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지은이) | 민음사, 636쪽

한국작가시리즈3 - 洙映寸鐵

김수영 산문 모음



駱駝過飮 



Y여, 내가 어째서 그렇게 과음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예수교 신자도 아닌 내가 무슨 독실한 신앙심에서 성탄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술을 마신 것도 아니겠고, 단순한 고독과 울분에서 마신 것도 아니다. 어쨌든 근 두달 동안이나 술을 마시지 않다가 별안간에 마신 과음이 나의 마음과 몸을 완전히 허탈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나는 지금 낙타산이, 멀리 겨울의 햇빛을 받고 알을 낳는 암탉모양으로 유순하게 앉아있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다방의 창 앞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Y여, 어저께는 자네집 아틀리에에서 춤을 추고 미친 지랄을 하고 나서 어떻게 걸어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어떤 자동차 운전수하고 싸움을 한 모양이다. 눈자위와 이마와 손에 상처가 나고 의복이 말이 아니다.

오늘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가 누워있는 곳은 나의 집이 아니라 동대문 안에 있는 고모의 집이었고 목도리도 모자도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 머리가 무거웁고 오장이 뒤집힐 듯 메스꺼워서 오정이 지나고 한참 후에까지 누워있었다.

옷이 이렇게 전부 흙투성이가 되었으니 중앙지대의 번화한 다방에는 나갈 용기가 아니 나고 나가기도 싫고 몸도 피곤하여 여기 이 외떨어진 다방에나 잠시 앉았다가 집으로 들어갈 작정이다.

인제는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데가 내 고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서 어떻게 앉아있어도 쓸쓸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몹시 쓸쓸하다

B양의 생각이 난다. B양이 어저께 무슨 까닭으로 참석하지 않았는지? 그러고보니 나는 어제 억병이 된 취중에도 B양을 보러 갔던가?그렇다면 이렇게* 이 외떨어진 다방에 고독하게 앉아서 넋없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B양에 대한 그리움이 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B양의 눈맵시, 그리고 그 유닉하게 생긴 입에 칠한 루즈가 주마등과 같이 나의 가슴을 스쳐간다.

Y여, 그리고 자네의 애인인 림양이 춤을 추다 말고 나와서 외투와 핸드백을 집어들고 B를 부르러 간 것도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난 일같이 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이 머리 안에서 마치 안개 속에 숨은 불빛같이 애절하게 꺼졌다가는 사라진다.

나는 지금 무엇에 홀린 사람모양으로 이 목적 없는 글을 쓰고 있다.

이 무서운 고독의 절정 위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겠나?

자네의 모습이며 림양의 모습이며 B양의 모습이 연황색 혹은 연옥색 대리석으로 조각을 하여놓은 것처럼 신선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워 보인다.

이 아름다움으로 사람에게 느끼는 아름다운 냄새를 나는 어떻게 처리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사람에게 환멸과 절망을 느낄수록 사람이 더 그리워지고 끊임없는 열렬한 애정이 솟아오르기만 하는 것이 이상하다.

갈 데가 없으니 다방에라도 가서, 여기가 세상을 내어다보는 유일한 나의 창이거니 생각하고 앉아있는 것인데,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은 언제나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있는 난로 가장자리는 아니고, 몸이 좀 춥더라도 구석쪽 외떨어진 자리를 오히려 택하여 앉기를 즐겨하는 나다. 이렇게 앉아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창을 어린아이같이 내다보는 것이다.

창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무기체와 같이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창밖에는 희고 노란 빛을 띤 낙타산이 바라보인다.***

지금 내 몸은 전부가 공상의 덩어리가 되어있다. 내가 나의 작은 머리를 작용시켜서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신이 그대로 공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말을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 사실인즉 미안하지만 자네는 이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목적이 없는 글이니 목적이 없는 정서를 써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 자인한다.

어느 거리, 어느 다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계집아이들.

붉은 양단저고리에 비로오드 검정치마를 아껴가며 입고 있는 계집아이들. 내가 이 아이들을 볼 때는 무심하고 범연하게 보고 있지만 이 아이들이 생각에 잠겨있는 지금의 나를 볼 때는 여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걸세.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공연히 엄숙한 마음이 드네. 그리고 그들이 스치고 가는 치맛바람에서 나는 온 인간의 비애를 느끼고 가슴이 뜨거워지네.

술이 깨어날 때 기진맥진한 이 경지가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좋으이.

이것은 내가 <안다는> 것보다도 <느끼는> 것에 굶주린 탓이라고 믿네. 즉 생활에 굶주린 탓이고 애정에 기갈을 느끼고 있는 탓이야.

그러나 나는 이 고독의 귀결을 자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네.

거기에는 너무 참혹한 귀결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

내 자신에게 고백하기도 무서워. 이를테면 죽음이 아니면 못된 약의 중독 따위일 것이니까.

자네는 나를 「잊어버린 주말」에 나오는 레이 미란드 같다고 놀리지만 정말 자네 말대로 되어가는 것같애.

운명이란 우스운 것이야.

나도 모르게 내가 빠지는 것이고, 또 내가 빠져있는 것이고 한 것이 운명이야.

실로 운명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야. 그것은 말할수없이 가벼운 것이고 연약한 것이야.

Y여, 자네의 집에서 열린 간밤의 성탄제 잔치는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아하고 구수한 것이었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으이. 이것은 결코 단순한 비관이 아닐세.

낙타산에 붙어있던 햇빛이 없어지고 하늘은 금시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이 무거우이.

Y여, 나의 가슴에도 언제 눈이 오나?

새해에는 나의 가슴에도 눈이 올까?

서러운 눈이 올까?

머릿속은 방망이로 얻어맞는 것같이 지끈지끈 아프고 늑골 옆에서는 철철거리며 개울물 내려가는 소리가 나네.

이렇게 고통스러운 순간이 다닥칠 때 나라는 동물은 비로소 생명을 느낄 수 있고 설움의 물결이 이 동물의 가슴을 휘감아 둘 때 암흑에 가까운 낙타산의 원경이 황금빛을 띠고 번쩍거리네.

나는 확실히 미치지 않은 미친 사람일세 그려.

아름다움으로 병든 미친 사람일세.




원주 

* 뼈가 말신말신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니된 것도 B양이 오지 않은 외로움에 못이겨 무의식중에 저지른 일종의 발악이었던가.

** 아무튼 나는 내 자신이 우습다. 한없이 우습기만 하다.

*** 낙타산은 나와는 인연이 두터운 곳이다. 낙타산 밑에서 사귄 소녀가 있었다. 나는 그 소녀를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약 십오년 전에 동경으로 갔었다. 내가 동경으로 가서 얼마 아니 되어 그 여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 오랜 방랑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지금 그 여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어느 대도시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영원히 이곳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그의 오빠에게로 왔다 한다. 나와 그 여자의 오빠는 죽마지우이다.


<1953. 12>










治癒될 기세도 없이





없는 사람이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운동을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정부의 처사가 상식화되어가고 있는 사태처럼 요즈음 우리들을 다시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국민들이 무엇보다도 염려하는, 앞으로 다가올 경제위기를 가장 자신 있게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씩씩한 정치가들이 국회 안에는 산더미같이 와글거리고 있는데 바깥의 현실은, 비근한 예가 慶北敎組나 京紡파업문제 같은 것만 하더라도 당국의 태도는 여전히 <빨갱이>에 대하는 태도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過政>의 태도라고 볼 수가 없고, 마치 새로 설 新政府의 서곡이나 부지공사처럼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국무총리를 新派가 잡든 舊派가 잡든 우리들의 관심은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총신경은 진정한 민주운동을 누가 어떠한 구실로 어느 정도까지 다시 탄압하기 시작하느냐의 여부에 쏘려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억압 밑에서 살아온 민중이라 억압의 기미에 대해서는 지극히 민감한 것도 사실이지만 반면에 지극히 비굴한 것도 사실이다. 이와같이 자칫하면 과거의 타성에서 수그러지기 쉬운 국민의 혁명적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운동에 원수가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교조운동같은 것이 서푼어치 가치도 안 되는 청리선출보다 훨씬 더 중요하면 중요했지 못한 것은 아닌데 이천만의 늠름한 대변인들은 지금 명분이 서지 않는 감투싸움에만 바쁘다. 이런 말을 하는 나는 교조원도 교원도 아니지만 혁명에 대한 인식착오로 <과정>의 피해자의 한 사람이 된 것만은 그들과 동일하다. 4월혁명 후에 나는 세 번이나 신문사로부터 졸시를 퇴짜를 맞았다. 한 편은 <과정>의 사이비 혁명행정을 야유한 것이고, 한 편은 민주당과 혁신당을 야유한 것이고, 나머지 한 편ㅇ느 청탁을 받아가지고 쓴 동시인데, 이것은 李承晩이를 다시 잡아오라는 내용이 아이들에게 읽히기에 온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 통과가 안됐다. 그런데 이 동시를 각하한 H신문사는 社是로서 李起鵬이까지는 욕을 해도 좋지만 이승만이는 욕을 해서는 안 된다는 內規가 있다는 말을 그후 어느 글쓰는 선배한테 듣고 알았다.

여하튼 詩作 15년 간에, 그것도 두 달 사이에 세 편의 시를 퇴짜를 맞아본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검열에 통과가 안됐다면 싸우기라도 해보겠지만 아는 친구들이 허다하게 있는 신문사에서 멱국을 먹었으니 하소연할 데도 없다. 아무튼 정치하는 놈들이 살인귀나 강도같이 보이는 나의 偏心症은 아직 손톱눈만큼도 치유될 기세가 없으니 초조하기만 하다.

金利錫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평소부터 죽음에는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같이 생각했는데 건방진 생각이었다. 利錫형이 죽고 그후 기관지염으로 몸이 성치 않아서 기침을 자주 하고 있으려니까 나도 그를 따라가는 것같은 생각이 들고 아직도 죽음에 대한 수양이 모자라는구나 하는 절실한 부끄러운 경험을 했다. 이럴 때면 어쩌다 주워읽는 토막글까지도 어찌나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만 읽혀지는지! 馬海松씨의 「살고 있다며」라는 수필을 무심코 읽어보고 깜짝 놀랐고, 한편 또 여간 반갑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利錫형이 舊자유신문사 건너편 화ㄱ집에서 결혼잔치를 할 때에 주례역할을 해준 것이 이 馬영감이었다. 그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 朴女史를 만나러 가서 빈 방에서 앨범을 뒤적거리다가 보니 그때의 사진이 있었다. 馬선생의 왼편에는 崔貞熙여사가 앉아있고 바른편에 노신랑신부가 앉아있고 그 뒤에 元應瑞 朴南秀 金鎭壽 千寬宇 石榮鶴 朴淵禧 黃廉秀 李明成(白水社 주인) 金洙映 등등의 돌팔이들이 제법 의젓하게 서있었다. 약 7년밖에는 안 될 것이다. 우리집 큰놈이 국민학교에 들어갈 임시였으니까 많아야 7년밖에는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이 상당히 오래된 것같이 생각된다. 모두 다 바쁜 탓도 있고, 세상이 그동안에 많이 변한 탓도 있지만 이러한 착각의 원인은 사실은 朴여사와 그가 중년결혼을 한 탓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결혼은 그때보다 적어도 한 10년쯤 전에 한 것같은 착각이 든다. 이러한 착각은 나만의 착각은 아닌 것같다. 利錫도 아마 이런 착각 속에서 살았으리라고 믿어진다.

그러니까 7년 전부터 그는(친구들의 말을 빌리자면) 급작스럽게 변했다. 그가 변하기 시작한 7년 전 그때부터 그는 그전처럼 심하게 술을 마시지 않았고 옷차림이 깨끗해지고 몸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들러리의 朴淵禧 金鎭壽 金耀燮 그리고 나같은 술깡패들은 利錫이가 갑자기 사람이 변하고 매력이 없어졌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변한 것은 利錫이뿐이 아니었다. 모두다 그전처럼 폭음을 하지 않게 되었고 제각기의 생활에 바빠졌다. 그러나 유독 利錫이만이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전날의 주정 때문이다. 주정은 나도 심하고 金鎭壽의 주정도 유명했지만 利錫의 주정도 굉장했다. 주정을 하다가 얻어맞고 다친 큰 사건이 내가 아는 것만 해도 한 너댓번가량 된다. 한번은 이마가 터져서 병원에서 꿰매고 나온 채로 명동의 길바닥 위에 드러누워있는 것을 내가 우리집으로 데리고 간 일이 있었고, 그후 코를 얻어맞아서 콧날이 부러져가지고 고생을 한 일도 있었고, 넓적다리를 다쳤다고 절뚝거리고 다니는 것도 보았다. 이런 주정이 살림을 하자마자 없어졌다. 그는 마당에다 장미를 가꾸기 시작했고 신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집에는 꼭 시간을 대어서 들어갔고 술은 마셔도 과음은 하는 일이 없고, 계절마다 멋있는 색깔의 넥카이를 갈아 매고 나와서 멋쩍은 듯이 픽 웃어 보이고는 했다. 나는 넥타이같은 것에 신경을 쓰는 따위의 취미는 벌써 무시하고 사는 지 오래이지만 利錫이 풀빛 단색 넥타이를 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어쩐지 무슨 향수같은 것이 느껴져서 공연히 다정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신경을 쓰는 것은 넥타이뿐이 아니었다. 모자도 나중에는 베레모를 쓰고 나왔고, 털스웨터도 구제품시장에서 발굴해옴직한 씨의 옷차림은 얼핏 보면 얼빠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가 신경을 쓰고 있는 것들이었다. 나중에는 베레모도 집어치우고 등산모로 바꾸었지만, 나는 그가 소설가가 아닌 것처럼 보았다. 좀 나쁘게 말하자면 그는 《文學界》나 《群像》의 사진에 나오는 고급 소설가들을 본따려고 은근히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는 그런 정도로 나르시스적이었다.

옷뿐이 아니었다. 산보를 하 과일을 깎아 먹으러 들르는 가게도 그가 들어가는 가게는 보통 가게와는 달랐다. 분위기가 되어있는 가게야만 했다. 그는 결혼을 하기 전에 한동안 마포에서 나하고 한 동네서 산 일이 있었지만 그렇게 고생을 할 때에도 그는 미식을 하는 취미를 버리지 않았다. 마포 전차종점에 오래된 설렁탕집이 있었는데 그는 나하고 같이 들어올 때면 곧잘 이 집에를 들러서 그가 좋아하는 우설을 먹으면서 중아침을 했다. 이러한 의식주에 대한 그의 취미벽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모든 것에 실속과 취미가 맞아떨어져야 했다. 그와 함께 문학산보를 하는 동안에 나는 나중에는 길을 가다가도 그가 좋아함직한 음식점이나 과일가게를 그보다도 먼저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러한 취미들도 나쁘게 말하자면 로스트 제너레이션 시대의 유물같은 인상을 주어서 나는 무슨 복습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따라다녔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平壤이 있었던 모양이고, 이 평양에 대한 향수가 그의 취미에까지도 그러한 구태를 버리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평양을 몹시도 못잊어 했다. 혹시 책가게같은 데를 들러서 古書를 찾다가 평양시가지 사진이라도 나오면 싫증이 날 정도로 지나치게 지루한 설명을 했다. 이런 때면 평양의 옛친구들의 얘기에서부터 아버지가 돈을 번 이야기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평양기담은 정말 장편소설에 가까운 찬란한 연대기였다. 그러나 利錫은 그가 두고 온 처자의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았다. 또 李仲燮의 이야기도 자세히 들어본 일이 없다. 黃廉秀의 말에 의하면 중섭을 위해서 제일 헌신을 많이 한 사람이 利錫이었다고 하는데, 그러고보면 利錫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과 중섭이 이야기만은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利錫형을 내가 처음 본 것은 환도 후에 文學藝術社가 미도파 건너편의 漢稷부인이 하던 술집 2층에 있을 때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朴泰鎭의 소개로 元應瑞씨를 찾아갔을 때 문학예술의 편집실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풀이 죽은 회색빛 라글란 오바에 거무죽죽한 회색 중절모를 쓰고 창문턱 앞 의자에 혼자 앉아있었다. 나는 첫눈에, 저치도 나만큼 가난하고 나만큼 고독하고 나만큼 울분이 많고 나만큼 뗑깡이 심한 치겠구나 하고 느꼈다. 그후 얼마 있다가 자유시장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그는 어떻게 나를 알았던지 다짜고짜로 내 팔을 끌고 술집으로 데리고 가서 소주를 마구 마시더니, 내가 안내한 찻집에 가서는 내 입에다 미친 듯이 입을 맞추면서 창가에 늘어놓은 화분의 화초를 모조리 뿌리째 뽑아내꼰졌다. 그후 우리들은 만나면 꼭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꼭 해갈을 했다.

그러나 그의 주정과는 반대로 그의 소설은 너무나 차분하고 조용한 것이 조금도 과격한 데가 없었다. 지금 죽고 난 뒤의 그의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고운 사람이었구나 하는 감회가 제일 크다. 고운 얼굴의 선, 고운 인정, 고운 옷맵시, 고운 취미, 고운 교우관계, 고운 연애, 고운 향수, 고운 문학―이렇게 쳐가면 곱지 않은 것은 괴팍한 그 주정벽밖에 없는데 그것도 원인은 지나치게 고운 데서 나온 게 아닌가―그의 모든 것은 이 고운 순정이라는 한마디로 통일될 수 있을 것같이 생각된다. 이처럼 그의 문학도 곱고 차분한 것이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에 너무 야심이 없는 것같았다. 혹은 나는 그의 문학에서 감동을 받기 전에 너무 빨리 그의 인간미를 흡수하고 소화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문학을 정당하게 느낄 수 있는 위치를 오래 전에 상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들은 피차가 자기들의 문학을 지나치게 멸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자학벽은 우리들의 공통적인 단점이었고, 그는 뇌일혈로 죽었다고 하지만 더 깊은 원인은 이 자학병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떼어버릴 수가 없다.) 그의 첫 창작집 「失碑銘」이 나온 것이 그가 마포에 있을 때인데 그가 준 책을 다 읽어보고도 늘 그의 사상이 더 궁금했고, 이쪽이야기보다도 저쪽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는데, 그의 단편집은 그러한 나의 개인적인 호기심을 하나도 풀어주지 않았다. 어떻게 그쪽에서 나왔나? 그와 술을 마실 때나 그의 작품을 읽을 때나 내가 알고 싶은 가장 안타까운 문제가 이것이었는데 그는 가족이나 중섭이 얘기를 하지 않은 것처럼 이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도 더 겁이 많았다. 술이 취하면 나는 이북노래를 부르는 악벽이 있는데 그런 때면 利錫은 반드시 이튿날 정색을 하고 나에게 훈계를 했다. 내가 보기에는 利錫은 너무 소심했다. 그리고 그는 선천적으로 소시민적인 작가였다. 그가 동경하는 것은 예술이지 사상이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정복준이(井伏鱒二) 구보전만태랑(久保田萬太郞) 같은 계열의 작가의 격조있는 잔잔한 세계였다. 이런 작가는 移種을 하기가 힘이 든다. 그의 배양토는 <피양>이었는데 이 뿌리의 흙을 모조리 다 털고 나와보니 다시 새 흙에 뿌리를 박기까지가 퍽 힘이 들었다. 그리고 겨우 새 흙에서 물이 오를만하게 되자 그는 죽어버렸다.

그가 쓴 신문소설은 그야말로 생활상 하는수없이 쓴 것이었다. 그는 취직을 하기를 막무가내로 싫어했다. 『작가가 취직을 하는 것은 작가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 하면서 그는 취직한 친구들을 은근히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소설로도 겨우 인정을 받기 시작하게 되자 이렇게 되고 말았다. 한국일보와 계약이 된 「대원군」을 쓰느라고 그는오랫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직접 지방으로 조사를 하러 다니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石榮鶴이하고 친하게 지냈고 이런 지방 유람에는 둘이서 같이 다니는 적이 많았다. 죽기 일주일 전에 향주라는 데를 가보자고 石하고 같이 우리집에를 들렀는데 비가 온 끝이라 강을 건너지 못해서 북한산성에 가서 놀다 왔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이 향주라는 곳도 「대원군」과 관계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신문소설을 써도 그의 생활은 여전히 옹색해 보였다. 우리나라의 글쓰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그는 <신문소설>이 없으면 없는대로 불안했고 있으면 있는대로 자기 글을 못 쓰니까 불안했다. 월남 후 14년을 그는 내내 고생만 하다가 죽은 셈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작가를 기를만한 자격이 없다. 이중섭 차근호 김이석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나 보아라. 나는 김이석의 죽음을 목도하고 친구로서보다도, 이남태생의 한 주민으로서 부끄러움과 슬픔이 더 크다.

利錫도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사상적인 작가는 못되었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좀더 깊이 있는 고운 작품을 더 많이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할 수 있는 말보다 할 수 없는 말이 더 많았을 것이다. 바로 그의 추도문을 쓰는 이 글에서 내가 그에 대해서 할 수 없는 말이 할 수 있는 말보다 더 많은 것처럼.


附記―재주가 워낙 서투른 데다가 자서전이나 傳記物類는 성격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잡지사의 청탁을 일단 거절했다가 다시 하는수없이 쓰게 되었다. 그러나 붓을 들고보니 고인에 대해서는 의외로 쓰고 싶은 일이 많은 것을 깨달았고 시간만 있으면 좀더 요령있게 자세히 가다듬어 쓰고 싶었는데 마감기일도 벌써 넘고 해서 미흡한대로 하는수없이 내놓게 되었다. 혹시 고인을 욕되게나 하지 않았나 두려웁다. 이런 글은 왜곡된 점이 있어도 너무 골자만 골라 써도 독자에게 뜻하지 않은 그릇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1964>

養鷄 辨明




날더러 양계를 한다니 내 솜씨에 무슨 양계를 하겠습니까. 우리집 여편네가 하는 거지요. 내가 취직도 하지 않고 수입도 비정기적이고 하니 하는수없이 여편네가 시작한 거지요. 그걸 세상은 내가 양계를 하는줄 알게 되고 나도 어느틈에 정말 내가 양계를 하느니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걸 시작한 게 한 8년 가까이 되나봅니다. 성북동에서 이곳 마포 서강 강변으로 이사를 온 것이 그렇게 되니까요. 먼저 우리들은 돼지를 기르면서 닭을 한 열 마리가량 치고 있었지요. 몇 마리 되지 않는 닭이었지만 마당 한귀퉁이에 선 돼지우리간 옆에 집을 짓고 망을 쳐 주었지요. 그놈이 한 마리도 죽지 않고 잘 자랐어요. 겨울에는 망사간막이 위에서 자는 닭 등에 아침이면 눈이 소북이 쌓여있었습니다. 그래도 알을 잘 낳았어요. 하루 8,9개는 꼭 낳은 것같아요. 그런데 돼지는 되지 않았어요. 경험이 없어서 여편네가 가을돼지를 사지 않았겠어요. 돼지는 봄에 사서 가을에 파는 거라는데 우리는 가을에 사가지고 한겨울 동안 먹이를 길어 나르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고 봄에 팔았지요. 이익금이 (지금 돈으로) 4백원가량 되었던가요. 그래서 그때부터 돼지는 단념하고 닭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내가 닭띠가 돼서 그런지 나는 닭이 싫지 않았습니다. 먼첨에는 100마리쯤 길렀지요. 부화장에서 병아리를 사다가 안방 아랫목에서 상자 속에 구공탄을 피워 넣고 병아리 참고서를 펴보면서 기르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이 들더군요. 그래도 되지 않은 원고벌이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하지요. 나는 난생처음으로 직업을 가진 것같은 자홀감을 느꼈습니다. 아시다시피 병아리에는 白痢병이 제일 고질입니다. 흰 설사똥을 싸다가 똥구멍이 막혀 죽어버립니다. 사람으로 치면 이질같은 것인데 병아리의 경우에는 유전성에다가 전염성이 겸해있고, 똥을 밟던 발로 모이를 밟고 다니는 동물이라 만연도가 아주 빠릅니다. 심할 대면 하룻밤에 10마리도 더 넘어 죽어 나갑니다. 약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한번 걸린 놈은 약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백리병이 끝나면 콕시즘이란 병이 또 옵니다. 이 병은 피똥을 깔기다가 죽는 병입니다. 이것은 유전성을 아니지만, 역시 전염성이라 백리만큼 애를 먹입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또 압사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병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눌려 죽는 것입니다. 구공탄불이 꺼지거나 화력이 약해지거나 해서 갑자기 온도가 내려가게 되면 병아리들은 서로 한군데로 몰키게 되고 눈깜짝할 동안에 희생자가 늘비하게 생깁니다. 기막힌 일이지요. 그러넫  이런 사고가 날 때마다 경험없는 우리 부부는 네가 잘못했느니 내가 잘못했느니 하고 언성을 높이고 싸움을 합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이지요.

그래도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게 자라나는 병아리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줄 모릅니다. 병아리는 희망입니다. 이 노란 병아리들의 보드러운 털빛이 하얗게 변색을 하는 것은 성장하는 모습입니다. 여편네도 기분이 좋고 나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때의 기분은 백만장자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생은 병아리를 기르는 기술상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모이를 대는 일이 또 있습니다. 나날이 늘어가는 사료의 공급을 하는 일이 병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인제 석달만 더 고생합시다. 닭이 알만 낳게 되면 당신도 그 지긋지긋한 원고료벌이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돼요. 조금만 더 고생하세요.』 하는 여편네의 격려말에 나는 용기백배해서 진지한 원고를 또 씁니다. 그러나 원고료가 제때에 그렇게 잘 들어옵니까. 사료가 끊어졌다, 돈이 없다, 원고료는 며칠 더 기다리란다, 닭은 꾹꾹거린다, 사람은 굶어도 닭은 굶길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여편네가 돈을 융통하러 나간다…… 이런 소란이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난리이지요. 우리네 사는 게 다 난리인 것처럼 난리이지요.

닭을 길러보기 전에는 교외같은 데의 양계장을 보면 그것처럼 평화롭고 부러운 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정반대입니다. 양계는 저주받은 사람의 직업입니다. 인간의 마지막 가는 직업으로서 양계는 원고료벌이에 못지않은 고역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이 고역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양계를 통해서 노동의 엄숙함과 그 즐거움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양계를 시작한 지 2년인가 3년 후에 나는 老母에게 병아리 천 마리를 길러드린 일이 있습니다. 생전 孝라고는 해본 일이 없는 자책지심에서 효자의 흉내라도 한 번 내보아야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때도 돈 때문에 병아리를 철늦게 구입해왔고, 공교롭게도 장마철에 병아리들이 콕시즘을 치르게 됐습니다. 콕시즘이란 병은 습기나 냉기와는 상극입니다. 이 병은 날이 궂기만 해도 만연도가 빨라지는 병으로서 뉴캣슬과 지프스와 함께 양계의 3대 병역 중의 하나에 들어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양계가들은 이 병의 발병기가 장마철과 더블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3월 초순쯤 해서 일찌감치 병아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나는 콕시즘이란 병이 얼마큼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게다가 나는 천 마리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병아리를 처음으로 시작해보는 것입니다. 어설픈 효의 욕심이 시킨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노모도 물론 양계를 업으로 하기는 처음입니다. 그때까지 시내에서 가게를 하시던 노모는 남 볼 상도 흉하고 세금도 많다고 하시면서 교외로 나가서 불경이나 읽으면서 한적하게 살기를 원했고,이런저런 궁리를 한 끝에 내가 권하는 양계를 해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창동에다 양계장을 새로 짓고, 병아리는 40일 동안만 내가 길러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나는 내 일보다도 더 힘이 났습니다. 판에 박은 듯한 난관을 치러가면서 40일 동안을 길러내고 보니 약 1할의 사망률을 낸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40일이 지난 병아리는 어른 주먹보다도 더 크게 자랐습니다. 이 병아리의 대군을 밧테리째 트럭에 싣고 우리들은 개선장군모양으로 창동의 신축양계장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진 鷄舍는 미비한 점이 많았고, 비가 오자 지붕이 새는 곳이 많았습니다. 짚을 깔고 보온을 철저히 하느라고 집안식구들이 총동원이 되어서 밤잠도 못 자고 분투했지만 아침이면 3,40마리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양계장에서 닭이 죽어갈 때는 상가집보다도 더 우울합니다. 약을 사러 다니는 일에만 꼭 한 사람이 붙어있었습니다. 닭약은 수용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제약회사들이 부정기적으로 이것을 생산해 내놓습니다. 꼭 약이 필요할 때 사료상이나 도매집이나 약회사에 약이 절품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입니다. 이럴 대에 약을 구하러 다니는 심고란 이루 말로서 다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노모와 둘이서 약 20일 동안을 눈코뜰새 없이 싸웠습니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강했습니다. 나는 곧잘 신경질을 냈지만 노모는 한번도 신경질을 내지 않았습니다. 내가 계사바닥을 삽으로 긁다가 팔이 아파서 쉴 때도 노모는 여전히 일을 계속하면서 내 삽이 불편할 것이라고 당신 삽과 바꾸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장마를 치르고 나니 겨우 남은 것이 7백마리밖에는 안됩니다. 그래도 그나마라도 건진 것이 다행이라고 노모는 기뻐했고 나의 수고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 7백마리로 시작한, 수지가 안 맞는 양계를 노모는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집을 보고 어떤 친구는 양계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근 10년 경영에 한 해도 재미를 보지 못한 한국의 양계는 한국의 원고료벌이에 못지않게 비참합니다. 이 비참한 양계를 왜 집어치우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해에는 특히 사료값 앙등으로 극심한 경영난에 빠졌습니다. 군색한 원고료벌이의 보탬이 되기는커녕 원고료를 다 쓸어넣어도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비참한 양계를 왜 집어치우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양계일을 보느라도 둔 담양에서 올라온 머슴아이가 우리집에서 야간중학교를 마치고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년에 야간대학에를 들어갔는데 이 아이의 인건비가 안 나옵니다. 새학기에 수업료를 또 내주어야겠는데 이것이 난감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전에는 모이를 사러 조합에 갔다가 모이 두 가마니를 실어놓은 것을 오줌을 누러 간 사이에 자전거째 도둑을 맞았다고 커다란 대학생놈이 꺼이꺼이 울고 들어왔습니다. 집안이 온통 배 파선한 집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집에도 양계를 하니까 돈이 있는줄 알고 또 얼마전에는 도둑까지 들었습니다. 잠을 자다가 떠들썩하는 소리가 나서 일어나보니 여편네가 도둑이 들었다고 고함을 치고 있습니다. 도둑이 어디 들었느냐고 물으니 만용이(만용이란 닭시중을 하는 앞서 말한 대학생) 방쪽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여편네와 함께 계사 끝에 떨어져있는 만용이방쪽으로 기어갔습니다. 어둠을 뚫고 맞지도 않는 신짝을 끌고 가보니 만용이는 도둑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도둑이라는 사람은 나이 50이 넘은 사나이였습니다. 헙수룩한 양복을 입고 외투는 입지 않고 만용의 방 밖에 서서, 무슨 동네에서 말이라도 온 사람처럼 태연하게 서있었습니다. 『당신 뭐요?』하고 나는 위세를 보이느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나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도둑의 얼굴이 너무 온순하고 너무 맥이 풀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말이 없습니다. 『여보 당신 어디 사는 사람이오? 이 밤중에 남의 집엔 무엇하러 들어왔오?』 말이 없습니다. 『닭 훔치러 들어왔오?』 말이 없습니다. 여편네가 고반소에 신고해야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도 말이 없습니다. 나는 버럭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흉기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아래위를 훑어보았으나 그런 기색도 없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거 보세요, 이런 야밤에……』 하고 존댓말을 썼습니다. 그제서야 사나이는 『백번 죽여주십쇼, 잘못했습니다!』하고 비는 것이었습니다. 말투가 퍽 술이 취한 듯했으나 얼굴로 보아서는 싯뻘건 얼굴이 술이 취해 그런지 추위에 달아 그런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즉각적으로 이 사람이 밤길을 잃은 醉漢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이 어디요?』 쑥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우이동입니다.』

『우이동 사는 사람이 왜 이리로 왔오?』

『모릅니다…… 여기서 좀 잘 수가 없나요?』이 말을 듣자 나는 어이가 없어졌습니다. 『여보, 술 취한 척하지 말고, 어서 가시오.』 도둑은 발길을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두어서너 발자죽 걸어나가더니 다시 뒤를 돌아다보고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하고 태연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나는 도둑의 이 말이 무슨 상징적인 의미 같이 생각되어서 아직까지도 귀에 선하고, 기가 막히고도 우스운 생각이 듭니다. 도둑은 철조망을 넘어왔던 것입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이 말은 사람이 보지 않을 제는 거리김없이 넘어왔지만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다시 넘어나가기는 겸연쩍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구태여 갖다붙이자면 내가 양계를 집어치우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장면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도둑은 나고 나는 만용입니다. 철조망을 넘어온 나는 만용이에게 『백번 죽여주십쇼, 백번 죽여주십쇼.』 하고 노상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하고 떼를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964>

장마 풍경





장마가 지면 강물이 내려가는 모양이 장관이다. 황갈색으로 변색한 강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내려가는 것을 보면 사자떼들이 고개를 저으면서 달려내려가는 것같다. 높아진 수위는 사자의 등떼기처럼 늠실거린다. 군데군데 하얀 거품이 이는 것은 숨가쁜 사자의 입거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것은 수천마리의 사자의 떼가 아니라 한 마리의 사자같이 보이기도 한다. 한 마리의 사자. 그러면 저 거센 물결들은 사자의 휘날리는 머리털이라고도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그 사자는 머리쪽과 궁둥이쪽이 서로 늘어나서 동서로 잡아다닌 엿가락처럼 자꾸자꾸 늘어나기만 하고, 그 신장되는 등 위를 물결이 흘러내려가는 것 같다. 혹은 뛰어가는 사자는, 꿈속에서 달려가는 것처럼 열심히 달려가기는 하지만 밤낮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계속되는 연상을 주는 강물은 삼라만상의 요술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지만, 나는 어느덧 연상에도 금욕주의자가 되었는지 너무 복잡한 연상은 삼가기로 하고 있고, 그저 장마철에 신이 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사자가 달려가는 것같다는 정도의 상식적 연상으로 자제하고 있다.

<사람은 바빠야 한다>는 철학을 나는 범속한 철학이라고 보지 않는다. 풍경을 볼 때도 바쁘게 보는 풍경이 좋다. 일을 하다가 잠깐 쉬는 동안에 보는 풍경. 그리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을 계속하게 하는 풍경.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일을 하면서 보는 풍경인 동시에 풍경 속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수양버들이 늘어진 연못가의 기름진 푸른 잔디 그늘에서 피크닉을 나온 부인이 부지런히 뜨개질을 하고 있는 영화의 장면 같은 것은 나에게는 평범한 풍경이면서도 결코 평범한 풍경이 아니다. 풍경을 보는 것도 좋지만 풍경을 사는 것은 더 좋다.

연극은 관객의 참여가 없이는 안 된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그러나 영화는 연극에 비하면 참여의 면에서 훨씬 소극적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풍경을 보는 것은 영화에 속하고 풍경을 사는 것은 연극에 속한다는 생각이 든다. 연극도 서구평론가들이 쓴 것을 보면, 요즘 우리나라의 시민회관이나 국립극장의 무대같은 액자무대는 참여를 할 수 있는 연극무대가 아니고, 셰익스피어시대의 삼면이 다 터진 애프론식 무대가 정말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무대라고 한다. 그러니까 현대연극은 우선 무대조건부터 개선해야 하며 서양에서는 이미 개량무대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연극평론가들이 참여 참여 하는 것은 어떤 무대를 가리키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풍경에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어쩌면 이들 우리나라의 연극평론가들과 똑같은 과오를 내가 범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도 없으면서 일이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혖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대조건도 구비되지 않은 무대에서 참여를 하라는 그들이나, 일도 없는 사회에서 풍경에 살라는 나나 조금도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돈 생기는 일이 없을 뿐이지 그렇지 않은 일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요즘 집의 아이놈의 글을 알으켜 주면서 생각했다. 여편네가 하도 머리가 나쁘다고 어린놈을 윽살리는 것이 불쾌해서 만사를 제외하고 학기말 시험을 보는 중학교 1학년 놈을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 2주일 동안을 계속해보았다. 돈벌이를 위한 일이 아닌 이렇게 순수한 일을 해보니 힘도 들지만 원고료벌이에 못지 않게 신이 났다. 아이놈이 시험이라도 잘 보고 오는 날이면 詩를 썼을 때에 못지않은 흐뭇한 감이 든다.

아무 일도 안하느니보다는 도둑질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만, 하여간 바쁘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우선 풍경을 뜻있게 보기 위해서만이라도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나만 바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바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나만 바쁘다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는 미안한 일이 되고, 어떤 때에는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모두 다 바쁘다는 것은 사랑을 낳는다.

장마철의 한강물을 보고 성난 사자같은 연상을 하는 것도 너무나 살벌하고 고갈한 환경이 시키는 반사작용이라고 생각하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떻게 또 생각하면 세상사람들은 모두 다 너무 바쁘고 나만이 너무 한가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든다.

토끼





동물은 어떤것이든 직업적으로 기르게 되면 애정은 거의 전멸하고 만다. 양계를 생업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얻은 경험이지만, 같은 닭이라도 착취의 대상으로 기르고 있는 우리집 닭보다는 남의집 마당에 두어서너 마리씩 한가롭게 기르고 있는 닭이 마치 공작처럼 귀해 보인다.

닭을 기르는 집에는 반드시 토끼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소독용으로 토끼를 몇 마리 길러 보았는데 이것도 어느덧 기업의식이 침입을 하고나서부터는 닭을 보는거나 마찬가지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풀을뜯어다 먹이고 짚을 갈아주고 하는 일도 어느덧 싫증이 나고 해서, 자연히 나대신 닭일 보는 아이놈이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토끼에서 나오는 소산은 그놈의 공책값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것에 재미를 붙이고 한참동안을 닭보다도 더 열심히 기르더니 월동이 어려워서 그랬던지 바빠서 그랬던지 그놈은 토끼를 모조리 팔아버리고 말았다. 한 3,4년 전 일일 게다 그후부터 우리집에는 토끼가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말 외양간 냄새가 여간 좋지 않았다. 토끼장 냄새는 그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 냄새가 평화스러운 감을 주는 것이 싫지 않다. 혹시 시골의 노모의 양계장에 내려가면 토끼축사에서 병든 닭들이 한데 놀고 있는 것을 보는데,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무슨 우애의 철학이나 세계평화의 산 표본을 보는 것같다. 肝病이나 소화불량이나 감기에 걸린 닭들도 이 토끼칸 안에만 들어가면 멀쩡해진다는 것이 노모의 자랑거리이다. 토끼오줌이 닭병에 약이 된다는 사람도 있고 안 된다는 사람도 있어, 그 가부는 전문가에게 물어보지 않는한 확정한 것은 모르겠지만, 좌우간 닭과 토끼는 상극은 아닌 것같다. 그런데 닭하고 토끼하고가 의좋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의식의 심부에는 어떤 미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닭띠이고 나의 아내가 바로 토끼띠이니까 말이다. 물론 우리들 부부는 결혼의 式典까지도 거부한 아파쉬적 취미인들이라 궁합을 맞춰보고 같이 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의 궁합이 더 신기해보인다면 신기해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런 소감을 아내에게는 한번도 말한 일이 없다.

아내는 요즈음 양계가 수지가 안 맞는다고 다시 토끼를 길러보자고 한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것이다. 몇해 전엔가 메추리가 유행했을 때, 친구들 중에 이 메추리가 利가 많으니 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는 굳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얼마 후에 메추리하던 사람들이 모조리 망하자, 이것을 권하던 친구들은 나를 보고 선견지명이 있다고 칭찬들을 했다. 나는 당시에 새와 열대어와 메추리 같은 것을 나에게 권장하던 사람들을 사람같이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칭찬을 해도 조금도 반가웁지가 않았다. 이런 말을 한 사람 가운데에는 문학을 하는 사람도 끼어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문학까지도 경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토끼는 하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토끼도(닭에 못지않게) 기르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일이든 얼마가 남느냐보다도 얼마나 힘이 드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아내는 아직도 나의 이 <力耕主義>에는 그리 신뢰를 두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1965>

모기와 개미





우선 지식인의 규정부터 해야 한다. 지식인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이다. 우선 일본만 보더라도 이런 지식인들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 지식인이 없지는 않는데 그 존재가 지극히 미약하다. 지식인의 존재가 미약하다는 것은 그들의 발언이 민중의 귀에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닿는다 해도 기껏 모기소리정도로 들릴까 말까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인의 소리가 모기소리만큼밖에 안 들리는 사회란 여론의 지도자가 없는 사회다. 혹은 왜곡된 여론만이 있는 사회다. 우리나라의 소위 4대신문의 사설이란 것은 이런 왜곡된 가짜여론을 매일 조석으로 제조해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씌어지고 있다. 이것을 진정한 여론이라고, 민주주의사회의 여론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더도 말고 우리나라의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서만도 허다하게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지식인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우리나라는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 지식인이 가물에 콩나기만큼 있기 때문에, 문학가가 아직도 사회적인 멸시를 받고 그나마 여론을 조성하는 자리에서는 대학교수보다도 볼품이 없고, 우리의 시와 소설은 아직껏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잡지사가 그전보다 좀 깨었다고 하는 것이, 외국말을 아는, 외국에 다녀온 문인들을 골라서 글을 씌우고 싶어하는 경향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것도 구역질이 나는 경향이다. 역시 탈을 바꾸어 쓴 후진성이다.

도대체가 우리나라는 번역문학이 없다. 짤막한 단편소설 하나 제대로 번역된 것을 구경하기가 힘이 든다. 요즘 나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200자 한 장에 20원도 못 받는 덤핑출판사의 번역일을 해주고 있다. 이 덤핑출판사의 사장이라는 젊은 청년과 나와의 거래의 경위를 간단히 말해둘 필요가 있다. 이 청년은 나다니엘 호오손의 유명한 소설 「주홍글씨」를 20원씩에 해달라고 통신사 친구의 소개를 받아가지고 와서 지극히 겸손하게 자기의 사업의 군색한 사정을 말하면서 부탁한다. 나는 그의 사정을 이해해주는 듯한 거룩한 순교자의 표정으로 그의 청탁을 승낙했지만, 사실은 原書 이외에 일본말 번역과 한국말 번역책까지 가지고 온지라 여차직하면 <베끼는> 정도의 수고와 속도로 해치울 수 있을줄 알고 승낙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그게 그렇지 않다. 우리말 번역은 乙酉文化社에서 나온 저명한 영문학자인 최모씨가 번역한 것인데 이것이 깜짤 놀랄 정도로 오역투성이다. 게다가 적당히 생략한 데가 많아서, 청년이 900매로 예산을 해온 것이 천 3백매도 SJADFM 것같다. 다음 찾아온 청년사장을 보고, 원고매수가 예정보다 퍽 초과된다는 것과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퍽 어렵다는 것을 말하면서 20원씩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하자, 이 청년은 지극히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장시간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그러면 헤밍웨이의 소설을 자기의 출판사에서 몇 년 전에 출판한 게 있는데 그것은 번역도 어지간히 된 것이니까 그것을 약간 수정―원고지에 쓸 것도 없이 교정보는 식으로 책의 여백에 고쳐넣을 정도면 된다는 것이다―해서 내 이름으로 내고 전부 합해서 4만원에 하자는 것이다. 청년은 그렇게 하면 「주홍글씨」와 한데 묶어 내 이름으로 내면 유리할 거라는 것이다. 나도 그 청년의 말이 그럴 듯하게 생각되고 이왕 시작한 일이고 착수금까지 받은 것이라,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승낙을 할 수밖에. 그런데 나중에ㅐ 그가 갖고 온 헤밍웨이의, 200자 원고지로 천 4백매가 착실하게 되는 전쟁소설의 번역책을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과 비교해가면서 읽어보니,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번역, 주인공인 대위가 메스홀에서 동료들과 농담을 하는데 군목을 보고 하는 대화 중에, 『신부 기분 잡쳤어. 신부 계집 때문에 기분 잡쳤어』 식의 말투를 예사로 쓰고 있다. 이것은 전후 문맥을 소개해야지만 이 오역이 얼마나 중대하고 창피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좌우간 이것은 아버지를 보고 『아범 기분 잡쳤어, 아범 계집 때문에 기분 잡쳤어』 정도에 해당하는, 농담이 아닌 무례한 욕지거리로 화해버린 오역이다. 그에 비하면 을유문화사의 정모씨의 번역은 월등 나은 번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번역에도 <미소했다>라는 식의 오역이 튀어나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에 청년사장이 또 찾아와서 한참동안 또 옥신각신을 한 끝에 이 정모씨의 얘기가 나와서, <미소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오역이 있더라는 말을 했더니, 이 청년은 의아스러운 얼굴로 『그럼 선생님이 하시면 어떻게 번역을 하시겠습니까』 하고 자못 정중하게 묻는다. 나는 이 <미소했다>가 얼마큼 중대한 오역인가를 그에 지지 않게 정중한 표정으로 설명해주지 않을 수 없지만, 이런 때면 정말 온몸에 맥이 풀리고 슬퍼지고 고문을 받는 것보다도 더 괴로운 심정이 든다. 그래도 당신같은 몰이해한 출판사의 일은 못하겠다고 큰 소리를 칠만한 용기가 안 나온다. 물론 안 나온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현실이다. 좀더 사족을 붙여 말하자면 이 청년사장과의 거래의 결말은, 헤밍웨이의 소설을 원고로 다시 새로 스기로 하고 「주홍글씨」까지 합해서 총 2천 8백매에 5만원으로 낙착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혹을 떼러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붙여오고 그 두 개가 된 혹을 또 떼러 갔다가 또 혹을 그 위에 하나 더 붙여온 셈이 되었다. 이제 출판사 사장하고의 거래는 완전히 그의 K․O승이다. 이렇게 되면 나의 전술은 간교해지는 수밖에 없다. 에라 모르겠다, 최모의 번역을 군데군데 어벌정 고쳐가며 베끼는 수밖에 없다, 이런 불쌍한 생각까지를 예사로 하게 된다. 이러니 나는 내가 욕하는 최모씨나 정모씨보다 더 나쁘면 나빳지 조금도 나을 게 없다. 아직은 모른다. 과연 정모씨의 번역을 베끼게 될지 어떨지 일을 시작해봐야 안다. 그러나 벌써 그런 생각을 먹었다는 것만으로 내가 실제 그의 번역을 베끼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반은 죄를 진 셈이다. 필경 나도 누구를 지식인이 아니라고 욕을 할만한 권한이 점점 희박해져가는 처지에 이쏙, 그런 절망적인 처지에 이길 가망이 도저히 없느,S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소련의 현대시인 쏠제니친의 시에 나오는 개미와 같은 낡은 생리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감명적인 시라고 생각되어서 최근에 《思想界》지에 번역되어 나온 것을 그대로 옮겨서 소개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작은 나무쪽을 불 속에 던져넣었는데, 그것은 개미들이 오밀조밀 집을 짓고 있던 통나무쪽이었다.

통나무껍질이 딱딱 소리를 내면서 타기 시작할 때 개미들은 절망 속을 기어 허위적거렸다. 껍질로 기어나와 날름대는 불꽃 속에서 타죽어가고 있었다. 얼른 통나무의 한 쪽을 들어올려 부벼대었다. 많은 개미들이 도명쳐 모래밭을 횡단, 낮은 솔잎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기운을 피해 아주 달아나버리지 않았다. 일단 절박한 위헙을 극복하자마자 개미들은 다시 타고 있는 통나무 주위로 기어들었다. 마치 어떤 힘이, 개미들을 그들이 포기해버린 고향으로 다시 되돌려보낸 듯이 많은 개미떼가 불타는 통나무로 다시 기어오르기까지 했다. 기어코 타 죽을 때까지 개미들은 그 불붙는 집을 방황하는 것이었다.

― 「개미와 불」

<1966. 3>

生活의 克服

― 담배갑의 메모





나는 수첩을 갖고 다니기가 싫어서 담배갑 뚜껑에 메모를 해두는 버릇을 지키고 있는 지가 벌써 오래된다. 어떤 때는 그런 담배갑이 양복호주머니 속에나 책상 위의 꽃바구니 속에 수두룩하게 고일 때도 있다. 어쩌다 몇 달 전의 그런 메모가 호주머니같은 데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발견되고, 찢어버리기 전에 또 혹시나 하고 다시한번 훑어보는 수도 있는데, 남의 비밀같이 정이 안 가는 이런 메모의 암호로 그당시의 생활이 홀연히 눈앞에 떠오르고는 한다. 잡지사의 원고료의 액수와 날짜, 사야 할 책이름. 아이들의 학비 낼 날짜와 액스, 전화번호, 약 이름과 약방 이름, 외상술값…… 이런 자질구레한 숫자와 암호 속에 우리들의 생활의 전부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담배갑의 보이지 않는 메모가 내 머릿속에도 거의 언제나 들어있다. 요즘의 그 위에 써있는 메모는 미국시인 데오도어 뢰스케의 시의 짤막한 인용구다―<너무 많은 實在性은 현기증이, 체증이 될 수 있다―너무 밀접한 직접성은 극도의 피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詩誌에 줄 시론을 번역하다 얻은 말인데, 이 말이 나에게 주는 교훈은, 나의 시적 사고의 문맥의 전후관계를 자세히 속새하지 않고는 그 진의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대체로 시의 경험이 낮은 시기에는, 우리들은 시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수가 많으나, 시의 어느정도의 훈련과 지혜를 갖게 되면, 시를 <기다리는> 자세로 성숙해간다는 나의 체험이 건방진 것이 되지 않기를 조심하면서, 나는 이런 일종의 수동적 태세를 의식적으로 시험해보고 있다. 여기에서 <너무 많은 실재성>과 <너무 밀접한 직접성>은, 그러니까 시를 찾아다니는 결과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내 자신에게 경고를 주는 의미에서 이런 메모를 해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작상의 교훈은 곧 인생 전반의 교훈으로도 통하는 것이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리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는 수가 많으니 제반사에 너무 밀착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런 초월철학은 대단한 진리도 아니지만 나대로의 履行의 전후관계에서 보면 한없이 신선하고 발랄하고 힘의 원천이 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이 평범한 진리보다도 이것을 적어두고 있는, 파지가 다 된 담배갑일 것이다. 하다못해 고리타분한 李太白의 시 「山中與幽人對酌」 같은 것도 이런 담배갑의 이행에서 보면 뜻박의 새로운 맛을 준다.


그대와 내가 만나자

산꽃들도 바나가와 피네

한잔 들게 한잔 주게

또 한잔 해지는줄 모르고

나는 이미 취해서

풀밭에서 한참 자려고 하니

그대는 마음대로 갔다가

내일아침 거문고나 안고 오게


이 시에서 나의 가슴을 찌른 구절은 <풀밭에서 한잠 자려고 하니/ 그대는 마음대로 갔다가>의 <마음대로>다, 이런 여유―아아 잠시 생각해보자―이런 여유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나중에 原詩와 대조를 해보니, 원시의 그 대목이 <我醉欲眠卿且去/明朝有意……>로 되어있으니까, 엄격히 말하자면 <마음대로>는 원시에는 없는 것으로서 역자가 문장상의 윤기로 붙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오역은 좋은 오역이다. 이것이 오역이라는 것을 아 뒤에 나는 오히려 太白의 이 시가 더 좋아졌고, <마음대로>가 더 좋아졌고, 여유의 진리에 대한 지혜를 더 함축있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요전에 어떤 시 쓰는 선배의 집에 갔는데, 그 선배는 큰아이가 중학교 시험에 낙제를 했다는 얘기를 하는 끝에, 이런 말을 하면서 입맛을 다시었다. 『내가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자식이 떨어지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파요.』 자식은 자기의 몸보다도 더 사랑스러운 것이 부모의 상정이다. 자식의 미련을 청산하기란 자기의 미련을 청산하기보다도 몇 배나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러니 이 미련도 꺾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머릿속의 담배갑의 메모를 빌려서 나는 요즘 조금씩 이런 연습도 하고 있다. 우선 새학기부터는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하는 말부터 하지 않기로 하자. 이를 깨물고 자식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자. 아직 이 연습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좋을 것 같다. 이런 回心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나는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서운 장해물부터 우선 없애야 한다. 그 장애물은 무엇인가.


지금 나를 태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욕심, 욕심, 욕심.

― 뢰스케의 詩에서


욕심이다. 이 욕심을 없앨 때 내 시에도 進境이 있을 것이다. 딴 사람의 시같이 될 것이다. 딴 사람―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벌써 오랜 옛날에, 나의 머릿속의 담배에 오랜동안 적어놓은 일이 있던 공자인가 맹자인가의 글의 한 구절이 또 생각이 난다. 이런 뜻의 유명한 처세훈이다―<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 마음의 여유는 육신의 여유다. 욕심을 제거하려는 연습은 긍정의 연습이다.>

우리집에는 올겨울에 처음으로 마루에 난로를 놓았고, 몇십년만에 처음으로 나는 무명 조선바지를 해입었고, 조그만 통의 커피도 한병 마련해놓고 있다. 이만한 여유를 부끄럽게 여기는 否定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은 나의 경우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모순의 고민을 시간에 대한 해석으로 해결해보는 것도 순간적이나마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여유가 고민으로 생각되는 것은 우리들이 이것을 <고정된> 사실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을 흘러가는 순간에서 포착할 때 이것은 고민이 아니다. 모든 사물을 외부에서 보지 말고 내부로부터 볼 때, 모든 사태는 행동이 되고, 내가 되고, 기쁨이 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시―동기―로부터 본다―이것이 나의 새봄의 담배갑에 적은 새 메모다. 나의 <마음대로>의 새 오역이다.

<白羊>에서 가장 오랜 신세를 지다가 뒤늦게 <아리랑>으로 옮겨와서 최근에 <파고다>로 또 옮겨온 메모의 배경의 정다운 역사. 그리고 펜에서 만년필로 변했다가, 만년필에서 볼펜으로 변한 메모의 도구의 정다운 역사. 그것은 과거는 되찾아지기 전에 우선 부정되어야 한다는, 이 역시 너무나 평범한 발전의 원칙에 따른 돌음길. 부정은 끝났다―나의 메모와 메모의 배경과 도구를 돌이켜볼 때, 나의 내부의 저변에서 모기소리처럼, 그러나 뚜렷하게 들려오는 소리. 이 소리의 음미.

그러나 우리들의 앞에는 모든 냉전의 해소라는 커다란 숙제가, 우리들의 생애를 초월한 숙제가 가로놓여있다. 냉전―우리들의 미래상을 내다볼 수 있는 눈을 주지 않는, 우리들의 주위의 모든 사물을 얼어붙게 하는 모든 형태의 냉전―나와 나 사이의 모든 형태의 냉전―이것이 다름아닌 비평적 지성을 사생아로 만드는 냉전. <파고다>여, 전진하라.

<1966. 4>



解氷





목욕통에 얼어붙었던 물이 윗덮개가 조용히 풀리기 시작한다. 위의 3분가량에 흥건히 물이 괴어있고, 얼음의 근심은 소리없이 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아직도 마당 위에 얼어붙은 먼지에 쌓인 얼음들은 요지부동이지만, 직경 2미터도 안 되는 목욕솥의 해빙이 알려주는 봄의 전조는 새싹을 보는 것보다도 더 반갑다. 새싹이 틀 때 봄을 느끼는 것은 이미 늦은 감이 들고, 가을의 낙엽을 보고 셸리처럼 지나치게 일찍이 봄을 예고하는 것은 너무 詩的이어서 싫고, 그저 남보다 조금 먼저 凡人처럼 봄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워 좋다.

새싹이 솟고 꽃봉오리가 트는 것도 소리가 없지만, 그보다 더한 침묵의 극치가 해빙의 동작 속에 담겨있다. 몸이 저리도록 반가운 침묵. 그것은 지긋지긋하게 조용한 동작 속에 사랑을 영위하는, 동작과 침묵이 일치되는 최고의 동작이다.

가라앉은 얼음을 겨우내 굳어온 근심이라고 생각할 때, 이 불행의 잠수행위는 희열에 찬 풍자까지도 풍겨주고, 어지러운 현실의 걱정이야 어찌되었든 우선 까닭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수돗가에 씻어놓은 저녁쌀이 튀어나올 듯이 하얗게 보이고, 마루에 올라와 난로가에서 손을 부벼보면 손의 두께까지도 제법 두툼하게 느껴진다.

피가 녹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얼음이 녹는 것이 아니라 피가 녹는 것이다. 그리고 목욕솥 속의 얼음만이 아닌 한강의 얼음과 바다의 피가 녹는 것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거대한 사랑의 행위의 유일한 방법이 침묵이라고 단정한다.

우리의 38선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다. 이 강파른 철덩어리를 녹이려면 얼마만한 깊은 사랑의 불의 조용한 침잠이 필요한다. 그것은 내가 느낀 목욕솥의 용해보다도 더 조용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조용함을 상상할 수 없겠는가. 이것이 다가오는 봄의 나의 촉수요 採針이다. 이 봄의 과제 앞에서 나는 나를 잊어버린다. 제일 먼저 녹는 얼음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철이고 싶다. 제일 먼저 녹는 철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얼음이고 싶다.

<1968. 2>



이일 저일





구공탄냄새를 맡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과정이 참말로 신비스럽다. 언제 어떻게 맡는지 알 수 없다.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는 해면에 물 스며들 듯하지만 그 완만한 속도는 무엇에 비해야 좋을지. 정말 느리다. 날이 하도 궂어서 여편네가 아침에 구공탄을 넣고 나간 것은 아는데, 그리고 방도 따끈따끈한 것은 지금 바로 이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아는데, 내가 구공탄내를 맡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통 알 수가 없다. 후각이 둔한 탓인지 머리가 고민으로 만성 마비증에 걸린 탓인지, 이렇게 안 맡아질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방귀냄새같은 것을 맡는 것을 보면 후각도 의심을 받을만한 여지가 없는데 구공탄냄새만은 통 맡아지지 않는다.

결국은 구공탄냄새를 맡아서가 아니라 염려와 공포에 못이겨서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그것과 바람이 통할 수 있는 맞은편 쪽의 마당으로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그것과 바람이 통할 수 있는 맞은편 쪽의 마당으로 통한 큰 문짝까지도 열어제쳐놓는다. 그래도 구공탄냄새는 맡아지지 않는다. 다시 자리에 누워본다. 태풍이 열어제친 두 문 사이로 마구 질주한다. 춥지만 다시 일어나기가 귀찮아서 그대로 누워있다. 구태여 묘사하자면 내가 누워있는 방은 여편네와 여덟살짜리 애놈이 단둘이 자고 있는 방이다. 아니 단둘이 자면 꽉차는 방이다. 서쪽으로 머리를 둘 때, 바른편에는 조그만 탁자가 있고 왼쪽에는 노란 칠을 한 빼닫이가 달린 옷장. 아궁이는 바른쪽 탁자의 바로 뒷벽에 붙어 있다. 그러니까 탁자 밑이 바로 아랫목. 나는 지금 이 아랫목의 탁자 밑에 놓아둔 담뱃갑 뒤의 짙은 어둠 속을 응시하고 누워있다.

구공탄냄새는 여전히 맡아지지 않는다. 다소 초조해진다. 벌떡 일어나 앉는다. 몇 번째 되풀이한 심호흡을 또한번 해본다. 골치가 아픈가 하고 생각해본다. 골치도 아픈지 안 아픈지 모르겠다. 이건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지난 겨울에 집안 식구 넷이 흠빡 개스중독이 됐을 때도 경위는 이와 똑같았다. 구공탄냄새가 나는지도 모르고 골치가 아픈 것을 겨우 깨달은 뒤에도 감기가 가서 그런줄만 알고 이틀밤을 그대로 지냈다. 사흘째 되던 밤에 아이들이 자다가 깨어나서 토하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그 원인이 구공탄냄새인줄은 몰랐다. 중학교에 다니는 큰놈이 먼첨 토했는데, 저희 어멈은 내가 낮에 그놈을 너무 심하게 때려주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나를 책망했고 나도 그런줄만 알았지 구공탄냄새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여편네하고 한참동안 싸우고 난 뒤에, 의사를 부르러 가려고 방문을 열고 나가자니 마루와 부엌 겸 쓰는 문간 안 현관이 개스로 꽉차있다.

이런 지독한 경험을 했는데도 구공탄냄새는 용이하게 맡아지지 않고 골치가 아픈지 안 아픈지도 모르겠다. 구공탄냄새가 완연히 코에 맡아질 때에는 이미 늦었고 골치가 아프기 시작하면 벌써 상당한 분량의 개스를 마신 게 된다.

그런데 오늘의 경우도 그렇지만, 구공탄냄새를 맡았다는 것보다도, 번연히 알고 말았다는 것, 주의를 하면서 맡았다는 것, 혹은 극도로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경계를 해가면서 맡았다는 것이 어처구니없고 더 분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글이 쓰기 싫은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글을 막 쓰는지 모르겠다. 쓰고 싶은 글을 써보지도 못한 주제에, 또 제법 글다운 글을 써보지도 못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소리이지만, 오늘도 나는 타골의 훌륭한 글을 읽으면서 겁이 버쩍버쩍 난다. 매문(賣文)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하면서 매문을 한다. 그것은 구공탄냄새를 안 맡으려고 경계를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맡게 되는 것과 똑같다.

이 글은 쓰기 시작할 때는 사실은 구공탄냄새를 빌어서 우리나라가 아직도 부정과 부패의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야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요즘의 나의 심정은 우선 내 자신의 문제가 더 급하다. 내 영혼의 문제가 더 급하다.

타골의 「장난감」이라는 시가 있다. 좀 길지만 역해보자.


아이야,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정말 행복스럽구나, 아침나절을 줄곧 나무때기를 가지고 놀면서!

나는 네가 그런 조그만 나무때기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나느 나의 계산에 바쁘다, 시간으로 계산을 메꾸어버리기 때문에.

아마도 너는 나를 보고 생각할 것이다. 『너의 아침을 저렇게 보잘 것 없는 일에 보내다니 참말로 바보같은 장난이로군!』 하고.

아이야, 나는 나무때기와 진흙에 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단다.

나는 값비싼 장난감을 찾고 있다, 그리고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모으고 있다.

너는 눈에 띄는 어떤 물건으로도 즐거운 장난을 만들어낸다. 나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에 나의 시간과 힘을 다 써버린다.

나는 나의 가냘픈 쪽배로 욕망의 대해(大海)를 건너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자기도 역시 유희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타골의 이런 시를 읽으면 한참동안 눈이 시리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쉬운 말로 이런 고운 시를 쓸 수 있으니. 이런 쉬운 말로 이런 심오한 경고를 할 수 있으니. 사회비평이나 문명비평도 좀더 이렇게 따뜻하게 하고 싶다. 그것이 더 가슴에 온다. 세상이 날이 갈수록 소란하고 살벌해만지는 것을 보면, 이제는 소리를 지르는 데는 지쳤다. 기발한 것도 싫고 너무 독창성에만 위주하는 것도 싫고 그저 진실하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진실을 추구하다 타골의 시보다 더 따분한 시를 쓰게 되어도 좋을 것 같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나도 모르는 나의 정신의 구공탄 중독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무서운 것은 구공탄중독보다도 나의 정신 속에 얼마만큼 구공탄개스가 스며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무섭다. 그것은 웬만큼 정신을 차리고 경계를 해도 더욱 알 수 없을 것 같으니 더욱 무섭다.

얼마 전에 우리집에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 방 안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누가 밖에서 주인을 찾는다. 나가보니 수도국원이다. 수도세를 받으러 온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미터 검사원이다. 나를 불러놓고 가족이 몇 명이며 세든 사람이 몇가구나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그 묻는 품이 이상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미터가 이번달에 상당히 돌아갔다고 한다. 나는 여름철이라 빨래와 목물이 잦아서 그렇게 되었거니 정도로 생각하고, 얼마나 돌아갔길래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액수로 환산해서 2천 6백원이라고 한다. 그 전달까지 우리는 매달 백원밖에는 내지 않았다. 국원은 나를 계량기가 묻힌 곳까지 데리고 가서 미터뚜껑을 열고 속을 보여주면서, 심지어는 누수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증명까지도 해보이면서 자기의 검사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니 국원과 나는 자연히 언성이 높아졌고, 나는 기계를 신용할 수 없다는 기계불신론으로 기울어졌고, 국원은 악착같이 기계가 사람보다 정확하다고 기계 절대주의를 내세웠다. 나는 결국 수도국에 직접 문의를 해볼 작정을 하고 싸움은 결말이 나지 않은 채 헤어져 버렸는데, 수도국에 가기도 전에 그 이유는 너무나 수월히 판명되었다. 이것은 그전에 다니던 검사원의 잘못이었다. 그 종래의 검사원이 지난 겨울 이래 미터를 들여다보지 않고 기계적으로 사용량을 매달 똑같이 먹여놓았던 것이다. 그 동안에 우리집에는 세든 사람들이 4가구가량 붙어있었다. 그러니까 이 2천 6백원은 그 동안에 누적된 사용량의 요금이었다. 그리고 이 새 국원은 자기들의 직무상의 책임과 체면을 생각해서도 선임자의 과실을 이쪽에 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튿날 나는 그 국원이 집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정을 해보려고 불러서 막걸리까지 같이 나누면서 화해를 했지만, 화해를 하고 나서도 나는 화가 가시지 않았고, 사람보다 기계를 신용한다는 그의 말을 귀에서 닦아내려고 술김에 이발소로 뛰어들어가서 삭발을 하고 말았다.

『여보, 백원씩 내던 수도요금이 별안간 2천 6백원이 되다니 이게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오. 밤낮을 노상 수도를 틀어놓고 있어도 그 금액은 안 나오리다』 하고 항의하는 말에, 국원은 종시일관 『그래도 미터에 그렇게 나와 있는 걸 어떻게 합니까. 사람보다 기계가 정확한걸요』 하면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구공탄 얘기가 이 수도국원과 어떤 연관의 아라베스크를 그리고 있는지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지만 오늘은 이만해두자.

讀者의 不信任





필자도 시를 쓰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뱉기가 될까보아 대단히 마음 괴로운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詩(비록 시작품뿐만이 아니지만)는 과거에 있어서 매월 빠지지 않고 줄기차게 나오는 문학지나 기타 월간지에 개재된 작품 중의 거의 90프로(상당히 돋보아서)가 詩가 아닌 작품들이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이런 현상은 日本은 물론 구라파 선진문화국가에도 예사로 있는 일

이라고 보면 그뿐이겠지만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큰 슬픈

이야기가 없고 이보다도 더 분격할 이야기가 없고 이보다도 더 중대한 범죄가 없다.

요즈음 문학계의 문제(기타 예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는, 정치적인 분란이 위주가 되는 바람에 제 3 제 4의 문제가 되고 있고, 앞으로도 정치적 경제적 문제같은 것보다 더 현실적인 難題의 처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니만큼 좀처럼 이 방면에 대한 고려를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쉽사리 올 것 같지 않지만, 그만큼 걱정스러움이 더 간절한 것도 사실이다.

일전에 4월 이후의 새로운 현상에 대한 잡담이 나온 자리에서 어느 문학지 기자가 하는 말이, 요즈음 통 잡지가 팔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것이 <나쯔가레>가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정치에 몰두하여 문학잡지 같은 것은 보지 않게 된 바람에 그런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문학지는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에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따라서 그들이 문학을 애호하는 것은 (적어도 문학지를 구매한다는 것은) 평화시절에만 국한될 閑事에 불과하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의 본질은 결코 閑時에만 받아들일 수 있는 애완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개혁적인 시기에 처해 있을수록 그 가치가 더 한층 발효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와 같은 현상은(그것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문학계 전반에 대한 기막힌 모욕이요, 경멸이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혁명이란 이념에 있는 것이요, 민족이나 인류의 이념을 앞장서서 지향하는 것이 문학일진대, 오늘날처럼 이념이나 영혼이 필요한 시기에 젊은 독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문학인이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을 고백하잠녀 나는 그 기자의 말을 듣고 내심으로는 오히려 통쾌한 감이 들었고, 우리나라 문학계도 이제야 비로소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고 쾌재를 부르짖었다.

젊은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限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복지사회란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이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영혼의 탐구는 경제적 조건이 해결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마치 소학생들이 숙제시간표 만드는 식으로 시간적 절차를 둘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개발은 호흡이나 마찬가지다. 호흡이 계속되는 한 영혼의 개발은 계속되어야 하고, 호흡이 빨라지거나 거세지거나 하게 되면 영혼의 개발도 그만큼 더 빨라지고 거세져야만 할 일이지 중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중단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시는 필자가 보기에는 벅찬 호흡이 요구하는 벅찬 영혼의 호소에 호응함에 있어서 완전히 낙제점을 받고 보기좋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허다한 혁명시가 나오지 않았느냐고.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 너무 창피해서 대답하지 못하겠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영혼이란, 唯心主義者들이 고집하는 협소한 영혼이 아니라 좀더 폭이 넓은 영혼―다시 말하자면 현대시가 취급할 수 있는 변이하는 20세기 사회의 제현상을 포함내지 網總할 수 있는 영혼이다. 나는 <유심주의자>들의 협소한 영혼이라고 말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학계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이 <유심주의자>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고 그것은 오히려 <逃避子>라거나 혹은 <기만적인 유심주의자>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게다. 이러한 도피자나 기만적인 범죄자(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를 혁명을 수행하는 학생들이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기 때문에(혹은 간파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은 보류하기로 한다. 또한 이밖에 4월 이후의 혁명시가 어째서 진심으로부터 독자들의 환영을 못받고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도 여기에서는 보류하겠다.

다만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4월 이후의 우리나라 시작품에 대해서 젊은층들이 영혼의 교류를 느끼지 못하고 이를 거부하였다면 그것은 사실에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또한 때늦은 감은 있지만 진정으로 반가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학계는 이러한 철저한 불신임 속에서 다시 백지로 환원됨으로써만 새로운 시대의 작품의 생산을 기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견실한 독자가 없이는 견실한 작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 문학현상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젊은 독자들일수록 아무리 거센 호흡 속에서도 영혼의 개발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런 뜻에서 문학인들은 젊은 독자들의 다급한 영혼의 돌진 속에서 호흡을 꺾이거나 휴식하지 말아야 하겠다.

문학혁명은 독자들 입장에서도 필자의 입장에서도 먼 장래의 태평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1960>



아직도 안심하긴 빠르다

―4․19 1周年





4․19당시나 지금이나 우두머리에 앉아있는 놈들에 대한 증오심은 매일반이다. 다만 그 당시까지의 반역은 음성적이었던 것이 이제는 까놓고 하게 되었다는 차가 있을 뿐인데, 요나마의 변화(이것도 사실은 상당한 변화지만)도 張정권이 갖다준 것은 물론 아닌데 張勉들은 줄곧 저희들이 한 것처럼 생색을 내더니 요즈음에 와서는 <반공법>이니 <보안법 보강>이니 하고 배짱을 부릴 만큼 건방져졌다.

그러나 하여간 세상은 바꿔졌다. 무엇이 바꿔졌느냐 하면 나라와 역사를 움직여 가는 힘이 정부에 있지 않고 민중에게 있다는 자각이 강해져가고 있고 이러한 감정이 의외로 급속도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4․19당시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역사의 추진력의 선봉으로서 일반지식인들이 상당한 역할을 할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어그러진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가 없다. 교육자, 문학․예술인, 저널리스트들 중에서 과거에 호강을 했던 치들은 고사하고라도, 그래도 양식이 있다고 지목되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에 국가의 운명에 냉담한 친구들이 상당히 많은 것은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까지도 아이들한테 자기가 쓴 시집을 반 강매하고 있는 고등학교 교사들, 파리에 갈 노잣돈을 버느라고 기관지마다 찾아다니면서 레알리즘 그림을 그리는 추상화가, 여당 덕분에 박사학위를 따고 <반공법> 공청회 연사로는 초청을 받고도 꽁무니를 빼는 대학교수, 곗돈을 붓느라고 아이들한테 과외공부를 시키는 국민학교 교원들, <보안법 보강>을 감행한다는데 반대데모도 한 번 못하는 문인들, 이런 사람들은 혁신계 정치가나 교원노조나 대구의 데모를 아직도 빨갱이처럼 백안시하고 있다.

그러니 그 이상의 지도층에 있는 부유한 자들이나 그들의 심부름을 하는 순경 나부랭이들의 골통 속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지―오늘이라도 늦지 않으니 썩은 자들이여, 咸錫憲씨의 잡지의 글이라도 한 번 읽어보고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시험해보아라. 그래도 가슴속에 뭉클해지는 것이 없거든 죽어버려라!

필자는 생업으로 양계를 하고 있는 지가 오래 되는데 뉴우카슬 예방주사에 커미숀을 내지 않고 맞혀보기는 이번 봄이 처음이다. 여편네는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리더라. 백성들은 요만한 善政에도 이렇게 감사한다. 참으로 우리들은 너무나 선정에 굶주렸다. 그러나 아직도 안심하기는 빠르다. 모이값이 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이값은 나라꼴이 되어가는 형편을 제어보는 가장 정확한 나의 저울눈이 될 수 있는데 이것이 지금같아서는 형편없이 불안하니 걱정이다. 또 이 모이값이 떨어지려면 미국에서 도입농산물자가 들어와야 한다는데, 언제까지 우리들은 미국놈들의 턱밑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나? 여하튼 이만한 불평이라도 아직까지는 마음놓고 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일주일이나 열흘 후에는 또 어떻게 될는지 아직까지도 아직까지도 안심하기는 빠르다.

<1961>

創作自由의 조건





李政權 때의 일이다. 펜 클럽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분들을 모시고 조그마한 환영회를 갖게 된 장소에서 각국의 언론자유의 실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끝에 모 여류시인한테 나는 『한국에 언론자유가 있다고 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 허, 웃으면서 『이만하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하는 태연스러운 대답에 나는 내심 어찌 분개를 하였던지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려도 그 말만은 3,4년이 지난 오늘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中間辭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설가, 평론가, 시인이 내가 접한 한도 내에서만도 우리나라에 적지 않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의 후진성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더 큰 근본문제이다.

시고 소설이고 평론이고 모든 창작활동은 감정과 꿈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과 꿈은 현실상의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상으로는 38선이 있지만 감정이나 꿈에 있어서는 38선이란 타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너무나 초보적인 창작활동의 원칙을 올바르게 이행해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문학을 해본 일이 없고 우리나라에는 과거 십수년 동안 문학작품이 없었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문학작품이 없는 곳에 문학자가 어디 있었겠으며 문학자가 없는 곳에 무슨 문학단체가 있었겠는가. 아마 있었다면 문학단체의 이름을 도용한 반공단체는 있었을 것이지만, 이 반공단체라는 것조차 사실에 있어서는 반공을 판 돈벌이 단체이거나, 문학과 반공을 <이중으로> 팔아먹은 돈벌이 단체에 불과하였다.

4월 이후의 都下 각 신문에 신물이 나도록 되풀이된 이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왜 또다시 꺼내느냐고 꾸짖을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이 4월 이후다. 4월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자유문협이 거꾸러졌다. 한국문협이 거세를 당했다. 전후문학가협회가 새로 나왔다. 시인협회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회원숙청을 했다 등등을 가지고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무엇이 달라져야 할 것인가부터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달라져야 할 것인가? 언론자유다. 1에도 언론자유요, 2에도 언론자유요, 3에도 언론자유다. 창작의 자유는 백퍼센트의 언론자유가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창작에 있어서는 1퍼센테이지가 결한 언론자유는 언론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李정권 하에서는 8할의 창작의 자유가 있었지만 張정권 하에서는 9할의 자유가 있으니 얼마나 나아졌느냐고 말하고 싶은 국회의원이 있을 성싶다. 아니 국회의원뿐 아니라 필자 자신 역시 그러한 망상과 유혹에 빠지기 쉬운 요즈음이다. 솔직히 말해서 간첩방지주간이나 五列이니 國是니 할 때마다 나는 옛이나 다름이 없이 가슴이 뜨끔뜨끔하고, 또 내가 무슨 잘못된 글이나 쓰지 않았나 하고 한결같이 염려가 된다. 간첩이 오고 있으니까 간첩방지선전도 하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간첩방지선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선전의 압력과 동일한 압력이 창작활동 위에까지 부당하게 뻗칠 것 <같은 불안>이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다. <보장된 자유>란 무엇인가? 이러한 불안을 없애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의 제거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위정자한테 있다.

지난날 같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중립이나 평화통일을 학생들이 논할 수 있는 새시대는 왔지만 아직도 창작의 자유의 완전한 보장은 전도요원하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왜 이다지도 무기력하냐는 비난이 요즈음 자자한 것 같지만 책임은 결코 문학하는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필자부터도 쓸데없이 몸을 다치기는 싫다. 정말 공산주의자라면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 자업자득하는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섣불리 몸을 다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창작상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 볼 때 그야말로 <불온사상>을 가진 것 <같이> 보여지는 수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의 결과가 사직당국의 심판으로 <저촉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가지고 온다 하더라도 문제는 그 판결의 유죄․무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만일>에의 考慮가 끼치는 창작과정상의 감정이나 꿈의 위축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축현상이 우리나라의 현사회에서는 혁명 후도 여전히 그전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죄악이다.

필자는 앞으로 문학자들이나 각 문학단체가 규학하여 사회에 대한 통일된 의견을 표시할 수 있는 움직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하고 있는 사람의 한 사람이지만, 그러한 단체는 우선 이 <완전한 언론자유>에의 戰取가 지고목표이며, 도 이 지고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서도 전체 문학인은 하루바삐 단결해야 할 줄로 안다.


제 精神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근대의 자아 발달사의 견지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요점으로 해서 생각할 때는 극히 쉬운 문제이고, 고대 희랍을 촛불을 대낮에 켜고 다니면서 <사람>을 찾은 철학자의 견지에서 全人에 요점을 두고 생각할 때는 한없이 어려운 영원한 문제가 된다. 한쪽을 대체로 정치적이며 세속적이며 상식적인 것으로 볼 때, 또 한쪽은 정신적이며 철학적인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本欄[靑脈 66.5]의 요청은 아무래도 진단적인 서술에보다는 처방적인 답변의 시사에 강점을 두고 있는 것 같고, 다분히 작금의 우리의 주위의 사회현상의 전후관계를 염두에 둔 고발성을 띠운 답변의 시사를 바라는 것 같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나는 이 제목을, <제 詩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로 바꾸어 생각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범위를 詩壇에 국한시켜 위선 생각해보자. 우리 시단에 詩人다운 시인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면 <시인다운 시인>의 해석에 으레 구구한 반발이 뒤따라 오겠지만, 간단히 말해서 정의와 자유를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의 운명에 적극 관심을 가진, 이 시대의 지성을 갖춘, 시정신의 새로운 육성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을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요청하는 <시인다운 시인>이라고 생각하면서, 금년도에 접해온 시 작품들을 한 번 생각해볼 때 내가 본 전망은 매우 희망적이다. 좀더 전문적인 말을 하자면 우리 시단의 경우, 시의 현실참여니 하는 문제가 시를 제작하는 사람의 의식에 오른 지는 오래이고, 그런 경향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는데 이런 경향의 작품이 작품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도의 예술성의 보증이 약했다는 것이 커다란 약점이며 숙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약점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있는 젊은 작품들이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국한된 조그만 시단 안의 경사만이 아닐 것이다.


四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東學의 함성,

光化門서 목 터진 四月의 勝利여.


江山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 엎었으면

이 군스러운 부패와 享樂의 不夜城

갈아 엎었으면

갈아 엎은 漢江沿岸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 칠, 아 푸른 보리밭

― 申東曄 「4월은 갈아 엎는 달」에서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이것을 이번에는 좀 범위를 넓혀서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4월 19일이 아직도 공휴일이 안 된 채로, 달력 위에서 까만 활자대로 아직도 우리를 흘겨보고 있을 리가 없다. 그 까만 19는 아직도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 국민을 믿지 못하고 있고, 우리의 지성을 말살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것이 통행금지 시간을 해제하지 못하고 있고, 윤비의 국장을 다음 선거의 득표를 위한 쇼오로 만들었고, 부정 공무원의 처단조차도 선거의 투표를 계산에 넣고, 노동조합을 질식상태에 있고, 언론자유는 이불 속에서도 활개를 못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위험한 일은 지식층들의 피로다. 이것은 우리나라뿐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보면 그뿐이겟지만 좌우간 비어홀이나 고급 술집의 대학교수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목석같은 나이가 나를 울린다>를 부르면 좋아하지만, 언론자유 운운하면 세련되지 않은 촌닭이라고 핀잔을 맞는 것이 상식이다. 얼마 전에 모신문의 부정부패 캠페인의 설문을 받은 명사 궁ㄴ데에 바로 며칠 전에 그 집에 가서 한 개에 4천8백원짜리 쿠션을 10여개나 꼬매주고 왔다고 여편네가 나에게 말하던 그 노 경제학자가 있는 것을 보고 낙담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남의 일로 낙담을 했다고 간단하게 처리될 수 없는 심각한 병상이 우리 주위와 내 자신의 생활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다. 나의 주위에서만 보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들 가운데 6부니 7부니 8부니 하고 돈놀이를 하는 사람이 있다. 나 자신만 하더라도 여편네더러 되도록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구두선처럼 뇌까리고 있기는 하지만 할 수 없다. 계를 드는 여편네를 막을 수가 없고, 돈을 빌려쓰지 않을 수가 없고, 딱한 경우에 돈을 꾸어주지 않을 수가 없고, 돈을 꾸어주면 이자를 받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버렸다.

우리들 중에 누가 죄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인간은 神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러나 건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은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 지식인이다. 진지하게라는 말은 가볍게 쓸 수 없는 말이다. 나의 연상에서는 진지한 침묵으로 통한다. 가장 진지한 시는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시다.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보더라도 지금의 가장 진지한 시의 행위는 형무소에 갇혀있는 수인의 행동이 극치가 될 것이다. 아니면 폐인이나 광인. 아니면 바보. 그러나 이 글의 주문의 취지는 英雄待望論이 아닐 것이다.

앞에서 시사한 유망한 젊은 시인들의 작품과도 유관한 말이지만 우리 사회의문화정도는 아직도 영웅주의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재원의 「立春에 묶여온 개나리」나 신동엽의 「발」이나 「4월은 갈아 엎는 달」의 因數에는 영웅 대망론의 냄새가 아직도 빠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아직도 우리의 진정한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나의 직관적인 추측으로는, 표면상의 지식인들의 피곤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들의 내면에는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각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이행이 은연중에 강행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나>의 문제로 귀착된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따라서 나는 내 정신을 갖고 살고 있는가로 귀착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나를 무한히 신나게 한다. 나는 나의 최근작을 열애한다. 나의 서가의 페이퍼 홀더 속에는 최근에 쓴 아직 미발표 중의 초고가 세 편이나 있다. 「식모」「풀의 影像」「엔카운터誌」라는 제목이 붙은 시들―아직은 사실은 부정을 탈 것 같아서 제목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이 중의 「엔카운터誌」 한 편만으로도 나는 이병철이나 서갑호보다 더 큰 부자다. 사실은 앞서 말한 김재원의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를 읽고 나서 나는 한참동안 어리둥절해 있었다. 젊은 세대들의 성장에 놀랐다기보다도 이 작품에 놀랐다. 나는 무서워지기까지도 하고 질투조차도 느꼈다. 그래서 그달치의 「詩壇月評」에 감히 붓이 들어지지 않았다. 그런 私心이 가시기 전에는 비평이란 쓰여지는 법이 아니다. 그러다가 그 장벽을 뚫고 나온 것이 「엔카운터誌」다. 나는 비로소 그를 비평할 수 있는 차원을 획득했다. 그리고 나는 여유 있게 그의 시를 칭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立春에 묶여온 개나리」의 작자보다 우수하다거나 앞서있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다.

<제 정신>을 갖고 산다는 것은, 어떤 정지된 상태로서의 <남>을 생각할 수도 없고, 정지된 <나>를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제 정신을 갖고 사는> <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것이 <제 정신을 가진> 비평의 객체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창조생활(넓은 의미의 창조생활)을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창조생활은 유동적인 것이고 발전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가 있다. 이것이 현대의 양심이다.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와 나와의 관계만 하더라도 이 윤리의 밀도를 말하고 싶은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엔카운터誌」를 쓰지 못하고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의 월평을 썼더라면 나는 私心ㅌ이 가시지 않은 글을, 따라서 邪心 있는 글을 썼을 것이다. 개운치 않은 칭찬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죽이거나 다치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엔카운터誌」의 고민을 뚫고 나옴으로써 나는 그를 살리고 나를 살리고 그를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고 나를 <내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끊임없는 창조의 향상을 하면서 순간 속에 진리와 美의 全身의 이행을 위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두지만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어느 특정된 인물이 될 수도 없고, 어떤 특정된 시간이 될 수도 없다. 우리는 일순간도 마음을 못 놓는다. 흔히 인용되는 예를 들자면 우리는 「시지프의 신화」에 나오는 육중한 바윗돌을 밀고 낭떠러지를 기어올라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自覺人의 세계의 대열 속에 미약한 한국의 발랄한 젊은 세대가 한 사람이라도 더 끼이게 된다는 것은 우리들의 오늘날의 그지없는 기쁨이다. 끝으로 《現代》지 4월호에 게재된 「立春에 묶여온 개나리」의 전문을 감상해보기로 하자.


開花는 강 건너 春分의 겨드랑이에 球根으로 꽂혀있는데 바퀴와 발자국으로 寧日 없는 鐘路바닥에 난데없는 개나리의 行列.

한겨울 溫室에서, 公約하는 햇볕에 마음도 없는 몸을 내맡겼다가, 太陽이 住所를 잊어버린 마을의 울타리에 늘어져 있다가,

副業에 궁한 어느 中年사내, 다음 季節을 豫感할 줄 아는 어느 中年사내의 등에 업힌 채 鐘路거리를 묶여가는 것이다.

뿌리에 바싹 베개를 베고 新婦처럼 눈을 감은 우리의 冬眠은 아직도 아랫목에서 밤이 긴 날씨, 새벽도 오기 전에 목청을 터뜨린 닭 때문에 마음을 풀었다가……

닭은 무슨 못견딜 짓눌림에 그 깊은 時間의 테로리즘 밑에서 목청을 질렀을까.

엉킨 未亡人의 繡실처럼 길을 잃은 세상에, 잠을 깬 개구리와 지렁이의 입김이 氣化하는 아지랑이가 되어, 암내에 참지 못해 請婚할 제 나이를 두고도 손으로 찍어낸 花甁의 執權의 앞손이 되기 위해, 알몸으로 都心地에 뛰어나온 스님처럼, 업혀서 亡身길 눈 뜨고 갈까.

금방이라도 눈이 밟힐 것같이 눈이 와야 어울릴, 손금만 가지고 握手하는 남의 동네를, 우선 옷 벗을 철을 기다리는 時代女性들의 目禮를 받으며 우리 아버지가 때없이 한데 묶어 세상에 업어다놓은 나와 내 兄弟같은 얼굴로 行列을 이루어 끌려가는 것이다. 溫度에 속은 罪 뿐, 입술 노란 개나리떼.


이것은 제 정신을 갖고 쓴 시다. 이 정도의 제 정신을 갖고 지은 집이나, 제 정신을 갖고 경영하는 극장이나, 제 정신을 갖고 방송하는 방송국이나, 제 정신을 갖고 제작하는 신문이나 잡지나, 제 정신을 갖고 가르치는 교육자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양식을 가진 건물이며 극장이며 방송국이며 신문이며 잡지이며 교육자를 연상할 수 있는데, 아직은 시단의 경우처럼 제나름의 양식을 가진 것이 지극히 드물다. 균형과 색조의 조화가 없는 부정의 건물이 너무 많이 신축되고, 서부영화나 그것을 본딴 국산영화로 관객을 타락시키는 극장이 너무 많이 장을 치고, 약광고의 선전에 미친 방송국이 너무 많고, 신문과 잡지는 보수주의와 상업주의의 탈을 벗지 못하고, 교육자는 <6학년 담임 헌장>이라는 기괴한 운동까지 벌이게 되었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이에 대한 처방전인 나의 답변은, 아직도 과격하고 아직도 수감 중에 있다.

<1966. 5>

文壇推薦制 廢止論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敷衍이 되고 전자는 후자의 부연이 되는 법이다. 사카린 밀수업자의 붓에서 「두이노의 悲歌」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진달래꽃」을 쓴 素月은 자기반의 부유한 아이들을 10여명씩 모아놓고 高價의 과외공부를 가르치는 국민학교 6학년 선생이나 중학교 3학년의 담임선생은 될 수 없다.

이런 예는 좀 투박한 비유이지만 오랫동안을 두고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학잡지의 신인들에 대한 추천제도만 하더라도 이제는 좀 차분하게 가라앉아서 추천하는 사람이나 추천을 받는 사람이나 다같이 근본적인 반성을 해볼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것은 크게 보면 우리 문학의 앞으로의 성격을 좌우하는 중대한 영향력을 가진 문제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은 허구많은 직업 중에서 유독 예술을 업으로 택한 이유는―자기 나름의 독특한 개성을 살려보기 위해서 독특한 생활방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시를 쓰려면 독특한 생활의 방식(즉 인식의 방법)이 선행되어야 하고,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문단에 등장을 하는 방식 역시 이러한 생활의 방식에서 제외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남의 흉내를 내지 않고 남이 흉내를 낼 수 없는 시를 쓰려는 눈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면, 자기가 문단에 등장하고 세상에 자기의 예술을 소개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그것이 독자적인 방법이냐 아니냐쯤은 한 번쯤은 생각하고 나옴직한 문제이다. 필자는 일제시대 말기에 淸水金一이라는 희극배우의 무대를 본 일이 있는데, 그는 좀처럼 종래의 배우들이 출입하는 무대 옆구리에서 등장하는 법이 없고 천장에서 들것을 타고 내려오거나 무대의 밑바닥에서 우산을 받고 기발하게 솟아 올라오거나 하면서 관객을 놀래고 웃기고 했다. 이것은 서푼짜리 희극 배우의, 관객의 허점을 노리는 값싼 흥행의식이라고만 볼 수 없는 예술의 본질과 숙명에 유관한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喜劇의 驚愕感이나 기발성과 예술의 본질과의 관계라든가 문학이나 문학가의 흥행성의 문제를 논할 여유는 없지만, 예술가나 예술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가장 크나큰 관심을 두고 있듯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는 문제도 필연적으로 중대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급한 규정을 내리자면 예술가는 되도록 비참하게 나와야 한다. 되도록 굵고 억세고 날카롭고 모진 가시 면류관을 쓰고 나와야 한다.

이런 비참한 가시 면류관의 대명사가 《現代文學》지의 추천시인이 될 수 있는가. 《現代文學》지의, 혹은 《詩文學》지의 씨도 먹지 않은 薦者들의 추천사를 통해서 배출되는 추천시인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두부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다. 이런 두부 가시의 면류관을 쓰고 나오는 문인들을 향해서, 혹은 <신인문학상> 당선이나 <신춘문예> 당선 등의 비누 가시관을 쓰고 나오는 소설가나 시인들을 향해서 세상에서는 <멀지 않아 문인 주소록이 전화번호부처럼 비대해질지 모르겠다>느니 <문인들의 홍수>를 막기 위해서 <문단에도 혁명적인 산아제한이 시급하다>느니 하는 비판을 기회있을 때마다 퍼붓고 있지만, 그런 시비의 타당성의 여부의 정도는 고사하고, 우선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해볼 때 적어도 그런 시비가 나올 수 이쓴ㄴ 여지가 있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없는 일이다.

우리 문단의 추천제도의 폐해의 원인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주장이 여러 가지일 것이고, 찬반의 정도나 대책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추천제를 공박하는 세속적인 원인으로서 우선 가장 큰 것이라고 필자에게 느껴지는 것은, 문인들의 수가, 특히 시인들의 수가 왜 이렇게 많으냐는 것이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자면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詩다웁지도 않은 시를 쓴답시고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는 말이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에 가장 순수하고 진지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문인들의 사회에서까지 신용할 수 없는 제품을 무작정 대량생산하는 제도가 있으니 이건 정말 어지럽고 불쾌해서 못살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종잡아 생각해보면 문인들의 수에 비해서 좋은 작품이 많지 않다(혹은 없다)는 말이 되고, 이런 허술한 문인들을 시인이나 소설가의 레텔을 붙여서 내놓는 추천제도의 권위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추천제도의 추천자나 응모자의 편에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추천자는 이렇게 말한다. 『추천제도가 추천자의 수많은 亞流를 낳고 있다든가, 혹은 추천자의 개인적인 문학의 명성이나 문단의 세력을 구축 내지 유지하기 윟새서 추천작가들을 이용한다거나, 혹은 추천제도를 주재하는 잡지사의 그의 주간의 문단세력을 구축․확장 내지 유지하는 데 추천작가나 시인들을 이용한다거나 하는 폐습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나마 추천제도라도 있으니까 신진들에게 선을 보일 정도의 기회라도 줄 수 있지, 이것마저 없으면 신진양성을 사보타지한다는 죄명으로 기성문인들이 모조리 테러를 맞을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신진작가나 신인들이 늘어나는 것은 추천제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다시피 폭발적인 인구팽창이 시키는 것이다. 비근한 예가 일본에서는 전국의 시 동인지의 수가 5백을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우리들이 추천하는 시인들의 작품이 질이 낮아간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일가견을 갖고 있다. 자고로 어느 나라의 어느 시대를 치고 우수한 동시대의 시인이 십명을 넘는 일이 없었다. 보통 한 시대에 한 두어서너명의 시인이 있으면 족하다. 나머지것들은 들러리나 비료의 역할이나 하면 된다. 지금 우리나라에 5백명의 시인이 있다고 해도 이건 큰일나는 일이다. 희극으로서도 큰일나는 희극이다. 그러나 이 5백명이 서발막대기로 휘저어놓은 것같은, 죽도 밥도 아닌 졸렬한 시를 매달 써내놓는다고 해도 그 피해는 이 서발막대기를 마구 휘둘러서 사람을 죽이는 깡패나 밀수업자가 되느니보다는 낫다. 잡지사의 시 고료가 좀 허실이 날 정도이고, 그 대신 우리같은 가난한 추천자의 담배값 정도는 벌어주게 되니 피장파장 아닌가.』

이러한 추천자의 주장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 이렇다.

『나도 신문사의 신춘문예의 심사원의 말석을 더럽히고 있는 몸이라 큰 소리는 할 수 없지만 귀하의 말 중에서 가장 실감이 나는 것은 귀하가―담배값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추천료에 유혹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오. 이것은 지극히 한심스러운 일이지만 사실이오. 그리고 이보다도 더 한심스러운 일은 심사원의 권위―아무리 低落한 권위라 할지라도―에 대한 매력이오. 이것도 지극히 유치한 일이지만 사실이오. 매력이란 말이 그야말로 유치하다면 유희나 장난 정도로 고쳐둡시다. 귀하는 매력도 아니고 유희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타성이오. 오늘날 추천제도가 욕을 먹고 있는 것은 이 타성 때문이오. 추천제도를 끌고나가는 문학잡지사의 타성이고, 그 문학잡지사의 추천제도를 모방하는 ABC의 문학잡지사와 XYZ의 詩誌의 타성이고, 이런 타성에 끌려가는 추천자 甲 乙 丙 丁의 타성이고, 이런 추천제에 응모하는 시를 생활할 줄 모르는 풋내기 문학청년들의 타성이오. 귀하는 일본의 시 동인지가 5백종이 넘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일본의 문학지의 추천제를 통해 나온 사람들은 아닐 것이오.

아세아의 폭발적인 인구증대와 급속도의 현대화와 거기에 따르는 자아의 각성에 유래되는 詩作하는 사람들의 증가의 현상은 귀하의 말마따나 그다지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니오.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오. 서구의 어느 비평가가 말했듯이 앞으로 먼 후일에는 모든 세계의 인류가 詩를 쓰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오. 또한 헷세가 그의 시에서 읊으고 있듯이, 시가 필요하지 않은 낙원이 도래하고 모든 사람들이 착한 시인의 생활을 하고 오늘날의 시가 무효가 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오. 그리고 오늘날 詩作하는 인구가 많아지는 것을 그런 세상의 출현의 전조로 보려면 못 보는 것도 아니오. 오히려 그런 세상의 출현의 전조로 보기 위해서 이런 시비가 나오고 잇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오.

시를 쓰는 인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시작품의 年産量이 앙등하면 할수록 시의 세계에 있어서는 질이 문제되는 것이오. 이것은 물ㄹ폰 귀하도 인정하고 남음이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오. 그런데 귀하의 추천제도를―그것이 천대 일이 되든 만대 일이 되든 간에―비료가 많아질수록 좋은 꽃이 더 많이 더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소.

나의 이의점이 여기에 있소. 서두에서 잠깐 시사한 것처럼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나아가는 가치)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오. 나의 이상으로는 개성있는 시인의 대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매너리즘에 빠진 오늘날과 같은 치욕적인 추천제도에는 도저히 응해지지 않을 것이오. 오늘날의 문단의 추천제는 「007」의 영화를 보려고 새벽 여덟시부터 매표구 앞에 줄을 지어 늘어선 관객들을 연상케 하는 치욕적인 것이오. 이런 치욕을 치욕으로 직관할 수 없는 일만 편의 시 중에서 귀하는 한떨기의 芳香馥郁한 꽃이라도 피면 족하다는 것이고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오.」

이러한 추천자와 나의 논쟁의 귀결은 이제 지극히 평범한, 詩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로 지극히 따분하게 되돌아온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시가 여태까지 추천제를 통과해온 무수한 시작품이나 <신춘문예>나 <신인문학상>에 당선된 수많은 작품들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은 독자들도 짐작이 갈 것이고, 여태까지의 기성인들의 어떠한 작품과도 비슷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것도 짐작이 갈 것이다. 시는 그러한 것이다.

<1967. 2>

<不穩>性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지난 2월 27일자 [조선일보]의 「實驗的인 문학과 政治的 自由」라는 拙論에서, 본인은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고,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서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거이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문화의 본질로서의 不穩性을 밝혀두었는데도 불구하고 李御寧씨는 이 불온성을 정치적인 불온성으로만 고의적으로 좁혀 규정하면서 본인의 지론을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전체주의의 동조자 정도의 것으로 몰아버리고 있다.

前衛的인 문화가 불온하다고 할 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재즈음악, 비트族, 그리고 60년대의 무수한 앤티예술들이다. 우리들은 재즈음악이 소련에 도입된 초기에 얼마나 불온시 당했던가를 알고 있고, 추상미술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유명한 발언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암스트롱이나 베니 굿맨을 비롯한 전위적인 재즈 맨들이 모던 재즈의 초창기에 자유국가라는 미국에서 얼마나 이단자 취급을 받고 구박을 받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재즈의 전위적 불온성이 새로운 음악의 꿈의 추구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예는 재즈에만 한한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베토벤이 그랬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세잔느가 그랬고, 고호가 그랬고, 키에르케고르가 그랬고, 마르크스가 그랬고, 아이젠하워가 해석하는 샤르트르가 그랬고, 에디슨이 그랬다.

이러한 불온성은 예술과 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인류의 문화사와 예술사가 바로 이 불온의 수난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문화의 이치를 李御寧씨 같은 평론가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오해를 고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그의 글에 답변을 하려고 붓을 든 주요한 이유는 나의 개인적인 신변방어에 있지 않다. 그의 중상 속에는 나의 개인적인 것이 아닌, 어떤 섹트的인 위험한 의도까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고, 그러한, 실제로 있지도 않은 위험세력의 설정이 일반독자에게 주는 영향은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것이다.

그는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의 서두부터 <문학 작품을 문학작품으로 읽으려 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바로 문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런 비난은 누구의 어떤 발언이나 作品이나 태도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중대한 말을 실제적인 예시도 없이 마구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는 내가 말한 나의 발표할 수 없는 詩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내가 발표할 수 없다고 한 나의 작품은 나로서는 조금도 불온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그것은, 불온하다는 의혹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발표를 꺼리고 있는 것이지, 나의 문학적 이성으로는 추호도 불온하지 않다. 그러니까 李御寧씨는, 내가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어서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불온하다>고 낙인을 찍으려면, 우선 그 작품을 보고나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나의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보지도 않고 <불온하다>로 비약을 해서 단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법은 문학자의 논법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機關員>의 논법이다. 아니, 요즘에는 기관원도 똑똑한 기관원은 이런 비과학적인 억측은 하지 않는다.

李御寧씨의 이번의 d나에 대한 반론은 거의 전부가 이런 식의 모함으로 충만되어 있고 이것을 일일이 가려낼 만한 의미를 나는 느끼지 않는다. 다만 나의 창작의 자유의 고발의 실제적인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설명해두고자 한다. 비근한 예가, 지금 말한 李御寧씨의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의 소위 <不穩詩>다.

지금 말한 것처럼 李御寧씨는 내가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온한> 작품이라고 규정을 내리고 있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발표를 하면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발표는 못하고 있지만, 결코 불온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나의 자유의 고발의 한계는 이런 불온하지도 않은 작품을 불온하다고 오해를 받을까보아 무서워서 발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李御寧씨는 이에 대한 책임이 작가나 시인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아니 이들에게만―이들의 역량이 부족해서―있다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장해세력이 우선 대제도의 에이전트들의 획일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나는 지적했다.

그런데 李御寧씨는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기관원도 단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불온하다>고 단정을 내림으로써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불온하지 않게 통할 수 있는 문화풍토를 조성하자는 나의 설명을 거꾸로 되잡아서,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바로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풍토가 조성되면 문학이 말살된다고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이론으로서는 一考의 가치도 없다.

<1968>

詩人의 精神은 未知





시의 정신과 방법? 시 쓰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시의 정신과 방법을 아는가? 그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의 愚를 범하는 일이다. 시인은 자기의 시에 대해서 장님이다. 그리고 이 장님이라는 것을 어느 의미에서는 자랑으로 삼고 있다.

도대체가 시인은 자기의 시를 규정하고 정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그에게 논꼽재기만한 플러스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의 시의 현시점을 이탈하고 사는 사람이고 또 이탈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어제의 시나 오늘의 시는 그에게는 문제가 안된다. 그의 모든 관심은 내일의 시에 있다. 그런데 이 내일의 시는 未知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다. 고기가 물에 들어가야지만 살 수 있듯이 시인의 미지는 시인의 바다다. 그가 속세에서 愚人視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기정사실은 그의 적이다. 기정사실의 정리도 그의 적이다.

그의 눈에는, 소설가란 생일을 잘 차려먹기 위해서 이레를 굶는 무서운 금욕주의자다. 무서운 인내가다. 결과로서의 소설의 발언이 시의 발언과 일치되는 점도 있지만 피차의 과정이 너무나 현격하다. 그 결과를 수긍하다가도 그 과정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파스테르나크는, 현대의 상황을 대변하려면 시만 가지고는 모자란다 해서 소설을 쓰고 희곡까지 썼지만, 그의 희곡이라는 것이 따분하다. 「유리 지바고」도 그의 초기의 단편만 못하다. 그런데 그의 단편은 아시다시피 백일몽이다. 『나의 「지바고」는 왕년의 모든 詩보다도 나에게 귀중한 것이다』라고 한 노후의 그의 말을 나는 신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죽는 날까지 시집만 내고 죽은 프로스트가 좀더 순수하다. 파스테르나크의 초기단편이나 딜란 토마스의 단편을 읽으면서 부러운 것은, 그들이 그런 잠꼬대를 써도 용납해주는 사회다. 그런 사회의 문화다. 나는 여기서는 오해를 살까보아 그런 일을 못하겠다. 여기에는 알지 못하겠는 글이 너무 많고, 그 알지 못하겠는 글이 모두 인찌끼다. 알지 못하겠는 글이 모두 인찌끼인 사회에서는 싫어도 아는 글을 써야 한다. 아는 글만을 써야 한다. 진정한 시인은 죽은 후에 나온다? 그것도 그럴싸한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만한 인내가 없다. 나는 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서 시인이 없어졌을 때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출발부터가 매우 순수하지 않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나는 고백은 싫다.

그렇지만 <詩 一篇>이라고 명기한 시청탁서를 받을 때마다 나는 격노한다. 왜 내가 시밖에 못 쓰는줄 아는가? 불쌍한 한국문단아!

요즈음 S잡지사의 권유로 「詩月評」이라는 걸 써보았는데, 그 바람에 시는 통 못썼다. 시인은 심판ㅇ르 받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시인이 심판을 하게 되면 불필요한 번민을 하게 된다(남에게 얻어먹은 욕은 즉석에서 철회할 수 있지만, 남에게 한 욕은 철회하기가 매우 힘든다) 또한 사기를 한다. 심판을 하자면 올가미를 씌워야 하는데 이 올가미에 자신까지 걸려들기는 싫다. 자기가 걸려드는 올가미는 시를 다칠까보아 싫고 자기가 걸려들지 않는 올가미는 비평이 거짓말이 되니까 싫다. 나의 월평이 게재된 같은 잡지에 소설평을 담당한 H씨의 글에 이런 말이 나와있다. <……특히나 요새처럼 작가의 정치색을 가장 날카롭게 작품 속에 구체화시키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을 때 이러한 유행을 의식적으로 회피한다는 것은 어쩌면 성실한 작가의 자세라고 봐야 옳을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나는 <앗차!> 했다. 지금 말한 것처럼 H씨의 소설평이 실린, 같은 잡지에 나의 시월평이 그분의 글과 나란히 게재되어 있다. 이달뿐이 아니라 지난달 호에도 어깨를 나란히 해서 나는 시월평을 쓰고 그분은 소설월평을 썼다. 그는 소설월평을 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난달에도 이달에도 시의 현실참여를 주장해왔고 내달에도 그것을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아까와 같은 그분의 글을, 내가 쓴 글을 읽은 끝에 마을가는 기분으로 읽던 중에 발견한 것이다. 그러지않아도 나는 연 3회를 현실참여의 월평을 써온 끝이라 또 다음호에 똑같은 논지를 내세우는 것이 변화가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좀 의아한 생각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재빨리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이 그런 말을 암시해 놓았다. <……이러한 유행을 회피하는 것은 어쩌면 성실한 작가의 자세……> 그렇다. 얼마전에 에케르만의 「괴테와의 대화」를 읽으면서 나는 그런 다짐을 비밀리에 하고 있었다. 그때가 벌써 S잡지사의 월평을 시작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그러니까 그 비평을 시작할 때부터 내 비상구는 만들어놓고 쓴 셈이다. 이번의 H씨의 글은 나의 사기를 재확인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 密告 안에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시인은 밤낮 달아나고 있어야 하는데 비평가는 필요에 따라서는 적어도 4,5개월쯤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야 한다. 혹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여야 한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

시인의 정신과 방법? 나는 그대를 속이고 있다. 술을 마실 때도, 산보를 할 때도, 교섭을 할 때도 무엇을 속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속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는 그대를 속이고 dLT다. 그대는 영리한 사람인 경우에는 눈치를 챈다. 나를 신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리한 그대는 내가 속이는 순간만 알고 있고, 내가 속이지 않는 순간이 dLT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한 그대를 구출하는 길은 그대가 시인이 되는 길밖에는 없다. 시인은 모든 면에서 백치가 될 수 있지만, 단 하나 시인을 발견하는 일에서만은 백치가 아니다.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밖의 모든 책임을 시인으로부터 경감하라!

<1964. 9>

진정한 현대성의 지향

―朴泰鎭의 詩世界





泰鎭의 詩는 일견 특색이 없다. 일부러 意表에 오르지 않는 것을 쓰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소의 괴벽스런 影像의 포우즈도 있지만 희박한 인상을 준다. 그의 시에는 <인생><내일><어저께><오후><시절><계절><기대><과거> 같은 시간용어나 준시간용어가 자주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들이 구성하는 人生論的인 서정이 역시 시간 위에 溶解되고 있다. 그의 詩가 일견 특색이 없어보이는 것은 다분히 이런 음악적인 경향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경향에서 볼 때 그의 詩에 나오는 용어들은 <憐憫><感情><孤獨><象徵> 등의 抽象語뿐만 아니라 <雪景><眼球><風化><戱畵><旅裝> 등의 具象語까지도 현대적인 潤色 속에서 지독하게 抽象化되고 있다.


이 눈 속에 地球를 생각하며 가을이 오듯이

그 후미진 곳을 향하여 落影하는 象徵들

眼球의 一角이 쑤시고

充血하는 곳

나의 故鄕이라고 하자

―「眼球」에서


이 「眼球」의 인용 구절처럼 그의 추상은 잘못하면 의미를 건질 수 없을 만큼 난삽해지며, 그의 초기의 작품은 대개가 이런 종료의 모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밖에 그의 詩를 난삽하게 만드는 요소로서 나르시스적인 감상이 있다. 그는 외적 정경을 서술할 때에도 이 나르시스의 그늘을 버리지 못한다.


오늘은 異邦의 直線車道를 건너며

나의 姿勢를 의심해 보았는데

―「공원길」에서


테므즈江 물은 자꾸 이야기를 띄워가는데

나는 흐르지 않는데

―「론든 부릿지에서」에서


마르지 않은 물줄기를 찾아

펠소나를 씻노라면

테므즈江은 나의 이야기를 싣고 간다.

―「同上」에서


걸음 걸음 나의 過去를 밟으며 暫時 나는

나의 부릿지를 생각해본다.

―「同上」에서



이러한 감상벽은 최근에 와서는 조화와 체념과 관조로 자리를 바꾸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의 내적 투쟁은 지드의 경우처럼 대부분 이 나르시스를 극복하기 위한 일이 바치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詩를 난삽하게 만드는 그밖의 요소로서 聯間과 行間과 行中의 연결에 부자연한 중단벽이 있고 우리말 사전에는 없는 난말의 亂用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묘사에 적합하지 않은 시적 기질이 산문의 의미를 성급하게 전달해보려는 무리에서 오는 수가 많다. 이것은 영상의 난삽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겪어야 할 난관이지만 그의 경우는 좀 집요한 편이다. 이것을 구하는 길은 의미의 구출이다. 아무리 부자연한 중단이 많고 불가해한 낱말이 있어도 그것을 커버할 만한 의미의 연결이 서 있을 때는 성공이다. 「歷史가 알 리 없는……」「아름다운 空白」「어지빠른」「自問하는 마음」(이상의 작품은 모두 詩集 「變貌」 속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등의 그런 의미에서 성공한 작품들이다. 이 중에서도 그의 본질이 가장 잘 나타나 dLT는 것이 「歷史가 알 리 없는……」이다.


歷史가 알 리 없는……

나의 초조한 걸음을

나의 지지한 작은 일들을

歷史가 알 리 없는

西大門 근방은 먼지가 많다.

그러기에 하늘은 멀리만 보이고

이미지가 不毛하던 이유를

人生만이 알 수 있다고 하자

꿈없는 길이 새문안을 향하여


특색없는 굴르는 乘合길을

다만 나와 더불어 희미한 길을

나는 꿈을 부어줄 수 있을까

歷史가 알 리 없는 나의

삶의 자취는 나의 어저께


낡은 나와 생각들이 남을 수 없는

車道와 步道 사이에서 언젠가 無智가 죄로 소박맞은 女人이 울던

이 길은 사랑도 미움도 어지빠른데

순간마다 변하는 구름길이 더욱 길다.

歷史가 알아줄 리 없는 나의

응달진 過去에 謝過는 없다.


길은 都市를 안고 경사지며

나는 형적없이 경사진 나이에 기대어

오늘의 일을 한줌 모아 펴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못하는 일 나의 人生이라고 하자

그러나 비가 내리며

내 이마를 소리없이 적실 그리고

소리없이 젖을 街路樹의 리듬을

나는 진정 알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의 여러 발음들이 본질적인 현대성을 바탕으로 하고 유니크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 있는 현대성은 육체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를 쓰기 전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시단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이것이다. 진정한 현대성은 생활과 육체 속에 지각되어 있는 것이고, 그 때문에 그 가치는 현대를 넘어선 영원과 접한다. 이 시의 모티브는 <나의 초조한 걸음을 / 나의 지지한 작은 일들을 歷史가 알 리 없는>의 현대적 자각에 있지만 귀결은 <소리없이 젖을 街路樹의 리듬을 / 나는 진정 알고 있다>의 영원한 인식으로 통하고 있다. 이만하면 그의 흘음(吃音 ; 말을 더듬음-승주(昇注))들을 그의 애교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이를테면 다음의 구절 같은 것은 그의 서투른 솜씨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곳인데,


계단에 모든 것을 기대 선

두 다리는 언젠가

몽마르뜨르 긴 층층계에서 떨은 적이

론든 밤거리에 굳어버린 적이

실상 다급한 것은 없다.

바람은 일고 자고

―「아름다운 空白」에서


이런 구절들은 구조상으로는 「歷史가 알 리 없는……」에서의 <낡은 나와 생각들이 남을 수 없는>의 연(聯)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숙명적인 난삽의 고개를 넘어서 <응달진 과거에 사과는 없다>의 청징(淸澄)한 힘에 도달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고지식한 분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웃을 수 있고 신용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싸움에 20년 가까이 종사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대부분의 하이칼라한 현대어 사이에 유표난 동양어(東洋語)들이 섞여있다. 시집 「變貌」 안에서만 보더라도 <關東의 曲><散調><大門><落水><落淚><冠岳><落潮> 등이 눈에 뜨인다. 이런 습성은 그가 초기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며, 자기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습성인 것 같다. 이런 말들이 그의 詩의 배경에 흡수되지 않는 것은, 좀 과장해서 말하면 徐廷柱가 <역사><궤도><욕구><계단> 같은 현대어를(詩作品에서) 사용할 때의 느껴지는 대조감 같은 것을 준다.


바람의 아들과 딸은 콧노래로 關東의 曲을 뜯으며

바람에 부벼 여원 以來

성에 차지 않은 쟈즈를

바람에 묻어 띄워보내는

喜悲의 얼굴은 다시

바람의 散調

―「雪景」에서


어떻게보면 모더니티의 피로에서 오는 타성같이도 보이지만 그의 작품을 오래 접해보면 이런 어휘의 패배가 그의 숨은 순진을 보여주는 것 같은 감을 받는다. 그의 최근의 작품에는 이런 어휘가 풍기는 향수를 생활현실에의 접근을 통해서 폭을 넓혀보려는 기미가 보인다.

현대적인 착잡한 분장 속에 일관되어온 그의 시의 본질은 인생의 감회다. 그러나 여지까지의 그것은 한국에 사는 이방인으로서의 인생의 감회다. 만약에 그가 「武矯洞」(新東亞 10)의 세계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킬 때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人生詩를 새로운 吃音으로 노래할 수 있는 독보적인 세계를 획득할 것이다. <眼球의 一角이 쑤시고 / 充血하는 곳 / 나의 故鄕…> 속으로 紳士詩의 옷을 벗고 들어오라면 그는 화를 낼 것인가? 泰鎭과 나와의 교우는 그가 시를 발표하기 전부터 시작되어 왔다.

그가 <…시의 난해성이 여태의 의미로 그칠 리 만무하고 또한 우리 시인들의 시 경험을 자극하는 레알리떼가 불투명하다 치고 그러나 여태와 같은 의미에서 불투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현대시의 난해성은 또한 새로운 의미에서 난해할 것이 아닐까>(그의 詩月評 「難解詩에 대한 最終是非」 思想界 11에서)라고 말할 때 나는 그가 말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는 <새로움>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새로움>의 추구에서 그는 우리 시단의 누구보다도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교양의 근거를 갖고 있다. 다만 그러한 立證이 작품을 통해서 뚜렷하게 서지 않는 것은 위에서 말한 그의 吃音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이 吃音의 여운과 싸우고 있다. 이러한 여운이 가신 진정한 오늘의 난해시가 어떤 것이냐? 그는 이 해답을 앞으로의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모든 한국시의 카메라의 셔터는 灼熱하는 선진국을 보기 위해 구멍을 훨씬 오무려야 하지만 그의 셔터만은 어두운 한국의 시를 1965년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구멍을 좀더 크게 크게 열어야 할 것이다.

<1965. 2>

演劇하다가 詩로 전향

―나의 처녀작





나는 아직도 나의 신변얘기나 문학경력 같은 지난날의 일을 써낼 만한 자신이 없다. 그러한 내력얘기를 거침없이 쓰기에는, 나의 수치심도 수치심이려니와, 세상은 나에게 있어서 아직도 암흑이다. 나의 처녀작의 얘기를 쓰려면 해방 후의 혼란기로 소급해야 하는데 그 시대는 더욱이 나에게 있어선 텐더 포인트다. 당시의 나의 자세는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닌 그야말로 완전 중립이었지만, 우정관계가 주로 작용해서, 그리고 그보다도 줏대가 약한 탓으로 본의 아닌 우경 좌경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항층 지독한 치욕의 시대였던 것 같다.

소위 처녀작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된 것이 해방 후 2년쯤 되어서일까? 아무튼 趙演鉉이가 주관한 《藝術部落》이라는 동인지에 나온 「廟廷의 노래」라는 것이, 인쇄로 되어 나온 나의 최초의 작품이다. 그때 나는 연극을 집어치우고 혼자 시를 쓰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발표할 기회가 전혀 없었고, 《예술부락》에 작품을 내게 된 것도 그 동인지가 해방 후에 최초로 나온 문학동인지였다는 것, 따라서 내가 붙잡을 수 있었던 최초의 발표의 기회였었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演鉉에게 한 20편 가까운 시편을 주었고, 그것이 대체로 소위 모던한 작품들이었는데, 하필이면 고색창연한 「廟廷의 노래」가 뽑혀서 실려졌다. 이 작품은 東廟에서 이미지를 따온 것이다. 동대문 밖에 있는 동묘는 내가 철이 나기 전부터 어른들을 따라서 명절 때마다 참묘를 다닌 나의 어린시절의 성지였다.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거대한 關公의 立像은 나의 어린 영혼에 이상한 외경과 공포를 주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공포가 퍽 좋아서 어른들을 따라서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무수히 절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廟廷의 노래」는 어찌된 셈인지 무슨 불길한 곡성같은 것이 배음으로 흐르고 있다. 상당히 엑센트릭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일부의 평은 나의 작품을 능변이라고 핀잔을 주고 있지만, 「廟廷의 노래」야말로 내가 생각해도 얼굴이 뜨뜻해질 만큼 유창한 능변이다. 그후 나는 이 작품을 나의 마음의 작품목록에서 지워버리고, 물론 보관해둔 스크랩도 없기 때문에 망신을 위한 참고로도 내보일 수가 없지만, 좋게 생각하면 <의미가 없는> 시를 썼다는 증거는 될 것 같다.

그후 이 작품이 게재된 《예술부락》의 창간호는, 朴寅煥이가 낸 <茉莉書舍>라는 해방후 최초의 멋쟁이 서점의 진열장 안에서 푸대접을 받았고, 거기에 드나드는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묵살의 대상이 되고, 역시 거기에 드나들게 된 내 자신의 자학의 재료가 되었다. 「廟廷의 노래」와 같은 무렵에 쓴 내딴으로의 모던한 작품들이 「廟廷의 노래」보다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廟廷의 노래」가 《예술부락》에 실려지지만 않았더라도―「廟廷의 노래」가 아닌 다른 작품이 《예술부락》에 실려지거나, 「廟廷의 노래」가 《예술부락》이 아닌 다른 잡지에 실려졌더라도―나는 그 당시에 寅煥으로부터 좀더 <낡았다>는 수모는 덜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나중에 생각하면 바보같은 콤플렉스 때문에 시달림도 좀 덜 받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후 나는 茉莉書舍를 통해서 朴一英 金秉旭 같은 좋은 詩友를 만나게 되었고, 寅煥이 茉莉書舍를 그만둔 후에 金璟麟 林虎權 梁秉植 그리고 寅煥과 함께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이라는 詞華集을 내게 되어서 지금도 나의 처녀작이라면 이 시화집 속에 수록된 작품들이 나의 처녀작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실질적인 처녀작은 여기에 수록된 「아메리칸 타임誌」와 「孔子의 生活難」도 아니고, 「廟廷의 노래」도 아니다.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에 수록된 「아메리칸 타임誌」와 「孔子의 生活難」은 이 시화집에 수록하기 위해서 급작스럽게 粗製濫造한 히야까시같은 작품이고, 그 이전에 나는 「아메리칸 타임誌」라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일본말로 쓴 것이 있었다. 그 당시에 우리집은 충무로 4가에서 <有名屋>이라는 빈대떡집을 하고 있었는데 치질수술을 하고 중환자처럼 자리보전을 하고 가게 뒷방에 누워있는 나는 벽지 위에다 「아메리칸 타임誌」라는 일본말 시를 서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자주 우리집엘 찾아온 秉旭이가 어느날 찾아와서 이 시를 보고 놀라운 작품이라고 하면서 村野四郞에게 보내서 일본 시잡지에 발표하자고까지 칭찬을 해주었다. 秉旭이가 경상도 기질의 과찬벽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눈물이 날 지경으로 감격했던 것 같다. 그후 寅煥이가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을 계획했을 때 秉旭도 처음에는 한몫 끼일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璟麟이와의 헤게머니 다툼으로 秉旭은 빠지게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寅煥의 모더니즘을 벌써부터 불신하고 있던 나는 秉旭이까지 빠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도 그만둘까 하다가 겨우 두 편을 내주었다. 秉旭은 이때 내가 일본말로 쓴 「아메리칸 타임誌」를 우리말로 고쳐서 내주라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에 대한 반발로 히야까시적인 내용의 작품을 히야까시쪼로 내준 것 같다. 혹은 秉旭이가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내가 미리 秉旭의 추측을 앞질러서 그의 허점을 찌르려고 황당무계한 내용에 「아메리칸 타임誌」라는 같은 제목을 붙여서 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좌우간 나는 이 시화집에 실린 두 편의 작품도 그후 곧 나의 마음의 작품목록으로부터 깨끗이 지워버렸다.

이 일본말로 쓴 「아메리칸 타임誌」라는, 내딴으로의 리얼리스틱한 우수한(?) 작품 이전에 또 하나의 리얼리스틱한 우수한 작품으로 「거리」라는 작품을 나는 썼다. 이것은 치질 앓기 전에 동대문안에 있는 고모집에 기식하고 있을 때 쓴 것이다. 이때 秉旭은 대구에서 오라오기만 하면 나를 찾아왔고 기식하고 있는 나의 또 기식자가 되었다. 그는 현대시를 쓰려면 우선 육체의 단련부터 필요하다고 하면서 나에게 권투를 가르쳐주려고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리석었던 시절이었고, 또한 상당히 즐겁고도 괴로운 시절이었다. 나는 현대시를 쓴다고 자처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상당히 로맨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리」도 그러한 로맨틱한 작품이다.


…………

馬車馬야 뺑긋거리고 웃어라간지럽고 둥글고 안타까운 이 全體의 속에서

마치 힘처럼 소리치려는 깃발―

별별 여자가 지나다닌다

화려한 여자가 나는 좋구나

내일 아침에는 夫婦가 되자

집은 산너머가 좋지 않으냐

오는 밤마다 두 사람 같이

貴族처럼 이 거리 걸을 것이다

오오 거리는 모든 나의 설움이다


지금 겨우 기억하고 있는 것은 끝머리의 요 몇 줄 정도다.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처녀시집이라면 처녀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8년 전인가에 나온 시집이 이 작품과 「꽃」이라는 《民生報》에 실렸던 작품을 넣고 싶었는데 기어코 게재지를 얻지 못해 넣지를 못했다. 「거리」는 나의 유일한 연애시이며 나의 마지막 낭만시이며 동시에 나의 실질적인 처녀작이다. 나는 남대문시장 앞을 걷다가 이 이미지를 얻었는데, 秉旭은 이 시를 읽고 이런 작품을 열 편만 쓰면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가질 수 있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秉旭에 대해서는 愛憎同時倂發症에 걸려있었고, 이런 그의 말을 신용하면서도 경멸했기 때문에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아메리칸 타임誌」를 통해서 반격 내지는 배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거리」를, 秉旭의 말을 듣고 起林은 여기에 나오는 <貴族>이란 말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이것을 다른 말로 고치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며칠을 두고 고민한 끝에 기어코 고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이 <貴族>이란 말을 고치지 않은 것이 나의 시적 자기증명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하고 무심히 생각해볼 때가 있다. 起林은 이것은 <영웅>으로 고치면 어떠냐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영웅―나는 그가 말하는 영웅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작품에서 <貴族>을 <영웅>으로 고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모독이었다. 앞으로 나의 운명이 바뀌어지면 바뀌어졌지 그 말은 고치기 싫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체질과 고집이 내가 좌익이 되는 것을 방해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시적 위치는 상당히 전통적이고 완고하기까지도 하다. 「거리」는 이러한 나의 장점과 단점이 정직하게 반영되어있는 작품이고, 현대시는 못되지만 「廟廷의 노래」에 비해서 그 나름의 수준에는 도달한 작품이다.

그러나 현대시로서의 진정한 자질을 갖춘 처녀작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볼 때 나는 얼른 생각이 안 난다. 요즘 나는 리오넬 트릴링의 「快樂의 運命」이란 논문을 번역하면서, 트릴링의 수준으로 본다면 나의 현대시의 출발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하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10여 년 전에 쓴 「屛風」과 「瀑布」다. 「屛風」은 죽음을 노래한 詩이고, 「瀑布」는 懶惰와 안정을 배격한 시다. 트릴링은 쾌락의 부르죠아적 원칙을 배격하고 고통과 불쾌와 죽음을 현대성의 자각의 요인으로 들고 있으니까 그의 주장에 따른다면 나의 현대시의 출발은 「屛風」 정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고, 나의 진정한 詩歷은 불과 10년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트릴링도 떠나서 다시 나대로 또한번 생각해보면, 나의 처녀작은 지난 6월 2일에 쓴 아직도 발표되지 않은 「미역국」이라는 최근작같기도 하고, 또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아직도 나는 진정한 처녀작을 쓰지 못한 것 같다. 야단이다.

<1965. 9>

作品 속에 담은 祖國의 試鍊

---폴랜드의 作家 셴키에비치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두에 걸친 폴랜드의 작가 쎈키에비치를 말하려면 우선 폴랜드의 역사의 윤곽부터 말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폴랜드 국민은 10세기에 신화시대로부터 기독교시대로 들어갔으며, 따라서 그 시대서부터 폴랜드 국민의 역사적 생활이 시작한다. 이웃나라와의 격렬한 싸움을 겪어가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보존해왔고, 그동안에 폴랜드의 영토는 엘베강에서 도니에블강에까지 오, 볼틱 海에서 黑海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 폴랜드 문명의 특징을 유럽 문명의 그것과 똑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허기는 비잔틴문화의 영향이 바로 폴랜드의 접경까지 밀려든 일도 있기는 하지만 역시 이 나라의 문화의 특징은 기독교적인 것이다. 이런 특수한 地勢 때문에 이 나라의 문명은 진보를 보았고, 그 때문에 또한 이 나라는 전쟁을 겪고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13세기 이후 폴랜드는 韃靼人(달단인)의 침략을 막아왔고, 이러한 폴랜드의 노력으로 그 침략이 유럽에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처럼 유럽의 방어자로서 그 침략이 유럽에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처럼 유럽의 방어자로서 폴랜드는 <기독교의 방패>라는 명예스러운 칭호를 얻게 되었다---그당시 이 말은 <문명의 방패>와 똑같은 의미로 통할 수 있는 것이었다. 16세기 말엽에 리토아니아와 王朝의 연결로 동맹을 맺고 그 후 1569년에 자발적으로 영구적인 합병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폴랜드의 세력은 증대되고 국왕의 광대한 지배는 16세기에 전 유럽을 뒤흔든 동란을 무사히 막아낼 수 있게 했다. 국내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기 때문에 잔인한 종교적 박해라든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다른 나라들이 겪은 특수한 싸움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러한 폴랜드의 융성을 시기하고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세 이웃나라는 동맹을 맺고 폴랜드의 독립을 박탈하려고 책동하기 시작했다. 그후 세 나라는 전쟁으로 폴랜드 정복에 성공하고 1773년에 1795년까지 폴랜드의 3국 분할을 이루어놓았다. 이리하여 1795년에 폴랜드는 3차에 걸친 분할을 겪은 뒤에 드디어 독립국가로서의 존재가 완전히 말살되었다. 나라는 멸망했었지만 국민들은 살아 있었다. 러시아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하는 전쟁에는 언제나 폴랜드 병사들이 참가했다. 나폴레옹 휘하의 폴랜드 군대의 용맹성에 의해서 그들은 불멸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그들이 피를 흘리고 싸운 보상으로 1807년에 와르소 大公國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후일 재생하는 폴랜드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나폴레옹 1세의 몰락과 함께 그들의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1815년에 원회의는 舊폴랜드의 일부에 소위 協議王國이라는 것을 만들고, 러시아 황제를 왕으로 하는 자치적 왕국을 세웠다. 러시아 황제의 지배는 폭정이었고, 그 후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번번이 러시아의 강력한 무력으로 탄압되고 실패에 돌아갔다. 1830년, 1863년, 1905년의 봉기는 적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지만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폴랜드가 독립국가로 다시 재생한 것은 1918년, 즉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그후 1934년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1939년 9월에 독일군의 폴랜드 침입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게 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폴랜드는 다시 소비에트와 독일에게 전 국토를 분할당했고, 1941년의 독일과 소비에트의 개전으로 독일이 전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 후 1945년 1월에야 폴랜드는 독일의 패망으로 다시 독립을 하게 되었고, 1952년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그 후 친소 사회주의 경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의 면에서 폴랜드를 볼 때 이 나라는 그러한 불우한 국가적 운명 속에서도 거대한 인물을 수많이 배출했다. 위선 15세기 중엽에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지구의 운행에 관한 이론을 발견한 유명한 세기적인 천문학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가 폴랜드사람이며, 최근에는 방사성 물질을 발견하고 노벨물리상을 탄 유명한 여류 물리학자 퀴리부인이 폴랜드사람이다. 또한 1919년에 폴랜드의 수상으로 취임한 저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파데레브스키가 있다.

퀴리부인의 자서전에도 나오지만 자유를 빼앗긴 폴랜드 국민은 아이들에게 자기나라의 말도 가르치지를 못했고, 祈禱도 아이들이 자기나라의 말로 드리면 피가 흐르도록 매를 맞았다. 국민들은 자기들의 땅을 소유할 권리가 없었다. 이러한 저주받은 구속된 기간 동안에 폴랜드 국민은 정부도 없고 군대도 갖지 못햇다. 이러한 절망에 빠진 폴랜드 국민에게 정신적 支柱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미술과 음악과 문학이었다. 폴랜드의 시인은 고대의 예언자처럼 미래에 있어서의 국민의 재생을 예언하고, 자유를 잃고 기진맥진한 동포의 영혼을 격려하고 그들이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다. 미키에비치(1798~1855), (폴랜드의 대국민 시인)과 슬로바키와 크라신스키와 같은 시인들의 걸작, 작곡가 쇼팽의 작품, 위대한 화가 그로트거와 매티고의 그림, 이러한 것들은 압박당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폴랜드와 정복해야 할 敵에 대한 것을 열렬하게 호소했던 것이다.

헨리크 셴키에비치(1846~1916)는 1863년의 실패한 반란 후에 폴랜드 사회가 전반적으로 절망과 피폐에 싸여있을 때에 청년기에 도달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여지껏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던 희망은 꺼져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생기를 주기 위해서는 비범한 영웅적인 先例와 正義의 승리같은 것이 사람들의 앞에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서 헨리크 셴키에비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모국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되는 일을 가장 성공적인 방법으로 성취시켰다. 매력적인 처녀작 「황무지에의 탈출」(1872년), 최초의 단편집「늙은 머슴」(1875년), 「음악가 양코」(1881년), 「정복자 발테크」와 「등대수」(1882년) 등이 그것이다. 그는 1883년에 당시 그가 편집하고 있던 일간신문 스로워를 통해서,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동포의 <정신적 要塞를 강화하기 위해서> 위대한 歷史詩 「三部作」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三부작」은, 「불과 칼을 들고」(1884년)와 「홍수」(1886년)와 「판 미카엘」(1887~1889년)로서 각각 출판되었다. 그후 1891년에 가련한 심리적 장편소설 「無信仰」을 발표하고 1895년에 교훈적인 소설 「폴랜드 가족」을 발표하고, 유명한 역사소설로서 로마시대의 폭군 네로를 취재로 한 「쿼 바디스」는 1896년에 완성되었다.

「三部作」은 17세기 중엽의 폴랜드의 敍事詩的 묘사로서, 스웨덴과 전쟁을 할 때 달단인과 코자크들이 침입해온 시대의 얘기다. 적은 사방에서 국내로 몰려들었다 수도는 그들에게 점령을 당하고 국왕은 간신히 피신을 했다. 이 불바다 속에서, 이 불행과 재앙의 도가니 속에서 단 하나의 要塞, 야스나 구라(빛나는 언덕이라는 뜻)의 교회만이 정복을 당하지 않고 공격에 견딜 수 있었다. 거대한 대포는 탄알을 성벽에다 대고 퍼부었고, 연이어 공격에 공격을 가했지만 모두다 허사였다. 그리고 이것을 방어하며 싸우는 용사들을 항복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스나 구라의 용감한 방어전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폴랜드 국민들은 각기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들은 적을 쫓아내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다시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적은 드디어 격퇴되어 폴랜드의 국경 밖으로 도망쳐나가고 야스나 구라는 무사하게 되었다. (이런 「3부작」의, 17세기 당시의 적에 대한 폴랜드 국민의 전투의 모습의 묘사는 역사가에 따라서 의견이 구구하지만 그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것이 「3부작」의 최후의 장면이다. 이 소설은 세계문학의 걸작 중의 하나에 드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00년에 나온 「십자가의 騎士」는 국경 근처에서 폴랜드를 공격한 독일 敎團과의 전투를 그린 것이다. 이 이야기는 15세기 때의 것이고, 폴랜드가 <십자가의 기사> 교단의 힘을 결정적으로 분쇄한 유명한 구룽왈트 싸움의 묘사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책과 영화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고 있는 「쿼 바디스」는 로마의 폭군 네로시대에 있어서의 초기 기독교도들의 순교를 그린 작품으로, 이것은 1896년에 출판되자마자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일대 선풍을 일으킨 것이다. 그후 1905년에 셴키에비치는 노벨문학상을 타게 되었다.

이상 열거한 전작품에 공통되는 관념은 무엇인가. 또한 압박당한 시대에 있어서 폴랜드에 대해서 어떤 목적을 갖고 있었나. 거기에는 투쟁이 있고, 正義에 대한 박해가 있고, 그리고 최후에는 정의의 승리가 있다. 적국의 검열관들의 엄중한 감시 밑에서 러시아와 프러시아의 압박에 대해서 공공연한 불만을 털어놓는 일은 폴랜드 작가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셴키에비치가 그의 눈을 과거로 돌린 이유이었다. 폴랜드에서도 구속받은 백년 동안에 수많은 네로가 있었다. 로마의 네로를 빌어서 그는 이러한 네로들을 암시하고 규탄했다. 셴키에비치의 고전적 작품은 폴랜드 국민의 정신에 영향을 주고 영광된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미래를 의심하지 않게 하고, 그리고 믿음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셴키에비치의 문학과 투쟁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절실히 요청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어떤 문학적 수법으로 어떻게 어디까지 싸워야 할 것이냐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셴키에비치의 시대에 비해서 오늘날의 상황이 급속도로 복잡하고 미묘하고 보다더 불행해진 것도 사실이며, 어찌보면 그의 역사적 방법이 낡은 감이 없지도 않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이며 조금도 낡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의 위대한 투지와 역량에 접할 때, 우리들은 새삼스럽게 한없이 압도될 뿐이다.

<1966. 1>

 

     



詩여, 침을 뱉어라*

―힘으로서의 詩의 存在





나의 시에 대한 思惟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만한 명확한 것이 못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上部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죽탑을 생각해볼 때, 시의 探針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고, 십자가의 하반부에서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의 건축의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있다 하더라도, 詩作上으로 그러한 明晳의 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못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의 오늘의 세미나의 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즉 노래―이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시를 못쓰게 된다. 다음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직까지의 시에 대한 思辨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시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나는 이미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한다고 시사한 것만큼, <詩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한 폭이 된다. 내가 시를 논하게 된 것은―속칭 <詩評>이나 <詩論>을 쓰게 된 것은―극히 최근에 속하는 일이고, 이런 의미를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 <시를 논한다>는 본질적인 의미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第一義的인 본질적인 의미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논지의 진행상의 편의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詩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開陣, 하이데거가 말한 <大地의 은폐>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오트의 문맥 속에서는 그것은 의미 對 음악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엘리오트도 그의 온건하고 주밀한 논문 「詩의 音樂」의 끝머리에서 <詩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있다>라는 말로 <意味>의 토를 달고 있다. 나의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은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해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허자라는 달갑지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留保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侵攻적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穩性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詩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의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詩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그의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더 精銳化―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수면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 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신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수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여직까지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못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직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성립의 사회조건의 중요성을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강조하고 있다―『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되어서, 詩人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 이미 중대한 일이 모두 다 종식되는 때다. 개미나 벌이나, 혹은 흰개미들이라도 지구의 지배권을 물려받는 편이 낫다. 국민들이 그들의 <過激派>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고립된 단독의 자신이 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間隙이나 구멍을 사회기구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더 나쁜 일이다―설사 그 사람이 다만 奇人이나 집시나 범죄자나 바보얼간이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인용문에 나오는 기인이나, 집시나, 바보 멍텅구리는 <내용>과 <형식>을 논한 나의 문맥 속에서는 물론 후자 즉 <형식>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얼간이들이, 자유당때하고만 비교해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있다. 부산은 어떨지 모르지만, 서울의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커녕 막걸리를 먹으러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에 메콩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근대화>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할 일이 아니다.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서방측의 자유세계>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그(서방측의 자유세계의) 시민들의 대부분은 群居하고, 인습에 사로잡혀 있고, 순종하고, 그 때문에 자기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싫어하고, 만약에 노예제도가 아직도 성행한다면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도 싫어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혹은 知的一致를 시민들에게 강효하지 않는 의미에서, 이 세계가 自由를 보유하는 한 거기에 따르는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혼란>은 지금처럼 이렇게 처절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자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도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나갈 수 있는 순간이 와있다. <막상 詩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詩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 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1968. 4>


* 1968년 4월 釜山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의 발표 원고


反詩論




문학에는 숙명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곡예사적 일면이 있다. 이것은, 신이 날 때면 신이 나면서도 싫을 때는 무지무지한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킨다. 곡예사란 말에서 연상되는 것이 불란서의 시인 레이몽끄노의 재기발랄한 시다. 얼마전에 죽은 꼭또의 문학도 그렇다. 빨리 죽는 게 좋은데 이렇게 살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 주접이 붙는다. 분별이란 것이 그것이다. 술을 먹을 때도 몸을 아끼며 먹는다.

그리고 젊었을 때와 다른 것이, 젊은 사람들과 대할 때면 완연히 체면 같은 것을 의식해서 말도 함부로 하지 않게 되고 주정도 자연히 삼가게 된다. 이쯤 되면 거지가 되거나 농부가 되거나 죽거나 해야 할텐데 그것을 못한다. 나이가 먹으면서 거지가 안 된다는 것은 생활이 안정되어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불안을 느끼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을 판단한다. 하다못해 술친구들까지도 자기하고 생활정도가 비슷한 사이를 좋아하게 된다.

그렇지만 恒産이 恒心이라고, 생활에 과히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정신의 불필요한 소모가 없어진다. 도시 마음을 쓸 데가 없는 것 같다. 약간의 사치를 하는 것도 싫지 않고, 남이 하는 사치도 자기의 사치보다 더 즐거웁게 생각된다. 하늘은 둥글고 땅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 역사도 둥글고 돈도 둥글다. 그리고 詩까지도 둥글다.

그런데 이런 둥근 詩 중에서도, 하기는 이땅에서는 발표할 수 없는 것이 튀어나오는 때가 있다. 최근에 쓴 [라디오界]라는 제목의 시가 그것이다. 이런 작품도 느닷없이 맨 작품으로 내놓기보다도 설명을 붙여서 산문 속에 넌지시 끼어 내는 편이 낫겠지만 詩란 그런 것이 아니다. 위험을 미리 짐작하고 거기에 보호색을 입혀서 내놓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고 아예 발표하지 않고 썩혀두는 편이 훨씬 낫다.

그리고 그전에는 이런 발표할 수 없는 작품을 쓰게 되면 화가 나고 분하면서도 오히려 흐뭇한 감을 느꼈는데, 요즘에 와선 그런 자존심도 없어졌다. 후일에 언제이고 발표할 날이 있겠지 두고 보자, 하는 따위의 앙심도 없어지고, 영원히 발표할 날이 없다 해도 조금도 섭섭하지 않은 기분이다. 아니 오히려 발표될 수 없어서 잘되었다는 안도감까지도 든다.

그런데 아주 발표하지 못하는 경우보다도 더 기분나쁜 경우가 있다. 그것은 수정을 해서 내놓는 경우다. 죽는 것보다도 못한 것이 병신이 되는 것이다. 나의 친척에 아들 다섯을 다 병신을 둔 사람이 있다. 이이는 검사노릇을 하다가 4․19 후에 그만두고, 그래도 먹을 것은 있고 몸도 별로 약한 편이 아니었는데, 얼마전에 60도 다 못 채우고 갑자기 죽어버렸다. 미친 자식을 두고 속을 썩인 분수로는 오래 산 셈이다. 그래도 글을 수정해내는 것은 미친 자식을 둔 것보다는 나을는지.

그렇지만 화가 난다. 최근에 某신문의 칼럼에 보낸 원고가 수정을 당했다. 2백자 원고지 5장 중에서 4,5군데를 고쳤다. 음담의 혐의를 받고 불명예스러운 협상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고치자고 항복을 했을 때는, 나중에 나의 보관용 스크랩으로 두는 것만은 초고대로 고쳐놓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며칠 후에 신문에 난 것을 오려놓고 보니, 다시 원상대로 정정을 할 기운이 나지 않는다. 겨우 두어서너 군데만 고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러고보니 오히려 수정을 해준 대목이 초고보다 더 낫게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이왕 강간을 당하고 순결을 잃은 몸인데, 하는 심사도 있지만, 요는 내 글보다도 내 글이 자유롭게 내놓여질 수 있는 세상이 정작 문제이지 내 글은 문제가 아니라는 심정이고, 그러고보면 내 글보다 훌륭한 얼마나 많은 글이 파묻혀있겠는가 하는 수치감이 들고, 이런 쪽지글에 신경을 쓰고 보관을 하려고 스크랩을 하는 것부터가 무거운 자책감이 든다. 언론의 자유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천재의 출현을 매장하는 하늘과 땅 사이만한 죄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A윤리위원회에서 Z윤리위원회까지의 모든 윤리기관을 포함한 획일주의자가 멀쩡한 자식을 인위적으로 병신을 만들고 있다. 이런 풍토에서는 곡예사가 재롱만을 부리지 않고 사기를 하게 된다.

또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흥분도 상품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사기다. 그러나 이것만은 그만두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죽느니만도 못하다. 그러나 상품으로서의 흥분을 의식하면서 흥분하는 익살광대짓도 있지만 좌우간 피로하다.

이럴 때를 나는 至日로 정하고 있다. 지일에는 겨울이면 죽을 쑤어 먹듯이 나는 술을 마시고 창녀를 산다. 아니면 어머니가 계신 농장으로 나간다. 창녀와 자는 날은 그 이튿날 새벽에 사람 없는 고요한 거리를 걸어나오는 맛이 희한하고, 계집보다도 새벽의 산책이 몇백배나 더 좋다. 해방 후에 한번도 외국이라곤 가본 일이 없는 20여 년의 답답한 세월은 훌륭한 일종의 감금생활이다.

누가 예술가의 가난을 자발적 가난이라고 부른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나의 경우야말로 자발적 감금생활, 혹은 적극적 감금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한적한 새벽거리에서 잠시나마 이방인의 자유의 감각을 맛본다. 더군다나 계집을 정복하고 나오는 새벽의 부푼 기분은 세상에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다.

이것은 탕아만이 아는 기분이다. 한 계집을 정복한 마음은 만 계집을 굴복시킨 마음이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는 거리에서 여자를 빼놓으면 아무것도 볼 게 없다. 머리가 훨씬 단순해지고 성스러워지기까지도 한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것도, 해장을 하고 싶은 것도 연기하고 발 내키는 대로 한적한 골목을 찾아서 헤맨다. 이럴 때 등굣길에 나온 여학생 아이들을 만나면 부끄러울 것 같지만, 천만에! 오히려 이런 때가 그들을 가장 있는 그대로 순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다. 격의없는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순간. 때묻지 않은 순간. 가식 없는 순간.

그런데 이런 至日의 중요한 휴식의 기회도 요즘에 와서는 놀라울 정도로 이용하는 도수가 적어졌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생활이 안정된 탓일 거라. 여유가 생기니까 이상하게도 여유가 없을 때보다도 덜 가지고 매력도 없어진다. 포옹의 매력도 그렇고 산책의 매력도 그렇다. 여유가 생기면 둔해진단 말이 맞는다. 그리고 둔해지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고 둔해지는 것을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고, 자꾸 이런 식으로 무한대로 좋다는 생각이 드니 할 수 없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술을 마신 끝에, 간혹 좋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짓을 하고 부푼 마음으로 일찌감치 새벽거리로 뛰어나왔다가 혼이 났다. 아직 행인은 얼마 안 되고 행길은 쓸쓸한데, 노란 돌격모를 슨 도로 청소부의 한떼가 보도에 일렬로 늘어서서 빗자루로 길을 쓸고 있다. 나는 종로거리에서 자라나다시피한 사람이지만 이렇게 용감한 청소부는 처음 보았다.

어찌나 급격하게 일사천리로 쓸고 나가는지 무서울 정도였다. 나는 새벽에 직장에 출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처음 보는 풍경인 만큼 더욱 놀랐는지는 몰라도 아마 이 꼴을 자주 보는 사람도, 경기장에 들어온 관중을 무시하듯 행인을 무시하는 이들의 태도에 습관이 되려면 몇 달을 착실히 걸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도 간혹 버스정류장 부근같은 데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마구 먼지를 퍼붓는 열성적인 소제부를 보기는 했지만 이런 처참한 광적인 청소부의 표정은 처음 보았다. 나는 먼지를 받으면서도 한참동안 먼발치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자기 일의 열성의 도를 넘어서, 행인들에 대한 평소의 원한과 고질화된 시기심까지가 한데 섞여서 폭발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일종의 복수행위인가. 복수행위라면 소주에 유독소를 넣어서 파는 것도 복수행위이고, 백화점 점원들이 정가의 두 배를 얹어서 돈 있는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도 합법적인 복수행위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어느틈에 시대에 뒤떨어져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복수행위를 예사로 생각하고 있는 듯한 행인들의 얼굴. 이들은 입에 손을 대고 지나가기는 하지만 별로 불쾌한 얼굴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입에 손을 대고 지나가기는 하지만 별로 불쾌한 얼굴도 하지 않는다. 불쾌한 얼굴을 지을만한 여유가 없느지도 모른다.

이들에게는 청소부에 못지않은 바쁜 직장의 아침 일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좌우간 나는 청소부의 폭동보다도 행인들의 무료한 얼굴에 한층 더 가슴이 섬찍해졌다. 그리고 <거지가 돼야 한다. 거지가 안되고는 청소부의 심정도 행인들의 표정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하면서 재빨리 구세주같이 다가온 버스에 올라탔다.

지일의 또 하나의 탈출구는 노모를 모시고 돼지를 기르고 있는 동생들이 있는 농장에 나가보는 일이다.

흙은 모든 나의 마음의 때를 씻겨준다. 흙에 비하면 나의 문학까지도 범죄에 속한다. 붓을 드는 손보다도 삽을 드는 손이 한결 다정하다. 낚시질도 등산도 하지 않는 나에게는 이 아우의 농장이 자연으로의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성당이다. 여기의 자연은 바라보는 자연이 아니라 싸우는 자연이 돼서 더 건실하고 성스럽다. 아니 진실하니, 성스러우니 하고 말할 여유조차도 없다. 노상 바쁘고, 노상 소란하고, 노상 실패의 계속이고, 한시도 마음을 놓은 틈이 없다.

그들의 농장의 얼굴은 늙은 어머니의 시꺼멓게 갈라진 손이다. 이 손을 지금 40이 넘은 아우가 닮아가고 있다. 그전에 비하면, 이렇게 내 개인의 집안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쓸 만큼 된 것도 여유가 생겼다면 여유가 생긴 것이고 불순해졌다면 그만큼 불순해진 것이다. 소설을 쓸 수 있을만큼 불순해진 것이다. 그래도 여직껏 詩를 긁적거리게 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가 농사를 짓는 이외에 불교를 믿고 있다는 것이 또한 무언중에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곤란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온 제사. 그리고 제대로 담근 식혜와 제대로 만든 전여. 절에 갖다줄 돈이 있으면 반찬이나 해잡수시라고 노상 타박을 하다가도 文仁葬의 식장 같은 데서 향불을 입으로 끄는 무식한 선배들을 보면 노모의 노후의 그나마의 마지막 사치를 그다지 탓하고 싶은 마음도 안난다. 결국 내 자신의 되지 않은 문학행위도 따지고보면 노모가 절에 다니는 거나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어머니는 절에도 다니지만 아직도 땀을 흘리고 일을 하는데 나는 땀도 안 흘리고 오히려 불공 돈의 몇갑절의 술값만 낭비하고 있다. 언제 어머니의 손만한 문학을 하고 있을는지 아득하다.


이제는 애를 써서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책이 선두가 아니다. 작품이 선두다. 詩라는 선취자가 없으면 그 뒤의 사색의 행렬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고생을 하든지간에 시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책이 그 뒤의 정리를 하고 나의 詩의 위치를 선사해준다. 정신에 여유가 생기면, 정신이 살이 찌면 목의 심줄에 경화증이 생긴다.

이런 때는 고생이란 고생을 다 써먹을 때다―말하자면 수단으로서의 고생을 더 써먹었을 때다. 하는 수 없이 경화증에 걸린 채로 詩를 썼다. 배부른 詩다. 이것이 「라디오界」라는 작품이었다. 그후 「먼지」「性」「美人」 등의 3편을 썼는데 아직도 경화증은 풀리지 않고 있다. 만성 경화증인 모양이다. 이대로 나가면 부르좌의 손색없는 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전에는 무엇을 쓸 때 옆에서 식구들이 누구든지 부스럭거리기만 해도 신경질을 부렸는데 요즘은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도 않고, 오히려 훼방을 좀 놀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것이 약이 되고 작품에 뜻하지 않은 구명대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잡음은 인간적이다. 그것은 너그러운 폭을 준다. 잘못하면 몰살을 당할 우려가 있지만, 잡음에 몰살을 당할 만한 연약한 詩는 낳지 않아도 후회가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서재가 없다. 일부러 서재로 쓰던 방을 내놓고 안방에 와서 일을 한다. 그저에는 잡음 중에도 옆에서 밥을 먹거나 무엇을 씹는 소리가 가장 싫었는데, 요즘에는 그것에도 면역이 된 셈이다. 정 방해가 될 때면 일손을 멈추고 잡담을 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詩는 地理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몹시 신봉하던 때가 있었는데 근자에는 그 신조를 무시하고 쓴 詩가 여러편 있다. 요즘의 강적은 하이데거의 「릴케論」이다. 이 논문의 일역판을 거의 안보고 외울만큼 샅샅이 진단해보았다. 여기서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을 텐데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뚫고 나가고 난 뒤보다는 뚫고 나가기 전이 더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다.

아무리 해도, 자기의 몸을 자기가 못 보듯이, 자기의 詩는 자긱 모른다. 다만 초연할 수는 있다. 너그럽게 보는 것은 과신과도 다르고 자학과도 다르다. 그렇게 너그럽게 자기의 詩를 보고 세상을 보는 것도 좋다. 이런 너그러움은 詩를 못 쓰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바로 새로운 詩를 개척해나가는 무한한 寶庫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性」이라는 작품은 아내와 그 일을 하고난 이튿날 그것에 대해서 쓴 것인데 성묘사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는 처음이다. 이 작품을 쓰고 나서 도봉산 밑의 농장에 가서 부삽을 쥐어보았다. 먼첨에는 부삽을 쥔 손이 약간 섬찍했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부끄럽지는 않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나는 더욱 더 날쌔게 부삽질을 할 수 있었다. 장미나무 옆의 철망 앞으로 크고작은 農具들이 보랏빛 산너머로 지는 겨울의 석양빛을 받고 정답게 빛나고 있다. 기름을 칠한 듯이 길이 들은 연장들은 마냥 다정하면서도 마냥 어렵게 보인다.

그것은 프로스트의 詩에 나오는 외경에 찬 세계다. 그러나 나는 쁘띠 부르的인 <性>을 생각하면서 부삽의 세계에 그다지 압도당하지 않을 만한 자신을 갖는다. 그리고 여전히 부삽질을 하면서 이것이 농부의 흉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죽고 나서 저승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되면 내 아우보다 꾸지람을 더 많이 들을 것은 물론 뻔하다. 그것은 각오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섣불리 농부의 흉내를 내고 죄의 감형을 기대하는 것 같은 태도는 더욱 불순하다. 나는 농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삽질을 한다. 진짜 농부는 부삽질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의 노동을 모르고 있다. 내가 나의 시를 모르듯이 그는 그의 노동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美人」은 가장 최근에 슨 작품인데 이것은 전부 7행밖에 안되는 短詩다. 낭독회의 청탁으로, 되도록 짧은 작품을 달라는 요청에 따라서 쓴 것이다. 詩는 청탁을 받고 스지 않기로 엄하게 규칙을 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규칙을 깨뜨린 것이다. 터치도 매우 가볍다. 여편네의 친구되는 미모의 레이디하고 같이 成吉思汗式이라나 하는 철판에 구워 먹는 불고기를 먹고 와서 쓴 것이다.

여편네의 친구들 중에는 상류사회의 레이디나 매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졸작 「美人」의 주인공은 그중 세련된 교양 있는 미인이라고 해서 같이 회식을 하러 갔다. 과연 미인이다. 나는 미인을 경멸하는 좋지 못한 습성이 뿌리깊이 박혀 있는데, 이 Y여사는 여간 인상이 좋지 않다. 여유 위에 여유를 넓히려고 활짝 열어놓은 마음의 창문이 때아닌 훈기가 불어들어온 셈이다. 우리들은 화식집 2층의 아늑한 방에 앉아 조용히 세상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Y여사는 내가 피운 담배연기가 자욱해지자 살며시 북창문을 열어준다. 그것을 보고 내가 일어나서 창문을 조금 더 열어놓았다. 그때에는 물론 담배연기가 미안해서 더 열어놓았다. 집에 와서 그날밤에 나는 그들창문을 열던 생각이 문득 나고 그것이 실마리가 돼서 7행의 短詩를 단숨에 썼다.

이 작품을 쓰고 나서, 나는 노상 그러하듯이 運算을 해본다. 그리고 내가 창을 연 것은 담배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천사같은 훈기를 내보내려고 연 것이라는 걸 알았다. 됐다! 이 작품은 합격이다. 창문―담배․연기―바람 그렇다, 바람. 내 머리에는 릴케의 유명한 「올페우스에 바치는 頌歌」의 제 3장이 떠오른다.


참다운 노래가 나오는 것은 다른 입김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입김. 神의 안을 불고 가는 입김.

바람.


또한 하이데거의 「릴케론」 속에 인용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독일의 사상가이며 문학자. 1744~1803)의 「인류의 역사철학적 고찰」에서 따온 다음의 문고가 密語처럼 울린다.


우리들의 입의 입김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세계가 繪畫가 되고, 우리들의 사상과 감정의 기본형이 된다. 인간이 일찍이 지상에서 생각하고, 바라고, 행한 인간적인 일, 또한 앞으로 행하게 될 인간적인 일, 이러한 모든 일은 한 줄기의 나풀거리는 산들바람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神的인 입김이 우리들의 신변에서 일지 않고 마법의 음색처럼 우리들의 입술 위에 감돌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필경 모두가 아직도 숲속을 뛰어다니는 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름다운 Y여사와의 화식이 천한 것이 되지 않고, 나의 평소의 율법을 깨뜨린 것이 되지도 않고, 그녀에게 조그마한―아니 티끌만치도―결례도 되지 않았다는 또하나의 확실한 증거로서, 역시 「올페우스에 바치는 頌歌」의 제 3장의, 방금 인용한 것의 바로 앞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詩句의 복습은 한없이 즐거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노래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급기야는 손에 넣을 수 있는 事物에 대한 哀乞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노래는 存在다. 神으로서는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언제 存在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들은 언제

神의 명령으로 大地와 星座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겠는가?

젊은이들이여, 그것은 뜨거운 첫사랑을 하면서 그대의 다문 입에

정열적인 목소리가 복받쳐오를 때가 아니다. 배워라


그대의 격한 노래를 잊어버리는 법을. 그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다.



내가 읊은 「美人」이 릴케의 「天使」만큼은 되지 못했을망정 , 그다지 천한 미인은 아니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과신일까. 좌우간 나는 미인의 훈기를 내보내려고 창문을 연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내보낸 것은 담배연기뿐이 아니라 약간의 바람도 섞여있었을 것이다. 바람이 없이는 어떻게 연기인들 나가겠는가.

그전에는 산문 중의 인용문도 너무 파퓰러한 것은 피했다. 여기에 인용한 릴케의 詩句 같은 것도 옛날 같으면 막무가내로 인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가 파퓰러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간에 남의 글을 인용하기가 싫었다. 그것이 요즘에 와서는 파퓰러하고 안하고간에 필요에 따라서는 마구 인용을 한다. 그리고 그전에 비해서 요즘의 나는 훨씬 덜 소피스트케이티디해졌다고 생각한다. 「먼지」 같은 작품은 내 자신도 상당히 난해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난해와 소피스트케이션의 구별을 분명히 가릴 수 있게 되었다. 필요에 따라서 소피스트케이션의 욕을 먹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쓸 작정이다.


파퓰러하다면, 原罪說처럼 정통적이고 파퓰러한 典據趣味가 없는데, 이런 데까지 서슴지 않고 소급해 올라갈 만한 용기가 생겼다. 나의 릴케는 내려오면서 만난 릴케가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부근을 향해 더듬어 올라가는 릴케다. 그러니까 상당히 반어적인 릴케가 된 셈이다. 그 증거로 나의 「美人」의, 검정 미니스커트에 까만 망사 나이롱양말을 신은 스타일이 얼마나 반어적인 것인지 살펴보기 위해서, 부끄럽지만 졸시 「美人」의 전문을 인용해보자.


美人을 보고 좋다고들 하지만

美人은 자기 얼굴이 싫을 거야

그렇지 않고야 미인일까


美人이면 미인일수록 그럴 것이니

미인과 앉은 방에선

무심코

따놓은 방문이나 창문이

담배연기만 내보내려는 것은

아니렷다


이 詩의 맨 끝의 <―아니렷다>가 反語이고, 동시에 이 시 전체가 반어가 돼야 한다. Y여사가 미인이 아니라는 의미의 반어가 아니라, 천사같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이고, 담배연기가 <神的>인 <薇風>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반어다. 그리고 나의 이런 일련의 배부른 詩는 도봉산 밑의 豚舍 옆의 날카롭게 닳은 부삽날의 반어가 돼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詩에서는 남과 북이 서로 통일된다.

우리 시단의 참여시의 후진성은, 이미 가슴 속에서 통일된 남북의 통일선언을 소리높이 외치지 못하고 있는 데에 있다. 이것은 우리의 참여시의 종점이 아니라 시발점이다. 나는 천 년 후의 우주탐험을 그린 미래의 과학소설의 서평같은 것을 외국잡지에서 읽을 때처럼 불안할 때가 없다. 이런 때처럼 우리들의 문화적 쇄국주의가 저주스러울 때가 없다. 이런 미래의 꿈을 그린 산문이 시를 폐멸시키고 말 시대가 불원간 올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주비행을 소재로 한, 우리들은 감히 상상조차 못할 만한 거대한 스케일의 과학시가 벌써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지구를 고발하는 우주인의 詩. 우주인의 손에는 지구에서 갖고 온 찝찝한 빵이 한 조각 들려있다. 이 찝찝한 빵에서 그는 지구인들의 눈물을 느낀다. 이 눈물은 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최초의 눈물과도 통한다. 우리의 詩의 과거는 성서와 불경과 그 이전에까지도 곧잘 소급되지만, 미래는 기껏 남북통일에서 그치고 있다. 그 후에 무엇이 올 것이냐를 모른다. 그러니까 편협한 민족주의의 둘레바퀴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우리의 미래에도 과학을 놓아야 한다.

그리고 미래의 과학시대의 율리시즈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아까 <이제는 애를 써서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말을 했지만,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반어가 되고 말았다. 때로는 책도 선두에 세우고 가야 한다. 아직 늙기는 빠르다. 종로의 새벽거리의 청소부의 狂態와 그 옆을 태연하게 지나가는 행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이제는 꿰뚫려 보인다. 간신히 바늘구멍은 터진 셈이다. 또 한 번 Y부인을 만나서 점심을 같이 하게 되면, 그리고 그녀가 나의 담배연기를 내보내려고 북창문을 열게 되면, 이번에도 나는 신사처럼 마주 그 문을 열면서 제 2의 「美人」을 쓸 구상이나 할 것인가. 아니다, 그때는 좀 달라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적어도 때늦은 릴케式의 운산만이라도 홀가분하게 졸업해야 할 것이다.


歸納과 演繹, 內包와 外延, 庇護와 무비호, 유심론과 유물론, 과거와 미래, 남과 북, 시와 반시의 대극의 긴장, 무한한 순환, 圓周의 확대, 곡예와 곡예의 혈투, 뮤리엘 스파크와 스프트니크의 싸움, 릴케와 브레흐트의 싸움, 앨비와 보즈네센스키의 싸움,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반시론의 반어.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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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철학자 간의 인과관계가 있는 순간을 하나의 꽁트를 통해 잡고 싶은 것뿐이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들의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위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은 스피노자이다. 쾌락을 위해 우리는 애를 쓰지만, 쾌락을 얻고 나면 '왜 이리 심심해?' 하고 푸념하기 쉽다. 그것은 이미 쾌락의 가치가 다 끝났기 때문일 것이다.

쇼펜아우어는 돈 많고 시간 많은 행운아로 여기저기서 자료를 모아다 진중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스피노자를 놓치지 않았을 리도 없지.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라고 정리하기에는 약간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가 염세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의 시대가 '모든 것이 끝난 시대'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시민 혁명을 일으킨 후에, 다시 왕관을 받음으로써 민주주의는 퇴보하였고 괴테는 '이 시대에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가 태어난 시대는 지식인들에게는 그토록 절망적인 지옥이었다.

아무튼 '염세주의자'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
쇼펜하우어는 위의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은 사유를 펼친다.

"우리들의 동화와 이야기가 주인공들의 행복으로 끝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행복의 페이지가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그들은 역시 평상시와 같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나날을 보낼 것이므로, 차라리 행복했던 순간들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맺는 것이 여러 모로 좋은 것이다. 그 다음 이야기를 하려고 들지 마라"

환상과 공포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자, 이 결론은 우리가 문헌에서 알아낸 이야기의 대단원이다. 의심할 바 없이 대단히 정당하고 행복한 결말이다. 아! 그렇긴 하지만, 수없이 많은 해피엔딩의 평범한 이야기들처럼 진실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행복한 결말이다. 내가 이러한 오류를 수정한 것은 전적으로 『텔미나우 이즈잇소오어낫』의 저자 덕택이다.
한 프랑스 격언이 강조하듯 "더 좋은 것은 좋은 것의 원수"라고 한다. 아까 세헤라자데는 이야기가 담긴 일곱 광주리를 상속했다고 한 언급은 이제 그 바구니 수가 일흔일곱 개로 늘어났다고 수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제 그 진실된 이야기를 덧붙여 보기로 하자.
(그 진실된 이야기는 '우울과 몽상'이라는 책에 담겨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책을 사서 보기 바란다)

※ 텔미나오 이즈잇소오어낫
'Tellmenow Isitsoornot'를 띄어쓰기하면 'Tell me now  Is it so or not'으로, '이제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내게 말해 달라'라는 뜻이 된다. 이는 작가 포가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생략함으로써 동양의 문헌 같은 느낌을 주도록 고안해낸 단어이다.

출처 : 에드거 앨런 포 '우울과 몽상', 중 '천일야화의 천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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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전략, 권모술수, 종횡가 등에 대해서 관심있게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 처세적인 것이 나와는 잘 맞지 않고,

무엇보다도 나는 진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철학과 과학 등 학문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 밖에 있을 때의 이야기고

이제는 처세와 모략을 좀 알아야겠다.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알아야겠다.

나는 좀 단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학문을 하는 데도 좀 도움이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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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삼국지로, 좀 지나서는 사기열전으로, 지금은 전국책으로 권모를 좀 익혔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요즘은 특히 내게도 '권모'가 좀 필요하다. 속지 않기 위해서는 '속이는 것에 대한 이론'을 알고 있어야 하니...


이참에 권모에 대한 책을 좀 소개할까 한다.


오리지날 북으로는..


위에 소개한 삼국지나 사기열전을 다 알 테고..

 

 

 

 

 

 

 

 

 

내가 읽은 가장 인상적인 삼국지는 40년도 더 된 '정음사 판본'이다. 큰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아들인 최영해씨가 만든 출판사가 '정음사'라는 곳인데,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해서 읽었다.

그 다음으로는 황석영의 삼국지가 '문학적'이고, 감동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삽화가..

이문열의 삼국지는 너무 말이 많았다. '논술'을 위해서는 좋을 것 같다. 하지만, '평역자' 주제에 원문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게 의분을 자아냈다. 차라리 장정일처럼 '새로운 삼국지'를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장정일은 '새로운 삼국지'를 쓰기 전에 삼국지에 대한 방법론을 먼저 썼다. 나는 삼국지 대신 방법론을 읽어보았다. 가장 첫 번째 권의 제목이 '홍건기의'라는 것은 몹시 상징적이다. 유비, 관우, 장비가 홍건적을 몰살하는 장면은 지금 보아도 몹시 좋지 못하다. 민중의 힘은 오늘날의 '여론'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읽어보지 못한 장정일의 '삼국지'를 권한다.

 

 

 

 

 

 

삼국지 이야기는 이쯤해서 정리하고..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그 다음으로 추천한다. 이것은 '권모' 중에서도 '중급'에 해당하니, 잘만 본다면 세상 속고 사는 일이 드물 것이다. 이것도 두 가지 판본을 추천할 만하다. 하나는 김원중 교수의 '을유문화사' 판이고, 하나는 '까지' 판이다. 참고로 김원중 교수는 두 판본 모두에 관여했다.

 

 

 

 

사기열전 원문을 3년간 읽었던 경험으로 이야기하자면, 을유문화사판을 추천한다. 을유판은 현대어로 번역이 깔끔하게 잘 돼 있다. 하지만 원문을 대조하면서 읽는 분에게는 '까치' 판본을 함께 권한다. 까치판은 '주석'이 몹시 상세하다. 옛 제도와 격식 등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해설서다.

 

 

 

 

허나 중요한 것은 '열전'은 '사기'의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본기와 세가를 빼놓을 수 없다. 본기와 세가를 빼놓고 사기를 읽는다면 3~40%밖에 얻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사기의 본기도 김원중 교수가 수고해준 끝에 을유판본이 나온 것으로 안다. 까치 판본은 기획할 때부터 나왔었다.

 

 

 

 

 그리고 '사기열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고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을 강추한다.  십팔사략은 아주 먼 옛날부터 있었던 역사서를 열 여덟개의 장으로 짬뽕시킨 역사책이다. 고우영 만화의 멋과 재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두말이면 잔소리겠다. 그냥 보라, 재미있고 유익하다. 만화 학습서의 개념을 발전시킨 위대한 만화가이다. 옌벤 출신의 작가..

 

 

 

 

다음에는 육도삼략과 전국책, 국어가 있다.

육도삼략은 '강태공'으로 유명한 '태공망'이 주나라 건국의 제왕인 '무왕'에게 '은나라 정벌 공략법'을 코치해준 내용을 담은 책이다.

 

 

 

 

내가 읽은 것은 범우사판인데.. 홍익출판사의 판본은 원문이 병기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는 사람은 '손자병법'보다 좀 더 기풍 있는 병법서로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다음은 전국책과 국어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이 책이 번역되지 못해서.. 원문만 복사해놓고.. 간간히 읽다 말았다. 하지만, 신동준이라는 분이 열심히 번역을 해준 덕에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한길 '대단한 책'에서는 다른 분이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출판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검색하면 나오겠지 모..

 

 

 

 

전국책은 '유향'이라는 사람이 쓴 책으로 주로 '전국시대'의 종횡가를 다뤘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외교관이라고 할 수 있고, 유세가라고도 부른다. '국어'는 그보다 앞선 '춘추시대'에 활약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들은 '사기열전'의 원류가 되므로, '고급'에 해당한다. 특히 역자는 '춘추전국시대'라는 시대구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단순히 역사가들의 편의를 위해 나눠놓은 것은 학문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서문을 읽어보기 바람. 서문이 너무 좋아서 워드로 다 옮겨 놓았다. 읽기가 버겁다면, 서점에서 살짝 '원문'만이라도 읽기를 권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외교의 시대에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인 것 같다. 긴박감 넘치기로는 '전국책'이 더할 것이다.

한비자의 '한비자'도 우리 '권모가'에서는 필독서로 통한다. 마끼아벨리도 유명하다지만, 제대로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다.

 

 

 

 

한비자는 중국의 천하통일에 1등 공신이지만, 친구인 '이사'의 모함에 걸려 요절한 불행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말더듬이었지만, '글'에는 대가였다고 한다. 그가 '법가'의 체계를 확립해 놓았다. 그로부터 중국의 '중앙통치'의 '치'는 시작한다.

그의 글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내 회사의 한 친구의 이야기와도 상통하는데, 혈연을 통해 갓 업무를 파악하는 '원장'과 일 년 가까이 회사에서 구른 친구의 이야기이다. 원장은 원장이므로, 지시를 하기는 하는데, 잘 알지 못해 그 친구는 답답해하고.. 앉혀서 1~2시간 동안 설명을 해 보았지만.. 깜깜.. 요즘은 서먹하다고 한다. 한비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여덟 명의 현자가 있어, 옳은 여덟 가지 제안을 하지만, 왕에 의해서 모두 처형되었다. 여덟 명의 '간신'이 있어서 달콤쌉싸름한 제안을 하지만, 여덟 간신 모두 처형되었다. 그들이 하는 열 여섯 가지의 말은 그 자체로는 모두 쓰레기이다. 이에 대한 해법은 몹시 인간적이다. 먼저 왕과의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맨 처음에는 말을 아끼면서 왕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느 정도 그 노력이 반영된다면 점점 말을 할 기회도 늘어나고, 완전히 '왕의 남자'가 되었을 때는 무슨 말을 하든, 기둥에 칼을 던지든 뭐라 안 한다. 이 때는 열 여섯 가지 말이 모두 '옳은 말'이 된다.

내 친구는 '새내기 원장'의 말을 잘 따르는 척했어야 했으며, '감동받는 척, 존경하는 척' 했어야 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감정'이 개입되면 옳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감정의 힘이고, 인간의 관계이다. 이 이야기는 한비자의 내용을 약간 각색하였다.

그리고 '플루타르크 영웅전'(범우사, 7권인가 8권임)은 반드시 숙독하기를 바란다. 실은 나도 2권까지밖에 안 읽었지만, 그리스와 로마를 통틀어 '축복받은 천재'는 '플라톤'과 '플루타르크스'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돈 대주지, 공부 시켜주지, 머리 좋지, 자료 많지, 정치 안정적이지(플루타르코스는 모르겠다) 글을 쓰기 위한 최적의 시기를 누렸다. 솔직히 '플루타르크'가 '사기열전'을 능가한다고 생각하며, 전국책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 다음에는 독서량이 부실해서 잘 모르겠다. '맹자'도 고급 화술과 세계관 형성에 큰 도움이 된다. 학자들은 그에게 '시대의 이빨'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부분이긴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도 권모를 위해서 좋은 '소설'이 될 것 같다. 책소개는 여기까지..

 

 

 

 

맹자의 판본을 추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논어에 비해서, 번역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김종무 씨의 민음사 본은 절판된 상태다. 다행히 학고재에서 '사서집주언해'를 출간했다. 논어, 대학, 중용, 맹자에 대한 상세한 해설과 특히 '언해본'을 풀이해 놓은 것이 주요하다. 책값은 좀 비싸지만, 당신이 맹자를 공부한다면, 전통문화연구회 같은 기계식 번역보다는 풍부한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나도 돈만 좀 모이면 전체를 구입할 생각이다.

처음으로 '블록버스터' 페이퍼를 작성했다. 아무튼 권모술수 입문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

이 글에 붙여 나의 '믿음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세상에는 두 가지 믿음이 있는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믿음을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게 하는 것'이다.

'믿게 하는 자'에게 '믿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큰 상처를 받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회사 동료가 요즘 들어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고 호소하는 것은,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믿음'을 주는 사람인지 '믿게 하는' 사람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마음으로 통하거나, 자신을 진심으로 할애하는 사람, 치부를 드러내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믿음을 주는' 사람에 가깝다. 하지만 섣불리 믿지는 마라.

믿음을 주는 사람과 믿게 하는 사람을 파악했으면, 그 대처 방법은 수월하다.

믿게 만든 사람에게는 믿음을 주는 대신 역시 '믿게' 만들면 된다.

이 때 권모가 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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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2-09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절이 된 책들이 있군요.악령은 아예 절판이라니...다시 나오려나? 암튼 가져가서 참고하겠슴다.^^

2006-02-09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마 안되는 내 독서의 역사를 말하자면,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원수 선생의 세계소년소녀동화집과 헤어지고나서
대학 2학년 때 헤르만 헤세와 재회하기까지 꼭 십일년 동안 공백을 가졌다. 그때부터는 관심을 갖고 책을 읽었는데, 나를 키워 온 책은 많았지만, 돌풍처럼 내 생활과 세계관을 발칵 뒤집은 책은 단 세권이다.

한번은 99년인가 내 친구가 공군 입대해서 일병휴가인가 하는 것을 올 때다. 그 녀석에게 내가 갖는 열등의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독서의 속도이다. 만화책을 보면 그녀석 두 권 읽을 때 나는 한권도 다 못 읽는다. 그래서 그 녀석은 두 권 읽고 나서 세권은 읽지 않고 담배를 한 대 천천히 피면, 그때야 끄적끄적 나는 한 권 다 읽으려구한다. 그림이 안 들어간 책은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문열의 삼국지 단행본을 하루 종일 읽으면 두 권을 읽을 수 있는데, 그녀석은 하루에 열 권을 다 읽을 수 있다. 그녀석과 대화를 해보면 과연 책을 많이 읽었는가 의심이 가지만 어쨌든 속도의 달인이다. 그녀석이 공군에서 책을 읽다가 발견한 책을 한 권 소개시켜줬는데, 그 책은 자신도 도저히 빨리 읽을 수 없고, 한 구절 읽을 때마다 가슴이 턱턱 막히고 책장 넘기기가 두려울 정도라고 한다. 그 책 이름은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다. 나는 괜히 헛된 열정을 발휘해서 그 책을 대번에 읽어갔지만, 나도 역시 다 읽지 못했다. 특히 반말체가 아니라 존댓말체로 찬찬히 전개하는 그의 생각은 나를 완전 발가벗겨 놓는 것 같았다. 지금은 그 내용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만, 어쨌든 한동안 나는 그 책에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그리고 유익하다는 말도 빼 놓을 수 없다.

 

 

 


두번째도 역시 99년 여름의 일인 것 같다. 그 당시는 처음으로 철학 관련 책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연히 '스피노자'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그 때는 무척이나 더웠고, 아스팔트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던 때라 내게 '가난'이라는 의미를 절실히 가르쳐준 시절이었다. 그때 읽던 책이 '에티카'라는 책이었는데, '-기하학적 질서에 의한 윤리학'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책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말 읽어내려가기 피곤했다. 아마 한달 내내 그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아침에 일어나면 '노가다'라는 걸 하러가서 해가 떨어지려고 하면 돌아와서는 샤워하고 바로 도서관으로 갔다. 그러면 한 일곱시 반 정도 되는데, 그 때부터 막차 시간까지 '에티카'를 잡고 읽었다. 정말 괴로운 한낮이었고, 더욱 괴로운 저녁 시간이었지만, 왜그랬는지 마치 부적처럼 잡고 읽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을 읽게 되었을 즈음 내 몸이 거대한 파도에 실려 광대한 바다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스피노자는 내가 요즘 철학사나 여러 철학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한번씩은 꼭 찾아보는 철학자인데, 그 경건함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거의 모든 서양철학자들도 그의 사상은 모르겠지만, 그의 인생의 자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다. 아무튼 한 달 내내 힘든 막노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에티카 때문이었으며, 그 책 때문에 내가 한 번 업그레이드 되었고, 학문에 더욱 발을 붙이게 되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현재 불거지고 있는 세계 핵문제에 관한 아주 무서운 발언을 하고 있다. 그것은 감정에 관한 장에 나오는데, 사람의 마음 속에 어떤 행위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현된다. 그것을 제어하는 다른 감정이나 판단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지금 핵의 문제에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현재의 핵 보유국들은 핵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들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쓰게 될 것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세계는 정세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며 아주 극단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막아주는 최후의 보루는 '세계정신'이라고 생각한다.(헤겔도 이러한 용어를 썼다고 하는데, 그것과는 관계가 없고, 그의 용어도 잘 모른다)
가령 북한같은 나라가 처절한 생계의 위기에 몰리면 핵폭탄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위협을 할지 모른다. 그것이 잘못될 경우 그것을 쓸 것인가 쓰지 않을 것인가는 바로 북한 수뇌부의 손에 달려 있다. 나는 아무래도 북한이 NPT를 탈퇴한 것이 하나의 불길한 전주곡만 같아 보인다.
세계정신과 애국정신은 어느 나라나 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부딪친다면 애국정신을 버릴 나라는 얼마 되지 않는다. 특히 지금 미국이 아주 그러한데, 유교적 사고방식을 빌어서 말한다면, 미국은 춘추전국시대 패도와 권모를 써서 세계를 제패하다가 힘이 다하자 아무런 유익한 기억도 없이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 나라들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다. 인자(仁者)는 세계정신을 위해 애국정신을 거침없이 버릴 수 있으며, 지자(知者; 이 때의 지는 지혜를 말함)는 애국정신을 버리고 세계정신을 취하는 것이 다른 것보다 몇십배는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애국정신을 버린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이 두 가지 아무것에도 닿아 있지 못하다. 힘의 균형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옛날의 영광스런 제국들을 생각해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떤 것을 즐기면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기호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볼 때 현재 미국의 배타적 애국심은 세계 시민들의 인간성을 황폐화시킬 위험이 크다.
바로 이 세계정신이라는 의미는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라는 사상에서 빌려온 말이다. 즉, 인간의 세계는 신의 깊은 이치와 원리에 의해서 정성스럽게 마련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리 정당하지 못하더라도 그 내면에 감춰진 신의 보편적이고 공평한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동양의 유학과도 통하는 철학인데, 천명(天命)에 따르는 생활을 하여야 문제가 없고 그것이 바로 왕도(王道)이다. 그것은 스피노자에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아름다운 음악이 병든 사람에게는 오히려 괴로운 것이고,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듯이 이 세상에 나쁘고 좋다는 것들은 모두 인간적인 견해일 뿐이며 그 위의 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아무튼 스피노자의 몇몇 사상이 나의 근본을 형성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길게 써봤다.


 

그리고 최근에 또 한권의 책이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 책은 꼭 복병 같다. 나는 요즘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살펴보고 있으며, 동시에 '민족문화추진회' 시험 준비 때문에 논어를 보고 있다. 비중은 전자 7 후자 3 정도에 두고 있었는데, 이 책 때문에 한 닷새간 결과적으로 논어만 보게 되었다. 책이름은 '(하는데, 남회근이라는 분은 1918년 중국에서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유교 경전을 두루 통하였고 20세 이후로는 불교에 귀의하여 깊이 침잠했으며 티베트로도 가서 공부하다가 대륙이 공산화되는 광경을 생생히 목격했고, 여러 대학 교수로 있다가 지금은 홍콩에 거처하고 있다고 한다.
내 인생의 큰 틀을 맡아준 두 노인이 계신다. 한 분은 만 3년간 내게 유교의 경전을 가르쳐주시고 평생의 체험을 생생하게 전해주어 내가 한낱 서생 혹은 샌님으로 빠지지 않도록 해주신 은사님(근자엔 농담식으로 '훈장님'이라고 하던 분)이 있고, 두 번째로는 이 남회근이라는 분이다.
인생의 여러 체험을 위주로 논어의 깊은 뜻을 잘 설명하시고 있고, 중국 역사와 여러 사상과 관련하여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좀 자세히 얘기하고 싶은데, 서당에 가야겠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더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으련만...
이렇게 하니 꼭 책장사 같다.









*
논어 해설서는 내가 몇 권 가지고 있는데 논어를 볼 사람에게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간행된 류종목 교수의 <논어의 문법적 이해>라는 책은 제목과 같이 문법적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잘 짚어주면서 그에 대한 용례도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약간 기계적인 부분이 있어서 논어 본연의 맛에 흠이 될 수 도 있다. 명문당에서 간행된 김성원씨의 <논어신강의> 라는 책은 구절 풀이가 다른 책에 비해서 더욱 세심하다. 그리고 띄어 읽는 토시에도 신경을 써주고 있는데, 무조건 따르기는 힘들다.
현음사에서 간행된 김도련 선생의 <주주금석 논어>라는 책은 다산의 '논어고금주'를 소개하며 논어를 해석하고 있는데, 문맥에 염두하며 세련된 해석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민음사에서 간행된 김종무씨의 <논어신해>는 신선한 해석을 하고 있으나 그 논리가 받아들이기는 힘든 구석이 좀 있다.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논어(동양고전연구회)책도 볼만 하다. 표지에는 여덟명의 철학자가 10년에 걸쳐 이뤄낸 과업이라고 나왔는데, 아마 각각 다른 일을 하다가 틈틈히 만나서 작업을 한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즉, 표현처럼 혼신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지만 성실하게 정리해낸 성과가 돋보인다. 논어와 이전의 권위있는 주석들을 세심하게 선별하여 수록해놓았고, 서로의 토론을 통한 짤막한 해설이 가끔 시원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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