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발견 -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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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은 누구나 한번쯤 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뜻하기 전에 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며 자기 탐구와 고백의 과정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독서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는 없다. 한낱 지적 허영과 자기 만족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라면 철저하고 내밀한 자신와의 만남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의 변화이며, 또한 삶의 태도를 바꿔 행동하는 양심으로 거듭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 내겐 독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작은 곳으로부터의 혁명과 발전이 전체를 이룰 것이고, 전체가 부분의 합이 될 수 없을지언정 그 부분의 변화가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한겨레신문사의 고명섭 기자가 펴낸 <지식의 발견>이라는 책은 제목이 거부감을 일으켜 일단 손맛이 까칠하다. ‘무엇이 지식이며 그것은 발견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그가 발견한 지식들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이 책은 단순한 서평 모음집이라고 하기엔 울림이 크다.

  그 울림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구성원들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문제들을 점검하고 반성하며 고민하게 하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개별 책들에 대한 서평을 넘어 통시적, 공시적 관점에서 그 의미망들을 구축하고 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실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고 해서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저자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작들을 풀어 내어 다시 묶어내는 방식으로 텍스트 상호간의 공통적 관심사나 차이점들을 드러내어 일관성 있게 현재의 관점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모든 문제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권의 책에서 백과전서식 지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참신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다. 상식과 일반론에서 벗어나 비판적이고 회의적 시각들을 주로 소개하는 것은 타성과 관성에 젖은 개념들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1부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친일에서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민주의’로 이름을 바꿔가며 해석돼 왔던 ‘nationalism’을 화두로 삼아 서중석의 <배반당한 한국민족주의>부터 꼼꼼하게 한국 사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담론들을 정리하고 있다. 김동춘의 논의가 가세하여 진지한 자세로 반성적 관점을 제시한다. 박노자의 ‘고명섭의 민족주의론에 질문한다’는 글을 통해 자신의 글을 되짚어보는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으며, 한국 문단의 권력자로 군림해왔던 조연현에 대한 글과 친일문학에 대한 글은 <인물과 사상> 20호 ‘한국 문학의 위선과 기만’을 떠올리게 하는 글들이었다.

  제 2부 근대성/계몽의 이해와 넘어서기에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재해석한 권용선의 책을 시작으로 파우스트와 니체의 사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한 책들을 소개하면서 근대의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푸른 눈의 탁월한 한국학자 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은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넘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 준다. 이어 김용옥의 <독기학설>과 신영복의 <강의>를 통해 주체적인 근대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서양중심의 근대성이 지닌 보편성에 대한 탐구를 거듭하고 있다.

  마지막 3부 정치 ․ 사회 ․ 지식에서는 하버마스의 스승격인 한나 아렌트를 소개한 김선옥의 <정치와 진리>를 시작으로 김욱의 <마키아벨리즘으로 읽는 한국 헌정사>, 하승우의 <희망의 윤리 똘레랑스>와 적절히 연결시키고 있다. 홍성민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는 시간을 내어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에필로그로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는 강준만이 쓴 강준만론이라는 평가에 덧붙혀 나는 저자인 고명섭의 지향점으로 읽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소개된 책과 관련된 책들은 무수히 많다. 그래도 늘 찾아읽게 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책을 위한 책도 아니며 책을 소개하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고명섭 기자의 서평을 모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각각의 주제에서 보듯이 결코 만만치 않은 담론들을 일관된 흐름과 형식들로 자연스럽게 묶어내고 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판과 문제점이 적절하게 드러나 독자들에게 책의 의미와 평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독서의 방법이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가정하에, 내가 개인적으로 많은 부분 공감하여 좋은 책으로 평가하는 것은 일관성과 비판적 해석이다. 논의의 대상 자체가 주관적 해석이나 감정적 접근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시종일관 객관적이고 침착한 분석으로 각각의 담론들을 일관성있게 비판적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자기와 상관없는 타인의 문제에 개입하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정의한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끝맺고 있다.

  “성찰의 차원에서 보면 지식인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개입해 자기 자신을 들볶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들볶기를 그만둘 때 지식인은 타락하고 지식은 거짓의 권력으로 떨어질 것이다.” - 에필로그

  지식인의 범주와 한계를 규정하지 않아 저자가 말하는 기준을 알 순 없으나 이 말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면서 동시에 이 땅의 모든 지식인들에 전하는 죽비소리로 들린다. 나는 지식인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스스로를 감시와 비판과 견제의 대상으로, 부르디외가 말한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 타락(?)의 위기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은 누구나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200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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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그밖의 것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오늘의책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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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시간을 무익하지 않게 쓸 수 있을 방법이 있을 때는 절대로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구절로 기억되는 부분이다. 물론 그만큼 공감했다는 이야기다. 러셀은 이렇게 명쾌하고 시원스럽게 자신의 생각들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유머와 재치 넘치는 표현과 신랄한 풍자가 읽는 재미를 더하여 에세이가 어떤 형식의 글이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듯싶어 시원스러웠다.

  그것은 러셀 특유의 박학과 관점 때문이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관심과 학문적 깊이에서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며 어렵지 않게 생각을 풀어내고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또한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며 부당한 억압이 없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읽어내는 것이 러셀을 바로 읽는 방법일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20세기 최고 지성으로 손꼽히는 그의 에세이들을 죽기 전에 출판을 준비하던 미발표 에세이들이라고 한다. 이 책은 1931년부터 1935년 사이의 글들을 모았다.

  흔히 비판적 지성이라 명명되는 촘스키와 자주 비교되는 러셀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보수와 안정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통념을 깨고 진보적 성향을 견지했던 흔치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촘스키와 비교되는 또 다른 면은 글쓰기 방식이다. 복문이 주를 이루는 만연체가 ch촘스키의 특징이라면 러셀은 간결체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래서 논리전개가 빠르고 논리 구조가 탄탄해서 꼼꼼히 읽지 않으면 행간에 숨어있는 사색의 깊이와 위트를 놓치기 쉽다.

  그의 글들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시간을 초월한 인간 세상에 대한 통찰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경험의 교훈’에서 “젊은이들은 상상과 논리적 추론에 영향을 받고 노인들은 경험의 안내에 따라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라고 말하거나, ‘비겁의 이점’이란 글에서 “기업이나 학교, 정신병원 따위의 윗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열에 아홉이, 독자적 판단력을 가진 입바른 사람보다는 나긋나긋한 알랑쇠를 선호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변한게 있을까? 계속되는 지적이다.

  오늘날의 당신이 성공을 원한다면 과거에 하던 그대로 하면 된다. 자기 생각대로 과감하게 굴지 말고, 소심하게 살피며 교묘하게 환심을 사는 것 말이다. …… 당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애쓰지 말고 백만장자들의 지원을 받는 단체가 정해놓은 목표를 추구하고자 노력하라. 사적인 우정에서는 될 수 있는 한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가려서 사귀되, 혹시 실패할 경우에는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사귀어라. 이렇게만 하면 당신은 공동체의 최고인물들 전원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게 될 것이다. - ‘비겁의 이점’

  달라지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를 불행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미래에도 같은 이야기가 여전히 통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세상의 보편적 정서에 공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오늘의 세상은 두 가지의 불행으로 고생하고 있다: 자신이 살 수 없는 재화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팔 수 없는 재화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 ‘세상이 미쳐가고 있는가?’

  그가 살던 시대에도 교육은 가장 큰 관심거리였고 대안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그의 입장에서 당연히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교사든 교사가 아니든 우리는 누구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신의 입장에서 교육하는 교육자다. 아이들의 부모는 학교 선생보다 훨씬 중요한 세상의 가장 훌륭한 교사다. 러셀의 이 말은,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와 교사가 기억할만하다.

  아동에게서 남다른 사고력의 징표를 읽어내는 법과, 너무 남다른 것이 교사에게 불러일으키는 짜증을 자제하는 법. 이 두 가지를 배우는 과정이 모든 교사들의 훈련과정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 ‘협력에 관하여’

획일화된 학교 교육과 남의 아이들과 내 아이를 비교해서 평균적(?)이거나 그 이상의 아이로 키우고 싶은 - 오로지 성적면에서만 - 기성 세대에게 울리는 경종으로 들린다. 러셀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상가다.



200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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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읽기 50 - 미래를 위한 자기발전 독서법
안상헌 지음 / 북포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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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의 운명에 관한 이런 얘기가 있다. ‘출판되는 책의 반만 팔리고 팔린 책의 반만 읽히며 읽히는 책의 반만 이해되며 이해된 책의 반만 활용된다.’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다. 누구한 한번쯤 질문한다. 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책 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은 한번쯤 회의하게 된다. 독서의 목적과 방법, 그 효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 실용적인 목적에서부터 자아발견과 시간 때우기까지 폭넓은 대답이 있을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다양한 독서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 효과는 기대 이상으로 자신과 생활을 변화 발전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집단 구성원의 인지·판단·행동의 성향 체계인 아비투스에 따라 개별적 독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 다양한 독서 목적과 방법들, 거두고자 하는 효과를 한 방에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생산적 책읽기 50>의 저자 안상헌은 그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언제나 책을 들고 다녀라’부터 ‘자신만의 독서법’을 써보라까지 50가지의 방법론이 그것이다. 일반적인 방법이므로 새겨두고 독서를 하는데 지침으로 삼는다면 크게 해가 될 것은 없는 방법들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필요한 방법들이 아니며 누구나 지킬 수도 없는 방법들이다.

  책도 결국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내가 읽은 책과 남이 읽은 책을 비교해서 그 책을 읽지 않을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내가 읽은 책을 자랑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혹은 자신의 경쟁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책읽기 전략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며 나름의 독서 전략과 방법을 세워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책읽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이 전하는 방법이 반드시 뚜렷한 목적을 위한 독서의 방법론을 제시한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독서행위 자체와 목적 보다는 과정과 방법론을 중시한 독서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아쉽다.

  물론 목적 없는 행위가 어디 있을까마는 표정훈의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나 <탐서주의자의 책>과는 다른 목적과 방법을 제시한다. 생산적이라는 말은 실용적이라는 말이다. 지식을 생산하고 정보를 선점해야 살아 남을 수 있을 듯한 미래 사회에서 꼭 필요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직업과 성향, 책을 읽는 목적은 일반화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독자는 누구나 제 나름의 독서 목적과 방법을 가지고 있다. <생산적 책읽기 50>은 그런 의미에서 풍성한 식탁의 양념처럼 읽으면 된다. 허다한 책들 속에서 문득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거나 보다 효율적인 독서 방법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책이다.

  ‘아무리 위대한 책이라도 그 반은 독자가 만든다’는 볼테르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읽은 책의 반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 사실 가장 어렵고 실질적인 독서가 된다. 밑줄긋고 옮겨적고 생각하고 음미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야말로 독서의 참맛이 아닐까 싶다. 오세영의 ‘한 줄의 시’에서처럼 ‘행간을 건너뛰는 두개의 콤마’를 찾아내는 것이 바른 독서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작가가 글로서 말하지 못한 그 행간을 읽어내는 방법과 재미가 내겐 늘 관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을 선택하는 기준과 방법이 늘 고민이다. 그것은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겠으나 아직도 쉽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면 저 책을 읽지 못하니 인생이 짧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일 것이다.

  ‘辭盡意不盡’이라는 말이 있다. 말을 다 하였으나 말하고 싶은 뜻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다. 저자가 말한 많이 읽고 많이 기억하는 1단계를 걸쳐 적게 읽고 많이 생각하는 2단계를 지나고 적게 읽고 많이 쓰는 3단계에 이르지도 못했으나 많이 읽고 충분히 생각하며 적게 쓰는 나만의 방법을 찾고 싶은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욕심내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며 빠진 이를 채우듯 이해하지 못한 고전을 다시 읽고 새로운 책에서 영감을 얻는 즐거움을 무엇과 바꿀수 있을까? 흐르는 물처럼 시간은 흐르고 내 생의 의미 찾기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 누가 그렇지 않을까마는 자신이 선택한 행복한 생의 방법을 찾아 오늘도 책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200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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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현암사 동양고전
홍자성 지음, 조지훈 엮음 / 현암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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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맛을 속속들이 알면 비가 되든 구름이 되든 다 맡겨 둘 뿐 눈 뜨고 보는 것조차 귀찮아지고, 인정이 무엇임을 다 알고 나면 소라고 하거나 말이라고 하거나 부르는 대로 맡기고 그저 머리만 끄덕일 뿐이로다.(후80)

  야채의 뿌리를 뜻하는 ‘菜根’. 기름진 고기와 배부른 일상에서 야채의 뿌리를 씹듯 그 향과 그윽한 맛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 이야기가 ‘菜根譚’이다.

  홍자성의 이 책은 다른 고전과 달리 그 뜻이 쉽고 명쾌하며 일상 생활속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적절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대한 충고이자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특정한 사상과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일반적인 인간의 속성에 대한 경고와 금언들이 마음밭의 행복을 찾아준다. 그래서 때로는 울림과 감동이 없는 따분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채근담은 전집 225장과 후집 134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을 시인 조지훈이 자연의 섭리, 도의 마음, 수신과 성찰, 세상 사는 법도로 다시 순서를 재배열하고 역주를 다는 방식으로 엮었다. 각 장 사이에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뒤섞어 다시 배열하고 주제별로 묶어 놓아도 그 뜻에 손색이 없다. 조지훈의 역주 또한 읽을만해서 단순한 주석과 도움말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 

나아가는 곳에서 문득 물러섬을 생각하며 울타리에 걸리는 재앙을 면할 것이요, 손 댈 때 문득 손 놓음을 꾀하면 호랑이를 타는 위험에서 벗어나리라.(후29)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 어찌 이름에서 숨는 것만 하겠으며, 일에 익숙한 것이 어찌 일을 줄여 한가로움을 누림만 하랴.(후31)

  읽다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면도 있어 지루하기도 하다. 시대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인간 삶에 대한 통찰과 수신의 덕목들로 가득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며 생의 목적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데 도움이 될 만하다. 곁에 두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번씩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책이다. 

남의 작은 허물을 꾸짖지 말고 남의 비밀을 드러내지 말며 남의 지난 잘못을 생각지 말라. 이 셋으로써 덕을 기르고 해를 멀리할 수 있다.(전105)

공을 세우고 업을 일으키는 사람은 대개 허심탄회하고 원만하나, 일에 실패하고 기회를 잃는 사람은 반드시 집착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전197)

성질이 조급하고 마음이 거친 사람은 한 가지 일도 이룰 수 없고, 마음이 온화하고 기질이 평안한 사람은 백 가지 복이 절로 모인다.(전209)

남의 나쁜 점을 꾸짖되 너무 엄해서는 안 되니, 그 말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전23)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갖춘 이도 있고 못 갖춘 이도 있거늘 어찌 나 홀로 모두 갖추기를 바라겠는가.(전53)

  밑줄 친 내용들이 모두 생활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당연한(?) 내용들이다. 되짚어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물질적인 행복이 아닌 참다운 마음의 평화와 안전을 찾을 수 있겠다.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겠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설과 반어, 대구와 대조, 적절하고 화려한 비유 때문에 어렵고 공허한 도덕적, 실천적 삶의 원리들이 오히려 쉽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장점이다. 무엇보다도 전체를 읽지 않아도 그 뜻과 의미를 새겨가며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가 될 듯 싶다. 내용을 평가해서 무엇하랴. 그저 나름대로의 의미는 얼마든 새겨지는 것이고 밑줄이 늘어갈 수록 세월이 흐른다는 이야기가 될 테지만.

음침하게 말이 없는 선비를 만나거든 아직 속마음을 보이지 말라. 발끈하여 성을 잘 내는 사람이 잘난 체하거든 모름지기 입을 다물라.(전122)

몸가짐은 지나치게 깨끗하지 말 것이니, 모든 더러움과 욕됨을 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할 것이요, 사람과 사귐에는 너무 분명하지 말 것이니 착한 사람과, 몹쓸 사람 또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를 모두 포용해야 한다.(전188)

냉철한 눈으로 사람을 보고, 냉철한 귀로 말을 들으며, 냉철한 뜻으로 느낌을 감당하고, 냉철한 마음으로 이치를 생각하라.(전206)

  풀뿌리를 씹어가며 살 수 없고 공기청정기를 메고 다니며 호흡할 순 없으나 가끔은 머리를 맑고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영혼의 청량 음료가 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200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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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
조희봉 지음 / 함께읽는책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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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꾸는 꿈이 있고 나름의 방식대로 책을 읽고 사거나 빌리며 보관하거나 선물한다. 책을 읽는 목적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책을 선택하는 방식이고 책을 구하는 방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실용적 목적의 책읽기를 가장 혐오한다. 나름의 이유와 방법이 있겠지만, 또한 목적없는 책읽기가 어디 있을까마는 가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작주자의 꿈>의 저자 조희봉은 그런면에서 가장 순수하게 책에 접근하고 있는 아마추어 정신을 갖고 있어 아름답다. 오히려 책읽기가 밥벌이 수단과 연결되거나 현학적, 과시적 기타 다양한 불순한(?) 독서와 구별되는 저자의 책에 대한 애정과 독특한 방식들이 눈길을 끈다.

우선 ‘전작주의’는 깊이와 정도가 다를 뿐 누구나 한번쯤 시도해 보는 방법이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면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는 것이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방식은 아니다. 다만 저자처럼 이윤기나 안정효 등 몇 백권에 달하는 번역서와 저작들을 가진 작가일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절판되거나 구하기 헌책방에도 없는 책들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작가에 천착하는 일은 책읽기의 깊이와 넓이를 확충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의 취미이고 열정으로 개인적 만족감에 머무른다. 하나의 방법론으로 나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집착과 소유욕이 되어 책읽기와는 다른 수집에 대한 욕망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몇몇 작가들의 경우 장르와 내용, 종류와 상관없이 구입하는 작가들이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정호승의 경우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었다. 시에 주력하던 정호승은 1993년 그의 시집과 동명 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1~3>을 내놓는다. 주저없이 초판을 사 읽었다가 작가에 대한 실망감으로 낭패를 보았다. 범작이었으나 개인적으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작주의는 위험하고 소모적인 책읽기가 될 수도 있다.

<전작주의자의 꿈>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물론 저자의 결혼 주례 스토리다. 이윤기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1호 제자’로 인정받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부러운 모습이다. 책과 무관한 일을 하며 그만큼 책에 대해 열정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사진으로 자랑하는 그의 책꽂이가 부럽다. 예전부터 상상만으로 꾸몄던 방식을 실행에 옮긴 모습이 장관이다. 널빤지와 벽돌만으로 낭비되는 공간없이 8단으로 쌓아올린 그의 책꽂이는 저자의 책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명 사진이다. 가구점에서 구입한 90cm 책장 5개가 넘쳐 정기구독하던 <현대문학> 7년치는 책장 위로 올라가 벽돌처럼 쌓여 있다. 누구나 넓고 깨끗한 책장과 여유 있는 공간을 원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저자와 같은 방식은 하나의 모범 사례처럼 보인다. 곧 시도해야겠다.

“나는 시간을 무익하지 않게 쓸 수 있을 방법이 있을 때는 절대로 책을 읽지 않습니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은 내게 금과옥조로 여겨진다. 더 즐겁고 행복한 일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먼저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이 책을 읽어 온 역사는 정말 짧다. 달리 생각하면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무식하거나 인생이 불행하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다만 자기만의 독서법과 책에 대한 사랑법을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삶에서 책이 주는 역할과 의미를 되새기고 책을 선택하고 읽고 활용하는 방법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반면교사가 된 책이다.

어떤 식으로든 삶은 살아지고 우리는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여전히 두렵기만 한 백지같은 인생을 채워나갈 무엇인가를 바보처럼 아직도 책에서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먼 후일 내 삶의 자세를 뒤돌아 볼 뿐일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책읽기 과정과 방법론을 점검하고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나름의 방식들을 점검하는 데 요긴한 책이다. <생산적 책읽기 50>처럼 건방지게 책읽기를 가르치거나 항목별로 실용적 책읽기를 강의하는 식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저자가 들려주는 수줍은 책에 대한 짝사랑 이야기로 들린다. 사진으로 보이는 넉넉함만큼 여유를 잃지 않는 열정이 되길 소망해 본다. 그래도 나는 책으로 손이 간다. 손을 잡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는 방법 밖에 또 어쩔 것인가.


200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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