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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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란 무엇일까? 행복한 주거지는 무엇을 담아내야 할까? 건축의 의미는 무엇일까? 유럽의 대표적인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이 문제에 답했다. 건축가가 아니면서 아름답고 행복한 주거지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다. 나도 이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문제는 행복한 주거지와 행복한 집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집이란 어떤 집인가를 묻는 방식이 철학적이기도 하지만 문학적이라는 점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특히 눈길을 끈 건물 중 하나가 성당이다. 누구나 유럽여행을 통해 수많은 성당을 다니지만 그 성당의 건축이 담아내려고 하는 것은 신의 존재이다. 따라서 건축이란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을 담아내려하느냐에 따라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어떻게 만들고 구조를 어떻게 하고 창을 어떻게 꾸미고 하는 것들이 달라진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의미도 그것이었다. 나아가 공간을 통해서 진리를 꿈꾸고자 하는 사람은 그 상징성과 의미를 어떤 식으로든 공간에 담아내고 구현하려고 한다. 사찰이 그러하고 사원이 그러하듯....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아파트로 획일화된 주거문화를 갖고 있다. 그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그 지역의 자연환경과 지형과 식생과 상관없이 서양식의 아파트가 어디에서나 똑같은 형태로 지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괴물은 탄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번만 집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고 그것이 담아내야 할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고 고민한다면 주거지로서의 아파트는 그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구조물임을 알게 된다.

 

  행복한 주거건물에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빛과 채광, 사생활 보호, 아늑함. 자유로움, 포근함. 정서적 안정, 위안, 평화 등등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부터 접근하여 우리는 건축물을 그려나갈 수 있다. 나에게 책이 중요하다면 서가와 그 서가를 비추는 빛의 활용과 책읽는 공간 구조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공간배치와 효율성을 생각해낼 것이다. 보통은 우리에게 이렇게 행복한 집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고려해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집의 수요자로서 또 매매가격을 지불하는 집의 주권자로서 우리는 응당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늘 단독주택의 꿈을 꾸어왔다. 입체적인 공간과 빛과 대기를 언제든 내 주거지 속에서 고루 느낄 수 있는 공간...계절의 변화와 기상의 변화를 주거지에서 바로 느낄 수 있는 집.... 그것이 나의 행복한 주거지였다. 그리고 조용히 책을 읽고 나만의 독송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집... 그리고 몸을 조금 움직일 수 있는 정원과 땅.... 내가 꿈꾸던 단독주택은 못되어도 그런 집에 대한 생각으로 그와 비슷한 주거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 번 더 내가 주거지를 옮기게 된다면 작은 땅으로도 3,4층의 공간에서 이런 것을 누릴 수 있는 나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거주의미를 건축가와 소통을 통해 짓고 싶다.

 

  책에 나오는 건축물과 주거건물을 한참 들여다보며 참으로 우리는 집의 행복함을 모르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란 어떤 공간인가? 라는 물음을 던지게 해준 것만으로도 이 책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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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와 한국의 전통 차문화
김상현 외 지음, 노무라 미술관 엮음 / 아우라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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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의 노무라 미술관 관장 타니 아키라의 인사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차문화는 한반도로부터 전해졌다. 그래서 우리보다 훨씬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고 또 임진왜란 전후로 부흥한 일본의 차문화에서는 성이라고 할지라도 한 개의 조선 막사발과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다기와 다례에 대해 많은 기호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보이차를 비롯해서 발효차에 있어서는 세계제일의 중국의 관젠핑 교수의 참여로 한, 중, 일의 다문화는 세계 차문화라고 불리어도 흠이 되지 않을 정도의 위상도 부여받게 되었다.

 

  송나라 시대에 남쪽에서 유행한 차는 해상교통의 발달로 고려로 들어오게 된다. 고려시대는 차문화의 전성기로 왕실의 다례와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상으로서의 다구, 귀족들의 다문화, 승려와 일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차의 음용과 생활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다. 송나라 때의 건요로 만들어진 토호잔이나 흑요잔 등 다양한 다완은 고려에 전해졌을 것이고 고려 또한 청자를 본격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생산된 것이 다완와 다도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1000년의 세월동안 전세품으로 내려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국보 115호로 지정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다완이나 은구처리된 국보 253호인 청자 양인각연당초 상감모란문 은구대접 두 점과 그 외 몇 점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없지만 다양한 형태의 다완이 제작되고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시대로 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차문화를 살린 것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다. 평소 차를 즐겨하였으며 유배시절 강진 초당에서 주변의 차밭을 일구어 직접 차를 재배하면서 초의 스님에게 그 제다법과 다도를 전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1905년 백련사로 놀러갔다가 차밭을 발견하고 백련사 승려들에게 차만드는 법을 전수한다. 1818년 유배지를 떠날 때 썼던 '다신계절목'을 보면 제장들과 함께 차를 만들었던 내용이 서술된다. 다산이 차를 마신 것은 음용이 아니었고 자신의 체증을 내리는 약으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차에는 독성이 많기 때문에 제자에게는 많이 마시지 말라고 권한다. 이 독성을 감쇄시키기 위한 제다법으로 '구증구폭'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의스님이 다산초당을 처음 방문한 것은 1809년이었고 그 해는 다산의 나이 48세, 초의 24세였다. 초의는 바른 스승을 찾아가며 열심히 구도했는데 사찰에 그리 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다산을 만나 학문도 배우고 차도 배웠다. 이러한 초의 차가 세상에 나온 것은 20년도 더 뒤의 일이다. 우연히 벗을 통해 초의차를 맛본 박영보는 '남차병서'를 지어 만남을 청하고 그의 스승 신위가 다시 '남차시'를 지어 초의차는 유명해졌다. 중국의 연행길에 싼 차만 사다마시던 그 당시의 기호자들에게 초의차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1840년 전후 홍현주의 요청에 따라 [동다송]을 지으면서 조선의 차는 이론면에서도 깊어갔다. 이러한 초의차가 더욱 깊어진 것은 차에 대한 지식과 안목을 가진 추사를 만나면서부터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후기 차문화의 르네상스라 부를 만하다.

 

  추사와 신위는 청나라 문예의 종장인 옹방강과의 교유를 통해 차가 문인의 일상에 얼마나 중요한 물품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북학파와 경화사족들이 차의 새로운 가치를 인식한 것은 조선시대 차문화 부흥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추사는 자신의 글과 그림을 선물로 초의는 자신의 차를 선물로서 오래도록 사귀었다. 이러한 까다롭고 안목있는 경화사족으로 인해 초의차는 더욱 발전한다. 초의가 만든 보림백모란 차에 대한 평가는 이 사실을 알려준다.

  " 초이차는 맛이 너무 여리다. 그러므로 오래전부터 보관했던 학원차와 섞어여 한 항아리에 보관하였다. 곧 새 차와 서로 어우러지기를 기다렸다가 사용하였다. 또 시를 지어 초의에게 보이려 한다."

1838년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글을 봐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 차를 보내주시니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낍니다만 매번 차를 덖는 법이 조금 지나쳐 차의 정기가 조금 침윤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차를 다시 만든다면 화후를 조심하는 것이 어떨지요?"

1840년 이후에야 추사는 "보내준 차는 과연 가품이다. 다삼매를 드러냈는가?" 하고 칭찬한다.

 

  이 책에서 알 수는 없지만 초의스님은 조주스님의 가풍을 이어받아 다삼매를 통해 진리에 이르려 했는지 알 수 없다. 앞으로 더욱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책은 그 외에도 한, 중, 일의 다도와 차문화 비교와 차관련 학과가 개설된 대학, 그리고 차문화의 정의 및 범위에 대해 비교하고 있다. 아무래도 엄청난 수요와 차문화의 일상화를 통해 중국은 차 제조 및 생산, 그리고 그 잎의 개량과 제작법에 관한 농과계통의 학과와 연구가 많은 반면 한국은 다문화와 다도구와 다례와 의식, 정신적 삶에 대한 것이 일본은 차 생산과 다도예절에 관련된 부분이 중심이다. 개설된 학과나 체계적 공부는 중국이 최고이고 한국은 2000년대 들어와 본격적으로 생기고 분화되는 편이나 그 속도가 빠르지 않고 일본은 전문대학 및 연구소를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생겼으나 지금은 주춤하는 실정이다. 이를 통해 한, 중, 일 간의 공동연구 및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차문화가 단순히 예와형식의 영역이 아니라 현대인의 정신생활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논문식 글을 그대로 실은 듯하여 쉽게 읽히지는 않으나 관심이 있다면 지나치지도 않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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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술사가의 편지 -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에게, 강우방 예술론
강우방 지음 / 솔출판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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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이야기가 있다. 70대 중반은 은퇴 학예사의 이야기이다. 공무원으로서의 신분도 은퇴하고 대학교 교수 신분으로서도 은퇴한 한 미술사가의 이야기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평생 몸담고 공부한 미술사에 매진해왔고 또 그 공부를 젊은이의 열정으로 이어가며 한국 건축과 불교 사찰 건축에 드러난 무늬의 의미를 쫓고 쫓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드러난 무덤양식 속의 무늬와 건축양식 속에 드러난 무늬의 상징성을 이해하는 코드를 갖게 되었다. 나는 [한국미술의 탄생]에 이어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서양과 동양의 무늬는 고대사로부터 그 보편성으로서의 공통점과 특수성으로서의 표현의 차이를 가진다. 그러나 무덤양식이 의미하는 것은 생명과 죽음과 사후 세계이고 또 왕이 상징하는 것은 용인데 그것이 무늬상으로 어떻게 원초적으로 생명이 나타나고 형화되어 표현되는지에 대해 '영기화생'이란 말을 사용하여 한, 중, 일의 고대사 양식을 해석하는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접근하는 방식과 격물하는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지식과 정보를 통해서 알아가는 방식보다는 예술품을 직접 격물하며 자신의 이해가 생길 때까지 마음 속에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쳐 자신만의 이해와 깨달음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 마치 불교의 '선'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불화나 고구려벽화에 드러난 무늬의 새로운 색칠을 통해 무수하게 그려가며 가진 새로운 해석은 아주 설득력있게 무늬와 도상의 설명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그 예술품이 사용되고 수요되는 주체와의 지위와 상징과 더불어 일목요연하게 설명된다. 그런 방식을 통해서 우리나라 신라 금관에 사용된 옥벽이 태아의 모습, 즉 생명의 단초의 모습이며 그것이 홍산옥기에 드러난 옥벽에서 용모양의 옥으로 화해가는 과정을 보며 한, 중, 일의 문화가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민족적 경계없이 서로 교류하여 공유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고 설득력있는 것이었다.

 

  선생님 자신이 무엇보다 공부를 사랑하였고 한국미술을 통해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공부인연을 깊게 만들었고 그래서 인연지어진 '일향'연구소의 탄생과 계속된 공부과정에서 드러나고 완성되어가는 세계미술사에 대한 공통적으로 나타난 보편성의 발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감동적이다.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의미있는 과정이 되는 것은 스스로의 즐거움과 의미성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불교미술사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인연의 만남은 한 곳에 자신의 정신을 집중하여 오랜 세월을 발효시켜가면서 '돈오점수'의 과정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때가 되어 그를 통로로 해서 드러난 신의 비밀이요 진리의 발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아직은 뭔가 일목요연하게 체계잡힌 것이 아닌 까닭에 제목을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로 붙인 것은 어느 때인가 선생님의 새로운 책이 탄생하기 전의 초고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세계미술의 탄생'이라는 제목이 붙든지 또는 어떤 제목의 책이 자신감과 더불어 나올 것을 기다린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뜻으로 세워지는 길만큼 분명하고 뚜렷하고 가능성이 확실한 길이 또 어디 있을까? 나이로는 한참 어리지만 그 열정과 학구열로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한 후학이 그의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됨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시단의 고은 선생님과 비슷한 분이 있다면 한국미술의 강우방 선생님이다. 라고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의 책을 좀 더 전작으로 읽어갈 듯 하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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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는다
타니 아키라, 신한균 지음 / 아우라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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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는 고려시대가 차의 전성기였다 한다. 그래서 다반사란 말도 이 때 생겨났다. 차를 마시는 그릇은 우선 문양이 화려하지 않으면서 차의 빛깔과 향을 잘 품을 수 있어야 하고 뜨거운 온도를 방지하기 위해 굽을 높게 만들어야 한다. 차를 타기에도 마시기에도 편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발달한 고려의 차문화가 조선에서는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조선시대 다완은 지방가마에서 사발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며 분청사기에서 많이 구워낸다.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듯이 일본인들은 조선의 도공들을 데려가 일본 도자기의 전성기를 일구어 낸다.

 

  일본인들의 문화적이고 예술적 감각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좋지 못한 연질 또는 조질 흙을 사용해서 일상용품 또는 실용적 보관용품으로 구워낸 막사발을 일본인의 미감으로 세계 최고의 예술품 취급을 했다. 츠츠이 준케이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미움을 받아 성의 공격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가지고 있던 이도다완 하나를 선물함으로써 오히려 큰 상을 받게 된 것에서 조선의 막사발 하나가 성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처럼 일본의 지배층이 가진 미의식은 화려함과 기교를 떠나 자연스러움과 실용성이 어우러진 조선의 그릇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우리가 분청사기 그릇을 재현해내고 그것을 말차 그릇이나 다완으로 사용하게 된 데에는 일본의 역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제서야 분청사기나 백분장사기에 대해 새롭게 해석해내고 재현해내게 되었고 또 기교로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스러움과 투박함에 미적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유약의 흘러내림이나 맺힘, 굽는 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요변현상으로 인해 세상에 다시 만들어낼 수 없는 유일함은 중국 송나라 다완을 밀어내고 세계 최고의 가치를 가진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이 책을 통하여 나도 백분장사기 다완을 몇 점 소장하게 되었고 또 그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음미하게 되었으니 고맙다.

 

  이러한 사발류는 조선에서는 당시 관요가 아니라 지방가마에서 구워낸 민요였다.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는 흔한 그릇에 미의식을 찾아내고 음미하는 일본인들의 미감이 훌륭하다 생각한다. 또한 나아가 자신들의 미감을 반영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구미에 맞는 그릇들을 주문제작하였던 점도 조선의 그릇에서 나아가 일본인의 문화로 재창조된 것이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화려하고 귀족적인 청자의 그림이나 문양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웁고 서민적인 미를 나타나는 반면에 가장 흔하고 서민적이고 화려함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조선의 사발은 일본 권력층의 선호로 인해 가장 귀하고 중요하게 취급받으니 물건의 업도 아이러니하고 우리들의 눈으로 알 수 없다.

 

  까칠까칠한 표면에 굽은 회돌이나 감꼭지가 달리고 못으로 파내어 돌린 자국이나 흙의 색깔이 드러나거나 유약을 바르지 않은 굽 등 그릇이 만들어지고 표현되는 방법도 다양하였다. 물론 이는 수요층의 다양한 미의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제작자의 미감과 능력이 발휘된 것이기도 하다. 굽의 형태도 높은 굽, 보통 굽, 도린 굽, 십자형 굽 등 다양하게 제작되었고 용도 또한 실생활용과 제기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일본인의 수요와 미감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도자사의 중요한 공백이 다시 메워지고 다시 연구되고 재현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보면 문화란 자연적으로 서로 퍼지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속성을 유지하기도 하고 단절되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된다는 점이다. 현재의 국가적 경계나 그 당시의 민족적 경계를 떠나 예술품과 미감은 세계보편적인 것이며 그것을 누군가가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작자나 제작국가가 독점할 수도 없고 수요자나 수요국가가 독점할 수 없음도 명약관화하다. 인연에 의해 주어진 순간에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음미하는 자가 진정한 주인의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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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컬렉션,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엮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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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쟁은 그 지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 군사적 이익 등을 노린 사회적 행위다. 일제강점기의 제국주의 역사에서 그것은 문화재의 찬탈로 나타났다. 영국의 내셔널갤러리, 대영제국박물관, 빅토리아앤 앨버트 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의 수많은 유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 역시 침략한 한국과 중국, 동남아의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그 많은 문화재가 앞으로 수많은 문화재반환 문제로 시끄러울 것이지만 반환이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생각처럼 그리 쉽지는 않다. 이미 법으로는 제국주의 역사 속에 찬탈한 문화재에 대해서는 시효적으로 소급되지 않게 되므로 양심적 소장자나 기관에 의한 자발적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문화재반환이라는 역사단추바로끼워맞추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단순히 니네들이 우리나라를 강제합병하고 약탈해간 문화재니 모두 반환하라라는 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정당하게 우리나라에서 수출된 물건들도 있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당한 상거래로 구입한 물건들도 있고 한국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사재를 털어 소장하고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법으로 찬탈한 문화재라 하더라도 2차, 3차 거래를 통해 합법적으로 구매한 현재 소장자가 있는 경우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게 된다. 나아가 정황적으로 고적조사사업을 명목으로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이라 하더라도 정황만으로는 반환을 주장하기 어렵다. 정확한 증거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 유물의 반환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기에는 현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 일본에 간 우리 문화재 중 그 규모나 중요성 가치면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손꼽히는 것이 오구라 컬렉션이다. 그것은 오구라 다케노스케(1870~1964)가 한국에서 전기사업을 하면서 그 돈으로 모은 엄청난 규모의 한국문화재를 말한다. 오구라는 한국 문화재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그 우수성과 예술성을 일찍 알아봤다. 또한 대구에 전기사업본부를 두고 경주와 경남지역의 문화재발굴 현장에 대한 정보와 전기사업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많은 한국문화재를 구입했다. 애초에 그는 한국과 일본의 유물사를 통해 한일고대사를 연구할 목적으로 유물을 구입하였으나 소장과정 중에 한국문화재에 더욱 애착과 욕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가 이렇게 가치있고 중요한 한국문화재를 많이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총독부와 고적조사사업이라고 하는 한국문화재 수탈계획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재벌들을 보라. 돈이 많다고 해서 누구나가 문화재를 구입하고 소장하고 관리하지는 않는다. 삼성처럼 비자금이나 재투자목적으로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경우라 아니라면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나 호림 윤장섭 사장님처럼 한국 민족과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소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오구라는 한국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욕심과 뒤섞여 있었지만  애정과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도굴해온 물건이라도 물건이 가치있으면 값을 매우 높게 쳐 주었으며 비록 돈이 되지 않더라도 웃돈을 들여 보관 수리하며 자신만의 기준으로 한국문화재를 시대별로 선별해가며 전체적인 소장을 하게 된 것이 바로 그러하다.

 

  오구라 컬렉션이 제대로 관리된 것은 그의 생전까지이다. 오구라 컬렉션 보존위원회가 준비되고 그 위원회에 의해 일정한 시간동안 관리가 되었지만 그의 사후 유물추가구입은 없어지고 아버지의 유물을 억지로 관리하던 아들은 결국 1981는 도쿄국립박물관에 오구라컬렉션을 기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본은 이것이 한일간 문화재반환에서 빈번히 다루어지고 한국언론의 조명을 많이 받게 되자 '한국'유물전시실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동양'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 오구라 컬렉션 중에는 다수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문화재를 약탈한 사실보다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한국문화재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인식과 관방의 인식이 낮은데 더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중국은 시진핑 정부 들어와서 문화와 문화재를 중요시하는 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며 우리 고대사 유적들을 자국의 변방문화로 유네스코에 등록하는 등의 문화재 보존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 역시 제국주의 시대부터 문화재와 예술품에 대한 높은 안목으로 그 가치를 부여해왔고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세계의 중요 미술품 시장의 주요 메카로 기능해왔다. 우리나라 관방은 자신들의 좁은 관점에서 벗어난 기물에 대해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한편 일본과 중국에서는 빠르게 한국이 내다버린 문화재에 대한 자국문화재로의 등록 및 등재와 보호에 나서고 있다. 단순히 소장자의 애국심과 민족심에 기대어 무상기증이나 유도하고 해외문화재는 무상반환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문화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문화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홍보하고 문화재에 대한 예산 배정을 많이 해서 좀 더 폭넓고 예술사의 공백을 메우는 다양한 유물 유적의 조사를 통해 잃어버린 우리 문화재의 복원을 통해 잃어버린 조상의 예술성과 정신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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