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
장 자크 루소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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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사상사는 사회사를 반영한다. 본능적 동물로 태어난 인간이 길들여지고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개인이 지닌 특수한 상황과 사회 제도가 결합되어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1712년 프랑스 태생의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장 자크 루소는 1761년 기념비적 두 권을 발표한다. 교육에 관한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에밀>과 개인과 국가,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는 <사회계약론>이 바로 그것이다.

  루소의 생애를 이해하는 일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사상가나 역사가, 철학자 모두 자신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행한 개인사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생활의 측면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이나 사건들이 사상에 미친 영향들을 고찰해 보는 데 의의가 있다. 유복했다고 보기 어려운 유년시절과 나이 많은 바랑 부인과의 사랑, 일생을 같이 한 테레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명의 자식이 모두 고아원에 버려진 사실들이 루소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그의 논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정치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 책의 저작 과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 밖의 개인사는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 행, 불행을 객관화할 수 있다면……

  이 책은 총 4부 4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주제와 제목을 통해 루소의 사상이 펼쳐지고 있다. 현재 상황과 다른 요소나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18세기 중반에 출판된 책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18세기 중반 우리의 상황을 돌아본다. 정조의 재위 시절로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로 불리기도 하지만 개인과 국가 혹은 개인과 사회라는 관계 자체를 거론하기 힘든 봉건적 사회였다. 서얼 출신의 양반들의 한숨 소리와 백성들을 옭아매고 있는 신분제도는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독소였다. 서양과 우리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의미할 수 있겠으나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는 없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가 주장하는 계약은 개인과 정부 사이의 계약을 의미한다. 자연 상태의 반대 개념으로 국가와 정부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국민은 생명과 사유 재산의 보호를 위해 피지배자들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덕과 시민적 책임의식이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개인의 의지가 전체 의사와 일치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일치가 지속적이며 항구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체 의사는 평등을 지향하는 반면 개인의 의사는 본질적으로 편파적인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P. 72 제2부 제1장 주권은 양도할 수 없다)는 말이 그 이유를 뒷받침하고 있다. 토마스 홉스나 존 로크의 이론상의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당시에 이러한 사상이 펼쳐질 수 있었던 토대 자체가 긍정적인 면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아나키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의 필요성과 주장은 국가와 정부의 존립 근거를 이론화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주체가 되고 국민 모두의 주권과 권리 의식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 국가와 정부의 역할을 고민하고 개인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이러한 모든 시도는 유용하다. 한 사회의 발전과 국가 체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의도된 목적은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사회계약론>은 여전히 본질적인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시금석이 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국가와 민족, 시대와 계층에 따라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개인의 이익에 어떤 방식으로 복무하느냐에 따라 또한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등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항존한다. 우리가 고민할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거나 정체되어 있는 제도에 대한 점검과 그 기본 틀을 고민해보는 거시적 안목이다. 내 앞의 떡을 위하여 달려가는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치를 고양시킬 수 있는 길은 반드시 있다. 물론 합의되지 않거나 이기적 모순에 빠질 위험을 배제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달려왔다.

  이제 한번쯤 되돌아보고, 아니 자주 되돌아보고 점검하고 살아 숨쉬는 관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자유는 모든 기후에서 열리는 과일이 아니? 그러므로 자유는 모든 나라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P. 178 제3부 제8장 모든 국가에 동일한 정부 형태가 접목되는 것은 아니다)는 루소의 말을 다시한번 되새겨 본다. 우리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와 정부 형태는 우리 스스로가 항상 고민하고 성장시켜 나가야 하는 과일이 아닐까 싶다.


200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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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색 -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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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 의사소통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커뮤니케이션은 이러한 소통 방법에 대한 고찰이다. 이것은 원인과 과정, 방법과 결과를 망라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관찰과 현상에 대한 분석이 바로 강준만의 <인간사색>이라는 책이 갖는 의미이다.

언론학자라고 한정하기에는 활동의 진폭이 큰 강준만의 책은 일단 재미있다. 물론 그 재미의 기준과 의미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지나친 정치적 수사와 직설적인 화법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고 현실적인 문제들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강준만의 이야기는 언제나 ‘래디컬’해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강유원이 ‘래디컬하다’란 말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 책과는 무관하더라도 그의 성향을 대표할 만하다. 이 땅의 수많은 지식인들을 지도로 그려보고 싶을 때가 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성향에 따라 이름이나 사진을 놓아 본다면 재미있는 그림이 나올 것 같다. 그의 평소 발언이나 책의 내용들을 반영해서 누가 한 번 그려보면 좋겠다. 꼭 사서 읽어 볼테니.

이 책의 특징은 지난해 출판된 철학자 김용석의 <두 글자의 철학>을 떠오르게 한다. 전체 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인간관계를 풀어내는 두 글자의 키워드가 제시된다. ‘사랑, 불륜, 질투, 순결, 키스’, ‘욕망, 열정, 감정, 체질, 싸움’, ‘청춘, 나이, 효도, 호칭, 권위’, ‘진실, 기억, 신념, 의리, 배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들만 나열해도 호기심이 넘친다. 이렇게 흥미로운 두 글자들의 조합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인들만의 고유한 인간관계를 풀어낸 책이 많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모든 국민이 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분석과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들 자화상을 그려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저자 강준만이 용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런 걱정은 이 책에 대한 장점과 단점으로 드러난다. 가장 큰 단점은 저자의 피해가기 기법이다. 길지 않은 분량에 인용된 책과 잡지 등 각종 자료가 방대하다. 저자의 꼼꼼한 준비와 분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객관적 시선 뒤에는 탁월한 주관적 배경이 배제된다는 함정을 피할 수가 없다. 강준만은 없고 수많은 인용과 관련 분야의 객관적 정보들이 넘쳐난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이다.

반면에 가장 큰 장점은 단점의 뒷면이다. 인간관계에서 살펴야하는 수많은 정보와 규칙들은 한 개인에 의해 정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인 특유의 정서와 인간관계론을 분석적 방법으로 객관화시켜 나가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물꼬가 터진 이상 즐겁고 재미있는 작업들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통찰력과 정확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인간관계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갖게하는 즐거운 책임에 틀림없다. 인용된 자료와 각주를 모두 읽어보고 싶을만큼 흥미로운 주제가 있는가 하면 밑줄 긋고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도 많다.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과 관계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부분들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한 권의 책을 묶어낼 수 있는 저자의 능력은 쉽게 판단할 수 없지만 주관적 정보의 주관적 선택이 만들어내는 객관적 분석은 훌륭하다. 인간관계를 고찰하는 일이 어찌 쉬운 작업일 수 있겠는가. 저자가 풀어내는 우리의 모습에 때로는 부끄러워하며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우리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스스로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거울에 비춰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빌어 나를 돌아본다. 때로는 미시적 관점에서 감정의 미묘한 떨림을 이야기하다가 거시적 안목으로 사회 정치적 문제까지 다루다보니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좁은 관계에서 넓은 관계까지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들을 다양하게 엿볼 수 있다. 한 권의 책에서 큰 욕심을 내지 않고 풍성하고 화려한 인간관계에 관한 에피타이저 정도로만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느끼는 막연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반성적인 시간을 갖게 해 줄 수 있는 강준만의 <인간사색>을 권한다.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부끄럽게 나를 돌아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 의미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0610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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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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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마감했던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들과 철학자 중의 한 사람, 미셸 푸코를 기억한다. 그는 수많은 동료학자들에게, 그리고 문학과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동료, 후배들의 찬사나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의 지식인들이 거들먹거리며 써먹는 논의의 화제거리가 우리들 현실과 미래를 짚어보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의 대표적 저작 중의 하나인 <감시와 처벌>은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제목은 항상 제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일반 명사나 추상 명사로 대표된다. 다소 흥미없는 주제로 보일 수도 있다. 일반인들 입장에서 ‘감시와 처벌’은 남의 일이며 더구나 ‘감옥의 역사’ 따위에 신경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실적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만하지 않은가?

  안기부 도청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던 무렵 정형근 의원의 핸드폰 사용법이 한겨레에 소개된 적이 있다. 1달 이상 같은 번호를 사용하지 않으며 동시에 여러개의 핸드폰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수시로 핸드폰을 바꿔가며 통화하고 자주 번호를 바꾼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안기부에서 악명을 떨쳤던 그의 행동이 CDMA 접속 분할 방식 핸드폰의 도청이 얼마나 쉽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아직 이 시대에 ‘big brother’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푸코의 경고는 단호하다. 일상 속에서는 우리는 대단히 무감각하다. 감출 것도 비밀도 없기 때문에 감시의 눈길이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 격리 수용되어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은 당연히 감시와 처벌을 받아야 하며 그것이 감옥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히는 푸코의 주장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미래를 예견한다.

  신체형과 처벌, 규율과 감옥 등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프랑스라는 한정된 역사와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한계를 보이고 있으나 봉건사회에서 민중들에 의해 시민혁명이 성공했고 또다시 복고 왕정이 등장하는 등 근대와 탈근대 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고 험난한 역사를 걸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한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책의 목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근대적 정신과 새로운 사법 권력과의 상관적인 역사를 밝히는 것이다. 처벌을 관장하는 권력이 근거를 두고 있고, 정당성과 법칙을 받아들이고, 영향을 넓혀가면서 그 엄청난 기현상을 은폐하고 있는, 과학적이고 사법적인 복합실체의 계보학이다. - P. 52 

  푸코의 이 말 한마디가 이 책의 의미를 밝히는 열쇠가 된다. ‘근대정신과 사법 권력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법은 누구를 위하여 복무하는가? 법은 과연 공평하고 평등하게 집행되는가? 이 질문에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21세기의 현실에서 푸코의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아니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모습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트에서부터 시작되는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길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효과적인 권력의 통제 수단으로 비롯된 이 부자유스런 시선들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고 처벌을 위한 감옥에서 활용되는 수단이 아니어도 우리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팬옵티콘으로 대표되는 벤덤의 감옥의 구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규율의 제도는 인간행위를 관찰하는 현미경처럼 기능하는 통제장치를 확산시켰다. - P. 272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를 위해 복무하던 징벌은 대다수 범죄자에 대한 교정 기능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처벌을 위해 존재했던 징벌이 감옥이라는 제도적 장치로 전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많은 논란과 혼란스런 과정을 겪었다. 범죄에 대한 형량을 시간의 개념으로 환산하고 신체적 구속을 통해 자유를 박탈하는 것으로 일반화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0여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이전의 공개처형을 통해 보여줬던 야만의 시간들은 역사는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징벌의 목적과 효과 군중들에 대한 경고와 군주의 의도는 역사적 사실로 그칠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푸코의 논의를 한정시킬 수 ?문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로 드러난다. 이 짧은, 한정된 분량으로 다 말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일망 감시장치’는 ''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 - P. 312

  한 사람의 감시자가 수많은 죄수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감옥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심리적 변화와 제도적 장치에 대한 공포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반성과 성찰들을 담고 있다. 그가 말하는 감시와 처벌은 단순히 감옥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로 확대되었고 아무도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의 삶을 대변하게 되었다.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 - P. 420

  범죄의 원인과 처벌의 문제, 권력의 도구인 감옥의 문제를 심층적이고 분석적으로 다루고 있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단순한 사회적 문제제기가 아니라 논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될 수 있는 텍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의미의 크기를 헤아리기 어렵다. 다른 책들을 읽어나갈 때마다 마주쳤던 푸코를 만나 나눈 대화의 소중함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06010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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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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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과 신세기의 구분은 의미 없다. 하지만 인간은 늘 무엇인가 정리하고 구분짓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다. 불연속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두가 따로국밥이다. 20세기가 끝났다고 해서, 21세기가 시작됐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많지 않다. 그것은 분명 심리적인 문제일 것이고 하나의 계기를 만들고 싶은 또 다른 욕망일 것이다.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고 매주 다시 맞이하는 월요일에 대한 반복적인 시간 패턴에 적응하는 인간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난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늘 대화는 필요하다. 상대방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눈으로 내가 비쳐지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공존과 대화보다 대립과 갈등이 심했다. 서로에게 부족한 면을 보충하자는 전략적 제휴도 아니고 모르는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와는 다른 대화가 진행되어 왔다.

  비판적 지성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주장하는 영문학을 전공한 인문학자 도정일과 안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기초가 된다는 신념을 가진 동물사회학을 전공한 자연과학자 최재천의 만남이 <대담>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특별한 만남도 아니고 출판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한민국 지성사 최초의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지만 아주 의미있는 일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생각의 방식과 사물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는 즐거움은 덤으로 얻는다. 우리는 늘상 우리 곁에 존재하는 사물들에게 무심한 눈길을 보내고 선택적 관심과 고정된 시선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인문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자연과학적 관점과 시선이 누구보다도 부족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방식과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니 사물과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세상에 대한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는 전제하에, 많이 안다고 해서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믿을 수도 없다. 호기심과 끊임없는 앎에 대한 욕망은 사람을 때로는 지치고 힘들게 한다.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 사람의 긴 대화를 읽어가면서 결국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회귀했다. 문득, 누군가 내게 위선보다 위악이 더 나쁘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유전자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과정과 방법은 실로 경이롭다. 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조차 본질적으로는 아름답고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과학적으로, 아니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속성과 이해가 필요하듯 인문학적 인간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더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두 가지 성향을 지닌 인간에 대한 관심과 탐구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 책의 역할은 충분하다.

  박학다식한 두 석학의 지적 유희와 번지르르한 말장난을 우려하지는 않아도 된다. 나름대로 도정일은 폭넓은 자연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최재천은 문학 소년이었던 시절을 말할 만큼 인문학과 공감할 수 있는 학문인 동물들의 사회생물학을 전공했다.

  두 사람 사이의 불꽃 튀는 논쟁과 첨예한 대결은 찾아볼 수 없다. 시종일관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이고 상이할 것 같은 두 학문 분야의 접점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의미 있을 뿐이다. 서로 놓치거나 구멍이 뚫려버린 부분들을 비추어 주고 중첩되는 부분에 대해서 공유하는 방식은 하나의 사유 방식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해석과 대안에 일정부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대학에서 학부제가 운영되는 취지가 제대로 살려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의 학문과 전공의 교육과정이 이렇게 철저하게 분과주의로 흐른 원인도 고민해보고 앞으로의 길도 모색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진정한 교양인으로 길러내기 위한 노력을 대학이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닌지,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사회의 ‘능력있는 공부기계’만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검도 필요하다. 효율과 결과에 집착하고 경제성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반성도 절실하다.

  21세기는 이미 시작되었고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은 언제나 불투명했다. 인간이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두 학자의 말에서 찾아본다.

  저는 21세기의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강의를 많이 합니다. 2003년 1월에 모리 전 일본 총리의 초?받아서 일본에 갔다가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도 하고 호모 폴리티구스이기도 하지만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공생인간이기도 하는 내용이었어요. - P. 593
  남미의 이반 일리치 같은 사람도 공생의 지혜와 철학을 끊임없이 이야기했어요. 일리치는 인간이 가진 대표적인 ‘공생의 도구’로 자전거, 도서관, 그리고 시(詩)를 꼽았습니다. - P. 596(최재천)

  두터운 세계를 꿈꾸는 호모 심비우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충돌하는 지점도 이곳이고, 과학과 인문학이 손잡고 공생을 추구해야 할 지점도 이곳인 것 같습니다. - P. 597(도정일)


060116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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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 공감 - 사람, 관계, 세상에 관한 단상들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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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별성 안에 보편성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정혜신의 이야기는 놀랄만큼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개별적 경험이 세상의 진리라고 굳게 믿는 행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과 사회 일반에 관한 이야기들은 결국 개별적 특성을 통한 일반화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정혜신의 <삼색 공감>은 특별한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짤막한 단편들이 모여 있어 긴 호흡으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과 고민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단점은 촌철살인의 한마디 한마디로 상쇄된다. 한겨레를 통해서 최근에 접한 칼럼도 포함되어 있지만 지나간 이야기들로만 치부할 수 없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우선 ‘사람, 관계, 사회’라는 이 책의 편집이 제목이 되어 버렸다. 삼색은 분명하다. 인간과 사회를 이어주는 관계의 모습.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기 색깔과 관점을 가지고 뚜렷한 목소리를 내거나 일관된 흐름으로 그것을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정신과 의사가 바라보는 세상은 좀 더 객관적이고 분석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은 오히려 책을 읽는데 방해 요소가 된다. 직업과 학력, 출신과 성분은 상대를 이해하는 최소한의 배경지식이 아니라 편견과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직업을 가지고서도 얼마나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가.

  다만 정혜신은 직업과 전공을 병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보다 일반들의 이해를 돕는데 사용하고 있어 부담스럽거나 주관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칼럼의 특성상 잘난 척하거나 전문가로서의 충고를 잊지 않으려는 시혜적 태도를 버리기 어려운데 비해 비교적 설득력 있고 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매 꼭지마다 일상에서 만나기 쉬운 일화나 비유를 사용해서 평이한 목소리고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하고 싶은 말들을 군더더기 없이 적확하고 명료하게, 때로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에 공감하게 된다.

  짧은 글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데 모범이 될 만한 형식과 내용들을 담고 있다. 물론 지나치게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고 시사 문제와 직결된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겠으나 발표된 지면의 특성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주관을 배제한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정혜신이 가지고 있는 성향과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고정되어 있다. 그 관계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냉정하고 차분하며 설득력 있다.

  나는 개인의 특별한 경험을 아주 쉽게 일반화해버리는 사람들이 미덥지 않다. - P. 77

  개인적 경험에 객관과 통찰이 더해지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세상의 모든 진보는 ''경험적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의 ''밝은 눈''에서 출발한다고 나는 믿는다. - P. 77

  본능은 핵심을 놓치지 않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본능이란 정교하고 미세한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존재 이유'' 그 자체에 의해 움직이는 힘이다. - P. 91

  자신의 경험들과 개인적 통찰력을 ‘경험적 문제의식’으로 바꿀 줄 아는 ‘밝은 눈’을 가진 정혜신도 본능처럼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 고민들이 좀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측면까지도 담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모두가 활동가나 선동가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기본임은 물론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목에 핏대 세우지 않고도 설득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폭넓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지적 권위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에게 '앎'은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다. 매사 ''너 그거 알아?'' 하며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따지기 좋아하고 상대의 이해력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지적 권위주의'는 '앎'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경향성이다.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므로 대개의 경우 합리적이지만 권위주의적 색채가 짙어지면 제3자를 무시하거나 냉소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 P. 101

  논리성이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는 알파와 오메가도 아니고 사람을 설득하는 요소의 전부도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의 90%는 언어적 요소가 아닌 비언어적 요소에 의한 것이다. - P. 102


  정신과 의사라는 ‘지적 권위’나 논리성의 메마름이 아닌 부드러운 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정혜신에 대한 나의 판단이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그러나 강약 조절보다 그 설득과 생각의 편린들을 전달하는 방식들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밝힌 것처럼 ‘비언어적 요소’를 통해 그녀를 만날 수 없다면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적 권위주의’와는 무관하다는 것은 그의 글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06012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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