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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이정우 지음 / 아고라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에 관한 수많은 책들은 특별한 장르로 분류하거나 묶어낼 수가 없다. 개성에 따라,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과 사유의 방식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책에 관한 책만큼 다양하고 많은 책들이 책을 읽은 후의 책들이다. 학자들의 경우 연구 저작물의 형태나 해설서, 주석서 혹은 평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결과물을 정리한다. 인류가 남긴 지적 재산이라고 불릴만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난다. 단 한권의 책에 수많은 연구 논문과 다양한 해석이 따라 붙기도 하고 논쟁이 벌어지다가 전혀 다른 형태의 이론가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렇게 인류의 지성사는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선 시대에 대한 부정과 반발 한 분야의 대가에 대한 도전들은 반드시 필요하며 정의와 진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그 모든 행위들은 발전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된다.

  읽은 책의 종류와 내용들, 그리고 책을 읽는 목적과 방법들은 책을 읽는 사람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철학자 이정우의 책읽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 <탐독耽讀>이다. 대안 철학학교인 ‘철학 아카데미’를 이끌고 있는 이정우의 서재와 책읽기에 대한 호기심은 당연한 일이다. 학부에서 공학과 미학을 공부한 후 대학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이정우는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4년만에 사임했다. 그의 책읽기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유목적 사유’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의 여정을 거쳐 ‘철학’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른 저자의 ‘사유의 방식과 흐름’을 따라가 보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부러움과 시기심, 극단적인 질투를 만들어낸다. 이정우의 유목적 사유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된다. 소은 박홍규 선생의 영향으로 촉발된 ‘존재론’이라는 축과 푸코에 빚지고 있는 윤리적 ․ 정치적 문제에 대한 사유가 그것이다. 사회문화적 관심은 철학자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현대사회에서 철학을 ‘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짚어보고 철학자의 역할과 의미를 고민해본다면 앞으로 전개될 저자의 저작들이 기대된다. 단순히 인류의 지성사에 대한 깊은 연구와 개인적인 사유의 내밀한 성과들이 학문적 성과만으로 끝난다면 이정우는 훌륭한 학자나 연구자로서 허명을 남길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 섣부른 판단과 기대가 될 지 모르겠으나 그가 말한 ‘유목적 사유’의 끝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 여정을 지켜볼 용의는 있다.

  저자의 인생과 더불어 중학교 이후 대학 입학시절까지 이어진 문학 서적들에 대한 유목, 학부시절의 과학에 대한 유목, 대학원 시절 이후 철학에 대한 유목이 연대기처럼 펼쳐진다. 물론 살아온 과정과 시기에 특히 주목하고 관심을 가진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나간 시기들이 있겠지만 저자의 경우는 그 이력과 독서의 과정이 재미있다. 단순히 다독가이거나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룬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된다. 사회적으로 이름을 날린 명망가의 서재를 들여다 보는 호기심도 제외된다. ‘인간’을 주제로 철학을 ‘하는’ 한 인간의 방랑과 유목에 대한 고백을 진지하게 들어 볼 만하다.

  국어 교사인 아버지 덕에 문학과 동양 고전에 파묻혀 지낼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출발하는 이정우의 책읽기는 책을 통해 하나의 인격체로서 사유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얻는다.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읽기를 소개하는 저자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탐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 이정우와 나누는 대화의 시간들,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한 저자의 감상과 견해들, 잊고 있던 책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보는 즐거움, 읽지 않은 고전들을 이제라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까지 덤으로 얻는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책을 읽을 수는 없지만 나름의 방법과 틀을 갖추어 나가는 사람들의 방식을 넘겨다보는 일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나의 책읽기와 사유의 방식은 무엇을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 지향점은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저자의 말에 공감할 뿐이다. 독서를 통해 그저 나를 풀어놓고 자유롭게 유목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지적 희열과 사유의 즐거움을 책이 아닌 어느 곳에서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것을 찾는 순간, 러셀의 반어적 표현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철학자라고도 또 다른 무엇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사유하는 사람, 저작 활동과 교육 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할 뿐이다. 오랜 시간 옛?유목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는 유목이 특별히 유목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 사유가 흘러가는 대로 사유하고 글을 쓸 뿐이며, 그런 가로지르기의 사유, 유목의 사유가 내게는 오히려 더 편안하고 친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갈라놓은 범주들은 내게는 의미가 없다. 오직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 다루고 있는 주제에 따라 관련되는 연구와 사유를 할 뿐이다. 내 학문은 다음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선택하지 말고 창조하라.’ - P. 285


06042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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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ptic 2006-10-3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좋은 책 많이 만들어 주세요.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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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질병과 고통은 생물학적 속성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죽음이다. 단 한 번의 생이기 때문에 소중하면서도 극적이다. 특히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은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누구나 한 번은 병들고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이 절대 공평의 원리는 삶에 대한 비극성을 인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원칙에 대한 확인이다.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실로 다양하다. 어떤 병에 걸려 어떻게 죽느냐, 하니면 불의의 사고로 죽느냐에 따라 그 삶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까지 한다. 축복받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모든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죽음도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수잔 손택이 ‘은유metaphor’로서 ‘질병illness’을 분석한 책이 <은유로서의 질병>이다. 이 책은 ‘에이즈와 그 은유’라는 글과 묶여 합본으로 출판됐다. 10년의 간격을 두고 쓰여진 글 두 편이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후 <타인의 고통>을 펴낸 손택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질병과 고통 그리고 그것이 주는 이미지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확인하는 일관된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고 사회 속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짚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질병으로 고통을 얻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는 실로 다양한 의미와 은유가 내포되어 있다.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질병의 실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그 은유들은 점차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에이즈’라는 질병으로 과거로 회귀하는 듯하다.

  이 책에서 특히 관심을 갖는 질병은 결핵과 암이다. 저자가 두 번이나 암에 걸려 극복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관찰과 사유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죽은 이유조차 감추었던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당시 ‘결핵’이라는 질병이 지닌 은유에 대해, 이후 그녀가 걸렸던 ‘암’이라는 질병이 지닌 은유에 대해 이 책은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보여주는 문학적 에세이로 판단해야 한다. ‘은유’라는 말은 문학적 용어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은유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비유법이다. 손택은 은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은유라는 표현을 쓸 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간결한 정의,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내린 정의를 따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은유란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轉用하는 것이다.”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는 것은 철학이나 시만큼 오래된 정신 작용이며,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 방식을 낳은 기초이다. P. -129

  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대표적 은유는 병의 원인에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병에 걸리는가에 대한 문제가 질병에 대한 은유의 시작이다. 앞서 말한대로 의학 지식이 부족하거나 병의 증상이 보여주는 이미지가 그것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질병을 바라보는 방식이 치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치료를 넘어 주변 사람들과 죽음까지도 처리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남은 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무지는 질병 자체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환자들에게 다가온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시선들, 예를 들어 동성애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병역거부자 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 보다 오히려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에이즈 환자에 대한 시선일 것이다. 그 감염 경로와 치료 과정과 무관하게 널리 퍼져 있는 칼날같은 시선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나와 무관하다는 안도감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문제다. 페스트처럼 제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 수를 넘는 죽음을 불러온 질병들에 대해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암의 정복 즉 질병의 정복은 단순히 생명 연장의 꿈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은유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넘어 선 고통을 받는 ‘질병들’을 주의하고 조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수잔 손택이 보여준 ‘질병으로서의 은유’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더구나 10여년의 간격을 둔 두 편의 글이 시간을 뛰어 넘어 하나로 읽힌다.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는 책읽기도 재미있었다.


060428-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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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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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 이 순간도 곧, 과거가 된다.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금방 현재가 되어 버린다. 시간의 모든 주름들 사이로 시간은 하나가 되고 일직선상의 모든 흐름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의 고리가 되는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공간을 탈주하라.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모든 시공간의 의미에 대해 해체와 분석을 시도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에게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는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 이후의 삶과 앎의 의미를 고민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거쳐 가야할 텍스트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책이다.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라는 저자의 표현은 이 책의 의미 전반을 투사하는 조명등이다. 18세기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가 이루는 세 개의 그물망이 이 책을 가로지르는 의미망이다. 그런데 이 의미망이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대단히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고미숙의 의도는 텍스트 전체가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사유의 틀을 제공하고 각 장의 의미들이 엮어내는 경계들을 넘나들며 나비처럼 자유롭게 ‘앎의 혁명’을 꿈꾸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지식 코뮌에서 숙성된 고미숙의 글은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학문적 틀 안에 갇힌 아카데미즘과 학술 보고서에 기초한 죽은 지식들의 파편들을 해체한 후, 죽어버린 지식과 인식의 틀을 바로 잡고 인공호흡을 통해 생명의 따스한 온기를 불어 넣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이 신통력은 사이비나 이단, 사파로 분류될 수 없는 강렬한 흡인력을 갖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뛰어난 글쓰기 능력 때문이다. 이 능력은 독자에게 충분한 설득력과 긴장감을 동시에 공급한다. 18세기의 동양사를 가로지르는 깊이와 넓이는 설득력을 높이는 지적 헛기침이 아니라 자유롭게 확대 재생산된다. 적절한 인용과 글의 흐름에 탄력을 붙이는 솜씨가 일품이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고미숙만한 성찬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스타일리스트의 일면을 여지 없이 보여주는 글이다.

  ‘나비’로 상징되는 박지원의 글쓰기에 숨어있는 유쾌하고 발랄함을 기본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인용하면서 ‘근대’가 우리에게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다가 왔는지 흥미진진하게 근대의 접힘과 펼침을 반복한다. 이런 방식은 각 장 첫머리에 인용되는 ‘푸코’를 통해 재확인된다. ‘전사’의 냉정함과 날카로움은 고미숙이 꿈꾸는 이중적 방식 중의 하나였겠지만 내용이 아니라 전체를 구성하는 틀과 근대를 바로보는 인식 방법으로 재현된다. 그래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연암에게서 춤사위를 빌려 왔으나 안무는 푸코에게 맡긴 것 같다.

느림 또는 시간의 유목주의란 이 ''얼빠진'' 일정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코드화된 방향을 벗어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 삶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때 속도, 균질화, 화폐의 삼중주는 깨어진다. …… 느림의 또 다른 표상은 자기속도를 지니는 것이다. 순간속도가 강렬도의 문제라면, 자기속도는 이질성과 관련된 사항이다. 노마드의 여정에는 목적지가 없다. 아니,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해야 맞다. 따라서 그는 여정마다에서 마주치는 온갖 대상들과의 능동적 접속을 시도한다. - P. 84

  이 책의 출발은 우리가 인지하는 시공간에 대한 개념이다. 여기에서부터 일탈이 시작된다. 직선상의 펼쳐진 팽팽한 긴장감. 이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부딪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다. 이곳으로부터 탈주해야 우리는 그녀가 안내하는 여행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책의 전체 구성은 ‘시공간-인간-성-몸-앎-글쓰기’으로 되어 있다. 11장으로 각 장이 구분되어 있으나 말과 사물들이 두서 없이 충돌하는 자유로운 해방의 공간이다. 여정 자체가 목적인 노마드는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인간의 존재와 성(性)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하는 몸에 대한 성찰이 안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라면 앎과 글쓰기는 밖으로 표출되는 존재 방식이다. 고미숙은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 글쓰기를 택했다고 스스로 선언한다. 공부해서 글쓴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부럽다! 젠장!

  그러나 그 당당함과 유쾌함에 독자들은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다. 최근에 읽었던 수잔 손탁의 <은유로서의 질병>, 홍대용의 <의산문답> 등 근대를 이야기하는 중요한 주제와 관심사, 필수적인 저작들이 절묘하게 녹아 있기 때문에 편안하고 쉽게 쓰여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완전히 소화해내고 적절하게 버무리는 솜가 일품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텍스트가 이렇게 재밌게 읽히는 것은 독립적인 장과 절들의 재미와 유기적인 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주장이나 핵심적인 요소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지식들간의 합종 연횡, 주름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여유, 깔끔하고 탄력적인 문장들의 조합은 이 책의 가치를 배가 시켜준다.

  이 책의 고별사에 적힌 다음 글에 공감하며 나도 평생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공부는 더 이상 취미나 교양이 아니다. 더 이상 소위 전문가 집단이 독점하는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네 삶에서 날마다 하고, 평생을 해도 변함없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공부 말고 달리 무엇이 있는지를. 그러므로 대학 안에 있건 없건 누구나 평생 배워야 한다.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면서 동시에 자기 삶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
공부와 일상이 이렇게 오버랩될 때, 지식은 비로소 근대적 표상으로부터 탈주하여 삶의 역동적 흐름 속으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마음을 비워 공부함에 있어 사해(四海) 안에 모두가 형제(兄弟)이며, 중생(衆生)이 모두 깨달음의 스승들이다." 고로, 공부에 외부는 없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 P. 592


06051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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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za 2007-09-09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쾌한 리뷰 보면서 다시 한번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을 쓴다는 건 많은 노하우가 필요한 거지만, 쓸 때만큼은 자기를 잊고 책의 내용에 흠뻑 잠기어 절단.채취하는 것이 더 중요한 거 같아요~
 
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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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의 의식은 은유를 동반한다. 더구나 색채가 주는 강렬함은 이성적 판단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종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색깔에 대한 문화적 습성은 원형적 이미지를 벗겨내지 못하고 한 민족이나 모든 인류에게 고착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도 변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만 겉으로 표현을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금기시 되어 있는 법적 효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을 지배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아직도 선입견을 넘어선 차별을 경험한다. 이 차별은 당연한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나 현실에서의 변화는 만만치 않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매일 부딪히는 문제다. 동남아 노동자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뿌리 깊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미국과 서구 유럽에 대한 근대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혹자는 ‘한국 속의 세계’를 외치지만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약육강식의 국제질서는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자본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권리와 차별의 거부는 작은 외침으로 공허하게 들릴 때가 많다. 뿌리 깊은 인간의 의식의 원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이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얼마나 탁월한 사상가들을 배출했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변화와 삶의 본질적 모습이다. 그 끝이, 완성된 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다만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라는 낙관적 전망만이 오늘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될 지도 모른다.

  1951년 스물 일곱의 나이에 쓰여진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2006년에 읽는 심회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끼친 명저의 공통점은 선구적 안목과 새로움, 탁월한 분석과 이론으로 보편성과 항구성을 유지한다. 다양한 가치를 긍정하고 인류의 사상사에 진일보한 족적을 남긴 책으로 손꼽히는 책들은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거나 고통스런 사유의 결과물이다. 검은 피부를 가진 앙띨레스 출신 정신분석 의사가 써내려간 한 줄 한 줄이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이 책은 프란츠 파농의 육성 고백을 듣는 느낌을 전해준다.

  흑인의 정체성을 거론하는 것은 ‘타자’화된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앙띨레스 출신 흑인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곧 흑인 전체를 대표하는 전형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관계를 고찰하고 동 시대인들의 관찰과 저작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식민지 민중의 의존 콤플렉스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글은 스물 일곱 청년의 육성이 배어 있다. 특히 흑인성이나 흑인과 정신병리, 흑인과 인정투쟁을 이야기할 때 드러나는 감정적 진술은 오히려 객관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인 검은 피부에 대한 회한과 절규로 들린다. 검은 피부가 백인에게 주는 은유들이 수없이 많다. 특히 사르트르의 <반유대주의와 유태인>을 인용하면서 흑인과의 유사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은 탁월하다. 유럽인들의 트라우마인 반유대주의와 흑인에 대한 반응은 겹침과 펼침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백인들이 흑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편견과 흑인들 스스로 규정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것의 의미는 비판적 접근을 내포한다. 따라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P - 203

  원칙과 나이와 상관관계는?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고민하는 프란츠 파농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서른 여섯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고뇌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프랑스의 흑인 문제로 국한된 것처럼 보이는 그의 글은 이후 그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60년대 킹 목사나 말콤 X의 방법과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근본적 원인은 동일하다. 이십대에 프란츠 파농이 겪은 사유 과정이 시대를 넘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직도 그의 고민이 끝나지 않은 채 흑인 문제 뿐만 아니라 차별과 편견이라는 서로 다른 문제들에 공통적인 접근법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말이 현재형으로 다가오는 것은 반성적 태도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것이다. 프란츠 파농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향한 웅변으로 들리는 이유는 검은 피부보다 더 역겨운 하얀 가면들이 세계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구를 끝마치면서 나는 희망한다. 이 세계가 나와 더불어 활짝 열려진 모든 종류의 의식의 문을 느낄 수 있기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도한다.
  “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P - 292


060517-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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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또 하나의 세계 - 근사체험을 통해 다시 생각하는 죽음
최준식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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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은 새가 알의 껍데기를 까고 날아가듯이
우리도 몸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나 날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죽음은 형태(form)의 변화일 뿐이다.

  우리는 단 하루도 죽음과 헤어져 본 적이 없다. 태어나는 순간, 생명을 얻는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 무덤을 향한 끊임없는 질주가 우리의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이 생의 끝자락 어디쯤엔가 놓여 있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무엇으로 치부된다.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물학적 논쟁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한 논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삶 이후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지금 우리들의 삶이 오히려 훨씬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인도의 어떤 구루(영적스승)가 남긴 시 한편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나머지는 모두 주금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이 시가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분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믿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과 인식 저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깨달음이거나 죽음의 이쪽편인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이다.

  서양의 연속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항상 삶과 함께 하는 것이며 육체적 죽음은 하나님 곁으로 떠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신의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독교적 윤리관에서 보면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도구적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반면 동양의 불연속적 세계관은 죽음을 극도로 혐오한다. 삶과 죽음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으며 이승과 저승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전혀 다른 형태의 시공간이 존재한다. 불교나 유교적 관점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서는 동일하다.

  최준식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는 일상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죽음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제공한다. ‘근사체험을 통해 다시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주된 관심은 ‘근사체험near-death experience:NDE’에 두고 있다. 사람이 죽은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인다. 저자는 우선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락사에서 존엄사까지 의학적, 생물학적 죽음의 정확한 정의에서 죽음의 문제를 시작한다.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만큼 두려운 것이 있을까. 우리말에 ‘무섭다’는 대상이 존재할 때 사용하며, ‘두렵다’는 말은 대상을 알 수 없거나 특정 대상이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죽은은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이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결국 죽음에 대한 고찰이 지닌 의미가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죽음 뒤의 세계를 살펴보면 체외이탈과 어둔 공간 속의 터널 체험을 거쳐 빛의 존재를 만난다. 그리고 장벽을 만나게 되며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장벽 앞에서 몸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지역과 종교, 인종과 성별, 연령과 민족에 따라 다양하게 근사체험의 형태가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회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차이일 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과 레이먼드 무디, 퀴블러 로스 등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근사체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풀어주고 있다. 다양한 사례 수집과 수집된 자료 분석으로 통계를 내고 특징들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적 방법이 죽음을 말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이런 노력들이 죽음에 관한 인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에 대한 작은 해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의학계와 종교계의 견해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약물에 의한 환각 작용 실험 등 근사체험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실험도 있었고 종교적 교리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근사체험을 부정하는 종교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 잣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일이다. 사후 세계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근사체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차분히 고민해 볼 일이다. 이 책의 저자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내가 동의하게 된 이유도 죽음이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게 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존재의 상실감에 대한 허무로 발전한다. 종교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유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죽음에 淪?깊이 고민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권해볼만한 책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죽음에게 물어보라. 잘 살기 위해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고민해보자.

  이슬처럼 사라져간 이슬이도 그 밝은 빛의 터널 속에서 평안하길 빌면서……


060523-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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