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주의자의 책 - 책을 탐하는 한 교양인의 문.사.철 기록
표정훈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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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봄에 읽은 것으로 기억되는 표정훈의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는 독특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스스로 규정짓기 힘들어 보이고 객관적으로 보아도 명확하지 않은 표정훈의 정체는 무엇일까? 다양하게 펼쳐진 스펙트럼처럼 그의 전방위적 독서 이력은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책에 대한 열정을 실천으로 옮기며 책을 수집하고 읽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표출하는 모습이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실용주의적 책읽기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줄만한 내용과 알지 못했던 정보 차원의 ‘책에 관한 이야기’ 들이 많았던 책으로 기억한다. 대학과 학원에서 영어를 강의하며 번역에 몰두하고 있는 동생에게 권했던 책이기도 하다.

1년여만에 다시 내놓은 <탐서주의자의 책>은 흡입력 있는 제목으로 책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책의 반은 독자가 만든다는 대표적인 이론이 ‘수용자 반응 비평’이란게 있다. 이 책이 주는 의미는 정말 다양할 듯 싶어 흥미롭다. 사실 개인적으로 짜증이 좀 났다. 돈도 좀 아깝고. 나는 책을 사면 우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하는 오래된 버릇이 있다. 찾아보기 전까지 268페이지 본문 시작이 17페이지다. 책사는 데 가장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내 방식은 변하고 있다. 아무 책이나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책도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겠으나 실망스럽다. 부제처럼 ‘책을 탐하는 한 교양인의 문 · 사 · 철 기록’을 훔쳐보고 싶다는 막연한 호기심으로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을. 기대치가 너무 높았는지도 모른다.

읽지 못한 고전들을 더 읽고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책들을 다시 읽고 새로 나온 좋은 책들을 접하는 즐거움들이 계속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 문제는 나의 게으름이다. 서점에 가 직접 책을 고르고 만져보고 뒤적여보는 수고로움을 포기한지가 꽤 된다. 바쁘다는 핑계가 따르지만 이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온라인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의 적절한 활용을 마음속으로 다짐해 본다.

그렇다고 표정훈의 객관적 평가를 부정적으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의 책에 대한 사랑과 정성, 다양한 지식과 폭넓은 독서를 통해 다음에 내놓을 책을 기대한다. 그의 말대로 '통합적 복합성(Integrative complexity)'에 기초한 나름의 책을 기대한다. 관심 분야별 선택과 집중에 의한 상호관련성 높은 분야별 교양서도 좋겠고, 전문서적들에 대한 일반들의 이해를 돕는 책도 좋을 것이다. 책 자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수필식으로 소개하는 책은 이제 그만 두고 책꽂이 한켠에서 자주 손이 가는 ‘책에 관한 책’을 기다려 본다.


200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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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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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우리 문화의 근대성은 모두 서양에 빚지고 있을까?’하는 물음이 생긴다. 근대의 개념조차 모호하며 문화적 지평은 고사하고 그 뿌리조차 척박한 이유는 일제 식민지의 유령으로부터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닐까?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는 영국의 투틀리지 출판사의 야심작 시리즈 1권이다. 세계의 지성들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라는데 앞으로도 읽어볼 만 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린비에서 출판한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1권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었고, 2권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었다. 그 이후에는 읽은 책이 없지만 두 권 모두 값진 책이었다. 출판사에서 펴내는 시리즈는 대개 1, 2권에 승부(?)가 결정된다. 이 책의 구성과 형식이 독특하다. 지젝의 사상과 저작을 중심으로 그의 논의를 정리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용어와 개념 정리는 친절하게도 각 단원마다 요약 정리를 해 주고 있다. 중간에 지젝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들의 사진과 개념을 설명으로 덧붙이고 있는 것도 지루하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20세기의 가장 명민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처럼 학문의 한 분야를 개척한 학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젝은 적이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해체주의자, 푸코주의자, 페미니스트들, 데리다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들 모두 제젝을 싫어한다. 그것은 지젝이 라캉주의자로 스스로 선언한 데서 연유한다. 학계는 늘 지젝보다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의 비판이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사유의 하나”라고 불리는 지도 모른다.

  영국인 저자 토니 마이어스는 슬로베니아 출신 지젝을 ‘끊임없이 놀라는 사람,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 진실로 구멍을 드러내는 부정어법, 할리우드 영화광, 프랑스 철학통, 대통령 후보’이며 ‘오늘날 가장 탁월한 사상가’라고 정의한다. 1981년에 철학 박사학위를, 파리 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젝의 사유는 예사롭지 않다. 독자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이 없다는 이유로 탁월한 철학자로 평가받지 못하지만 그 자리를 할리우드 상업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로 보충하고 있다.

  지젝은 변증법이라는 사유의 형식 혹은 방법론을 헤겔에게 제공받았다. 그의 작업에 실천적 영감을 제공한 사람은 마르크스다. 지젝이 시도하는 것은 마르크스적 사유 전통, 특히 이데올로기 비판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의 분석틀과 개념용어를 제공하는 역할은 라캉이 맡는다. 그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상징계와 실재계의 개념이다. 그는 이 두 세계의 접속지점에 ‘주체’ 개념을 위치시키고 그것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와 라캉, 세 명의 철학자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체’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셰링이나 루이 알튀세, 오토 바이닝거 등을 동원하여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근대를 비판하고 라캉의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다’에 대한 오해를 설명한다. 

  슬라보예 지젝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21세기형 사상가로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숨쉬고 일상에서 접하는 대중문화와 정치현상들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독특한 방식의 사유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좌충우돌하는 키취적 문화 게릴라쯤으로 평가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향락과 그것의 정치적 부침’이라는 한국어판 출판을 기념하며 보냈다는 지젝의 최근 글로 책을 끝맺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조만간 지젝을 다시 만나야겠다. 정치적 성향과 세상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는 우리 시대에 주목받는 대표적인 사상가임에는 틀림없다. 세월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의 사상과 행보에 주목받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일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듯 싶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분노하며 부시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히치콕이나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이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과 현대인들의 다양한 정신세계를 분석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슬라보예 지젝 사상적 변모와 흐름을 소개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200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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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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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통해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가들이 많다. 헤겔에게서 사유와 방법론을 제공받고 자크 라캉의 분석틀과 개념 용어를 사용해서 마르크스로부터 실천적 영감을 제공받았다는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자이면서 실천적 문화 비평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진중권의 인문적, 미학적 사유는 비트겐슈타인의 인식틀과 벤야민에게 받은 영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밝히고 있다. 2002년쯤 내가 읽었던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첫 책은 철학자 김용석의 <깊이와 넓이 4막 16장>이었다. 김용석 또한 정확한 개념 정립과 논리적인 글쓰기로 문화 현상들을 꼼꼼하게 다룬 적이 있다.

  90년대 기억에 남는 몇 권의 책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를 꼽는다. 마그리트와 에셔를 통해서 그가 보여준 미학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돌하게 명민한 분석과 거침없는 목소리로 현실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진보 논객 ‘진중권’이 아니라 책 속에서 만나는 그의 목소리는 다소 진중하다. 하지만 여전히 재치있고 감각적인 문장은 여전히 독자를 흡수하는 힘을 갖는다.

  “상상은 정신의 놀이다. 상상을 할 때 정신은 노동을 하지 않고 놀이를 한다. 미래에는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예언은 맞았다. 비록 인류의 미래는 공산주의의 것이 아니었지만, 상상력이 생산력으로 진화하면서 노동은 점차 유희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윤리학은 미학이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도 실현되고 있다. 상상력은 미학의 영역이며, 이 영역은 진위와 선악의 피안에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 ‘상상력 혁명’중에서

  스스로 밝힌 위와 같은 서문의 내용이 이 책의 의미를 대변하고 있다. 점점 빠르게 진행되는 미디어 시대에 활자 매체인 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중권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의 문화 텍스트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비선형, 순환성, 파편성, 중의성, 동감각, 상형문자, 단자론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를 내세워 이것을 다시 일곱 개의 주제로 일별하고 있다.

  우연과 필연(red)-주사위/체스/광대, 빛과 그림자(orange)-카메라 옵스쿠라/라테르나 마기카/그림자놀이, 숨바꼭질(yellow)-아나몰포시스/인형풍경/물구나무, 수수께끼(green)-애너그램/아크로스틱/리버스, 사라짐의 미학(blue)-피크노렙시/마술, 순간에서 영원으로(navy blue)-불꽃놀이/만화경/미로, 다이달로스의 꿈(purple)-종이접기/오토마타/정리정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배열하고 묶는 방식으로 흥미진진한 텍스트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색인처럼 사용되는 색은 독특한 의미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다만 각 주제 아래 묶인 놀이들이 제각각 독립적이지 않고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평면적 테스트를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이 책은 90도로 돌려 보고 뒤집어 보고 비스듬이 놓고 째려보고 별 짓을 다하며 읽어야하는 재밌는 놀잇감이다. 아무도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에셔나 김재홍의 그림 등 <미학 오딧세이>에 소개되었던 작품들이 많아 익숙함 속에서 그의 텍스트들 자체가 또 하나의 하이퍼 링크 기능을 갖게 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또 같은 문단과 문장들이 반복되는 장치를 통해 순환성과 중의성 등 앞서 제시한 일곱 개의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이 책의 재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어린 시절 익숙하게 보아왔던, 혹은 지금 여전히 즐기고 있는 놀이와 사물로부터 자연스럽게 상상력의 세계와 놀이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또 하나는 책의 구성과 치밀한 글쓰기 전략으로부터 오는 신선함과 흥미다. 대부분의 인문학 텍스트의 진지함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물론 내용과 소재 자체에 대한 즐거움은 기본이다.

  “창조적 인간이 되고 싶은가? 그럼 성숙의 지혜를 가지고 어린 시절의 천진함으로 돌아가라. 500년 전에 이미 기술적 상상력을 갖고 있었던 다빈치. 그는 호기심에 한계가 없고 상상력에 구속이 없는 ‘영원한 소년’이었다” - 영원한 소년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상상력 혁명’은 결국 ‘영원한 소년’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순환 고리를 에셔의 작품 ‘메타몰포시스’로 보여주면서 책을 끝내고 있다.

  맥루한의 미디어 시대에 대한 경고는 책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단언할 ?없겠다. 하지만 적어도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과 같은 신선하고 재밌고 즐거운 그러면서도 상상력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책들이 있는 한 활자 매체를 떠날 생각은 없다. 늘 새恝?수많은 없겠으나 진중권의 또 다른 책을 기다린다.

  하늘이 흐리다. 비가 올 것만 같다. 김광석의 ‘거리에서’가 가슴에 사무치는 날이다.


200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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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듣다 읽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미학강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고봉만.류재화 옮김 / 이매진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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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서양미술사 <고전주의와 바로크>를 다시 뒤적여 본다. 고전주의와 바로크 시대의 거장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과 ‘엘리에제르와 레베카’라는 그림으로 시작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미학 강의는 인류의 발자취를 더듬어 대표적인 예술작품을 통해 교훈을 얻어내고 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미학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보다 듣다 읽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푸생을 보고, 라모를 들으며, 디드로를 읽는 것이 주된 내용이고 ‘말과 음악’, ‘소리와 색깔’, ‘오브제들에 관한 시선’으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한가지 곤혹스러운 것은 라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들어본 적도 없는 나는 음악에 대한 이론들이 마치 낯선 외국어처럼 이해 불가능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190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1930년에 최연소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브라질로 건너가 원주민과 함께 거주하면서 미개문명에 대한 탐구에 정열을 쏟았고, 2차 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건너가 언어학자 야콥슨을 만나 언어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프랑스로 귀국하여 ‘사회인류학’ 강좌를 창설한 20세기의 뛰어난 지성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푸생의 두 그림을 꼼꼼하게 해설하는 방식은 당시 예술가들의 이론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당시 라모의 음악에 열광했던 이유를 멜로디와 화성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디드로의 예술론이 보여주는 당시의 논의들을 통해 미의식에 대한 변화들을 분석해주고 있는 셈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시대가 아닌가 싶다. 레비-스트로스가 푸생과 라모와 디드로를 선택한 것은 사회인류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고전주의와 바로크, 신고전주의 대표자를 통해 인간의 미적 가치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한 예술과 시대에 충실한 예술의 가치 평가를 내릴 때 어느 쪽이 우수하다고 평가할 수 없듯이 인류가 쌓아온 문화는 상대성과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특정 인물인 푸생, 라모, 디드로를 넘어 말-여기에는 언어학자 소쉬르의 ‘빠롤parole’ 개념이 ‘랑그/랑가주langue/langage'과 구분되어 쓰인다-과 음악, 소리와 색깔이라는 사유방식으로 확장되어 ’오브제objet'에 대한 시선으로까지 확대된다. 인간이 살아온 문화와 인류의 생활방식들 속에서, 특히 문명화되지 않은 '바구니'에 대한 사소함에서, 대상에 대한 그의 탁월한 분석과 날카로운 시선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비록 온전히 내게 전달되어 육화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고유의 예술 대상들, 즉 오브제에 관한 연구와 깊이있는 관심은 결국 한국인의 사유방식과 문화 코드를 읽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객관적(?)인 저력 때문이다. 이름난 유럽과 서양의 예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곧 우리 민족 고유의 미의식을 현재화하고 세계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우리 고유의 미학 강의가 나올 날이 멀지 않다고 믿는다.

 
200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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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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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구름의 장막을 걷어내듯 시원스레 퍼붓는 소나기처럼 읽혔다.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려’ 본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눈물이 날 뻔 했던 책들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다가……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지금까지 학교만 다녔다. 배우러 그리고 가르치러 뻔질나게 학교 교문을 드나들며 난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가르쳤나하는 자괴감에 눈물이 날 듯 했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넘어 이 사회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표현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실천이다’는 J. 네루의 언설로도 설명될 수 없는 내면의 고백이었고 삶에 대한 개인적 목표로도 설명될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 칼마르크스(Karl Marx) <루이 보나파르트 브루메어 18일>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평생을 바쳐야 하는 사업이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탱크레드>

  라는 명제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시작된다. 사이드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학문과 영국의 수상이었던 디즈레일리로 대표되는 정치를 통해 지식과 권력 - 앎과 힘의 관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인용이 이 책에서 비판되는 오리엔탈리즘의 두 가지 속성 - 인식과 실천을 대변하고 있다.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이다. 이것이 어떻게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 정책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실증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발생, 발전, 전개라는 논리에 따라 3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박홍규의 번역이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저자인 사이드는 문학평론가이다.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이주한 사이드는 카이로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과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는다. 그의 삶의 행로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을 아우른다.

  사이드의 관심이 그의 생과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것처럼 이 책에서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7, 8세기부터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적 근원을 파헤치고 실증적 자료와 문헌들을 통해 그 허구적 성격을 사이드 특유의 해박한 지식과 번득이는 예지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은 역사서도 아니고 사회비평과 관련된 개설서도 물론 아니다. 그저 사이드가 제시하는 비판적 관점을 따라가며 인간의 성향과 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누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러한 현상들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제대로 눈뜨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질문과 반성을 유도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취급되는 크로머의 <현대 이집트>라는 책은 일본에서 1911년에 번역되어 한국지배의 기본이 되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멀리 존재하는 그들만의 논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 속에 가시처럼 박혀, 치유되지 않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현재에도 더욱 유효하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등 숱한 현실적 문제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관습화되어 생활과 사고방식 곳곳에 숨어 삶의 목표와 사유 방식 자체를 통제하고 변질시킨다.

  유럽에게 이슬람은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외상(trauma)이었다. 17세기말까지 ‘오토만 제국의 위협’이 유럽의 주위를 둘러싸서 모든 기독교 문명에 대한 끝없는 위험을 표상했다. 곧 유럽 문명은 그러한 위협이나 전설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도 미덕이나 악덕도 모두 병합하여, 스스로의 삶의 옷감 속에 짜넣어 흡수했다. (본문 117페이지)

  처음부터 논의의 초점이 명확하고 문학가로서 지성과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사이드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한 권의 책에서 모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슬람 국가 이외의 지역이 논의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이 편협하다고 볼 수도 없다. <오리엔탈리즘>은 지구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종교인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립과 갈등 측면에서 문헌학적 전개과정을 고찰하고 있으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식으로 동양인들에게 자리잡고 있는가하는 논의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책을 맺고 있다.

  내가 독자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은, 오리엔탈리즘?대한 해답이 옥시덴탈리즘 곧 서양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동양인’은 자신이 이전에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쉽게 - 너무나도 쉽게 -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동양인’ - 곧 ‘서양인’ - 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도, 아루런 거리낌도 없을 것이리라. 만일 오리엔탈리즘을 아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 유혹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점이다. 설령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지 간에또는 어떤 곳, 어느 때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필경 과거 이상으로 지금이 그것을 생각하기에 적합할 것이다. (본문 570페이지)

  이후에 1995년판 후기가 이어지고 박홍규의 ‘옮기면서’라는 역자 후기가 붙어 책은 800페이지에 달한다. 흥미있는 것은 1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박홍규 교수의 ‘옮기면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 이 책이 나에게 빛이 되는 이유는, 본문은 물론이려니와 박홍규의 적절한 역주, ‘옮기면서’에서 보여주는 냉소주의에 가까울 정도의 신랄한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삐딱한 지성이 내지르는 허튼 소리가 아니며 덜떨어진 얼치기 교수의 사회 비판적 투정의 목소리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심각한 경고의 목소리로서 내 영혼을 울리고 갈고리처럼 살을 후벼 파는 자성의 목소리로 삶의 자세와 태도를 되돌아 보게 한다.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박홍규 번역의 증보판 <오리엔탈리즘>에 최고의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오래 간직하고 두고 볼만한 좋은 책 한 권을 책꽂이에 더하는 기쁨은 덤으로 얻었다.


2005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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