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서 "화두"에 이르기까지, 작가 최인훈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상당수가 넓은 의미에서 서재인이다. 작가 본인 역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서재인이라는 말이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전적인 의미로도 서재인은 '사회 현실과는 동떨어져 서재에만 박혀 있는 학자나 문필가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책상물림의 지식인을 의미하는 셈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책과 세상 사이의 적절한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는 경우인지도 모른다. 요즈음 자주 거론되는 이른바 현장과 강단의 거리, 현실과 학문의 거리, 세상과 교실의 거리, 그런 대비 속에서 강단, 학문, 교실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부정적인 뉘앙스의 서재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결코 가당치 않다. '싸잡아' 비판한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과 세상의 거리가 도대체 얼마나 되어야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지, 단언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서 고대 문헌의 수집, 정리, 고증에만 일로 매진하고 있는 학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런 학자의 경우 전형적인 서재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고 그가 책과 세상 사이의 적절한 거리 조절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들 것이다.
이집트의 국가 원수 낫세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집트의 어느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고고학자가 낫세르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고 하던가. "낫세르라!.....그게 누구더라.....아! 제가 언젠가 읽은 고대 문헌에 그것과 비슷한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게 누구더라.....왕이 총애하던 대신이었던가.....여하튼, 수천 년 전에 죽은 그 사람에 대해서 왜 질문하시는지?"
이런 종류의 '거리'라면 차라리 그것은 '삶의 의미 연관 구조'가 일상인들과는 전혀 다른, 탈속(脫俗)의 범주에 속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동일한 차원 위의 거리가 아니라, 아예 차원 자체가 다른, 그러니까 애초부터 '거리' 자체를 운운할 수 없는 그런 '거리'. 여하튼 이런 경우는 극단적인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서재인의 의미를 보다 긍정적으로 살려 본다면, 현실의 질서를 언어로 조감, 평가, 재구성, 기술하거나, 가능성에 불과한 현실을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요컨대 엄연히 현실의 일부이면서도 현실과 완전히 동화된 존재 위상을 지닌다고 보기는 힘든 물건, 바로 책이라는 일종의 메타 질서에 상대적으로 몰두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책이라는 것이 반드시 '글자가 인쇄되어 있는 종이 묶음'일 필요는 없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차라리 '기호' 또는 '상징'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이런 의미의 서재인들은 현실 또는 사물에 직접적으로 참여 또는 개입하기 보다는, 그 기호 또는 상징을 조작, 운영, 재구성,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러한 재정의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급격한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이른바 메타 질서라는 말 자체가 모호한 탓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메타 질서란 대략 언어의 질서, 기호의 질서, 상징의 질서 등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러한 메타 질서를 보존 또는 전달하는 매체는 주로 종이 묶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가상 공간이라 불리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확답하기 힘든 질문들을 발생시킨다. 가상 공간의 질서가 구체적인 질감을 지닌 현실의 질서와 비교해서 어떤 종류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위상을 지닐 수 있는지, 그런 검토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가상 공간의 질서는 언어, 기호, 상징 등의 질서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그 나름의 독특한 위상을 지니는 것 같다.
어쩌면 21세기의 서재인은 하이퍼 텍스트의 세계를 주유하면서 가상 공간 위에서 뭇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과 정보를 가늠하는데 여념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책장이 줄지어 자리한 서재가 아니라, PC 또는 그밖의 정보 통신 기기, 바로 그것이 21세기의 서재가 될지도 모른다. (이미 지식의 생산 및 유통의 상당 부분이 정보 통신 기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서재를 이루는 기본 재료가 목재에서 칩으로 바뀐다 해도, 변해서는 곤란한 서재인의 특성이 하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현실과의 근본적인 불화" 바로 그것이다. 가상 공간을 주유하면서도 가상 공간과의 '근본적인 불화' 또는 긴장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21세기 서재인의 중요한 미덕 또는 기준일지도 모른다.
사실 상징 또는 기호를 조작, 운용하여 나름의 가치(경제적, 미적 가치 등등) 창출하는 직종은 현재에도 무척 다양하다. 소프트웨어 개발자, 주식 및 선물 거래인, 컨설턴트, 영화 감독, 디자이너 등등. 더구나 군사 분야와 의학 분야의 경우도, 총을 들고 직접 싸우는 전통적인 전투 방식에서 디스플레이에 나타난 목표물 표시를 확인하여 버튼을 누르는 방식으로, 직접 수술 메스를 들이대는 방식에서 마이크로 로봇이나 기타 첨단 의료 기기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추세임을 고려한다면, 역시 상징 또는 기호 조작인에 접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과의 근본적인 불화'라는 대목에 이르고 나면, 그러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재인은 무척 드물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기호에 대한 기호, 상징에 대한 상징, 가치에 대한 가치를 총체적으로 반성하는 사람은 드물다. 결국 기호와 상징의 질서의 꼭지점 같은 곳에 자신의 시좌(視座)를 마련하고, 그러한 질서가 재현하는 현실을 메타 크리틱하는 일이 21세기 서재인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하겠는데, 문제는 역시 "꼭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다.
구체성과 일상의 질감을 거치지 않은 '꼭지점'은, '지구를 들 수 있는 지렛대'만큼이나 공허하다. 구체성과 일상의 질감이란 결국 '삶의 세계', 그러니까 단순히 '생각하는 나'(데카르트), '말하는 나'(이른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 이후 서양 철학의 대체적 흐름)가 아니라, '타인들과 대화하는 우리로서의 나'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 같다. 결국 책 바깥의 공동체적 삶의 원체험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 셈이다. '책'의 안과 바깥, '삶의 세계'와 '상징 및 기호의 세계'에 골고루 몸담는 일이야말로, 이 글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서재인의 사전적인 정의를 거부하고 싶은 미래의 서재인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플라톤을 '읽는 것'만으로 동굴에서 빠져 나와 찬연한 빛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 플라톤을 '읽는 것'만으로 동굴 속에서 함께 사슬에 묶여 있던 이들에게 '너희들은 지금 동굴 속에 갇혀 사슬에 묶여 있노라'고 외칠 수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은 이른바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들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책의 동굴' 속에서 '문자의 사슬'에 묶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함정이다.
자료출처-http://www.kungr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