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5] 공자의 칭찬법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차가운 목소리와 따뜻한 목소리를 구분합니다. 말을 못하는 아기도 '이 놈!'하고 인상을 쓰거나 제지를 하면 싫어하고, 밥상머리를 짚고 일어섰을 때 놀라고 칭찬해주면 기뻐합니다. 칭찬은 감정을 격동시키는 행동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칭찬을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은 대개 위험하고 어렵듯 칭찬 역시 양날의 칼로 작용합니다. 아이는 칭찬을 통해서 진심으로 기뻐할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민준이는 개다리춤울 추는 것을 좋아하는데 동작이 엉뚱하고 우스워서 칭찬을 많이 해줬습니다. 칭찬을 해주니 신나서 계속 개다리춤을 춥니다. 새로운 개다리춤 동작을 생각해내면 한번 보라고 하면서 또 춤을 춥니다. 칭찬을 해달라는 말입니다. 솔직히 가끔은 귀찮기도 합니다. 민준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갔을 때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했습니다. 내가 만든 일종의 필살기는 아이들이 하이파이브를 했을 때 '어이쿠' 하면서 손을 뒤로 튕겨나가는 동작을 하거나 손바닥이 아프다는 동작을 하면서 "점심 때 뭐 먹었는데 이렇게 힘이 세?!" 물어봅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신이 나서 민준이 유치원 갈 때마다 하이파이브를 해달라고 합니다. 나는 하이파이브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힘세고 밥 많이 먹은 것에 대한 일종의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민준이 유치원에 갈 때마다 아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서 자신이 얼마나 힘이 세고, 밥을 잘 먹었는지 하이파이브를 해달라고 하면 성가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내가 성가시고 귀찮은 마음을 얼굴에 담아서 동작을 취하거나 성의 없이 칭찬을 하면 아이들은 조용히 상처를 받습니다. 상처를 받는 까닭은 부모님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알아봄'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알아봐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지지하고 긍정한다는 말인데, 칭찬이 아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쑥쑥 자라게 하는 까닭은 자존감의 원천인 '알아봄'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순간 부모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칭찬할 때 '알아봄'의 마음을 담아서 해주시고 계신가요? 아이들이 자꾸 칭찬을 요구해서 귀찮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으셨나요? 
공자는 제자들과 대화하면서 제자의 성격에 맞게 대화를 한 것으로 유명하고, 이것이 스승 공자의 가장 위대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토대가 굳건하기 때문에 공자의 칭찬 역시 제자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반영되었습니다. 

공자께서 천한 아비를 둔 중궁에 대해서 이르셨다.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좋으면 비록 쓰지 않으려 한들 산천의 귀신이 버려두겠느냐?"
- <논어> 6-4

공자의 제자 중에서 신분이 천한 중궁의 능력과 고민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감을 가지라는 스승의 칭찬이 인상적입니다. <논어>를 보면 공자는 중궁이 '덕행'에 뛰어났다고 특별히 언급한 부분이 나오며, 중궁과 다스림에 대한 깊은 의견을 나누고 인에 대해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스승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은 중궁의 기분이 어떨까요? 열심히 하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 신분과 상관 없이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면 어떤 식으로든 빛을 보리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신의 한 수'처럼 공자의 칭찬은 중궁의 가슴속에 담겨서 인생을 빛냈을 것입니다. 
공자가 제자 중에서 가장 아꼈던 안연에 대해서는 많은 칭찬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안회(顔回)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이 달라지게 된 과정을 드러내준 이 칭찬은 특기할 만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안회와 종일토록 말을 해 봐도 내 뜻에 반대한 적이 없어 어리석은 사람 같다. 그러나 물러가 그 자신을 살펴보고, 또 나의 뜻을 발휘하고 있다. 안회는 어리석지 않다."
- <논어> 2-9

공자는 처음에 안회에 대해서 고분고분하고 말 잘 따르는 착하기만 한 사람으로 바라보았지만 제자 안회의 이의제기가 없었던 것은 안회가 스승의 주장에 대해서 진심으로 공감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자로처럼 스승에게 따져 묻거나 중궁처럼 반론을 펼치면서 대화를 더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별 말 없이 따르는 모습에 다소 섭섭한 감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의 가장 큰 마음은 흡족함입니다. ""회는 나를 돕는 사람이 아니다. 내 말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논어11-3)라는 말처럼 공자는 얼핏 들으면 푸념처럼 들리는 묘한 말을 많이 남겼습니다. 반어(反語)와 은근한 비유를 많이 쓰기 때문에 시를 읽듯이 거리를 두고 말을 음미하거나 깊은 감정이입을 하거나, 현장에 실제 있었던 것처럼 느끼면서 논어 구절을 살피면 여러 가지 맛이 납니다. 그래서 논어책은 여러 번 읽어야 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남에게 좋은 말을 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부족한 부분을 짚어주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됩니다. 예컨대 아이가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아이의 수준이 성에 차지 않을 때 부모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이를 가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도 이것은 많은 부모가 꿈꾸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파스칼의 <팡세>를 읽으면서 '지적을 피하는 칭찬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이른바 파스칼 칭찬법입니다. 

남을 효과적으로 훈계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려 한다면, 그가 사물을 어떤 측면에서 보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보통 그 측면에서는 올바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올바른 점을 인정하면서 그의 잘못된 다른 측면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인간은 이것으로 만족을 느낀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다만 모든 측면에서 보는 것을 게을리 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 파스칼 <팡세> 일부

대학 다닐 때 철학자 스피노자를 참 좋아해서 교수님께 스피노자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교수님은 특정 철학자의 저작을 읽는 것은 가장 훌륭한 철학 공부라고 칭찬하시면서 나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남겨주신 말씀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네가 스피노자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철학사를 읽어 봐라. 전체 철학사의 입장에서 스피노자의 위치를 이해한다면 스피노자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이니까."

나는 교수님의 조언을 듣고 나서 많은 철학사 저작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덕분에 스피노자의 철학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스피노자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공자 역시 이와 같은 칭찬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날까 하는데 그때 나를 따르는 사람은 아마 유이겠지?"
자로가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 공자가 말했다. "유야! 용기를 좋아하는 것은 나보다 낫지만, 재주와 사리를 재량하는 능력은 취할 만한 것이 없구나."
- <논어> 5-6

파스칼 칭찬법의 특징은 칭찬 대상(아이)의 현재 모습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는 데 있습니다. 한글 읽기를 잘 하는 민준이를 칭찬해주면서 받침 몇 개만 더 잘 읽으면 모든 한글을 다 읽을 수 있겠다고 칭찬하면 민준이에게 동기와 목표를 심어주는 셈이 됩니다. 더불어 민준이는 부모가 자신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고, 자신이 깊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가 듣기 싫어하는 지적을 해야 하는 부모님들이 만약 칭찬으로 번역해낼 수 있다면 아이의 감정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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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가족과 아이를 지키는 최종 수비수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사회운동을 몇 년 하고, 가족 먹여살린답시고 사업을 몇 년 하다가 뒤늦게 육아에 참여한 늦깎이 아빠로서 아이들과 교감을 맺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내의 신뢰 덕분입니다. 처음에는 육아서와 심리학 등 내가 아는 지식을 육아에 적용하며 시행착오도 많았고 아내와의 다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차차 엄마의 자리와 아빠의 자리가 잡혀가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육아 참여가 아이에게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무수히 보고되고 있습니다.

1950년대에 심리학자 로버트 시어스와 그의 동료들은 다섯 살짜리 자녀를 둔 300명이 넘는 미국인 부모들을 대상으로 자녀 양육 관행을 조사했다. 26년 후에 또 다른 연구자 집단이 이 원래 연구 대상의 자식들 중 일부와 접촉했다. 그 목적은 그들의 감정이입의 정도를 측정하여, 그것을 시어스의 원래 조사 결과와 비교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나중의 연구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성인기 감정이입의 가장 강력한 예측자는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양육 관여였다. 이 요소는 몇몇 어머니의 관련 예측자보다 더 나은 예측자임이 증명되었으며, 이는 소년과 소녀 모두에게 분명하게 드러났다.
- 로스D 파크, 아민 A 브로, <나쁜 아빠>(이학사), 27쪽


하 지만 육아에 있어서 아버지의 자리는 마치 변방과 같습니다. 문화센터나 공공도서관에서 ‘가족과 함께 함는 책놀이 잔치’이라는 행사를 마련하면 참여 부모의 10% 정도가 아버지입니다. (10가족 중의 1가족) 뿐만 아니라 ‘아빠와 함께 하는 책놀이 잔치’라고 ‘아빠’를 명시했을 때도 아버지의 참여는 50%가 겨우 넘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참여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 아버지들이 참여할 때는 유심히 살펴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같이 온 경우는 대개 아버지는 뒤쪽으로 물러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구경을 합니다. 아버지들이 적극적으로 책 놀이에 참여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가정 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편하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회사와 주주의 관계처럼 됩니다.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보고를 하고, 돈이 많이 드는 완구나 책을 구매할 때 아버지가 가끔 이의제기를 하는 정도입니다. 아버지의 역할이 이처럼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가족의 행복은 점점 달아납니다. 나는 육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아버지로부터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하는 아버지로 변신했는데, 그 과정을 동양철학의 한 구절로 담았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을 것이다."
- <논어> 4-25

육 아를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간직하는 최소한의 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와 가족을 향한 사랑과 선의입니다.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 일상생활에서 이 선을 시나브로 넘어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완구 세트를 사겠다는 어머니의 주장과 이를 반대하는 아버지의 주장이 충돌할 때 아버지는 아이의 앞길을 막아세우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지나치다고 생각했거나 가정형편상 무리라고 생각했을 확률이 큽니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원망하며 싸웁니다. 부부 간의 신뢰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만약 아내와 남편이 아이에 대한 선의와 사랑을 인정하고, 서로에 대해 존중하고 지켜준다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주장을 들어도 자세히 들어보고 설득을 하거나 반영을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갈등이 심화된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대방을 부정하거나 비하하고, 아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소신껏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부부가 서로의 육아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아이에 대한 사랑과 선의로 충만합니다. 신뢰의 문제는 엄연히 있는 사랑의 감정을 애써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의 덕을 살펴보는 다정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과 아이에 대한 선의를 존중하는 것이 신뢰의 첫 번째 원칙이라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두 번째 원칙입니다. <논어>를 읽을 때는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기분이 좋은데, 특히 스승과 제자가 서로에 대해서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신뢰라는 것은 ‘이해’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자와 자로의 신뢰 관계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유(자로)의 비파 솜씨로 어찌 내 문하에서 탈 수 있느냐?”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문인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유는 이미 수준이 당(堂) 위에 올라 있다. 다만 방[室]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다.”
- <논어> 11-14


자 로는 공자와 가장 나이차가 적을 뿐만 아니라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제자입니다. 제자들이 불만이 있을 때 자로가 대표로 따져 묻기도 하고, 공자가 면전에서 대놓고 욕을 하기도 해서 때로는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비파 사건 역시 공자와 자로의 친근한 관계를 보여주는 모습이지만, 제자들은 공자에게 꾸지람을 받는 자로를 오해한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알아줌’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부럽습니다. 부부 사이도 이처럼 알아줄 수 있다면 신뢰가 깨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공자가 모함을 받았을 때 제자가 버팀목이 되는 대목을 소개합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자공(子貢)은 공자보다 위세가 더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공자 사후에 나라의 선비들은 자공을 찬양하기 위해서 공자를 헐뜯기도 했습니다. 이때 자공이 보여준 모습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공손무숙이 조정에서 대부에게 말하였다. "자공이 중니보다 어질도다." 자복경백이 그 말을 자공에게 전하니, 자공이 말했다. "궁실의 담에 비유하면, 나의 담은 어깨에 닿아서 집안의 좋은 것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요함을 볼 수 없다. 그 문에 들어간 자가 적으니, 무숙의 말이 또한 마땅치 않겠는가?"
- <논어> 19-23

진 자금이 자공에게 이르기를 "자네가 겸손해서 그렇지, 중니가 어찌 그대보다 어질겠는가?" 자공이 말했다. "군자란 한마디 말로 지혜롭게 되기도 하고, 한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하게 되니, 말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생님께 미칠 수 없는 것은 마치 하늘을 사다리로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선생님께서 나라를 얻어 다스린다면, 이른바 민생을 세워 주매 민생이 서고, 덕으로 인도하매 백성이 따르고, 인정으로 편안하게 하매 백성이 모여들고, 예약으로 고무시키매 백성이 화하게 되어, 살아계실 때는 사람마다 받들어 모시고, 돌아가신 때에는 모두 슬퍼한다는 것이니, 어떻게 이에 미칠 수 있겠는가?"
- <논어> 19-25


공 자가 자로를 변호한 일과 자공이 공자를 변호한 일의 공통점은 서로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므로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습니다. 반면 형제들이나 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배우자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무시하거나, 특정한 행동에 대해서 비난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의지할 사람은 가족밖에 없습니다. 같이 맞장구를 치면서 호응을 하면 배우자의 자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만 제대로 지켜진다면 신뢰의 끈은 견고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형성하는 육아의 기초일 뿐 서로가 채워야 하는 게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그 어떤 육아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아내에게 육아를 맡겨놓고 돈을 벌거나 바깥일을 하는 것은 독립운동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사회적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제대로 지켜주지 않지만, 집에 있을 때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 돌보는 것을 피하지 않고 자주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하면 육아와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생활까지 좋은 기운이 뻗칩니다. 사람이 가족의 사랑으로 태어난 것처럼, 가족으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거나, 아이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부모님에게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사랑’의 개념이 무척이나 폭넓고 깊은데, 특히 ‘가족의 사랑’을 으뜸으로 칩니다. 심지어 이상적 인물로 추앙받는 순임금의 아버지가 만약 죄를 받는다면 임금 자리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숨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입니다. 따라서 가정교육이 모든 교육에 앞서고, 가정의 사랑으로부터 모든 사회체제와 제도로 확장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가족은 사회의 요구에 맞게 아이를 키우고, 학교나 학원의 지시에 복종하는 세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철학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가족의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기 때문이고, 가족의 자존감이 이 지경까지 떨어진 까닭은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이 최소한의 신뢰의 끈만 붙잡는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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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3] 아이를 혼내는 동양의 지혜


불가피하게 아이를 혼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부모님들이 무너집니다. 무턱대고 혼을 내거나, 아니면 벌벌 떱니다. 혼을 낸다는 것은 마음을 뒤집어엎는 일입니다. 국가로 따지면 정변이나 전쟁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손자병법'을 쓴 손무는 노자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노자 <도덕경>에는 전쟁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비장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무릇 군대를 좋아함은 상서롭지 못하여 조물주는 이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도를 모시고 사는 자는 그러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에 군자가 머물 적에는 왼쪽을 귀히 여기고 군대를 부릴 적에는 오른쪽을 귀히 여긴다. 무기란 상서롭지 못한 연장이어서 군자가 다룰 물건이 아니다... 이기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건만 이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것이리라, 무릇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자는 천하에 뜻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길한 일에는 왼편을 숭상하고 흉한 일에는 오른편을 숭상하니 이런 까닭으로 부장은 왼쪽이 자리하고 상장은 오른쪽에 자리하거니와 이는 전쟁을 상례(喪禮)로 삼는 것을 말함이다. 사람 죽인 것이 많으면 슬피 울어 애도하거니와 전쟁에 이겼다 하더라도 상례로 삼아야 한다. 
- 노자, <도덕경>, 31장

조정에서는 우승상이 좌승상의 상급자가 되고, 전쟁터에서는 좌장군이 우장군의 상급자가 되는 까닭은 임금이 ‘삶’의 위치에 있느냐, ‘죽음’의 위치에 있느냐 차이입니다. 즉, 평상시에 임금은 남쪽을 향해 앉아 있기 때문에[남면(南面)] 우승상이 임금의 오른쪽이 되고, 전쟁시에 임금은 북쪽을 향해 앉아 있기 때문에[북면(北面)] 좌장군이 임금의 오른쪽이 됩니다. 위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쟁에 임하는 자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의 사령관 중에서 가장 부끄러운 자는 적의 목을 많이 벤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졸장부 중에서 졸장부 취급을 받습니다. 전국시대 진(秦)나라 통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백기 장군은 목을 벤 장졸만 100만명이 넘고, 절대 라이벌인 조나라 병사 45만명을 일거에 생매장할 정도로 전과를 올렸지만 왕에게 자결 명령을 받을 때는 조나라 병사 죽인 일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사기열전 ‘백기왕전열전’) 벌을 주는 것에 관한 조금 더 직접적인 구절에서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강하게 드러납니다. 

맹손씨가 양부에게 형법을 총괄하게 하였다. 양부가 증자에게 형법을 관장하는 방법을 물었다. 증자가 말했다. 
“위에서 도(道)를 잃어 민심이 흩어진 지 오래다. 범죄의 정상을 알더라도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
<논어>, ‘자장19’

전쟁이든 형벌이든 채찍을 손에 들 때 공통적으로 지키는 것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시험을 잘 치는 아이가 꼭 지혜롭지 않고, 시험을 못 치는 아이가 지혜롭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벌을 받는 사람 역시 잘못한 경우보다 불가피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된 상황을 서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안타까운 마음 안에는 일을 이렇게 만드는 데 원인을 제공한 지도자와 어른들의 미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미안함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이 맹자의 ‘망민(罔民)’입니다. 망민이란 백성을 그물질한다는 뜻입니다. 

맹자가 왕에게 말했다. 
“일정한 생업이[항산(恒産)] 없어도 떳떳한 마음[항심(恒心)]을 가지는 자는 오직 선비뿐입니다. 백성은 일정한 생업 없이 떳떳한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만일 떳덧한 마음이 없으면 거리낌이 없게 되고 사치한 것을 일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죄를 얻게 된 백성을 쫓아 형벌을 가하면 이것은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그물질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 1-7

죄의 목록을 정해놓으면 사람들은 목록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죄의 목록을 정한 취지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아이를 혼낸다는 것은 부모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고, 스스로에게 채찍을 드는 것입니다. 부모가 혼을 낼 때는 아이가 명백한 잘못을 하거나, 선을 넘었거나 하는 상황입니다. 대개 사전에 어떤 경우 혼이 난다는 것이 합의가 된 경우도 많습니다. 이 원칙에 의거해서 혼을 낼 때 부모님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은 ‘감정’입니다. 혼을 낼 때는 이성만 작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동양의 사고방식은 혼을 낼 때일수록 감정을 함께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감정을 작동시키라는 것은 감정적으로 형벌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거나 정벌을 당하는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서로 칼을 겨누는 적군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혼내기는 ‘비인간적인 행위’로 전락합니다. 이것이 바로 동양이 혼을 내는 지혜입니다. 혼을 낼 때는 감정이 뒤엎어지면서 행동과 말, 논리 하나하나가 엄중히 새겨집니다. 이 엄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혼내며, 엄중함에 압도되기 때문에 감히 혼내지 못합니다. 혼낼 줄 아는 부모님은 어렸을 적에 제대로 혼나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어렸을 적에 제대로 혼이 난 적이 없기 때문에 혼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크게 혼났다고 해서 제대로 혼나는 것이 아니라, 혼이 날 때 마음속에 부당하다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 있지 않도록 정확하게 혼이 나는 것이 제대로 혼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를 가지고 실제 생활에서 아이를 어떻게 혼내는지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혼을 낼 때는 이유가 보편타당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하더라도 원칙에 일관성이 없거나 논리적 결함이 있거나 혼내는 사람의 자격 시비가 걸린다면 영(令)이 서질 않습니다. 형 민준이는 동생 민서보다 두 살이 많기 때문에 민준이가 민서를 때리거나 밀치고 민서가 우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민준이가 민서를 때리고 민서가 울었다고 해서 혼내거나 지적하지는 않습니다. 부모인 내가 명백히 알고 있고, 민준이의 행동에 변명의 여지가 없을 때 혼을 냅니다. 

민준이와 민서에게 똑같이 감자칩을 주었습니다. 감자칩을 좋아하는 민준이는 얼른 봉지를 비우고 민서의 봉지에서 감자 두 조각을 빼앗았습니다. 힘이 센 것을 이용해서 동생의 것을 빼앗는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따끔하게 지적하고 민서에게 돌려주라고 말했습니다. 민준이는 기분이 나빴는지 감자 두 개를 던져 버렸습니다. 명백한 이유로 혼이 날 때 불평을 하거나 화를 내는 것 역시 혼을 내는 사유가 됩니다. 나는 엄하게 민준이를 꾸짖었습니다. 민준이는 서럽게 웁니다. 민준이에게 아빠는 밖에 나가겠다고 말하고는 현관 문을 열고 밖에 나가서 2~3분 정도 있다가 다시 들어갔습니다. 민준이는 조금 마음이 누그러진 듯합니다. 감자칩을 좋아하는 민준이가 동생 것을 먹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동생에게 부탁을 해서 충분히 얻어낼 수 있었지만 힘으로 빼앗은 것은 누가 뭐래도 교육을 잘못 시킨 부모에게 있기 때문에 혼이 난 아이에게 부모는 마음의 빚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준이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거려주면서 아빠한테 혼나서 많이 속상하냐고 물었더니 민준이는 힘 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민준이에게 혼내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민준이는 내가 왜 나갔는지 궁금했는지 물어봅니다. 나는 “처음에는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갔지만, 밖에서 생각해 보니 혼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혼을 내는 가장 커다란 원칙은 가급적 혼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불가피하게 혼을 내야 한다면, 혼내고 난 이후에 반드시 두 팔로 안아주고 혼내서 미안하다는 말을 붙입니다. 민준이를 크게 혼낸 날 몇 분 뒤에 민준이가 “아빠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아빠가 혼냈는데도 사랑해?”라고 물어봤더니 그래도 사랑한다고 합니다. 민준이가 아빠를 사랑하는 이유가 더 의미심장합니다. 

“아빠가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민준이는 감자칩 남은 세 개 중에서 두 개를 꺼내서 민서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한 개면 충분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민준이가 감자칩 한 개를 민서에게 주자 민서가 고맙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의 감정이 한바탕 파도를 넘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혼을 내지 않고 아이를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아이와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혼을 내지 않는다는 게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부모라면 최소한 혼을 내는 목표를 정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혼을 내는 이유는 나중에 혼을 낼 상황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철이 들면서 점점 혼날 일이 없어졌듯이 시간이 흘러가면 혼을 낼 일이 거의 없어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혼을 내는 사람의 마음과 혼이 나는 사람의 마음을 함께 헤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님들은 혼난 이유를 먼저 생각하고, 아이들은 이유보다는 혼난 경험 자체, 또는 감정을 먼저 생각합니다. 부모의 메시지가 아이에게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혼나서 다친 아이의 감정을 어루만져주고 편안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내가 민준이에게 혼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민준이는 그제서야 빼앗은 감자를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아이를 혼내고 난 후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으면 부모가 아이를 혼내는 이유는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혼 낸 일 자체만 아이의 뇌리에 남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이런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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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2] 아이들과 잘 노는 방법은 따로 있어요


아이들과 노는 것에 연구를 해본 아빠들은 알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와 잘 놀 수 있는지. "아이들과 잘 노는 방법은 뭔가요?"라고 질문하는 순간, 아이들과 잘 놀지 못한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과 잘 노는 방법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잘 놀 수 있는지 이야기할까 합니다. 나도 한때는 아이들과 놀 거리를 연구해서 아이들 앞에 내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 대견해하지만 아이들 보기에는 전혀 성에 안 차지요. 하지만 이 정도 아빠라면 전체 아빠의 2% 안에 들 것입니다. 20% 안에 드는 아빠들은 놀이공원이나 OO랜드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이기구 줄을 서고 있습니다. 빼곡하게 들어찬 OO랜드의 주차장을 보면 '부모님들, 애 쓴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놀이공원에 가서 아이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공으로 만들어진 재미 같습니다. 음식점에서 어른들이 인공조미료 MSG에 마비된 것이나, 어린이들이 인공 재미에 마비된 것이나 진배없지요. 나는 22%의 아빠들이 애틋하고 안타깝습니다. 최소한 아이들과 잘 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아빠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아이들과 놀고 싶어하는 아빠들을 위한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이런 놀이 저런 놀이를 만들면서 생각난 것은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정신이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옛것을 전달할 뿐 새로 지어내지 않는다." - <논어> 7-1 일부

보수주의자인 공자의 '옛 것'을 나는 아이들의 놀이와 감정으로 응용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놀이를 새삼 만들 필요는 없고 그저 아이들의 마음을 잘 살펴보면 그만이라는 의미입니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들은 스스로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음유시인처럼 당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놀이를 일부러 만들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알았습니다. 놀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른이 절대로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이제는 최소한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을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아이들이 놀이를 재밌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뒤탈이 나지 않도록 뒷받침을 해주는 게 부모의 포지셔닝입니다. 잘 만들어진 영화의 '조연배우'라고 하면 딱 맞는 비유입니다. 아이들과 내 고향 성산포 마을을 여행하듯 돌아다녔습니다. 성산일출봉이 몸통을 담그고 있는 수메밑 바다는 기다란 해변이 장관입니다. 특히 둘째 민서는 모래사장에서 모래놀이를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낭떠러지 옆에서 노는 것만 제어를 해주고 나머지는 아이들이 하자는 대로 합니다. 아이들은 모래사장을 눈썰매장으로 바꿔 버립니다. 조금 경사진 모래의 지면을 이용해 엉덩이로 해변까지 20미터를 넘게 나아갑니다. 계단 옆에 나 있는 돌담을 짚어서 곧바로 암벽타기에 들어갑니다.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밑에서 보조를 해주고, 가끔 도움을 요청하면 들어서 올려줍니다. 아이들이 놀이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 정말 현란합니다. 갑자기 한데 모여 모래를 퍼 담으며 단숨에 둔덕 하나를 만들어냅니다. 그 옆에는 똑같은 둔덕이 하나 생겼는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나뭇가지가 송송 박혀 있습니다. 왜 나뭇가지를 박았는지 물어보니 '뾰족산'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공자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말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어찌 전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를 운행하고 만물을 낳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 <논어> 17-19

우리 아이들은 생명과 자연을 많이 닮았습니다. 어른스럽다는 것은 아이들이 내는 생명과 자연의 소리를 잘 듣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침을 깨우는 새들처럼 사람의 정신을 깨우는 아이들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길들이려고 하기보다는 보조를 해주세요. '말의 무의미성'에 대해서는 동서양 할 것 없이 많은 말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불교의 사상을 비롯해서 노자와 장자의 철학 역시 말의 한계를 명확히 합니다. <논어> 등 공자의 언행 기록 중에는 공자가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했던 모습과 하늘을 보고 깊이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동양의 사고방식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놀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동양의 가르침을 따르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동양철학을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서당에서 <맹자>를 읽으면서였습니다. <맹자>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구절 중의 하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였습니다. 

맹자가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알고, 나는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배양한다."
공손추가 물었다. 
"감히 묻사오니,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합니까?"
"말하기가 어렵다. 그 기라는 것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서, 이것을 곧바로 배양하여 상해가 없다면, 천지의 사이에 가득 메우게 되고, 그 기라는 것은 정의와 도덕에 배합된다. 이것이 없다면, 약해진다. 이는 정의가 모여서 생겨나는 것이지, 밖에서 엄습하여 이를 차지한 것이 아니다. 행위가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면, 기는 약해진다. - <맹자> 3-2 일부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연지기'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으로 공감이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슴으로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고향을 여행하면서 호연지기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산일출봉을 뒤로 하고 해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두어 시간을 그렇게 놀고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때마침 성산일출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리허설을 하기 위해 밴드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자 어깨춤을 흠씬 추자 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막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민서는 얼마나 흥겨웠는지 춤  추다가 자빠지고 일어서서 또 춤을 췄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습니다. 아이들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신이 났는지 돌아오는 길에 식당 앞에서 다시 춤을 추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행복해졌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호연지기였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표정이 바로 호연지기였습니다. 그날 아이들은 밤 아홉 시에 일제히 잠이 들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10시나 11시에 겨우 자는 아이들이 일찍 단잠이 들었다는 말은 하루 종일 제대로 놀았다는 뜻입니다. 놀이공원과 이곳저곳 현장답사를 한 어른과 고향에서 하루 종일 신나게 논 어른은 여기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시골을 다니면서 아이들이 재밌게 놀 수 있게 함께 참여한 어른은 호연지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몸이 지치지만 마음은 지치지 않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놀이공원 등을 바쁘게 돌아다닌 어른은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칩니다. 규모가 큰 놀이공원에는 '놀이방' 시설이 있는데, 거기 있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의자나 모퉁이에 지친 표정으로 앉아서 쉬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 놉니다. 이것은 호연지기의 단절이자, 놀이의 단절이며, 어른과 아이의 단절입니다. 어른과 아이가 따로 놀고, 아이의 놀이에 어른이 참여하지 않는 놀이는 아이들에게는 인스턴트 음식과도 같습니다. 앞서 소개한 민준이와 민서의 신나는 하루를 '어른'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른이 어떻게 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세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게임의 용어를 쓰자면, 어른들은 아이들의 플랫폼(platform)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항구의 접안 시설이나 전철역의 플랫폼은 배와 기차가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승객들이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바로 그 역할을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어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부모들이 자신들의 놀이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점과, 자신들은 부모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아이들의 심리상태는 무척 안정적이 됩니다. 다시 말해 맘 놓고 놀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놀이의 환경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추임새'로 재미를 더해줍니다. 모래성을 쌓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물어봅니다. 아이들은 로봇이 출동하는 산이라고 신나게 설명합니다. 아이들이 만드는 모습이나 만들어 놓은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나뭇가지는 왜 꽂았는지 물어보면 아이들의 대답은 더욱 구체적이 됩니다. 자신들이 한 행동을 설명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놀이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놀이는 많은 말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잘 지켜보면 무척 많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노는 아이들과 말을 섞음으로써 함께 놀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추임새'의 세계는 어른의 독특한 영역이 될 수 있으며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른의 추임새에 따라서 아이들의 놀이 쾌감이 무척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제 현장에서 들려오는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아이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냅니다. 나는 리듬에 맞춰 약간 어깨를 들썩거린 것뿐인데 아이들은 흥에 빠져 정신없이 춤을 춥니다. 식당 앞에서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입으로 흥겨운 음악을 조금 들려주면 아이들은 리듬에 맞춰 그 자리에서 춤을 춥니다. 어른의 추임새는 아이들에게는 '스위치'와 같습니다. 나는 '호연지기 스위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호연지기란 다름 아닌 '연결'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호연지기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나 혼자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며,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호연지기를 이해한 것은 함께 연결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이들과 잘 논다는 것은 '함께'와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주연배우를 도와주는 조연배우의 포지셔닝과 추임새만 알아도 아이들과 잘 놀 수 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비싼 시간과 돈을 들이면서 아이들의 단순한 말초신경을 자극하기보다는, 집 주변의 공원을 산책하더라도 아이들에게 '놀이 감수성'을 키워주세요. 장난감이 아닌 것을 장난감으로 놀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아이들의 놀이 감수성과 호연지기는 충만한 상태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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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1] 육아서, 육아전문가를 대하는 자세


부모님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거나 책 놀이를 할 때 참으로 난처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처음 내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은 "무척 젊으시네요!"입니다. 그 말에는 의외의 신선함도 있지만 반신반의의 느낌도 있습니다. '아이를 키워보기나 한 거야?' 하는 의심이죠. 그래서 시작할 때 아예 나이와 아이 둘을 키운다는 사실을 밝혀놓고 시작합니다. 부모님들께 신뢰의 시선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동기부여를 주기 때문에 나쁘지 않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책을 펴내고 강의를 자주 다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내 이름 옆에 ‘책 놀이 전문가’, ‘육아 전문가’ 등 ‘전문가’라는 꼬리표가 붙으면서 ‘의심’의 시선이 ‘의존’의 시선으로 바뀝니다. 드디어 강적을 만난 것이죠. 나는 참 난감합니다. 

내 아이와 같은 연령대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어떤 책을 읽히는지, 독서 목록을 추천해줄 수 있는지 여쭤보고, 자신이 구매하려고 하는 책이나 프로그램이 있는데 괜찮은지 여쭤봅니다. 스스로한테 물어야 할 질문을 받을 때는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난감한데, 원칙적으로 답하면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되돌아섭니다. 이런 경우를 계속 경험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질문은 답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동양철학을 ‘나를 향하는 마음공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동양철학은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로 되돌아오는 여행입니다. 동양학을 만들어낸 철학자들이 던진 메시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자신감 때문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집안의 큰 어른인 까닭은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거나, 다른 사람이 책임을 가져가면 힘의 흐름이 그 사람에게 갑니다. 가장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정치지도자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예외 없이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정치를 합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권력공백'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공자가 사랑한 제자 자로가 공부한 방식을 보면 ‘나’로부터 출발하는 동양철학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아직 실천하지 못했다면, 또 다른 가르침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 <논어> 5-13

대구의 어머니들과 강의 겸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습니다. 몇 분의 어머니 중에서 유독 한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칭찬 놀이’를 하면서 서로의 좋은 점을 이야기할 때 그 어머니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은 다른 어머니들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 분의 생각과 육아 철학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육아서나 육아 프로그램을 보거나, 육아 강의를 들으면 그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참조할 뿐이에요. 나의 아이, 나의 가족이니까요.”라고 한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부모님들께 듣고 싶은 바로 그 대답이었거든요. 

내가 의존적인 부모님들의 태도를 불편해 하는 까닭은 그 결과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전문가에 대해서 부모님이 의존하는 태도를 보이면 육아시장과 사교육 시장에서는 전문성을 상품으로 만들어 부모님들에게 영업을 합니다. 부모님의 불안한 마음을 만져주는 영업 전략은 대개 성공합니다. 문제는 그 집의 아이입니다. 원치 않는 책을 봐야 하고, 원치 않는 교육을 받아야 하거든요. 마치 주권 잃은 국가의 서러운 국민처럼, 부모가 육아 전문가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식민지에 사는 백성처럼 안타까운 신세가 됩니다. 사교육계에 있으면서 이런 모습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육아시장이든 사교육시장이든 현란한 '공포 마케팅'을 동원해서 먼저 그 가족의 기를 꺾어서 의존하게 만들려고 힘을 기울이는 마당에, 부모가 먼저 의존을 한다면 무척 반가운 일이죠. 하지만 의존을 하지 않는 부모가 되려면 아이의 행동을 자세히 살피고,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고, 아이가 즐겨 읽는 책을 자주 읽으면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선택과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거든요. 그런데 의존을 하는 부모님들은 대개 쉬운 선택을 합니다. 동양철학이나 인문학을 자주 접하면서 ‘나’를 들여다보면 당연히 의존할 일이 없어지지만, 육아서에 의존하면 의존할 일이 자꾸 생깁니다. 이 문제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골치가 아픕니다. 다만 여기서는 의존하고 쉬운 선택을 할수록 아이가 불안정해지고 위태로워진다는 점만을 경고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동양철학은 ‘나의 행위’에 일종의 절대성을 부여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선언에서 풍기는 자신감이 느껴지시나요? 그러니까 동양철학을 보면 볼수록 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나의 사소한 행동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보여주는 구절을 소개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산을 쌓는 것에 비유하면 한 삼태기가 모자라서 이루지 못하고 그쳤더라도 나는 그만둔 것이다. 땅을 고르는 것에 비유하면 비록 한 삼태기를 덮고 나아갔더라도 나는 나아간 것이다.“
- <논어> 9-18

아이를 잘못 키워도 부모님의 책임이며,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도 부모님의 책임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육아 전문가와 아동 심리학자, 그리고 사교육 전문가가 찾아와도 아이에 대해서 부모만큼 전문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부모님들이 자신감을 갖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는 좋은 육아서 고르는 방법과 좋은 육아 전문가를 만나는 방법에 대해서 소개할까 합니다. ‘어머니께서 잘 모르셔서 그러는 모양인데.’라는 어투를 사용하는 전문가들의 말은 전부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어머니가 잘 모른다면 알 때까지 이해를 시켜줘야지 모르니까 자기의 말을 따르라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양철학에서 교육과 토론의 대명사로 평가 받는 공자와 순임금의 방식을 보면 좋은 교육자란 어떤 모습인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운 분이구나. 순임금은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백성들이 하는 말을 세심히 살피기 좋아하시되, 나쁜 것을 몰아내고 선한 것을 드높이되 그 양 끝을 붙잡으시되 그 중에 중심에 합치되는 것을 백성들께 베푸시니 이것이 바로 순임금인 까닭이구나."
- <중용> 6장

공자가 말했다. 
“나는 유식한가? 나는 무지하다. 다만 시골 사람이 나에게 물으면 허심탄회하게 나는 상하·장단의 양면을 인용하여 성의를 다할 뿐이다.”
- <논어> 9-7

그 다음은 ‘불안 마케팅’, ‘공포 마케팅’입니다. 어떤 책을 보거나 교육을 받지 않으면 마치 큰일 날 것처럼 하는 말은 듣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불안이 시켜서 구매한 것은 반드시 대가를 치릅니다. 구매를 해도 불안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육아서를 읽을 때 불안한 마음이 더 강해진다면 덮으셔도 됩니다. 육아 강의를 듣거나 학원 상담을 받았을 때 불안함이 강해진다면 신뢰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은 ‘의도된 불안’이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편안하게 머무르며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을 무릅쓰며 요행을 바란다. 공자가 말했다. "활쏘기는 군자의 자세와 같으니, (활을 쏘아) 정곡에 닿지 않으면 돌아와서 자신의 자세를 돌이켜보며 찾는다."
- <중용> 14장

조급해 하는 마음은 공격의 표적이 됩니다. 공자와 맹자가 미련해서 뜻을 이루지 못한 걸까요? 고위직 공무원이 되어서 자신의 원하는 정책을 맘껏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요? 사실 동양철학을 읽으면서 나도 이 점이 궁금했습니다. 맹자의 제자 역시 스승의 자세가 답답했나 봅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봅니다. 

진대(陳代)가 말했다. “제후를 만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도량이 협소한 것 같습니다. 이제 이들을 한번 만나보시면, 크게는 왕업을 성취할 수 있고, 작게는 패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록에는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곧게 한다.’ 하였습니다. 아마도 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 <맹자> 6-1장

<논어>나 <맹자> 등 동양철학을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들의 행동이 무척 위선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뜻을 굽히면 많은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한심하게 생각할까? 공자의 제자 자로도 공자에게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백성도 있고 귀족도 있고 토지신도 있고 곡식신도 있는데, 어찌 반드시 독서를 해야만 배웠다고 하십니까?”라는 말로 스승의 ‘유연하지 못함’(?)을 비판하는 대목입니다. 공자는 아예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거지만 사랑을 채워준 만큼 아이들은 자라고, 사랑이 왜곡되거나 편향되지 않고 제대로 전달되는 만큼 아이들이 발전합니다. 인풋(input) 아웃풋(output)의 관계가 명확합니다. 그 사이에 요행은 없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부모님들은 보다 쉬운 방법, 요행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요행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만병통치약을 팔았던 사람들과 같죠. 이런 경우 “어디서 약을 팔아?!”라는 반문을 해야 마땅하죠. 맹자는 아이에게 보탬이 된다는 막연한 기대나, 사사로운 욕심으로 요행을 바라는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결국 뜻을 이룰 수 없을 거라고.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곧게 한다’란, 이익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만약 이익을 가지고 따진다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곧게 하여 이익이 된다면, 역시 하겠는가?
- <맹자> 6-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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