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우리 문화의 근대성은 모두 서양에 빚지고 있을까?’하는 물음이 생긴다. 근대의 개념조차 모호하며 문화적 지평은 고사하고 그 뿌리조차 척박한 이유는 일제 식민지의 유령으로부터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닐까?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는 영국의 투틀리지 출판사의 야심작 시리즈 1권이다. 세계의 지성들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라는데 앞으로도 읽어볼 만 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린비에서 출판한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1권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었고, 2권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었다. 그 이후에는 읽은 책이 없지만 두 권 모두 값진 책이었다. 출판사에서 펴내는 시리즈는 대개 1, 2권에 승부(?)가 결정된다. 이 책의 구성과 형식이 독특하다. 지젝의 사상과 저작을 중심으로 그의 논의를 정리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용어와 개념 정리는 친절하게도 각 단원마다 요약 정리를 해 주고 있다. 중간에 지젝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들의 사진과 개념을 설명으로 덧붙이고 있는 것도 지루하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20세기의 가장 명민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처럼 학문의 한 분야를 개척한 학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젝은 적이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해체주의자, 푸코주의자, 페미니스트들, 데리다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들 모두 제젝을 싫어한다. 그것은 지젝이 라캉주의자로 스스로 선언한 데서 연유한다. 학계는 늘 지젝보다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의 비판이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사유의 하나”라고 불리는 지도 모른다.
영국인 저자 토니 마이어스는 슬로베니아 출신 지젝을 ‘끊임없이 놀라는 사람,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 진실로 구멍을 드러내는 부정어법, 할리우드 영화광, 프랑스 철학통, 대통령 후보’이며 ‘오늘날 가장 탁월한 사상가’라고 정의한다. 1981년에 철학 박사학위를, 파리 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젝의 사유는 예사롭지 않다. 독자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이 없다는 이유로 탁월한 철학자로 평가받지 못하지만 그 자리를 할리우드 상업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로 보충하고 있다.
지젝은 변증법이라는 사유의 형식 혹은 방법론을 헤겔에게 제공받았다. 그의 작업에 실천적 영감을 제공한 사람은 마르크스다. 지젝이 시도하는 것은 마르크스적 사유 전통, 특히 이데올로기 비판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의 분석틀과 개념용어를 제공하는 역할은 라캉이 맡는다. 그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상징계와 실재계의 개념이다. 그는 이 두 세계의 접속지점에 ‘주체’ 개념을 위치시키고 그것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와 라캉, 세 명의 철학자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체’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셰링이나 루이 알튀세, 오토 바이닝거 등을 동원하여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근대를 비판하고 라캉의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다’에 대한 오해를 설명한다.
슬라보예 지젝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21세기형 사상가로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숨쉬고 일상에서 접하는 대중문화와 정치현상들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독특한 방식의 사유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좌충우돌하는 키취적 문화 게릴라쯤으로 평가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향락과 그것의 정치적 부침’이라는 한국어판 출판을 기념하며 보냈다는 지젝의 최근 글로 책을 끝맺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조만간 지젝을 다시 만나야겠다. 정치적 성향과 세상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는 우리 시대에 주목받는 대표적인 사상가임에는 틀림없다. 세월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의 사상과 행보에 주목받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일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듯 싶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분노하며 부시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히치콕이나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이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과 현대인들의 다양한 정신세계를 분석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슬라보예 지젝 사상적 변모와 흐름을 소개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2005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