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연재를 들이밀어서 '말잔치'의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이제부터 제 전공 분야인 철학의 키워드를 가지고 현대의 문제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유명한 사조나 철학적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오로지 현대의 문제에 기탁하여 키워드를 만들어가는 것이 이 연재의 큰 줄기입니다.

徐子曰 仲尼稱於水曰 水哉水哉여하시니 何取於水也시니잇고 孟子曰 原泉이 混混하야 不舍晝夜하야 盈科而後에進하야 放乎四海하나니 有本者如是라 是之取爾시니라
맹자 이루 하 18장
※ 科 구덩이 과, 盈 찰 영, 而 말이을 이(어조사 이), 後 뒤 후, 進 나아갈 진

(맹자의 제자) 서자가 묻습니다. "중니(공자의 자)께서 도도한 물줄기 앞에서 '물줄기로구나! 물줄기로구나!' 하고 두 번이나 탄성을 자아냈는데, 도대체 이 물에서 어떤 뜻을 취하신 것입니까?"
맹자가 답합니다. "샘의 근원은 졸졸 흘러 밤낮 가리지 않고,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나아가 (마침내) 큰 바다(사해)에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 점을 취하신 것이다.""

#장면 1

수영복 세트를 만드는 A중소기업은 2002년에 여성용 수영복 세트를 9만원 전후로 공급했지만 올해는 7만원대에 공급한다. 인건비와 물가는 올랐는데 납품가는 3년새 20% 정도 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에 할인점이 챙기는 판매수수료(마진율)는 20%에서 25%로 오히려 늘어났다. 할인점 간에 가격경쟁이라도 붙는 때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할인점의 세일 경쟁이 붙으면 가격 하락 요구는 더욱 거세진다. ㄱ마트에서 20% 세일하면 ㄴ마트는 30%로 해달라고 요청한다. 혹은 납품업체가 판매 과정에서 발생하는 매장 청소비, 광고비·판촉행사비, 매장 직원 인건비를 할인점 대신 부담하는 게 백DC다. 보통 매출액이나 납품가의 5~15% 정도 된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할인점은 납품업체의 피를 빨아먹는 통에 납품업체는 할인점을 '흡혈귀'라고 부른다.

“물건을 창고에 쌓아둘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매출의 98%가 할인점에서 이뤄지니 하나라도 더 팔려면 할인점에 들어가야 해요. 치사하지만 할인점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망하니까요.”(수영복 제조업체 ㅎ부장)

"납품업체와 거래가 공평치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를 부담하더라도 납품하겠다는 업자가 한참 줄을 서 있습니다. ‘갑’인 할인점이 손해볼 장사를 할 이유가 없어요. 이게 바로 경제잖아요.”(할인점 MD 김모씨)

기사출처 : 경향신문 '05년 9월 13일자 기획기사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3. 납품업체는 할인점의 ‘봉’ 중에서

#장면 2
 
현대자동차의 하도급 업체 횡포도 유명하다. 이들은 하도급 업체 B 중소기업에게 납품을 받으며 납품 원가를 첫 해에는 2.5%, 두 번째 해에는 2% 인하했다. 이 결과 B 중소기업은 12억원의 손해가 발생했는데, 전 직원의 한 달 임금이 2억원이므로, 6개월 임금을 상납한 것이다.
때문에 하도급 업체 사이에서는 현대자동차를 위시한 대기업에게 "마른 수건을 쥐어짠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하도급 업체는 현대자동차 측에 납품 원가를 깎지 말아줄 것을 호소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운(社運)이 기울 판이기에, 공정위에 제소하여, 공정위는 하도급법 위반 혐의가 중대하니 원가 삭감에 대한 시정 조치를 명령했다. 이듬해 B 중소기업은 도산하고 말았다.

자료 출처 : KBS 특별기획 '양극화사회 희망의 로드맵(3)'('05.12.8일자 방영분)

이 결과 대형 유통점(할인점은 무슨 놈의 할인점!)과 대기업의 순이익의 급상승하는 반면, 하도급 업체, 납품 중소기업의 매년 순이익은 급감하여, 도산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무리한 투자를 해서라도 해외로 터전을 옮기는 일도 잦다.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중소기업의 공동화 현상(空洞化現狀)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제기반은 잠식하는 동시에 대기업 할 것 없이 공멸로 가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노동자의 87%가 중소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중소기업이 떠나간다면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대기업의 폭리 → 대기업,중소기업 간 영업이익 편차 극대화 → 중소기업 잠식, 혹은 해외이전 → 중소기업 공동화 현상 → 경제 성장동력 정지 → 대규모 실업 사태 → ?

위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이러한 현상이 대기업의 이익이 될까.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으로 가장 완숙하다는 '大'라는 글자를 허락할 수 있을까?

# 장면 3

오늘날의 포스코가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중소 협력업체와의 동반성장이 있었다. 포스코는 공정에 있어서나 제품 생산 등 핵심 개발 업무에 중소기업을 적극적은 파트너로 대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한 해 얻는 이익은 수십억 원에 이르고 있으며, 세계에서 1,2위를 다투는 철강업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스코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거대한 기업 안에 개미만한 기업들이 앞, 뒤, 양옆, 속까지 받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이익은 중소기업의 개발 투자비로 책정된다.
(포스코는 수익을 거둔 첫 해의 이익을 모두 중소기업에 배당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현대중공업도 마찬가지이다. 중소기업 C는 현대중공업의 판매 유통망과 인지도를 이용해 세계 각국에 커다란 매출 실적을 올리고 있는데, 그것은 현대중공업의 인지도 상승과 기업 실적에 적잖은 도움이 된다. 꼭 현대중공업의 힘이 아니더라도 중소 업체가 그 길을 통해 소비자에게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준다면, 그 이익은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대우조선은 아예 협력업체 직원을 데려다 교육시키고, 이윤 보장을 확실히 해주고 있다. 이 투자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료출처 : KBS 위의 프로그램

이와 같이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우리 경제의 주축이기 때문에 서로를 이윤의 도구로 보느냐, 공영의 동반자로 보느냐는 국가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이 두 가지 인식이 존재한다. 그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人無遠慮 , 必有近憂 (사람이 넓게 사려하지 않으면, 근심거리가 가까워진다-논어)라는 말과 같이, 우리 기업들이 넓은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눈앞의 이익에만 어두운 모습이 안타깝다. 기회가 있으면 사마천 사기열전의 '화식열전'이라도 한 편 봤으면 한다.
"큰 장사꾼은 큰 장사를 한다."
제발 큰대 자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위의 몇 가지 사례만으로로 '盈科而後 進'(과영이후에 진)의 의미가 밝혀졌다. 구덩이 중에는 큰 구덩이와 여러 개의 작은 구덩이가 있다. 하지만 물은 큰 구덩이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작은 구덩이가 차지 않으면 반드시 나아가지 않는다. 이 물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많은 부분에 적용해볼 수 있다. 이 키워드처럼 스펙트럼이 넓은 것도 없으며, 사회 문제의 많은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에 '마수걸이'로 정했다.

나는 이 키워드를 우리 사회의 경제 문제, 특히 대기업과 하도급 간의 공생관계의 측면에서 이야기했지만, 정치, 사회, 역사적으로 이 키워드를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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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논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초기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

우선 알 만한 분은 아시겠지만, 책을 많이 사게 된다.

그렇지만 나의 지갑이 파산 지경에 이르지 않는 까닭은

내가 아주 운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즉, 공적으로도 살 수 있고 사적으로도 살 수 있고,

혹 운이 좋으면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암튼 지난 주와 이번 주에 구매한 것만 10만원 가까이 된다.

그 중독 현상에 일조한 책들을 헤아린다면

 

 

 

 

'21세기의 동양철학' 을유문화사 60주년을 기념으로 60개의 주제로 풀어낸 기획작이다. 내가 을유문화사를 좋아하는 까닭은 을유년을 좋아하기 때문인데, 을유년은 내 사상의 어른인 맹자가 태어난 갑자이며, 을유년에 해방되었고, 기억할 만한 일이 을유년에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배운 동양 사상이나 동양사 등 학술적인 분야의 책을 성실하게 만들어왔으므로, 을유문화사를 아끼는 편이다. 그렇다.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던 서양철학사도 을유문화사 '램프리히트'의 서양철학사였다. 책과는 관계없이 을유문화사 이야기만 해버렸당.

 

 

 

 

'글쓰기의 전략' 나는 글쓰기 방법론을 믿지 않는 편이다. 소설 창작 강좌, 시 창작 강좌를 들으면서 그 생각은 더욱 굳혀졌다. 하지만 논술 선생을 하면서 글쓰기의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좀 불온한 구석이 없지 않지만, '가르치기' 위해서는 도식과 방법이 있어야 하겠고, 나는 그들을 가르치며 도식과 장막을 쳐놓는다. 그들은 아프락사스의 새처럼 나의 도식을 쳐부숴야 하리라. 흐흐흐

 

 

 

 

 

'대담' 나는 도정일 선생을 좋아한다. 현대적 감각의 평론가이자 정감 있는 어른 같다. 내가 이야기를 트는 신문사의 기자가 또 존경하는 마음의 스승이 사회학자 도정일이다. 그에게 처음으로 '냄비근성'에 대해 들었다. 어떤 현상을 이론으로 키워드로 표현하는 방법은 그에게 배운 것이다. 이번에 그와 과학자가 편안하게 이야기를 한다길래 구미가 당겨서 '긁었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1~2권 세트 , 이건 순전히 충동구매로 사는 것이기도 하고, 이때까지 우리의 스승(그것은 언어학도의 스승이라는 의미로)이 쓴 학술적 저작을 한줄도 보지 않았다는 죄송스러움이 마음에 가득 남아 있었고, 내가 분개하는 미국이란 나라의 비판적 지식인의 '참여적'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데 따른 미안함도 있다. 촘스키는 여러분들이 아시듯 '변형생성문법'이란 언어학의 지평을 연 언어학자이지만, 비판적 지식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침 위 세 권의 책을 받고 나면, 마일리지가 10,000원이 되고, 결국 내 사비가 1만원 대로 드는 데다가, 요즘 이벤트 기간이라 3권의 책을 더 주는 이베트 기간이므로, 나는 고도의 속어림에 따라 '긁고 말' 것이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하나, 둘'

이것은 순전히 알라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의 표현이자, 나의 기본적 역사 소양을 만족시키기 위해 산 책이다. 얼마 전 알라딘 서평단에 선정되어 '세계사 교과서'를 공짜로 보게 되었다. 그 때의 감동이 다시 찾아온다. 늦지 않게 서평을 썼고, 그 서평이 호응이 좋은지 4개의 추천 별딱지도 받았다. (그 후로 9개의 추천과 땡큐를 받아서 마일리지가 두둑해졌습니다. 서평 하나 잘 쓰면 읽고 싶은 책 한 권 정도는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서평 강추!)

쇼펜하우어가 그랬다지 않은가. 그가 헤겔에게 도전해 그 영광을 빼앗을 요량으로 같은 학기에 강좌를 마련했다. 하지만, 헤겔의 강좌에는 수강생이 미어터진 반면 쇼펜하우어의 강좌에는 수강생이 2~3명뿐이었다고 한다. 쇼펜아우어 왈 "너, 헤겔 선생의 강좌에 가지 않고 어째서 이 강좌를 신청했냐?" 그의 제자 왈, "헤겔 교수님의 강좌는 너무 사람이 많아서 들을 수가   없었..." "예끼 이놈아!" 하고 강의실 문을 걷어차며 나가버렸다는 이야기.

또다른 이야기.. 쇼펜하우어가 드디어 뜨기 시작했다. 신문에 대서특필 보도가 되고, 평론가들의 찬사는 연일 계속되었다. 그 일을 기록한 철학사가의 말이 더욱 재미있다. '철학가로서 생전에 이렇게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사람은 철학사적으로 드물다. 그리고 광적인 탐식가처럼 관련 기사마다 스크랩해서 기쁨을 숨기지 않으면서까지 꼴불견이었던 철학자도 그 열에서는 그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뭐 쇼펜하우어 이야기는 한담이고, '세계사 교과서'를 보기 얼마 전에는 서중석 교과서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한국사, 현대사, 세계사의 교과서적 소양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의 '구매 행위'였다.

이 모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졌으며, '긁혔다.'

여기서 한 가지 명언이 나온다.

한 번 긁는 순간은 짧지만, 그것을 다 소화하려면 그보다 좀 길게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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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5-12-09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견물생심이란 말이 딱이여요. 하루에도 몇번씩 가게를 들락거리는 꼴이니 오죽하겠어요^^

승주나무 2005-12-0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한 번 다니면, 자꾸 새롭고 흥미로운 게 눈에 밟히니까.. 어찌 고양이가 생선을 마다하겠어요..^^
 

실은 나는 이론가다. 나만을 향하는 이론일지는 모르겠지만, 영감이 떠오르면 어떨 때는 시가, 어떨 때는 이론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나중을 위한 일종의 메모이다.

 

빛은 지속적이지는 않지만, 순간 강렬히 빛난다.

빛에는 저장이나 전승, 패거리 등의 집합, 인위적 구성이 불가능하다.

역사와 철학도 나를 향하는 하나의 빛이다.

나는 챙겨둔 지식의 척도로 사물을 보지 않고,

오로지 끊임없이 일신하는 한줄기 빛과 같은 직관으로

현실의 어떤 문제를 향해 빛을 보낸다.

그 때의 철학과 지식은 그 문제와 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스팩트럼을 뽐내며

여러 사람을 향하여 명멸한다.

누군가 그 빛을 기억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강렬한 빛이 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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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넷'이라는 곳에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때도 없었다. '넷'이 없었을 때는 멱살잡고 싸우더라도 논리가 있었고, 경청이 있었고, 마무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넷'의 세계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뱉는 것도 아니고, 싸는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말과 같이 구역질이 난다.

친구들과의 대화 중 나는 이 사태를 '신 전체주의'로 규정했다. 독일이 2차세계대전을 시작하기 전 독일 사회는 국가사회주의가 횡행했고, 실업률이 비상식적으로 떨어져 빈부격차가 심했다. 그들에게는 '상식'보다는 '전설' , '인생 역전', '영웅' 등의 환상적인 기대가 마치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아래 네티즌의 말과 같이 이 문제는 이미 언론의 윤리, 과학의 윤리, 과학은 커녕 상식의 수준도 떠나 있는 것 같다.
짧은 시간 내에는 이렇게 취약한 여론과 언론 환경, 절망적인 관계 등의 분위기가 개선될 것 같지 않다.
아무래도 '넷'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 같다.
'우리들의 넷 윤리'는 내게는 세상 어떠한 윤리보다 더 실현 불가능하고 기대 불가능한 일일까. 오늘은 잠보다 절망이 앞선다.


문제는 황박사는 이미 추종자에게 종교 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예수가 행한 기적을 말이 안된다며 증명해보라고 한다면 신도들과는 절대 대화가 통하지 않을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믿음에 관한 문제 즉 종교에 관한 문제이기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이글 역시 참 좋은 글이지만.. 이글을 읽고도 황빠들은 아무 감흥이 없습니다. 왜냐면.. "믿으면 되는것을 이런 골치 아픈 고민을 할 이유가 없는것이죠" 즉 황우석은 종교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학으로 접근하고자 하기에 충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 과학 갤러리의 한 네티즌

우리가 저명인사를 통해서 재확인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는 것만큼, 커다란 성과나 인물을 통해 이미지의 편승을 시도하는 심리도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월드컵 4강국이라는 고착된 이미지가 한국 축구에 장애적 요소와 압박으로 작용했듯이, 세계 최초 줄기세포 복제, 개 복제라는 성과는 분명 자랑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들의 이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4강을 할 수도 없고, 세계 최초의 역사를 계속 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황우석이라는 하나의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황우석 씨도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발언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숫눈) 위를 건너듯이'나 '내가 여자였어도 난자를 제공했을 것이다' 등의 발언은 격정적인 한국인의 심리를 제대로 이용한 고도의 전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황우석 씨와 그 과학적 발견 등 이 주제와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2002년 '정몽준을 대통령으로!' 하고 열광하던 그때와 지금 대상만 바뀐 황우석 열풍, 그리고 3-4년 후. 어떤 분위기일지는 예측할 수 없겠지만, 지금과는 굉장히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알리딘에 남긴 나의 댓글

과학하는 것이 벼슬이 아닙니다. 그리고 Ph.D 이것도 벼슬이 아닙니다.
과학자 소위 전문가들은 머나 먼 옛날 부터 일종의 고급 사회 계층을 형성해 왔습니다. 물론.. 현 사회도 그렇지만 ..

남들 보다 이 분야에 대해 조금 더 많이 배워 조금 더 많이 알 뿐인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자연과학 특히 순수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인문과학과 같이 가야 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요성도..
Ph. D 라는 것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죠.

한국내의 인문 과학의 몰락과 현 사회의 패러다임의 부재는 같은 맥락을 취하고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정신적인 과학을 바탕으로 해야 순수 과학이 나오고 실용 과학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니까요. 과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과학자 나름데로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어야 겠죠.

그것이 현 사회의 패러다임와 일치하지않을 수도 있고 공통된 부분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 이데올로기는 권위가 아닙니다.

과학자 소위 전문가라 해서 누구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감히 누가 나한테." 라는 권위는 매우 조심해야 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과학자의 자존심이 권위를 세우는 것은 절대 아니고 이 권위 자체가 과학자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각자의 유전적인 영향, 환경, 민족성 등등에 영향을 받아 각자의 고유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겠죠. 이러한 각자 개인나름의 독특한 이데올로기는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조그마한 점에 수렴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이 사실들이 진실이 아니고 또한 진실이라고 해서 모두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실과 진실의 혼돈입니다.


그냥 이번 사태를 바라보면서 Ph.D의 Ph는 역시 소중하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봅니다.
- Bric의 한 네티즌

좋은 전망과 자신감을 갖되 균형감각도 함께 견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윤리와 학술적 검증과 이성과 합리성을 충족시켜가면서도 충분히 국익을 구현하는 연구를 할 수 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국민적 사랑과 신화 속에 당연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방기되지 않았는지 성찰해봐야 하는 것이다. 환상적 이익을 보면서 오히려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정신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 경향 언바세바의 네티즌 칼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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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12-0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정보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해 준 반면에 수 많은 지식, 생각들을 노이즈처럼 여기게 만드는 것 같아요. 가령 검색을 하면 내가 찾는 정보만 찾고, 나머지는 버리듯이 점점 '대화'가 힘들어진다 라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문제는 유사의견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부류들이 덩어리가 되면서 타인의 의견을 압도하고 관철시키려는 폭력성을 드러낸다는 점이죠. 가령 방송국이나 특정사이트를 '방법'하는 형태로... 이게 또 무지 가벼워서 유행처럼 퍼지고 놀이로 정착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고... 백색테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흐..

승주나무 2005-12-0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생각이 박혀 있는 네티즌이라면 언제나 '짜증나는 퍼즐'을 하듯, 수많은 말의 형상 중에서 '말'을 찾아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문맥을 인식해서.. 모든 댓글에 '반말'을 금지시키고, '존댓말' 시스템을 정착시키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그러면
'참 개아들이시군요.'
ㅡㅡ; 똑같나요?
 

 한글 맞춤법의 특징 중 유달리 중요시되는 것은 하나의 형태에 이질적인 의미를 가진 낱말을 무척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부치다’라는 단어처럼 하나의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달려 있을 수도 있지만, 그와 발음이 비슷한 ‘붙이다[부치다]’가 ‘부치다’와 혼용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맞춤법 제6장(그밖의 것) 중에서도 마지막 손님인 57항에 그에 관한 방침을 명시해 놓았습니다. 언중들이 이 용어들을 혼용하는 이유는 1. 발음이 비슷하고, 2. 두루뭉수리로 써버리거나 3. 사동/피동형태를 모르거나, 의미를 분별하지 못할 때 등의 이유가 있습니다. 맞춤법에 명시된 것이나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 중 빈번한 것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놀랠 정도로 → 놀랄 정도로

☞ 놀래다 → 놀라다의 사동형(놀라게 하다)



마음으로 바래다 → 마음으로 바라다

☞ 바래다 → 색이 바래다



세 살박이 → 세 살배기

☞ 박이다 → 살이 박이다(굳은살이 생기다)

※ 살이 배기다(백이다) → 살이 박이다



조리다 / 졸이다

조리다

☞ 어육이나 채소 따위를 양념하여 간이 충분히 스며들도록 국물이 적게 바짝 끓이다. (생선을 조리다, 생선조림)


졸이다( 졸게 만들다(사동형) / 초조해하다)

☞ ‘졸다’의 사동형

※ 졸다 : 찌개, 한약 따위의 물이 증발하여 분량이 적어지다. / 겁먹어 기를 펴지 못하다(‘쫄다’는 구어체)



부딪히다 / 부딪치다

무딪히다

☞ ‘부딪다’의 피동형 (~에, ~와 등 다른 사물이나 현상 등에 당하다는 의미)


부딪치다

☞ ‘부딪다’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 (내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뚫고 가거나 마주치다 등 나의 행위가 능동적으로 문장에 드러나는 경우)



가름 / 갈음

가름

☞ ‘가르다’의 명사형(분별이나 구분을 뜻함)

예 : 이 일에 대해서는 가름이 잘되지 않는다

※ 판가름

갈음

☞ ‘갈다’의 명사형(대신하다 또는 바꾸다의 뜻)

예 : 저를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축사를 갈음합니다.



든/던의 차이


'-든'은 선택적 상황에 대한 표현에 활용된다. 다만 반드시 둘 이상의 대상이 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 : 내가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이야!

예 : 네가 그것을 하든 말든. (하던 말던 X)

 

이에 비해 '-던'은 과거의 상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선택적 상황은 올 수 없습니다.

예 : 공부를 하던 교실이다. (하든 X)


이 외에도 시대와 세대에 따라 문화와 지역에 따라 변천하여 구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죽음 / 주검, 놀음 / 노름 등이 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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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1-29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갑니다

승주나무 2006-01-29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니까, 두 번 가져가셨더군요. 좀 더 정진해서 연재 횟수를 늘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