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살 사춘기 소녀 '에비'와 '리지'는 이웃해사는 단짝이다. 학교도 같이 다니지만 서로의 집에서 같이 자기도 한다. 서로에 대해서 속속들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친한 사이이다. 이 소설은 사춘기 소녀들의 성적 호기심과 욕망에 대해 드러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에비에게는 하염없는 애정과 갈망을 품은 동네 아저씨가 있고 그 아저씨는 매일 밤마다 에비의 집 앞에서 에비의 방 창문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이 다음의 우울한 이야기들이 상상된다면, 맞다. 그러므로 얘기하지 않겠다. 그리고 에비의 단짝친구 리지. 리지는... 하아- 에비의 아버지를 갈망한다. 아버지란 말이 너무 나이 들어보이나..에비의 아빠를 갈망한다....................................................참...읽기 조마조마한 소설인데, 심지어 짜증까지 났었다. 문장이 뭐라고 해야하나..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해야하나. 그러니까 계속 읽을까 말까를 고민하게 한 문장이 앞 쪽에 떠억, 하니 나타나는데, 바로 이런 문장이다.



축구공을 50미터나 찰 수 있고 딸들을 위해 공주풍 화장대를 만들며 폴러스케이트장이나 볼링장에 우리를 데려가는 베버 씨. 그에게서는 언제나 상쾌한 공기와 라임 향, 크리스마스 육두구(향신료로 쓰이는 나무 열매)냄새가 동시에 났다. 우리에게는 평생 '남자'를 의미했던 냄새이다. 베버 씨, 그는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를 내다보기 위해 목을 길게 내빼지 않았던 때를 기억할 수 없다. 계속해서 베버 씨의 말을 조금이라도 더 듣기를 기다리면서, 그가 내게 관심을 가져주는 순간에 목말라하면서. (p.10)



....응? 나는 그를 내다보기 위해 목을 길게 내빼지 않았던 때를 기억할 수 없다?? 이게 무슨 말이지?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 앞의 문장들과 그 뒤의 문장들을 보면, 그러니까 요지는, 베버 씨를 보기 위해 항상 목을 길게 내뺐다는 건데, '기억할 수 없다'로 끝나?? 내빼지 '않았던 때'?? 부정이니까, 이중부정으로 ... 진짜 수차례 읽은 다음에야 저 문장이 '그를 보기 위해 늘 목을 길게 내뺐다'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진짜...... 책을 다 읽고나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저 문장을 또 읽어봤는데, 여전히 참..뷁스러운 문장이다.....휴.........저런 문장을 써둔 건, 원서에도 이중부정이 나와서일 것 같은데, 아, 진짜.....그만두자.




그건그렇고,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중에 '한희정'과 함께 부른 <그대는 어디에>라는 곡이 있다. 오늘은 문득 그 노래가 생각났다. 


눈물은 보이지 말기
그저 웃으며 짧게 안녕이라고
멋있게 영화처럼 담담히 
우리도 그렇게 끝내자

주말이 조금 심심해졌고
그래서일까 친구들을 자주 만나고
챙겨보는 드라마가 하나 생겼고
요즘엔 나 이렇게 지내

생각이 날 때 그대 생각이 날 때
어떻게 하는지 난 몰라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마음은 담대하게
그 다음은 어디서부터 어떡해야 하니

환하게 웃던 미소 밝게 빛나던 눈빛
사랑한다 속삭이던 그댄 어디에
사랑하냐고 수없이도 확인했었던
여렸던 그댄 지금 어디에

웃기도 잘 했었고 눈물도 많았었던
사랑이 전부였었던 그댄 어디에
같이 가자며 발걸음을 함께 하자며
나란히 발 맞추던 그댄 지금 어디에



정확히 저 부분. 챙겨보는 드라마가 하나 생겼고.......


챙겨보는 드라마가 하나 생겼고

챙겨보는 드라마가 하나 생겼고

챙겨보는 드라마가 하나 생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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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내게도 챙겨보는 드라마가 하나 생겼다. 사실 집에 있어도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데, 이런 내가 그 드라마가 방송할 시간이 되면 텔레비전 앞에 가서 앉는다. 오 마이 갓.. 그렇다고 본방사수!! 같은 건 아니고, 왜냐하면 토요일에도 술마시느라 안봤으니까... 그 시간에 집에 있으면 보자, 인데, 어쨌든 챙겨보는 드라마...가 하나 생긴 것이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이 드라마가 참 좋은 게,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안재욱과 소유진이 성숙한 연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고 서로의 생활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진은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하고, 전남편에게는 화를 내고 소리지르고 욕을 하지만, 남자친구 앞에서는 설레이고 좋고 막 그런 여자다. 누가 자신에게 뭐라고 할 때 무조건 잘못했다라고 하지도 않고 기죽지도 않고 당당하게 대응한다. 경우 없는 여자에게는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게 다있냐'고 말하고, 안재욱의 장모에게는 '우리가 뭐 불륜이라도 하냐'고 맞선다. 크- 좋은 캐릭터다. 게다가 어제는 소유진과 안재욱이 같이 밥을 먹는 식당에서 옆테이블 여자들이 저들은 불륜인가보다고 쑤군거리자 '우리 불륜 아니다' 라고 말하고는 '왜들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나는 그 대사가 좋더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기준만 가지고 덮어놓고 욕하는 사람들이 들었어야 할 대사다. 

뭣보다 안재욱이 정말 좋은 남자친구다. 지금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행복하고 기분 좋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게 뭐가 있을까를 늘 고민한다. 심지어 여자친구가 애인이 생기면 하고 싶다고 했던 위시리스트를 하도 많이 들여다봐서 외우기까지 했다. 소유진이 보이기 싫어했던 모습까지 다 보았는데도, 그는 '나는 남자친구니 내 앞에서 그런 모습 보여도 된다'고 말한다. 여자친구에게 높임말을 쓰고, 자주 손을 잡고, 자주 함께 웃는다. 열심히 일했으니 열심히 연애합시다, 라고도 말한다. 이 드라마 상에서 츤데레 역을 맡고 있는 골프선수가 많은 여자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나는 안재욱 캐릭터가 좋다. 너무너무너무좋다. 울트라캡숑나이스짱이다. 모름지기 남자친구라면 안재욱 같았으면 좋겠다. 안재욱 럽 ♡ 어른의 사랑... 좋아......





주말에는 조카들이 놀러왔었다. 동생네 부부가 볼 일이 있어 토요일 하루를 꼬박 조카들과 보내야했는데, 내 방에 반지를 놓아둔 케이스를 본 일곱살 조카가 그 케이스를 들고 오더니 내게 건네며 말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하아..조카야.. ㅜㅜ 

너는 대체 왜..왜...왜... ㅜㅜ


드라마 그만 봐 ㅠㅠㅠ


그리고는 "이모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지?" 라고 하니 "나!"라고 한다. "그럼 이모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지?" 라고 하니 "(   )"라고 답한다. 우와, "어떻게 알았어?" 했더니 아아, 일곱살 아이가, 이러는 거다.


"내가 이모를 왜 모르냐. 아주 잘알지."


일곱살 조카가 나를 잘안다!!!!!!!!!!!!!!!!!!!!!!!!!!!!


네살 조카는 남자아이인데, 와, 얘는 애초에 태어나기를 애교를 장착하고 태어난 것 같다. 쳐다보기만 해도 방긋방긋 웃고, 자신이 웃는 걸 사람들이 예뻐라 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너 이거 왜그랬어?' 하고 물으면 대답이 바로 이렇게 나온다. '응, 이모가 좋아서.'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얜 뭐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예쁜 대화들이 오고가서 사랑이 가득 넘쳤다로 끝나면 훈훈했겠지만,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얘네들 빨리 자기네 집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사랑한다고해서 늘상 붙어있는 건 답이 아니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 피곤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거리감, 거리감이 중요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특히나 나같은 사람은 사랑할수록 거리를 둬야 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야 사랑이 쑥쑥 자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점심까지 먹고 간다 그래서 당황했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점심으로 김밥 잘라서 또 우동하고 함께 네 살 조카 먹여주는데 잘도 받아먹는 게 진짜 이뻤다. 어휴, 계속계속 먹이고 싶어. 나는 내가 먹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잘 먹는 걸 보는 것도 너무나 좋다. 특히나 내가 사랑하는 존재라면 더더욱. 네 살 조카가 내가 떠주는 밥을 잘 받아먹는 걸 보는데 진짜 너무 좋았다. 행!복! 




며칠전에 인증서를 갱신했는데 특수기호를 넣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 뒤로 자꾸만 인증서암호가 틀렸다는 메세지를 보게 된다. 여전히 특수기호 없는 번호를 넣기 때문이었다. 틀렸다는 메세지를 보고나서야 아, 특수기호, 하고는 다시 쳐넣는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자연스레 손에 익게 될 것이고, 그렇게 새로운 비밀번호를 누를 수 있게 되겠지만, 아직은 새로운 비밀번호가 낯설기만하다. 좀처럼 손에 익질 않는다. 인증서 만기 같은 거 없이, 갱신 같은 거 없이, 비밀번호 변경 같은 거 없이, 그냥 살 순 없는걸까.



지난주에는 사주를 보러 다녀왔다. 사주를 봐주신 분은 내 사주들을 풀이하시면서 '각인'이란 단어를 쓰셨다. 오..각인이라니! 제이콥이 르네즈미에게 각인되었었는데...이 분, 트와일라잇 시리즈 보신걸까? 제이콥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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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2016-05-16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엔 거리가 필요하다는말, 절대 공감합니다 :)

다락방 2016-05-16 16:16   좋아요 0 | URL
그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

비연 2016-05-1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톤 프로젝트의 저 노래. 너무 좋죠. 듣고 있으면 정말 빨려들 듯한...
저도 드라마 잘 안 보는데, 노희경 작가의 ˝디마프˝ 를 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다락방 2016-05-16 17:34   좋아요 0 | URL
저는 저 노래보다는 <이화동>을 좋아해요. 들으면 진짜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능 ㅋㅋ 그 노래랑 <눈을 뜨면>이요. 어휴, 그냥 술 취하고 들으면 진짜 쥐약이에요.

안재욱 캐릭터에 빨려들어가고 소유진과 연애하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한 번 보고나니 자꾸 보게 되네요. 히힛.

머큐리 2016-05-17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즐겨 보고 있는 드라마에요...ㅎㅎ

다락방 2016-05-17 15:57   좋아요 0 | URL
오오 머큐리님도 보신단 말입니까? 소유진과 안재욱 커플 좋지요? 힛.

2016-05-17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7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8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8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9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밀리 비룡소의 그림동화 34
마이클 베다드 글, 바바라 쿠니 그림, 김명수 옮김 / 비룡소 / 1998년 3월
평점 :
품절


"시가 뭐예요?"
내가 물었습니다.
아빠는 시든 이파리를 손바닥 위에 놓았습니다.
"엄마가 연주하는 걸 들어 보렴. 엄마는 한 작품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데, 가끔은 요술 같은 일이 일어나서 음악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진단다. 그게 네 몸을 오싹하게 만들지. 그걸 설명할 수는 없어. 그건 정말, 신비로운 일이거든. 말이 그런 일을 할 때, 그걸 시라고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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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2016-06-0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동문제 관련해서 꼭 등장하시는 은수미 전 의원님. 개인적인 은수미씨가 궁금해서 검색하다 이 블로그 글을 보았어요 ㅎㅎ
인터뷰 내용 중 `삭제`라는 표현과 아름다움에 대한 의견이 와닿아서 몰래 혼자 보려고 공유해 갑니다 :)
 
우리가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 테드북스 TED Books 3
해나 프라이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돈 많고 잘생기고 키도 크고 다정하며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한국남자만을 내 연인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은 연애하지 못할 확률이 크다. 그러나 외모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예의 있는 남자를 원하며 인종과 국적 나이도 별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 연애할 확률은 전자보다 크다. 이건 똑똑해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는 거다. 조건이 많을수록 그 조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거니까. 그렇다고 아무나 다 괜찮다, 하는 건 아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나는 나와 사이좋게 지낼 사람을 찾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을것이다. 


또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고 다정하게 대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확률도 크다.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기를'바라는 것보다 말이다. 나는 십오년간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 하지만, 그 안에서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내가 근무하는 빌딩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지만, 우연히 마주치는 누군가로부터 '이 빌딩에서 당신이 제일 예뻐요' 같은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벤치에 앉아있어보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도 가보았지만, 여행지에서의 로맨스 같은 것도 생기질 않았다. 아무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도...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해서 계속 좋아한다고 말한 상대와는 불타는 연애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너무 좋아해서 팔짝팔짝 뛰고 좋다좋다 이천오백번쯤 말했더니 어느 순간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더라.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는 좀더 다정해져야 했고, 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혹여라도 상대에게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될까봐 신경을 썼고,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말과 행동을 했다면 바로 사과했다. 나는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분에 내내 신경썼던 거다. 그래서 나는 그 연애를 그전의 연애보다 더 오래 끌고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상대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기를 바라지 않고, 너무 좋다면 먼저 다가가서 관계를 시작하려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내 신경을 쓴다면, 연애는 시작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내가 그간 연애와 이별을 반복하면서, 그리고 그간의 시간들을 지내오면서 저절로 터득한 것들이다. 내가 깨달은 연애와 이별에 대한 것들이 유별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연애에 대해서 이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아주 많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역시 연애를 시작하고 끝내고 또다른 연애를 시작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중 일부는 원하는 상대와 함께 살고 있기도 할 것이고.



이 책, 『우리가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은, 내가 위에 했던 얘기를 똑같이 한다. 이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그러나 수학적으로. 책장을 넘기다보면 이 당연한 얘기들을 하는데 확률이 나오고 그래프가 나오고 방정식이 나온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들은, 수학적 공식 앞에 더 설득력을 갖는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방정식에는 당연히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대입되는 모든 것들에 '행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자는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숫자 대신 사람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굳이 수학적인 증명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이 책에 쓰여진 것들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이 나에게 딱히 쓸모는 없었다. 게다가 책 뒷부분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하객들을 어떻게 앉혀야 하는지를 얘기하는 부분은 특히나 더 필요없었고, 그러나, 분명, 이 책은 어떤 사람들에게 반드시 읽어야할 책일 것이다. '왜 나는 연애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애인이 안생길까' 같은 생각으로 괴로운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연애를 하기 위한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으면서 '아 너무나 외로워 연애하고 싶다'만 하루종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 남자든 여자든, 방 안에 가만히 혼자 앉아서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만 강하게 한다고 해서 연애가 되는 게 아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움직여야 되는 거다. 내가 움직여야 우주도 나에게 반응한다. 일단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곳에 가서 나를 드러내는 게 우선이다. 그건 지하철이나 버스를 하루종일 타고 있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비행기 안에서 재벌2세인 남자나 여자를 만날 확률은 실상 제로에 가깝다. 


매일 출퇴근하거나 등하교하는 곳에 이성이 별로 없다면, 동아리에 들거나 동호회에 나가든가 소개팅이나 미팅을 해야 한다. 직접적인 액션이 싫다면 자기계발을 위해 어학 공부나 댄스 공부등등의 학원을 다니는 것도 괜찮겠다. 그러니까 일단 누군가를 만나야 뭔가 될 게 아닌가. 로또를 사지도 않고 당첨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상대가 눈앞에 있다 싶으면, 혼자서 좋다좋다 초능력으로 세뇌할 생각하지 말고, 가서 말을 걸어야 한다. 이런 건 그냥 너무나 당연한 거다. 



이 책의 저자 '해나 프라이'는 수학을 사랑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학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해 가끔은 흥분한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런 책을 굳이 쓴 까닭은, 사람들이 까다롭거나 어렵다고 생각하는 수학을 조금 더 쉽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수학 너무 좋아, 수학 진짜 황홀한 거야, 얼마나 황홀한지 내가 알려줄게, 하는 뉘앙스가 계속 풍긴다. 그래서 너무나 기분이 좋다. 이 당연한 것들을 얘기하는 이유가, 그녀가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라서. 자신이 느끼는 사랑과 흥분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그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물론, 그렇게 쓰여진 이 책이 '연애를 하고 싶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귀엽다는 생각을 마흔번쯤 한 것 같다. 나는 소설을, 책을 사랑해서, 그걸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재미를 알려주고 싶다. 아우, 이 좋은 거, 왜 몰라, 이거 정말 좋단 말이야, 하는 기분. 해나 프라이에겐 그것이 수학이었다. 수학 진짜 좋단 말이야, 수학 진짜 짱이야, 이거봐, 이렇게 사랑에 대한 것도 다 증명할 수 있잖아, 하면서. 음.. 그렇다면 나도 귀여운걸까?


무언가 강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랑하는 것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나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다. 내가 사랑하므로 너도 사랑해야해! 라는 강압적인 뉘앙스가 아니라, 아, 이거 정말 좋단 말이야,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게 진짜 좋다. 내내 웃음이 난다. 


뭐가됐든, 역시 사랑이 답인가....

그러나 이 수많은 확장 형태나 사례에서도 근본적인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 가끔씩 맞닥뜨리게 되는 민망한 거절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편이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앉아서 다른 사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먼저 다가가는 편이 낫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마음에 드는 이에게 다가가길. 그리고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길. 수학이 증명하고 있으니까. (p.66-67)

기간이 짧든 길든 싱글로 지내본 사람들이라면 특별한 인연을 찾는 일이 가끔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제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몇 년 동안 연속해서 따분한 남자들이나 정신 나간 여자들과 연애를 하다보면 좌절하고 실망하며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이 반드시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오랫동안 싱글로 지내온 피터 배커스라는 수학자는 2010년에 자신과 데이트를 할 잠재적인 여자친구의 수보다 은하계에 존재하는 지적인 외계 문명의 수가 더 많다는 계산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p.15-16)

"사랑은 한 여성과 다른 여성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p.28)

개인적인 취향과 선호도 목록은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검색 결과를 걸러내기에 이상적인 요소다. 그러나 약 80년에 걸쳐 인간관계를 연구해온 과학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개인의 데이터를 사용해서는 커플이 얼마나 잘 어울릴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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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5-13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처럼 우리가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을 잘 알려줄 것 같네요ㅎ

다락방 2016-05-13 08:49   좋아요 0 | URL
재미있었어요. 방정식하고 그래프 나올 때는 역시나 멘붕이 올 것 같아 건너뛰었지만.. -_-

웽스북스 2016-05-1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연애할 일 없(어야하)는 유부녀는 읽을까요 말까요?

다락방 2016-05-13 09:00   좋아요 0 | URL
귀여운 소품같은 책이라서 읽는 재미가 있어요. 뭣보다 작가가 수학에 대해 흥분하는 게 초귀여움 ㅋㅋ 그렇지만 이 책의 내용상으로 보면 웽님은 이미 다 터득한 것들입니다. 성숙한 여자니까요.. ㅎㅎㅎㅎㅎ

수퍼남매맘 2016-05-13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딸에게 읽히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중3이 읽어도 될 만한 책일까요? (수위가 걱정되어서)

다락방 2016-05-13 23:13   좋아요 0 | URL
수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읽게하셔요!!
 















아.. 이 책을 요즘 읽는 중인데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여자들이 남자에 의해서 잔인하게 살해당하는데, 그 잔인한 장면이 너무 끔찍해서 가슴이 아프기도 하지만, 그녀들이 너무나 '좋은', '괜찮은' 사람들이라걸 알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이런 말은 물론 잘못된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죽음이 가슴 아프지 않냐'라는 되물음이 올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진짜 이렇게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칼에 찔려 난도질을 당하면서,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할 어린 아이들을 걱정하고, 막 낙태한 미성년자가 지금 이 자리를 떠나 안전한지를 확인하고, 칼에 찔린 개 때문에 운다. 이 여자들이 자기가 당하게 될 고통 앞에, 내가 죽어서 어쩌나, 를 생각하기보다, 다른 이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염려한다. 그리고 다른이들이 당한 고통 때문에 운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녀들이 그렇게 한다.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고 머리가 멍해지면서도, 그녀들은 그렇게 한다. 아, 너무나 눈물이 난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과 공감과 애정과 예의를 가진 여자들을, 남자는 잔인하게 죽인다.


이 책의 절반정도를 넘겨 읽었는데, 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그녀는 하고 싶은 말들을 정교하게 잘 해내고 있다. 남자들은 항상 여자들을 죽여왔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잔인한 죽음 앞에 무방비하게 놓여진 그녀들이 얼마나 한 명 한 명 괜찮은 사람이었는지를, 그리고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까지를, 사소한듯 하지만 사소하지 않게 중요한 메세지들을 꼭꼭 잘도 박아두었다. 살인자는 여자들을 죽일 때마다 그녀들을 죽이는 이유가 그녀들이 '빛나서'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랬다. 그녀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빛나는 여자들이었다. 삶을 열심히 살고자 했고, 그래서 치열하게 살고 있었고, 애정과 공감과 배려를 갖춘 자들이었던 거다. 



후.. 여자주인공 커비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만큼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를 안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걷는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개를 그 곳에 두고 오는 게 아니라,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자신의 개를 안고 걷는다. 어휴.. 진짜 읽다보면 사람은 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기 직전의 개가 자신의 주인을 살해하려는 남자를 공격하는 것에도 놀랐지만, 대체 이 사람들은, 뭔가, 어쩌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인가 싶어진다. 아..사람은 뭘까? 인간은...도대체 뭘까? 너무나 괜찮은 인간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고, 아니 존재 했었다고 계속 말하고 있어서 펑펑 울고 싶어진다. 





빌어먹을 항상, 여자들은 살해당한다고.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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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1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1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몬스터 2016-05-11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은 공감지수라고 해야하나? Empathy level이 참 높으신듯해요. 주위에 좋으신 분들이 참 많으실 듯 합니다

다락방 2016-05-11 23:07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오늘,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여럿이다, 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제 공감능력 때문인가 봅니다. 몬스터님 댓글 덕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힛
:)
 

"넌 정말이지 낭비가 심해, 아론." 페기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은 누가 가까이 다가오면 반가워할 거야. 너는 그 여자의 속셈을 알아보느라 분주하지."

내가 말했다. "어떤 여자의 속셈을 말하는 거야?"

"넌 그것조차 보지 못해. 알아차리지도 못한다고. 넌 그 여자가 낭비되도록 내버려 두지."

"누가 낭비되게 내버려 둔다는 거냐고? 지금 루이스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pp.264-265)

















토요일에 일자산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산에 갔다며.

응.

아카시아 꽃 많이 피었지?

못봤는데? 냄새도 안나던데?

아빠 친구가 일자산 갔다가 아카시아꽃 많이 피었다고 사진 찍어 보내줬던데?

아 나는 너무 앞만 보고 갔나? 못봤어.

아니 어떻게 그걸 못봐?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곰곰 생각해봐도 내가 아카시아 나무를, 꽃을 본 기억이 없다. 어떻게 그랬을까? 피지 않아서 못본걸까, 피었는데도 못본걸까? 아무리아무리 떠올려봐도 아카시아 나무가 기억에 없다. 


일요일에 다시 일자산엘 갔다. 아카시아 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했지? 하고 산에 오르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아,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못보고 지나쳤을까 싶었다. 아카시아가 지천이었다. 여기저기 온통 아카시아나무였고 꽃이었다. 달큰한 냄새까지 났다. 아카시아 껌, 그 냄새다, 했다. 게다가 윙윙 들리는 벌들의 소리. 머리 위로 벌들이 아주 많이 날고 있었다. 자주 볼 수 있는 평범한 꿀벌부터 엄지손가락만한 큰 벌까지. 진짜 벌천지(!) 였다. 혹여라도 벌이 내게 달려들까봐 쪼그라들 정도로 벌이 많았고, 시선 닿는 곳마다 아카시아 꽃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걸 못보고 갔던거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대체 나는 뭘 보고 간거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갔길래 산을 온통 가득 채운 아카시아나무를 못보고 지나친거지? 한두그루도 아니었는데?



그러자 '앤 타일러'의 책 속 문장이 생각났다. 나는 아카시아를 낭비되도록 두었구나, 싶어서. 이렇게 보란듯이 피어서 자기 향을 피워내고 있는데,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치다니, 아카시아는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성실히 해내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의 몫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아카시아 나무를, 내가 몰랐다. 내가 아카시아 나무를 낭비하고 있었다. 아카시아 꽃을 낭비한 채로 두었던 거구나.


어쩌면 아카시아 나무에 대한 것만은 아닐 거다. 나는 아주 많은 것들을 모르는 채로 지나치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어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스쳐지나갈 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주 많은 것들을,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을 낭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누군가가 나를 낭비하고 있는 채로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넌 그 여자가 낭비되도록 내버려 두지, 라는 페기의 말이 자꾸만, 자꾸만 생각난다. 




연휴동안 슬픈 일을 겪었던 친구가 아침에 내게 글을 써달라고 했다. 내게 위로 받고 싶다고 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친구는 나를 낭비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달라고 말하다니. 내가 글을 쓰는 게 지금의 친구에게 좋은 일이라면, 나는 그 일을 할 수 있다. 아울러 다른 친구에게도 얘기하고 싶었다. 주말에 내가 그 친구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을 찾고, 손을 내밀수 있는 만큼 내밀었으면 좋겠다. 나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을 낭비되게 두지 말고, 자신의 슬픔의 무게를 덜어내는 데 한껏 이용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가 소중한 사람에게 낭비되지 않아야 한다. 




토요일 밤늦게 본 『아이가 다섯』은 무척 좋았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고 성장한 성숙한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하고 있다. 안재욱은 재혼할 생각이 없다면 나쁜 놈입니까, 라고 물었고, 소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도 아이들 때문에 재혼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우리의 상황은 다른 연인들과 다르니까, 라며 안재욱의 말을 이해했다. 안재욱은 아이들이 다 크면, 그런데도 우리가 계속 같은 마음이면 그때 함께 살자고 말했다. 소유진의 막내가 어려서 막내가 스무살이 되려면 14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자, 안재욱은 자신이 기다리겠다며, 그때까지 좋은 남자친구가 되어줄게요, 했다. 와- 이 둘의 대화가 너무 좋았다. 이해해요, 기다릴게요, 좋은 남자친구가 되어줄게요, 라는 모든 말들이 다 좋았다. 게다가 섣불리 영원을 맹세하는 것도 아니고, 그때에도 우리가 여전히 같은 마음이라면, 이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14년 후면 쉰이 될텐데, 많이 늙겠네, 라는 얘기를 하면서 소유진은 일본 출장 갔을 때 먹으면 7년씩 젊어 진다는 달걀 얘기를 꺼낸다. 우리가 같이 살게 될 때, 그때 거기가서 그 달걀을 두 개씩 먹고 14년 젊어지자고, 그리고 함께 살자고. 전경린의 「부인내실의 철학」이 한 구절이 이와 같다.
















"......당신은 아이들이 언제 다 자란다고 생각해요?"

"열여덟 살. 둘 다 열여덟 살을 넘기면 다 키운 거야......"
"나보다는 당신이 늦겠네요."
"나를 기다려줄 거야?"
희우는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나 기다려줄 거야?"
"당신이 지금이라고 할 때까지. 얼마든지...... 당신 아는 사람들이 다 죽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다 죽고 이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을 때까지......"
"당신의 말은 늘 나를 놀라게 해. 당신 몸처럼."
기윤은 희우의 뒷목덜미에 입을 맞춘다.
"그때가 되면 우리 북해도로 여행을 가요. 그곳엔 하나 먹을 때마다 7년 젊어지는 검은 계란이 있대요."
"하하. 그런 이상한 계란이 있다고?"
"틀림없이 있어요. 7년씩 젊어진다는 검은 계란이."
"정말?"
"정말이라니까요. 북해도에 눈이 있는 만큼이나, 온천이 있는 만큼이나 확실히 있어요. 우리 그곳에 가면 검은 계란을 똑같이 두 개씩만 먹어요. 그리고 함께 20년만 더 살아요."(전경린, 부인내실의 철학 中)



아이가 다섯의 드라마 작가는 이 소설을 읽고 저런 대사를 써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랬을 것 같다.....음... 어쨌든,


이 남자와 이 여자는 참 성숙한 사랑을 하는구나, 싶었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다면, 드라마속의 골프선수 사랑을 재미있게 봤을것 같은데, 그 사랑이 더 눈에 들어왔을 것 같은데, 지금은 확실히 조곤조곤하고 다정하게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귀기울여주는 쪽에 마음이 끌린다. 멋지다. 안재욱이 드라마상에서 젠틀해서 너무나 좋다. 게다가 소유진이야말로 매력이 터지는데, 사내연애를 숨기고 있는 그들앞에 차대리가 팀장님인 안재욱을 좋아한다고 소유진에게 말한 것이다. 팀장님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자기는 천천히 팀장님에게 다가갈거라고 한다. 그러면서 회사 일로 모든 부서원들이 안재욱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때, 소유진에게 '내가 조수석에 앉게 도와줘요' 라고 말한다. 그러나 차대리가 안재욱 차의 조수석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이미 소유진이 타고 있었다. 내게는 이 장면이 아주 놀라웠다. 소유진이 괜히 착한척 하면서 뒷자리에 앉았다면 그건 그대로 서운할 사람이 생겼을 거다. 안재욱은 안재욱대로, 그리고 양보한 소유진은 소유진대로. 그러나 소유진은 자신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멋져! 크.


이십대 중반에 내게는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같이 근무하던 다른 여직원이 내게 그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그래서 회식자리에서 그에게 고백할거니 그를 불러달라 말했을 때, 나는 가서 친절하게 잠깐 나가보라고 말했다. 그때 그 여직원은 그에게 '너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거절을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심한 그녀를 위로했는데, 아아 그때의 내가 너무나 바보같다. 소유진으로 치자면 조수석을 양보한 셈이다. 으윽. 그래놓고 나는 또 얼마나 마음 아파했었나. 병신... 나는 그때 그녀에게 '나도 그남자 좋아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녀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그에게 다가섰어야 했는데..모지리 모지리 모지리.. 나는 그때 왜!! 그녀에게 그를 내 마음대로 양보한걸까. 왜 착한척 했을까... 어휴 바보같다 진짜... 그랑 사귀지 못해서 바보같은 게 아니라 시도조차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난 내가 바보같다는 거다. 소유진이 그러했듯 자신감을 갖고 내 감정을 숨기지 말했어야 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당시 친했던 형과 술을 마셨는데, 시간이 지났고 서로의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렸으니 말했었다. 형, 내가 그 때 그 친구를 좋아했었어요, 라고. 그때 형이 말했다. 왜 진작 말 안했냐, 걔도 너 좋아했는데, 라고. 둘이 담배 피다가 그가 말했었다고 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아니 이 병신은 왜 또 이대로 지 감정을 숨겼을까...뭐, 안될라고 그런 거겠지. 결과적으로 그와 어떻게 되지 않았던 것은 잘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의 내가 됐을 수 있었던 걸테니. 그를 만나서 좋다고 고백하고 사귀었다면, 사람일은 모르는거지만, 혹시 그와 결혼이라도 했다면, 아... 내가 그랬다면 삼십대에 사랑했던 남자를 만나지 못했을테니.. 과거에 바보였던 게 다행이었던 것 같다... 음....





혼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결국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혼자라고 생각한다. 내 곁에 있으면서 내가 누군가와 싸울 때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내 편인 사람이 24시간 365일 내 곁에 붙어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그 사람이 없을 때 싸우지 못해 얻어터지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나 스스로도 누군가와 싸울만큼 강해져야 한다. 여행도 마찬가지. 지금 내게 너무나 좋은 여행친구가 있지만, 언제까지나 이 친구와 함께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이 좋게도 그동안은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이 일치했고 시간을 같이 낼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란 법은 없다. 우리가 시간이 맞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이 일치하지 않을 때 내가 여행을 포기하기 보다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내가 갈 수 있으려면, 내가 혼자서 여행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뭐가 됐든 나는 혼자서도 뭐든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스스로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사랑하고 더 많이 돌아다녀서 내가 할 수있는 것들을 해내면서 살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한다.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다 할 수 있도록, 혼자서도 부족한 게 없을 수 있도록. 누구 때문에 혹은 누가 없어서 포기하는 일들이 생기기보다는 혼자서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낭비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당신도 당신을, 그리고 나를,

낭비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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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2016-05-10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내 맘.

소유진 얘기도.

다락방님의 서로를 낭비했던 그 예전 얘기도.

절절히 다가오는...


다락방 2016-05-11 09:12   좋아요 0 | URL
아 얼룩말님... 이 글이 절절하게 다가온다면, 얼룩말님은 지금 어떤 시간을 보내고 계신겁니까.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