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른 후 시(詩)의 연금술로 이상화된 소녀가 정말로 어땠는지를 기억하려고 애썼을 때, 그는 그녀의 모습을 가슴이 찢어질 듯했던 당시의 황혼과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았을 때, 그러니까 첫 번째 편지에 대한 답신을 기다리고 있던 때, 일년 사시사철 항상 4월이던 아몬드 나무들이 꽃비를 내리던 오후 2시의 가물거리는 햇빛 속에서 아름답게 변한 그녀를 보곤 했었다. (p.115)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페르미나 다사'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매일 그녀를 보기 위해 그녀의 집앞을 서성이고 그녀에게 건네줄 편지를 적는다. 그녀를 연모하는 마음을 그녀에게도 전하고, 그 사랑이 잠깐동안 서로에게 타올랐고, 결국은 불발로 끝났지만, 그는 그녀를 평생 사랑한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황홀에찬 아름다움으로 지켜봤는지, 그녀는 그에게 얼마나 진한 환상이었을 지, 나는 '아몬드 나무'의 등장에서 실감한다. 아몬드 나무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위의 인용된 문장을 읽었을 때, 아몬드 나무의 등장과 함께 눈 앞에, 화악- 하고, 고흐의 <꽃이 핀 아몬드 나무>라는 그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탕의 저 청록빛이, 그 청록빛 안에서의 저 꽃이 그대로 눈앞에 살아나고, 내게 페르미나 다사는, 바로 정확히, 저 그림 밑에서 있는 것으로 그려졌다. 만약 그녀의 외모가 아름답지 못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 저 그림 밑에 서 있는 그녀는 아름답게 느껴졌을 것이고, 만약 그녀가 아름답다면(물론 그녀는 아름답다) 저 아몬드 나무 그림 밑에서 더, 더 아름답게 느껴졌을 것이다. 청록빛의 세상에 아몬드나무가 뻗어 있고, 그 밑에 한 여자가 서 있다면, 세상 어느 누가 본다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아직 1권밖에 읽지 못했고, 읽다보면 이 책은 '빨간 빛' 일것 같은데,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내게 이 책은 청록빛으로만 기억될 것 같다.
실제 아몬드나무가 어떤지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봤다. (출처는 다음의 동산묘목까페)
아, 꽃도 예쁘네. 벚꽃 나무와 비슷한 느낌일 듯하다. 그래도 고흐 그림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고흐 그림 아래 서있는 여자가 더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정말로, 세상이 온통 청록빛인데 아몬드 나무 아래 서 있다면, 와우-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다울까. 그 장면은 사랑이 없다해도, 평생 잊지 못할 한 컷이 되지 않을까.
조카 둘이 함께 와있었던 엊그제. 엄마는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덜컥 겁이 나셨단다. 이제 막 50일이 된 갓난아기에게 감기가 옮을까 걱정이 되셨던 것. 마침 저녁 약속이 있던터라, 그 약속에 나가 소주를 세 잔 드시고 돌아오신 엄마는, 유자차까지 내리 두 잔을 따뜻하게 드셨다. 찾아오려는 감기 기운을 떨쳐내고자 하셨던 것. 그러나 소주는 잠을 자는 데 방해가 되었고, 결국 엄마는 새벽 네시, 내 방으로 들어와 타이레놀을 달라셨다. 타이레놀을 한 알 드시고는 뜨거운 찜질로 팩을 해서 땀을 흠뻑 내셨다. 다음날 아침, 어제보다는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고 하셨는데, 마침 그런참에, 이 책에서 이런 부분을 읽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장례식이 끝날 때가지 머무른 몇 안 되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는 속옷까지 흠뻑 젖어 있었는데, 오랫동안 철저하게 건강을 관리하고 지나칠 정도로 예방에 신경을 써왔는데 그날 오후의 일로 폐렴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브랜디를 몇 방울 떨어뜨린 따뜻한 레모네이드를 준비한 다음 침대에 앉아 두 개의 아스피린과 함께 그것을 마시고는 양모 담요를 덮고 비 오듯이 땀을 흘렸다. 그러고 난 후에 몸이 제 상태로 돌아왔음을 알았다. 상갓집으로 돌아갈 무렵, 그는 기력을 완전히 되찾은 기분이었다. (p.91)
몸에 이상기운이 느껴질 때, 알코올을 섭취하고 땀을 내서 그것을 떨쳐내고자 하는 게, 우리 엄마만이 알고 있는 방식이 아니라니, 새삼 신기하고 반가웠다. 문득, 사람들은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저마다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것들이 처음이라면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스럽겠지만, 어떤 아픔이나 고통이 재차 찾아왔을 때, 아 난 이럴 때 이렇게 하면 돼, 하고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서 헤쳐나오게 되는 것 같다. 미국에 잠깐 여행을 갔을 때, 사흘째 되던날 속이 더부룩했는데, 그 때 친구의 남편이 한인이 운영하는 고기집으로 데려가 갈비와 소주를 사주었다. 그 분은 내가 속이 편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한 상황이었고, 나는 그자리에서 먹지 못해 불편한 분위기가 되는 게 싫어, 억지로 그 고기와 소주를 먹었는데, 소주를 먹고나자 놀랍게도 속이 편해지는 거였다. 마치 언제 속이 불편했냐는 듯 쳇증이 확 내려간 그런 기분. 너무 신나서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들떠있었던 기억. 아, 물론 술 취해서 들뜬것도 있겠지만.. 그 뒤로 나는 속이 불편하다 싶으면 자꾸 소주를 마시고 싶어진다.
속이 안 불편해도 소주를 마시고 싶어지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그러나 엄마는 어제 오후, 결국 심하게 아파져서 병원에 가야했고, 나 역시 토요일 밤, 체한 속을 양주로 다스렸다가 다음날 호되게 앓아 누워야 했다. 아, 이 방법이 능사는 아니구나,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소주를 마셨어야 하는데 양주를 마셔서 그런것 같다.
아, 다시 아몬드 나무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도 그녀에게 흠뻑 빠졌고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 아버지의 성에 차지 못한 남자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데리고 장기간 여행을 한다. 그를 잊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 기간동안 그녀의 사랑은 더 견고해지고, 그들은 서로에게 전보를 쳐서 연락을 하고 사랑을 맹세한다. 그녀는 분명 사랑에 빠졌고, 아버지가 뭐라한들 그 사랑을 이뤄내고자 했다. 마음속으로 자신은 이미 그의 아내라고 생각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시장을 구경하면서 그를 위해 이것저것 음식들을 구입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신나는 마음으로 사랑에 빠진 여자는 나는 듯이 걷고 있었는데, 몰래 그녀의 뒤를 따르던 그가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난 순간, 그녀의 사랑은 와르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여긴 왕관을 쓴 여신이 올 곳이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자기 눈에서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눈과 창백한 얼굴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굳어진 입술을 보았다. 그와 처음으로 가까이 있었던 자정 미사의 군중 틈에서 보았던 모습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와는 달리 사랑의 감동이 아닌 환멸의 심연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열정적으로 이런 망상을 키워왔는지 모르겠다고 놀란 마음으로 질문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하느님 맙소사! 이 불쌍한 사람!' 이라는 생각만 떠올릴 수 있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미소를 짓고서 무언가를 말하려 하면서 그녀를 뒤쫓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자기 인생에서 지워버렸다는 손짓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발 부탁인데, 이제 그만 잊어버려요."
그날 오후, 아버지가 낮잠을 자고 있는 틈을 이용해 그녀는 갈라 플라시디아 편으로 두 줄짜리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오늘 당신을 보자 우리의 사랑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라고 적혀 있었다. (p.181)
아!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 생각도 했을만큼. 그러나 그녀가 사랑한 그는,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던', '전보를 주고 받던', 다시말해 그녀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던거지, '그'는 아니었던가 보다. 그를 생각하며 즐겁게 걸을수도 있고 즐겁게 쇼핑할 수도 있고, 마음속에 그를 향한 사랑의 맹세를 새길 수도 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눈 앞에 있는 그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그에게 평생 아몬드 나무 아래 서있던 여자인데, 그녀에게 그는, 군중속의 사람들 중 더 볼품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나 역시 '연애를 위한 연애'를 했던 적이 있던 바, 그녀가 느낀 절망과 수치심, 그 순간의 환멸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를 두번째 만나던 날이었던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를 보는데, 아 맙소사, 나 지금 저 남자 만나러 여기까지 온건가, 하는 생각이 든거다. 그러나 나는 페르미나 다사 처럼 그 환멸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에게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나는, 내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데이트하는 그 저녁 내내, 그에게서 좋은 점만 보기위해 안간힘을 썼고, 내가 잘했다고 나 스스로를 타일러가며 더 많이 웃었다. 나는 행복하다고, 내가 잘못 선택했을 리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고, 그 때의 행동들은 그로 하여금, 나를 아몬드 나무 아래에 서 있게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그가 아니라 '연애'를 지키고 싶었다. 나는 몇 번의 연애들 속에서 나쁜 남자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내가 나쁜 여자였던 적은 더러 있었던 것 같다. 이럴 때마다 나는 '수키시리즈'의 '수키'가 되어, 수키가 적에게 내뱉었던 욕을 내 자신에게 내뱉고 싶어진다. 쌍년. 환멸을 느껴놓고 그것을 억지로 속 깊이 감춰두는 것은, 쌍년이 되는 지름길이다.
오, 그러나 이 불쌍한 남자를 보라. 그녀는 그에게 환멸을 느꼈을지언정, 그는 그녀를 여전히 아몬드 나무 아래에 세워두고 있다. 거기에서 그녀는 더 아름답고 더 빛나고 있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은 점점 더 열등해진다.
그녀의 모든 것은 예전과 달랐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전에 없이 아름답고 젊어 보였지만, 그는 전에 없이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의 여자가 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실크 튜닉 아래로 그녀의 배가 둥근 곡선을 띠고 잇는 것을 보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임신 육 개월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그녀와 남편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것과 두 사람이 너무나 여유 있게 세상을 살고 잇어서 마치 현실의 위험과는 상관없이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질투나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 대한 경멸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불쌍하고 추악하며 열등하다고 생각했고, 그녀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그 어떤 여자에게도 부족한 남자라고 느꼈다. (p.268)
하아- 그는 그녀를 아몬드 나무 아래에 늘, 항상 세워두었건만, 그녀는 그를 꽃처럼 한 철만 사랑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럴거라면, 처음부터, 사랑이라고 손바닥이나 마주치지 말것이지, 왜 그렇게 반짝, 그를 들었다놨다놨다놨다놨다 한거냐고. 흑흑. 그러나 환멸을 느끼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해마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사랑이 어느 순간에는, 잠깐이나마 존재했다. 그 사실이 그 누구에게도 위안이 되진 않겠지만.
조퇴하고 싶구나. 조퇴해서 이 책의 2권을 어서 빨리 시작하고 싶구나. 흑흑. 오십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의 이야기가 나는 궁금하단 말이다. 흑흑. 나를 여기서 내보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