 것과 거리가 먼 성격의 여자인데, 그녀 스스로 그것을 잘 알고 있고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안달까. 이제 병원 폐업을 앞두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한 번 받아볼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전히, 소파 수술과 성병을 치료하기 위한 여성과 포주들만 방문한다.

그리고 태반을 먹기 위한 동네 여자들과.




그런 여자들을 구경하노라면 진찰대에 치부를 얼굴처럼 쳐드는 자세로 누워 있을 때하곤 또 다르게 여자의 추악함이 그 극한까지 다다른 것을 보는 것 같은 잔혹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니까 여자들에게 남의 미숙한 태반을 먹이고, 그 비릿한 입으로 음담을 지껄이게 하는 것도 내 나름의 여자들에 대한 박해의 한 방법이었다. 증오로써 할 수 있는 일 중 박해처럼 자연스러운 일도 없다. 이렇게 끊임없이 나는 내가 여자이기에 받은 치가 떨리는 박해의 기억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남에게 분배함으로써 나만의 억울함을 덜어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결코 덜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남을 비참하고 추악하게 만들어놓고 비교해도 역시 내가 더 비참하고 추악했다. (p.143)




나는 자신에 대한 어떤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왜 나는 내가 이렇게 이해할 수 없어지나? 자기로부터 가까운 사람일수록 이해할 수 없는 거동이나 기색을 보일 때 기분이 더 나빠진다. 하물며 자기 자신에 있어서랴. 하긴 그 우스꽝스러운 날림 결혼식 구경을 하면서 느닷없이 살아 있는 완전한 아기를 받아보고 싶단 생각을 품기 시작하고부터 나는 나로부터 떨어져나가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따지지 말고 내버려두자고 벼른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분리되는 수은처럼 자신이 산산조각날 것 같아 나는 두렵다. (p.140-141)




이 책에 실린 열편의 단편중 나는 아직 네 편의 단편밖에 읽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이 너무 인상적이다. 뒤에 실린 이야기들은 또 어떤 이야기들일까.

아직 내가 읽지 않은 박완서의 작품이 많다는 게 너무 좋다. 제대로된 한국어로 쓰여진 짜릿한 맛을 느낄 생각을 하니 너무 좋은 거다.




지난 설연휴에 친구와 만나 닭도가니탕을 먹으러 갔었다. 삶아진 닭과 죽이 함께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데, 그릇 가득 녹두가 담겨있었다. 노란빛이라고 하기에도 적절하지 않고 연둣빛도 아닌, 그 색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녹두를 모르는 사람에게 녹두를 설명하자면 노란 것보다는 빛이 바랬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흐린 노랑? 그러나 녹두를 아는 사람에게는 녹두색, 이라고 하면 금세 떠올릴 수 있을테다.

내가 한국어로 쓰여진 소설을 좋아하는 데는 바로 그 이유가 있다. 녹두색이라고 설명할 수 있고, 그걸 알아들을 수 있는 바로 그 지점.





대기실과 상담실을 겸해서 넓고 쾌적하게 꾸며진 방의 남으로 난 창가에 아직도 우단의자는 놓여 있다. 그 의자는 허구한 날, 내 눈에 거슬렸던 것처럼 오늘도 눈에 거슬린다. 손으로 우단천을 결과 반대방향으로 쓸면 다 바랜 잿빛 속에서 밝은 녹두색이 살아난다. 그 녹두색은 삼십 년 전의 쑥색의 잔재다. 그 의자는 쑥색이었을 적에도 녹두색이었을 적에도 잿빛이 된 후에도 나의 병원과는 안 어울렸다. (p.138)



위의 문장을 읽는데 너무 좋은 거다. 쑥색이라니, 녹두색이라니. 그리고 잿빛. 역시 한국어로 쓰여진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문장이 다 쑥쑥 들어와. 눈앞에 선명히 그려진다. 정말이지, 아 이맛이야~ 이러면서 읽을 수 있다니까?


좋다. 좋아.



아 할일이 많은데, 그래서 어제도 요가하면서 내내 '내일 뭣도 해야 하고 이것도 해야하고' 하면서 일 생각했는데, 왜 회사 나오니까 책에 대한 얘기만 하고 있는가. 어쨌든 책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하였으니, 이제 페이퍼쓰기를 마치면 점심식사에 대한 생각을 하는 걸로 하겠다. 뭐먹나..








창녀의 사타구니와 정숙한 여자의 그것과를 감히 비교하는 것은 정숙한 여자에겐 모독이 되겠지만 나는 다만 외관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상식적으론 창녀의 것은 더럽고 정숙한 여자의 것은 깨끗한 걸로 돼 있지만 육안을 통한 관찰에 의하면 그와 정반대다. 어떤 창녀의 그곳은 거의 백치의 얼굴처럼 청결하다. 그러나 자기의 그곳이 가장 정숙하다고 믿는 여자일수록 그곳의 불결에 파렴치하다. 그것은 마치 뉘 집에서나 응접실이 가장 깨끗한 것과 같은 이치이리라. -<그 가을의 사흘 동안>-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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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04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박완서 작가님 소설책을 일곱 권이나 모아놓고 한 권도 안 봤네요. 스스로도 깜짝 놀람ㅎㅎㅎ. 다락방님 페이퍼 읽으니 읽고 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0-02-05 08:41   좋아요 1 | URL
우와 대박. 일곱 권이나 모아놓으셨다뇨!! 이제 읽는 일만 남았네요.
저도 사놓고 안읽은 책이 너무나 많지만, 나중에 읽을 책 많아지니 좋다..라는 긍정적 마인드를 자꾸 끼워넣으며 살고 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님은 아무때고 내킬 때 읽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ㅎㅎ

slobe00 2020-02-04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은 드물게도 남편과 제가 공통적으로 애정하는 작가님이셔요^^
저도 역시나 번역서 비중이 높다보니 외국어 좀 잘했음 하는 마음도 불쑥불쑥~

다락방 2020-02-05 08:41   좋아요 0 | URL
저도 번역서를 많이 읽고 그래서 원서로 읽고 싶은 욕심에 방통대 영어영문학과에 편입했다가..한학기 다니고 자퇴했지요. 공부는 내 길이 아닌것임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0-02-04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박완서 작가님 글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다락방 2020-02-05 08:42   좋아요 1 | URL
쟝쟝님도 읽어봐요!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 많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