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한형조 지음 / 여시아문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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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나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붙잡고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우둔하게도 나는 말이 의미하는 바에 휘둘리고 있었다. 자정을 넘겨 아득해진 어느 시간인가? 내 마음을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생김과 사멸함이 없는 곳, 시작과 끝이 없는 곳, 시간의 전후가 없는 곳, 절대적인 궁극의 세계는 내가 아무리 밖을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곳은 바로 나의 마음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의 절대적 공간 속에서만 그것을 찾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언어를 통해 그 마음 속의 절대적 공간을 찾아보려 하는 책이다. 그 절대적 공간이 언어로 과연 표현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방편은 된다. 즉 언어를 통해 언어의 의미가 끝나는 그 지점까지 우리를 인도할 수는 있는 것이다. 선을 언어로서 풀어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 이 책을 통해 나는 '너머'의 소식을 접했는가? 그렇지 못하다. 다만, 이 책을 따라 물가에 나온 당나귀와 같을 따름이다. 물가에 왔으니 이젠 물을 먹어야 할 터인데... 그것이 백척의 장대끝에서 한 걸음 내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아~

하지만 낙담하기엔 이르다. 터무니없이 기뻐할 일도 아니지만 물가에 서 있지 않은가? 내가 물가에 서 있다는 것을 안다. 물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물맛을 보려고 한다. 버둥친다. 맛보면 그저 물맛은 물맛일 뿐이데......하지만 나는 또한 백척의 장대끝에 서있다.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절벽에서 한 걸음 내 디딜려고 한다. 알지 못하면 백길 천길 낭떠러지요, 알면 그저 풀밭일 것인데... 지금 알지 못하면 내 인생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다.

너머의 소식은 '없다'이기도 하고 '뜰 앞의 잣나무'이기도 하다. '마른 똥막대기'이며 '마음'이며 '오직 모를 뿐'이며 '평상심'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기도 하며, 또 그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인가? 8만 4천의 무명이 한 점으로 모이는 경험들이 나에게서 천천히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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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으로 얻는 깨달음 - 달라이 라마 명상록
텐진 갸초 지음, 지창영 옮김 / 가림출판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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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와의 4일간의 대화로 엮어진 이 책은 우리들에게 인내와 관용을 기르는 방법에 대한 명상법을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쁜 말을 할 때 우리는 분노하기도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분노와 미움의 이유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내와 관용이란 무엇인가? 이미 온전한 이 우주에 내가 스스로 업을 짓지 않기 위함이다. 이러한 인내와 관용만이 이 지구에서 우리 인류에게 닥쳐온 위기를 해결하고 우리 인생이 가진 의미를 온전히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인내와 관용의 부족이 가져온 수많은 업들, 현상적으로는 세계의 전쟁과 살륙, 마음으로는 3독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마음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절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내와 관용은 타인의 고통과 번뇌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마음 그리고 자비의 마음으로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가는 것일수도 있으며, 현상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사건 사물들이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의 수행을 이야기할 때 이 두 가지의 방법이 모두 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고통에 빠진 중생들의 삶을 연민하고 그 고통에 대한 자비심을 기르는 것은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보리심과 자비심을 위해 인내와 관용의 마음을 마음에서 키워내는 것은 중생의 행과 업이 사실은 그들 자체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는 깨달음을 아는 것과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상의 실재를 이해하고 공을 깨닫게 되는 것에만 집착하여 자신의 깨달음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삶은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것이 된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다름이 없다라는 말도 이것과 상통되는 것이 아닐까? 인내와 관용 그리고 실재에 대한 깨달음 그것은 다름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이 마음이란 무엇일까?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나의 오감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서도 무감각하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그 마음을 놓치지 않는 것... 바로 명상으로 얻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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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재를 털면 - 숭산스님의 가르침
숭산스님 지음, 스티븐 미첼 엮음, 최윤정 옮김 / 여시아문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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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으며 이 책에 담긴 선의 의미를 마음으로 점검해본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마음이 어떠하였는가? 그 마음의 상태에서 스스로 말의 의미를 넘어 가르치는 바가 어떠하였는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 그 의미에 대한 깨우침이 없다면 읽어도 읽지 않은 것이다.

숭산스님의 '오직 모를 뿐'이란 말을 내가 받아들인 마음의 소리로 말한다면 '악, 매워'이다. 말에 매이지 않고 그것이 마음 속에서 전달되어지는 뜻을 스스로 갖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이 물음들에 대한 답...개구즉착. 내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른다. 이것은 고양이 공안에 대한 나의 답이다. 부처님전에 재를 털면 '차나 한잔 드시고 가시지요'한다.

난 이 책을 다시 읽을 것이다.
난 이 책을 다시 읽을 것이다.

오줌보가 저려 온다.
일어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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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김재웅 / 형설출판사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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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순간 올라오는 수많은 생각들로 나의 일상은 혼란스럽다. 그 생각들 올라와서 순간순간 없어진다면 마음의 고통없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어떤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주만큼 커져서 나를 휘어잡기도 한다.

몸이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탐, 진. 치가 참 많다. 그러고보면 내 육신이 탐, 진, 치로 뭉쳐진 업장덩어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생각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없어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생각들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생각들도 있다. 순간 바치면 없어졌다가도 느닷없이 다시 올라오는 생각들...업들... 중간덩어리의 생각들은 바치고 또 바치면 사르르 녹아내린다. 미운 사람 얼굴들 떠오르면 바치고 또 바치고 그러면 당분간 사그라든다... 않좋았던 일들도 생각들도 바치고 바치면 또 없어진다.

하지만 몸을 바탕으로 하는 오욕들, 무엇보다 자아만큼 질기고 커다란 장벽도 없다. 가족관계,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생각들도 아직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벽이지만 이놈의 '나'라는 생각은 아직 내가 풀어내기란 막막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낙수가 바위를 쪼개기도 하듯.. 그렇게 순간순간 올라오는 생각들 바치는 방법이 있으니... 면면히 끊임없이 순간순간 깊은 마음 내어 바치는 것. 그러면서 내 마음 지향하는 바 놓치지 않는 것. 그러면 머무는 바 없이 마음 낼 날도 분명 있으리라. 그것이 다음 생, 아니 그 다음 생일지라도...

그런데 바치는 곳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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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라마가 전하는 행복에 이르는 길 붓다, 그 삶과 사상 3
라마 소파 린포체 지음, 주민황 옮김 / 무우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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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 어려움을 제대로 모르는 탓인지 '오직 수행뿐'이라는 대답이 마음 속에서 울린다. 이 책은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가 되면 행과 불행에 대한 개념조차 사라져버린다. 티베트의 라마가 전하는 행복의 길은 우리들에게 오로지 수행하라고 가르칠 따름이다.

수행에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선 단계적 수행법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초급의 수행자는 생의 집착을 끊기 위해 악업을 피하고 선행을 쌓으려고 하는 자를 말한다. 중급의 수행자는 업과 번뇌로 만들어지는 중생들이 사는 윤회전체가 고통임을 알고 윤회와 그로 인한 업과 번뇌의 굴레로부터 해탈하려고 하는 자이다. 상급의 수행자는 다른 중생들을 돕기 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타심을 기르는 자이다.

아마 평범한 사람들이 수행의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초급과 중급의 수행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지향을 단계에 따라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마음씀은 늘 대승적인 곳으로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늘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생명들에게 대한 사랑과 자비가 필요하다. 사랑하기 힘든 대상에게는 연민과 자비가 필요하다. 늘 타인에게 도움이 되려고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실적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가도록 바라는 마음씀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씀에도 늘 탐.진.취의 3독은 올라온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씀에도 늘 회향이 필요한 것이다. 이타심의 마음을 내는 그 마음조차도 없음의 공성을 알아차리는 깨달음이 나의 수행이 진전된다는 생각없이 나를 본래의 존재에 가까이 데려다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바꾸어내는 생각, 그것은 늘 순간에 깨어있어야만 하며 의지와 마음씀이 필요한 것이며 그래서 수행할 것인가 하는 순간순간의 물음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다시 '수행을 할 수 있는가?'하고 스스로에게 말없는 물음을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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