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페인트의 주위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정치적 참여가 가장 활발한 사람은 ‘신상품사업개발단장’이다. 신상품사업개발단의 창립 이념은 ‘이제는 물질보다 정신을 팔자’이다. 정신을 팔다니, 정신을 팔아서 무슨 수익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정신은 어떻게 파는 것인가. 처음에는 수많은 의문이 들었다. 물론 쇼페인트의 친구들은 워낙 특이하기 때문에 이제는 놀라지도 않지만, 그보다 기대가 더하다.

이들의 특징은 특이하지만 유용하고, 기발하지만 평범한 데서 출발한다.

 

신상품단장이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아주 평범한 사연에서 출발한다. 하루는 친구들과 식당에 가서 밥을 시켰다.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밥을 시켰는데, 거기가 먼저 밥이 나왔다. 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맛있게 먹겠습니다'라든지 '감사합니다' 등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단장은 아주 순간적으로 물질과 화폐의 교환으로 대표되는 경제 논리가 일순간 '고마운 감정'으로 인해 무너진 현장을 포착했다. 그렇다. 물질의 교환과, 고마움의 표시는 분명히 다른 차원이다. 곧이어 단장의 상에도 밥이 왔다. 그도 '감사히 먹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환히 웃으며, '맛있게 드세요. 김치 이번에 담가서 맛이 잘 들었을 거에요' 하고 한마디 붙이는 것이었다. 이 순간 받은 '정감의 세례'를 통해 이 일에 뛰어들었다고 술회하였는데, 참 시시하기도 하다. 습관보다 미미한 정감이 거대한 관계론을 낳을 수 있는가. 아무튼 그 '관계론'은 이만큼 커진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와 만나며 요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완결된 텍스트 운동’이 바로 신상품개발사업단의 작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완결된 텍스트 운동’이란 몇몇 인식 있는 신문사에서부터 시작한 운동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텍스트인 신문에서부터 한글맞춤법을 준수해 학생이나 일반인들, 외국인들이 한국어, 띄어쓰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한 운동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구호는 ‘모든 신문 텍스트의 한국어 문법 교재화’이다. 이 운동은 상당한 반향을 얻고 있다. 외국에서도 이 운동을 벤치마킹해서 자국 언어 사용의 정확성을 높이고 있다.

이로 인해 멀게만 느껴졌던 한글맞춤법이 보편화되었음은 물론, 한글맞춤법이 한글의 특징을 잘 구현한 작품이라는 사실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글의 어떤 성분과 어떤 성분이 만나면 유독 특이한 화학 현상을 일으키는가도 사람들은 잘 알게 되었고, 거의 모든 종류의 글쓰기에 맞춤법이 활발히 적용되고 있다.

이것이 시작된 계기는 신상품개발사업단에서 출판한 ‘신문맞춤법’이라는 책이 화제를 일으키면서부터이다. 신문맞춤법은 신문사가 맞춤법을 좀처럼 지키지 않아, 국민들의 언어 생활을 오염시키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책이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부분은 신문맞춤법 총칙 제2항이다.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는 총칙 2항을 교묘하게 변형해 ‘문장의 각 단어는 붙여씀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붙여 씀’도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나 신문맞춤법은 이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신문사 측은 지면 배분 관계로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해 왔으나, 조사 결과 띄어쓰기를 엄격히 적용해도 지면의 1%를 초과하지 않으며, 그것도 각 기사의 폭을 줄이거나, 남은 여백을 이용하면 대부분 해결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눈에 띄는 조항은 ‘단위명사는 절대로 띄어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물론이고, 오백 원 같은 것들은 의미를 구분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의 모든 문장을 '붙여쓰기'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신문맞춤법은 띄어쓰기 조항을 특히 어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업단의 노력으로 몇몇 대형 신문사를 시작으로 교열부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각 신문사는 맞춤법을 준수하고 있으며, 지금은 교재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사를 써내고 있다. 이 운동을 온몸으로 겪은 한 기자는 ‘맞춤법이 마치 반드시 지켜야 할 법률인 것처럼 생각돼 반발심도 생겼으나, 우리말을 절묘히 표현한 작품임을 알게 되고 나서 우리말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였고, 다른 기자는 ‘맞춤법 공부가 문법 능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논리력도 상당히 강화시켜주었다.’고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이 사업단이 ‘악학대사전(惡學大事典)’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단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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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어깨 적성검사연구소 엮음 / 박문각 / 2005년 10월

 

이 책을 만들 때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전공적성이란 걸 처음으로 알게 해준 책이었거든요. 수능도 아닌 것이 논술도 아닌 것이 사람 머리를 이랬다 저랬다 정신없게 만들었어요. 한양대는 전공적성의 원천기술이자 특허를 가지고 있는 학교이고, 지금도 참신한 문제를 자꾸 제작하고 있어서 저를 괴롭히고 있지요. 한양대는 언어간 관계를 중시하는데, 사각형을 그리고 위쪽 단어와의 관계, 옆쪽 단어와의 관계, 대각선 위쪽 단어와의 관계, 이렇게 삼단 관계를 묻는 문제를 출제하고 있고, 특히 패러디 속담에도 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양대 지원하시는 분들은 패러디 속담과 다이나믹한 단어 관계를 숙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주대는 두 번째로 괴로운 책입니다. 이 책 때문에 저는 직업병에 걸렸답니다. 아주대는 특히 자료해석 문제가 많이 나오거든요. PSAT라는 공직자 직무적성 시험에 나오는 자료해석 문제를 활용하여 만들었는데, 언제까지 남이 만든 자료를 가지고 활용할 수도 없고 해서 신문을 열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신문을 보고 그래프가 있으면 저는 딱 두 가지만 생각하죠. '이것으로 문제를 만들 수 있을까, 없을까?' 그렇지만 문제 만드는 재미가 있는 교재였습니다.

 

 

 

 

 

경희대는 아주대 계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인성검사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죠. 인성검사야 뭐 제가 바른생활맨이다보니(퍽) 만드는 것이 수월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인성검사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생활이 아니라 상상력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극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대체로 논리추론 비중이  크고, 아주대와 한양대 딱 중간에 놓여 있는 경향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전공적성을 나눌 때 '한양대 계열'과 '아주대 계열'로 나누거든요.

 

 

 

 

 

인하대는 한양대 계열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양대는 어법을 중시하는데 인하대도 마찬가지로 어법에 많은 문제를 배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추나 단어간 관계, 일반논리 같은 것이 주로 출제됩니다. 그렇지만 인하대만의 색채가 조금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요즘 인하대랑 아주대 모의고사 만들고 있는데, 머리에서 피가 나올 지경입니다. 그래도 좋은 문제 만들려고 경쟁사들의 문제들을 모조리 활용하고, 신문이나 언어 관련 홈페이지에서 소중한 자료들도 참고해가면서 막강 모의고사를 만들고 있으니, 학생들의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듯싶습니다.

 

 

 

 

 

홍익대는 한양대 계열의 막내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공적성 문제중에 가장 개성이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홍대는 이번 전공적성 시험을 통해 막강 수입을 올렸다고 합니다. 홍대가 전공적성을 폐지하면 제 일은 하나 줄어드는 거지만, 암튼 홍대만큼 기본기를 강조하는 대학은 없을 것입니다. 응용적 사고능력보다는, 어법과 일반논리(삼단논리), 단어간 관계 등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자료해석이나 응용논리 비중은 약한 반면 이들 기본기 문제들이 많이 출제되니, 혹시 전공적성 시험에 대비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저는 맞춤법이나 어법을 존중하는 한양대 계열(한양대, 인하대, 홍익대)의 책에 애정이 갑니다.

이렇게 대학별 실전편을 만들다 보니, 어느덧 저도 전공적성에 대해서는 준전문가가 다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진화하기 때문에 사태의 추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양질의 문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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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PC방 안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데, 컴퓨터는 모두 켜져 있었다.

‘이 많은 컴퓨터를 온종일 가동하려면 전기세 꽤나 나오겠군.’

“인터넷 박물관에 온 걸 환영해.”

쇼페인트가 저렇게 맑고 밝은 얼굴을 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데, 녀석은 마치 정말 가고 싶어하는 곳에 온 것 같은 표정이었다. 늙수그레하게 생긴 청년 한 사람이 컴퓨터 사이를 기웃거리며 간간이 마우스로 클릭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인터넷 박물관장님이야. K씨라고 흔히들 부르지.”

쇼페인트는 ‘님’자까지 붙여가며 그를 소개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서울 한복판의 PC방에 손님이 한 명도 없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안의 넓은 인터넷 세계를 떠돌면서 시민들이 작성한 문건들을 검색하고 있어. 이 컴퓨터들은 ‘디지털 진딧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야. 사람들이 작성한 내용에서 동일한 주제를 검색할 뿐만 아니라, 그 문건 전후의 문건을 검색해서 그것과 연관되는 것들을 찾아내는 거지.”

“다음 문건이 그것과 연관되는지 안 되는지 컴퓨터가 어떻게 알 수 있어. 동일한 키워드가 없으면 찾을 수 없잖아.”

“그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대개 문건의 앞뒤는 동일한 주제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 분석 결과 나타났어. 그래서 앞 뒤의 문건이 꼭 그 키워드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이것, 그것’ 등의 대명사를 통해 그 주제를 표현할 확률이 큰 문건들을 검색해내지. 그것이 디지털진딧물의 역할이야. 진딧물들은 단백질이 주 영양분인데, 식물의 즙은 단백질 함량이 얼마 되지 않거든. 그래서 포식하기 마련인데, 진딧물이 적정량의 단백질을 얻으면 탄수화물은 과다하게 흡수된 상태이지. 그래서 남는 당분을 배설하게 되는데, 우리가 얻고자 하는 정보도 단백질과 같아. 그래서 하나씩 클릭하면서 유용한 정보인지를 결정하는 ‘디지털개미’가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러면 일일이 클릭해야 하잖아. 그걸 어떻게 다해.”

“그래서 인공지능 개미를 개발하고 있는데, 아직 개발단계라 사람이 일일이 클릭을 해줘야 하거든.”

쇼페인트는 아쉬운 표정으로 설명한다. 디지털개미가 차를 내온다.

“아저씨는 이렇게 하루종일 컴퓨터를 가동시키면서 어떻게 생활을 유지하세요?”

나는 이게 참 궁금했다.

“현대 사회는 정보 강자의 세상 아닌가요. 나는 정보의 강자랍니다. 그래서 벌이도 권력도 명망도 이 정보를 통해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찾고자 하는 시대정신에 비하면 먼지만큼도 못합니다.”

“음... 일리가 있군요. 그런데 실명을 쓰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무한공유 시대에 이름이란 한낱 기호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이름이 없고 그냥 시민이라는 명칭만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뭐. K는 Kim의 약어입니다. 우리나라에 김씨가 가장 많잖아요. 그래서 많은 것으로 기운 것일 뿐,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우리가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 나이를 매긴다면 인터넷의 나이는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인터넷 시대는 수백 수천 년 동안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어렵잖게 예견해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사용하던 물품은 유품이 되듯이 그가 몸담았던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 수없이 남겼던 게시판의 글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그것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3년이 넘은 휴면 계정이 있으면 먼저 주인에게 메일을 보내 존재 유무를 확인하고, 답변이 없으면 파일 형식으로 담아서 인터넷 박물관에 저장합니다. 여기서 미래를 생산할 수 있어요. 아직은 계획에 불과하지만, 좋지 않은 마음을 품은 세력들이 이 정보를 마음대로 유용하기 전에 이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나는 마치 한 편의 공상과학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시민들의 정보라는 것이 그렇게 가치가 있나요?”

“지금은 아직 ‘무한공유 시대’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옛 시대의 체질을 가지고 있어서 지식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적 재산권’이라는 제도가 그것을 말해주죠. 옛 조상들의 말에 ‘큰 부자는 큰 장사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식을 널리 공유하는 것만큼 인류의 지식을 크게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지식 공유권’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무한공유 시대가 오면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할 사람들은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자신의 존재를 찾지 못했어요. 만약 제 모습을 찾는다면, 그 시대에 맞는, 시대 정신에 맞는 행동을 할 겁니다. 그 첫 영토가 우리나라의 인터넷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아직 확신할 수가 없다. 쇼페인트와 박물관장의 표정은 너무나 의연하다. 그 시대가 오면 내가 정보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말인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천의 얼굴과 천의 목소리를 가진 누리꾼들의 입에서는 듣기 불편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토론 게시판이나, 포털 사이트에서 이야기를 들으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수많은 오해와, 폭력, 범죄가 자행되고 있는 우리의 영토에서 이렇게 무서운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진정한 주인이 된다고. 나는 납득할 수 없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허위의 탈을 쓰고 있을 테니, 빨리 그것이 벗겨졌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내심 그 허위의 탈이 쇼페인트나 박물관장의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소망이 마음 한켠에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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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페인트는 오늘도 분주하게 외출 준비를 하고 었었다. 내가 옆에서 뭘 하든 말든 못 본체다.


“쇼페인트 오늘 누구 만나러 가는 모양이지.”


쇼페인트는 아무 대답이 없다. 뭔가 생각에 잠기듯 멍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지만, 이때는 녀석은 눈을 감은 것이나 다름없다.


“너 혹시 발굴학이라고 들어봤니?”

“뭐, 고고학을 말하는 거니?”

“고고학이 아니라 발굴학 말이야.”

“참, 세상에 발굴할 신기한 것이 어디있담. ‘놀라운 것은 이미 나에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광고문구도 모르니?”


쇼페인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 나는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이 생길까 해서 황급히 뒤를 따른다.


“사상은 시대정신을 따라 움직여. 그런 의미로 보면 ‘발굴학’은 가장 현대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어.”

“도대체 발굴학이란 게 뭐야? 시대정신은 또 뭐야. 시대정신은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혔다고 말한 사람이 이제 와서 다시 시대정신 운운하는 것은 너답지 않은데.”


“발굴학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주요한 문제로 다루는 학문이야. 학문이 주류를 따른다면 발굴학은 비주류 학문이라 할 수 있지. 예전에는 몇 사람의 선각자가 열정적인 성찰을 통해 우둔한 시민들의 등불이 되었다면, 이제는 시민들이 시민들을 향하여 들불이 되는 거야. 선각자들은 내적 성찰을 통한 외적 실현이 인생의 방향이라면, 시민들은 내적 성찰을 통한 내적 실현이야. 참여는 하되 이끌지는 않는 것이 시민들의 특징이야. 그렇지만 지식의 무한공유 시대가 되면서 선각자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지식의 권위자가 되는 시대가 왔어.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발굴학이지. 발굴학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지식이나 사상, 문화의 흔적을 찾아내 우리의 시대정신을 찾아내는 거지.”

“시대정신이 ‘알려지지 않은 시민들’에게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예전과 지금은 차이는 너무도 뚜렷하지 않니. 예전에는 곧잘 뭉쳤어. 시대정신이 굉장히 명확했기 때문에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어때? 시대정신이 아예 없어 보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발굴학자들은 시대정신이 이동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어. 시대정신은 시민들의 조용한 앞마당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 거지. 발굴학의 목표는 그것의 조각들을 모아서 하나의 커다란 밑그림을 그리는 거야. 나도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말야.”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허름한 동네 PC방 앞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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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 지음 / 민음사 / 2003년 6월

 

김수영의 산문집을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또 즐겁게 난다.

세상의 온갖 회유와 압박도, 오늘날의 회자와 찬사도 결코 녹일 수 없었던 그의 비판정신. 특히 내적 자기성찰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던 그였다. 그가 남긴 '창작자유의 조건'을 펼쳐보자.

이승만 정권 때의 일이다. 펜 클럽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분들을 모시고 조그마한 환영회를 갖게 된 장소에서 각국의 언론자유의 실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끝에 모 여류시인한테 나는 "한국에 언론자유가 있다고 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 허, 웃으면서 "이만하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하는 태연스러운 대답에 나는 내심 어찌 분개를 하였던지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려도 그 말만은 3,4년이 지난 오늘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中間辭)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설, 평론가, 시인이 내가 접한 한도 내에서만도 우리나라에 적지 않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의 후진성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더 큰 근본문제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창작자유의 조건' 중에서)

정치와 법치는 문학과 예술보다 비속하니 한 사람의 인권쯤은, 그것도 대한민국 국보법 안에서 이를 무위로 만들려는 괘씸한 몸짓쯤은 초당적으로, 초법적으로 다뤄도 된다는 말인가.

천정배 법무장관의 인터뷰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 김수영을 떠올리게 되었다.

“터무니 없이 본질을 벗어나는, 어떤 면에서는 본질을 호도하는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는 국가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중 하나가 법치주의다. 형사소송법은 불구속 수사 원칙, 즉 도주나 증거 인멸 우려가 소명되지 않으면 불구속 수사한다는 대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모든 국민, 모든 인간, 외국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돼야 한다. 하루에도 수백명씩 구속되는데 왜 한 사람만 봐주냐는 얘기가 있다. 턱도 없는 얘기다. 한두 명 제외되면 어떠냐는 사고방식은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한참 먼, 군국주의적·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본질적으로 국가는 국민 개인의 인권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저급한, 오히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비판이다. 본질을 호도하려는 정치적, 정략적 의도라고 의심하고 있다.”(천정배 법무장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절대적이어야 할 것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고,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은 것을 규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와 법치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제도와 관습과 법률을 뛰어넘는 것은 장대한 이상(理想)이어야 한다.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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