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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2006-01-11

애거사 크리스티 타계 30주기
성경,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장편 66편, 단편 20편 등 총 20억부 넘게 판매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의 타계 30주년을 맞아 세계적으로 애거사 크리스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는 1월 12일이 30주기다.

크리스티는 한 사람이 일생에서 그렇게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장편 66편, 단편 20편, 희곡 18편, 추리소설이 아닌 일반 소설 6편, 기타 시집과 중동에서의 체험담, 자서전 등이 그녀의 작품 목록이다. 작품의 양만 놓고 보면 크리스티는 마치 신에게서 ‘많은 작품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처럼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는 대중성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녀의 작품은 셰익스피어보다 14개가 더 많은 103개의 언어로 번역됐고 지금까지 20억부 넘게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작품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의 저자’라는 표현은 이래서 나온 것이다. 이런 그녀의 인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잔인한 장면 없어도 오싹한 소설

우선 그녀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추리소설작가 백휴씨는 “애거사 크리스티는 ‘구성의 천재’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가”라고 평했다. 크리스티의 독특하고도 천부적인 재능은 그녀가 기본적인 요소들, 즉 작품 속 인물과 상황설정을 교묘히 다루는 데 있다. 그러한 요소들은 공격과 전율을 느끼게 하는 범죄와는 달리 진정한 추리소설의 틀을 구성한다.

호기심을 끄는 방법에서 본다면 그녀의 모든 이야기는 어느 시대의 배경에도 맞는다. 그녀는 특정시간에 제한받지 않는다. 자신이 성장하면서 함께 보아온 관습이나 규범을 통해서 합리적이고 적절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많은 사람의 호감을 받게 되고, 그것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과거에 대한 강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도 한다.

그러나 줄거리만 재미있게 끌어간다고 해서 문학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추리소설 전문출판사 해문출판사의 이경선 사장은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이유는, 물론 치밀한 구성과 뛰어난 아이디어도 있지만 내면 깊숙한 곳까지 꿰뚫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는 세월이 지나도 공감을 얻어내며, 끊임없이 문제로 대두된다. 특히 그녀의 작품에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녀의 심리 묘사는 다른 추리소설처럼 분석적이라기보다는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직관에 충실한 심리묘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각각의 캐릭터가 살아숨쉬듯 생생하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줄거리를 좇아가다가도 각각의 인물과 그 특징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대표적인 예다. 이 작품은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은 아니다. 긴박하게 진행되는 스토리에 등장인물들의 자세한 묘사, 그리고 그들 각각의 위험한 사정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결말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대개 이 작품의 기가 막힌 반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반전에 머물지 않고,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본성을 소름 끼치도록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은 그녀의 수많은 작품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의 상황과 심리 등을 어떻게 생각해내는 것일까? 크리스티는 “당신은 주인공들을 실생활로부터 이끌어냅니까?”라는 질문을 주변에서 반복해서 받곤 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들을 창조해내고, 그들은 완전히 내 것입니다. 그들은 나로부터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존재하며, 내 성격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도 그들 생각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내가 그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작품의 구성을 생각해내는 다른 방법은 설거지 등과 같은 평범한 가정의 일로부터다. 이런 일을 할 때 그녀는 마음이 들뜨게 된다고 말했다.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또 하나의 묘미는 충격적인 결말이다. 추리소설은 원래 대부분이 결말에 반전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크리스티의 작품은 늘 독자에게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크리스티는 1962년 데일리 메일지(紙)의 세실 윌슨과 대담을 갖고 “추리소설에서 절대 금기사항은 결말부분에서 안이한 끝맺음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또 잔인한 범죄수법이 안 나오는 게 특징이다. 예컨대 사람이 죽은 장면을 묘사할 때도 ‘총에 맞아 죽었다’는 정도로만 묘사하지, 살해수법이나 사망상태를 자세히 묘사하는 법이 없다. 이로 인해 그녀의 작품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

크리스티는 다른 작가가 그 이전이나 이후에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을 살인사건을 생활 속에서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엮어놓았고, 흥미있는 체스 게임, 또는 만족스러운 크로스워드 퍼즐 정도의 모험 이상을 넘지 않는 범위로 살인사건 자체를 변형시켜 글을 썼다.

이는 추리소설작가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천성 때문이다. 전 생애에 걸쳐 그녀는 폭력과 피를 몹시 싫어했으며, 자신은 살인에 사용되는 수단이나 기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항상 고백했다. 또한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아는 한 한번도 살인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나는 피스톨 권총과 리볼버 권총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보통 내 책의 주인공들을 둔기로 죽인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해야 독약을 쓰지요. 독약은 사실 아주 흥미를 돋우면서도 깔끔하다는 점 외에…. 나는 얼굴이 잔인하게 난도질당한 것은 차마 볼 수 없답니다. 그래서 독약에 흥미를 갖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나는 보통 시체가 되기 일쑤인 최후의 순간을 묘사하지 않는답니다.”

주인공 명탐정 포와로의 죽음

추리소설에는 탐정이 나온다. 매력적인 탐정은 추리소설의 재미를 높이는 양념 같은 존재다. 크리스티의 작품에도 매력적인 탐정이 나온다. 그녀가 만들어낸 탐정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에르큘 포와로와 ‘미스 마플’로 불리는 제인 마플 양(孃)이다. 형사 출신의 벨기에인 에르큘 포와로는 추리소설사에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에 필적하는 명탐정으로 꼽힌다. 그는 암탉이 크기가 다른 계란을 낳은 것을 못참아 할 정도로 균형성(symmetry)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생활습관 또한 규칙적이어서 아침식사로는 초콜릿과 크로와상을, 점심은 반드시 12시30분과 1시 사이에 먹기를 고집했으며, 저녁식사는 7시에 마치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간호사 출신의 미스 마플은 안락의자에 앉아 평소 관찰한 현상을 바탕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새로운 유형의 탐정이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말년에 이렇게 매력적인 주인공인 포와로를 죽여버린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그녀의 책을 출판하던 윌리엄 콜린스 출판사의 윌리엄 콜린스 경(卿)은 크리스티의 작품 두 편 중에서 판권 하나를 얻기 위해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것은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가 죽는 내용의 작품인 ‘커튼’과 그녀의 작품 중 마지막으로 출판된 ‘.

처음에 크리스티 여사는 두 작품을 그녀가 죽을 때까지는 출판하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버텼지만, 윌리엄 경은 그녀를 설득했다. 그녀가 자기 손으로 에르큘 포와로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녀가 죽은 뒤에 다른 작가들이 그를 다른 작품에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 예로 킹슬리 에이미스가 이언 플레밍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를 내세워서 소설을 쓰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도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결국 포와로가 기괴한 통속소설에서 단역으로 나올지도 모른다는 윌리엄 경의 말에 겁을 먹고는 ‘커튼’의 출판을 허락했다.

사실 이 작품은 1910년대 중반쯤 크리스티가 1차 세계대전 중에 종군 간호사로 있으면서 써놓았던 작품이다. 크리스티는 포와로를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와로는 너무 귀엽기 때문에 내가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이 그를 등장시키는 것이 싫어요. 포와로는 제임스 본드와는 다릅니다. 내가 죽은 뒤에 포와로가 등장하는 작품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티는 사망하기 한 해 전인 1975년에 발표한 ‘커튼’에서 포와로를 숨지게 한다. 여기서 포와로는 처음으로 소설에 등장했을 때와 똑같이 관절염으로 약간 절뚝거리는 데다 얼굴에는 주름이 많이 생긴 채 등장한다. 포와로가 젊었을 때의 영광을 나타내는 유일한 것은 그의 전매특허인 번쩍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커튼’에서는 염색을 한 것이지만)뿐이었다. 그러한 그가 혈압을 떨어뜨리는 아밀질산염이 들어 있는 작은 주사액 병을 침대에서 치워버렸다는 것을 헤이스팅스에게 알려 자살을 암시했을 때, 50년 동안이나 이 용감한 벨기에인을 작품 속에서 보아온 전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했다고 한다.

미스 마플은 그녀가 등장한 마지막 소설인 ‘잠자는 살인’에서 포와로보다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크리스티는 자신이 총애하는 이 등장인물을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에서 활발히 활동을 계속하는, 재치가 번뜩이고 현명하며 예리한 모습으로 남겨두었다.

크리스티가 1920년에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을 발표한 이래, 현재까지도 수많은 팬이 있었고 계속 그녀의 독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저력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추리소설이라는 특징적인 장르 안에 탄탄한 줄거리,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 등이 녹아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자신을 단지 인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서만 볼 뿐, 결코 문학가로 여기지 않았던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는 내가 하는 일을 결코 중대하다고 여기지 않아요. 그저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뿐이지요. 내가 죽은 지 10년쯤 지나면 아무도 나에 대해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신해요”라고 말했다. 추리소설작가 백휴씨는 “크리스티가 확립한 추리소설의 대중성은 그녀의 사후에도 전혀 훼손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철 주간조선 기자(yc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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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쟈마르쉐콘콘♡ 2006-08-2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어요..퍼갈게요 ^^
 

 

세계화, 기회 넘치는 '평평한 신세계' 열었나

중앙일보 박정호 2005-12-09

 

날아가는 일자리 보지 말고 자원 배분의 합리성을 봐야 피하려 하면 되레 빈곤의 덫에
-
공병호(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강자에게만 '평평한 세계'일 뿐 빈부격차.불평등의 그늘…비판적 성찰 좀 하시죠
-이해영(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독 사회주의의 몰락만을 알린 사건이 아니었다. 통제.관료주의 빗장을 굳게 걸어두었던 인도는 91년 외환위기에 직면하자 드디어 경제개방을 선택했다. 그리고 개혁 3년 만에 연 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오랜 빈곤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하버드대 교수로 노벨상을 수상한 인도 경제학자 아마르타 센은 "베를린 장벽은 미래를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막는 수단이었다. 장벽이 존재했을 때 우리는 세계를 글로벌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신간 '세계는 평평하다'(도서출판 창해)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저자는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충돌을 다룬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로 유명한 미국 저널리스트 토머스 L 프리드먼(사진).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PC 대중화에 불을 댕긴 '윈도 3.0 버전'이 90년 등장하면서 "세상이 평평해지기 시작했다"고 단언한다. 국경.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구촌 경제체제, 즉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회와 자유가 주어지는 세계화를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다고 말한다.

'평평한 세계'는 국가.기업.개인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다. 아니, 저자에 따르면 개인에게 더 절실한 단어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국가→기업→개인으로 서서히 이동 중이라는 것. 저자는 심지어 자기 자녀들에게 "중국과 인도의 아이들이 네 일자리를 가져가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지은이는 세계화가 빈부격차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에 일부 공감한다. 그러나 가속도가 붙은 세계화 물결을 되돌릴 수 없다는 입장에는 흔들림이 없다. 과연 그럴까. "미국과 유럽기업이 누리던 독점적 지위가 끝날 것이다"는 그의 주장을 찬.반 양론으로 살펴본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 그렇다

날아가는 일자리 보지 말고 자원 배분의 합리성을 봐야 피하려 하면 되레 빈곤의 덫에

세상에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마치 자생적 질서처럼 우리들의 삶의 곳곳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세계화의 거센 파고'다. 이를 두고 토머스 L 프리드먼은 '세상은 평평하다'는 은유를 사용한다. 어찌할 수 없는 추세라면 우리가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사고방식을 바꾸면 된다. 강력한 변화지향적인 태도와 개방적인 사고, 이 두 가지면 누구든지 흥미진진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것들이 쉽지만은 않다. 인간이란 조그만 변화라도 일단 반대해 놓고 보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적응성과 수용성 두 가지로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이 당면하게 될 미래는 더욱 가혹할 수밖에 없다.

세계화와 개방을 비난하고, 그런 변화를 주도하는 적으로 미국과 서방세계를 질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그들에게 "감정적이지 말고 냉철하게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런 대책 없이 반대에 익숙한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은 가혹한 가난과 빈곤의 나락이 될 것이다. 그것은 개인, 조직 그리고 국가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프리드먼의 저서들은 뛰어난 필력에다 누구도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인맥으로부터 얻어낸 정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한편의 장대한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신간도 그렇다. 이 책을 통해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람들이나 과거의 이론이나 이념에 젖어 여전히 꿈꾸듯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이 시계를 한층 확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세계화는 세계 전체가 자원 배분의 합리성을 더욱 높여가는 일련의 과정이란 특성을 갖고 있다. 협소한 시야에서 보면 날아가 버리는 일자리에 분노할 수 있지만 시장의 확대는 대다수 사람에게 전문화와 분업의 이점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세계를 대상으로 공급체인이 어떻게 확대되고 있는 가를 보는 것만으로 세상은 부정문이 아니라 긍정문임을 확신할 수 있다. 나는 자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면 된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프리드먼은 개인 차원에서 끊임없이 능력을 키워가라고 말한다. 평평한 세계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조직이나 국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며, 그 누구도 자신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늘 자신의 일이 "아웃소싱의 대상이 될 수 없도록 하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은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이 세계는 세상을 어두컴컴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암울함과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겠지만 변화의 흐름을 직시하고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에겐 대단히 역동적인 미래가 펼쳐지고 있다. 이런 미래에 이 땅의 모든 이들이 기회를 잡고 이용할 수 있는 데 지적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를 찾고 싶다.

공병호(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 아니다

강자에게만 '평평한 세계'일 뿐 빈부격차.불평등의 그늘…비판적 성찰 좀 하시죠

잘 팔리는 책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프리드먼이 안내하는 세계화의 꽃밭은 향기로웠다. 미국인이 쓴, 무슨 상받은 이런 유의 책을 접할 때마다 나는 미국식 글쓰기의 '힘'에 놀라곤 한다. 참 이다지도 일관되게 피상적일 수 있구나. 나는 이를 '서핑'형 글쓰기라 부른다. 현상의 표면만 긁어 모아 자신이 설계한 가상공간에다 마치 새 가구를 갖다 놓듯 나열하고, 여기에 저널리즘 특유의 갖가지 인터뷰를 엮은 다음, 괜찮은 제목을 붙인 그런 글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저자 스스로 말하듯 '조용한 위기', 즉 철두철미 미국의 조용한 위기에 대한 미국 와습(WASP), 그 가운데 '자유무역분파'의 세상읽기에 속한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이른바 '뉴요커'의 정서에 바탕하기에 부시를 '위험하고 멍청하게' 보고, 세계화의 수혜계층이기에 어떻게든 세계화로 평평해진 신세계가 얼마나 멋진 곳인지 세일즈에 여념이 없다. 하기야 자유무역에 대한 미국 내 상류계층의 충성도가 50%대에서 20%대로 반 토막 나고 있는 조건에서 그래도 미국적 가치에 기반해 자유무역을 계속해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그의 책은 미국 기준으로 볼 때 시의적절하고 또 팔릴 만하다.

이 책은 분명 엄격한 학술서도, 딱딱한 이론서도 아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사투리'로 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 터무니 없이 두꺼운 책에 널린 억설을 읽어 내자면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의 논지가 갖고 있는 최대의 약점은 세계화에 대한 과도한 가치적재 곧 '세계화=절대 선' 식의 암묵적 전제이며, 이는 세계화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가로막는 치명적 걸림돌이다. 과도한 전제는 언제나 논리적 비약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해서 빈곤의 원인도, 전쟁의 원인도 세계화가 덜 되어서 그렇다는 강한 암시가 전개된다. 세계화로 평평해진 세계 그 자체가 불평등의 원인이 되고, 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은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배제된 터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인터뷰 녹취를 푸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너무나 미국적인 그에게 '자유무역주의는 강자의 보호주의'라는 국제정치학자들에게는 이미 진부해진 진실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그의 말처럼 '맥도널드'뿐만 아니라 특히 '글로벌 공급사슬'이 전쟁을 억지한다면, 그 본산인 미국은 왜 전쟁을 도발할까? '그리운 식민지' 인도의 IT산업에 대한 인상비평은 이 책을 끌어가는 엔진이다. 하지만 최첨단 빌딩 숲 사이에 따개비처럼 붙어 사는 수억 명 인도의 '하루살이' 인생에도 세계는 '평평'할까?

정치학을 미래의 '성장산업'이라 부르기에 나로서는 그저 고맙다. 과도한 시장과 경제, 과소한 국가와 정치, 그래서 나는 저자에게 정치를 진지하게 고민해 주길 권장한다. 하지만 그래도 미국을 알고자 한다면 다 같이 이 책을 읽자. 단 빌려서!

이해영(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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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다" 쪽에 편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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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부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 대학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비록 개점휴업 상태이거나, 학내용 교양 과목 교재를 펴내는 수준에 머무르는 곳도 적지 않겠지만, 여하튼 총장을 발행인으로 하여,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라도 거의 모든 대학이 출판부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외국(대학 출판부)의 경우를 거론하지는 않고자 한다. 말 안해도 이미 잘 알려져 있을뿐더러, 중요한 것은 "여기, 지금, 우리"의 현실일테니까.

시내 대형 서점에 가면,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도서를 각 대학별로 따로 진열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각 대학 출판부의 활동 또는 수준을 한 눈에 판가름할 수 있는 기회라 하겠는데, 역시 천차만별이다. 물론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표지 디자인, 본문 편집, 교정 및 교열 상태 등에서 일반 출판사의 도서와 차이가 너무 심하다는 점이다.

대학 출판부의 경우, 대학 소속 연구자들의 전문적인 연구 성과를 출간한다는 기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장성이 거의 없는 전문 학술서를 내지 않을 수 없다. 대학 출판부가 아니라면, 원고지 또는 파일로 연구실에서 잠자고 있을 성과를 그나마 공적으로 선보인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런 측면에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꾸준히 전문 학술서를 출간해 온 우리 나라 대학 출판부의 업적과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해온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출판 기획"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대학 출판부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건국대학교에서 세계의 주요 문학가들의 생애, 작품 세계, 작품 자체 등을 간략하게 요약, 정리하여 문고판으로 출간하는 "문학의 이해와 감상 시리즈" 같은 것은, 비록 그 내용의 수준 차이가 각 권마다 심하고, 전반적인 편집 상태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비교적 성공적인 경우에 속한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출간하는 "이화문고" 역시 몇 해 전부터 그 면모를 일신하여, 일반 출판사에서 내는 도서와 거의 비슷한 얼굴을 갖추었다. 그리고 고려대학교의 "인문사회과학총서"도 최근 들어와 '대학 출판부에서 낸 도서같지 않은 도서'로 탈바꿈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출판부 역시,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러 대학 출판사들이 공동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신문이나 출판 관련 잡지에 광고를 내는 경우도 가끔씩 보게 된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징후 또는 시도는 아직까지 초보적인 것이어서, 본격적인 '출판 기획'이라 할 수 있는 정도에는 못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대학 출판부만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기획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서, 대학에 포진하고 있는 연구 인력, 특히 각 대학마다 넘치는 '미취업,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기획 및 편집, 번역 인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 대학 자체의 교수 및 강사 평가에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저서 또는 번역서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주는 (조금은 치사한?) 방법도 고려할만 하다. 편집이나 디자인은 외부 전문 업체에 맡겨서 고정적인 인건비 부담 없이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더구나 각 대학마다 몇 명쯤은 있기 마련인, 이른바 "잘 나가는 교수님"들의 저서를 외부 출판사가 아닌 대학 출판부에서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편집과 마켓팅의 측면에서 경쟁력을 지녀야만 필자가 신뢰감을 가지고 원고를 기꺼이 맡길 수 있겠지만.

최근의 우리 나라 대학은 지식인 사회 일반에서 쟁점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생산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다. 또한 전문 학술과 일반 대중을 매개하려는 노력("글쓰기"를 포함한)을 방기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결국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회로 안에서 맴돌며" 안주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러한 현실도 현재 대학 출판부의 위상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사실, 그렇게들 혈안이 되어 있는 "홍보"의 차원에서도 대학 출판부의 활성화는 적지 않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투입 비용과 기대되는 홍보 효과의 비율을 고려할 때, 성공적인 출판 기획으로 시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출판부 도서를 여러 종 보유하게 되면, 언론 매체의 광고를 통한 홍보 효과보다 훨씬 더 지속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학을 탐방하여 진행되는 TV 오락 프로그램에 자기 대학 학생들이 출연하여 노래와 춤 등으로 마음껏 끼를 발산하여 얻게 되는 홍보 효과 보다는 훨씬 더 지속적이지 않을까?)

대학 출판부 역시 "못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안해서 못하는" 경우가 아닐까 한다. 결국 "대학" 출판부가 아니라 대학 "출판부"라는, 발상의 전환이 무엇보다 먼저 요구된다 하겠다.

출처-kung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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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있다. 책은 종이로 만들어졌으니, 그 신체적(물질적) 운명의 시작은 역시 나무였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인가 어린 줄기와 가지, 잎사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갖은 풍상과 세월의 기억을 간직하며 우뚝 자랐을 것이다. 곧바르고 웅장하게 자랐을 때쯤, 인간의 손으로 쓰러져 갖가지 방법으로 마름질당한 끝에 결국 종이가 되었을 것이다.

종이에 찍히는 활자는 사람의 생각을 담고 있으니, 그 의미론적 운명의 시작은 역시 어느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인가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첫선을 보인 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어느 사이에 생각의 열매가 맺혔을 것이다. 그 열매가 탐스럽게 익었을 때쯤, 갖가지 생각의 자취가 갈무리되고 글의 모양새가 꼴을 갖춘 끝에, 결국 활자가 되어 종이에 찍혔을 것이다.

한 권의 책은 결국 자연과 인간, 우주와 자아가 만나는 자리인 셈이다. 그 만남이 반드시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어서, 어느 한 그루의 나무와 어느 한 사람의 만남이 "그들만의 외로운 만남"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무수한 사람들의 축복 속에 무척이나 화려한 만남이 되는 경우도 드물게나마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만남의 당사자들의 물질적 생명이 끝난 뒤, 긴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여전히 그 만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경우마저 있다. (우리는 그러한 만남을 보통 "고전"이라 부른다.)

여하튼, 나무에서 출발한 책의 신체적 생명이 다하는 날, 그 최후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 없다. 다시 한번 여러 방법으로 마름질되어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들어 가거나(그러니까 다시 책으로 태어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바람결에 부질없이 날리는 한 무더기의 먼지로 산산히 부서지거나..... . 물론 그 의미론적 생명만은 어떤 의미에서 불멸에 가까운 것이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롯하게 자리잡아 언제까지나 이어질 경우도 있다.

그런 "불멸의 생명"들은, 지금도 이 세상 어느 곳에서인가 태어나 자라나고 있을 한 그루의 나무와 한 그루의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게 될 것이다. 결국 책이라는 존재의 신체적 생명의 윤회가 가능한 것 처럼, 그 의미론적 생명의 윤회 역시 계속 이어질 수 있다. 그 무한한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감동하고 화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독자"라는 이름의 사람들!

무척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독자"에서 "필자"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고통이 될지도 모르는, 어쩌면 나무와 인간의 불행한 만남을 주선하게 될지도 모르는, 악업을 쌓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책으로 지은 악업이야말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윤회의 사슬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나는 필자가 되고자 마음 먹거나 이미 필자인 세상의 무수한 사람들을 존경하면서도 동시에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독자들을 윤회의 사슬로 유혹하는 사탄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렇게 본다면 번역자들이란 사탄의 하수인들인지도 모른다.

필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무언가 쓰기로 결정하기 전에, 한 그루 나무 앞에 홀로 서서 나무에게 말을 건네보라고 말이다. 나무를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거든, 그때 가서 다시 한 번 나무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펜을 잡던가 키보드를 누르기 시작하라고 말이다.

그리고 번역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무언가 번역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원서를 앞에 놓고 그 원서가 탄생하기까지 억겁의 세월에 걸친 나무와 인간 사이의 인연의 사슬을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말이다. 그 책을 번역할 경우 번역서가 앞으로 쌓게 될 무수한 업보의 무게가 두렵지 않거든, 그때 가서 저자와 한 그루 나무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펜을 잡던가 키보드를 누르기 시작하라고 말이다.

그러니 필자든 번역자든, 자신의 마당에 한 그루의 나무를 반드시 심을 일이다. 그것이 여의치 않은 환경이라면, 꽃이든 풀 한 포기든 자신의 방 안에 화분을 놓아 둘 일이다. 영화 속의 레옹이 소중하게 보살폈던 그런 화분 말이다.

출처-kung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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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12-04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 앞에서 늘 부끄럽습니다...흐흑.

눈보라콘 2005-12-10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샐러 작가시잖아요.
 

위의 제목을 번역하자면 '전업 작가' 또는 '전업 저술가' 정도가 되겠는데, 물론 시,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집필하는 경우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글을 써서 파는 일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정도를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문학 작품이 아닌, 이른바 교양 도서를 전문적으로 기획, 집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름의 전문 분야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미국의 현실.) 전문 분야의 박사 학위를 소지한 사람도 적지 않은데, 사실상 '전업 학자'에 견줄만한 식견을 지니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의미의 '전업 작가'들이 지닌 강점이라면 역시 글쓰기에서 찾을 수 있다. 대중들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글쓰기를 통해 전문 분야의 최신 지식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의 전업 작가들이 그러하다. Science Writer라는 직종이 있는 셈인데, 대학원 수준의 전문 교육 과정이 개설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얼른 생각나는 Science Writer로 김동광 선생, 이인식 선생, 최재천 선생 등이 있다. 다만 김동광 선생의 경우는 번역 작업에 치중하는 편이고, 최재천 선생(서울대 교수)은 full-time은 아니다. 그 밖에도 SF 분야의 박상준 선생, (자연과학은 아니지만) 불교 분야의 진현종 선생, 신화(학) 분야의 이경덕 선생, 한국사 분야의 이덕일 선생, 민속학 분야의 주강현 선생, 그리고 특정 분야를 확정하기 힘든 전방위적인 경우로, 고종석 선생, 복거일 선생(소설가라는 직함(?)도 지니지만)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풍수 분야의 최창조 선생(전 서울대)도 full-time writer에 가까운 것 같다.

글이라는 칼 한자루로 일도필살의 진검 승부를 펼치지 않을 수 없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결국 자기 분야에 대한 탄탄한 전문 지식과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글쓰기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fw(영어 자판으로 전환하기 불편한 탓에 약어로 표기함.)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행복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행복이라는 것이 단지 경제적인 차원만은 아니다. 실제 글쓰기 작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레훠런스가 충실하게 마련되어 있다는 행복이 더욱 중요한 것 같다. 요컨대 글의 기획, 구상 단계에서부터 실제 글쓰기 작업 중에 구체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믿을만한 사전, 목록, 색인, 연구 성과, 고전 번역, 번역서, 저널 등이 충실하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의 사례로, 조선왕조실록 국역과 그 씨디롬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재가공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랜 기간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 국역과 씨디롬화 작업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국역본 실록 및 그 씨디롬이라는 기본 레훠런스를 바탕으로 fw들이 신나게 붓끝을 놀릴 수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업 "학자"들의 일이란, 각 분야의 기본 레훠런스부터 충실하게 작성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레훠런스의 피라미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기본 레훠런스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고, 그러한 축적의 바탕 위에서 fw들은 폭넓은 대중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글을 생산한다. 그렇게 생산된 글은 다시 레훠런스가 되어 다른 글을 낳는데 도움을 준다.

미국에서 출간되는 교양 도서의 경우, 그 내용을 이루는 기본 자료들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는 경우가 많다. fw가 할 일은 어떤 분야의 어떤 주제를 어떻게 요리할(글쓰기 및 전체적인 구성) 것인가 고민하면서, 기본 레훠런스를 부지런히 '조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어떤 주제를 문제 삼으려면 어떤 레훠런스를 조사해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fw가 갖추어야 할 미덕인 셈이다. 레훠런스를 올바르게 이용하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 및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의 전문적 식견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전문적인 fw보다는 '전업 번역가'가 많은 형편인데, 이것은 아직까지 각 분야의 주요 고전 및 연구 성과가 제대로 번역되어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현실과도 관련있는 것 같다. (일본과 대비되는 현실이기도 하다.) 요컨대 아직까지 우리 나라는 기본적인 레훠런스를 부지런히 축적해야 하는 단계인지도 모른다. (기초 체력이 부실한 운동 선수의 비극!) 이렇게 본다면, 강단과 현장, 학문과 현실, 글과 삶의 유리를 걱정하는 최근의 목소리들은 지나치게 앞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암암리에 인문학이 위기 상태가 아니었던 시기를 전제로 하고 있는 셈인데, '인문학의 위기'가 화두로 등장하기 이전에는 과연 인문학이 위기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정도의 상태였는지 의문이다.

결국 최근 회자되는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 분야 연구를 업으로 삼아 먹고 사는 사람들의 밥줄이 끊어질 위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영화 "넘버 쓰리"에 나오는 검사(최민식)의 말을 빌리자면, "인문학이 무슨 죄가 있나, 인문학 한다고 하는 인간들이 문제지!"; 원래 대사는 대충 "죄는 미워해도 죄지은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X같은 소리하고 있네, 까놓고 말해서 죄지은 새끼들이 문제지 죄가 도대체 무슨 죄가 있어!") 기초적인 레훠런스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단과 현장의 거리를 걱정하는 것은, '강단'이라는 동네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강단'에서 진작에 이루어졌어야 할 일들이 이루어져 있지 않은 상태라면, 거리를 운운할 단계가 아니다.

거리를 좁히는 일은 강단에 있는 사람이 TV에 나와서 몇 마디 떠들거나 교양 서적 몇 권을 집필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강단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깊숙히 강단과 연구실 속으로 들어가야 이루어질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기초적인 레훠런스를 충실하게 축적하는 작업, 어쩌면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업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실록의 국역과 씨디롬화 작업에 전념했던 수 많은 무명용사들의 보이지 않는 피와 땀이 더없이 소중해 보인다.

출처-http://www.kung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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