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우유와 소보로빵 마음이 자라는 나무 8
카롤린 필립스 지음, 전은경 옮김, 허구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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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에서 독일로 이주해 온 외국인 노동자가 독일에서 낳은 아이이다. 그래서, 샘의 겉모습은 에리트레아인이지만, 샘의 정체성은 에리트레아인이 아니라 독일인이다. 그는 에리트레아에 대해서 부모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저 낯선 이국땅처럼 느껴질 뿐이다. 게다가, 그곳은 부모님의 고향일 뿐 샘에게는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곳이다.

 

에리트레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샘의 부모님은 난민수용소에 있다가 만나게 되었고, 결국은 고향을 등진채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파괴된 그곳은 고향의 어떤 이미지도 불러올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어버렸다- 독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마침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기여서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였고 그것은 샘의 부모에게도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샘의 아빠 친구 중에는 꽤 성공하여 고향인 에리트레아에 돌아가 재건사업에 힘을 보태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샘의 부모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고향에 돌아가본들 남아 있는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샘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환경과, 교육의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정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바로 이 책의 사건-학교에서 놀림을 당하거나 사회적인 위협을 받는-들은 그들 부모의 결정에 확신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샘의 반 친구 중에서도 폴란드나 포르쿠갈에서 온 학생들도 같은 외국인 노동자의 아들들이지만, 샘은 그의 외모때문에 더 눈에 띄게 되고 그로 인해 더많은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30년전 독일의 노동력 시장에는, 우리나라의 노동자들도 많이 유입된 걸로 기억한다. 그들이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와 새 삶의 터전을 가꾸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현지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다. 따라서 샘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렇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설 수도 있다. 우리 기업에도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고, 또 농촌에도 많은 외국여성들이 결혼을 하여 정착했다. 독일의 어떤 교실에는 40% 이상이 외국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학교에도 이제 곧 외국인 자녀, 혹은 한쪽이 외국인인 부모의 자녀들이 입학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책 속의 외국인들에 대한 반감은, 노동력이 넘쳐 나고 자국민들의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와 집을 차지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우리나라도 곧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내가, 외국인 노동자들의 한국어 교육을 위해 현장에 나갔을 때 그들-대부분이 동남아시아의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현장에서 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사실,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도 임금이 지나치게 싸게 책정되어 있고, 그렇기때문에 한국인들이 그런 일을 기피하는 것이지만, 그들을 대체할 인력들은 어떻게든 공급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기업이 임금을 현실화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한국의 노동자들이 눈을 낮추는 수밖에 없지만, 둘다 힘든 일이다. 그러니, 곧, 조만간,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한국인 노동자들의 실업은 점점더 늘어날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닌가.

 

어쨌거나,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어른들의 이기적인 반발심은 아이들에게까지 아무런 여과장치없이 그대로 전달되어 차별과 따돌림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샘은, 독일에서 태어났고 에리트레아보다는 독일이 더 익숙한 소년이다. 그래서 샘은 왜 자기가 그렇게 사회의 위협을 받아야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친구들의 놀림도 자신의 피부색이 다르기때문일거라는 생각 외에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어른들의 이기적인 발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인노동자, 특히 그들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지어내는 이야기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조차 그런 허위정보를 믿게 만든다.

 

보리스가 샘의 집에 가서, 그의 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샘의 집을 보고 부모님들이, 어른들이 한 말이 틀렸음을 알게 되는 장면이 그런 사실을 잘 알게 해준다. 보리스는 자신이 그동안 했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고, 샘이 사고-습격-로 학교를 결석하면서 그동안 샘이 자신을 더 분발하게 하는 좋은 라이벌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게 된다. 바로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아무도 그들이 함께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지만 그들은 샘의 왼손과 보리스의 오른손으로 훌륭하게 피아노를 연주해낸다.

 

어른들의 이기심에 아이들의 동심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그들을 마치 먹여살리는 듯-사회보장제도의 이득을 보는 건 그들이라는 생각- 보이지만, 결국 우리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고 살아가야 할 아이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생각을 해보자.어른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결국은 모든 이들이 함께 살 수밖에 없는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이 책은 청소년이 읽어도 좋을 것 같고, 어른들도 함께 고민해야 할 주제가 담겨잇는듯하다.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제법 인기인듯하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외국인들의 생각을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도 제법 나온다. 우리는 이제 한국인은 단일민족이라거나, 타민족과 차별을 두거나 하는 옛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부터가 바로 세계화로 가는 올바른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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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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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영화를 본듯한 느낌이 든다. 아주 잘 짜여진 극본과 적절한 클라이막스, 끝까지 살아남는(여기서는 눈을 뜨고 있는) 주인공까지..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구성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잡은 그 순간부터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증은 자꾸 증폭되었고, 사람들의 행동의 변화와 더불어 생각이 변화해가는 모습을 놓치기가 아까웠던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는 언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아마도 이번에 읽은 건 두번째이지 싶다. 그런데, 그전에는 내가 이 책을 통해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었는지 다시 책을 잡고 읽으면서도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게다가 내 책장에 이 책이 없으니(아마도 그땐 빌려읽었던듯)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생각과, 나의 환경이 달라지면서 의미가 없던 책들도 의미를 가지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책이 그런 책 중의 하나였다.

 

어쨌거나, 이 책에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나오지 않는다. 작품 속 '작가'의 말처럼 '내 목소리가 나'인 것이지 이름은 '나'가 아니다. 눈먼자들에게는 이름보다는 '소리'가 그들을 대표한다. 누가 화자인지, 청자인지 구분하지 않은 데다가, 가끔은 시점이 바뀌기도 하는 이 책을 읽다보면, 내가 그들이 되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음을 느낀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우리]라는 단어는 책을 읽고 있는 [나]도 그 장소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처음 눈먼 남자는 자동차에 앉아서 신호등 색깔이 바뀌는 것을 기다리다가 눈이 멀었다. 그다음부터 줄줄이 연쇄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눈이 멀기 시작한다. 마치 무서운 전염병처럼. 보통 이 책 속의 사람들은 갑자기 눈이 멀거나, 눈이 멀까 두려워하다가 눈이 멀었다.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만이 끝까지 눈뜬자로 남아,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까지도 다 보게 된다. 의사의 아내는, 의사가 구급차에 실려가기 전에 뭔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준비를 한다. 이 [준비]는 집을 청소하고 정리하거나, 남편의 짐과 더불어 자신의 짐을 챙기거나하는 것과 더불어 마음의 준비, 그러니까 남편과 함께 갈 마음, 남편과 끝까지 함께 하려는 마음 -의지- 의 준비까지 아우른 것이다. 그런 준비를 한 아내의 눈은 다른 사람들이 다시 눈을 뜨는 그 순간까지도 멀지 않는다. 

 

처음 수용소에 격리된 사람들은, 적어도 희망이-눈을 뜰 수 있다는- 있었고, 또, 눈을 뜨고 있고 모든 상황을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여자, 의사의 아내가 있기 때문에 다른 병동이나 병실 사람들과는 달리 생활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눈을 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걸 발설하지 않으면서 따라준 일부 병실 사람들의 지지(?)가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세상 사람들이 눈이 멀지도 모를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이미 눈먼자들을 격리수용하면서부터 그들-수용소 밖의 사람들-의 이기심은 발동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눈먼자들을 격리 수용하고, 자신들마저 눈이 멀까 두려워하며 인간적인 도움의 손길을 거두어버리지 않았다면 상황은 어땠을까? 의사의 아내처럼 언젠가는 나도 눈이 멀겠지만, 먼저 눈먼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눈을 의미있게 사용했더라면 과연 그 도시 전체가 눈먼 사람들로 가득찼을까? 

 

인간의 이기심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혹은, 인간의 이기심이 세상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준 책이 아닐 수 없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보려하고, 자신과 관계 없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인간의 이기심때문에 언젠가는 이 세상도 눈-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든-먼자들로 가득찰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미 세상은 기아로 허덕이는 아이들이 있는 세계와 잉여농산물을 버리거나 비만으로 가득찬 세계로 나누어졌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을 일으키는 나라와 전쟁의 피해자가 되는 나라로 나누어져있다. 모두들,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당신에게도 바로!! 그 두려움이 곧 닥칠지 모른다.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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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적인 삶 - 제100회 페미나 문학상 수상작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 / 밝은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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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 폴 뒤부아, 이 사람은, 아니, 이 사람의 작품은, 나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타네씨~]에서 엄청난 실망감을 안겨줬다가, [이 책이 너와 나를]에서 열광하게 하더니, [프랑스적인 삶]에서는 인내심을 요구했다.
어쨌거나, 내 인내심은 그의 작품을 견뎌냈고, 그 결과는, 무난하다.


책의 초반부에서 지루함을 느끼면 책을 덮어버리는 내가 끝까지 읽었다는데에 일단 박수를 보내자.
그 지루함이, 소재나 주제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장폴뒤부아의 문체에서 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구성에서 오는 것인가..
아마도 이 책이 프랑스적이 아닌 한국적인 삶이었다면 그 몰입은 쉽게 이루어졌을 듯하다.
즉, 프랑스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잘 모르는 상태거나, 남녀관계(동거나 결혼)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 나와 같이 지루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참고 읽어보자. 까짓거 정 지루하면 대통령 한 두명쯤 건너뛰면 어떠랴...
폴 블릭의 인생에서 몇 년쯤 모른다고 대수냐 라고 과감하게 건너뛰어도 괜찮다. 읽다가 궁금하거든 그때 다시 앞을 보지 뭐.
폴 블릭이 일반적인 프랑스인이 아니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덧붙여진 프랑스인이다.
아주 질곡 많은 삶을 겪음으로써, 소설 속 사건을 이루는 조건 말이다.


뒤로 갈수록 그의 사람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한다. 아니, 남의 불행을 재미있다고 말하는 건 좀 어폐가 있나?
대학을 졸업한 폴 블릭이, 떠밀리다시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내 대신 전업주부가 되어 생활하다가, 취미로만 끝날 줄 알았던 사진작업으로 돈을 벌고, 아내가 배신하고, 아내가 죽고, 아이들이 성장하여 분가하고, 딸이 정신병을 앓게 되는 과정들이 이 책의 지루함을 날려버리고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 이전의 사건들에서는 프랑스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조금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면, 폴의 결혼 이후의 삶에서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냥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양념일 뿐이다. 


여기서 잠깐,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나는 이말에 반대한다. 일본의 문학이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가 있는 이유 중에 하나를 무국적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한국적인 것은, 다른 나라 사람이 한국에 왔을 때, 혹은 이국적인 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을지 모르지만, 그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지루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품은 세계가 공통점으로 관심을 가진 문제라야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 책이 초반부의 프랑스적인 색채의 영향에서 벗어날 즈음에야 나의 지루함이 날아가고 주인공의 삶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동거를 많이 하는 편이고 결혼은 많이들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거 상태에서 아이를 낳아도 사회보장혜택을 결혼한 것과 동등하게-혹은 비슷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절차를 밟은 후에는 그 책임이 막중하다고 한다. 그러니 결혼보다 동거를 택하는 사람이 더 많을듯하다. 물론 이 책 속 등장인물들처럼 배우자 외에 애인을 두고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말이다. 폴 블릭의 삶이 일대 전환을 맞는 것이 그의 결혼과, 안나의 출산과 맞물리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또, 아내가 일하고 남편이 전업주부로서 사는 모습도 소설 속에서는 특별한 거부감을 느낄 수 없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의 불행은 끝없이 생성되는 듯 보이지만,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주인공의 모습은 없다. 오히려 딸 마리와 함께 산 정상에 올라 새로운 꿈을 꾸고 희망을 안게 되는 모습이 건강해보이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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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낚는 자기연출법 - 만남의 순간 상대를 사로잡는 마법의 테크닉
요시무라 다카미 지음, 김현영 옮김 / 시아출판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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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을 낚는 자기연출법이라....낚는다는 표현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기연출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절실히 깨달았기에 한번 읽어보기로 했다.

 

일본인들이 쓴 책 중에는 이런 종류의 책이 다수 되는 듯하다. 굳이 일본인을 만날 때 다테마에(표면상의 원칙이나 방침)와 혼네(본심)를 구분하라는 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상대방에게 끌려가지 않고 나의 편으로 만드는 방법은 중요한 기술이다.

 

이 책에서는 지금까지의 인간관계는 현재의 나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즉, 유유상종, 초록은 동색이란 말이다. 하긴, 우리는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보다 그 사람 주변에 더 신경을 쓴다. 어떤 사람과 어울려 다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등등... 그러니까,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도 어떤 사람을 사귀느냐는 중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가식적인 생각과 행동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이 순수한 마음이 없으면 노력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마음의 기반 위에 이 책에서 말하는 실천요령을 접합해 보자. 그러면, 당신도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잇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책에서 가르쳐 주는 내용을 모두 적용시키려 하지 말라. 자기에게 필요한 엑기스만 차용하라.

 

우선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첫인상을 좋게 하는 커뮤니케이션기술에 동의한다. 꿈과 목표를 가진 사람, 유머, 성실함, 시선의 자연스러운 처리, 웃음, 칭찬, 그리고 목소리는 첫인상을 좌우하는 주요 포인트다. 이러한 것들은 연습이 필요하다. 평소에는 전혀 그러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니까..

 

자, 또 한가지, 모임에서 호감을 사는 요령 중에서 가장 공감하는 내용은 "여성끼리 똘똘 뭉쳐있지 말자"는 것이다. 여러 모임에 참여해봤지만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모임의 분위기를 망치는 주범이다.

 

그러나, 초면에 받은 느낌이 좋지 않다면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는 조언은 그리 탐탁치 않아 보인다. 물론 나 자신 역시 첫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은 끝까지 그런 경우가 많은 편이긴 하지만, 내가 그를 소극적으로 보아서 일부만 봤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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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삶
레아 징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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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47

에로스는 포로스(풍요)와 페니아(빈곤)의 아들이라서 다음의 상황에 처한다. 첫째로 그는 항상 가난하며, 사람들이 은밀히 상상하듯 결코 부드럽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보다는 거칠고 불결하며 맨발로 정처 없이 떠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본성에 따라 언제나 맨바닥에 눕고, 문밖에서, 거리에서, 하늘 아래 노천에서 잠을 자고,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아버지한테서는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쫓아다니는 성향을 물려받았으며, 아버지를 닮아서 남성적이고 영리하고 대담하다. ㄷ범한 사냥꾼이며, 영원히 술수를 부리고, 인식을 갈망하고, 교활하다. 일평생 철학자고 이대한 마법사고 독살자고 궤변가다. 그 본성에 따라서 영원히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 플라톤의 "향연"

 

에로스는 모차르트를 이야기하는데 딱 적당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만-혹은 영화 아마데우스의 이미지- 책을 읽은 지금, 에로스만큼 모차르트에게 적당한 단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콘스탄체는 그러한 에로스-모차르트-를 사랑한 여인이자 에로스-모차르트-가 사랑한 여인이다.

 

이 이야기는 코차르트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모차르트가 죽은 후 콘스탄체는 [소문]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 소문을 모두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p.10 지금 이 시간에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머지않아 자신을 향한 공격의 화살이 되어 날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p.26 눈 앞에 선해요. 소문들... 곪은 내장같은 소문들, 터져서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소문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고요.

 

p.28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사람들이 소문으로 우리 아버지는 쓰러뜨릴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절대로 아니에요. 이제 나를 내버려둬요. 나는 소문들과 함께 살 수 있어요. 거의 모든 것과 함께 살 수 있다고요.

 

모차르트의 음악은 몰라도 모차르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얼마 전에는 모차르트 탄생250주년이다 뭐다해서 시끄럽기도 했고, 또, 아이의 태교를 시작할 때 흔히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몇년 전 개봉했던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도 있다. 그런데, 그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사실, 나는 유명인의 가족들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중에게 인기있는 연예인의 온갖 사생활들을 다 이야깃거리로 삼아서는 그의 가족들의 대소사까지 전부 알려주는 연예뉴스의 가벼움에는 이미 질려버린 탓이다. 그런데, 나는 왜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에게 관심을 가지는가?

 

그것은, 콘스탄체에게 씌워진 악녀캐릭터 때문이다. 천재의 아내로 살아야했던 한 여인의 삶이 평탄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천재란 어떤 사람들인가? 나는 천재를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시대나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서는 그의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열정이 제대로 분출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모차르트만 해도 그렇다. 모차르트는 다른 일을 하는 순간에도 악상이 떠오르면 악보를 그려내야만 했던 사람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대상이 황제라해도 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벌어들이는 수입에 비해 지나친 낭비를 하면서도 그게 낭비인지도 모르고 살만큼 경제관념이 철저하지도 못했던 사람이다. 악보는 기가 차게 그려내면서도 그 손으로 제입에 들어가는 음식조차 제대로 못먹은 사람이다.

 

나라면 그런 남자와는 단 하루도 살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러나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고, 모차르트의 음악적 열정을 이해했고, 그랬기에 그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었다. 세간의 사람들을 그런 그녀를 모차르트를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려고 하는 악녀로만 보았다. 모차르트 생전에, 그녀가 한 일은 오로지 모차르트를 내조하는 일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그녀는 모차르트를 너무나 잘 이해했기 때문에, 그의 음악 작업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함께 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 역시 그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았다.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는 그러한 모차르트의 마음을 잘 대변해준다. 콘스탄체 없이는 모차르트도 없었을 것이다.

 

콘스탄체를 비난하는 많은 목소리들은 결국, 그들 역시 모차르트를 이용해 한몫 벌려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그녀를 비난하고, 그녀를 악녀로 만들어 그녀의 것을 뺏으려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콘스탄체가 스무번이 넘는 이사를 하고, 모차르트의 낭비를 참아내고,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면서도 모차르트를 몰아세우지 않고 그의 음악작업을 오히려 격려했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녀가 모차르트 사후에 모차르트의 이름으로 부를 창출한다하여도 그 누구도 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이름으로 벌어들인 수입이라는 것도 결국은 저작권이나 초상권 뭐 이런 등등의 권리이지 않은가?

 

대중 연예인들이 소문에 휘둘리다 사라져가는 모습 - 죽음을 택하거나 연예계에서 사라지거나 - 을 자주 본다. 이제는 그러한 것이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그러려니 하지만, 소문이 사람을 어떻게 피페하게 만드는지는 한번쯤 생각해보아야할 일이다. 지금은-사후에- 모차르트의 명망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모차르트가 그만큼의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콘스탄체의 덕분이 아니었을까? 모차르트가 죽을 때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할 정도로 궁핍했었기 때문에 그의 묘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지만, 그나마 콘스탄체가 그의 작품을 지켜냈기 때문에 현재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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