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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라서,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기쁘고, 다행입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독자라서,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쁘고, 다행이라니
기쁘고 다행입니다.
‘번역, 그것은 그녀가 세상을 불신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배운 옹알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잿빛 도시의 풍경에 낯빛도 변해가는 세상을 그려내는 것은 쉽고도 어렵다. 선과 면, 형과 색이 불분명한 것들을 뚫어지게 봐야만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기억 깊숙한 곳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불쾌함을 건져내는 작업이기도 하니까.
기억의 그늘 속에 자리잡은 아슬아슬한 쓰라림과 웃을 수 밖에 없는 웃지 못할 상황들. 아비의 초상, 개인의 고독한 자아 찾기는 단편 곳곳에서 비춰진다. 군중, 다세대 주택, 북적거리는 지하철, 편의점 등에서 일상은 필연처럼 찾아오는 늘 그것들이지만, 우연처럼 부대끼는 사소함에 현대인은 늘 소심한 움츠림으로 바짝 긴장한다.
‘노크하지 않는 집’에서 보여지는 은밀한 공포감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삶을 직면했을 때 '누구세요?'라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익명성에 있다. 묻혀버린 삶, 자와 타의 흐릿한 경계를 두고 너무나 닮아져 버린 삶에 대한 불신, A를 A라 말하지 못하는 나에게 뻗어져 나온 뿌리인 셈이다.
유난히 ‘나는’을 말하는 이야기들은 ‘나는’을 밝히지 않는다. ‘우리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듯이 스쳐가는 시베리아의 찬 공기처럼 감각적인 잔상만을 남길 뿐이다. 편의점의 푸른 조끼를 입은 청년이 ‘손님, 죄송하지만, 삼다수나 디스는 어느 분이나 사가시는데요’라는 답변처럼 질문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간만에 만난 동창생의 뒷모습에서 낯선 이별을 경험하듯, 수족관의 물고기가 인간을 바라보듯 하지만, 수 많은 인연과 번민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 일까…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타인에게 요약되는 방식이 싫다.’
차라리 요약되지 않는 것이 나을런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붙잡고 터럭 같은 모든 것들을 주절거리고, 털어내고, 살을 부비고 싶은 이야기들...
한 개인의 깊은 호흡 같은 일기를 들쳐본 느낌,
야광 반바지를 입고 세계를 뛰어 다니는 시시하고 초라한 아비에게 썬글라스 씌워줄 수 있는 김애란식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편안함과 상큼함을 한 입 베어 물게 한다.
‘안녕 하고 물으면,
안녕 하고 대답하는 인사 뒤의 소소한 걱정들과 다시 안녕 하고
돌아선 뒤 묻지 못하는 안부 너머에 있는 안부들까지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안녕하시고,
이 책은 제가 당신에게 매우 딱딱한 얼굴로 보내는 첫 미소입니다.
언제고, 곧 다시 봅시다. (작가의 말 중에서)
언제고, 다시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