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가문의 쓴소리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이 시대에 되살려야 할 선비의 작은 예절
조성기 지음 / 김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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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무엇을 경계하며 살아갈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삼가는 걸까? 예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의 다른 이름이다.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며 나를 절제하는 일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조건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이기적이고 무례한 사람들은 점점 많아진다. 범위를 조금 넓혀 가족 이기주의가 예절과 삶의 토대를 형성하는 기본 틀로 작용한 것이 근대 이후라고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것이 절대 가치가 되어 버렸다.

  예절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법이다. 그 형식과 내용을 구별할 수는 없고 형식이 내용을 구속하기도 하지만 습관이 되고 그것이 행동을 변하시키고 인생을 살아가는 기준이 되려면 온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특히 작은 예절을 지키지 않으면 타인은 물론이고 나를 온전하게 세울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라는 것을 선조들은 책 속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삶을 통해 체득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성의 거울로 삼는다.

  영, 정조 대문장가인 박지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이 이덕무이다. <사소절士小節>은 작은 예절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훌륭한 저서이다. 선비의 작은 예절이라는 뜻의 제목을 달고 있지만 선비의 가정에서 지켜야할 예절 모음집이다. 이 책을 소설가 조성기가 <양반 가문의 쓴소리>라는 제목으로 해설을 달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조성기의 <사소절> 해설집이다. 그래서 몇 가지 장점과 몇 가지 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성품과 행실에 관한 교훈인 성행性行, 언어생활에 관한 교훈인 언어言語, 의복과 음식에 관한 충고인 복식服食, 행동거지에 관한 충고인 동지動止, 기타 삼가야 할 것들인 근신勤愼 편으로 나뉘어져 있고 하나하나 항목화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양반의 법도와 권한을 듣고 “나, 양반 안해!”라고 외쳤던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보자. 만약 그 사람이 이덕무의 <사소절>을 보았다면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까무라쳤을 지도 모르겠다. 선비로 살아가는 일은 겉으로 드러난 형식과 격식의 틀에 매여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얼마나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통제하며 삼가고 또 삼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덕무의 생애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가벼운 책이다. 스스로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그것을 권면하는 책이니 이덕무의 입장에서 보면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실용서’를 쓴 셈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읽다보면 오히려 웃음이 나고 재미있는 부분들도 많다. 특히 복식과 행동에 관한 충고들은 당시의 풍속과 일상을 상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성품과 행실, 언어생활에 관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방법과 태도가 조금씩 변했겠지만 그 근본정신과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머리의 좋고 나쁨에 구애되지 말라, 뜻을 다하여 목표를 정하라, 정성을 기울여 날마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올바른 정신을 소유하도록 하라’는 것은 공부하는 기본자세에 대한 충고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자세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월급을 물으며 축하하지 말라는 충고나 음식이 차려지면 지체하지 말고 먹으라는 충고,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놀리지 말라는 충고,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지 말라는 충고 등은 현대인들도 뼈에 새겨 들을만한 충고이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서출이라는 신분의 제약과 무관하게 책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아 스스로 ‘간서치’ 불렀던 이덕무. 방안에 들어온 햇빛을 좇아 책상을 들고 옮겨 다니며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는 고리타분한 서생 이덕무. 그가 말한 선비는 돈과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벼슬아치를 말한 게 아니었다.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예절들과 ‘선비’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행동거지에 대한 사소한 충고들이다.

  어찌보면 지루하고 쪼잔한 잔소리쟁이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선비정신’이라는 게 있다면 정신세계에 면면히 흐르는 거대 담론으로서의 사상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생활인으로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덕무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는 갔지만 그나 남겨 놓은 정갈하고 깨끗한 정신은 살아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유와 제멋대로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행동들을 돌아 보았다. 조선시대 냄새나는 생활규범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가 보여주는 우리의 정갈한 생활 풍속을 오늘에 되살려 보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느닷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서 유사한 내용들을 끌어다 붙이고 인용하는 저자의 종교적 색채만 아니라면 깔끔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오래 곁에 두고 생각날 때 마다 조용히 읽어 볼 만하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소한 법도가 시대가 흐른다고 해서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생긴 대로 살고 싶다.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난 나다. 편한 게 최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 책을 피해 가야 한다. 숨통을 조이는 올가미로 여겨질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 번쯤 그 시절을 상상하며 이 시대와 비교하며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예절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책으로 가볍게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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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 연인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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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곁에 두고 오래 사귄 벗을 친구라고 한다. 동무는 무엇이라고 규정될까? 단순히 정서적 동반자를 동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동무는 스승이자 친구이고 연인이다. 말과 살의 관계처럼 동무와 연인은 쉽게 단정 지어 그 관계를 말할 수는 없다. 그저 함께 걸어가야 할 동행이며 사상적 동지이자 거처이다. 연인과 동무는 멀리서 그리워하다가 하나로 겹쳐져 같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교수였다가 스피노자의 삶을 선택한 철학자 김영민의 <동무와 연인>은 신문 칼럼 모음이지만 최근에 읽은 가장 인상 깊은 책이다. 깊이와 넓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 매력적이다. 지극한 상찬이 이어져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 책은 스물 한 명의 서른아홉 명을 소개한다. 한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를 묶어 그들의 관계가 동무이며 연인이고 친구이자 스승이었음을 증거한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로 포문을 여는 저자의 이야기는 문장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점착인 문장은 다음 문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하나의 단락은 완벽한 의미의 덩어리로 살아 움직인다. 글쓰기 교재로도 손색없을 만큼 잘 다듬어져 있으며 탄탄하고 긴장감 넘치는 필력을 보여준다. 이덕무와 박제가 하이데거와 아렌트, 프로이트 융, 윤심덕과 김우진, 매창과 유희경 등 동서양은 물론 고전과 현대를 넘나들며 팀을 이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들의 말과 살과 삶을 통해 세상을 보여준다.

  쇼펜하우어와 그의 어머니 요한나의 관계나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애인들의 관계,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의 관계처럼 특이한 경우에 더 눈이 가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다. 생의 비극과 열정, 부조리에 대한 보편성에 대한 성찰 때문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그리고 누군가 반복하고 있을지 모르는 이 관계들은 이 책을 통해 배우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사물화하고 객관하며 하나의 유형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인간관계의 유형화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비슷한 경우의 수를 더듬어 볼 뿐이다. 이 책은 그것을 제공해 주고 있는 걸까?

  역사에서 눈에 띠는 특별한 관계들을 고찰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색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성과 감성은 말과 살로 분해되고 나와 세상은 관계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남는 걸까? 보부아르에게 죽음이란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르트르가 죽음 앞에서 그녀가 가장 슬퍼한 것은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고 하는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연인의 살이 이윽고 고기[肉]로 느껴질 때에도, 그 고기를 다시 살로 되돌리는 법은 오직 말 밖에 없다.’는 저자의 말은 동무와 연인을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종교와 연애, 가족과 사랑에 대한 지극히 보편적인 관계들이 주는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갖는 것은 철학자들만의 특권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사람과 관계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은 순전히 저자의 힘이다.

연애의 열정은 어느 무지(無知)에 근거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무지는 어느 특권적 지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 P. 46

바타이유나 베블런 등이 종교의 본질을 낭비와 사치로 규정한 바 있지만, 종교와 더불어 인류의 양대 환상인 사랑이야말로 낭비를 위한 낭비의 방식에 다름아니다. - P. 109

동무의 길은 인정과 배려를 통해 사랑의 열정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서 트인다. - P. 114

  짤막한 경구처럼 쏟아지는 문장들은 폐부 깊숙이 들어와 박힌다. 사랑과 연애에 관한 통찰은 열정적이지도 그렇다고 냉소적이지도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들을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 혹은 그 안에서 얼마나 맹목적인 행복과 좌절을 맛보았던가. 아찔한 순간들은 봄눈처럼 사라지고 생의 뒤안길에서는 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자책과 후회 혹은 아쉬움과 미련에 잠 못 들어 하는 법이다.

  세기의 연인도, 더없이 부러운 사제지간도, 그 둘이 합쳐진 사람들도 이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우리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 뿐이다. 신기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으로 끝날 수 있는 내용은 결코 아니다.

  어떤 책이든 반은 독자가 만들어간다고 하지만 이 책은 너무 먼,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엮어 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삶에 대한 반성이자 성찰이고 확인이자 전망이다. 지금 내 곁에는 누가 있지?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살을 만져 본 적은 있는지 혹은 그것들을 소중하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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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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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3년간, 올해 3개월을 포함해서 3년 3개월간 480여 권의 책을 읽었다. 3분의 1쯤이 문학 서적이고 나머지는 인문, 사회, 철학, 역사,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다. 고전은 물론 최근에 발간된 책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훑어보고 신중하게 선택하고 진지하게 읽어왔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열정은 순전히 ‘무목적성’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걷는 길은 행복하기만 하다. 책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거나 생계와 직결된 일이었다면 나는 절대로 책을 즐길 수가 없을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나무 아래, 따스한 햇볕이 드는 호수가의 그늘진 벤치, 창 밖에 눈 내리는 겨울밤의 따스한 거실, 차창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버스 창가,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기차의 구석 자리. 책을 읽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겠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습관은 고치고 싶지 않다. 주변에 흔한 다독가에 비하면 많은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목적과 방법이 다르겠지만 1년에 300권이 넘는 책을 본다는 사람도 보았기 때문이다.

  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질은 양을 담보로 하지만 양이 곧 질이 될 수는 없다. 책에 관한한 스스로 프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마음 가짐을 다시 가다듬는 계기가 되는 책이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단순한 활자 해독 수준에서 시작하는 독서는 그 질적 수준이 천차만별일 것이고 한 권의 책에서 건져내거나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적 변화의 과정은 독자들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기억에 남는 대목이 다르고 이해의 수준과 폭도 다르다. 독자의 반응과 이해의 수준이 그 책이 최종 소비자인 독자에게 의미하는 것은 작가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방법에 따라 같은 책이 독자마다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면서 쉽게 간과했던 ‘책을 읽는 방법’은 자기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가? 왜 책을 읽는가?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질문에서 출발한다면 이 책은 독자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 갈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를 처음 만난 건 <일식>을 통해서였다. 도쿄대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8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등장한 괴물 같은 소설가로 기억한다. 무라카미 류와 비교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내가 ‘괴물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쓴 이유는 소설 <일식>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중세 유럽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 권의 소설을 더 읽었지만 처음과 같지 않았고 <장송>은 아직 읽지 못했다.

  말하자면 ‘읽을 읽는 방법’에 대한 그 주관성과 허다한 방법론 속에서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이름 때문에 읽은 책이다. 이 책은 몇 마디 충고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서 전해지는 실천과 경험의 충고가 뼈에 사무친다. 매끈한 말솜씨와 화려한 수식으로 현혹시키는 종류의 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천적 방법론으로 가득하다. 특별한 노하우나 비법을 전수하는 책은 아니지만 저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실화를 통해 실전에 필요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천천히 읽어라!’로 요약된다. 속독법에 관한 책이나 속독법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겠지만 ‘슬로 리딩’이라 명명된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양의 독서에서 질적인 독서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다 보면 매력적인 ‘오독’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독(遲讀)’이 곧 ‘지독(知讀)’이라는 말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을 요약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푸코의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등을 예로 들어 슬로 리딩을 어떻게 실천하는 지 직접 보여주는 대목은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공감을 주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이 읽는가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왜, 어떻게 읽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용적 목적에 따라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책을 조사하거나 자료를 수집하는 사람들, 단기간에 레포트나 논문을 써야 하는 사람들을 예외로 하더라도 책이 하나가 도구가 되거나 단순히 정보 수집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이 책은 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나에게 책이란 무엇인가? 가끔 떠올려 보는 생각이지만 이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자기 점검의 시간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목적과 방법이 다르겠지만 서로 곁눈질하고 배워가며 자신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오늘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흐린 하늘을 쳐다보며 휴일의 아쉬움을 달랬던 나는 화창한 봄날이 와도 책을 찔러 넣고 떠날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즐거움으로 가득하리라. 그래서, 행복한 여행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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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지도 - 세계지성사를 풍요롭고 활기차게 한 핵심 키워드 88
기다 켄 지음, 김신재.심정명.윤여일 옮김 / 산처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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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 문장이다. 완결된 고대 그리스 문화의 구조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는 루카치의 이 문장은 너무도 유명하다. 20세기를 전망하고 있는 듯한 이 문장은 어둠과 암흑의 시대를 예견이라도 하는 듯하다.

  겨우 7년이 흐른 시점에서 20세기를 정리한다거나 마무리하는 것은 무리한 욕심인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무언가 끝맺고 싶은 욕심과 정리하려는 본능을 가진 것 같다.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어야 객관적인 시점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20세기를 정리하려는 노력은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혹은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장석준은 <혁명을 꿈꾼 시대>라는 책을 통해서 20세기는 인류의 역사상 끊임없는 혁명을 꿈꾸었던 시대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결정적 시기를 나눈 또 하나의 기준이 될 것이다.

  기다 겐은 <현대 사상 지도>를 통해 20세기의 세계 지성사를 풍요롭게 했던 핵심 키워드를 정리하고 있다. 88개의 개념을 통해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주요 개념들을 정리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이 작업을 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여러 명의 일본 학자들에 의해 정리된 이 책은 일종의 현대 사상에 관한 개념어 사전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선 사상의 흐름과 키워드를 제시하며 거시적 관점에서 20세기를 파악한다. 응용윤리학에서 출발해서 해석학, 현상학, 구조주의와 실존주의, 분석철학, 포스트모던 등 지난 세기를 풍미했던 개념들을 소개하고 가능세계, 젠더, 상징, 타자성, 탈구축, 노마돌로지, 차이와 차연 등 현대 철학의 용어와 개념을 설명한다. 그리고 언어, 심리,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인류, 종교, 과학, 비평에 관한 용어들을 분야별로 잘 정리하고 있다.

  어떤 책이든 장단점을 가지고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감탄과 아쉬움이 교차된다. 우선 장점을 보자. 한 권의 책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개념들과 한 시대의 사상의 흐름을 깔끔하게 일별할 수 있다. 특히 개념 중간 중간 학자들과 학파들 그리고 사상의 흐름들을 표로 정리하고 있다. 영향 관계를 화살표로 정리해 놓고 있어 시각화의 장점을 백분 활용하고 있다. 또한 중요한 용어와 핵심 개념들을 서로 연계 시키고 있고 마지막 부분에 그 개념과 관련된 용어와 키워드를 찾아 가도록 안내하고 있다. 즉 순서대로 읽는 책이 아니라 화살표를 따라 지도를 찾아 가듯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현대 사상 지도>라고 지었을 것 같다. 또 하나의 장점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수고가 돋보인다. 공저가 갖게 되는 문제점, 즉 일관성과 통일성의 결여는 이 책에서 의미가 없다. 어차피 개별 개념들에 대한 정확하고 명쾌한 설명이 필요한 책이니까. 그리고 공동 번역의 효과는 모르겠지만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연구원 세 명의 노력이 좋은 책을 소개하고 있는 것 같아 흥미 있게 읽었다. 내용 자체가 무슨 재미가 있을까마는 머릿속에서 쉽게 정리되지 않는 현대 사상의 흐름과 용어들이 그나마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용어별로 마지막 부분에 우리말로 번역된 관련 서적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책꽂이에 꽂아 놓고 사전처럼 쉽게 찾아보고 관련 서적을 찾아본다면 훌륭한 현대 사상의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떤 책이든 그렇겠지만 이 책의 활용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읽고 사용할 것인가는 개별 독자가 선택할 일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당연하게도 지나치게 짧고 굵은 설명이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짧게는 한 페이지가 안 되는 것도 있다. 서너 페이지에 걸쳐 특징과 흐름을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각 분야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관심도 없었고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은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일 것이다.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맞는 책을 구입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독서라는 것이 처음부터 예정된 길만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연히 이 책을 만난 독자라면 오히려 혼란스럽고 어려운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다.

  비슷한 얘기지만 하나의 개념이나 용어를 설명하는 데 있어 분명하고 핵심적인 접근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모호한 표현이나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 변죽만 울리고 마는 것도 있다. 일일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쉽고 간단한 것을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몇 가지 아쉬움이 남지만 곁에 두고 참고할 만한 부분이 많은 책이다.

  20세기는 루카치의 말대로 별빛이 길을 안내해 주지도 않았고, 지도가 없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21세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야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인류가 걸어온 사상과 문명 발달의 길이 더욱 험난하게만 느껴진다. 양보와 배려를 위한 이타적 유전자보다는 자본으로부터 소외되고 물질적 욕망의 덩어리로 가득한 세상을 비참하기만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합의도 없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책이 답을 줄 수는 없다. 다만 사상의 흐름과 사유의 방식을 뒤돌아보는 방식을 통해 미래를 짐작하고 고민하며 한 걸음 내디뎌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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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그 공존의 역사를 다시 쓴다, 비움과 나눔의 철학 3
이명권 지음 / 코나투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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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저녁놀이 아름답다. 자연이 빚어내는 환상은 우리가 벗어나기 힘든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에게 감사하겠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문제들과 본질적인 의문들의 열쇠를 단 하나의 존재에게 의탁하는 일은 나약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신의 존재를 설정하고 나면 참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부조리한 세상과 불공평한 인생도 달리 보이고 현실의 고통까지도 참을 수 있다. 내세와 천국이 우리를 인도하여 영생의 길로 이끌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도 나는 <왜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와 같은 책을 읽으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종교가 없는 유물론자가 신의 존재 여부를 논쟁하거나 증명하는 책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다만 신이 갖는 의미와 역할은 다른 문제이다. 엄연히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담임 목사 1인 체제로 공룡처럼 덩치만 키우는 대형 교회나 좋은 돈벌이 수단으로 절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과연 종교인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어디에나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종교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종교인의 역할과 신도들은 석가나 예수, 무함마드의 말씀과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반문해본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신의 존재 유무는 차치하고서라도 신의 종류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인간 종족이다. 전 인류의 20% 이상이 믿는 종교인 이슬람은 소수 종교가 아니다.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에 비해 역사와 전통, 신도 수에서 결코 2등 종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슬람교에 대한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테러리스트를 먼저 떠올리고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의 아랍인을 연상한다. 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갖지 않고 있다면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를 비교하고 무함마드와 예수를 견주어 보는 노력과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명권의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은 이러한 의문들에 답하는 좋은 안내서이다. 특정 종교에 대한 비교 우위를 논하는 책도 아니고 복음을 전파하거나 선교를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는, 혹은 잘 알지 못하는 무함마드의 존재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해설서이다. 무함마드와 예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는 것은 두 종교를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무함마드와 예수를 비교하고 이것을 토대로 2부에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치우친 견해를 밝히거나 오호의 감정이 개입되었다면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것이다.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일반적으로 모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안내와 잘 알려진 예수를 비교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있는 책이다.

문제는 구원의 주체가 누구이며, 구원의 중개자가 누구인가 하는 소위 메시아에 대한 개념에서 이들의 신앙은 달라지고 만다. 무함마드는 어디까지나 알라-하나님의 사도로서의 역할만 할 뿐이지만, 신약성서와 그리스도교에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한 세상의 메시아이자 삼위일체의 존재로 평가된다. 이른바 예수는 하나님과 같은 위치를 지닌 구세주로서의 신앙의 대상이 된다. - P. 155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신은 모두 하나님GOD이다. 십자군 전쟁을 위시해서 종교 전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의 가르침과는 모순된 논리지만 인류는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믿는 것은 하나인데 그들끼리는 싸운다. 초등학생에게 물어 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상식에 위배된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교리상의 차이와 신의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벌어지고 갈등과 반목이 생겨났다고 해도 종교의 근본 원리나 목적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무함마드를 사도(예언자)로 규정하여 일위일체만을 인정하는 이슬람교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규정하여 삼위일체론을 펼치는 그리스도교는 출발부터 다를 양상을 보인다. 무함마드와 예수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바로 두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의 틀을 달리한다. 핵심적인 차이점이 드러냄으로써 유사성은 묻혀버리고 만다. ‘라 일라하 일랄라La ilaha illa Allah’ 즉,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꾸란>의 가르침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각종 <복음서>들이 전하는 말씀과 무함마드의 <하디스>는 두 종교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쉽게 말해서 무함마드는 인간이고 예수는 신이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예수는 인간이고 사도(예언자)일 뿐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앙고백, 공식예배, 자선, 단신, 순례’의 다섯가지 기둥이 이슬람교를 버텨내고 있다. 이슬람의 역사와 경전인 <꾸란>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차이점으로 받아들인 점은 ‘자선’이다. 예수는 마음을 중시했고 의도를 중시했지만 이슬람에서 ‘자선’은 의무사항이다. 명목상 십일조를 통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를 돕고 있지만 강제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자선’이 거역할 수 없는 의무사항에 해당된다. 최근 사찰이나 교회, 목사 등 납세 문제가 언론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눔의 역할과 순수한 종교의 목적에 충실한가를 따져보는 일이다.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이러한 가르침에 충실하며 사회의 어둠과 그늘진 곳을 보살피고 있겠지만 과연 ‘대다수’라고 말할 수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영희 선생은 한국 교회는 ‘모이자! 돈내라! 집짓자!’는 세 마디로 실날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특정 종교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서방 언론에 의한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졌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읽을 만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무함마드와 예수가 누구인지 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 보다 여전히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이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08020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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