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토지 제1부 1 - 박경리 원작
박경리 원작, 오세영 그림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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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 님의 <토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시대의 가장 자랑스러운 문학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가장'이라는 말에 토를 달고자 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더 많은 분들은 고개를 끄덕이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토지>를 제일 처음 대했을 때는 아마도 텔리비젼 드라마를 통해서였던것 같습니다. 매회 빠지지 않고 본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서희의 매서운 눈빛연기와 양복입은 조준구의 교활함 섞인 웃음연기, 서희와 결혼한 길상이 그녀 앞에서는 항상 경직되이 딱딱하게 표현되던 모습  등이 뇌리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그리 남은 희미한 빛깔의 드라마를 통해 본 <토지>가 내가 처음 체험한 빛깔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5부와 완결편 16권이 나오기 전부터 읽기를 시작해서 마지막 16권까지 몇번이고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억척스럽게 읽기를 스스로에게 강요하며 여름방학을 방바닥에 뒹글며 읽었던 때였습니다. 지금도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힌 열여섯권의 두툼한 모습과 토지사전, 몇권의 비평서 등을 보고 있노라면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곤 합니다. 한권 한권 뒤로 넘어갈 때마다 앞에서 읽은 내용들은 이미지로 흩어져 버리고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있지 못해서 불편하던 기억과 언젠가는 다시 시작하여 읽으리라는 다짐을 아직까지 지키지 못함으로 인한 안타까움, 그리고 마지막 완결편의 책장을 덮을 때까지 나름대로 지난했던 시간들에 대한 고통스런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때문인 듯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면에는 마지막장을 덮으며 참 행복했었다는 기억도 있습니다. 열여섯권에 쌓인 작가의 언어를 내가 읽어 냈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체험이 <토지>를 제대로 몸으로 부대끼며 느낀 것이라고 아직까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토지>는 제가 손도 대지 않은 것이니 논할 것이 없겠고, 이번에 이리 만화로 태어난 토지를 1권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토지에 대한 세번째 체험인 셈입니다. 하지만 처음에 소개된 인물소개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낯설지 않지만, 이리 대하게 되는 책과 각개의 인물들은 낯설기 그지 없습니다. 1권에 나오는 이야기의 내용이 다른 것도 아닌데 이리 전혀 다른 작품처럼 낯설게만 다가옵니다. 아마도 매체의 표현방식에서 오는 상이함이겠지요.

 저자는 이 만화를 16권으로 계획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부가 7권이니까 아마도 가장 중점적인 부분이 되고 특색을 보여주는 -즉 작가가 원작을 세밀하고 깊이 있게 해석하고 나름대로 표현한 역량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부분일 듯 합니다. 그리고 만화라는 것이 글로만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여러 상상의 여지를 많이 남겨두는 소설 자체에 비해, 인물이나 각각의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수반되는 것이므로 원작의 뼈대에 살이 조금 더 많이 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해석이 담긴 표현이 들어가고, 그러한 과정이 기존의 소설 토지와는 다른 특징과 개성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1권에는 각 인물에 대한 소개라고 생각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과 별당아씨와 구천의 야반도주, 용이와 월선의 사랑, 조준구의 등장정도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느끼는 즐거움이라면 각 인물에 대한 작가의 탁월한 묘사를 보는 것과 각 장면들에 들어간 세밀한 필치를 통해서 단순한 사실표현 이상의, 작가 자신의 해석에 대한 것들을 담으려는 배려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1권을 읽은 것이니, 작품에 대한 평가는 조금 미루는 것이 예의일 듯 하구요. 하여간 이리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토지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대를 가져보는 바입니다.

 얼마전에 신문기사에서 박경리 님이 자신은 원작 <토지>를  토대로 만든 영화나 드라마는 보지 않았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오래전에 드라마 토지를 칭찬하셨던 기사도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정확하지가 않으니 뭐라고 못하겠네요.^^- 하지만 이번 만화에 대해서는 작품을 내신 만화가의 역량을 기대한다는 내용의 인터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한번 접고 받아들여야 할 부분일 듯 합니다. 원작자의 말에 '삶의 모습'이라는 제목의 글로 만화가 오세영님의 역량을 기대하신 박경리 님의 글속에 이런 구절이 문득 눈에 들어옵니다. '..... 결국 만화도 인간을 소재로 하는 만큼 연극적 요소, 소설과의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때론 황당하기도 하고 장난스럽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겠으나 원형을 향한 구심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끝으로 바라는 것은 만화 <토지>가 원작의 뼈대로 나타났으면 하는 것인데.....' 이 안에서 저는 원작자의 기쁨보다는 염려를 먼저 느낍니다. 내가 느끼는 낯섬보다 원작자는 아마도 더한 낯섬을 느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낯섬이 작품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에 더 어렵고 난해하기까지 합니다. 원작 <토지>는 이리 드라마로 해석되고, 만화로 해석되고, 또한 청소년들이 읽기에 알맞게 다시 씌여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16권-현재는 21권- 빼곡히 채워진 작가의 언어를 대신하지는 못할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설명하고 이해하기 쉽게 돕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나중에 나의 아이들에게는 할 수만 있다면 본래대로의 토지를 먼저 읽히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세영님의 꿈과 노고와 열정을 기대하고 말씀하신대로 작품을 훼손하지 않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높이 사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면보다는 어차피 다른 표현 형식으로 다시금 작품을 세상에 내 놓는 거라면, 장르에 맞는 세밀한 계획과 시도로 토지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수 있도록 작가가 자신의 혼신을 쏟아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거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긴 소설 토지가 드라마로, 만화로 영화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풀이되는 것은 기쁜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방대한 스케일과 길이로 인하여 현대인에게 읽히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작품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도 함께 마음속에 묻어남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다른 감상은 다 뒤로 하고 오세영님의 만화 토지만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정성을 들여야 하는 작업을 이리 용감하게 시작하여 세상에 그 소산물을 내놓았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박수를 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즐겁고 보람된 시간들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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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이라고요, 곰! 책꾸러기 5
프랭크 태슐린 지음, 위정현 옮김 / 계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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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르고 분명한 사고력을 지닌 한 개인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계속 듣게 되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이 이야기에서 '곰'은  거짓을 주장하는 다수의 힘에 영향을 받는 개인이나 국가를 상징한다. 거짓말을 계속 듣다 보면 나중에는 그것이 사실처럼 여겨져서, 자신이 원래 품고 있던 신념은 무너져 버린다. 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리는 변하지 않듯, 결국 본래의 생각과 논리에 따라 거짓을 판단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1946년 저자 프랭크 태슐린이 이 작품에 "거짓 주장에 휘둘리지 않기"라는 제목으로 올린 작가의 말입니다. 작가가 직접 쓴 글이기에 아마도 다른 어떤 작품설명보다도 더 이 작품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뭔가 느낌을 주기는 하겠지만 작가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기에는 조금 난해한 문제일거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자신이 곰임을 주장하지 못하고 공장의 노동자들과 동일하게 등을 보이고 기계를 다루는 일을 하게 되는 곰과, 곰을 곰이 아니라고 우기고 결국 다른 노동자들처럼 일을 하게 만드는 탁월한(?) 관리자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 문명의 기계 만능주의와 인간 소외를 날카롭게 풍자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를 연상하게 됩니다. 조금은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기계를 다루는 것이 아닌, 기계가 사람을 부리기 시작한 시대의 초입에서 사회의 변화를 겪었던 두 사람 사이에 문제의식의 한 끝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낙엽이 지고 기러기떼는 모두 남쪽으로 가버린 어느 겨울, 곰 한마리가 겨울잠을 자기 위해서 당연히 동굴로 들어가 몸을 눕힙니다. 그리 곰이 동굴안에서 깊은 잠에 빠진 겨울동안에 동굴밖은 숲의 나무가 베어지고 산이 깍여서 거대한 공장지역으로 변해 버립니다. 봄이 오고, 멋진 봄을 기대하며 공장 건물아래서 잠이 깨어 동굴입구 -공장의 지하실 문인듯-로 나온 곰에게 보인 것은 숲과 나무와 꽃은 사라져 버리고 대신 차갑게 서있는 콘크리트 건물과 연기를 내뿜는 굴뚝들입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 곰에게 이제부터는 그것을 확인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곰을 발견한 공장감독은 어서 일하러 가라고 재촉하지만 아직 곰은 자신이 곰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좀더 높은 분들 -자신의 직위만큼이나 방도 창문도 책상도 더 커지고, 전화기며 여비서들의 숫자도 늘어나게 되는- 에게 돌림빵을 당하며 곰처럼 꾸민 멍청이일 뿐임을 강요당합니다. 하지만 곰은 아직까지는 자신을 곰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곰은 동물원이나 서커스단에나 있는 거라는 걸 확인시키기 위해서 높은 분들은 곰을 그곳에 데려가서 다른 곰들과 대면시킵니다. '얘가 곰으로 보이니?' '아니요. 수염도 깍지 않고 털옷을 걸친 멍청이예요.' 결국 곰은 곰이 되지 못하고, 공장에 돌아와 노동자가 되어 기계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수염도 깍지 않고 털옷을 걸친 멍청이로 말입니다.......  한데 공장이 폐쇄되고 노동자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곰은 뒤쳐져서 숲속에 남게 되고.....계절은 다시 겨울.... 그런데 동굴로 들아갈 듯하던 곰이 그대로 숲바닥에서 잠을 자네요..... 털옷을 걸친 멍청이로..... 하지만 추위와 외로움속에서 멍청이는 다시 동굴로 돌아가 예전의 곰, 아니 자신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털옷을 걸친 멍청이도, 멍청한 곰도 아닌 겨울이 되면 동굴로 들어가 동면을 취하는 본래의 곰으로 말입니다.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노동자들 틈에서 등을 돌리고 서서 기계를 돌리고 있는 곰이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이 나옵니다. 나는 곰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지만 결국은 무시당하고 노동자가 된 곰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생산의 수단이 자연적인 것과 크게 괴리되지 않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모습에서 기계와 다른 부수적인 발명품들에 의한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비인간화되는 시기로 넘어가던 격동의 시기였던 듯 합니다. 그러한 모습의 극적인 표현을 아마도 저자는 곰과 특색없는 노동자, 그리고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계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거대한 시대의 조류앞에서 각 개인은 힘없이 무너지고, 자신의 자리를 이내 잃어버리고, 그리 사는 것이 정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공장의 관리자들이나 동물원과 서커스단의 곰들은 외떨어져서 자신들과 다른 모습으로 나는 곰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곰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은게 당연하겠구요. 하지만 글의 말미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결국 곰이 본래의 곰으로 돌아가듯이 산업화되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참된 자아를 찾고 정체성을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 -또는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소망- 을, 그리고 그리되기 위해서는 본래의 자신, 자연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의 곰은 겨울이 되어 다시 동면을 위한 굴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연의 상태로 돌아감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회복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콘크리트 빌딩과 아스팔트 숲속에서 자동차 등을 이용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현대인들의 자아를 회복하는 방법과 모습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생깁니다. 이런 복잡스런 어른의 생각을 가지고 아이에게 이 책 어떻냐고 물으니까 아이의 하는 말이 "재미있어요."입니다. 그 뒤에 "왜?"라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저자의 깊은 생각을 이해할려면 좀더 자라야 하겠고, 아이는 아이 나름의 감상이 있어서 그걸 즐겼을테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내가 이해한 것보다 더 많은 저자의 속삭임을 알아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일수도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이에게 따로, 그리고 부모에게 따로, 각각의 재미와 성찰의 시간을 줄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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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초등 낱말편 2
김경원.김철호 지음, 오성봉 그림 / 열린박물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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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가 고플 때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나 목이 마를 때 마시던 한 모금 냉수에 대한 기억은 아마도 평생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한때 가난하던 시절의 꽁보리밥이 단순히 건강식이라는 의미 이상의 열풍을 타고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붙들었던 것도 먹을 것이 없던 시절 그나마 주린 배를 채우던 음식에 대한 기억이 많은 어른들의 추억을 자극하였기 때문일겝니다. 어느 날, 여기저기 뜨기 시작한 두번째 어린이 국밥에 대한 소개가 내게는 그런 자극이었습니다. 우리말에 대한 숨겨진 굶주림을 자극하였던 첫번째 어린이 국밥에 대한 기억이, 냉큼 두번째 국밥을 내손에 움켜쥐게 만들었습니다. 아직 내 아이들이 이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할 만큼 자란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같이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 나누며 한그릇씩 비울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그 기막힌 맛을 기대하며 내가 먼저 다시 한 그릇을 후딱 해치워버렸습니다.

 책의 형식은 <초등 낱말편1>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 두 단원인 '즐겁게 깨달으며'와 '생활 속에서'는 이전처럼 서로 혼동하기 쉬운 낱말들의 쓰임 -예를 들면 '햇볕'과 햇빛', '돌'과 '돌멩이', '볼'과 '뺨' 등- 에 대해 알려 주고 각 의미의 차이를 알수 있는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교과서에서 볼수 있는 예문들을 중심으로 각 낱말의 바른 쓰임을 찾아보는 퀴즈코너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단원인 '총명한 생각으로'에서는 '다르다'와 '틀리다', '빠르다'와 '이르다' 등의 동사나 형용사들 중에서 비슷한 의미를 가지거나 혼동하기 쉬운 단어 일곱쌍을 소개하고 있고, '차이를 가려내며'의 단원에서는 '몽둥이'와 '방망이'의 차이 등 일곱개의 명사 단어쌍의 바른 쓰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각 소단원의 끝에는 '교과서, 사전 들여다 보기'라는 코너를 통해서 각 단어의 쓰임의 실례를 친절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용으로 나온 책이기는 하지만, 이 책을 들여다보면 배운다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내가 평상시에 수도 없이 되뇌이는 각각의 낱말들이지만, 그 의미와 쓰임에 대해서 좀더 명확한 지식을 얻고, 미묘한 어감의 차이나 쓰임새의 차이를 알아가는 독특한 재미가 있습니다. 물론 한 번 읽고서 '아! 그렇지' 하다가도 다음에 그 낱말을 사용할 때는 다시 혼동하며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잘 알고 있는 듯한 우리말과 글에 대해서도 이리 제대로 정리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겐 의미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두권의 형식이 비슷한 말에 대한 풀이에 대한 것들이었다면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 내용과 형식이 발전할까하는 호기심도 생기기 시작합니다. 동일한 형식이나 내용의 반복이라면 3권, 4권이 나오면서 열기가 식을 수도 있고, 식상함을 주기도 할텐데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시절 전과를 보면 항상 국어 단원의 말미에 비슷한 말, 반대말 등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앞으로는 유의어 뿐만 아니라 반의어나 상대어에 대한 내용들도 추가된다면 좀더 풍부한 내용의 시리즈물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영어사전의 Lexicon과 같은 류의 형식을 추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 우리 말들의 어원이나 숨겨진 순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되살리는 내용들도 정리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 국밥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이 책들이 내게 준 즐거움과 기대가 컷기에 두번 째 어린이 국밥을 먹으며 잠시 해보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저자들이 문장론 등에 대해서도 다룰 것이라고 했던 말을 들은 듯도 한데, 하여간 앞으로도 더욱 흥미롭고 내가 생각지도 못한 우리 말과 글에 대한 독특한 국밥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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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 자전거 동시야 놀자 1
신현림 지음, 홍성지 그림 / 비룡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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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늘 학교에 일찍 갔다. 가보니 친구들이 재잘재잘, 쫑알쫑알 떠들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책을 봤다. 하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좀 떠들고 있었다..... 나는 급식을 먹고 집으로 와서 허겁지겁 숙제를 하고, 자전거를 쌩쌩 타며 놀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놀이터에서 놀았다. 주르륵 타고 내려오는 기구가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들의 국어책에 의성어와 의태어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단원을 배우고 나서, 의성어와 의태어를 다섯개 이상 넣어서 글을 써오라는 숙제에 아들내미가 써간 내용입이다. 물론 이 책을 대하기 이전의 일이지만, 책속의 여러가지 의성어와 의태어를 대하면서 아이의 공책을 뒤져서 이리 적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좀더 실감나게, 그리고 생생하게 표현하는 방법이겠지요. 의성어나 의태어를 이리 사용하는 것들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글속에 형식의 멋과 내용의 재미를 모두 버무려 넣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시인 신현림이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로 우리말의 맛을 살려 쓴, 딸을 위한 동시집. 시인은 책속의 시들이 아이와의 관계속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린 딸을 위해 책을 찾아다녔지만 다른 종류의 책에 비해 유난히 적은 동시집을 보면서 직접 쓴 동시를 들려주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고, 자신의 딸과 함께하던 일상생활속의 웃음, 그네, 빵, 사과, 고래, 토끼 등에서 그리고 사계절과 아침, 점심, 저녁 풍경들 속에서 아이와의 이야기거리를 나누며 쓴 글들이 이 책이고,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아이와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함이 담긴 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인은 단순한 언어만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통해서 살아있는 세상을 아이들에게 전해줍니다.

 초코파이 자전거를 탓더니 /  바람이 야금야금 / 다람쥐가 살금살금 / 까치가 조금조금 / 고양이가 슬금슬금 먹어서 // 내 초코파이 자전거 / 폭삭 주저앉아 버렸네. <p8, 초코파이 자전거>

 슝슝 / 그네를 타면 // 하늘 보자기 펄렁펄렁 / 구름 순두부 말랑말랑 / 나무 빗자루 술렁술렁 / 내 가슴 풍선까지 벌렁벌렁 // 난리야 난리 / 모두 기뻐서 난리  <p24, 그네를 타면>

 개구리가 고요한 연못에 퐁당 / 돌고래가 푸른 바다에 펑덩 / 나도 아늑한 엄마 품에 푸웅덩  <p33, 풍덩>

 시인의 글을 읽으며 글이 살아있다는 것이,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어른의 눈으로 본다면 아마도 세상이 동시처럼 보이지는 않겠지만, 아이들의 눈높이로 낮추어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시인의 글보다도 더 살아서 팔딱거리고, 활기가 넘치는 그런 세상일거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 동시들을 읽으며, 동시와 훨씬 더 가까워지고 친근해질거라는, 또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글이나 말로 표현했을 때, 세상이 훨씬 생생하게 살아있고 또한 가까이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리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멋있는 형식과 재미있는 내용을 모두 가진 글을 쓰는 방법을 시인은 이리 자신의 동시들을 통해 아이들에게 선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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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의 비밀일기
앨런 스트래튼 지음, 이장미 그림, 박슬라 옮김 / 한길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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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전에 이미 책내용의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더 불편함을 느낀 듯 합니다. 아마도 읽은 부분보다 읽어야 할 부분이 더 적어질 때까지는 '아이들이 보는 책에 이리도 불편한 현실의 단면을 직설적으로 표현해야 할까? ' 하는 생각과 '내 아이에게는 이 책을 읽어보라고 먼저 권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무수히 하며 읽어 내렸으니까요. 그런다고 '예쁜 공주와 멋있는 왕자가 우아하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식의 이야기만을 아이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을 반을 넘겨 읽을 때까지, 정확히 말하면 불량소녀 -이 말이 한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꼬리표 붙이기 일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선에서 표현한다면- 레슬리와 그의 남자 친구인, 있는집 아들 제이슨의 도를 넘어선 애정행각(?)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부분들까지 읽으면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에 이런식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런 태도가 어른으로서의 세상의 어두운 면을 가리려는 가식이나 세상은 살만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뻔한 말을 지껄여 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아직 어린 자녀를 둔 마음으로는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으니까요.

 10학년-우리나라 학제에서는 고1-인 레슬리는 이혼가정의 편모 아래서 자라는 여자아이입니다. 아버지와 주말에 만나곤 하지만 그 아버지에겐 새로운 여자가 생겨서 레슬리에게 큰 관심을 주지는 못하는 듯 하고, 어머니도 생활을 위해 일을 하며 레슬리에게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감을 주지는 못하는 듯 합니다. 물론 안정되지 못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레슬리의 모습도 많은 경우에 그렇듯이 모범생(?)의 모습에서 상당히 빗나가 있어 보입니다. 캐나다나 미국인들의 가치관이 우리와 많이 차이가 나고 더 개방적이기는 하겠지만 옷차림이나 땡땡이(?)로 인해 끊임없이 선생님들에게 지적을 당하고 벌을 받는 모습이 영락없는 불량소녀의 모습입니다. 그런 레슬리에게 부자집 도련님인 12학년의 제이슨이 백마를 탄 기사처럼 등장하면서 사건은 시작됩니다. 만나서부터 바로 시작된 불장난-육체적 접촉 = coitus-은 레슬리가 그레이엄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쓰던 비밀일기에  그대로 기록되고, 읽지 않기로 약속된 일기는 선생님이 바뀌면서 세상에 알려지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듯하던 연애소설은 반전을 맞이 합니다. 자신과 레슬리의 관계가 드러나면서부터 제이슨은 집요하게 레슬리를 괴롭히고 협박하고 결국은 목숨에 위협을 느끼게 끔 만들게 되고, 그 과정에서 레슬리는 친구 케이티의 도움으로 근근히 버텨가다가, 가출을 하고, 가게에서 먹을 것을 그냥 가지고 달아나다가 잡히고, 경찰들에게 넘겨진 후부터 레슬리에 대한 제이슨의 폭행, 강간, 협박 등의 사건이 법정으로까지 치닫게 됩니다. 결국 제이슨은 소년원에 보내지고 레슬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한층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게 되구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읽는 동안 느꼈던 불편에 대한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레슬리가 그러한 신체적, 정서적인 어려움과 수치스러움 등을 이겨내고 힘을 가진자인 제이슨을 용감하게 법정으로 끌어내어 자신에게 가했던 성적폭행과 위협 등에 대한 단죄를 결심함으로써, 반복적으로 여자아이들에게 자행했던 성적폭행 등에 대한 잘못을 유야무야 덮어주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자 하는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일들이 발생했을 때 어찌 행동해야할 것인가와 그리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답을 아직 가치관이 바로 잡히지 못한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견해에 나도 찬성의 한표를 망설임없이 던지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것은 마음에 남겨진 불편함들입니다. 그래서 곰곰히 그것들을 들여다 봅니다. 먼저는 성적인 관계에 대한 표현과 묘사 -이야기되는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와 적나라하게 이야기되는 욕설들로 인한 불편감입니다. 고상한(?) 책에 그것도 아이들이 보아야할 건전한(?) 책에 도색잡지 수준은 아니지만 이리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는데 대한 불편감이겠지요. 저자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불편감은 마지막까지 해소되지가 않습니다. 두번째는 비치볼 교장선생님이 처음 일기장의 내용을 보고서 취한 가식적이고 교활한 행위에 대한 불편감입니다. 사람사는 곳의 현실에 대한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학교의 선생님들이 좀더 교육자적이기를 바라는 순진함이 있어서일겝니다. 요즘 다시 스승의 날이 되어서 촌지문제가 뜨겁기는 하지만, 내 아이의 선생님만은 그런 잡음에서 자유로운 교육자적인 양심을 지닌 이기를 바라는 그런 순전함 말입니다. 세번째는 불편함이랄 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부모된 자로서는 반성해야 될 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이혼한 레슬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으로부터 오는 불편함인데,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식을 두고 자신들만의 행복을 먼저 추구하는 -특히 레슬리의 아버지- 모습으로 인한 것입니다. 현실이지만 아직까지는 부모가 그럴수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은 위선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자식에게는 끝까지 책임있는 부모로서의 모습이 우리 사회와 나의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남는 불편감을 토로하는 것은 이 책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두 어린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로서, 아이들이 좀더 자란 미래를 보며 희망하는 모습과 너무 거리가 멀고 빗나간 모습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말한 얘기들은 분명 우리 사회에서도 어디선가는 반복되어 나타나는 어두운 현실일테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런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도 분명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나의 아이에게 이 책을 들려주면서 읽어보라고 권하지는 못할 듯 합니다. 다만 어느 날, 나의 아이가 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깨을 토닥여 준 다음, 약간의 어른의 가식이 섞인거지만, 이리 말해 줄 수는 있을 듯합니다. '네가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더 넓어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어두운 면들도 있지만 여전히 세상은 살만하고 아름다운 면도 많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레슬리가 용감하게 법정에 나선 것처럼 네 삶에서 그런 용기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삶의 보석은 어두운 곳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거란다....'

 많은 이들이 불편한 진실보다는 소중한 자신의 삶의 의미를 깨우치고, 레슬리의 용기를 배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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