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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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하늘 멀리 헬리콥터 한 대가 흰 구름을 배경으로 날아간다. 벌써 가을이 당도해 버린 것인가. 지난 번에 주문한 <서재 결혼 시키기>는 책에 관한 여러 책들 중 하나다. 독서에 관한, 책에 관한 타인의 취향이 궁금할 때 가끔 환자(?)들의 책을 읽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증상과 성향들을 보여 재미있다. 물론 부분적으로 나도 비슷한 증상을 경험했고 그렇게 지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중의 하나는 책읽는 부모를 만나는 일이라고 한다.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양질의 도서를 책장 가득 채워주는 것보다 아이와 함께 조용히 책읽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 분위기가 집안 전체를 가득 메운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앤 패디먼은 바로 그런 집에서 자란 대표적인 경우이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는 과정보다 서재를 합치는 일련의 과정들이 흥미롭게 보인다. 영혼을 합치는 작업을 눈으로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은 저자가 살아온 과정을 책이라는 주제로 묶은 수필집이다. 성장배경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와 연결시켜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불편하고 딱딱한 이야기가 아니라 위트와 유머 넘치는 글솜씨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웃음을 만들어준다. 권위적이거나 목에 힘주고 설교하거나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로 독자들을 긴장시키지 않는 방법을 저자는 알고 있는 듯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과 인연을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끔씩 책을 읽는 행 위 자체를 돌아보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여전히 책읽기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사는 나에게 생활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쾌하고 즐겁게 여겨진다. 결국 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자연스럽게 자신이 읽고 쓰는 일로 연결되어 버린 앤 패디먼은 행복해 보인다. 누구나 그렇게 자연스런 행복을 원한다.

  어느집에나 같은 책 두권이 꽂혀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읽고 선물했던 책과 선물받았던 책들이 가장 많은 경우다. 양이 많지 않아 나란히 꽂아두고 나름의 추억으로 삼는다. 패디먼 일가처럼 교열에 관한 편집증적 증상을 보이지는 않지만 직업병 수준에 가까운 맞춤법과 표준어에 대한 관심은 글쓰기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수많은 오탈자를 담고 있는 일상적인 생활들이 더 정겹다. 엘리베이터에 앞 게시판에 붙혀놓은 반상회 안내문에 아저씨들의 실수가 짜증으로 여겨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언제나 세상을 정확하고 꼼꼼하게만 살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표지의 인용부호가 패디먼의 삶을 요약하는 훌륭한 문장이 된다. 그녀의 전 생이 책으로 가득하다는 말이니 달리 설명이 필요없다. 수많은 책에 관한 책중에 하나임이 틀림없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손색없는 아주 괜찮은 책이다.


200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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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과 폭력 살림지식총서 29
류성민 지음 / 살림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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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스럽다기보다는 폭력적이다.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인간은 사회적 질서와 규칙을 잘 지키는 규범적 동물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본능적으로 폭력적 성향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갈등과 대립 상황에서 폭력은 가장 쉽고 단순한 문제 해결 방법이었을 것이다. 힘의 논리는 자연에서 벌어지는 가장 단순하고 손쉬운 문제 해결방법으로 여겨진다.

  원시 공동체 사회를 이루면서 인간의 이성은 조금씩 발달하기 시작했다. 근대적 국가가 성립되고 형벌제도가 도입되어 개인의 복수가 국가권력에 의해 대신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기 전까지 폭력은 당연한 개인간의 문제 해결 수단이었다. 이것이 종교제의와 결합되면서 희생제의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의 출발을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에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과정에서 동물을 희생제의로 삼는 것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의 제목을 뒤집어 <성스러움과 폭력>으로 류성민은 폭력에 대한 논의를 종교의식과 희생제의라는 주제로 풀어내고 있다. 종교행사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들에게 가한 필요 이상의 가학적 폭력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다각도로 진행된 논의를 먼저 보여준다.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하던 논의는 결국 희생제의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폭력적 성향을 잠재우는 역할로 희생제의는 제 역할을 다 해냈을까? 희생제의가 폭력을 잠재울 수 있는 사회적 장치로 충분한 역할을 했을까? 여기에 대한 의문과 대답은 여전히 미흡하다. 짧은 분량 속에 여러 가지 논의를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한계로 느껴진다. 아무튼 제한된 분량 속에서 폭력의 의미를 종교적 의미와 결합시키고 ‘희생제의’라는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했기 때문에 성스러움이라는 다소 거리가 먼 개념과 결합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희생제의를 거행하면서 엄청난 폭력이 행사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폭력이 폭력을 예방하고 최소화하기 위한 방책이라는 분석은 폭력을 통한 폭력의 극복이라는 역설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희생제의는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윤리적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39페이지)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폭력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로부터 예수와 신약성서의 저자들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견해였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가 발전시켜온 종교의 기본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폭력 성향과 사회 윤리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논의의 초점이 종교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희생제의에 관한 견해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반박할 만한 견해가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희생제의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죄와 사람을 구분지어 흔히 쓰는 말이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가 그것이다. 이 말 속에는 희생제의가 표방하는 중요한 윤리적 의미가 숨어있다. 죄와 사람을 분리하여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할 희생제의가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래서 예수는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영원’이라는 시간적 개념속에서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희생제의를 통해 억제되고 예방되어 온 폭력은 이제 사법제도를 통해 효과적으로 제어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사족처럼 마지막에 언급한 현실 관점에서 바라본 폭력의 의미에 대한 논의이다. 학교 폭력을 비롯하여, 조폭의 직접적 폭력, 사법제도에 의해 행해지는 사형이라는 공인된 폭력,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부패 척결 과정에서 드러나는 희생양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폭력과 희생 제의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어 아쉽다. 종교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 측면에서 드러나는 폭력에 대한 논의가 깊이 있게 다루어지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학문적 영역을 벗어난 이야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쉬운 논의는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현실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자식을 위해, 학생을 체벌을 한다는 것도 정당하지 못하다. 희생제의에서 자신이 자신을 대신하는 동물에게 폭력을 가하듯이 체벌은 스스로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희생양을 만드는 정치 노닐도 비판받아야 한다. 희생제의에서의 희생양은 양을 희생하는 사람들 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곧 자기희생인 것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 대신에 그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폭력의 순환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88페이지)


200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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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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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본몬 4페이지)

  강유원의 <책과 세계>는 이렇게 도발적인 선언으로 시작된다. 상식과 타성에 젖어버린 책에 대한 생각들을 일순간 뒤집어버리는 한 마디가 통렬하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전인류의 40%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이들을 미개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책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읽어도 읽어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대지와 호흡하고 하늘을 우러르며 두 뺨에 스치는 바람이 일러준대로 살아가는 삶이 더 행복하거나 인간적(?)일 수 있다.

  지식을 위한 방편이라고 하기엔 시대가 너무 달라졌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나무를 베고 종이를 만들어 책을 찍어내는 일이 유효한가?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전들을 들쑤셔본다. 국가론, 갈리아 전기, 우정론, 신국, 신학대전, 군주론, 리바이어던, 백과전서를 거쳐 국부론, 종의 기원까지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킨 고전의 의미를 재해석해보는 것으로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하고 있다.

  책이 가지는 매체로의 속성 또한 다양하다. 진흙판에서 죽간, 최근의 e-book에 이르기까지 매체 자체가 가지는 역할과 의미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인간을 중심으로 결국 책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책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인류가 발전(?)을 거듭하며 문명을 이룩해 오는 과정에서 책의 역할과 의미를 강조하며 그래서 ‘책’은 중요한 것이다는 교훈적 결론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책의 재조명 작업 정도로 불릴 수 있겠다.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평했던 어느 역사의 말을 되새겨본다. 15세기 이후 축적된 인류의 이성과 문화의 발달이 현재의 관점에서도 지속 가능한 일인가? 고전을 통해 자아를 들여다보는 일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이며, 무언가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게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일 수도 있다고 저자에게 설득 당했다.

  물론 수많은 반론과 각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책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탐색 없이 책읽기에 몰두하거나 아이들에게 책 읽히기에 목매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살펴야 한다는 의미 정도는 읽어낼 수 있다. 아울러 단 한권의 책, 고전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과 의미들을 다시 한번 새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역사와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현재를 조망해 볼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에는 현재의 고전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넓게 보고 깊이 읽는 안목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얼마나 더 들여다보아야 안개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길이 보일런지......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공포는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요, 탐욕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즐거움에 의해 생겨난다. (본문 11페이지)

  저자의 말처럼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가지 힘 중에 나는 늘 탐욕을 탐한다. 누구나 그런가? 고통을 즐기고 즐거움을 음미하는 듯한 태도는 가식이다. 고통스러운가? 아니면 즐거운가? 어느 쪽인가? 그것이 직접적으로 몸에 가해지는 일들이라면 더욱 본능에 충실해진다. 책과 무관한 인용일 수 있으나 생각해보면 온몸이 떨리는 즐거움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은 개인마다 다르지 않은가. 오늘도 공포를 통한 고통이 아니라 탐욕을 통해 즐거움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를 포함한 전 인류를 위해 건배할 일이다.


200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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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과 매혹
레이첼 에드워즈, 키스 리더 지음, 이경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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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랑슬랭은 친구들과 브리지 게임을 하고 아내와 딸과 함께 사위의 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가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현관문은 굳게 잠긴 채 미친듯이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다. 더욱이 하녀들이 있는 다락방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다. 두 시간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경찰서에 가서 세 명의 경관과 함께 집 뒤쪽의 창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 2층으로 가는 계단위에 극심하게 난타당한 채 허벅지와 다리가 처참하게 잘린 랑슬랭 부인과 딸 주느비에브 랑슬랭을 발견한다. 정말 끔찍한 일은 두 모녀의 숨이 붙어 있을 때 맨손으로 뽑아낸 안구가 계단 양탄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처참한 살해 현장을 확인한 경관과 랑슬랭 씨는 입주 가정부 크리스틴 파팽과 레아 파팽의 시신을 확인하게 위해 2층으로 향한다. 하녀들의 방은 굳게 잠겨 있고 열쇠 수리공을 불러 방문을 열자 파팽 자매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살아있었던 것이다. 바닥에는 두 모녀를 살해할 때 사용한 망치가 놓여 있었으며 두 자매가 바로 살인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은 순순히 살인을 인정했고 살인에 사용한 칼은 랑슬랭 부인의 시체 밑에서 또 다른 도구인 양철 물병은 계단에서 발견되었다.

  이 엽기적인 살인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끌기위한 설정이 아니라 1933년 2월 2일 프랑스의 르 망 시 브뤼에르 가 6번지에 벌어진 세기적인 살인 현장의 모습이다.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은 경악했으며 냄비처럼 들끓었다. 훨씬 더 끔찍한 살인 사건과 연쇄 살인범과는 비교되지 않는 특수하고 대체 불가능한 힘을 부여한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재생산되는 문화의 코드가 되고 있다.

  레이첼 워드워즈와 키스 리더가 공저한 <잔혹과 매혹>은 이렇게 단 하나의 살인 사건이 가져온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있다. 우선 1장에서는 살인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사실fact에만 집중하고 있다. 객관적 사실들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라깡과 데리다, 들뢰즈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들의 관심과 저작을 중심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있다. 3장에서는 ‘매혹당한 작가들’이라는 부제로 해석과 분석을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마지막 4장에서는 영화 속의 자매 살인자의 모습들을 분석하며 수없이 많은 영화로 최근 2000년까지 재생산 되고 있는 두 자매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세상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살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사건은 계급 간의 갈등, 즉 주인과 하녀라는 특수한 관계 때문에 벌어진 사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두 자매는 근친상간의 동성애자였던 사실이 밝혀지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생활을 했던 유년시절 등이 알려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고 논란은 증폭되었다. 언니 크리스틴 파팽은 단두대 형을 언도 받았지만 대통령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1937년 정신병원에서 사망한다. 동생 레아 파팽은 10년 노역형을 치르고 최근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의 독특한 범죄행위가 주는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맨손으로 뽑아내고 한 집에 거주하던 여주인과 딸을 망치와 칼로 두 자매가 협력해서 살해한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르트르의 <벽>, 장주네의 <하녀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연륜의 힘> 등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로렌스 하비의 영화 <의식>, 니코 파파타키의 영화 <심연> 등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이후 2000년에 제작된 <살인의 상처>, <파팽자매를 찾아서>에 이르기까지 두 자매에 관한 관심을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학문적 관점과 정신분석이나 예술적 관점에서 두 자매의 삶을 재해석하고 분석하는 것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왜, 도대체 왜 그런 방식으로 두 모녀를 살해했으며, 두 자매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라깡의 문구를 빌리자면 ‘샴 쌍둥이 영혼’을 지닌 인간에 대한 보고서인지도 모른다.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와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한 방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미스터리가 숨어있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지나치게 간접적인 서술과 지금까지 출판된 책과 영화를 통해 2차적이고 종합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본질에서는 한발 물러선 느낌까지 전해준다.

  하지만 사건 자체가 주는 ‘잔혹’과 그 잔혹이 불러일으키는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많은 작가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계속된다. 21세기에도 사람湧?삶은 이어지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는 이어질 것이다. 20세기에 벌어진 처참한 살인 사건이 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증폭되는 의문들이 이 책이 내게 건네는 의미이다.

  하늘은 회색이어도 시간은 흐르고, 삶은 계속되겠지만……


200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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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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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서 가정법을 사용하는 일이 가장 바보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상상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을 돌아보며 아쉬움과 후회를 남긴다. 결정적 시기와 사건에 대해 후회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인류 역사의 변혁 과정에서 그 가정법을 사용하는 일은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과거를 재생하고 현재화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의 지성이라 일컬을 만한 지식인 하워드 진의 역사 모노드라마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marx in soho>는 즐거운 상상력이 빚어놓은 재미있는 희곡이다. 실제로 공연이 되었다고 하지만 레제드라마lese drama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배우의 연기로 각인되기 보다는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와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며 읽기 위한 희곡으로 더 어울린다.

  뉴욕은 현재 지구상의 존재하는 모든 자본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 ․ 11테러로 더 잘 알려진 세계무역센터가 있는 도시 뉴욕에 마르크스가 시대를 뛰어넘어 나타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며 우리에게 어떤 말들을 전해줄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다.

  엥겔스와 더불어 세계를 뒤흔든 선언으로 기억되는 ‘공산당선언(1848년)’을 발표한 마르크스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엥겔스는 그보다 두 살 어린 스물여덟이었다. 이후 유럽 파리와 벨기에를 거쳐 영국에 망명한 마르크스는 불세출의 걸작 ‘자본(Das Capital)'을 출간한다. 아내 예니와 세 딸들은 극도의 빈곤과 가난 속에서 엥겔스의 도움으로 겨우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준의 생활을 영위했다. 평생 마르크스를 괴롭힌 엉덩이의 종기만큼 가난은 그에게 버릴 수 없는 생의 동반자였다.

  아내 예니와 막내딸 엘레아노르는 가족의 울타리를 그를 감쌌고 또한 사상의 동반자였다. 이 책에서 프루동과 바쿠닌을 등장시켜 관객을 즐겁게 한다. 특히 바쿠닌과의 신랄한 비판과 언쟁은 극적 재미를 더해준다. 엥겔스와의 관계가 오히려 마르크스의 입을 통해서만 제시되어 소홀하게 다루어진 면이 있다. 어떤가, 어차피 마르크스라는 인물을 통해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모노드라마라는 사실만으로도 재미있는데.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항변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반증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고했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철학자다. 우리 인류 역사에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만큼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면서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일정한 거리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워드 진은 그런 인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희곡이라는 형식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모노드라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인물을 대하게 된다. 물론 실존 인물에 대한 고증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수 없겠지만, 상상력의 폭은 넓어지고 인물은 재창조된다. 살아있는 마르크스, 얼마나 흥미로운 주제인가.

  하워드 진은 그 인물을 영국의 소호가 아닌 뉴욕의 소호로 불러 냈으며 그에게 실컷 자신에 대해 항변하고 왜곡된 자신에 대해 사람들에게 속시원히 말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한 인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으로는 부족하다. 실제 공연에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희곡은 공연을 관람하는 것보다 읽는 것으로 만족스러울 듯 싶다.

  뉴욕이라는 상징적 도시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행보가 뚜렷한 인관관계를 형성하며 극을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 정도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좀더 세밀하고 깊이있는 대사와 뉴욕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최대한 활용한 내용으로 극이 전개됐다면 하는 아쉬움도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서울에 나타난 마르크스였다면 즐겁게 읽지 못하고 우울하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의 나라 불구경하듯 현실과 동떨어진 사실이 아님에도 한다리 건너편에 세워 놓고 상상하는 즐거움을 놓쳤을 테니까 말이다. 짧지만 즐거운 상상을 통해 마르크스와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20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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