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 - 10인의 예술가와 학자가 이야기하는, 운명을 바꾼 책
어수웅 지음 / 민음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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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분명 의미가 있다고, 책이 삶과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내가 책을 읽는다는 사실이 뿌듯해졌다. 앞으로도 계속 읽고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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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4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05-25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마음으로 즐겁게 읽었습니다^^
책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다락방 2016-05-25 08:35   좋아요 0 | URL
고양이라디오님이 저보다 먼저 읽으시고 즐거이 리뷰 쓰신 거 봤어요. ㅎㅎ
책은 분명 의미가 있죠. 책 속의 열 사람이 그걸 알고 있고 말해줘서 좋더라고요. 제가 책 읽는 게 좋고요. 힛. 앞으로도 우리 계속 읽어요!

moonnight 2016-06-01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이 책 샀어요. 아직 못 읽었는데 기대됩니다^^ 저자가 제가 좋아하는 분이에요. 호호♡

다락방 2016-06-02 09:47   좋아요 0 | URL
오! 저는 이 책으로 처음 접한 이름인데 문나잇님은 이미 좋아하는 분이란 말입니까! 크- 문나잇님 멋지네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어요. 힛.
 

˝야, 너도 밥 같은 건 이제 네 손으로도 해 먹을 줄 알아야지! 귀하게 컸다고 언제까지 받기만 하냐. 아비가 됐으면 식구부터 챙기고. 어떻게 너 혼자 오냐. 너도 참 모질다.˝ (『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비밀들>, p.197)


김이설의 소설 <비밀들>에서 베트남 여자와 결혼한 남자는 아내가 아파 밥을 먹지 못해 이웃집에 밥을 얻어 먹으러 온다. 아내가 아파 밥을 먹지 못하는 건, 아내가 아파서 자신의 마음도 아파 못먹는 게 아니라 아내가 아파 자신의 밥을 차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아파 밥을 먹지 못한다고 이웃집 아저씨가 우리집 와서 먹어라, 한것. 이에 그 집 아주머니가 저렇게 말한다. 야, 밥 같은 건 이제 네 손으로도 해 먹을 줄 알아야지, 하고. 아니 진짜, 언제까지 받기만 할거야? 소설속에서 그는 아이가 있는 아버지이지만, 설사 아버지가 아니라도 다 큰 성인 남자라면 자기가 먹을 밥을 자기가 차려 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일전에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에서 에쿠니 가오리가 여행을 간다고 하자 남편이 "그럼 내 밥은?" 하고 물었다는 일화가 나왔었는데, 남자들아, 왜 밥을 못차려 먹어요???? 왜야???? 왜지??????? 당신 입이고 당신 배에요, 굶기 싫으면 당신 손으로 차려 먹어요... 엄마가, 아내가, 누나가 니네 밥 차려 줄라고 사는 거 아니에요... 그걸 말해줘야 알아요?



아, 갑자기 김이설 소설의 저 부분이 떠오른 건 빡치는 시 두 편을 내리 읽었기 때문이다. 



공갈빵


                    손현숙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

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오다가 우리하

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

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나,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

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

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

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

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신 같았어



그러면서 오늘까지 우리 엄마는 아버지의 밥때를 꼬꼭 챙기

면서 내내 잘 속았다, 잘 속였다, 고맙습니다, 그 아버지랑 오누

이처럼. 올해도 목련이 공갈빵처럼 저기 저렇게 한껏 부풀어 있

는 거야




다른 여자랑 팔짱 끼고 나갔다온 주제에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를 보자마자 밥을 달라고 한다.. 이 나라 남자들은 밥을 자기 손으로 차려 먹으면 지구가 망한다고 생각한걸까...




엄마는 출장중


                   김중식



또 석 달 가량 집을 비우신단다

산 사람 목에 거미줄 치란 법은 없는 모양이군, 나는 생각했다

집 앞이 집 앞이니만큼

질펀한 데서 허부적거리다가 저녁에 들어오니

그저께 밥상보 위의 흰 종이


머리라도 자주 빗어넘기고

술 한잔도 두세 번에 나누어 마시거라

엄마 씀.

잠은 좀 집에서 자고


아무리 이래도 저래도

한世上 한平生이라는 각오를 했지만

내 삶이 점차 생활 앞에서 무릎꿇고 있다

한량 생활도 사는 건 사는 건데 이건 아닌 것 같고


치욕 없이 밥법이할 수 있으리요마는 나는 이제 밥벌이 앞에서

性고문이라도 당할 용의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밥상 앞에서

먹고 사는 일처럼

끊을 수도 있는 인연이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감기 들면 몸살을 앓으시는 어머니

아! 한가하면 딴 생각 드는 법

또 석 달 가량 나는 自由다, 라고 외치자꾸나, 내 젊음에 후회는 없다, 라고

그런데 냉장고에 양념된 돼지 불고기가 있어서 그만

엄마, 소리만 새어나왔다.



밥벌이도 엄마가 하고 밥상도 엄마가 차린다. 나도 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잘 먹기를 바라는 마음. 엄마는 아마 그런 마음으로 아들을 염려하고 밥상을 차려놓고 그리고 밥벌이 하러 나간 것일게다. 그래,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안다. 집에서 술만 마시는 아들이 걱정되어 술 한잔을 세 번에 나누어 마시라고 쪽지를 써놓고 밥벌이 하러 나간 엄마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엄마가 없는 3개월간은 자신의 밥상을 자신이 차릴 수밖에 없겠지만, 이 시를 읽노라니 그 밥상이 제대로 된 밥상이라기보다는 그저 술상일 확률이 클 것같다. 생활 앞에서 무릎꿇는다고 표현하는 시인의 처지가 딱하지만, 딱한데, 나는 내내 김이설의 소설 인용구만 생각났다. 



˝야, 너도 밥 같은 건 이제 네 손으로도 해 먹을 줄 알아야지! 귀하게 컸다고 언제까지 받기만 하냐. "

















워낙에 시를 잘 못읽는 사람이라 그런지 실린 시도 딱히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고 그에 대한 감상도 딱히 와닿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러나 형식만은 좋구나 싶어서 이렇게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에 드는 시 몇 편을 추려내어 그에 따른 나의 감상을 덧붙이는 일. 그리고 위의 두 시도 선택해서 내 식대로 감상을 적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시에 대한 감상을 적기 보다는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공감으로 감상을 적어나갈테고-어쩌면이 아니라 확실하겠구나-, 그래서 나는 이 시들을 이 책에서 황인숙이 그랬듯이 좋은 감상으로 써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이래서 나는 시를 못쓰고 못읽는구나 새삼 깨닫는다. 등장인물이 되려고 하니 시를 시로써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내용으로 감상하려고 해서. 난 위의 두 시들이 너무 화가나.....하아- 그런데 이 책속에서 황인숙은 위에 인용한 첫 시 <공갈빵>에 대한 감상으로는 '재밌는 시' 라고 한다.. 두번째 시 <엄마는 출장중>은 '재밌지만 속살이 쓰라리'며, '독한 마음을 먹어도 해결이 안되는 '생활'의 징그러움' 이라 표현한다. 


난..

나는...

시를 읽기에 맞춤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아......




그렇게 책을 읽어가다가 왈칵, 잠시 페이지에 시선이 멈추어 고정되었던 글이 있다. 시에 대한 황인숙의 설명 부분이었는데, 이런 구절이 나오더라.



"어떻게 사랑은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 대사를 읊은 주인공처럼 풋푹하게 젊은 남자가 아니더라도, 사랑의 백전노장이 아니라면, 대부분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게 사랑의 속성이라는 환상을, 미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모든 감정처럼, 사랑이라는 감정도 계속 움직인다.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이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이지만, 그 흐름이 향하는 "사랑하는 이"가 바뀔 수 있다. 그럴 뿐 아니라 그 강물의 온도도 늘 같지 않다. 어느 날은 90도까지 올라가기도 하지만, 대개는 60도나 70도고, 때로 30도로 내려가는 날도 있다. 물은 100도가 돼야 끓는다. 99도에도 끓지 않는다. 펄펄 끓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90도의 사랑에도 사랑이 변했다고 느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늘 움직이고 변하게 마련인 사랑의 속성에 마음이 불안하게 요동친다. (p.176-177)



아아. 갑자기 뭔가가, 내가 잡으려 했지만 잡지 못한 무엇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은 감상이다. 펄펄 끓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90도의 사랑에도 사랑이 변했다고 느낀다, 라는 구절에서. 그렇구나. 그런거구나. 그래, 그런 거였어,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나는 왜 사랑이 변했냐고 울부짖기 보다는, 100도까지 펄펄 끓었었구나, 하는 것에 감사해야겠구나. 늘 비슷하게 유지되는 60도나 70도이기 보다, 100도까지 끓기를 선택했고, 그렇게 된거였구나, 하고. 이거야말로 가슴 쓰라린 일이구먼..



이런 근사한 감상이 나온 시는 이것.



냇물에 철조망


                       최정례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이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이다

어제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바람이 불었는데

한 가지에 나뭇잎, 잎이

서로 다른 곳을 보며 다른 춤을 추고 있다

저 너머 하늘에

재난 속에서 허덕이다가 조용히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모습으로

구름도 흘러가고 있다

공중에서 무슨 형이상학적 추수를 하는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펄펄 끓었다가 90도가 되어 한쪽이 변했다 느껴졌는데 상대가 여전히 펄펄 끓고 있다면, 그렇다면 펄펄 끓던 쪽은 그대로 계속 끓어 끓어 쫄아버리게 되는걸까..그러다 냄비도 다 타고...불나서 타버리게 되나...소방차 불러야 되나.....



그리고 이 책 한 권을 통틀어 가장 좋은 시는 아래에 옮길 '김경미'시인의 시다. 일전에 <쉿, 나의 세컨드는>이라는 시를 좋아했었는데, 어쩌면 시도 취향이란 것이 있는걸까. 좋아했던 시를 쓴 시인의 시가, 이번에도 또 좋으네.



봄, 무량사



                      김경미



무량사 가자시네 이제 스물몇살의 기타소리 같은 남자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어 무엇이든 깨도 좋을 나이

겨자같이 싱싱한 처녀들의 봄에

십년도 더 산 늙은 여자에게 무량사 가자시네

거기 가면 비로소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며



늙은 여자 소녀처럼 벚꽃나무를 헤아리네

흰 벚꽃들 지지 마라, 차라리 얼른 져버려라, 아니,

아니 두 발목 다 가볍고 길게 넘어져라

금세 어둡고 추워질 봄밤의 약속을 내 모르랴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좀 짧게 자른 머리를 차창에 

기울이며 봄마다 피고 넘어지는 벚꽃과 발목들의 무량

거기 벌써 여러번 다녀온 늙은 여자 혼자 가네

스물몇살의 처녀, 오십도 넘은 남자에게 무량사 가자

가면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 재촉하던 날처럼




아, 좋다. 좋구먼.. 크.. 좋다.


올림픽공원 생각난다. 일전에 아빠랑 올림픽공원 근처를 걸으면서 '아빠, 내가 올림픽공원에 데리고 온 남자가 몇인줄이나 알어?' 했더랬다. 그러자 아빠는 '좋겠다, 넌 남자 바꿔서 계속 가도 되잖아, 싱글이라. 난 안되는데..' 라고 하셨더랬지...아빠.... 

김경미 시인에게 무량사는 나에게 올림픽공원 같은건가.....



그런데 저 마지막연좀 보라지.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라니. 아아. 인생은 어차피 혼자 가는 거야... 김경미 시인이 자신의 시, 쉿 나의 세컨드는, 에서 그랬었지. 새끼 손가락을 들며 나는 세상의 이거야, 이거, 라고.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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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4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조기후 2016-05-2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림픽공원이라면 다락방님과 술먹고 토하고 술먹고 토하자고 백만년전에 약속했던 그 곳이군요 ㅋㅋㅋㅋㅋ 아 아닌가 음.. 그냥 술먹고 토하자고 했지 올림픽공원은 아니었나 ㅋㅋㅋㅋㅋ 저는 왜 올림픽공원에 가기로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ㅋㅋㅋ 그나저나 우리는 무려 토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6-05-24 11:0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술멈고 토하고 술먹고 토하자고 약속한 건 기억나는데 그게 올림픽공원이었는지는 저도 잘 기억이 안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올림픽공원도 좋죠. 좋아요. 요즘엔 좀 많이 덥겠지만요.
우리 좀 멋진 사람들이네요. 토하자고 약속하다니 ㅋㅋㅋ 남들이 하지 않는 약속을 하는 우리 ♡ 건조기후님과 나♡

2016-05-24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4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4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의욕이 또 화르르 불타오르는데 [더 컬러 퍼플]이 절판이더라... 아쉽.....

이 책이 딱히 좋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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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는 45년간을 부부로 살았다. 서로에게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졌다. 남편이 찾는 사전이 창고의 어디쯤에 있는지 아내가 알고 아내가 오전에는 늘 개를 데리고 산책한다는 것을 남편이 안다. 서로가 서로의 사소한 습관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는 이들의 일상은 견고하다. 둘이 마주앉는 일이 그리고 이야기나누는 일이 나란히 눕는 일이 이들에겐 너무나 익숙하다. 이런 부부가 결혼45주년 기념 파티를 앞두고 있는데, 파티가 열리기 일주일 전, 남편 앞으로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에는, 남편이 결혼 전 사랑했던 여인의 시체를 찾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남편은 편지를 읽고 과거로 빠져든다. 과거의 여인과 함께 산에 올랐던 일, 그곳에서 그녀를 잃게된 일 같은 것들을. 그리고 지금 이렇게 거동이 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위스의 어느 곳, 그녀가 묻혀있는 곳을 가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하지만, 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아내와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혼자 일어나 과거의 여인의 사진을 찾아 다락을 뒤진다. 과거로 돌아간 그는 자꾸만 과거의 그녀 얘기를 꺼내고, 잘 들어주고 위로해주려던 아내는 어느 순간 서운하다가 화가 난다. 이제 더이상 그 이름을 내 앞에서 꺼내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의 견고한 일상은 흔들리고 말았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과거의 연인 얘기를 듣다가 묻는다. 만약 그때, 둘다 그 산에서 살아돌아왔다면, 당신은 그녀랑 결혼했을까? 남편은 그렇다고 답한다. 아마 그녀와 결혼했을 거라고.







하아...45년을 함께 쌓아온 단단한 일상인데 그보다 오래전의 존재가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서는 이 견고한 일상을 흔든다. 이 일은 아내에게 큰 상처가 된다. 45년이면, 너무나 길잖아. 정말 길잖아. 결혼 45주년 파티는 하루 이틀 앞으로 다가오는데, 파티에 쓰일 곡들을 고르는 것도 아내의 몫이고, 아내는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평상시로 돌아와주길 바라지만, 설사 그렇다해도 아내가 받은 상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파티때는 아내를 만나서 다행이라 말하고 아내를 사랑한다 말하고 그래서 아내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남편이지만, 아내는 남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편하지도, 안정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당연한듯, 《올리브 키터리지》가 생각난다. 오래전 바람피웠던 남편에게 '당신 아직도 그녀 생각해?' 묻던 아내가. 그리고 우리의 심장에게 더이상 이런 일을 시키지 말라고 말하던 아내가.


"말해요." 몹시 침착했다. 그녀는 한숨마저 내쉬었다. "제발, 얘기해줘요." 제인이 말했다.

어두운 차 안에서 가빠진 그의 숨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녀의 숨결도 거칠어졌다. 제인은 말하고 싶었다. 이런 일을 겪기엔 우리 심장이 너무 늙었다고. 이런 일을 계속 우리 심장한테 시키면 안 돼. 당신 심장이 이런 일을 견뎌낼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 (p.246)


"그 여자 죽었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죽었다면 스콧이나 메리한테 소식을 들었겠지. 그러니 안 죽은 모양이야. 하지만 소식은 전혀 몰라."  

"당신 가끔 그 여자, 생각해요?" (p.247) 



그가 대답하지 않자, 장이 뒤틀리는 듯하더니 속에서 해묵은 한 자락 고통이 진저리를 쳤다. 그것은, 그 특정하고 친숙한 고통은 제인을 얼마나 피로하게 했던가. 찐득한, 더러워진 은빛 액체가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더니, 이내 퍼져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크리스마스 전구들도, 가로등도, 갓 내린 눈도. 모든 것의 사랑스러움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p.245)
















나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 나와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옆에 눕던 사람, 서로의 작은 습관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던 사람, 거실이나 부엌이나 욕실에서 부딪히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사람. 그 사람에게 잠깐 누군가 찾아들고, 그 누군가 찾아들었던 일 때문에 나와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면, 나는, 그걸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설사 그가 '잠깐동안'이었다 하더라도, 그 잠깐동안이 우리의 함께한 일상을 파괴했다면, 내가 그걸 지우고 사는 게 가능할까?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는 게, 그게 가능할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지 않을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내자, 라고 백 번 다짐해도,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슬프다.


아니, 그런데, 이 대단히 훌륭한 책인 《올리브 키터리지》를 써낸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른 장편 소설이 지난주에 번역되어 나왔다!!!!!!!!!!!!!!!!!!!!!!!!!!! 꺅 >< 

내가 진짜 얼마나 기다렸는데!!!!!!!!!!!!!!!!!!



















내가 진짜 나오자마자 너무 좋아서 당장 사겠어! 하고 장바구니를 비우려다가, 생각해봤다. 지금 당장 읽고 싶긴 하지만.. 안읽은 책 너무 많지 않아? 좀 참아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지금 여행경비도 모아야 하는데...책 사는 데 쓰는 돈을 좀 아껴야하지 않겠어? 사두고 안읽은 책만으로도 2년은 읽을 수 있겠는데..... 하루키의 신간인 라오스 책도.... 다음에 사도 되는거잖아? 응?

















나의 계정에는 중고로 책을 팔아 입금된 돈 12,600원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둘 중에 한 권을 사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을, 환급 신청했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여행경비하자...하고. 인생.......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하루키... 우리 조금 있다가 만나요. 그렇지만 꼭 만날 거에요. 




4월달에, 친구들과 함께 모여 술마시고 있는데 남동생으로부터 갑자기 뜬금없는 문자메세지가 왔었다.


<갑자기 스토너가 참 대단한 소설이란 걸 느낀다. 가슴 울림이 있어.>



아니, 얘는 갑자기 왜이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음날 너 갑자기 왜그랬냐 물어보니, 소설중 캐서린이 스토너 앞으로 자신이 쓴 책을 보내는데 헌사가 쓰여진 게 생각났단다. 그 장면이 너무 좋았고 짠했단다. 그게 생각나니 이 소설 진짜 좋구나 싶었다고.

나보다 먼저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를 읽던 남동생이 '쥐 좀 안나왔으면 좋겠다' 했는데, 내가 읽다보니 무슨 말인 줄 알겠더라. 그래서 나도 남동생에게 '쥐 좀 그만나왔으면 좋겠어' 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남동생은 이렇게 답했다.


<이자식 일부러 이렇게 쓴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남동생은 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군시절 장교식당 취사병으로 있다가 팔뚝만한 쥐랑 눈이 마주쳤던 것부터 시작해서 쥐에 대한 끔찍한 장면들 몇 개가 머릿속에 남아있는데, 스티븐 킹 소설에서 쥐를 만나니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고. 




지난번에도 한강의 소설에 대해 친구들과 수다떨었던 얘기 쓰면서 말했었는데, 같은 책을 읽었던 사람과 책에 대한 수다를 떠는 것은 진짜 즐겁다. 누구와도 가능한 대화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더 좋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건그렇고, 함께 산다는 게, 함께 오래 산다는 게 대체 뭘까, 싶다. 45년을 살아도 한 순간에 저렇게 휘청일 수 있는건데.... 인생.......



당신 가끔 그 여자 생각해요? 라고 물을 수도 없고 대답을 듣기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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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3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3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3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3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클 2016-05-23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페이퍼들을 맨부커상 페이퍼부문에 추천합니다 ^^

다락방 2016-05-23 16:26   좋아요 0 | URL
어머. 야클님도 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조기후 2016-05-23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읽은 책 너무 많지 않아? 좀 참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ㅋㅋㅋㅋㅋ 하지만 부자가 아니니까 안 읽은 책 생각도 잠깐이나마 하는 거 보면 부자가 아니라서 다행인걸까요 뭘까요. ㅎㅎㅎ

다락방 2016-05-23 16:27   좋아요 0 | URL
아 부자가 아니라서 다행인건가요? 저는 안 읽은 책이 천 권이든 만 권이든 역시나 같은 고민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신간이 계속 나오니까요. 그때마다 휘청휘청, 집에 안 읽은 책이 만 권인데, 어쩌지, 하면서 또 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몬스터 2016-05-23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그러더라구요.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아서 , 한 챕터가 끝나면 또 다른 챕터가 시작되는거라고. 그저 내 감정에 충실하며 카르페디엠 하는게 어떻까 하네요. 다락방님이 쓰신 책 읽어 보고 파서 자주가는 싸이트에서 eBook을 찾았는데 , 음네요. lol

다락방 2016-05-23 16:28   좋아요 0 | URL
으앗 몬스터님. 제 책이 이북으로는 나오질 않아서요 .. (시무룩)

괜찮으시다면 제가 보내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 수줍게 싸인해서 보내드릴게요. 히힛. 괜찮으시다면 주소 알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우편으로 슝- 보내드릴게요. 해외배송 환영이니까요. 아하하하핫.

2016-05-23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4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룩말 2016-05-23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들도 가끔..어쩌면 자주..다락방님을 생각하겠죠? ^^

다락방 2016-05-24 09:54   좋아요 0 | URL
그런 사람들도 있겠죠? 아마도요. 하아-

캐롤 2016-05-24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에이미 읽고 있는데 번역서가 나왔네 하고 보다가 여기 다락방님 공간까지. 저영화도 꼭 보고싶네요.
책도 쓰신 분이시군요!!! 다락방님 책까지 주문합니다^ 기대기대!!!

다락방 2016-05-24 09:55   좋아요 0 | URL
어머! 제 책까지 주문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캐롤님. 저도 예전부터 에이미 읽고 싶었는데 원서는 감히 엄두가 안나서요 ㅠㅠ 번역서가 나와 다행입니다. 저도 읽어볼게요!

무해한모리군 2016-05-24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책수다 떨고 싶다. 스토너에 대해 말하는 남동생 가지고 싶다.... 엄마 왜 난 남동생 안낳아줬어???라고 묻고 싶은 기분좋게 비오는 아침이네요 ㅎㅎㅎㅎㅎ 땡투도 누르고 휙~

다락방 2016-05-24 10:11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부터 평일에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는데 비가 와서 마음이 참 거시기한게...술 생각이 나요. 하아- 안돼, 그만 마셔, 마시지마... 혼자 다짐하는 비오는 아침입니다. ㅎㅎ
저보다 먼저 읽으시겠네요, 모리님!! >.<

2016-05-24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5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4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05-25 08:48   좋아요 0 | URL
넵!

젤리곰 2016-05-3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ㄷㄹㅂ님도 45년 후 보셨군요! (극장에서 곰방 내릴 것 같아서 퇴근하고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보러 갔던...) 영화 보는 내내 할아버지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고 싶었어요. 아옷.

다락방 2016-05-30 09: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ㅠㅠ
45년이나 함께 살았는데 그렇게 한순간에 휘청이다니,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ㅠㅠ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몹시도 서운하고 절망스럽더라고요 ㅠㅠㅠ 싫어... ㅠㅠㅠㅠ
 
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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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사람을 보고 이야기꾼이라고 하는구나, 라고 나는 스티븐 킹의 이번 소설을 보면서 생각했다. 출근하면서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내릴 역을 놓칠뻔했다. 잠깐 싸한 기분에 고개를 들어보니 양재에서 문이 열려있더라. 오오, 잽싸게 책과 가방을 들고 후다다닥 지하철 출입문으로 향했고, 그 잠깐동안 '나는 문에 끼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해서 쫄았다. 그러나 문은 좀 오래 열려 있었고 나는 무사히 내렸다. 이게 다 스티븐 킹 때문이야! 라고, 스티븐 킹을 원망했다.


일전에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읽으면서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스티븐 킹, 스티븐 킹 하는구나' 했더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왜 그의 소설이 그렇게나 많이 읽히는지,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겠더라. 이야기꾼이다, 천상 이야기꾼이야.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고, 게다가 스티븐 킹은 쓸데 없는 얘기를 하지도 않는다. 이야기 구석구석 할 말을 깔아 놓았다. 이번 책, 『별도 없는 한밤에』는 총 네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하나같이 다 기가 막혔다.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쓰게 됐는지, 영감이 떠올랐던 한 순간의 장면이나 기사들을 소설의 끝에 써놓았는데, 어쩌면 이야기꾼이라는 건 타고나는 게 아닌가 싶더라.



<1922> 는 가장 처음에 실린 소설이다. 한 남자가 유산으로 많은 땅을 물려받은 아내와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그런 아내한테 짜증이 나서 '아내를 죽인다'. 아내는 말하는 폼이 상스럽고 그래서 열네살의 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했다. 남편과 자주 싸웠다. 그리고 이 시골이 아닌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어했고, 남편은 이 시골에 머무르고 싶어했으며, 이에 자주 말다툼을 했고, 남편은 '아내를 죽였다'. 남편과 아내가 의견이 안맞아 싸웠는데, 남편이 아내를 죽였다. 그는 아들에게 '네 엄마를 죽이는 걸 도와달라'고 말했고, 아들이 보는 앞에서 엄마의 목에 칼을 댔다. 그리고 죽은 그녀를 집의 우물 안으로 던져버린다. 아내의 시체를 커다란 쥐가 와서 뜯어먹는 것까지 목격한다. 그가 아내를 죽인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고 그가 아내의 살해범으로 잡히진 않았지만, 아내를 죽인 그가 평온하게 잘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내를 죽인 후 그의 삶은 엉망진창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로 지독해진다. 어쩌면 그의 주변에 '여자를 죽인 남자'를 반드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범죄가 감춰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내의 실종을 조사하러 온 마을의 보안관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네도 이미 알겠지만, 나는 직감만 믿고 찾아온 게 아니야. 부부 사이의 문제야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 당연한 거 아닌가? 성서에도 나와 있잖아,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니 여자가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남편에게 배워야 한다고. 고린도전서 말씀이지. 성서가 내 보스라면 난 성서 말씀대로만 행할 거야. 그러면 인생도 참 단순해질 테니까." (p.85)



"자네도 알겠지만, 여자들하고는 가끔 입이 아니라 손으로 대화를 할 필요가 있어. 그래야 정신을 차리거든. 세상에는 흠씬 얻어터져야 고분고분해지는 여자들이 있어. 그러니 잘 생각해 봐." (p.95)



저런 보안관이 엄청나게 수사에 집중해 남편이 범인임을 알아냈다해도, 저런 분위기에서 남편에게 어떤 벌이 내려지게 됐을까? 그리고.. 성서에 정말 저렇게 나와있는 걸까?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대체 어떤 남자들이 여자의 머리일까? 왜 성서는 그렇게 말했을까? 알면알수록 성서는 신기한 것 투성이구나. 언제 한 번 정독해봐야 겠다. 어쩐지 반박할만한 많은 문장들이 그 안에 있을 것만 같다. 


소설 속에 임신한 소녀가 등장하는데, 이 소녀는 이런 말을 한다.



"보면 알겠지만, 내가 문제가 좀 있거든. 난잡한 계집애라나 뭐라나! 남자 친구는 도망쳤어. 걔도 난잡한 사내놈인데, 그 자식 욕은 아무도 안 하는 거 있지! 그래서 우리 꼰대가 날 감옥에다 쳐넣은 거야, 거긴 펭귄들이 지키는 감옥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세상에! 꼰대가 누구겠어, 우리 아빠지! 펭귄은 수녀복 입은 할망구들이고!" (p.179)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했는데 여자가 임신을 했고 남자가 도망쳤다. 여기서 왜 갇혀야 하고 난잡하다고 욕먹어야 할 게 그저 여자 뿐인걸까. 게다가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또다른 소녀 하나는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앞으로 공부하고 싶은 것도 있는, 밝은 미래를 꿈꿔왔는데, 임신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그 상황에 주저앉게 된다. 



섀넌은 눈보라 속으로 간신히 몇 걸음을 옮기고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삼각법을 할 줄 알았던, 그래서 어쩌면 오마하 사범학교 최초의 여자 졸업생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소녀는, 어린 연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말했다.

"자기야, 나 더는 못가겠어. 땅에다 눕혀 줘."

"아기는 괜찮아?"

"아기는 벌써 죽었어. 나도 죽고 싶어. 아파서 더는 못 참겠어, 너무 아파서." (p.190)



남편이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일어나고, 그 모든 일들은 비극이다. 아내를 죽인 다음에야, 여러가지 불행들이 닥치고 또 닥친 다음에 '내가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해봐야, 아내는 이미 죽었다. 남편이 죽였다. 불행한 사건들만 닥쳐오는 게 아니라 남편 스스로도 불행해진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빅 드라이버>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죽인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여자는 남자와 다투었다거나 남자가 자신을 화나게 했더나거 자신을 무시해서 충동적으로 죽인 게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살해한 남자를 죽인다. 강간범은 여자를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여자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강간범이 자신의 시체를 던져 버린 곳에서, 그녀는 깨어나,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들의 시체가 그 곳에 더 있음을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되고, 만약 그 강간범을 살려둔다면, 이 곳에서 다른 여자들이 또 강간당하고 살해당할 것이라는 걸 짐작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강간당한 여자임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뉴욕 포스트》같이 저속한 신문들은 테스의 10년 전 사진을, 즉 뜨개질 클럽 시리즈가 처음 출간될 무렵의 사진을 실을 것이 뻔했다. 그때 테스는 이십대 후반이었기에 짙은 금발 머리를 길게 길렀고, 미끈한 다리를 뽐내려고 짧은 치마를 즐겨 입었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저녁에 외출할 일이 있으면 뒤꿈치 부분이 끈으로 된 하이힐을 신곤 했는데 어떤 남자들은 그 구두를 '남자 꼬시는 신발'이라고 불렀다(물론 그 거인도 예외일 리 없었다.). 테스가 이제는 나이를 열 살이나 더 먹었고 몸무게도 9킬로그램이나 늘었고, 성폭행을 당할 때 거의 촌스러울 정도로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신문에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런 세부 사항은 삼류 신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기사의 문장 자체는 점잖을지도 모르지만(행간에는 선정적인 분위기를 살짝 흘릴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함께 실린 테스의 젊은 시절 사진에서 진짜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아마도 인류가 바퀴를 발명하기도 전에 만들어졌을 이야기를. 여자가 야하게 하고 다녔네……당해도 싸지, 뭐. (p.271-272)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하진 않으려고 했는데, 그냥 뒀다가는 또 다른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할 걸 생각하니 그대로 둘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여자는 강.간.범.을 죽인다'.


몇차례나 강간당하고 두드려맞고 스스로도 죽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깨어난 여자는,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 몸의 힘을 끌어모은다. 



또다시 의식이 흐려지려고 하자 테스는 손으로 자기 뺨을 후려쳤다. 일단 집에만 도착하면, 프리츠에게 밥을 주고 침대에 눕기만 하면(문을 모조리 잠그고 불을 모조리 켠 후에), 기절 같은 건 원 없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결코, 절대로, 맹세코. 당장은 계속 걸어야 했고, 차가 다가오면 숨어야 했다. (p.268)



아.. 몇 번이나 기절하고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면서 그녀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집에 돌아가서 고양이 밥을 줘야 한다는 거였다. 아, 이 여자들은 정말 얼마나 위대한지. 자신의 고통과 아픔과 두려움앞에 다른 존재를 걱정하고 염려한다. 남자가 무참하게 여자를 짓밟을 때, 여자는 그 상황에서도 다른 존재를 신경 쓴다. 자신이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할까봐 걱정되는 존재를. 아아 진짜.. ㅠㅠ 눈물이 난다. 


또한 이 소설에서 스티븐 킹은 강간당한 여자가 테스 하나뿐만이 아님을 말한다. 많은 여자들이, 대부분의 여자들이 강간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그녀의 복수를 알고도 입을 다물어준 조력자 역시 십대시절에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의붓아버지에게 여러차례. 얻어 터지고 맞고 강간을 당한 피해자들이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낼 수 없이 살아간다.



사람들은 두들겨 맞은 여자를 우습게 봤다. 특히 금요일 밤에는 더더욱. 아가씨, 누구한테 그렇게 얻어터진 거야? 뭘 잘못했길래? 남자한테 그 정도로 얻어터졌으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정도는 알 거 아니야?

그 생각을 하니 오래전 어디선가 들었던 농담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해마다 30만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얻어터지는 이유가 뭔지 알아? 왜냐면 여자들이……도대체가 …… 말을 들어 처먹질 않거든! (p.281)



그래서 여자는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강간범을 응징한다. 어두운 물속에서 썩어간 다른 여자들의 시체를 생각하며 그녀는 그 모두의 복수를 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성폭행을 막았다. 만약 내가 그녀의 복수를 알았다면, 그래서 그녀가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 역시 그녀가 사람을 죽였다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세상에 성폭행범만 골라서 응징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성폭행 하지마, 강간하지마, 라는 말을 들을 생각도 안하는 남자들이라니 직접적으로 두려움을 안겨주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강남역에 포스트잇 붙이는 걸로 그렇게 빼애액 해대는 남자들이라니, 남자들은 도대체가 말을 들어 처먹질 않으니, 강간하고 살해하면 얼마만큼 처절한 응징을 당하는지를 몸소 보여줘야, 그때야 비로소 말을 들어 처먹질 않을까.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여자는 결혼 후 27년이 지난 다음에야, 남편이 범죄자 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도 여러차례 여자들을 강간하고 죽인 바로 그 연쇄살인범임을. 27년간 사이좋게 살아왔고 둘 사이엔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아들과 결혼을 앞둔 딸이 있다. 아내가 자신이 연쇄살인범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남편도 안다. 내 앞에 앉은 이 남자가, 이제 드러났으니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려줄게, 라고 말하는 이 남자가, 나랑 27년간 함께 살아왔던 남자라는 사실에 여자는 앞이 깜깜해진다. 이걸 어쩌나 싶다. 경찰에 신고하게 되면 남편 말대로 자식들의 미래에 큰 장애가 될 것이다. 아이들이 평생을 강간살인범의 자식으로 살아야 한다. 직업도, 결혼도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러니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다. 일단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남편과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겠다고 남편에게 다짐하긴 했지만, 그녀로서는 무.섭.다. 남편은 여자에게 사랑한다 말하지만, 여자가 그를 사랑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여자는 무섭다. 아내는 무섭다. 이 남자가 자신의 두려움을 눈치채고 언제고 자신을 죽일까봐 무섭다. 이 상황이 너무 답답했는데, 나는 계속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정체를 차마 밝힐 수는 없고, 그래서 경찰에 신고할 순 없고, 그런데 이 남자가 나를 언제 죽일지 몰라 너무나 무섭고...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도망쳐야 할까? 도망치면? 그 다음은?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겐 아빠로부터 도망친 원인을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이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다른 나라로 떠나버릴까? 남편이 아내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데이비드 버스'의 『이웃집 살인마』를 보면 멀리 도망친 아내를 기어코 찾아내서 죽이는 남편도 나오던데,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잖은가. 


그러자 어쩔 수 없는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아내가 되었고, 여기에서 기어코 벗어나서 남은 삶을 살아내야 했으니, 도망치거나 경찰에 신고하는 걸로는 답이 나오질 않으니, 어느 순간, '죽이자' 라는 생각이 든거다. 이 남자를 죽여야 한다. 이 남자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다른 여자들이 죽는다. 죽이는 게 답이다. 그러자 또다시 『이웃집 살인마』에서 본 구절이 떠올랐다.



남성들이 자신을 버린 배우자를 살해한 반면, 여성들은 살인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될 만큼 심하게 자신을 격리하고 학대하며 위협한 배우자를 살해했다. (이웃집 살인마, p.174) 


간략히 말해,여성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살인의 주된 동기는 자기 보호와 위험한 결혼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필사적인 욕망이다. (이웃집 살인마, p.171)



스티븐 킹이 써놓은 이야기들을 읽노라면, 남자들은 자신의 기분을 거스른다고 여자들을 죽이고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여자들을 죽인다. 그러나 여자들은,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다른 여자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남자를 죽인다. 


스티븐 킹이 이런 얘기를 해주어 얼마나 다행인가 했다.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사건이 왜 일어나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이렇게 지명도 있는 '남자'가 이런 얘기를 해주다니. 곳곳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차별을 받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으니까. 똑똑하고 많이 배웠다는 남자들이 종종 여자들에게 '더 넓게보라'고 훈장질 해대는 걸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고종석과 김광진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는데, 스티븐 킹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아, 스티븐 킹은 다르다. 훈장질 하려는 남자가 아니다. 그는 알고 있다. 현실이 여자에게 어떤지를. 『돌로레스 클레이본』에서도 스티븐 킹은, 여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못된 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 가끔은 여자가 자기를 지탱하기 위해 못된 년이 되는 수밖에 없어.˝ (돌로레스 클레이본, p.212)



스티븐 킹이 우리 편인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든든해졌다. 세상에 훈장질 하는 남자들과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은 기쁘다. 우리는 두렵고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소리치는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것은 편가르기가 아니다. 공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도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스티븐 킹이 원하는 것도 지금보다 나은 세계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점이 고마웠고, 또 다행스러웠다. 앞으로도 계속 스티븐 킹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완벽하고 재미있는 소설에서 별 하나를 뺀 건, 이 소설을 다 읽고 자던 밤, 악몽을 꿨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위도 눌렸어. 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제일 처음의 단편 <1922>는 건너 뛰는 게 좋을 것 같다. 스티븐 킹을 다 읽고 자니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렸다고 말하자,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남동생은 내게 말했다.


"스티븐 킹 읽고 자면 안돼.."



스티븐 킹을 읽고 자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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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6-05-23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었을때 왜 번역을 안해주지 했어요. 지금이라도 번역해주어 얼마나 반갑던지...^^
그나마 스티븐킹이 예전보다 한국에 인지도가 높아져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재미있다라고만 표현할줄 모르는데, 역시 다락방님 글은 스티븐 킹의 글만큼이나 재미있어요~~~^^

다락방 2016-05-23 16:29   좋아요 0 | URL
이 책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보슬비님. 스티븐 킹이 괜히 킹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인지도가 높아지는 게 당연한 작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가 다른 소설들에서는 어떤 얘기를 했는지 막 궁금해지더라고요.

히힛. 재미있다고 해주시니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써야겠다고 다집해봅니다. 불끈!!

에이바 2016-05-24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1922에서는 발등 위를 타고 오르는 음습한 어둠을 느꼈는데 몇 번이나 구역질이 일더라고요. 대단한 사람 무서운 사람... 다락방님 혹시 타란티노 데쓰프루프 보셨어요? 빅 드라이버 보고 나니까 그 영화 생각 나더라고요.

다락방 2016-05-25 08:50   좋아요 1 | URL
아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스티븐 킹 아저씨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기도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해줘서 참 좋더라고요. 데쓰프루프는 안봤어요. 빅 드라이버는 참 좋았어요. 결국 다 죽여버리는 게 좋았어요. 죽여버리는 게 더 좋다는 말은 참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빅 드라이버가 살아서 다른 여자들을 또 강간할 걸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한 거에요. 어휴.. 저는 <행복한 결혼생활>도 너무 무서웠지만 그런 의미에서 좋더라고요. 내가 아내의 입장이라면..하고 해결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결국 죽이는 것 밖에 답이 나오질 않았어요. 스티븐 킹을 죄다 읽어봐야겠어요. 어떤건 특히 더 무섭겠지만요 ㅠㅠ

버벌 2016-06-07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티븐킹을 너무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다치지 않고 오래오래 계셨으면 해요. 최근에 스티븐킹의 it이 영화화 된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입니다아~~ 아마도 내년이후에 개봉이겠지만요. ㅜㅠ

다락방 2016-06-10 13:40   좋아요 1 | URL
아아, it 도 읽어봐야겠는데 말입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하나씩 차례대로 다 읽어봐야겠어요. 킹 아저씨 짱이에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