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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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과속 위반 스티커와 부고의 공통점은 상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현실 속으로 날아든다. 과속이나 주차 위반, 버스 전용차로 위반의 경우 과거의 기억 속에서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내지만 부고는 훨씬 강한 충격으로 삶을 순간적인 혼돈에 빠트린다. 시공을 초월해서 과거를 헤매다가 현실로 돌아오거나 메트릭스 밖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거나. 친구의 부음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전해졌다. 오늘 오후에.

 죽음은 종교만큼이나 숭고하거나 거룩한 삶의 종착점이다. 연속적인 세계관에서 생각하면 죽음은 생의 연장이며 또 다른 삶의 형태일 수 있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일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동양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생의 마감이며 존재의 소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야말로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없어질 때의 고통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다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말을 한다. 나 살아 있다고, 그 사람이 죽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불교에 대한 오해와 종교 일반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은 불신과 갈등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자신의 종교와 무관하게 종교에 대해 올바로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불교도 우리에게 오해의 대상이기는 마찬가지다. 호국 불교, 기복 불교로서 오로지 현실에서의 복덕과 행운을 기대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경우 그 종교는 반드시 왜곡된 형태로 중생을 미혹하게 한다. 불교를 올바로 알고 이해하는 일은 종교인으로서 기본적인 자세일 뿐만 아니라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종교의 허와 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하는 당위가 생긴다. 왜냐하면 종교는 현실의 도피처도 아니고 종교와 현실이 종속 관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역사는 물론 서양의 역사에서 종교가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종교 자체의 영향이라기보다 종교인의 자질 문제, 종교를 이용한 정치의 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어찌됐든 현실 세계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소승불교와 대승 불교에 관해서는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이 좋은 안내서가 된다. 비종교인의 관점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쉽고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숭산의 글이 객관적일 수는 없다. 불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을 엿볼 수 있는 입문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에 비해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강해>는 불교의 핵심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고려대장경 판본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 진수를 선보인다. 여러 판본과 원전의 철저한 해석과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설픈 전문가는 맞대거리 하기가 힘든 것이 도올 저작들의 특징이다. 이 책 또한 해박한 도올의 설명이 특유의 어법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지나쳐 요설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해석은 주관적이고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기독교 교리와의 공통점 뿐만 아니라 종교 자체에 대한 기본 인식이 다르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비판적이고 냉정한 분석과 논리적인 주장은 새겨 들을만하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 - P. 401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선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있어도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생에 대한 집착과 외물에 대한 유혹은 쉽게 벗어버릴 수도 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곧 해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 방법과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곳에 열반은 자리한다. 어떤 형체나 음성으로도 여래를 감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내가 보았던 수많은 불상들과 목탁 소리에도 여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순간을 사는 인간과 영원을 꿈꾸는 종교는 여전히 불협화음으로 불화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인간의 불완전성이 낳은 가장 비극적인 형태의 종교들이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있다. 제대로 알고 바르게 믿을 수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나도 종교를 가질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07031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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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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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현실의 막막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원래 인간은 그렇게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현실과 구별되는 환상을 꿈꾸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일까?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280일간 태초에 인류가 발생하기 이전부터의 시간과 공간을 익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모든 민족이 가지고 고유의 신화들 간에 공통성과 놀라운 유사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면 실제로 바벨탑이 세워졌고 언어가 달라지기 전의 기억들을 지금도 재생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구 저편에 사는 장 보드리야르의 부고가 오늘 신문에 실렸다. ‘시뮬라시옹’의 개념을 처음 접하면서 ‘호접지몽’과 영화 ‘메트릭스’가 떠올랐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이 현실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과연 원본 없는 환상과 실체 속에서 진실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셉 캠벨은 신화에 일생을 바쳤다. 한 사람의 일생을 매료시킬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단순하게 신화의 아름다움이나 구조와 체계를 연구한 학자가 아니라 비교 신화학을 통해 각 민족이 지닌 신화의 속성이나 공통적 특질들을 찾아내고 그것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 물음들은 신화와 현실을 연결시켜야 하는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씨줄과 날줄이 되어 현실 속에 상상의 빌미를 제공한다.

 도대체 신화는 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지 궁금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불러일으킨 신화에 대한 이상 열기는 단순히 서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신화에 대한 무지를 탓할 일도 아니지만 신화가 지닌 힘을 과대 평가하기도, 간과하기도 어렵다.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가 나눈 대담을 엮은 <신화의 힘>은 신화학자 캠벨의 입을 통해 신화에 관한 궁금증과 현실 세계의 원형들을 보여준다. 빌 모이어스의 깊이 있는 질문과 캠벨의 적절한 답변들이 대화 형식으로 풀어져 있기 때문에 신화에 대한 개략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렇게 신화 이야기를 듣다가 캠벨 자신이 ‘인생’에 대해 토로하는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 P. 133

 인생은 개선한 사람이 없다는 단언에 절망한다. 이보다 나아지지도 않는단다. 이 부정적 현실 인식에 동의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같은 현상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생은 이대로도 충분히 놀랍고 굉장한 사건들의 연속이며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환상일 수 있다. 과연 그런가? 알 수 없는 일이거나 사람마다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이다. 신화를 연구한 학자는 이렇게 현실조차도 신화와 같은 환상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캠벨은 죽음 저편에서 신화 속으로 들어갔을까?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 - P. 375

 우파니샤드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연현상에 대한 감탄이나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고비를 넘어선 자의 깨달음처럼 여겨진다. 꽃이 예뻐보이면 나이를 먹어가는 증거라는데 해 지는 저녁 무렵 한참동안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들이 마치 종교의 그 무엇처럼 경건해지는 상태를 신의 일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화의 어려움은 결국 모든 장면과 환상을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데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신화를 모티브로 작품을 창작해 왔지만 언어의 한계 혹은 이미지의 한계는 신화가 전하고 싶은 내용의 저편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맥없이 끝이 난다. 마치 선문답을 하는 선승처럼.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영역에 신화는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신화의 한 부분은 아닌지.

모이어스 : 의미는 결국 언외에 있군요.
캠벨 : 그렇습니다. 말이라는 것에는 조건이 있고 제한이 있어요.
모이어스 : 그런데도 우리 이 하잘것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캠벨 : 그래서 결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 P. 415


070308-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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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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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각하는 능력과 말하는 능력 그리고 글을 쓰는 능력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는 것이 많은 선생과 잘 가르치는 선생이 다르듯이.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글을 쓰는 능력은 사유의 폭과 넓이, 상상력이 전제가 되어야 하지만 플러스 알파가 전제마저도 무력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진중권의 글은 적어도 내게 흡인력이라는 면에서 손 꼽을만하다. 숟가락을 허공에 든 채 만화 영화에 시선을 빼앗겨버린 어린 아이처럼.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탁월한 이론과 예리한 시선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실감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공허하게 들린다.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현실적인 공감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코미디 프로 보다 더 낄낄거리며 읽었다. 예를 들어 ‘포토샵, 일주일만 하면 황우석만큼 한다’는 인용문을 보고 대략 2분간 미친듯이 웃었다.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전달하는 방식이 새롭다.

 근대화에서 전 근대성 그리고 탈근대가 아닌 미래주의라는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인간개조에서 된장남과 된장녀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한국 사회를 요리한다. 독일에서 유학했던 경험이 이 책에서는 진중권의 제3자로서의 시각으로 돋보인다. 이 후 한국 사회에 돌아와 한국 사회의 특수성과 개성들을 날카롭게 그리고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국은 이래서 안된다’는 유의 책들과 다르고 ‘한국인은 이래서 뛰어나다’는 민족적 우월성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차분하지만 예리한 칼날로 단면을 드러낸다. 알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들춰내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드러내는 날카로움은 저자 특유의 글솜씨로 마무리된다. 강준만의 <인간사색>과 비교해서 읽으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문제점을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은 아니다.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화상을 그려내는 데 서투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거울의 역할을 한다. 라캉의 말대로 거울을 통해 자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발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그리고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대중적인 글쓰기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라서 다양한 측면의 분석과 해석은 미흡하고 지나치게 주관적인 관점으로 서술되는 아쉬움은 상쇄될 만하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군대다’라는 책이 나올만큼 기계화된 사회 구조와 사람들의 의식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다.

창의성이 생산력이 되는21세기에 대한민국은 자신의 미래를 군대 훈련소에서 찾고 있다. 모자라는 상상력을 사디즘으로 보충하는 변태들이 너무 많다. - P. 37

 거침없는 표현과 실날한 비판의 메스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독자에게 말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진보냐 보수냐를 넘어 우리들의 자화상을 어떤 모습으로든 새롭게 바라볼 필요는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저자의 시선 속에서 21세기 한국인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과 우리들의 모습 사이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국 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단편적인 이슈와 거시적인 담론의 틈바구니에서 마주치는 이 책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전해준다.

같은 달력을 사용한다고 같은 시대에 사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처럼 근대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된 사회에는 종종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 축이 공시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 P. 110

 갈등의 근본 원인 중 하나를 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진단은 정확해 보인다. 같은 달력을 사용하면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이 책을 통해 확인하는 내용은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하늘을 보고 마음을 다잡는 일보다 거울을 보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할 때가 있다. 코레아니쿠스의 축소된 자아가 나의 많은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나는 아니라고 외치는 대신 큰 거울을 들여바 보는 일도 의미있다.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우리를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이제 거울을 들여다 보았으니 어쩐다. 머리를 빗을까? 아니면 화장을 할까? 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려 버릴까? 너는 누구냐고 외쳐 볼까? 각자의 몫이다.

070126-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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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1-3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진중권의 책은 인기가 많군요...리뷰 잘보고 보관함에도 넣었습니다.지금 당장 읽을 것은 아니지만.진중권이 그동안 냈던 -미학책을 제외한-책들 또는 계간지들에 올렸던 글들과 유사할 듯 합니다.갈등의 원인을 한국사회의 근대와 전근대의 병존으로 보는 것은 여러차례 썻던 글인가 같기도 합니다.엘리아스와 푸코의 예를 들면서 그 둘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단계론적 방식에 대한 거부. 근대와 전근대,탈근대가 공존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기때문에 비단 한국 사회에만 적용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저자의 지적이 정확하다기 보다는 '8월에 물조심하라'말 만큼 보편적이라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그럼에도 진중권의 책을 읽는것은 재미있습니다.

sceptic 2007-01-31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에 물조심하라'는 비유가 적절합니다. 이 책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방식을 제 나름대로 읽어낸 거니까 진중권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겠지요. 관점이 새롭거나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드팀전님의 지적대로 저자의 지적이 정확하다기보다 말하기 방식이 재미있지요. 읽는 맛은 별미에 해당하니 저로서는 잘 참아지지 않습니다. 대리만족이든 대리배설이든 일단 시원하니까요. 대안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겠죠. 누구든.
 
경제학 -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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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자본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괴물은 모든 것들을 삼켜 버렸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이기주의에 기대게 되었다. 그것은 사유재산의 축적을 통해 그리고 토지와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로 컴퓨터처럼 2진법으로 분류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마르크스의 주장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확인했다. 부르주아든 프롤레타리아든 단 두 개의 팀으로 분류한 방법은 혁명을 위한 준비단계로 마르크스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라는 책은 1844년 집필된 책으로 1867년 <자본>이 나오기 이전의 파리 시대의 그의 사상적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책이다. 청년 마르크스에게 당시의 경제 이론들은 자본이라는 큰 틀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과 신념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지금은 당시의 경제 상황과 다르게 파악될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큰 틀이 바뀌지는 않았다. 어쨌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관심은 자본의 소유에 대한 방법과 사용법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아니 이제든 국가의 경계마저 허물어졌다. 그 자본이 미치는 파괴력은 산업시대의 그것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은 증대되었고 자본에 접근하기는 더욱 어려워졌으며 자본의 형태와 소유 방식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여전히 자본가가 되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고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며 토지와 생산수단 이외의 금융자본 등 상상을 초월하는 자본들이 생겼다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로 머물러 있다. 자본을 이해하는 것은 내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본의 힘에 경배할지어다.

2. 노동

 육체적인 노동의 댓가로 먹고사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직종과 업무에 상관없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노조가 없는 무노조 경영을 표방하는 삼성맨들의 프라이드를 보면 알 수 있다. 불쌍한 노동 기계. 그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비참하고 부정적인 현실 인식이 아니라 분명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또 다른 현실이 시작된다.

 노동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부를 창출하고 자본을 형성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엄한 놈이 챙긴다. 단순하고 상식적인 논리와 마르크스의 주장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보이지 않는다. 어렵고 따분한 말로 길게 서술되어 있으며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인용하고 반박하고 있지만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다. 내가 이해하는 방식은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노동의 역할과 가치를 알고 산출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노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현실에서의 역할을 찾고 싶은 것이다.


3. 지대

이제는 우스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땅이라니? 땅이 자본이 되는 시대는 지나갔나? 나이키 같은 다국적 기업은 마케팅과 서비스만 제공한다. 생산을 공장과 토지는 값싼 노동력을 따라 지구를 떠돈다. 또 헌법에 토지 공개념을 포함하자는 노무현의 논리는 어떤가? 여전히 땅땅거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노동과 지대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기본 요소이며 현재에도 유효하다.

 시대가 달라지고 상황이 변하고 IT가 어떠니 인터넷이 어쩌니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과 다른 것은 땅은 늘거나 줄지 않는 데 있다. 문제는 다시 노동이다. 토지는 소외되지 않지만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본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노동자는 불쌍한 노동 기계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4. 사유재산

 인간의 본능이다. 공산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대한 본능을 간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유 재산은 영원할 것이다. 이기적 욕망과 사적 소유의 관계는 경제 문제에서 당연한 전제가 된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소비하거나 구매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경제 원리가 가장 정확하다. 사유 재산은 노동하는 인간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제공한다. 오늘을 버티게 하는 마약 혹은 환상.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소유할 가능성이 없는 경우,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경우를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확인한다. 그리고 그 현실을 살아간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우리가 책임질 수 있으며 제도의 개선을 통해 보완한다고 해결될 수 있을지 오른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5. 화폐

 새로 나온 만 원권을 교환하기 위해 3박4일 동안 한국은행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라. 그것의 교환가치나 상품가치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단면이다. 화폐의 기능과 속성을 아는 것보다 화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좌절감.

화폐의 속성의 보편성은 그 본질의 전능성이다. 그런 까닭에 화폐는 전능한 존재로 간주된다…화폐는 욕구와 대상, 인간의 생활과 생활수단 사이의 뚜쟁이이다. 그러나 나에게 나의 삶을 매개해 주는 것, 그것은 나를 위해 다른 인간의 현존도 나에게 매개해 주며, 그것은 나에게는 다른 인간이다. - P. 174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전지전능하신 ‘화폐’의 위력을 실감한 마르크스의 혜안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능성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이 두렵다. 보다 많은 ‘화폐’가 행복의 척도이며 생의 목표이며 현실적 삶의 궁극이라는 데 모두 동의하십니까?

 청년 마르크스의 결정적 시기의 다듬어지지 않는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책의 내용보다 현실이 먼저 보이고 지나온 자본주의의 역사가 보인다. 우리가 고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느냐는 질문에 반대한다. 자본주의를 엎어버리자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가공할 위력에 몸 둘 모르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도 아니다. 난해한 번역문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드는 현실로 두통을 유발하는 책이다.


07012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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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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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치에 지독하게 민감하다. 그러면서 정치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뉴스에 보도되는 정당과 정치인들의 행위를 술안주 삼아 씹어대지만 우리의 사유와 태도와 그리고 행동 방식은 정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도 한나라당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일보의 관점으로 현실을 비판하며 자신의 생각으로 착각한다. 왜 그럴까?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억압된 가부장적 생활 양식때문이라는 성정치학을 주장했지만 자신의 계급과 모순된 사고방식과 정치 행태를 쉽게 진단하기는 어렵다. 이런 현실은 지속되며 쉽게 바뀌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자신의 위치와 생활을 확인하고 삶의 근본적인 목표와 태도를 결정하는 일은 어디에서 배워야 하는 것일까?

정규 학교 교육을 통해서 난 이런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 하물며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교육의 혜택을 제대로 입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는 더 할 것이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을 통해, 정치적 삶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한다. 가난 때문에 겪는 고립적 삶을 벗어나 민주 시민으로서 정치적 삶을 누리고 그 안에서 희망과 행동하는 삶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을 통해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얼 쇼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확신을 행동으로 옮긴다.

미국에서 시작된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는 이제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얼 쇼리스의 작지만 엄청난 실험은 성공적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또다른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최고의 학생들을 위한 최고의 교육은 곧 모든 이들을 위한 최고의 교육이다.”라는 허친스의 말을 교육 방법으로 굳게 믿고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삶을 행동하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정치적 삶은 질서와 자유 사이의 공간을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행동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정치, 또는 중용이기 때문이다. - P. 67

수강생들로 하여금 공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하고, 가난한 탓에 겪는 고립에서 벗어나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교육목표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클레멘트 인문학 코스는 여러 학문 분야를 통합한 형태의, 대학 수준의 강좌인데, 교수 방법으로는 여전히 소크라테스식 방법론이 활용되고 있다. - P. 202


책을 읽으면서 부족한 인문학 지식에 부끄러워진다. 서양의 문화와 그들의 정신을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철학과 역사, 예술 일반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지식을 얻을 기회가 없었다.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같은 곳을 통해 자발적인 노력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엉뚱한 발상이지만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인문학은 절대로 필요하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정신적 흐름과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예술에 대한 안목은 가난한 삶을 벗어나기 위한 헛된 방법론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시행하고 있다. 과명시 평생학습원과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의 인문학 과정이 그것이다. 인문학은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의 이유로 살아가는 삶의 희망을 갖게 한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에 대한 자각은 가난한 사람들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잃고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얼쇼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타자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이다. - P. 426

민주주의가 세상의 절대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수많은 모순과 단점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민주적 삶에 대한 가치와 목표를 공유해야 한다는 당위와 만나게 된다. 타자의 행복을 위해 무릅쓸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이라면 기꺼이 그 위험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자그마한 실천과 노력으로 함께 행복할 수 있다. 인문학 과정의 전폭적인 지지와 동참이 아니더라도 모두 함께 가는 길을 찾아야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 당연한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0701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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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1-1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인문학자들과 우리나라 인문학자들은 질적으로 다르지요.

sceptic 2007-01-17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된 인문학자를 찾기 힘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