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환상의 물매
김영민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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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 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 - P. 21

  결핍과 잉여는 연애의 영원한 딜레마이다. 항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동반한 열병처럼 찾아오는 연애의 시작은 찬란하기보다 깊은 고통이다. 견딜 수 없을만큼 지독한 불면과 울렁증으로 연인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낸 열정 속에 함몰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 그 지속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후 벌어지는 상황과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관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되지만 식어버린 감정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김영민은 ‘환상의 물매’라는 말로 ‘사랑’에 대한 정의와 분석을 시작한다. 은밀하고 집요한 방식으로 인간의 영혼을 잠식하는 그 모호한 감정에 대해 정의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김영민은 특유의 사색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하나하나 사랑의 모호한 안개를 걷어낸다.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표현과 문장들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언어의 사유의 힘이며 개념은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김영민의 문장들은 대상의 분석에 천착하고 있다. 언어와 개념들 간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일 수 없다. 사랑이라는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포리즘들은 짧은 문장들의 긴밀한 긴장감을 통해 더욱 견고하고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글들이 이어진다. 때로는 한 문장으로 명징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고 때로는 탄탄한 구조의 문장들이 하나의 관계망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유하고 공감하며 돌아본다. 김영민의 글들을 계속 읽게 되는 이 묘한 매력에 대해 뭔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젊은 시절 2000여편의 시와 6편의 소설을 불태웠던 지난한 과정으로 길어낸 사색과 문장의 힘일까?

모욕과 상처의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여전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상처의 기억은 곧 기억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 P. 46

  예를 들어 이와 같은 문장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언어를 뒤집어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전복시킨다. 상처의 기억이 기억의 상처가 된다는 동어반복적이고 역설적인 표현은 순간 멈칫거리게 한다. 내 기억의 상처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처의 기억일까?

  사랑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주제를 다양한 콘서트처럼 아포리즘 형식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김영민의 힘은 놀랍기만 하다. 단순하고 가벼운 놀이로서의 감정이 아니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욕망과 생활의 대체물로서 사랑도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는 이 놀라운 감정을 김영민은 차분하게 사유하고 있다.

  필연이고 숙명이라 굳게 믿고 싶었던 환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사랑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열정과 자기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사랑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보다 객관적인 거리와 시선으로 사물과 상황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것을 상처의 기억이라 부른다.

  철저하게 남녀 간의 연애 감정을 전제로 한 이 죽일놈의 사랑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사랑의 실체가 아니라 타인의 관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주되는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지나가버린 시간들에 대한 경의로움보다는 아쉬움과 기억의 상처 때문이리라.

  여전히, 사랑은 환상이며 환각이고 환유이며 환멸이고 환락이며 환영이다. 누구나 한 번쯤 정의내리는 사랑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세계를 넘어 사랑의 진경은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철학작 김영민이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감성과 파토스의 세계가 아니라 이성과 로고스의 세계로 수평 이동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그 안에서 답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저 한가롭게 거닐다 어떤 순간을 조우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모호한 경계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 가장 정확하게 적용되는 말일 수도 있겠다. 김영민은 이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한다. 자신의 마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한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독자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무어냐? 책장을 덮고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알 수 있다면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일까?

“달은 기울어 밤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경이든 오경이든, 두 사람의 마음을 두 사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脈動하는 법. 그 마음은 어느 먼 미래의 것이었고, 매번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속하였다. - P. 255


0806025-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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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08-06-26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보다는 여기가 한가로운거 같아요~ 리뷰도 찬찬히 읽어볼만하지만
댓글이 더 재미있어요. ^^
동무와연인 이후로 김영민한테 반해버리셨나바요~ ㅎㅎ

전 사랑은 미친짓이다, 라는 책을 보는데 잘 들어오진 않네요
그래도 윤대녕의 글은 단숨에 읽었어요
음.. 이런 사람있으면 사랑하고 싶을 것 같아요 .
시드니폴락감독은 작품을 지탱하는 건 골격이고 그 골격이 없으면 작품은 무너지지만
그건 보이지 않아야 한다, 골격이 보이면 실패작이다, 라고 말했다지요..
윤대녕이 그런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바로 그런 어떤점에서 닮아있어요..

바쁘시다면서 어쩜 이런 일기를 쓰실수 있죠?
연구대상이세요. ㅎㅎ
편안한 밤 되시길. ^^

sceptic 2008-06-27 12:30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 골격에 대한 시드니폴락의 이야기...

소설이든 어떤 이야기든 서사구조는 늘 그런식이죠. 숨은 골격에 붙은 살덩이만 파먹을 수 없으니까요.

김영민의 문장은 탄탄한 골격을 겉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물스럽지만 그 점이 맘에 들기도 하구요. 현학적이거나 작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소화시키고 싶은 욕망과 여운이 남으니까요.

바빠도 일기는 써야죠...^^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시죠?

2008-06-29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3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3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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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교보문고가 있다. 주말에 한 번씩 들러 포식자가 먹잇감을 사냥하듯 천천히 서점을 산책한다. 나는 이것을 눈으로 즐기는 뷔페라고 하는데 그 포만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으로 실제 음식으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팔짱을 낀 채 분류된 코너 매대를 돌며 신간을 확인한다. 관심이 가는 실용서까지 훑어보는 것으로 에피타이저를 마친다. 본격적으로 벽과 스탠드형 책꽂이로 발길을 옮긴다. 일요일 오후의 여유 있는 만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분야별 개론서와 전문서를 일괄하고 한 권씩 꺼내들고 목차를 읽고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는다. 책등을 보인 채 일목요연하게 늘어선 책들의 제목을 훑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흐름이 파악되고 내가 읽은 책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상하좌우에 꽂혀 있는 책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고 다름 도서 목록에 참고하기도 한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꺼내들고 강유원을 떠올리다가 <천의 고원>은 수없이 표지만 만지작거리다 도로 꽂아 넣는다. 장석주의 말이 생각나서 사지 않는다.

  철학 분야 윤리학 코너의 책등을 읽다가 피어 싱어와 짐 메이슨의 <죽음의 밥상>이 윤리학 책이라는 사실이 생각난다. 원제가 ‘The Ethics of What We Eat’이다. 윤리학의 주체는 항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도대체 먹는 것까지 윤리를 따져야 한다는 말인가? 자연의 약육강식이라는 기본적인 법칙으로 보아도 인간은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피터 싱어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옮긴이 함규진도 후기에서 이 책을 끝까지 번역하고 나서도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고기를 먹었지만 자연스럽게 젓가락이 채식 쪽으로 기울었다. 앞으로도 베건이 될 자신은 없다. 완전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면 양심적인 잡식주의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먹을 게 없단 말인가? 책은 나에게 희망과 즐거움보다 고민과 실천을 요구한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형적인 현대의 식단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양심적인 잡식주의자와 완전 채식주의자들을 살펴본다. 한 가정에서 먹는 일반적인 식탁의 풍경에서 시작해서 장을 보는 과정을 취재하고 그것들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하나 역추적한다. 소나 돼지, 닭이 키워진 농장의 현실을 파헤친다. 앨빈 토플러처럼 발로 쓴 <죽음의 밥상>은 올해 읽은, 내가 뽑는 추천 도서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이론에 치우치거나 일방적인 주장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농장의 잡부가 되어 바닥을 기고 ‘쓰레기통 다이버’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직접 쓰레기통 속에 뛰어드는 철학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피터 싱어가 쓴 이 책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론과 실천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가나 책을 만나게 되면 경외감을 느낀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공장식 농장에서 길러져서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과정을 알게 된다면 육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A4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생의 전부를 보내야 하는 닭의 일생에 대해, 전기충격기에 의해 기절하지 않은 채 목이 잘려 뛰어다니는 소에 대해, 꼼짝 못하게 갇힌 돼지의 스트레스에 대해 나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피터 싱어가 내세우는 동물에 대한 동정同情은 사실 인간에 대한 개념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각종 종교와 근대 시민 혁명을 통해 이루어낸 인종 차별의 극복과 남녀평등 등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동물의 ‘차별’ 문제로 이어진다. 그간 끊임없이 반박의 논리와 반대 이론들이 제기되었지만 인간의 종種차별주의에 저항하는 철학자 피터 싱어의 이야기는 한 마디 한마디가 살을 파고들며 뼈에 사무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제 유기농은 낯설지 않다. 공정무역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나로서는 조금 더 많은 관심과 실천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좁은 면적을 가진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로컬푸드는 화석 연료의 사용, 지역경제 활성화, 우리 농민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문제로 얽혀 있다.
 
보통 미국인의 한 끼 식사는 그 거주 지역에서만 식재료를 구해 만든 식사에 비해 석유 사용량이 17배나 높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7배나 높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7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 P. 205

조그마한 텃밭이라도 스스로 가꾸고 상추 한 잎이라도 키워 먹어야겠다는 뼈아픈 자각들이 생긴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실천이다. 이 책 한 권으로 피터 싱어의 생각과 방법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겠지만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먹거리에 대한 윤리학이 철학적 문제를 동반하고 있으며 오로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산업이 되어버린 우리의 식탁을 돌아보게 되었다.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긴 여행처럼 읽었다. 미친소 문제로 뇌용량 2MB임이 드러난 대통령 덕분에 이 책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국가가 국민위에 존립할 수는 없다. <리바이어던>의 가르침이나 <아나키즘 이야기>의 주장이나 <코뮨주의 선언>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실천적인 책 한 권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있는 법이다. ‘죽음의 밥상’이 아닌 ‘건강한 밥상’은 국가라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차려 먹어야 한다.


080602-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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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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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을 무림의 고수로 여긴다. 그의 텍스트 지향 홈피를 들락거리고 그가 쓴 책과 번역한 책들은 의심 없이 읽고 있다. 호남의 강준만이나 영남의 박홍규처럼 의심 없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질 정도로 순진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지만 책을 읽으면서 오호惡好의 감정이 생기기도 하고 깊이 공감하기도 한다.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선호하는 저자가 생기고 혐오스럽지는 않더라도 다시는 그의 책을 사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는 몇 년 전에 출간 된 책이지만, 기회를 놓치고 미루다가 집어 든 책이다. 이 책은 그의 표현대로 잡문집이다. “‘잡문’이라는 단어는 논쟁들, 지엽말단의 문학, 지나친 자유, 언어의 가치하락에서 유래하는 폭력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총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투르니에의 글을 인용해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강유원식 겸양 어법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어쨌든 그의 생각과 그간의 이력들을 짐작할 수 있게 되어 편안했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적어나가 쉽게 읽혔으며 그의 글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과정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강유원 개인에 대한 궁금증까지 골고루 해소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부’를 통해 우리가 만났던 강유원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 생각의 끝자락을 내보이고 편안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 속에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렇게 강유원식 공부 방법에 대한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긴요한 책이다. 소설 읽기 이외에 다른 독서가 필요하지 않거나 조중동의 기사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독자들에겐 필요없는 책이니 선별해서 읽어야겠다.

  익히 알려져 있듯 강유원은 직장 생활을 하며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경야독하는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의 공부방식 때문에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를 50번쯤 읽고 나니 눈이 트이는 경험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기가 질리는 게 아니라 막말로 참 ‘독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방법과 태도에는 공감했고 스스로의 절제와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 공부라는 사실을 이제 몸으로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진짜(?) 공부가 뭔지 공부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모두다 챙겨 들을 만 하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공부를 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부의 목적과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강유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혹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 온 사람이라면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다.

책이 손에 잡혀야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지식에의 열정이 시작되는 때이다. - P. 18

  이렇게 작은 깨달음으로 시작하는 공부 이야기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책 따로, 세상따로, ‘문화’라 부리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학문의 현실적 쓸모 등 네 부분으로 편의상 나누어져 있지만 그 구분은 무의미하다. 마지막으로 제시한 ‘탈 아카데미즘의 길목에서’와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공부라는 대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며 또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정리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혹은 나름의 방식과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사람에게 좋은 참고 도서가 될 것 같다.

  타인의 방식을 빌려 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방법이 생기고 그것이 몸에 익혀진다. 완전히 자기만의 공부 방법이 생길 때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즐겁고 행복한 공부가 된다. 입신 영달을 위해, 돈 벌이의 수단을 위한 공부를 공부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정적이거나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이 트이고 앎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입장권이 생기지는 않는다.

  즐겁고 행복한 공부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채찍질할 수밖에 없다. 앎의 즐거움과 깨달음의 희열, 끝없는 지적 호기심도 ‘욕망’이라는 또 하나의 허영이 아니라 생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는 방법과 도구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온몸으로 전해지는 짜릿함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기쁨이다.

  나는 아직도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세상을 바꿔야 진정한 목적이 달성된 것인지, 나의 안목과 시선이 달라지고 관점의 변화만 가져오면 되는 것인지, 실용적인 목적과 개인의 이익의 위해 노력하는 것인지. 하지만 책을 읽고 정리하고 무엇인가 써나가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이제 어렴풋하게 체험하기 시작했다. 공부는 지겹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고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삶의 과정이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 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 P. 194


080525-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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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자본주의
김영민 지음 / 늘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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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분이 지나고 나면 해가 길다. 특히 하지 부근의 저녁 어스름은 글자 그대로의 ‘산책’을 하기에 맞춤한 시간이다. 길 건너 편 중앙공원에 들어서면 산길을 절개해서 도로를 만들고 도심의 숲을 고립시킨 작위적 공원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을 중심에 두고 사방은 빽빽한 아파트 숲이다. 나무의 숲과 고층 빌딩의 숲은 서로를 원망하며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도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도심의 공원들은 인공의 섬이 되거나 본래의 모습을 잃고 길 잃은 아이처럼 콘크리트 숲 속을 서성인다. 그 산길 구석구석을 개미처럼 걷는 사람들, 작은 호수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을 타는 꼬맹이들과 마주하는 일상은 흔히 볼 수 있는 도심의 생활이다.

  현대 사회에서 ‘산책’이라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계층은 그리 많지 않다. 일선에서 은퇴한 노인 계층이 아니라면 하루하루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어디서 걸을 것인가? 어디를 향해 누구와 걸을 것인가? 목적 없이 홀로 걷는 여유로움은 자본주의 사회를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치이다. 붕어빵처럼 비슷한 가족의 모습으로 주말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속에 서성이다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은 공식화 되어 있고 여가를 즐기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습득하게 된다. 독서 후에 목적도 방향도 없이 사색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산책과 적당한 대화가 가능한 노을 지는 저녁 어스름은 과연 사치인가?

  철학자 김영민은 산책을 ‘전일화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해서만 성립하는 어떤 태도와 실천’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산책’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동무와 연인>을 읽고 탄력 받아 주문한 책이 바로 <산책과 자본주의>이다. 이 책은 문화비평서이다. ‘문화비평은 역사학과 사회학이 겹치는 그 첨단의 지점에서부터 오히려 삶의 조직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려는 감수성’이라고 정의하는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 본다.

  <사랑, 그 환상의 물매>(2004)라는 근사한 제목의 책도 구미가 당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영민의 문장들을 신문의 칼럼이나 짧은 글들로 만나왔다. 긴호흡으로 읽어가는 맛은 확실히 다르다. 내게는 사유의 물꼬를 트여줬고 한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즐거움을 전해주었다.

  짧은 글들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는 구성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짧은 글들이 모여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만 독자는 하나의 큰 흐름을 짚어 내거나 저자의 말하기 방식을 통해 소통하게 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청계천이나 명절, 핸드폰, 비만, 전두환, 5.18, 인문학, 표절, 사랑, 혼인 등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사를 통한 문화 비평이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도한다. 숱한 사상가들을 인용하고 그들의 핵심 개념들을 통해 대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은 낯설지만 통쾌하다.

  대단히 직관적인 사물과 상황에 대한 인식 태도를 보여 주기 때문에 은유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직설적이고 차분한 논리로 그것들을 해체하고 분류하며 기저의 흐름을 꿰뚫어 분석을 시도한다. 대체로 통쾌하고 유쾌한 느낌의 문장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지나치게 매끈하며 지나치게 관념에 기대고 있기도 하지만 논리적이다.

  가벼운 문화 비평서로 읽히지만 뒷맛은 진한 에스프레소를 닮았다. 비평의 조건에 해당되는 여건도 안되는 건 아닌가? 우리의 삶이 말이다. 산책조차 불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불성설일지도 모르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철학적 인간과 일상적 인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사유의 힘과 능력이 현실에서 발현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분노는 긍정적인가?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과 선택의 방식들에 고뇌하는 영혼의 그림자를 밟으며 오늘도 산책하고 싶은 욕망만은 통제 불가능이다.

  하버마스의 말대로 ‘의사소토의 구조가 뒤틀린 탓에 생화세계가 식민화되었다’.  혁명이 배신당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애는 온몸으로 거부하기 힘들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시대인 것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때때로 가슴 속의 쌓인 넋두리와 울분을 토해내는 일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 뒤의 악마의 얼굴이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근원적인 존재론적 질문에 당면한 인간은 불안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면 일단 정지, 전원을 내린다. 자본주의를 산책하는 김영민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와 함께 한 번 쯤은 산책을 권하고 싶다. 그의 방식은 때때로 무념무상한 일상의 틀에 대해 작은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책장을 덮기 전에 고백하는 저자의 한마디는 ‘아, 찔레꽃’이다. 아, 봄날은 간다! 이렇게.

나는, 그렇게, 몇몇 인간들을 그리워하였고, 훈련을 통해 마침내 그리움을 끊었으며, 그 여력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찔레꽃으로 사랑하였다. - P. 255


08051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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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도 2008-05-1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처를 아는 자에게는 어떤 역사도 미학이 될 수 없다. (상처를 미학으로 처리하려는 모든 태도는, 그 근본에서 파시즘!)역사를 미학으로 꾸미는 짓은 몰락하는 특권층의 비극적 감상주의일 뿐이니, 차라리 그것은 정치학이거나 생물학!

모욕과 상처의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여전한 폭력이다. 왜냐면 상처의 기억은 곧 기억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요컨데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자의적 분란의 늪을 만들지 말고, 그냥 살과 말을 더 공대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전략이다.

연인들은 '마음'을 챙기느라 '언어'를 늘 혹사한다. 그래서/그러므로 그 언어의 반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결국 벼랑 끝에 떠밀리고 나서야 비로소 꿍쳐 놓았던 '마음'을 호출하지만 알고 보니 호출부호가 없었다!?(얘들아, 도대체 얼마나 얘기해야 하겠니? '마음'을 저리 밀쳐 두고 '피부'와 '언어'로써 연애하라지 않든!? 그 연하고 순한 것이 불쌍하지도 않든!?)

-사랑, 그 환상의 물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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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모르는 철학용어들이나 한자어들이 많이 쓰였네요.
사실 어려운 글은 별로 안좋아하는데
문장 하나 하나의 밀도가 높고 사유가 빛나고 있어서
님의 말처럼 반복해서 음미하게 됩니다.

귀엽기도 해요.^^

sceptic 2008-05-21 20:56   좋아요 0 | URL
그냥 살과 말을 더 공대하는 것이 현명하다...그렇죠? 피부와 언어로 연애해야죠...공허한 마음에 기대지 말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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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출판된 책의 절반만 팔리고 팔린 책의 절반만 읽히고 읽힌 책의 절반만 이해되고 이해된 책의 절반만이 소화되어 지식으로 남는다는 말은 책의 운명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는가? 아니 얼마나 책을 읽지 않는가? 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현존하는 인류의 절반 이상은 글자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책을 읽지도 않는다. 1년에 한 권 이상의 책을 읽는 사람은 전 인류의 몇 퍼센트나 될까 궁금하다. 책을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발달은 지식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책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과학 기술은 책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생산, 축적하고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빨리 더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책의 미래와 운명은 어떠한가?

  끝없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책의 효용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피에르 바야르는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해 책으로 답한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다소 도발적이고 장난스러울 것 같은 제목의 이 책은 진지하고 성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썼단 말인가?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책의 노예가 되어 살아왔다. 전통적으로 독서의 중요성을 유교 문화권만큼 강조한 곳도 없을 것이다. 독서가 곧 공부였다. 지식을 얻고 세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책을 통해서였다고 하면 과장된 말일까? 유아나 어린이용 출판시장은 급속히 성장했다. 중, 고등학교생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공부를 하기 위해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성인들도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선택 능력이 부족하고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책을 읽히는 부모가 늘면서 아이들에게 독서는 필수가 되었다. 초등학생용 책에도 ‘논술을 위한~’ 어쩌구 하는 문구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책에 대한 부담과 공포와 죄책감을 경험한다. 책에 대한 콤플렉스는 죽을때까지 계속된다. 특히 꼭 읽어야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장난스런 정의가 어울리는 고전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독서의 양이 곧 교양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으며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나름의 소신과 논리로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오래된 질문들에 대해 자신있고 당당하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주장한다. 비독서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경우(Unknown Book),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Skimmed Book),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Heard Book),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Forgotten Book)로 나눈 저자의 분류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여기서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와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는 책을 읽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어떤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그 책의 내용을 모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분류법에 따른 SB와 FB는 읽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독서의 방법은 읽는 사람의 목적에 다양하게 전개된다. 저자는 SB와 FB의 경우 ‘정독’을 하지 않은 책으로 분류하는 것이고 우리가 흔히 읽지 않은 책으로 분류하는 것은 UB와 HB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내면의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모두 읽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이 책들에 대해 담론 상황에서 자신 있고 당당하게 대하라고 충고한다. 사교 생활이나 선생 앞에서 그리고 작가 앞에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결코 간단하고 만만한 방법들을 전해주지 않는다.

  요약된 대처 요령을 전해준다. 부끄러워하지 말 것,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책을 꾸며낼 것, 자기 얘기를 할 것 등 네 가지로 요약된 대처 요령은 이 책의 진수를 보여준다. 과연 책을 왜 읽어야 하며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책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진지한 고민을 통해 저자와의 대화를 시도해 볼 일이다.

“나는 내가 논해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 오스카 와일드(228페이지)

  얼마 전 김성동과 김성종을 구분하지 못해 개망신을 당한 대학 교수 문학평론가의 일화가 떠오른다. 차라리 읽지 않았다면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냉정하게 정확한 평가가 가능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의 양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가 일생 동안 읽는 책의 양은 부끄러운 지경이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다!라는 선언이 무색한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방점을 찍고 싶었던 대목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 책들을 통해 성찰하고 우리들 삶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읽지 않은 개별적인 책들이 아니라 그 책이 내면의 도서관 전체에서 차지하는 총체적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이 화면의 책(도서관)이든 내면의 책(도서관)이든 잠재적인 책(도서관)이든 관계없이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가치 있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태도와 방법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자.

  독서는 과연 시간의 낭비에 불과한가?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불완전한 독서와 비독서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정독한 책 건너편에 자리 잡은 모든 책들에 대한 열망과 호기심, 그것들이 가진 가치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책에 대한 진면목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 저자는 진짜 비독서가가 아니다. 저자만한 비독서가가 되려면 책을 읽는 것 보다 더 진지한 사색과 총체적인 통찰력이 요구된다.

  단순히 책을 읽지 않고 다른 사람을 현혹시키는 싸구려 기술 습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며 이 책에서 손을 떼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누구보다도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열정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오만한 책을 쓴 저자의 목적이 어디 있겠는지 잠시만 생각해 봐도 답은 금방 찾을 수 있다. 더불어 이 책의 갈피갈피에 숨어 있는 저자의 의도와 노력들을 만날 수 있다면 책에 대한 또 다른 태도와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08051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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