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내 책읽기의 등대였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과정과 방법을 배운 책이었다.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는, 진지한 사유와 성찰이 밑바탕이 되는 책읽기의 세계는 내가 만난 어떤 세상보다도 매혹적이었으며 아름다웠다.

  세상에는 책읽기의 고수가 많다. 하지만,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 골고루 책읽기에 성공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인다. 책읽기에서 ‘성공’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고, 그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단순히 한 분야의 책 읽기 고수는 책읽기 고수라 하지 않고 그냥 해당 분야의 학자나 연구자 혹은 전문가라고 한다. 정확한 개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정의한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에 바탕과 뿌리를 두지 않은 책읽기는 사상누각과 같다.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인간의 삶과 사상의 흐름, 사회의 변화 과정을 인식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면 무릇 책읽기는 그저 고급한 취미와 젠체하기 좋은 겉멋에 불과하다. 그래서 특히 젊은 시절의 책읽기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형성하며 나와 타인의 관계를 조망하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책읽기 고수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성인이 되기 전 이미 책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책과 무관한 분야는 없다. 안철수와 박경철 같은 유명인을 비롯하여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에 이르기까지 활동 분야를 전문분야와 활동 분야를 막론하고 책은 모든 영감의 원천이며 행동의 출발이고 사상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나이 오십쯤 되어 내 인생의 책을 정리하고 싶은 욕망이 나에게도 생길지 모르겠지만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읽는 내내 말할 수 없는 공감과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사람답다. 겨우 열네 권을 추렸지만 그의 책읽기와 글쓰기 내공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고 정교한 그물처럼 짜여있다. 한 사람의 내밀한 영혼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뼛속까지 드러내는 일이다. 작가의 구석구석을 탐욕스럽게 샅샅이 훑어내는 나의 시선이 오히려 섬뜩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까지 다시 읽어내면서 유시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청춘’이 궁금한 게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인간이 지켜야할 진정한 가치와 고전의 눈부신 문장들을 함께 읽어보고 싶었다. 수많은 책에 관한 책 중에서도 『청춘의 독서』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바로 냉정하고 합리적인 이성과 날카로운 비판정신 그리고 따뜻한 감성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이제 갓 세상에 나가 길을 찾는 딸에게’ 바쳐진 이 책은 험한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딸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면바지 차림으로 국회에 서서 양복쟁이 국회의원들에게 신고식을 당하던 유시민의 어색한 표정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를 조금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이제 오십이 넘었고 그의 딸은 스무살이 되었다. 그렇게 옳은 말을 말을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할 수 있는 그의 소신에 박수를 보냈지만 정치적 행보와 색깔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유시민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교차한다. 하지만 스물 여섯에 감옥에서 쓴 ‘항소이유서’를 읽으면서 그의 글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니 선생이 내게 묻는다.
너는 지식인이냐.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 P. 48


지적 활동 중단 선언을 하신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다시 읽고 스스로 던진 질문이 아프게 와 닿는다. 평범한 생활인인 내가 가져야하는 부담과 고민만큼만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없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오래된 청춘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작가 옆에서 그 지도를 함께 들여다보는 즐거움으로 며칠을 보냈다. 고마울 따름이다.

  읽었던 책은 다시 읽고 미처 읽지 못했던 몇 권의 책은 당장 읽고 싶어졌다.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들을 얼마나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나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직장을 다녀도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과 삶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삶이 되기를 희망한다. 시간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보수주의는 사회의 부유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영예로운 장식적 가치를 얻는다. 이것이 더 심화되면 우리의 관념 속에서는 보수적 견해를 고수하는 것은 당연히 존경받아야 할 대상으로 평가된다. (……) 보수주의는 상층계급의 특징이기 때문에 품위가 있는 반면, 혁신은 하층계급의 현상이기 때문에 저속(vulgar)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회적 혁신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본능적 반발과 비난의 가장 단순한 요소는 사물의 본질적 비속성(vulgarity)에 대한 관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자(innovator)가 대변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가 치유하려는 악이 시간적 ․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개인적으로 접촉할 가능성이 없을 때 이런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 혁신자는 교제하기에는 불쾌한 인물이며 무릇 그와 접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혁신은 나쁜 것(bad form)이다. - P. 244(『유한계급론』, 179쪽)

  읽지 않은 책 중에 가장 읽어 싶어진 책 중의 하나다. 보수와 진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를 이렇게 적확하게 짚어낼 수 있을까 싶다. ‘혁신자는 교제하기에는 불쾌한 인물이며 무릇 그와 접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뼈아픈 지적이지만 ‘혁신은 나쁜 것’이라는 말은 지루한 세상에 던지는 불타는 구두같은 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풍자가 지나치면 눈물을 자아낸다.

  혁명 전사도 투사도 아닌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가슴 밑바닥부터 아려왔다. 지치고 힘들 때, 포기하고 싶을 때, 나약해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두고두고 생각해 볼 책이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시대를 견딜 힘조차 내겐 없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끔 두렵고 외로운 밤이 찾아온다.

“역사와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중에서)이라고. 이 믿음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의 격려를 받아들여야 할까? - P. 312


0912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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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귀신 죽이기
박홍규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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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는 인간들의 꿈과 환상이 빚어낸 배설물이다.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불안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믿고 싶은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견뎌내거나 종교적 믿음을 위한 상징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모든 부족 혹은 민족에게 신화는 자부심과 긍지를 만들어 주었고 후손들에게 경외감과 존경심을 갖게 해주었다. 실제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신화의 세계는 여전히 환상적인 모험의 세계이며 먼 과거에 대한 꿈의 세계라고 믿는다.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 로마 신화』를 처음 읽었던 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삽화 한 장 없이 빽빽한 글씨로 채워진 책장을 넘기며 처음 듣는 신들의 긴 이름과 거의 콩가루 집안인 족보를 머릿속에 그려가며 읽자니 장난이 아니었다.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이 책은 후자에 해당된다고 믿었다. 어렴풋한 흐름만 이해하고 몇몇 장면만 기억에 남는다. 이후 단편적인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다시 만난 것은 그림을 통해서이다. 중세, 르네상스, 고전주의에 이르는 유럽의 예술은 신화의 시대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시대를 뛰어넘는 파격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신화와 종교는 서양 예술의 근간을 이루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지 못하고 유럽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새롭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오게 했으며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에 열광하는 초등학생이 부럽기도 했다. 불황을 모르는 학습만화 시장은 쉽고 재미있게 접근하고 읽을 거리가 많지 않았던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했다.

  상식과 교양의 이름으로 맹목적으로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를 알아야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없다. 그림에 담겨있는 수많은 알레고리가 마치 수수께끼처럼 풀릴 때의 신기함 정도로 시작된 관심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들이 필요에 의해 읽혀졌다. 하지만 한 번도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태도로 왜 ‘그리스, 로마 신화’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박홍규의 『그리스 귀신 죽이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뒤집고 비틀어보기를 시도한다.

이제 우리 민주주의에 필요한 사람은 그런 영웅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아니라 착하고 성실할 줄 아는 진정한 보통사람들, 즉 신화 밖의 평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를 읽지 않아도 좋지만 꼭 그것을 읽는 경우에는 비판적으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 P. 72

  개인적으로 박홍규의 저작들을 통해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오리엔탈리즘』, 『학교없는 사회』,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와 같은 번역서는 물론이고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예술, 정치를 만나다』, 『아나키즘 이야기』,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등 그의 인문학적 저작들은 새로운 시각과 비판적 관점,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책들이었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반성 없이 ‘교양과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하는 신들의 행태에 대해 저자는 일침을 가한다.

  그리스 신화는 끊임없이 반인륜적 폭력의 권력투쟁 과정을 보여준다. 적대, 경쟁, 전쟁, 정복, 침략, 복수, 음모, 계략, 살인, 절도, 사기, 약취, 유괴, 강간, 간통, 차별 등 온갖 범죄와 부도덕의 결정판으로 볼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접근하게 해서는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는 충격적인 내용이 많다는 데에는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지적대로 그리스의 귀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저자는 삼층 차별구조로 그리스 신화 전체를 다시 들여다본다. 신과 영웅에 대비되는 괴물과 인간, 지배자와 남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피지배자와 여성, 서양의 주변에 머물러 있는 비서양이 그것이다. 이렇게 뚜렷한 차별적 구조를 가진 신화는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으로 볼 수는 없다. 신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성성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 신화가 가지고 있는 다른 신화와의 차별점에 대한 이야기다. 부분적으로 각 민족의 신화는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신화를 비판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분석하고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다.

지배민족=그리스=서양=중심=문명=미와 선=정상
…신과 영웅=왕과 귀족 및 장군=주인=미와 선=정상
…남신-남자영웅-남자인간=정신 지성 문명=공적 정치세계=국가

피지배민족=비非 그리스 =비非 서양=주변=야만=추와 악=비정상
…괴물과 인간=노예 및 외국인=주변=추와 악=비정상
…여신-여성인간=육체 감성 자연=사적 가정세계=사회

이러한 도식화는 세계사를 서양사 중심으로 설정하고, 비서양사를 서양의 비서양 지배사로 날조하게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이 세계사이지만 아직까지도 비서양은 서양과 관련되는 경우에만 그 객체나 타자로 등장하고, 세계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서양일 뿐이지 비서양이 아니다. - P. 274


  저자의 관점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 자체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밖에 없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을 전제하지 않은 맹목적 수용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

  낯설게 바라보고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하는 인식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의 문제로 언제나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조차 가지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09112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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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30 1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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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2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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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0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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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2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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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 88만원 세대에게 전하는 한기호의 자기 생존 솔루션
한기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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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나름의 기능을 가진다. 한 시대를 정리하고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은 몇 권의 책을 통해 얻을 수 없는 특별한 혜안이다. 재밌고 즐거운 책읽기, 예술적 감동을 얻는 책읽기, 지식과 정보를 얻는 책읽기, 배움을 위한 책읽기, 시간을 보내기 위한 책읽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책읽기 등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하지만 책읽기를 통해 삶을 변화시키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근본적으로 생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일이 책을 통해서 가능할까?

  중세의 봉건적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꿈꿔보기도 전에 제국주의에 유린당한 한반도는 해방이후 60여 년간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물론 경제, 문화적으로도 급격한 변화가 이어졌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지식인의 책무일 것이다. 사르트르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역설했듯이 스스로 변화의 주체와 민중들을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권력을 이용하고 안일하게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이념을 넘어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지식인의 범주와 역할에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기성세대 혹은 어른이라고 불리는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최소한의 역할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한기호는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를 통해 대한민국 20대의 현실을 정확히 짚어냈고 현실적 대안은 물론 미래 사회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는 우리 사회의 경제현실과 젊은이들의 삶에 대해 수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이 책도 어떻게 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승자독식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자기계발서 틈바구니에서 20대의 손에 반드시 쥐어주고 싶은 책이다. 아니 그보다 곧 20대가 되는 10대에게 먼저 읽혀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이 시대의 청소년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한 마리 애벌레들은 모두 소중한 나비가 될 준비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 속에 내몰려 있다. 일제고사와 수능 성적 공개는 누구를 위해 왜 필요한 것일까? 동물들의 생태계처럼 인간 사회에서도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원칙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경쟁 논리로 풀어내는 것이 과연 합당하고 가능한가? 공정한 경쟁 체제는 차치하고라도 삶의 목적과 방향을 가늠하지도 못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교재와 학습 내용을 가지고 그들의 능력을 한줄로 세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조금만 더 멀리 내다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든 금방 알 수 있는데도 아이들을 끝없이 국영수 경쟁체제로만 내모는 교육에는 희망이 없다.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 이론을 통해 인간의 지능과 능력을 다양하게 분석했다. 우리 인간은 다양한 흥미와 소질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동일한 잣대와 기준으로 모두를 재단하는 방법은 문제가 있고 하나를 위해 모두가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일은 공멸의 지름길이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공감하면서도 그대로 방치한다면 명백한 기성세대의 직무유기다. 결국 10대와 20대가 가장 피해자가 되고 희생자가 될 것이다. 한번뿐인 인생에서 그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미래 사회의 가치를 안내하는 것은 어른들의 당연한 책임이다.

  모든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교육은 불가능할까? 한기호는 그 대안으로 책읽기를 제시한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 보이지만 현실에 대한 적확한 분석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주장의 근거를 갖추고 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종횡무진 분야를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책읽기와 정확한 분석능력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출판계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무서울 정도의 독서력은 그의 혜안을 뒷받침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에서 인용하고 저자들의 이야기를 소화해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칼날처럼 예리하다. 그가 인용한 대부분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프지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20대의 비정규직화는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대학 입학에 동시에 어지간한 중산층 가정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등록금 부채가 시작된다. 85%라는 OECD 최고 대학진학률을 자랑하는 사회구조도 문제지만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없는 현실을 무한 경쟁체제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가 애벌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한 마리 나비가 되기위해 자신의 ‘컨셉력’을 갖춰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는 앉아서 코풀기 위해 우수학생 유치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대학은 다양한 능력을 가진 학생들을 다양한 선발 방식을 통해 선발하고 그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한기호는 이 책에서 대학 4년 동안 1주일에 한권씩 200권의 책을 읽으라고 주문한다. 인문학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분야의 교양을 통해 전문적인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고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컨셉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정형화된 취업 5종세트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자신의 스펙관리만 잘 한다고 해서 정규직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정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이 책은 세상을 읽고 분석하고, 생존의 솔루션을 찾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컨셉력’을 갈고 닦으라고 주문한다. 그 중심에는 책읽기가 놓여 있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해도 근본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책읽기다. 책만 읽으면 문제가 해결되겠냐는 반론은 차후의 문제다. 수능성적으로 평생이 좌우되고 승자독식의 경쟁체제와 경제적 능력만이 유일신이 된 세상에서 책읽기는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은 인터넷 검색만으로 얻을 수가 없다. 진지한 책읽기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혜안에서 비롯된다. 관계와 소통을 통해 미래 사회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20대를 기대하려면 바로 지금 우리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091018-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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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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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화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넓고 전망 좋은 아파트, 안전하고 영양가 높은 음식, 고급 승용차, 억대 연봉이 조화를 이루면 되는 걸까? 늘어놓고 보니 돈만 있으면 가능한 삶이다. 시니컬하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삶이 대부분 사람들의 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능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사실 이런 현실을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고 느낄까? 욕망의 크기 때문인가? 아니면 삶의 목적과 방법 때문인가?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며 미래를 설계하고 과거를 성찰한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작고 소박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아무도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봐야 바늘 하나 꽂을 곳이 없는 틀에 박힌 일상에서 한낱 공상에 불과한 생각들로 머리만 복잡하다. 이건 아닌데 싶지만 전혀 다른 삶을 꿈꿀 수도 없다. 현실과 상황은 만만치 않으니 그만 오늘과 타협하고 만다. 견고한 사회 구조 안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종류는 그리 다양하지 않다. 함께 꿈꾸고 같이 걷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삶이다.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이 버몬트 숲 속에서 살았던 20년간의 기록을 적은 <조화로운 삶>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머나먼 미국에서 대공황이 최악으로 치닫던 1932년, 두 사람은 뉴욕에서 버몬트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외부적인 조건이 두 사람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지만 대학 교수였던 스코트 니어링과 그의 제자에서 아내가 된 헬렌 니어링이 전혀 다른 삶에 도전하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스코트 니어링은 1883년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나 펜실베니아 대학 교수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친다. 아동 노동을 착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 해직되고, 톨레도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와 예술대학장을 맡았으나,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 대전을 일으킨 것에 반대하다가 또다시 해직된다. 아내 헬렌 니어링은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을 공부했으며, 명상과 우주의 질서에 관심이 많았다. 한때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었으며 스물네 살에 스코트 니어링을 만나 삶의 길을 바꾸게 됐다. 마흔 다섯 살의 스코트 니어링은 헬렌보다 스물한 살이 많았다. 두 사람은 가난한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버몬트 숲에 터를 잡고 농장을 일궈냈다. 스코트는 1983년 세상을 떠났고, 헬렌은 그로부터 8년 뒤에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썼으며, 1995년 헬렌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조용한 청교도적 삶을 살아가는 듯한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인생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엉뚱하지만 조금씩만 욕심을 덜어내고 생의 조건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보고 다른 사람을 조금만 더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상적인 꿈이라고 비웃을 수 있지만 불가능한 꿈조차 없다면 현실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지 전혀 신경 쓰지 말라. 우리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우선 이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도록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나 더욱 슬기롭고 사람다워질 미래에는 더욱 냉철하고, 규모 있고, 쓸모 있게, 사회를 생각하면서 살리라.”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이러저러하게 살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현재를 이어받아 미래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 P. 199


  누구의 말을 인용했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터무니없는 이 말을 믿고 산다. 현재는 미래의 거울이다. 우리의 지금을 살펴보자. 버몬트에서 직접 집을 짓고 채식을 하며 공동체를 꾸리던 부부는 개발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훗날 메인으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사회를 등지고 살자는 말이 아니라 “인생의 어느 시점까지 열심히 산 사람들이 더욱 성숙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으로서(이것은 인생의 여러 단계에 대한 동양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데, 그 사람들은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마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성인이나 은둔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일과 취미 생활을 동시에 하면서 슬기롭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부부의 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저 특별한 20세기 미국인 부부의 삶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21세기에도 사람이 산다는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깊은 밤 이 부부기 20년간 버몬트 생활을 마무리 하는 말을 되새겨 본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가장 품위 있고 친절하고 올바르고 질서 있고 짜임새 있게 살아야 한다. 어떤 처지에서도 사람은 옳게도 그르게도 행동할 수 있다. 어떤 환경이 주어지든, 미워하고 공격하고 부수고 무시하고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 두는 것 따위의 더욱 해로운 행동을 하기보다는, 사랑하고 창조하고 건설하며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대도시 한가운데보다는 산업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 더 훌륭하게 조화로운 삶을 꾸려 갈 수 있다고 믿었다. - P. 201


090903-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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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를 던지다 - 왕들의 살인과 다산의 탕론까지 고전과 함께 하는 세상 읽기
강명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이탁오는 어떤 진리도 스스로 자신만이 진리라고 주장할 때 그 진리는 더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한 것이다. - P. 76

  ‘진리’를 논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세상에 객관이 존재하지 않듯이 진리는 현실밖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신념과 진리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밖에 없으며 어떤 사람도 그것을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시대에 비추어 보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다수결과 다르다. 잘못된 법과 제도가 통용된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이 전근대 사회에서는 자연스런 사회 현상이었지만 그것을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폭넓은 안목과 미래지향적인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최선의 가치일 수 없듯이 자유경쟁과 자본의 논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고 해서 미래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강명관의 <시비를 던지다>는 조선 사회를 통해 21세기 한국사회를 조망하고 있다. 한학자인 저자는 조선시대를 학문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밝혀보지 않는다면 지식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처한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만족스럽게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위해 역사가 필요하고 선인들의 글을 도구로 삼았다. 이 책은 그렇게 저자의 학문적 열정을 통해 바라본 21세기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다. 저자가 선별하여 제공하는 글이지만 오늘에 되새겨 볼 만한 글을 읽다보면 책은 우리에게 영원한 길잡이며 삶의 교훈과 미래에 대한 지혜를 알려준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전체 4부로 나누어 노비와 비정규직을 비교하고 역대 왕들의 행적을 돌아보며, 학문적 진리를 논하고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선조들의 고민을 살펴본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매일 일어나 숨 쉬고 살아가는 일상이 편리해졌지만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과거제도가 공평하게 치러지지 않았고 21세기 수능도 공평한 경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으며 탐관오리와 지방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 지배층의 백성 훈육과 입시에 짓눌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꾼다.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치고 있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내일을 꿈꾼다. 하지만 소통과 어울림은 요원하기만하다. 그들만의 세상은 계속되고 있으며 백성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나는 국민이란 명사를 들을 때면, 백성이란 명사가 떠오른다. 백성이 사실상 멸시받는 ‘상것’의 현실을 덮고 있는 호사스런 말이었던 것처럼, 국민이란 명사는 다른 어떤 명사를 그 속에 덮고 있는가. - P. 93

분명한 것은 돈과 권력, 학벌과 인척관계로 결합한 극소수 귀족층의 한국 사회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는지, 외국 국적을 가진 자녀를 두고 있는지, 왜 특정 대학 출신들인지 묻는 것조차 이제는 어리석다. 이런 속성의 ‘고소영’과 ‘강부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21세기 대한민국은 정확하게 19세기 조선의 연장이다. 세상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 P. 118

“일제고사 좋아하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산의 <하일대주(夏日對酒)>의 한 구절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들만이 재상이 되고, 그들만이 판서와 감사가 되고, 그들만이 승자가 되고 그들만이 헌관(憲官)이 되네.” - P. 274

  부정적 시각과 비판적 안목은 구별되어야 한다. 비판을 인정하지 않는 무모함이 영원할 수는 없다. 국민과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먼 안목으로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한 삶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꿈일 수도 있다. 겸손하지 못하고 오만과 독단으로 결정된 일들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아이들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놓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념과 정쟁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 고민해 볼 시간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뼈아픈 충고와 자기반성의 시간을 촉구한다. 멀지않은 과거였던 조선시대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비춰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수많은 고민들은 어쩌면 얼마 전 선조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발짝만 비껴서서 스스로를 돌아보자. 나의 믿음과 진리에 시비를 걸어볼 시간이다.


09090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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