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른 후 시(詩)의 연금술로 이상화된 소녀가 정말로 어땠는지를 기억하려고 애썼을 때, 그는 그녀의 모습을 가슴이 찢어질 듯했던 당시의 황혼과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았을 때, 그러니까 첫 번째 편지에 대한 답신을 기다리고 있던 때, 일년 사시사철 항상 4월이던 아몬드 나무들이 꽃비를 내리던 오후 2시의 가물거리는 햇빛 속에서 아름답게 변한 그녀를 보곤 했었다. (p.115)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페르미나 다사'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매일 그녀를 보기 위해 그녀의 집앞을 서성이고 그녀에게 건네줄 편지를 적는다. 그녀를 연모하는 마음을 그녀에게도 전하고, 그 사랑이 잠깐동안 서로에게 타올랐고, 결국은 불발로 끝났지만, 그는 그녀를 평생 사랑한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황홀에찬 아름다움으로 지켜봤는지, 그녀는 그에게 얼마나 진한 환상이었을 지, 나는 '아몬드 나무'의 등장에서 실감한다. 아몬드 나무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위의 인용된 문장을 읽었을 때, 아몬드 나무의 등장과 함께 눈 앞에, 화악- 하고, 고흐의 <꽃이 핀 아몬드 나무>라는 그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탕의 저 청록빛이, 그 청록빛 안에서의 저 꽃이 그대로 눈앞에 살아나고, 내게 페르미나 다사는, 바로 정확히, 저 그림 밑에서 있는 것으로 그려졌다. 만약 그녀의 외모가 아름답지 못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 저 그림 밑에 서 있는 그녀는 아름답게 느껴졌을 것이고, 만약 그녀가 아름답다면(물론 그녀는 아름답다) 저 아몬드 나무 그림 밑에서 더, 더 아름답게 느껴졌을 것이다. 청록빛의 세상에 아몬드나무가 뻗어 있고, 그 밑에 한 여자가 서 있다면, 세상 어느 누가 본다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아직 1권밖에 읽지 못했고, 읽다보면 이 책은 '빨간 빛' 일것 같은데,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내게 이 책은 청록빛으로만 기억될 것 같다.


실제 아몬드나무가 어떤지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봤다. (출처는 다음의 동산묘목까페)




아, 꽃도 예쁘네. 벚꽃 나무와 비슷한 느낌일 듯하다. 그래도 고흐 그림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고흐 그림 아래 서있는 여자가 더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정말로, 세상이 온통 청록빛인데 아몬드 나무 아래 서 있다면, 와우-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다울까. 그 장면은 사랑이 없다해도, 평생 잊지 못할 한 컷이 되지 않을까.






조카 둘이 함께 와있었던 엊그제. 엄마는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덜컥 겁이 나셨단다. 이제 막 50일이 된 갓난아기에게 감기가 옮을까 걱정이 되셨던 것. 마침 저녁 약속이 있던터라, 그 약속에 나가 소주를 세 잔 드시고 돌아오신 엄마는, 유자차까지 내리 두 잔을 따뜻하게 드셨다. 찾아오려는 감기 기운을 떨쳐내고자 하셨던 것. 그러나 소주는 잠을 자는 데 방해가 되었고, 결국 엄마는 새벽 네시, 내 방으로 들어와 타이레놀을 달라셨다. 타이레놀을 한 알 드시고는 뜨거운 찜질로 팩을 해서 땀을 흠뻑 내셨다. 다음날 아침, 어제보다는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고 하셨는데, 마침 그런참에, 이 책에서 이런 부분을 읽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장례식이 끝날 때가지 머무른 몇 안 되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는 속옷까지 흠뻑 젖어 있었는데, 오랫동안 철저하게 건강을 관리하고 지나칠 정도로 예방에 신경을 써왔는데 그날 오후의 일로 폐렴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브랜디를 몇 방울 떨어뜨린 따뜻한 레모네이드를 준비한 다음 침대에 앉아 두 개의 아스피린과 함께 그것을 마시고는 양모 담요를 덮고 비 오듯이 땀을 흘렸다. 그러고 난 후에 몸이 제 상태로 돌아왔음을 알았다. 상갓집으로 돌아갈 무렵, 그는 기력을 완전히 되찾은 기분이었다. (p.91)



몸에 이상기운이 느껴질 때, 알코올을 섭취하고 땀을 내서 그것을 떨쳐내고자 하는 게, 우리 엄마만이 알고 있는 방식이 아니라니, 새삼 신기하고 반가웠다. 문득, 사람들은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저마다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것들이 처음이라면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스럽겠지만, 어떤 아픔이나 고통이 재차 찾아왔을 때, 아 난 이럴 때 이렇게 하면 돼, 하고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서 헤쳐나오게 되는 것 같다. 미국에 잠깐 여행을 갔을 때, 사흘째 되던날 속이 더부룩했는데, 그 때 친구의 남편이 한인이 운영하는 고기집으로 데려가 갈비와 소주를 사주었다. 그 분은 내가 속이 편하지 않다는 걸 알지 못한 상황이었고, 나는 그자리에서 먹지 못해 불편한 분위기가 되는 게 싫어, 억지로 그 고기와 소주를 먹었는데, 소주를 먹고나자 놀랍게도 속이 편해지는 거였다. 마치 언제 속이 불편했냐는 듯 쳇증이 확 내려간 그런 기분. 너무 신나서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들떠있었던 기억. 아, 물론 술 취해서 들뜬것도 있겠지만.. 그 뒤로 나는 속이 불편하다 싶으면 자꾸 소주를 마시고 싶어진다. 



속이 안 불편해도 소주를 마시고 싶어지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그러나 엄마는 어제 오후, 결국 심하게 아파져서 병원에 가야했고, 나 역시 토요일 밤, 체한 속을 양주로 다스렸다가 다음날 호되게 앓아 누워야 했다. 아, 이 방법이 능사는 아니구나,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소주를 마셨어야 하는데 양주를 마셔서 그런것 같다. 





아, 다시 아몬드 나무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도 그녀에게 흠뻑 빠졌고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 아버지의 성에 차지 못한 남자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데리고 장기간 여행을 한다. 그를 잊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 기간동안 그녀의 사랑은 더 견고해지고, 그들은 서로에게 전보를 쳐서 연락을 하고 사랑을 맹세한다. 그녀는 분명 사랑에 빠졌고, 아버지가 뭐라한들 그 사랑을 이뤄내고자 했다. 마음속으로 자신은 이미 그의 아내라고 생각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시장을 구경하면서 그를 위해 이것저것 음식들을 구입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신나는 마음으로 사랑에 빠진 여자는 나는 듯이 걷고 있었는데, 몰래 그녀의 뒤를 따르던 그가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난 순간, 그녀의 사랑은 와르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여긴 왕관을 쓴 여신이 올 곳이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자기 눈에서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눈과 창백한 얼굴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굳어진 입술을 보았다. 그와 처음으로 가까이 있었던 자정 미사의 군중 틈에서 보았던 모습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와는 달리 사랑의 감동이 아닌 환멸의 심연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열정적으로 이런 망상을 키워왔는지 모르겠다고 놀란 마음으로 질문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하느님 맙소사! 이 불쌍한 사람!' 이라는 생각만 떠올릴 수 있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미소를 짓고서 무언가를 말하려 하면서 그녀를 뒤쫓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자기 인생에서 지워버렸다는 손짓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발 부탁인데, 이제 그만 잊어버려요."

그날 오후, 아버지가 낮잠을 자고 있는 틈을 이용해 그녀는 갈라 플라시디아 편으로 두 줄짜리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오늘 당신을 보자 우리의 사랑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라고 적혀 있었다. (p.181)




아!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 생각도 했을만큼. 그러나 그녀가 사랑한 그는,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던', '전보를 주고 받던', 다시말해 그녀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던거지, '그'는 아니었던가 보다. 그를 생각하며 즐겁게 걸을수도 있고 즐겁게 쇼핑할 수도 있고, 마음속에 그를 향한 사랑의 맹세를 새길 수도 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눈 앞에 있는 그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그에게 평생 아몬드 나무 아래 서있던 여자인데, 그녀에게 그는, 군중속의 사람들 중 더 볼품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나 역시 '연애를 위한 연애'를 했던 적이 있던 바, 그녀가 느낀 절망과 수치심, 그 순간의 환멸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를 두번째 만나던 날이었던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를 보는데, 아 맙소사, 나 지금 저 남자 만나러 여기까지 온건가, 하는 생각이 든거다. 그러나 나는 페르미나 다사 처럼 그 환멸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에게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나는, 내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데이트하는 그 저녁 내내, 그에게서 좋은 점만 보기위해 안간힘을 썼고, 내가 잘했다고 나 스스로를 타일러가며 더 많이 웃었다. 나는 행복하다고, 내가 잘못 선택했을 리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고, 그 때의 행동들은 그로 하여금, 나를 아몬드 나무 아래에 서 있게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그가 아니라 '연애'를 지키고 싶었다. 나는 몇 번의 연애들 속에서 나쁜 남자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내가 나쁜 여자였던 적은 더러 있었던 것 같다. 이럴 때마다 나는 '수키시리즈'의 '수키'가 되어, 수키가 적에게 내뱉었던 욕을 내 자신에게 내뱉고 싶어진다. 쌍년. 환멸을 느껴놓고 그것을 억지로 속 깊이 감춰두는 것은, 쌍년이 되는 지름길이다. 




오, 그러나 이 불쌍한 남자를 보라. 그녀는 그에게 환멸을 느꼈을지언정, 그는 그녀를 여전히 아몬드 나무 아래에 세워두고 있다. 거기에서 그녀는 더 아름답고 더 빛나고 있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은 점점 더 열등해진다.



그녀의 모든 것은 예전과 달랐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전에 없이 아름답고 젊어 보였지만, 그는 전에 없이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의 여자가 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실크 튜닉 아래로 그녀의 배가 둥근 곡선을 띠고 잇는 것을 보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임신 육 개월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그녀와 남편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것과 두 사람이 너무나 여유 있게 세상을 살고 잇어서 마치 현실의 위험과는 상관없이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질투나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 대한 경멸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불쌍하고 추악하며 열등하다고 생각했고, 그녀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그 어떤 여자에게도 부족한 남자라고 느꼈다. (p.268)



하아- 그는 그녀를 아몬드 나무 아래에 늘, 항상 세워두었건만, 그녀는 그를 꽃처럼 한 철만 사랑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럴거라면, 처음부터, 사랑이라고 손바닥이나 마주치지 말것이지, 왜 그렇게 반짝, 그를 들었다놨다놨다놨다놨다 한거냐고. 흑흑. 그러나 환멸을 느끼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해마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사랑이 어느 순간에는, 잠깐이나마 존재했다. 그 사실이 그 누구에게도 위안이 되진 않겠지만.









조퇴하고 싶구나. 조퇴해서 이 책의 2권을 어서 빨리 시작하고 싶구나. 흑흑. 오십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의 이야기가 나는 궁금하단 말이다. 흑흑. 나를 여기서 내보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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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5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5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dreamout 2013-12-0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손가락에 꼽을만한 소설!!
정말, 정신없이 빨려들었어요. 이 소설 읽었던, 녹음이 짙어져오던 그 계절 그 카페도 생각나네요. ^^

다락방 2013-12-06 14:15   좋아요 0 | URL
다 늙고난 후, 오십년이 지난후에 남자가 찾아왔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너무 궁금해요. 빨리 읽고 싶은데 회사에요. 엉엉 ㅠㅠ

Forgettable. 2013-12-05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 소환 페이퍼랄까? 아 좋네요. 다시 읽고싶어지게 만드는 글입니다. 인용 구문을 읽으니까 잊고 있던 글임에도 손에 잡힐 듯 그려지네요. 하.. 근데 이거 영화는 구리다고. ㅋㅋ

다락방 2013-12-06 14:16   좋아요 0 | URL
흐미. 이거 영화도 있어요? 구리다고 해도 좀 궁금한데요? ㅋㅋ
일단 책부터 끝까지 읽고나서 생각해야징.
아하하하. 뽀 소환 페이퍼라니, 좋당. ㅋㅋ

가연 2013-12-05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이레놀과 술은 같이 먹지 말라고 하더군요. 타이레놀 주의사항 중 하나가 술이랑 같이 먹지 말라.. 거든요.

다락방 2013-12-06 14:16   좋아요 0 | URL
어제 술 마시면서 엄마께 가연님 이 댓글 전해드렸어요. 엄마, 타이레놀은 술하고 같이 마시면 안된대, 하고요. 엄마가 감기약 드시는데 거기에 타이레놀 있다고 한 것 같아서 말이죠. 고마워요, 가연님.

네꼬 2013-12-05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약속에 나가 소주를 세 잔 드시고 돌아오신 엄마는"

약속에 나가 소주 세 잔을 마시고 온 건 다락님일 줄 알았어요. 어머니 멋찌다!

다락방 2013-12-06 14:17   좋아요 0 | URL
울 엄마 술꾼이 다 됐다능! 큰딸이 술꾼 만들었다고 늘 절 원망하시지만, 제가 보기엔 엄마한테 잠재적으로 술욕심이 있었어요...저는 그걸 톡- 하고 건드려 발현해주었을 뿐. 아하하하하.

섬사이 2013-12-05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아침에 읽고 지금 또 다시 읽었어요.
고흐의 '꽃이 핀 아몬드 나무'는 제가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하거니와
그 나무 밑에 아름다운 여자가 서있으면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에요.
읽을 책은 쌓여 있는데 자꾸 저 아몬드 나무에, 저 책에 한눈을 팔고 있으니
나도 참 구제불능이구나, 하고 있어요. ㅠ,ㅠ

다락방 2013-12-06 14:19   좋아요 0 | URL
아, 섬사이님도 상상이 되세요? 아몬드 나무 밑에 아름다운 여자..되게 환상적이죠? 자꾸자꾸 생각이 나고 좋더라고요. 제가 고흐의 저 그림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더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하는 게 가능했으니 말이죠. 제가 저 그림을 알지 못했다면 추상적으로 이미지를 그렸을텐데, 저 그림 덕에 구체적인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었고, 그게 무척이나 아름다웠어요.
 

왜 출근길은 그토록 오랜시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도 않으며 좋아지지도 않을까. 요즘 책읽기가 더딘 까닭은 지하철만 탔다하면 스르르 선잠이 들기 때문인데, 잠이라기보다는 사실 조는것에 가깝지만, 여튼, 어제오늘, 방송에서 양재역이란 안내가 나올때마다 눈물이 글썽거린다. 내리기 싫어...이대로 눈감고 앉아서 더 가고 싶어, 한 바퀴 돌고 싶어. 엉엉. 눈물나 진짜. ㅠㅠ


게다가 오늘 새벽에 꿈도 정말이지 대단했다. 이건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계속 곱씹게 되는 꿈이었는데, 그러니까 꿈에 우리 식구들은 단독주택에 살았으며, 새끼 표범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새끼지만 어쨌든 표. 범. 우어어어. 우리 식구들은 그 표범을 굉장히 예뻐했는데, 표범이 눈이 컸던게, 아마도 내 조카를 닮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성격..까지도. 잠깐 조카 얘기를 하자면, 요것이, 이제 41개월이 되었으면서, 고작 그만큼을 살았으면서도, 어젯밤엔 나를 보고 "나는 이모가 있어서 고맙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고 나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듯 좋아서 실성한 년 처럼 깔깔댔는데,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한 지 삼십분도 채 안되어 "이모 싫어!" 하고 악을 버럭버럭 쓰는거다. 아이고. 요것이 그냥 이모를 들었다놨다 들었다놨다 하네. 여튼, 다시 꿈 얘기로 돌아가서, 새끼 표범이 귀여우면서도 포악스러운 게 내 조카를 닮았........뭐, 할 얘기는 이게 아니니까. 그러던 어느날, 우리 식구가 새끼 표범을 데리고 외출하려는 데, 마당에 커다란 표범 한 마리가 떠억- 하니 앉아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정말이지 포스가 대단해서, 감히 근처에 갈 수가 없는거다. 우리 식구들은 그 표범을 보고 너무 놀라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저것이 우리 새끼 표범의 엄마인걸까, 그래서 애를 찾으러 온걸까, 하고 궁금해했다. 만약 그렇다면 어미한테 주는 게 맞겠지, 그렇지만 아니라면 꼭 줄 필요는 없지않나, 우리가 키워도 되잖아, 막 이런 얘기를 하면서, 우리 그냥 저 표범 무시하고 나가보자, 하고 대문으로 나가려는데, 이 커다란 표범이 일어나서 우리쪽으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래서 아, 저것이 어미가 아니라면 우리 마당에 나타날 리가 없다. 그러니 어미일 것이다. 새끼 표범, 주기 싫지만, 제 어미에게 보내자, 하고 그 새끼를 두고 우리 식구들은 외출을 했다. 네 어미 따라가라, 하고. 외출후 돌아와보니 우리 집에 새끼 표범도 엄마 표범도 없어서, 아 데리고 갔구나, 하면서 우리는 서운해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새벽이었다. 우와, 표범 두마리의 색깔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대체 이게 뭔 꿈이냐, 웬꿈이냐, 한 것이다. 아니, 대체 왜 표범 꿈을 꾸지, 카운슬러에는 치타가 나왔던것 같은데, 그거 본 지 오래됐는데, 하고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잠을 청했는데 꿈에 또! 표범이 나온거다. 그 뒷이야기로.



새끼 표범이 엄마 표범으로부터 도망쳐서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표범이 엄마가 아닐 확률이 크다. 우리는 이대로 새끼표범을 보낼 수가 없고, 그렇다면 우리가 키워야 할 것인데, 엄마 표범이 우리 집을 알고 있는 이상 우리 식구들도, 이 표범도 위험해, 우리는 이 표범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그래서 뭔가 이동수단을 타고서는 그 즉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표범의 눈에 띌까 두려워, 우리는 멀리멀리 가기로 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싶었는데, 집집마다 방문이며 창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우리를 내다보지도 않았다. 자칫 잘못해서 표범의 목표가 자기들이 될까봐.....도망가다 깼어.......



오늘 아침엔 지하철에서 꾸벅 졸면서, 대체 왜 이런 꿈을 꾼걸까, 하다가 어제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잠깐 읽었던 책의 내용이 그제서야 퍼뜩 떠올랐다. 그 책에서는, 주인공 부부가 키우는 사냥개가 광견병에 걸려, 부부가 외출한 사이, 집 안의 모든 동물들을 물어뜯어서 여기저기 피를 묻혀놓았던 것이다(이건 무슨 책일까~~~아요?). 아, 그 장면 때문이었나보다, 그래서 표범 꿈을 꿨나봐..





영화 <인사이드 르윈> 을 보면 삶이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비루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삶은 치사스럽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크게 후려갈기는 것 같다. 음악을 그토록 좋아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으로는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매일 어디서 자야할 지를 고민하는 르윈에게, 르윈의 누나는 배 타러 나가서 돈을 벌기를 권유한다. 이 말은 수치스럽고 모욕적으로 들리는데, 결국 르윈을 받아주는 곳이 아무데도 없자, 르윈은 배타러 나가기로 결심하고 선원 명단에 제 이름을 올려달라고 한다. 배를 타는 일이 수치스러운 일이어서가 아니라, 음악을 하고 있고, 그 음악으로 먹고 살고 싶었고, 그 음악으로 인정받고 싶은 사람한테 '배 타러 가' 라고 했으니, 그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이게 아니라 그걸 해야하는 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인데, 삶은 그에게 '그래도 너 배 타야할 걸' 하고 자꾸 몽둥이를 휘둘러대니, 그는 자존심과 자신감을 모두 내팽개친 채, '그걸' 선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삶이 반복되는 것이다. 크- 치사스러워... 르윈에게 삶은, 하나 밖에 없는 젖은 신발 같았고, 젖은 양말 같았다. 날도 추운데 축축하게 젖어버렸지만, 차마 그걸 벗고 걸을 수조차 없는, 그런 젖은 신발, 젖은 양말. 영화속에서 클로즈업 되던 그의 젖은 신발은, 그것이 그의 삶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아, 무슨 삶이 이래. 왜 푹 젖어버린 신발 같은거냐고.



아, 인간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르윈의 젖어버린 신발같은 삶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르윈이 우리집에 자러 와도 되겠냐고 물을까봐 조마조마했다. 거침없이 '싫어' 라고 말할 내 자신 때문에...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젖어버린 신발로 뺨 까지 때리는 격이겠지만...






꿈에서 그리던 사람을 만나게 되면, 투명하게 흐르던 시간이 그 사람의 머리카락에 색을 들이고 형태 없이 흐르던 세월이 그 사람의 입술을 도드라지게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내 인연임을 알아보게 되는 법이다. 사만다도 내게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정해진 분량만큼의 사랑만 할당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p.89)












꿈에서 그리던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내 인연이라고, 그러니 이 애정은 끝이 없는 거라고 확신했던 순간이 분명 있었는데, 그 순간 조차도 결국엔 사라지고 만다는 생각을, 오늘은 했다. 이만큼이었구나, 그를 향한 나의 애정은. 이만큼만 할당되었었구나, 하고. 그가 내 인연이 아님을,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그렇게 오래 싸인을 보내고 있었는데 나는 온몸으로 거부했고, 그 많은 싸인들이 이제는 한 번에 후려치는 느낌이랄까. 예전엔 그가 열 번 실망을 주면, 한 번 웃게 한걸로 충분했는데, 이제는 한 번 웃게 한것보다 실망이 쌓이는 횟수를 세고 있다. 그에 대한 애정 할당량은 여기까지였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하는 아침. 애정도 식었고, 커피도 식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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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곰 2013-12-0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ㅡ 삶은 젖어버린 신발이라니.. 너무 철학적이잖아요 ㅎㅎ
전 오늘 하루종일 이 말을 하고 돌아다닐 것 같아요. 늘 그렇지만 오늘은 공감을 314개 드리고 싶어요^^

다락방 2013-12-03 17:33   좋아요 0 | URL
영화속에서 르윈의 젖은 신발이 클로즈업 되거든요.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신고 있기도 뭣한, 뭐랄까,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계속 강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에요. 계속 그 젖은 신발이 생각나네요.

공감 314개, 모조리 다 받겠습니다. ㅎㅎ

2013-12-03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3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13-12-03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 너무 지독하다... 하아.. ( ")

다락방 2013-12-03 17:34   좋아요 0 | URL
나는 퇴근하다가 곤드레밥 먹고 들어가려고요. -_-

2013-12-03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5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렇게혜윰 2013-12-03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을 이어서 꾸는 경우가 있다더니...젖은 하루 밤잠 자며 잘 말리시길...꿈에 드라이기 나오려나요?^^

다락방 2013-12-05 11:48   좋아요 0 | URL
그 다음날 꿈은 악몽이었어요. 제가 귀신이 되어 사람들에게 안보이는 꿈 ㅠㅠ 대체 왜 이런 꿈을 꾸는걸까요..사춘기인가 ㅠㅠ

2013-12-03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5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3-12-03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르르 눈이 감기는...그러나 다락방님과는 달리 표범은 고사하고 개미새끼 한마리도 안나온다는...

다락방 2013-12-05 11:50   좋아요 0 | URL
겨울이라 히터 틀고 이래서 공기가 무척 건조하잖아요. 그래서 눈이 쉬이 피로해지고 자꾸 눈을 감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오늘은 '건조함과의 전쟁'을 저 나름대로 선포해서, 사무실안의 화분에 물을 듬뿍 주었습니다. 가습기도 틀고, 걸레도 빨아놓고요. 어휴.

마노아 2013-12-04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범 얘기 태몽 아니냐고 생각했는데, 이미 둘째 조카도 태어났는데 무슨 태몽이지? 이러다가 책 이야기 듣고서 아하! 했어요.
아아, 그나저나 젖은 신발 같은 삶이라니... 이렇게 확 와닿는 표현이 또 있을까 싶네요. 그저 축축합니다.ㅜㅜ

다락방 2013-12-05 11:50   좋아요 0 | URL
책은 책이고, 저도 역시 태몽을 생각했는데,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질 않아요. 누구 태몽이지? 정말 모르겠어요. 나을 사람은 다 나았고, 내 경우엔 안 나을 사람..인데. 흐음.

자작나무 2013-12-04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몽입니다. 이번에는 조카가 아니예요.

다락방 2013-12-05 11:51   좋아요 0 | URL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곰곰생각하는발 2013-12-04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링크건 화면.. 심규선을 심보선'으로 이해하고는 야, 이 사람 도대체 안 가진 게 뭐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얼굴도 잘생겼지, 글도 잘 쓰지, 머리도 좋지. 닝기미... 이제 노래도 부르는구나.... 하다가
여자 목소리가 나와서.. 그래, 신은 한 인간에게 모든 재능을 주지는 않지 했습니다. 다행이다.. 아, 다행이다 !!!

다락방 2013-12-05 11:52   좋아요 0 | URL
신은 한 인간에게 모든 재능을 주지는 않을테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신이 모두에게 하나씩의 재능을 주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누군가에겐 아예 재능도 미모도 안주시는 듯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직업에는 여러가지가 있고, 그 직업들은 다시, 보람을 주는 직업과 안정감을 주는 직업, 단순히 돈만 벌게 해주는 직업으로 나뉠 수 있을것이다. 뭐, 이건 나누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달라질텐데, 어떤 직업은 '남들이 보기에도 근사하고 자기 자신도 만족하는' 직업으로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직업은 '남들이 보기에는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자기 자신은 만족하는' 직업으로 보일 수 있을것이다. 이것 역시 나누는 사람, 보는 사람의 기준이겠다. 예를 들면, 내 기준에서는 통역을 한다거나 번역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남들이 보기에도 근사하고 자기 자신도 만족할 수 있는 직업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헬쓰장 트레이너에 대해서는 남들이 보기에 근사해 보이는 건 아닌데 자기 자신은 만족할 수 있을것 같은 직업이란 생각이 든다. 그건 자기 자신이 만족해야만 할 수 있는 직업이란 생각이 내겐 있었다. 



어제.

식구들과 모여앉아 티븨 채널을 돌리다가 암환자에게 운동이 얼마나 좋은지를 말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암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운동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한 달이 지나고나자 몰라보게 몸이 좋아졌다고들 말하고 있었다. 환자 대부분이 나이 많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운동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하자, 그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트레이너들이 그들에게 운동하는 방법을 옆에서 코치해주었다. 


나는 아픈 사람들이 운동을 시작한 것보다, 그들의 운동을 돕는 트레이너들이 아주 인상 깊었다. 그 직업이, 아주 좋아 보이는거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이 삶과 아주 다르게 보이는 삶. 아프고 병든 자들을 좀 더 건강한 삶으로 이끌기 위해 프로그램을 짜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코치해주는 그 트레이너들이 무척이나 근사해 보이는거다. 일반적인 대형 헬쓰장처럼 거기엔, 열정 혹은 혈기로 들끓는 젊은이들이 왔다갔다 하지 않는다. 가끔 눈둘 곳을 모를만큼 근사한 차림새의 젊은이들이 바글거리지도 않는다. 혹시 잠깐 시간을 내어 커피 한 잔 할 수 있겠느냐는 은밀한 작업이 그곳엔 없다. 거기엔 남은 삶을 어떻게든 조금 더 이어보고자, 그 삶을 조금 더 건강하게 이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고, 젊음의 시간은 이미 다 보내 버린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에게 동작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트레이너들을 보니, 뭐랄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이상적으로 보이는거다. 


그들에겐 성취감이 있을것이다. 물론, 그들이 잘하는 일일 것이고. 빠르고 급하게, 라는 게 거기엔 없을것이다. 퇴근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그 트레이너들의 머릿속에 뭐, 내 생각과 별반 다를바 없는 생각이 들어있을 확률이 크겠지만, 그 트레이너들의 직업이 아주 오래 이어갈 수 있는, 그런 완벽한 직업으로 느껴졌다. 나는 운동에 별 관심이 없고 잘 하지도 못해서 그 직업으로 옮겨간다거나 하진 못하겠지만, 만약 삶의 목표가 '돈 잘 벌고 출세하고 이름을 떨치는' 게 아닌 남자사람과 여자사람이라면, 그러니까 자신의 삶의 목표가 '조용하고 안정적이며 보람있는' 거라면, 그런 직업은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권해보고 싶어졌다. 물론, 나는 겉에서만 본 거니, 그 직업으로 막상 뛰어들면 어떤 치열함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어제 티븨를 보는 동안에는, 그들이 완벽해 보였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난 지금의 이 직장을, 이 직업을 오래오래 갖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난 뭘하며 먹고 살아야 할까? 





깨끗한 식사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

식주의자가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

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

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

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

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

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

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등을 끊어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

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으니 이제 참으로

두려운 것은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

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





어휴, 이 시는  아주 그냥 강하게 내려치는구나. 말문을 막히게 하는 시랄까. 직설적으로 강하게 확- 내려쳐서 턱, 하게 되는 기분. 이래서 강신주가 그토록 김선우를 좋아하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휙- 확- 내려쳐서, 내다꽂아서.




















이 시집을 펼쳐 절반쯤을 읽었는데, 또 모르겠는 시 투성인거라, 아아, 이것이 나의 문제야. 내가 시 조차도 너무 빨리 읽으려고 해서 그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시집을 덮었다. 생각날 때마다 천천히, 하나씩 둘 씩, 그렇게 천천히 야금야금 읽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뭐든 빨리 읽으려고 하는 성격이 급한 나라도,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천천히 읽게 되는 글들도 있다고. 이를테면, 


코맥 매카시라든가, 줌파 라히리라든가, 앙드레 드 리쇼의 글이 그랬다고. 누가 권하지 않아도 천천히, 씹고 싶었다고, 그렇게. 그래도 다시,


천천히, 시를 천천히 읽어봐야지. 뭐, 천천히 읽는다고 내가 더 잘 이해할 것같진 않지만. -_-




정확히 뭘 어떻게 말하는건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는 않는데, 확실히, 그러니까, 음, 뜨거움을 주는 것 같은 이런 시는, 좀 아득하지만, 아름다운 것 같은 느낌.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이 시는, 현재 내가 읽고 있는 소설책보다 더 은밀함과 질펀한 감정을 깨우는데,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처음부터 성욕, 섹스 라는 단어를 남발하고 있어도, 이 시에서 주는 기운을 따라올라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소설도 절반 정도 읽었으니, 끝까지 읽어보기는 하겠다. 어쨌든 그래도 뭘 어떻게 설명하는건지 잘 모르겠어서, 참말이지, 강의라도 듣고 싶은 심정이다. ㅎㅅㅊ님 만나면, 이 시에 대한 해석이나 부탁해야 할까보다.




그나저나 오늘 검색창에 신동엽 아이큐가 160이라고 떴던데, 오, 신동엽은 그럴만도 하지, 싶다가.... 흥. 대한민국 머리 좋은 사람들은 죄다 연예인만 하나보다. 연예인들은 아이큐만 공개했다하면 다들 그렇게 높더라. 다시 한 번 검사해보라고 하고 싶다. 늬들, 늬들이 말한 아이큐 안나오기만 해봐, 이 구라쟁이들아.




암튼간에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용히 생각 좀 해봐야겠어..난 머리도 나쁘니까 말이야..



나도 내 프로필 사진에 있는 안젤리나졸리처럼, 저 코트를 입고 저 가방을 들고 저 핏이 나오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ㅠㅠ

졸리는 치맥을 안하나?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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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13-11-28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김선우 좋아해요~!!
그녀의 산문집들은 한때 저를 점령했었어요. ^^
얼마 전에는 <거꾸로 가는 삶>이라는 시가 한동안 저를 멍~하게 만들었구요.
다락방님한테 김선우 시인의 이야기가 나오니까
다른 날보다 열 배쯤 더 반가워요.,

추운 아침이에요.
이런 날엔 스타일 생각말고 두툼하게 따뜻하게 입고 출근해야 하니까
안젤리나 졸리는 잠시 생각하지 말아요.
감기 조심하세요.

다락방 2013-11-28 12:12   좋아요 0 | URL
섬사이님의 댓글 읽고 검색해봤어요. 이런 시네요.


거꾸로 가는 생 - 김선우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의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 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 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 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지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하는 것도 다 걷혀
마치 이즈음이 그러기로 했다는 듯
붉은 동백 기진하여 땅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들도 즐거이 그러하리라는 듯

즐거워라 거꾸로 가는 생은
예기치 않게 거꾸로 흐르는 스위치백 철로
객차와 객차 사이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터저 나오는
강릉 가는 기차가 미끄러지며 고갯마루를 한순간 밀어 올리네
세상의 아름다운 빛들은 거꾸로 떨어지네


좋으네요. 김선우의 산문집을 검색해봐야 겠어요. (섬사이님 앞으로 자주 오시는 거 맞죠? 맞죠?)

2013-11-28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8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3-11-2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넌 대체 누구울 보고 있는 거야..내가 지금 여기 눈 앞에 서 있는데.......-by Jason Statham-

(정말 이렇다면 꿈만같은 일...)

다락방 2013-11-28 12:12   좋아요 0 | URL
므흐흐흐흐흐흐흐흐. 어제는 스맛폰으로 재이슨 스태덤 검색해서 아빠께 보여드렸어요.

아빠, 이 남자가 내가 좋아하는 남자야, 하고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Mephistopheles 2013-11-28 13:40   좋아요 0 | URL
아버님께선...자연스럽게..."12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 이란 노래가 떠오르셨을 껍니다.

다락방 2013-11-28 17:37   좋아요 0 | URL
므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밤늦게까지 재이슨 스태덤하고 같이 있는 상상했어요. 므흐흐흐흐흐흐흐흐

hnine 2013-11-28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대 중반쯤, 제가 제일 자주 한 생각이 그거였던 것 같아요. 이 직업을 평생 계속하기엔 너무 재미가 없다...직업을 재미로 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재미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몇년 후, 그 직장을 그만 뒀지요 ^^
신동엽 IQ는 160 '이었다' 더군요, 지금 160 이 아니라요 (IQ는 같은 연령대 사람들을 기준으로 하기때문에 계속 변할 수 있어요). 계속 10씩 떨어지고 있다면서요 ㅋㅋ
운동하는 암환자에 대부분 시선을 두고 있을때, 운동을 시켜주는 트레이너에도 시선을 돌리는 사람. 그런 사람 좋지요!

다락방 2013-11-28 12:16   좋아요 0 | URL
저는 재미도 없고 불만도 '별로' 없어요. 그래서 계속 쭉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현실안주형인가봐요.

아, 그런데 아이큐가 그런거에요? 같은 연령대 사람들을 기준으로 하는? 그래서 계속 변하는거에요? 아, 저 정말 몰랐어요. 그렇다면 신동엽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도 근거가 있는 말이겠네요? 물론 본인은 농담으로 했을지도 모르지만요. 마찬가지로, 아이큐가 예전보다 더 높아질 수도 있는 거겠군요.
연예인들이 아이큐 공개할때 다들 그러더라고요. 중학교 때 150 나왔다, 학생때 148 나왔다, 이렇게요. 150이나 148이면 정말이지 천재인데, 천재는 세상에 흔치 않은데, 그들 모두 다 연예인이 된거란 말인가....뭔가 신빙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건 아마도 천재이지 못한 제 불만...때문일지도 모르지만요.

제가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저 직업을 심각하게 생각해봤을것 같아요. 이직을 하는쪽으로 말이지요.

단발머리 2013-11-2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강신주가 그토록 김선우를 좋아하는건가'에서 의문 하나.

다락방님은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어디서 아셨을까. 혹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에서 알게 되셨다면, 그 책을 읽은 나는 왜 기억이... 안 나는 걸까.

'안젤리나 졸리는 치맥을 안 하나'에 의문 둘.

졸리는 아마도 몸매를 위해 안 먹을듯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럴 수 없나? 하는 생각에
코트를 바꾸면 된다는 생각. 검정색에, 단정하고, 몸을 다 가리며, 날씬해보이는 코트로.
올 겨울 유행한다는 매니쉬 코트. 오케이바리~

다락방 2013-11-28 12:17   좋아요 0 | URL
네. ㅎㅎㅎㅎㅎ <맨얼굴의 철학~>에서 읽었어요. 그 책 반만 읽고 계속 멈춰있는 상태 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젤리나 졸리는 치맥을 안하는것 같고, 저는 어제도 치맥을 했고....그러니까 저런 코트는 걍 쳐다보기만 해야하는 거...인거죠? ㅜㅜ
뚱띵이 파카나 입고 다닐랍니다. Orz

2013-11-28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8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8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8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8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9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3-11-2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선우하면 저는 <물의 연인들>밖에 생각나질 않아요.
아쉬워요. 끝내 못 읽어냈거든요. 지금이라면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김선우의 산문투는 제가 좋아하는 게 아니어서 더욱 못 읽은 거 같더라구요.
요즘 신경숙의 문투가 그렇게 느껴지는데.... 이게 다 한강 탓이라구요. 이제 한강 글이 아니면 읽히질 않는... 아우

어떻게 해야하죠 다락방님? 여성적이면서 유쾌한 소설 어디 없나요. 어서 이 여성성에서 벗어나야 겠어요. 유쾌를 통해서.

다락방 2013-11-29 09:19   좋아요 0 | URL
전 일전에 김선우의 [캔들플라워]를 몇 장 읽다 포기했기 때문에, 산문집은 어떤걸로 읽을까 고민해보다가 또 포기하게 되고 그러네요. 산문집을 하나쯤 읽어보면 좋을것 같긴 한데 말이죠. 이건 천천히..

여성적이면서 유쾌한 국내여자작가..라면 정말이지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도, 하나도 없네요. 아는 작가들의 이름을 떠올려봐도 모두들 하나같이 우울..하기만 하네요. 흐음. 꼭 국내여자작가..에 한정된 게 아니라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을 한 번 읽고 기분 전환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그 작품은 유쾌하고 따뜻하니까요. 검색해보니 무려 지금 반값이네요!!!!!!!!!!!!!!!!!!!!!!!!
 


이 책, [지금, 사랑해도 될까요?] 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상상의 친구'가 존재한다. '상상의 친구'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들이 '아이들의 부모'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는 보이지 않되, 아이들에게는 보이는 존재. 그들은 어른의 형태로 아이들의 옆에서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준다. 적절한 때, 그들은 아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격려를 준다. 다정한 우정과 보호도 함께준다. 아이들이 부모 때문에 슬프다거나 외로워할 때, 그들은 아이들의 옆에서 같이 아이스크림도 먹어주고 눈물도 닦아주기 때문에, 아이들은 당시의 고통과 외로움을 조금쯤 극복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들에게 더이상 그들이 필요없게 되었을 때, 아이들이 자랐을 때, 아이들의 곁을 떠난다.







이 '상상의 친구'란 존재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하고. 아이들의 옆에서 아이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들의 편이 되어줄 사람. 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좋으니, 아이들이 붙잡고 버틸 수 있는 다정한 존재. 그러나 말 그대로 이 존재는 '상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없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어른들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만 하는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에게는.





그럼 세라, 그녀는 말했고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이 셈을 시작한다. 하나를 세고 둘을 세고 셋을 세고 넷을 세고 다섯을 세고 여섯, 일곱, 여덟, 아홉을 세고 열로 넘어갔다가 잊어버렸다.

안 세?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말한다.

내가 세라고 했지? 세라고 했는데 왜 세지 않냐 몇 대까지 맞았는지 세지도 못하냐 잊어버렸냐 너는 그 정도 머리도 없는 짐승이고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하면 되겠네? 잊어버린 네가 순전하게 잘못했으므로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되겠다 세라 머리부터 꼬리뼈까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십 씨발 십이 십삼 사 오 육 칠 팔 다음이 뭐냐 응? 다음이 뭐야?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짐승을 다스린다. 씨발 상태가 되어 씨발년이 된 그녀는 그녀가 가진 짐승의 머리뼈부터 꼬리뼈까지를 다룬다. 짐승을 향해 팔을 휘두를 때 그녀는 관절을 어깨 뒤쪽까지 젖혀 완전한 힘을 싣는다. 어개를 움켜잡을 때는 엄지로 쇄골을 쑤시고 배를 때릴 때는 불시를 노리고 짐승의 자세를 바로잡을 때는 정수리에 돋은 머리칼을 쥐고 당긴다. 귀를 꼬집고 뺩을 때리다가 엉뚱한 모서리에 빗맞아 손가락을 비고 악 소리를 지르며 누웠다가 발딱 일어나 짐승의 목을 쥐고 흔든다. 때리는 쪽도 맞는 쪽도 구토를 하며 보내는 시간이고 그럴 때 그녀의 검은 눈은 쇠구슬처럼 작고 단단하다. 땀이 고인 얇은 턱은 악다불어 터질듯하고 귀는 창백하다. (pp.64-65)


















앨리시어와 동생이 엄마에게 얻어터질동안, 그들이 맞는걸 말리는 어른은 아무도 없다. 뒷짐지고 모르는 척 방으로 들어가는 아버지가 있을뿐. 앨리시어와 동생은 엄마에게 허구헌날 얻어터지고 온 몸이 아프고 쑤셔 잠도 안 올지경이 되어 방안에 누웠을 때, 욱씬거리는 몸에 약을 발라줄 어른도 없다. 상상의 친구? 허. 어림도 없는 소리다. 상상의 친구를 상상조차 할 여력이 앨리시어와 동생에겐 없다. 이런 앨리시어와 동생에게 가정폭력상담...따위? 개풀 뜯어먹는 소리다. 상담을 한 번 받고 앨리시어는 생각한다. 여긴 괜히왔다, 좆됐다, 고. 그래, 앨리시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머니도 모시고와요. 어머니도 모시고와서 같이 상담을 받으면 나아질 수 있어요. 아니, 이건 나아진다고 되는 게 아니야.



옳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 그러니까 나는, 앨리시어가 그런 마음을 먹는게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러면서도 앨리시어가 내내 생각하고 있는 '복수'를 응원했다. 앨리시어의 키가 어서자라, 힘이 더 커져, 얼른 엄마에게 맞짱을 뜰 수 있기를, 자신을 향해 내려치는 손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얼른 자라, 얼른. 얼른 자라라고. 앨리시어는 엄마를 때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폭력이 또 이어지면 안되는 거라고 내 의식은 말하는데, 그런데 나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폭력은 한 쪽이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앨리시어의 엄마가 폭력을 멈추기를, 상담을 받아 새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랄 수가 없었다. 그건 멀고도 멀어 보였다. 멀고도 멀고 끝은 보이지 않는 바로 그 길에 있는 것 같았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그 길을 가라고 누가, 아니 내가, 어떻게 말해. 두 눈 질끈 감고, 그래 앨리시어, 니가 하고 싶은대로 해, 끝내버려. 이를 악물고 동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겨버려, 한 방에 이겨버려! 그러는게, 온당하고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웅덩이를 바라보며 드문드문 앉은 다른 낚시꾼들처럼 긴 시간 동안 미동도 않고 앉아 있다가 찌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는 활기차게 줄을 감아올렸다. 마침내 흙바닥에 내던져진 물고기는 단단하고 맑은 살집을 꿰고 있는 척삭의 강한 힘이 느껴지도록 몸부림쳤다. 그것을 주워 양동이에 담는 것은 대부분 앨리시어가 할일이었다. 손바닥 속에서 빳빳하게 요동하는 그 힘이 징그럽고 두려워 앨리시어가 움찔거리면 앨리시어의 아버지는 그 모습이 재미나다는 듯 하핫 웃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가 잡은 물고기의 대부분을 웅덩이에 도로 놓아주었다. 집에서는 별다르게 말하는 법도 없다가 웅덩이 부근에서는 자신감이 넘치고 말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알어?

느긋하게 그는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목숨은 모두 가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가치가 있단 말이다.


(중략)


이 나이 되도록 인생을 살고 보니 그렇더라. 사람이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네 어미도 그렇고 다 그렇게 귀하고 불쌍한 거지. 세상 나고 자란 목숨 가운데 가치 없는 것은 없는 거다.


알어? 가느다랗게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뒤 그는 보란듯 웅덩이를 향해 양동이를 엎었다. 낚싯바늘에 주둥이를 찢긴 물고기들이 피로 탁해진 물과 함께 웅덩이로 주르륵 흘러들었다.


(중략)


알아? 너는 모르고 나는 안다는 식으로 그는 말하고 그게 그의 입버릇이지만 앨리시어가 보기에 그는 미개하다. 입을 찢었으면 먹든가 죽이든가. 입을 찢어놓고 도로 놓아주며 가치 있는 목숨 운운하는 인간은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pp.50-53)





어휴, 힘들어. 어젯밤, 뒤에 조금 남은 이 책을 읽고 잘까 하다가, 몇 년전 '송은일'의 [한 꽃살문에 관한 전설]을 읽고 잠자리에 들었던 때가 생각나, 그만두었다. 그 때, 온 몸이 두드려맞은듯, 내가 아팠던 기억 때문에,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으면 그 밤처럼, 내가 또 얻어맞은듯 욱씬거리는 느낌에 잠을 설칠 것 같아, 다음날 아침 출근길로 넘겼다. 넘겼는데, 아침에 읽었다고 더 나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지하철안에서 인상 빡 쓰고 읽으면서, 이 책은, 밤에도 아침에도 읽기에 적절한 때란 게 없다, 는 생각이 들었다. 잠을 못자는 것을 선택하느냐, 온전히 깨어있어 이 불편하고 아픈 느낌을 감당하느냐, 선택이 그 둘 중에 하나인데, 대체 이 둘 중에 뭐가 더 낫단 말인가. 휴- 



그러니까, '제임스 패터슨' 과 '가브리엘 샤보네트'가  말한 [지금 사랑해도 될까요?]의 상상의 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 상상의 친구는, 제임스 패터슨과 가브리엘 샤보네트가 있는, 미국에만 존재하는가 보다. 확실히 여기, 대한민국엔 없다. 확실하다. 







어제 알라딘 트윗과 오늘 나에게로 온 이메일을 통해, [폴리나]가 반값이란 걸 알게됐다. ㄴㄲ 님은 나에게 [나도 편식할거야]란 책을 '강력추천' 해주었다. 오늘 아침은, 이 두 책을 가뿐하게 지르고 시작해야겠다. 지금, 지르러 갑니다. (라고 써놓고 지금 주문하려니(AM10:51) 폴리나 반값할인 끝났다. 멘붕..)











그리고, 헌사.

어제 '줌파 라히리'의 신간 [THE LOWLAND]의 책장을 살포시 넘겨보다가, 거기에 적힌 헌사를 읽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헌사'만' 읽었다. 그 뒤는 다음으로 미루고..여튼, 그 헌사가 이랬다.



시작부터 나를 믿어준 카린에게, 그리고 끝까지 나를 지켜봐준 알베르토에게, 뭐 이런거 아닌가. 아.....근사해......멋져 ♡ 

빨리 번역되어 나왔으면..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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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1-2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책은 어제에 이어 다락방님에게 윈투스트레이트 핵펀치를 맞고 그로기 직전까지 가버렸군요...

다락방 2013-11-27 09:52   좋아요 0 | URL
아 어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랬는데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네요. 하핫;; 제임스 패터슨이 저 잡을라고 한국 오는거 아닌가 몰라요. 역시..제이슨 스태덤을 친구로 뒀어야 하는건데..그래야 나를 지켜줄텐데...쩝......

Mephistopheles 2013-11-27 10:21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분명 다음 다락방님의 책 헌사는

"for my lover jason statham....어쩌구 저쩌구 wooo so sexy..sexy....."

로 정해지겠군요..

다락방 2013-11-27 10:5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헌사는 너무 길면 별로 안멋져요. 짧고 굵게 가야 해요. 이를테면,

Jason Statham, you are mine.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진짜 저렴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레와 2013-11-27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먼저 읽은 언니가 두껍지도 않은 저 책을 '아휴 아휴' 한숨을 쉬면서 하루 온종일 들고 있었어요.
그걸 보고 '이번 황정은 책은 읽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죠..
도대체 아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시련은 누가 준 걸까. 저기 인용해준 두 구절만 봐도 먹먹함을 넘어 갑갑하고 힘든데..
아휴.........................................................................


우리의 그녀, 줌파 신간 번역소식은 아직인겁니까?!
이번엔 번역에 도전해 보는게 어때요?! 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3-11-27 10:50   좋아요 0 | URL
황정은은 백의그림자가 짱이구나, 위에도 썼지만 정말 그래요. 자꾸 맞고, 복수를 다짐하고 그런 사람들을 보는 게 힘겹더라고요. 어휴..

아니, 번역이라니..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전 저 짧은 헌사 저렇게 써놓고도, 맞나? 아닌가? 이렇게 하면 안되? 몇 번을 고민하고 있는데. 뭐, 누군가 제대로 된 해석을 내놔주겠지, 이런 생각하면서. ㅎㅎ
만약 번역하면 저는 옆에다 사전 끼고 예순살이 되야 완성할 수 있까말까 할듯. 그마저도 초어설프게..

2013-11-27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7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3-11-27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Carin과 Alberto는 누구일까, 저는 누구에게 Carin 또는 Alberto가 되어준 적이 있던가, 그거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아직 줌파 라히리의 책을 한권도, 한권도! 안 읽었답니다 ㅠㅠ

다락방 2013-11-27 13:12   좋아요 0 | URL
오, 나인님. 아직 줌파를 만나지 않으셨군요. 그런데 나인님이 줌파를 읽으신다면, 저만큼 줌파를 좋아하실까요? 어쩐지 별로 안좋하실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혹여 읽게되신다면 어떠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카린과 알베르토같은 친구를 두는 것도, 또 그런 친구가 누군가에게 되는것도, 모두 근사한 일 같아요. 정말 근사한 일요.

자작나무 2013-11-2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근후 다과장님의 책을 읽는 일이 제게는 최근 들어 가장 근사한 일이예요.
나중에 보다 시간이 나면 소설을 써보세요.
꼭이요.

다락방 2013-11-28 08:25   좋아요 0 | URL
어떻게, 책이 읽기에 괜찮으신지 모르겠네요 ㅜㅜ

2013-11-28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8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8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13-11-28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편식할 거야, 저도 강력 추천이요.
읽고 나면 아마도 장조림이 먹고 싶어질 거예요. ^^

다락방 2013-11-28 08:26   좋아요 0 | URL
폴리나 는 결국 못사고, 나도 편식할거야, 는 샀어요. 얼른 읽고 싶어요. 토요일에나 배송될텐데... ㅎㅎ
장조림은 지금도 먹고싶어지네요. 하핫
 

 

 

 

 

 

 

 

 

 

 

 

 

 

 

 

"내일이 되면요" 라고 시마모토는 말했다. "내일이 되면, 전부 얘기해 줄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묻지 말아요.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 지내기로 해요. 만약 내가 지금 얘기해버리면, 당신은 이제 영원히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돼버려요."

"어차피 나는 원래 자리로는 돌아가지 못하오, 시마모토. 그리고 어쩌면 내일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오. 그리고 만약 내일이 오지 않으면, 나는 당신이 가슴에 품고 있는 많은 것들을 하나도 모르는 채 끝나버리게 되는 것이오" 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내일이 안 온다면 좋겠지만" 하고 시마모토는 말했다.

"만약 내일이 정말 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있을 수 있는 거예요."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그녀는 내게 입맞춤으로 그것을 막았다.

"내일 같은 것은 송골매에게 먹혀버리면 좋을 텐데." 라고 시마모토는 말했다. "내일을 먹는 것은 송골매라도 괜찮나요?"

"괜찮지. 꼭 맞아. 송골매는 예술도 먹지만, 내일도 먹지."

"소리개는 무엇을 먹었더라?"

"이름도 없는 사람들의 사체"라고 나는 말했다. "송골매와는 전혀 다르지."

"송골매는 예술과 내일을 먹나요?"

"그렇소."

"어째 상당히 근사한 짝이로군요."

"그리고 디저트로는 이와나미 신서의 목록을 먹지." 시마모토는 웃었다. "하지만 아무튼, 내일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pp.225-226)

 

 

 

자, 이것이 송골매의 출처다. 오천년만에 이 책을 펴들었다. 송골매 출처를 밝히고 인용하기 위해. 그러다 화들짝 놀랐다. 아니, 하루키의 책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하오체를..썼어? 책 속의 남자는 아내에게는 그렇지 않은데 내연녀에게는 이렇듯 하오체를 쓰고 있는거다. 으악. 하오체라니. 이제 무슨 로맨스소설이야? 왜 하오체를 쓰는거야? 안...안......안어울려 -_-

문득, 이 부분을 찾느라 조금 훑어보다가, 나 이 책, 최근에 나온게 있다면 최근걸로 다시 사서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모르오, 그렇소, 라고 말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하루키 책이라니. 후-

 

무엇보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거다. 이거..무슨 내용이었지? -_- 이 책에 송골매가 나온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까맣다. 아주 까맣다(까만밤 아주 까만밤 너와내가 사랑했던 아름다운밤). 킁킁.

 

 

 

 

 

 

 

 

 

 

 

 

 

 

 

 

 

 

참..진짜... 이 책은...내가 신랄하게 백자평 쓸 예정이지만, 무슨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컴플렉스 있는 두 사람이 만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써낸 책인 것 같다. 사랑은 아름답고 찬란하고 완전하고 완벽하여라, 오 마이 갓, 해피엔딩. 뭐 이런거? 어른들을 상대로 썼다면, 후우- 대체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가능할까. 아이들을 상대로 한 환상의 동화가 아닐까 싶다. 아마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라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이런 울트라슈퍼메가톤급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걸까? 운명적인 사랑, 그들이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패밀리. 그것이 완벽하고 아름답고 완전한 결말인걸까.

 

암튼, 됐고.

 

 

"제인과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알 수 없었다.

마이클은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며, 제인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마이클은 난생처음 겪는 이런 복잡 미묘하고 격한 감정에 몸까지 아픈 듯했다. 한참 동안 샤워기 아래 몸을 맡긴 채 서 있던 마이클은 타월로 몸을 감고 세면대 거울에 서린 수증기를 손으로 닦아낸 다음, 면도를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새삼 낯설다고 느끼며, 셰이빙 폼을 바르고는 성능 좋은 5중날 면도기로 살살 면도를 시작했다.

그때 일이 벌어졌다. 전에돈 한 번도 없었던, 생각조차 못한 일, 바로 면도를 하다가 베인 것이다. (p.166)

 

 

마이클은 항상 제인을 사랑해왔다. 그리고 우연히, 마찬가지로 평생 자신을 그리워하던 제인과 마주치게 된다. 그 둘이 보자마자 서로를 그리워했던 사실을 인정하며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뭐,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그들은 만나면서 행복해하고,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내게 있을까, 내가 꿈꾸던 완벽한 사람이야, 라는 생각으로 함께 지내다,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질 때는, 돌아서자마자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그녀를 만날 생각에 들뜨고, 그녀 생각을 하다가 면도를 해 베이는 일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지금 사랑하는 그 사람과의 미래를 생각해보고 고민해보는 일. 그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몇 년전의 토요일.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했었다. 다 늦은 밤,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그때만해도 나는 언제고 그에게 연락이 올지 몰라, 샤워를 하면서도 핸드폰을 들고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매어 있을 필요가 없었는데, 그 때는 핸드폰을 잠시도 손에서 떼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샤워하는 사이에 혹여라도 연락이 온다면, 내가 잽싸게 답하지 않는다면, 그렇게된다면 뭔가 틀어질 것 같아 그렇게도 조바심이 났다. 나는 네가 찾을 때 언제든, 어디서든 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반드시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샤워할 때도 꼭 그렇게 핸드폰을 들고갔고, 그 행동은 보답을 받아, 샤워를 막 시작했는데 연락이 왔다. 갑작스레 만나자는 전화였다.

 

평소의 나였다면, 아니 상대가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핸드폰을 받지 않거나 거침없이 '노'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갑자기 불러내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 밤에 나가는 것 역시 별로 내켜하는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상대가 그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동안의 내 행동과는 달랐다. 나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나가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샤워를 했다. 정성스레 화장을 하고 외출복을 차려 입었다.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망설이다 옷을 차려입고, 서둘러 밖에 나가서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가 기다리는 장소로 가기 좀 전에 내려, 쇼윈도에 나를 비춰보았다. 머리를 묶고 내 차림을 다시 점검했다. 괜찮아, 이 정도면 예뻐, 충분해. 그리고, 그렇게, 그에게로 갔었다. 그때는.

 

 

마이클이 샤워를 하면서 제인을 생각하는 장면 때문에, 나는 그때의 내가 생각났다. 샤워를 하며 그에게 연락을 받았던 일, 전화를 끊고 서둘러 샤워를 하던일, 샤워를 하던 내내 그를 만나러 갈 생각에 설레이던 일. 사랑에 빠졌다면 매순간이 사랑에 빠진 상대를 생각하느라 즐겁고 흥이나겠지만, 샤워를 할 때는 특히 더한것 같다. 샤워를 하는게 즐겁고 정성이 들어간다. 흥얼흥얼 콧노래도 부르게 된다. 평소엔 비누거품으로 몸을 닦았다하더라도, 사랑에 빠진 상대를 만나러 가기 전이라면, 향이 좋은 바디클렌져를 찾게 된다. 샴푸도, 린스도 모두 향이 좋은걸 쓰고 싶어진다. 이런 일들은, 윤종신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으악. 벌써 아홉시다. 오늘은 낮잠을 자지도 않아서 잠시후 잠들어버릴 것 같은데, 아흑, 그러면 월요일이 잽싸게 올텐데, 이 일을 어쩌면 좋담 ㅠㅠ

 

오후에 엄마와 뒷산에 산책을 다녀왔다. 어제도 나는 선물받은 와인을 따서 엄마랑 둘이 신나게 마시고 맥주까지 또 마셔서 기절한 듯 잠들었었는데, 좀 전에도 나는 또 한 병의 와인을 땄다. 그리고 또 엄마랑 신나게 마셨다. 지금 맥주를 더 마시고 싶은데 내일이 일요일이라 참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갈등중이다. 어째야하지...아 어쩌지.......

 

그리고 이제 무슨 책을 읽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싶었는데, 솔로몬의 위증이 계속 눈에 걸린다. 남동생이 먼저 읽은 터라, 내가 빨리 읽으면 슈퍼바이백으로 팔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쩝.....근데 뭘 저렇게 두껍고 세 권이나 되지. 걍 읽지말고 팔아버릴까. 그러면 왜샀지? 팔려고 샀나? 아- 뭘 어째야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다시 책장 앞에 서서 무얼 읽을까,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다. 읽어야할 책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다. 차라리 몇 권되지 않았다면 이런 결정장애가 오진 않았을텐데.. ㅠㅠ

 

이러는사이 일요일은 야금야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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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애편지 - 다락방님께
    from 세상에 분투없이 열리는 길은 없다 2013-11-26 00:08 
    어떤 상대에게 매혹되는가.사랑을 처음 시작하는 연인들이 흔히 그렇듯 문득 발견되는 동질성인가, 아니면 내게 전혀 없는 그 무엇인가. 그녀는 나와 다르다.그녀는 나와 같은 것을 봐도너무나 다르게 느낀다.처음엔 그 다름에 호기심을 가졌다. 아마 나는 여러 글 중에 단번에 그녀의 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그녀가 고기와 남자 아닌 다른 주제를 다룬 글일지라도 말이다.그녀의 글은 이를테면 독특한 체취를 가지고 있다.다르고 또한 아름답다.그래서 좋아져버렸다.
 
 
2013-11-24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5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13-11-24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연유가 있었군요.
아... 일요일이 1시간 20분 남았어요 ㅠㅠ

다락방 2013-11-25 13:05   좋아요 0 | URL
벌써 월요일 점심시간! (이 지나버렸네)
전 오늘 점심으로 순대국을 먹었어요. 아주 맛있었습니다.

레와 2013-11-25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오늘이 월요일이 쪼큼 반가워요.



저녁에 세븐스프링스 가기로 했걸랑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3-11-25 13:05   좋아요 0 | URL
난 지금 ㄷㅎ 님 꼬셔서 매운족발 먹으러 가자고 할까 어쩔까...아침부터 고민하고 있어요. ㅋㅋㅋㅋㅋ

moonnight 2013-11-25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저 책, 당연히 읽었건만 송골매 나온 건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능 ㅠ_ㅠ
저도 요즘 안 읽고 책장에 내내 꽂혀만 있는 책들 그냥 팔아버릴까 생각될 때 있어요. 사긴 왜 샀을꼬 한탄 -_-;;;;;
월요일도 곧 지나갈 거에요. 얼른 퇴근해서 와인마시고 싶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다락방 2013-11-25 13:06   좋아요 0 | URL
전 송골매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요. 저게 아내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 좋아하는 건지도 전혀 몰랐어요. 새로 번역된 걸로 사서 읽어봐야겠어요. 어휴..책을 읽으면 뭐해요. 이렇게 아무 생각이 안나는데 ㅠㅠ

전 토요일도 일요일도 와인을 마시고 아주 행복했습니다. 그런데도 집에 와인이 또 남아있어요. 떨어지지 않게 사두어야겠어요. 홍홍홍

건조기후 2013-11-25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왜 하필 송골매였을까? 또 궁금해지네요. ㅎ
송골매 송골매 자꾸 쓰고 읽으니까 단어가 이상하게 보여요 ㅎㅎ 뭐든 그렇지만.


서재도 오랜만에 오니까 낯선데, 다락방님 덕분에 온기가 느껴져서 참 좋아요. ^^

다락방 2013-11-25 16:12   좋아요 0 | URL
하루키는 저렇게 뜬금없이 툭툭 잘도 내뱉는 것 같아요. [댄스댄스댄스]에서는 '수에즈 운하'도 뜬금없이 툭 내뱉거든요. 저는 하루키의 그런점이 엄청!!!!!!!!! 좋아요. 므흐흐흣

건조기후님이 온기를 느끼셔서 좋다니, 저도 좋습니다. 자주 들러주세요!
:)

2013-11-25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5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13-11-2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런 때가 있었지요.. 벌써 오래 전 일인데, 그 때의 감정은 순식간에 다가오네요~ 그런 순간을 겪고.. 그러고 시간이 한참 지나고.. 우연히 그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런 기분을 느꼈어요. 사람의 마음은 참 알 수가 없네요..ㅎㅎ 책 내신 거 축하드려요~~ 당근 12쇄보다 훨씬 많이!!!! 아.. 싸인 받아야 하는뎅 ㅎㅎ

다락방 2013-11-26 17:48   좋아요 0 | URL
아니, 이게 얼마만입니까, 꼬마요정님! ㅎㅎ 오랜만입니다.

저는 그 당시에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는 거, 그런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느끼게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고 그 순간이 가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경험, 그런 감정이 내 것이 되게 해줬으니까요.
그런 경험이 매순간 오질 않잖아요.
물론, 꼬마요정님 말씀처럼, 이제는 더이상 그 사람에 대해 그런 감정이 들진 않지만 말예요.

카스피 2013-11-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늦었지만 책출간 축하드려용^^

다락방 2013-11-26 17:4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