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문학박물관 - 구지가에서 김소월까지 한 권으로 보는
장세현 지음, 경혜원 그림 / 국민출판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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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가 서로 정답구나.

                     외로운 이 내 몸은

                     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여기저기 나오는, 옛날에 배웠다는 기억을 자극하고, 그떄의 학창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에 넋을 빼고 읽었습니다. 위의 황조가는 아마도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웠던 듯 합니다.-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기억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네, 지은이가 유리왕이고, 거기에 연관된 여인들이 치희와 화희라는 둥, 느껴지는 감정과 그 뒤에 얽힌 사연이 어떻다는 둥 하는 시험에 나오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수업시간에 읊었던 듯 한데, 지금 들여다 보며 반가움을 느끼는 것은 그러한 것들보다는, 아마도 당시에 이 시를 읽으며 느꼈던 감정적인 세밀함을 다시 느끼게 되는 것으로 인한 것일 듯 합니다. 절제되었으면서도 세련된 감정표현이 당시에 뇌리에 상당히 강렬하게 각인되었나 봅니다.

 부제 '구지가에서 김소월까지 ...'에서 보듯이 이 책은 우리 문학사의 의미있는 작품이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맟추어 꾸며 놓았습니다. 학교를 다니노라면 책속의 내용 모두가 한번쯤은 언급되고, 또한 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만큼 우리 문학을 대표하고, 우리 문학사의 발전과 변화에 한 획을 그은 의미있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겠지요. 그리고 <가시리>나 <청산별곡> 같은 경우는 고려시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에 의해서 가요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진 역사와 문화적인 정취가 여전함을 나타내주는 예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책의 구성은 수로왕 신화의 <구지가>에서 진달래꽃의 민족시인 <김소월의 시>까지 총 25편의 작품과 인물에 연관된 이야기와 작품속 이야기, 그리고 작품과 연관된 더 깊은 이야기를 담은 '한걸음 더' 라는 형식의 스물 다섯 꼭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거론된 작품들은 이외에도 <공무도하가>, <여수장우중문시>, <서동요>, <제망매가>, <정읍사>와 <치술령곡>, <토황소격문>, <화왕계>, <가시리>, <청산별곡>, <용비어천가>, <금오신화>, 황진이의 시, <관동별곡>, <홍길동전>, <어부사시가>와 <오우가>, 사설시조,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 <허생전>과 <호질>, 정약용의 시 등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논술 등에 대한 관심으로 아이들에게 책읽기를 많이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이면이 있더라도 순수하게 독서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겠구요. 하지만 가끔씩 너무 학습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서 아이들의 필독서에 또는 문학전집속에 들어있는 어른들에게도 어려울 작품들을 보며 씁쓸함을 느낄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그러한 작품들을, 지식이라는 형태로 아이들 머릿속에 억지로 구겨 넣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의 마음 때문입니다. 문학작품이라는 것이 삶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터인데 말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도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그런 염려 비슷한 것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어린이의 범위를 어디까지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정서가 묻어나고 조상들의 삶과 나라에 대한 고민과 충정이 담긴, 또한 세상을 향한 호탕한 기상이 담긴 작품을 아이들에게 소개한다는 의미에서의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이런 좋은 내용을 너무 일찍 아이들에게 지식으로 집어 넣으려는 조바심에서 비롯된 기획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이 책을 집어들고서, 여러 작품속을 여행한 뒤에 그 작품들의 문학사적인 가치나 의미 등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조상들이 이러한 마음과 정서, 기상을 가지고 살았구나'하는 느낌을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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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3
존 보인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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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아홉살짜리 두 아이, 생일도 같고, 세상을 보는 눈높이도 같고, 또한 철조망이 사이에 있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도 관심도 우정도 동일하였던 두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어른들이 구분하여 놓은 차이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 같은 하늘아래, 같은 땅을 밟고 있지만 어른들의 구분지은 세상이 한 아이는 철조망 안쪽의 갇히게 만들고, 한 아이는 그 바깥쪽 자유로운 세상의 권력자의 아들이지만- 그런 권력의 유무나 차이는 둘 사이에서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아홉살 선한 영혼의 우정 이야기입니다. 아우비츠의 가스실에서도, 그리고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공포에 잠기는 이유도 모르고, 단지 친구의 손을 잡고 그를 지켜주고 그와 함께 있다는 것만을 의미있게 여기며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갔던 수용소 사령관의 아들인 소년 브루노와 수용소 안에 갇혀있던 그의 유대인 친구 쉬뮈엘의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 유난히도 강조된 '두 아이의 슬프고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라는 멘트에 현혹되어, 읽는 내내 작가가 두 아이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리도 각박하고 메마른 어른들의 세계에서 만나는 두 아이를 소재로 삼고, 결국은 두 아이가 영문도 모르는 채  -특히 수용소 사령관의 아들이 브루노의 죽음의 경우- 죽어가는 결말까지 내달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표를 무수히 되뇌이며 읽었습니다. 단지 소년들 사이의 지고지순한 우정을 -물론 우정이라는 주제도 중요하지만-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지은이가 이런 환경과 이야기의 고리를 연결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베를린에서 평화롭게 살던 브루노의 가정이, 아버지의 아우비츠 -아마도 실제 역사에서는 아우슈비치를 의미하겠지요- 수용소의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풍랑이 일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가족 모두가 내키지 않는 일이었고, 특히 할머니의 경우는 나치에 부역하는 아들의 모습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이야기 중에 나오는 코틀러 중위의 아버지도 아마 그러한 거부감으로 스위스로 망명한 사람인 듯 합니다-. 베를린의 넓은 집에서 구석구석 탐험을 하며 지냈던 브루노는 아우비츠의 작아진 집에서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용소 안의 줄무늬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유대인들을 들여다 보며, 이런 저런 의문을 품고 지켜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선 탐험(?)에서 수용소 철조망 너머에 있는 쉬뮈엘을 발견하게 되고, 둘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아이들만의 이야기로 우정을 쌓아 갑니다. 중간에 가슴 아픈 배신의 장면도 있고, 쉬무엘의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아버지가 사라지고, 또한 안과 밖의 다름을 브루노가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한 어색함도 있지만, 어린 아이의 맑은 영혼은 그러한 다름과 차이를 상관하지 아니하고 더욱 깊은 우정을 맺어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브루노의 가족이 베를린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쉬뮈엘은 아버지를 잃어버린 날, 두 아이는 헤어짐의 아쉬움도 달랠 겸, 쉬뮈엘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수용소 안으로 탐험을 나서기로 합니다. 다음 날 비에 젖은 땅을 맨발로 밟고서 드디어 브루노가 철조망을 넘어 수용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줄무늬 파자마에 웃옷과 모자를 쓰고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순전한 영혼들의 아름다운 우정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어른들이 세워놓은 구분과 폭력으로 인해서 그러한 순전한 영혼이 죽음의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부분을 통해서, 이러한 대비를 통해서 저자는 가장 중요한 말은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장면이었습니다.

 책을 덮으며 지은이가 두 아이의 우정과 죽음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물론 서로 다른 환경과 처지에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맑은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큰 주제였겠지만, 자꾸만 그 이상의 것들에 대한 물음과 답을 찾게 됩니다. 이야기 속에, 두 소년의 마주 손잡은 우정이, 미처 깨닫지 못한 폭력에 의해 가스실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과 브루노의 아버지가 브루노의 옷가지가 발견된 자리에서 철조망이 들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털썩 주저앉는 장면과 몇달후에 그가 군인들에게 끌려가면서 그것이 더 기뻤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마도 브루노의 아버지는 늦었지만 자신이 지휘한 야만적인 폭력에 의해서 자신의 아들도 희생되었다는 것을 깨달알던 듯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 모습을 통해서 비인간적인 압제가 핍박받는 이의 몸과 영혼만이 아니라 핍박을 가하는 권력자의 영혼과 몸까지도 갉아 먹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 쉬뮈엘이 브루노의 아버지를 보면서 생각하는 '그때마다 저렇게 악랄한 군인에게 어떻게 그토록 친절하고 다정한 아들이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을 품고 했다'는 장면과 브루노가 자신의 아버지를 엄하지만 든든한 아버지, 훌륭한 군인으로 자랑스러이 쉬뮈엘에게 말하는 장면의 대비를 볼 수 있는데, 이 장면에서는 동심에게 보이는 양극단적인 어른들의 모습과 어른들은 충분히 그리 살 수도 있다는, 또는 자신의 가족이나 이웃 또는 민족이나 종교적인 울타리 안에서의 편협함을 벗어나지 못하고서도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아버지, 좋은 부모로서 각인될 수 있다는 야유를 보내는 듯한 저자의 목소리를 느끼기도 합니다.

 지은이는 책의 마지막을 '브루노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물론 모든 것이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는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인 것이다.'라는 말로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거듭 반복하여 읽으면서 아름다운 우정 이상의 역사가 남긴 아픔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다시 듣습니다. 나의 아이들도 후에 이 책을 읽으며, 그러한 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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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빨간 스포츠카 달을 담은 책그릇 2
프레데릭 니오베 지음, 윤정임 옮김, 박상민 그림 / 책그릇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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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에게 반짝거리는 새 차와 그 차의 주인인 아빠는 어찌보일까요? 아마도 친구들 앞에서는 멋지다고 자랑을 하겠지요. 더구나 빨간색의 쑥 빠진 스포츠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어느 순간 자신은 그 차에 탈 수가 없고, 아빠는 자신보다 그 차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거나 애지중지 한다고 오해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요.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이 멋쟁이 아빠에게서 느낀 그런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이들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예민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주인공 사무엘의 아버지는 멋진 빨간 스포츠타를 가진 멋쟁이입니다. 그 차에는 좌석이 둘뿐인데, 사무엘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앞좌석에 앉을 수 없는 관계로 그 차를 타보지 못하였지요. 하지만 사무엘의 진짜 속내는 아빠의 빨간 스포츠카를 타보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걷는 것을 싫어하는 관계로 아빠가 차를 핑계로 사무엘을 데리러 학교에 잘 오질 않으신다는 것이고, 아마도 이 부분은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에 대한 주인공의 갈급(?)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을 학교에 데리러 오고, 자신의 취미에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손잡고 걸어주는 그런 아버지를 바라는데, 아버지는 출장이다 회의다 하는 일에 바빠서 정작 사무엘을 챙기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인공의 서운함이 쭉 진행하다가, 친구 벤자민의 도움으로 멋지게 해결됩니다. 열쇠가 사라져서 차를 몰고 다닐 수 없게 된 아빠가 열쇠가 사라진 사연을 듣고서는, 결국 자신의 출장이 끝나면, 걸어서, 시간안에, 사무엘을 데리러 학교에 오기로 '약속, 도장, 사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읽으며 군더더기 없이 아이의 눈높이로 보는 세상을 잘 표현해 놓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단순하긴 하지만, 톡톡 튀는 아이들만의 생각이나 말들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고, 또한 결말도 그러한 방식으로 마무리가 되구요. 또 한가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무엘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있는 빨간 스포츠카를 보며 허탈감(?)을 느끼곤 하는데, 내게는 우리 아이들이 사무엘 아버지의 빨간 스포츠카와 같은 것들이 없나 하는 반성도 함께 하게 됩니다. 너무 나의 일이나 생각, 환경 등에 억눌려서 사무엘처럼 내 아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보지 못하거나 또는 느끼지 못한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책을 보면서 생기는 바람 한가지는, 우리 아이들도 엉뚱하지는 않게 사무엘의 친구 벤자민 처럼 가끔씩은 친구들에게 멋진 모습을 선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도우려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람이겠지요. 멋진 아이들, 그리고 멋진 아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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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와 보랏빛 구두 조약돌 문고 5
홍종의 지음, 이현주 그림 / 섬아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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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아빠와 여자아이, 그리고 가족을 떠나 자신의 꿈을 향해 타국으로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데 제목이 '소나무와 보랏빛 구두'네요. 이들은 가족이 아닌데, 작가는 이 둘을 제목으로 골랐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보랏빛 구두를 끝까지 지켜주던 이가 소나무입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자신의 밑둥 근처에 떨어진 보랏빛 구두가 주인의 품에 안길때까지, 자신의 좋은 열매를 청설모에게 먹이기로 약속하고 보살펴 주는 이가 바로 소나무입니다. 그리고 보랏빛 구두는 소녀가 교통사고후에 마비된 자신의 발을 보며 애타게 찾던, 그리고 그 어머니가 그런 딸의 소망을 더듬어 찾아나선 것입니다. 소녀가 자신을 떠난 엄마를 원망하며 창밖으로 내던지려고 하다가 결국 사고를 당하게 된 이유가 되기도 한 신발입니다. 그 전에는 외국으로 떠나기 전에 소녀의 엄마가 아이에게 사준 신발이었습니다.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손길과 마음이 담긴 물건이었지요. 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미워 그걸 버릴려고 해서 벌을 받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사고를 수습했던 아빠의 친구가 한짝을 가져왔을 때, 아이는 그걸 신고서 한쪽 발을 조금이나마 움직였습니다. 바로 이 가족에게 그 분홍빛 구두 나머지 한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서로에게 생채기 난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 남겨진 사고의 후유증까지도 치유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속의 가족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상아라는 아이지만, 한 가족이 그 의미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데는 그외의 것들이 필요하다는 속삭임을 듣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집도 필요하고 음식도 필요하고.... 등등의 것들을 덧붙일수 있겠지만,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면에서 가족이라는 유대관계가 끈끈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다는 외침을 듣습니다. 바로 보랏빛 구두와 소나무지요. 보랏빛 구두는 아이가 엄마를 느끼고 생각하게 해주고,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소망으로 생각했던 이유를 들여다 보면, 그것은 바로 부모의 사랑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됩니다. 가정의 한 축을 이루는, 아니 한 축이라고 하기 보다는 기둥이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부모의 사랑 말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중심축이겠지요. 그리고 소나무는 가족의 바깥에 있지만, 수고를 아끼지 않고 한 가정의 소망을 거들어 주고 지켜주는 존재입니다. 아마도, 이웃이나, 지역공동체, 또는 국가, 다르게 생각한다면 종교적인 것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역경속에 내던져진 가족의 가치와 존재의미를 지탱해주는 것들이라면 모두가 소나무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 보면 이 이야기는 나 자신의 가치에서 부터 시작하여 가족의 사랑과 이웃의 가치,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내가 성심을 다하여 하는 작은 행위-소나무처럼-의 가치와 의미까지도 들려주는 동화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아이가 이 이야기를 읽더라도 이리 깊이 생각하지는 않을 듯 하지만,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짚어본 작가의 의도였습니다. 맞는 부분도 엇갈린 부분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작가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부모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홍빛 구두와 소나무가 있는 세상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멋진 가족, 씩씩한 어린이를 그리면서 말입니다. 나도 지난 봄에 우리 아이에게 분홍빛 구두-또는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들- 를 선물했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그리고 매일, 내 삶속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에게 기쁨이 되는 분홍빛 구두를 선물하는 부모로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멋지지 않는가요! 아이의 마음속에 새겨진 분홍빛 구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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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령은 왜 지옥에 갔을까? - 같이 읽는 동화 책도령 이야기
김율희 지음, 이윤희 그림 / 예림당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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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책을 무척 좋아하는 도령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즘 학부모들이라면 책좋아 하는 아이를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하겠습니까? 하지만 조금을 넘어서 너무 과하게 책을 좋아하는 우리의 주인공은, 밥 먹는 것도, 옷 입는 것도, 편찮으신 어머니 봉양도 뒤로 한 채 오로지 책속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먹여주고 입혀주시며 돌보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우리 책도령님 그만 굶어 죽고 맙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저승사자를 따라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할까요? 저도 책만 읽은 죄밖에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이런 ...... 염라대왕님 앞에서 거론되는 죄가 수도 없이 많네요. 삽화에 보면 죄목을 적은 두루마리가 끝이 없어 보입니다. 책만 읽은 죄, 하지만 그러느라고 사람으로서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추궁이 더 무서워 보입니다.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은 죄에서 부터 시작하여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린 죄, 게으른 죄, 혼인하지 않은 죄, 제 몸을 돌보지 않은 죄 등등등......책만 읽다가 지옥에 간 사람에게도 저리 많은 죄목이 있으니, 이런 저런 말썽을 일으키며 사는 우리들에겐 얼마나 많은 죄목들이 추가 되려나요.^^

 이런 책도령이 지옥에서도 제버릇 개 못준다고, 책달라며 아우성 쳐대니, 염라대왕을 비롯한 모든 지옥식구들이 손발들고 지옥에서 그를 제거할 궁리끝에 그에게 적합한 세가지 임무를 주는데, 책과는 아예 담쌓고 지내는 거울만 보는 처녀, 돈을 숭배해서 제사까지 드리는 부자, 밤낮 동네 아이들 쥐어패며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를 책에 빠지게 하라는 겁니다. 책도령은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 이 세사람을 돕는 과정에서 자기가 굶어죽도록 빠져살던 책읽기에 대한 의미를 드디어 깨닫게 되는 듯 합니다. 진정한 책읽기라는 것이, 물론 좋아서 가까이 하고 지식을 얻기도 하는 등의 목적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그 안에 든 지식과 지혜로 나를 바로잡고, 내 주변, 우리사회와 공동체를 살찌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굶어 죽을 때까지 미처 알지 못한 책읽기의 가치를 그가 알게 된 듯 합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으로 자신을 축출하려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지옥식구들의 기대에 반하여,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선언합니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겠소!' 이리하여 우리의 책도령님은 지옥의 초대 도서관장이 되시나 봅니다. 이 세상의 어떤 도서관보다 멋지고 의미있는 도서관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부분입니다. 여기저기 안식을 얻는 지옥의 영혼들의 모습이 담긴 삽화도 그런 책도령의 마음을 잘 표현한 듯 합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들에는 책을 대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책을 통한 지식의 습득과 간접 경험과 같은 일반적인 이유들에서 부터 시작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들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책도령이 살던 시대에는 책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보다는 좀 더 배우고 있는 사람들의 소유물이었을 것이고, 당시에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 단순한 지식습득이라는 측면 이상의 의미 즉, 자기 수양이라는 의미가 항상 따라 다니던 시대였으리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래서 당시의 선비들은 크건 작건 자신의 서가에 의미를 새긴 이름을 걸고 그 속에서 자신을 채근하며 살았던 흔적들을 볼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가치는 물론 현대에도 여전히 바라지 않은 것들이겠습니다. 다만 현대에는 좀더 실용적인 면에서의 책의 가치가 많이 강조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우리가 책을 통해서 지식을 얻고, 학문은 배우고, 생활에 적용하는 과정속에서 얻어야 하는 중요한 가치는 그러한 실용적인 면 이상의 것들, 우리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런 책읽기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속에서 책도령이 도왔던 세명의 주인공이 변화되는 모습 - 즉 거울만 쳐다보던 공주가 자신을 찾아 길을 떠나고, 돈에 제사를 지내던 최부자가 돈보다 더 중요한 삶의 가치를 찾고 실천하는 모습, 그리고 말썽꾸러기 개똥이가 마음을 열고 아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는 모습- 속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읽기의 예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 책도령 자신의 모습을 뺄수가 없겠습니다. 안락한 천국행을 포기하고 어렵고 힘든 지옥의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실천, 이것은 책을 읽고 깨달아 변화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일테니까요. 나의 아이들도 저자가 들려주는 이런 모습속에서 책읽기의 귀하고 소중한 의미를 깨우치고, 그러한 가치를 삶속에서 나타내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살아있는 독서를 배워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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