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딜레마 여행 -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 사고 실험 100
줄리언 바지니 지음, 정지인 옮김 / 한겨레출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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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의 제목은 독자들에게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Essays in love>라는 원제나 <on love>라는 미국판 제목의 책을 보고 우리나라 독자들은 얼마나 그 책을 찾았을까? 우리나라에서 1995년에 <로맨스>라는 시덥잖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가 말아먹고 2002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중역된 같은 책은 제목 때문인지 몰라도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이다. 이 책은 제목이 눈길을 끄는 제목이 아니었다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보통’ 붐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쾌한 딜레마 여행>의 원제는 <The pig that wants to be eaten>이다. 일생일대의 목표가 인간에게 잡아먹히기를 원하는 돼지가 있다면 우리는 육식을 하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에 대한 질문이다. 아무튼 제목 때문인지 이 책은 제법 팔리는 모양이다. 딜레마는 진퇴양난이라는 한자성어와 가장 잘 어울린다. 논리학의 용어로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 봐도 다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다. 책의 성격과 내용을 적절하게 드러내는 용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무려 100가지 딜레마를 제시한다. 고대 철학자들이 제시했던 갖가지 역설에서부터 현대적인 의미의 안락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황들을 제시한다. 유사한 말들이지만 모순과 역설, 딜레마와 관련된 수많은 사례 모음집과 같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부터 영화 메트릭스에 이르기까지 흥미 있는 주제들을 실제 사례와 상황을 만들어 간략하게 제시하고 그와 관련된 책이나 이론들을 표시해 놓았다. 그 다음 저자의 간략한 설명과 내용에 대한 검토와 분석이 뒤따른다. 길어야 2~3페이지 분량으로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쉬움보다는 집중력을 요구한다. 길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쉽고 단순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짧고 긴 여운을 남긴다. 철학자의 대중화 노력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철학 입문서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수히 많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익숙한 상황과 뻔한 일들은 절대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인 생각에 뇌를 맡긴다. 돌아보거나 의심하지 않고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으로 규정지어 버린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금방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개인의 이익이나 매너리즘에 젖은 생활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 귀차니즘과 이기주의 완벽한 결합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돼지와 유사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진다.

  ‘이성이 빠진 상상력은 공상에 지나지 않고 상상력 없는 이성은 빈약하다’는 저자의 머리말은 이 책의 특성을 요약하고 있다. 상상력에 의한 상황 설정이나 가상 시나리오가 모두 이성에 의해 판단하고 분석해 보아야 할 문제로 가득하다.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 실제 현실 상황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질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책에서 예로 들고 있는 장면들은 그렇게 지금 우리들 현재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간단한 문제가 남는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거나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러나 그 순간 모두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생각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환한 미소를 짓거나 승리의 기쁨 따위를 누릴 수 없는 딜레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고 다시 한 번 눈여겨보는 태도를 갖으라는 무언의 충고. 기계적인 선악의 판단 기준과 사회적 통념이 만들어 낸 기준들이 우리들의 감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속에서 오로지 단 하나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사람이 나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단지 우리의 현재 믿음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 P. 24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할 것이다’라는 말은 흔히 나쁜 행동에 대한 빈약한 합리화라고 여겨진다. - P. 35

  저자의 충고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말들에 밑줄 긋다가 포기했다. 책 전체가 던지는 모든 질문들은 지금까지 언급했던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놓칠 수 없는 역작이니 이 책을 꼭 읽으라는 조언이 아니라 어떤 책이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특별한 책이 된다. 너무 많은 사고 훈련은 오히려 뇌를 지치게 한다. 100번 쯤 얻어터지고 나면 나중에는 코피가 난다. 지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07051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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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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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초의 문민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전공이 철학이었다. 세상이 달라졌나?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는 철인 정치였지만 진정한 철인이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철학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이상 국가가 실현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노태우와 김종필, 셋이서 한 화면에 잡힌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철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철학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국가라는 제도와 형태 자체가 가진 모순을 완전하게 가릴만한 차양은 아직 개발되지 못했다. 아나키즘에 대한 열망과 관심은 현실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다기 보다 국가를 비롯한 모든 권력과 제도에 대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몸짓이다.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한 개인의 생각을 적어 놓은 ‘마음의 철학’으로 보기에는 그 위치가 주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 단순한 개인의 철학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했던 황제의 생각은 단순한 철학자의 그것과는 확연한 변별점을 지니게 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군주’가 지녀야할 덕목과 치세의 도를 말하는 처세술과 관련된 책이라면, <명상록>은 황제의 자리를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던 인간과 세상에 대한 경험적 추론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의 2장 3절에 ‘네가 불평하면서 죽지 않고 즐겁고 참되고 신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으려면 책에 대한 갈증을 버려라!’는 구절이 나온다. 전체적인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책에 대한 갈증으로 항상 목말라 하는 내가 개인적으로 곰곰이 뜯어본 구절이다. 아는 것이 힘이거나 모르는 것이 약이거나 상황과 기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진정한 행복을 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 방법과 태도도 나름대로 다 달라진다.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필요한 것에 대한 ‘마음’과 그 마음을 다스리는 황제 아우렐리우스의 조언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시대를 초월해서 죽음과 인간의 생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 인간이다.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의 보편성에 기대어 개별적 상황과 개인의 특수성과 무관한 본성에 대한 인식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은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다. 로마 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각을 빌어 현재의 나를 돌아보겠다는 생각이 어처구니 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주의 본성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이와 넓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현재적 유용성을 전해주고 있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로 로마의 황금시기가 저물 무렵에 황제에 오른 아우렐리우스는 이 책을 통해 인간과 우주 그리고 생의 본질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짧은 생에 대한 감각이다. 이 책에는 인간의 생 순간에 불과하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된다. 그 깨달음은 철학자나 황제로서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단순한 진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짧은 생에 대한 인식과 그 찰나와 같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면 지나치게 건방져 보인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의 목소리는 높지 않고 차분하며 분명하고 명확하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놀라다니 이 얼마나 가소롭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인가!

  물론 이렇게 냉소적인 목소리로 놀라게 하기도 하는 12절 13장을 보면 냉철한 분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현재에도 살아 있는 친구의 충고처럼 살아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고전을 읽는 목적이 인류의 역사를 더듬거나 발자취의 향내를 맡으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선인들의 지혜를 빌려 오늘을 살펴보려는 무모함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키에르케고르의 목소리가 뼈에 사무치는 순간과 마주치기도 하는 법이다.

  로마의 황혼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전장에서 일기를 적듯 쓰여졌다는 이 책은 시대를 초월한 처세술로도 혹은 특별한 무엇인가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인생에 대해 냉소하는 철학자의 고백담으로도 읽혀질 수 있다. 두고 두고 가슴에 새겨지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책이 오래 남는다면 이 책은 그런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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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30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읽으셨군요. 저는 구판으로 읽었는지라^^
참 배울 것이 많았던 책이었습니다. 그의 심오한 철학의 깊이 빠질 수 있었던 책이라고 할까요.

sceptic 2007-05-0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판, 신판이 상관있나요...암튼 이중, 삼중역보다는 천병희의 번역은 꼼꼼하고 주석을 통해 스스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번역하지 못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 - 새로운 아름다움이 세상을 지배한다 살림 H classic 3
심혜련 지음 / 살림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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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적으로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해 논하는 전통 미학과는 달리, 매체 미학은 예술 작품, 또는 예술적 미적 감응을 주는 대상이 어떻게 지각되고 수용되는가를 다룬다. - P. 29

  발터 벤야민이나 아도르노의 이론에 정통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들의 논문을 잘 씹어 줄 수 있는 책들이 필요했다. 미학의 전통적 이론에서 파생된 매체 미학은 과학 기술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영화나 사진이라는 장르가 예술로 인정받기까지 지난했던 세월에 대해서도 고찰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만 우리는 우선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에 매체 미학이라는 것이 어떤 역할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영화나 사진의 무한 복제 시대에 돌입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술이 어떤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가였다. 벤야민이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나 사진을 옹호할 수 있었던 근거는 분명하게 읽히지 않는다. 다만 시대의 흐름과 문화적 충격 속에서 예술에 대한 개념과 구분 자체가 모호해졌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인터넷이라는 정보 혁명으로 이제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또 하나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이원화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영화 메트릭스가 경고한 세계가 바야흐로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장자의 나비가 현실인지 꿈인지 알수 없는 원본 없는 이미지와 모방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할 때가 있다. 심혜련의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은 매체 미학을 중심으로 이러한 궁금증들에 대한 사유의 단초를 제공한다.

  필름 영화와 사진 시대를 넘어 이제는 디지털 이미지를 수용하는 관객들의 자세도 달라져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 중 최근에 <300>이라는 영화가 주목을 끌었다. 보지는 않았지만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승리라는 평가와 촬영과정이 소개된 것을 보았다. 이제는 영화 속 장면조차도 이차적인 현실이 되어버렸다. 아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과 장면들을 관객들에게 이미지로만 전달되는 시대가 되었다. 영화가 어차피 현실과 거리가 먼 하나의 환상을 제공하는 것도 하나의 기능이라고 하지만 이쯤 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의심하는 수준에 이른다.

“벤야민은 영화관에서 영화라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접하는 관객들은 분산적 지각과 시각적 촉각성에 의해 영화를 즐기면서 또 비판할 수 있다고 믿었다.(67페이지)”는 말은 영화라는 예술의 무한 가능성을 예고한 듯하다. 일상의 공간과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일종의 프리즘 역할을 하는 것이 영화라면 인간의식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영역을 재발견하기 위한 예술적 장치가 영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시간과 공간이 사이버스페이스로 옮겨 간다. 움직이는 포착해야 하는 긴장감 속에서 감상하는 예술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꿔야하는 것일까?

현재 디지털 매체 예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수용자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는 상호 작용적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사이버스페이스, 즉 온라인에서의 작품 전시다. - P. 143

  이 책에서는 주로 디지털 매체 예술에서 전통적 회화나 상호작용적 예술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개념이나 매체 미학에 수용될 수 있는 익숙한 개념들을 잘 녹여서 설명하고 있지만 새로운 개념이나 독특한 관점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마지막 장에서 영화 <올드 보이>를 분석하고 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실제 영화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에 읽을 만하다.

TV는 시계이자 달력이고 교회이며 친구이자 애인이다.(올드보이) - P. 164

  영화 <올드 보이>가 선태된 이유는 TV라는 매체 때문이다. 오대수는 오로지 TV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한다. 이우진의 연인이 강물로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찍힌 선명한 사진들은 앨범이 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사이의 관계를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개념을 적용시켜 적절하게 풀어내는 방식도 재미있다. TV와 사진이라는 매체를 바라보는 방법이나 분석적 태도는 <올드 보이>를 보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것들이다.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의 개념과 방법론을 알아야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상은 아는 만큼만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이해하고 이해한 만큼 공감한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다. <눈부신 날에>에서 보여주었던 새로운 가족의 개념과 삶의 이유들은 사이버스페이스가 아니라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다. 박광수의 의도가 어떠하든 우리에게 눈부신 날은……



070427-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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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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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과 서양의 구분과 영역은 명확하지 않다. 굳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빌려오지 않더라도 동양은 서구 중심의 용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유럽에서 볼 때 우리는 동쪽에 위치한 중동을 포함해서 일본까지 모두 동양이 된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유럽과 미국은 물론 서양이 된다. 방향은 기준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인 용어로 굳어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어는 많은 것을 규정한다.

  미국인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는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정작 동양의 모태가 되었던 중동, 즉 이슬람 문화권은 빠져있다. 어쨌든 곁가지를 모두 잘라내고 나면 이 책에서 말하는 동양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이 양념으로 들어간다. 서양은 유럽을 포함한 미국을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통상적인 방법으로 구분한 동양과 서양을 들여다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첫 번째 느낌이다.

  그러나 기준과 전제가 불문명하고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심리학자들의 실제 실험들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설득력이 있는지 따져볼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우가 수가 존재하고 실험의 목적과 과정 자체가 완벽하게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의 인식 상태와 사고 구조에서 객관이라는 용어 자체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주관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객관성을 위한 노력들과 서로 상반된 두 개의 관점을 인정할 만하는 것이다. 2004년 4월에 나온 책을 2007년 1월에 22쇄를 찍었으니 엄청나게 팔렸다.

  많이 팔리기 위해서는 적당한 분량과 흥미 있는 내용, 간결하고 쉬운 문장 등의 요소를 갖춰야 한다. <생각의 지도>는 이런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는 중심에 ‘사람’을 놓았다. 사람들의 생각과 심리적 차이는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텍스트가 된다. 더구나 저자인 니스벳 교수에게 지도받은 역자 최인철은 사회심리학자로서 전문가답게 적절하고 쉬운 설명으로 번역한 책이 지니는 어색한 문장이나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들을 잘 다듬어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동양(사람)은 도를 중시하고 더불어 사는 삶과 전체를 보는 시야, 상황론, 동사와 경험을 중심으로 한다. 이에 반해 서양은 삼단 논법을 중시하고 홀로 사는 삶, 부분을 보는 시각, 본성론, 명사와 논리를 중심에 놓고 있다. 이 책은 8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이것들을 각각 비교하고 실제 실험을 통한 결과들을 제시함으로써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마지막에 동양과 서양에서 벌어지는 사고 방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그리고 누가 옳은 것인지에 대해 필자의 견해가 덧붙혀져 있다.

  컵은 옆에서 보면 사각형 위에서 보면 원형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을 놓고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나 프랑스 영화 <라 빠르망> 등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법 중의 하나인 서로 다른 관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과 위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의 지도는 정확하게 칼로 잘라 낼 수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선입견의 벽은 무섭다. 그러나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접근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소한 것이 큰 차이를 만든다. 항상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화법의 주인공들에게도 유효한 책이다. 동서양의 차이나 문화의 다양성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에 대한 교훈까지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가볍게 그러나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권해줄만한 <생각의 지도>는 당연하게 여기는 통념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기도 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차별과 평등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늘 우리들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와 장애인과 노숙인과 동성애와 여성과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북한과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070417-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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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4-1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멋지게 쓰신 리뷰를 보니 반갑습니다.
22쇄의 힘에는 분명 대학교재의 공이 크겠지만 22쇄 찍힐 만큼 많은 사람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짱꿀라 2007-04-1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얾음장수님처럼 저도 잘 읽고 갑니다. 저 또한 읽은 책인데 많은 도움을 받았답니다.

sceptic 2007-04-2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음장수님이나 santaclausly처럼 제게도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루카치 소설의 이론
게오르그 루카치 지음 / 심설당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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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소설이 전하는 위력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지 알 수도 없다. 문학에서 소설이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은 논란이 있겠지만 문학을 단순히 소설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소설이 현실 세계에서 갖는 영향력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클수도 있지만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그만큼 많다.

  소설 무용론을 주장했던 과거의 조선 시대 선비들도 있었지만 서사 구조가 탄탄한 소설의 매력은 여전하며 영화나 드라마 등 다른 장르의 내용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소설이다. 인간이 현실에서 충족시키지 못하는 쾌락 욕구에 대한 대리 만족으로서 소설을 읽는다는 견해를 밝힌 비평가도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소설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력과 꿈을 심어주기도 하고, 비참한 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환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소설을 통해 울고 웃었던 많은 순간들을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1920년에 발간된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소설의 역할과 의미를 짚어낸 고전이다. 문학이론을 다룬 책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형식이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그 역할과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책이다.

  하지만 용어 자체가 낯설고 문장의 구성과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우저의 명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근세편을 번역했던 반성완의 85년도 번역본으로 역자의 전문성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역자 스스로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음을 군데군데서 확인할 수 있다. 독일어 원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문학 전공자들이나 철학 전공자들도 반쯤 읽다가 던져버린다는 책의 소개가 무색하다.

  문학을 전공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철학적 관점에서 소설을 바라보는 일은 또 얼마나 의미있는 일이며 새로운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지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루카치가 이야기했던 소설 특유의 구체성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우매한 독자로서 시대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확인했다.

삶이란 것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다 그러하듯 스스로를 넘어서 있는 일체의 초월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상대적인 독자성과 그러한 초월적 구속이 가질 수밖에 없는 상대적인 불가피성과 필요불가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 P. 50

  하지만 이렇게 소설과 무관하게 삶에 대해 선언하는 부분들이나 그 삶을 소설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작가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만한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예술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지만 역사와 철학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소설은 여전히 제멋대로 혹은 이 모든 것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버텨내고 있다.

서구의 문화 세계는 그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의 불가피성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논쟁적 태도 이외의 방법으로 이들 구조에 마주 서서 대항할 능력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 P. 166

  서구 사회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논쟁적 태도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문화적 토대와 학문의 성향이 달라서일까?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진다는 ‘학계의 금기’를 넘어서는 일도 중요해 보이지만 그들과 다른 우리 소설의 구조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 외연과 내용을 확장시킬만한 동력들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여건과 역량을 갖춘 많은 작가들을 기대하는 것은 단순히 독자로서의 욕심만은 아닐 것이다.

  루카치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예술과 삶의 관계는 쉽게 말해질 수 없다. 애증의 관계로 이별할 수 없다면 항상 사이 좋은 연인관계일 수는 없지만 그들의 관계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소설을 바라보는 일은 항상 즐거운 일탈일 것이다. 현실에서 벗어나 소설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그 모든 이론들을 잊어버리고 술에 취하듯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닐까?
 
예술은 삶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dem)의 태도를 취한다. - P.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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