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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 유일의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말을 바꾸어, 일본 관련 도서가 좀처럼 맥을 못추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 역시 맥을 못추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을 알기 위한 요량으로 서점을 방문한 사람이 만나게 되는 책은 무척 제한되어 있다.

일본은 없다느니 있다느니 하는 따위의 책, 일본 대중문화의 현실을 소개하는 책, 교과서 투 또는 '알기 쉬운' 류의 일본사 도서, 일본 천황가의 조상이 한반도인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 또는 그와 비슷한 내용의 책, 일제의 만행에 대한 책.... .

개인적인 독서 체험이지만, 서구인들이 뇌리 속에 일본 문화의 본질이 선(Zen)이라는 인식이 뿌리박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스즈키 다이세쓰의 저서의 경우, 국내에는 그가 집필한 일본 문화 관련 저작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유명한 볼링겐 시리즈의 하나로 현재까지도 판을 거듭하며 출간되고 있는 Zen and Japanese Culture 같은 책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세계 일본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전문 연구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문학 분야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일본 고전 문학 작품을 만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결국 변죽만 울리는 셈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당위와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현실 사이의 간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혹시 일본의 고전이나 수준 높은 일본 관련 도서를 출간하는데 부담을 느끼는 출판사 관계자 분이 계시다면,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의 출판교류프로그램(http://www.jpf.go.jp/e/about/program/publi.html)을 자세히 검토해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자세한 조건은 직접 검토하면 알겠지만, 인쇄 및 제본비, 종이값 등 도서 제작 총 비용의 50%(학술 도서)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번역서의 경우에는 학술 도서 60%, 일반 도서 40% 이며, 교류기금 자체 추천 목록에 수록되어 있는 책을 번역할 경우에는 80%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목록은 일본 문화원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는 일본의 지원을 받는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어 지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올해부터는 그렇지 않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라 하겠지만, 우리 나라의 일본학 연구 수준과 읽을만한 일본 관련 도서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현실이 악순환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서울대학교가 '드디어' 학부 또는 대학원에 일본학 과정을 개설하기로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만시지탄이라는 말이 이처럼 어울리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민음사에서 1997년부터 '현대일본의 지성' 시리즈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필두로 출발하기도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뒤로 소식이 뜸하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판단이야 당연히 출판사의 소관 사항이니 무어라 할말은 없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심정이 드는 것인 어쩔 수 없다. 다행히 이산 출판사에서 수준 높은 일본 관련 도서 내지는 일본 필자의 도서가 꾸준히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 출판계에서 일본 관련 도서의 풍경은 아직까지도 삭막하기만 하다.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새로운 세기 우리 나라 출판계의 중요한 과제들 가운데 하나가 일본을 '제대로' 소개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특히 일본의 고전을 제대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 물론 언제나 어렵기만 한 출판계 자체 역량만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다. 국내의 관련 학계가 출판사의 일본 관련 기획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한일 문화교류가 온통 일본 대중오락상품 개방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대중오락상품의 교류도 중요하다. 현재의 일본 대중들이 느끼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감수성의 세계에 대한 우리 나라 일반인들의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역사의 지층을 이루는 보다 깊고 다양하고 풍부한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현재의 정부가 정말로 지식정보화 사회의 실현을 화두로 삼고 있다면, 일본 관련 지식정보의 편식에 대한 정책적인 고려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출처-http://www.kung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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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는 과학'임을 내세우는 어느 침대 전문 업체의 광고 멘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출판기획은 과학(이 되어야 한다)'이라는 일종의 격률이 부각된 적이 있었다. '출판기획은 과학'이라는 말은 출판기획이 그 동안 과학이 아니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보통 '감'(感)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느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뜬다, 뜨지 못한다' 따위를 판별하는 일종의 영안(靈眼) 같은 것.

'출판기획은 과학'이라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예상 독자층 분석과 이에 따른 수요 예측, 사회문화적 흐름에 대한 충분한 고려(시의성 문제), 이미 나와 있는 비슷한 성격의 책에 대한 검토, 비슷한 종류의 해외 도서가 현지 도서 시장에서 어느 정도 반응이 있는지 검토, 출간 시기에 대한 고려, 제목의 적절성, 최근의 일반적인 독서 추세, 기타 다양한 사항을 체계적,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일을 뜻한다 하겠다. 요컨대, 도서 시장 내외적 환경의 불확실성을 줄여보려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감이란? 감은 결국 앞서 언급한 과학으로서의 출판기획의 최정점을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요컨대, 출판기획에서 과학과 감을 엄격히 분리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아는 어느 성실한 번역가/출판기획자 한 분은, 어느 출판사 대표에게 나름의 기획안을 말씀드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고마운 충고를 대답으로 들었다고 한다. "좋은 말 할 때 충고하는데, 기획 생각 집어치우고, 좋은 번역자나 될 생각하라." 그런 말씀을 하신 분 생각으로는, 출판기획이란 감각이 살아 있을 때까지의 한 철 장사일 뿐이며, 반면에 제대로 된 번역자가 되면 그것은 평생 장사인 셈이다. 출판계에서 쌓은 오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전도유망한 출판인의 미래를 걱정해주시는 취지의 말씀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 분의 그런 배려에 대한 고마움과는 별도로, 기획이란 책 장사꾼의 '감'이고, 그런 것은 아무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기획 및 기획자에 대한 그 분의 생각에는 분명 문제가 많다. 좋은 번역자는 꾸준히 노력하면 되지만, 뛰어난 기획자는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동물적인 '감'을 타고나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그런지, 출판기획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제법 성공적인 기획자로 평가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동물적 '감'이 얼마나 정확한지 말하기를 좋아하는 듯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뜬다, 뜨지 못한다'는 판단이라 하겠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역술인들의 점괘에도 가깝고, KBS 대하 역사드라마 왕건에서 궁예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데 사용한다는 관심법에도 가깝다.

앞서 언급했던 출판기획자 분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렇다. "물론, 출판기획에서 '감'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출판의 색깔을 좌우하는 것일 뿐, 궁극적으로 책을 만드는 일의 모든 것은 아니다. 책을 만드는 일에는 '감'외에 '궁리(窮理)'가 있어야 한다. '된다, 안된다' 따위의 판단으로서의 '감'보다, '이런 쪽으로, 혹은 저런 쪽으로'라는 방향으로서의 '감'이어야 하고, 거기에 덧붙여 '어떻게 되게 만들고, 어떻게 살릴 것인가'하는 '궁리'로의 작업이 뒤따라야, 책을 온전히 만드는 일의 과정이고 그것이 기획의 궁극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컨대 번역서의 경우, 어떤 책 한 권을 내느냐에 대한 결정으로 모든 것을 거는 기획(?)에는 문제가 있다. 관건은 어떻게 책에 더 많은 생명력을 부여할 것인가, 제아무리 잘나지 못하고 그냥 천덕꾸러기 신세일 것 같은 한 권의 번역 원고일지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운동하는 생명이고, 그 운동성의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 주느냐에 따라 생명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운동성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것이 기획의 참된 자리이고, 그러므로 기획에는  '감'과 '궁리'라는 양날개가 필요하다."

이상과 같은 말씀에 나 또한 전적으로 동의한다. 동물적 감도 지난한 궁리의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면 결코 생기지 않는다.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감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지리산에서 수십년 도를 닦고...."를 외치는 떠돌이 약장수의 거짓 내공과 비슷할 것이다. 출판기획에서 관심법 따위는 없다.

발췌- http://www.kung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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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냥꾼들이 있다. 그들의 사냥터는 실로 전방위적이다. 요컨대 서점은 그들이 활동하는 사냥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서점은 그들에게, 사냥감을 미리 풀어 놓은 뒤 사냥꾼들에게 돈을 받고 운영하는 곳 정도에 불과하다. 무척 편하기는 하지만, 사냥감을 발견하고 손에 넣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떨어진다.

책사냥꾼이 보통의 사냥꾼들과 다른 점은, 사실상 일상 생활의 모든 장면들 속에서 사냥감을 물색하는 안테나를 접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신문을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는 물론이거니와, 오랜만에 방문한 친구집 서가라던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서점이라던가,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라던가, 버리지 않고 쌓아 둔 몇 년 전 신문더미라던가..... .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냥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이 필수 조건이라 하겠다. 일단 사냥감을 발견하고 나면, 책사냥꾼의 몸과 마음은 바빠진다. 우선 과연 그 사냥감이 사냥에 나설만한 가치가 있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서점이 주요 무대라면, 사냥감을 직접 만져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다양한 체널을 동원해야 한다.

우선 그 사냥감을 손에 넣은 적이 있는 주위 사람에게 직접 물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사냥 일지('서평'이라는 이름의)를 찾아 볼 수도 있다. 다른 나라 말로 집필된 사냥감이라면, 인터넷을 통해 저자, 서평, 인터넷 서점에 올라 온 다른 사냥꾼들의 일지, 기타 등등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판단해야 한다. 도서관 이용이 가능하다면, 각종 도서관을 방문하여(직접 방문이던, 인터넷을 통한 방문이던) 그 책의 소장 여부를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도서관 이용의 경우, 치사한 사냥 방법이기는 하지만 불법 복사 및 제본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사냥감이 천연기념물에 해당하는 경우,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구할길이 없고 오직 한 군데 도서관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경우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해도 책사냥꾼의 양심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보통이다.

책사냥꾼이 보여주는 이런 종류의 양심 몰수가 과연 윤리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항인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불법 제본, 그러니까 박제로 만들어 획득한 사냥감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서 쾌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책이라는 사냥감은 그 속살뿐만 아니라, 가죽과 털도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사냥당한 적이 있는 사냥감을 모아 놓고 파는 곳, 그러니까 이른바 중고서점이라는 사냥터는 각별한 사냥의 재미를 준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일반 서점과는 달리, 우연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사냥감이 갑자기 등장할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 그러니까 중고서점은 일종의 밀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경우에 준비된 실탄(돈)이 없으면 곤란하다. 실탄을 장전하기 위해 뜸을 들이는 동안, 누군가 다른 사냥꾼이 선수를 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정한 프로 책사냥꾼이라면, 어디를 가든지 사냥을 위한 여분의 실탄을 장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냥에 성공한 다음 할 일은 역시 사냥감의 속살을 맛보는 일인데, 이 단계에 불충실한 사냥꾼들도 적지 않다. 요컨대 서가에 진열해 놓기만 하고 좀처럼 그 속살의 맛을 보지 않는 경우라 하겠는데, 나 역시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언젠가는 맛보리라 생각하며(마치 뱀술, 과일주 등을 큰 유리병에 담아 놓고 바라보는 애주가의 눈길과 비슷) 흐뭇하게 바라보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지만, 역시 책이라는 사냥감은 직접 맛을 보아야 제격이다.

책사냥꾼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사냥감을 직접 만들어 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없지 않다. 요컨대 다른 사냥꾼들의 후각을 자극할만한 사냥감을 만들어 풀어 놓고 싶다는 생각. 일본의 어느 저명한 동양학자(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책을 소개하고자 마음먹기도 했었는데.)의 책에 대한 신조랄까 그런 것이, "책을 구입한다. 구입하면 반드시 읽는다, 읽고 나면 반드시 쓴다"였다는데, 가히 책사냥꾼의 입신의 경지라 할만하다.

요컨대 책을 사고, 그것을 읽고, 읽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고, 그렇게 쓴 글이 모이면 책으로 출간하여 팔고....뭐 이런 순환 과정인 셈이다. 여하튼, 책사냥이라는 일은 강박 관념에 가까운 집착이 아니면 성공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서, 갑자기 읽고 싶은 생각이 든 책이 있는데, 분명히 서가 어느 곳에 있기는 있는데 정확히 어느 곳에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자신의 서가 전체를 여러 번 살펴 본 적이 있는 사람, 그러나 결국 찾을 수 없어서 잠못 이룬적이 있는 사람. 오래 전에 절판되었으나 반드시 구하고 싶은 책이 있는데, 도무지 구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아 괴로워한 적이 있는 사람, 한 달 생활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우연히 만난 훌륭한 사냥감에 주저 없이 투자한 사람, 실탄 부족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사냥감을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그러니까 훔치는 일)하고 싶다는 치명적인 유혹에 시달려본 적이 있는 사람, 그런 등속의 사람들.

탐미주의 또는 유미주의라는 말도 있지만, 탐서주의 또는 유서주의라는 말도 가능할지 모른다. 탐미주의자의 의식 상태를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한다면, 탐서주의자의 의식 상태 역시 그러할 것이다. 심하게 말한다면 "책의 노예"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스스로 노예가 되고 싶어 하는 상태, 그러니까 일종의 약물 중독과 비슷한 상태라는 점이다.

문자의 금단 현상,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문도 들어오지 않고 변변한 책이나 책방 하나 없는 산골에서 사흘 이상을 견디지 못하는, 일종의 문명병이라고 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사실상 치유 불능에 가까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내릴 수 있는 처방 아닌 처방은 아마도,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한 시한부 말기 암환자" 가족에게 의사가 건네는 이런 말밖에 없을 것 같다. "집에 모시고 가셔서 드시고 싶은 것 마음껏 드시게 하십시오."

발췌-http://www.kung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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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화두"에 이르기까지, 작가 최인훈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상당수가 넓은 의미에서 서재인이다. 작가 본인 역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서재인이라는 말이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전적인 의미로도 서재인은 '사회 현실과는 동떨어져 서재에만 박혀 있는 학자나 문필가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책상물림의 지식인을 의미하는 셈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책과 세상 사이의 적절한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는 경우인지도 모른다. 요즈음 자주 거론되는 이른바 현장과 강단의 거리, 현실과 학문의 거리, 세상과 교실의 거리, 그런 대비 속에서 강단, 학문, 교실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부정적인 뉘앙스의 서재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결코 가당치 않다. '싸잡아' 비판한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과 세상의 거리가 도대체 얼마나 되어야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지, 단언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서 고대 문헌의 수집, 정리, 고증에만 일로 매진하고 있는 학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런 학자의 경우 전형적인 서재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고 그가 책과 세상 사이의 적절한 거리 조절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들 것이다.

이집트의 국가 원수 낫세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집트의 어느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고고학자가 낫세르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고 하던가. "낫세르라!.....그게 누구더라.....아! 제가 언젠가 읽은 고대 문헌에 그것과 비슷한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게 누구더라.....왕이 총애하던 대신이었던가.....여하튼, 수천 년 전에 죽은 그 사람에 대해서 왜 질문하시는지?"

이런 종류의 '거리'라면 차라리 그것은 '삶의 의미 연관 구조'가 일상인들과는 전혀 다른, 탈속(脫俗)의 범주에 속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동일한 차원 위의 거리가 아니라, 아예 차원 자체가 다른, 그러니까 애초부터 '거리' 자체를 운운할 수 없는 그런 '거리'. 여하튼 이런 경우는 극단적인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서재인의 의미를 보다 긍정적으로 살려 본다면, 현실의 질서를 언어로 조감, 평가, 재구성, 기술하거나, 가능성에 불과한 현실을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요컨대 엄연히 현실의 일부이면서도 현실과 완전히 동화된 존재 위상을 지닌다고 보기는 힘든 물건, 바로 책이라는 일종의 메타 질서에 상대적으로 몰두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책이라는 것이 반드시 '글자가 인쇄되어 있는 종이 묶음'일 필요는 없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차라리 '기호' 또는 '상징'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이런 의미의 서재인들은 현실 또는 사물에 직접적으로 참여 또는 개입하기 보다는, 그 기호 또는 상징을 조작, 운영, 재구성,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러한 재정의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급격한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이른바 메타 질서라는 말 자체가 모호한 탓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메타 질서란 대략 언어의 질서, 기호의 질서, 상징의 질서 등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러한 메타 질서를 보존 또는 전달하는 매체는 주로 종이 묶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가상 공간이라 불리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확답하기 힘든 질문들을 발생시킨다. 가상 공간의 질서가 구체적인 질감을 지닌 현실의 질서와 비교해서 어떤 종류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위상을 지닐 수 있는지, 그런 검토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가상 공간의 질서는 언어, 기호, 상징 등의 질서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그 나름의 독특한 위상을 지니는 것 같다.

어쩌면 21세기의 서재인은 하이퍼 텍스트의 세계를 주유하면서 가상 공간 위에서 뭇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과 정보를 가늠하는데 여념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책장이 줄지어 자리한 서재가 아니라, PC 또는 그밖의 정보 통신 기기, 바로 그것이 21세기의 서재가 될지도 모른다. (이미 지식의 생산 및 유통의 상당 부분이 정보 통신 기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서재를 이루는 기본 재료가 목재에서 칩으로 바뀐다 해도, 변해서는 곤란한 서재인의 특성이 하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현실과의 근본적인 불화" 바로 그것이다. 가상 공간을 주유하면서도 가상 공간과의 '근본적인 불화' 또는 긴장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21세기 서재인의 중요한 미덕 또는 기준일지도 모른다.

사실 상징 또는 기호를 조작, 운용하여 나름의 가치(경제적, 미적 가치 등등) 창출하는 직종은 현재에도 무척 다양하다. 소프트웨어 개발자, 주식 및 선물 거래인, 컨설턴트, 영화 감독, 디자이너 등등. 더구나 군사 분야와 의학 분야의 경우도, 총을 들고 직접 싸우는 전통적인 전투 방식에서 디스플레이에 나타난 목표물 표시를 확인하여 버튼을 누르는 방식으로, 직접 수술 메스를 들이대는 방식에서 마이크로 로봇이나 기타 첨단 의료 기기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추세임을 고려한다면, 역시 상징 또는 기호 조작인에 접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과의 근본적인 불화'라는 대목에 이르고 나면, 그러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재인은 무척 드물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기호에 대한 기호, 상징에 대한 상징, 가치에 대한 가치를 총체적으로 반성하는 사람은 드물다. 결국 기호와 상징의 질서의 꼭지점 같은 곳에 자신의 시좌(視座)를 마련하고, 그러한 질서가 재현하는 현실을 메타 크리틱하는 일이 21세기 서재인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하겠는데, 문제는 역시 "꼭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다.

구체성과 일상의 질감을 거치지 않은 '꼭지점'은, '지구를 들 수 있는 지렛대'만큼이나 공허하다. 구체성과 일상의 질감이란 결국 '삶의 세계', 그러니까 단순히 '생각하는 나'(데카르트), '말하는 나'(이른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 이후 서양 철학의 대체적 흐름)가 아니라, '타인들과 대화하는 우리로서의 나'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 같다. 결국 책 바깥의 공동체적 삶의 원체험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 셈이다. '책'의 안과 바깥, '삶의 세계'와 '상징 및 기호의 세계'에 골고루 몸담는 일이야말로, 이 글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서재인의 사전적인 정의를 거부하고 싶은 미래의 서재인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플라톤을 '읽는 것'만으로 동굴에서 빠져 나와 찬연한 빛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 플라톤을 '읽는 것'만으로 동굴 속에서 함께 사슬에 묶여 있던 이들에게 '너희들은 지금 동굴 속에 갇혀 사슬에 묶여 있노라'고 외칠 수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은 이른바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들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책의 동굴' 속에서 '문자의 사슬'에 묶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함정이다.

자료출처-http://www.kung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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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출판 관련 단체에서 행한 독자 대상 설문 조사에 따르면, 독자들은 가장 필요한 분야의 도서로 환경 문제 관련 도서를 꼽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요하다는 인식과 지갑을 여는 손길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어서, 환경 문제 관련 도서는 여간 해서는 팔리지 않는다. 사실 환경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의 일이다. 개발 논리에 밀려 방치되어 있던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전반적인 사회 민주화 분위기와 함께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많은 환경 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현재 시민 운동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환경 문제 관련 도서가 팔리지 않는다는 불패의 신화는 좀처럼 깨질 줄 모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 잇슈 등을 대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전반적인 태도도 하나의 이유인 것 같다. 중요한 문제나 잇슈가 있을 경우, 그것의 근본적인 원인과, 현실, 그리고 대안을 조리 있게 규명, 제시하는 이야기(담론이라고 그럴 듯하게 부르기도 하는)에 귀기울이는 자세가 부족한 것 같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과 동전의 양면으로, 이른바 냄비근성이라는 자조적인 말로도 불리는 태도, 다시 말해서 그 일 아니면 당장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이 열을 내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조용해지는 태도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사실은 얼마 전에 환경 도서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시는 분과 술자리를 가졌다. 지조와 고집이라는 말이 꼭 어울리는 분이기도 한데, 우리 나라에서 환경 도서는 더 이상 아무런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는 비관적인 결론을 말씀하셨다. 파괴되어 가는 환경 실태를 자세히 정리, 보고하는 자료집 성격의 책은 이제 인터넷의 확산으로 자료로서의 가치를 잃었다고 한다. 요컨대 웬만한 환경 관련 자료는 인터넷을 통해 입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통계 자료와 조사 보고에 기초한 자세한 현실 분석 및 그에 이어지는 대안 제시를 기본 형식으로 하는 도서에는 우리 나라 독자들이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안 그래도 사회과학의 시대가 가뭇없이 실종되어 버린 분위기 속에서, 사회과학적 분석을 주조로 하는 환경 도서가 살아 남을 길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것.

결국 일종의 Hard Book(Hard Science와 같은 맥락에서)으로서의 환경 도서의 자리는 없어졌고, 넓은 의미의 환경 도서,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감수성에 기반을 둔 말랑말랑한 환경 도서만이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독자의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환경 도서의 자리가 사라지고, 독자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환경 도서만 가능한 상황이다. 추세가 그렇다면 추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출판계의 입장이겠지만, 머리가 사라진 가슴만으로 환경 문제를 대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무척 서글픈 현실이라 하겠다. 그 서글픔 때문이었을까? 그 분과 나의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자료출처-http://www.kung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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