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도와줘.. - 왕따.학교폭력.아동성범죄로부터 사랑하는 우리 아이를 지키는 방법
이정환 외 지음 / 달과소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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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런 나의 자녀, 누가 지켜야 하나?

머리말 제목이다. 과연 누가 지켜야 하는걸까? 자기자신? 부모나 가족? 이웃? 학교? 이 리뷰를 읽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부터 먼저 물어보자. 나는, 이웃을 비롯한 사회 전체가 지켜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학교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이 책에서는 누가 지켜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가장 1차적으로 부모를 들고 있다.

청소년을 비롯한 아동범죄가 증가하는 이유를 저자는 세가지로 이야기한다. 핵가족화, 가정교육, 정신을 활용하는 놀이의 증가. 따라서 아동범죄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부모에게 있는데 아이는 90%이상 부모에게 의존하면서 자라기 때문이다(p.7)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의 특성상 부모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예전같으면, 부모의 책임이 아니라 엄마의 책임이라고까지 이야기했을 법한데(이 책 제목이 [엄마, 도와줘]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나마 부모라고 해서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요즘은, 부모의 손에 의해 길러지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봐주는 아이들도 많이 줄어든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의 역할만 강요당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머리말을 읽는 순간 들었다. 나는, 학교를 비롯한 사회가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내용 중, 제2장을 먼저 읽기로 했다. 제2장 중에서도 [학교는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지 자녀를 책임지는 곳이 아니다]라는 부분. 제목만으로도 학교에 뭔가를 기대한 나를 호되게 야단치는 기분이 든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학교에는 수백 수천 명의 아이들이 있고 선생님은 적어도 2,30명의 학생을 관리하고 지도해야 한다. 게다가 선생님은 근본적으로 학과목을 지도하는 것이 주된 임무이지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 주된 임무는 아니다. 물론 철없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서 있는 이상, 안전에도 당연히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능력과 시간에 한계가 있다.(p.85)

이 말은 한 아이의 부모로서 읽을 때 상당히 불쾌한 느낌마저 든다. 내가 알고 있는 학교는 교수학습이 이루어지는 장소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교육과 사회적응교육의 장으로서도 활용되는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서 근무하고 있는 선생님의 의무 역시 공부를 가르치는 업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 선생님이 투자하는 노력과 시간은, 학생들의 생활까지 돌봐줄 여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학교에서 처음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교육을 받아야 하는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기계로 내몰리는 것 아닌가? 자녀교육(자녀의 안전지도를 비롯한 모든 것)의 첫번째 장은 당연히 가정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가정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학교가 이런 역할을 어느 정도 보완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더군다나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왕따, 학교폭력, 아동성범죄를 중심으로 살펴 볼 때, 왕따나 학교폭력이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제3장 아이를 위협하는 장소들은 주로 아동성범죄에 관련된 장소이다. 나는 여기에 위협하는 장소로 [학교]를 넣고 싶다. [학교]라는 그 공간으로 제한된 [학교]가 아니라 이 책에서 말하듯, 등하교길을 포함한 [학교]이다. 그리고, 왕따나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장소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믿고 맡긴 학교가 아동성범죄의 장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일어난 교사에 의한 아동성범죄를 기억하라.) 저자의 말대로 학교를 오로지 배우는 장소로만 생각한다면, 선생님도 '수상한 사람'이 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주지시켜야 할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가장 1차적인 책임을 져야 할 상대로 [부모]를 들고 있기 때문에 초점을 거기에 맞춰 쓰여진 듯하다. 그래서, 학교나 선생님에 대한 의견을 위와 같이 제시한 것같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부모로서의 무거운 짐이다. 부모로서의 역할(이 책에서 제시하는)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부모 아래서 성장한 아이들은 어떻게 보호되어야할까? 우리 이웃이, 우리 학교가, 우리 사회가 함께 보호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 이젠 가볍게 다음 장을 살펴보자. 제5장(자녀를 위한 방범상식)과 6장(범죄를 당한 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상당히 도움이 되는 장이다. 우리 아이를 범죄로 부터 지켜내는 방법으로서 보편적인 도덕과 보편적인 매너를 가지게 하라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인 듯하다.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카피가 넘쳐나는 시대에 보편적으로 키우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보편적으로 키우라는 말을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더불어, 아이에게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상황을 설명하거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될 때 아이와 부모 사이의 수평적 대화가 이루어 질 수 있다. 이 책은, 내 관점과 안맞는 부분이 다소 있었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는 부모들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는 책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부모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부모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얹어놓은 것은 아닌지...한번쯤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내용에 별 세개를 준 이유는 나와 관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이고, 편집구성에 별 세개를 준 이유는 일러스트가 영 마음에 안든다.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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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반지 - 그는 짐승, 새, 물고기와 이야기했다
콘라트 로렌츠 지음, 김천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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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반지]가 대체 뭐야? 처음에 솔로몬의 반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하이에나는 우편배달부](비투스 B 드뢰셔)를 통해서였다. 솔로몬왕은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 콘라트 로렌츠는 동물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서 어떤 걸 들려줄까? 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의 첫머리에는 초판2쇄 머리말이 있는데, 이걸 읽어보니 콘라트 로렌츠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초판에서 미처 챙겨보지 못한 오류와 실수를 콕콕 집어내어 솔직히 고백하고 있는데, 그 머리말은, 동물학자(비교행동학자)의 학자로서의 모습보다 우리 이웃에 사는 친근한 아저씨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아하, 이 책도 역시 편안하게 읽어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콘라트 로렌츠는 [이 책이 살아있는 동물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동물을 다룬 책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것](p.9)이라는 그의 말은 그가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동물을 집적 기르거나 연구해보지 않은 사람의 상상에 의해 쓰여진 책이, 일반독자들, 혹은 어설픈 동물애호가들에게 얼마나 많은 엉터리 정보를 남발하고 있는가. 물론 저자는 문학적 형상화에 대해서도 [동물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허락되어 있다](p.10) 는 말로 지적한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게 1949년 여름이라 하니, 한참 늦게서야 번역된 셈인데, 이런 류의 책(뒤늦게 번역된 책)을 읽다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게 없다는 데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얼마전 읽었던 [안녕하세요 아그네스선생님](커크 패드릭)때도 그랬다.

 

저자는 수족관을 꾸밀 때에도 모래를 깔고 수초 몇개를 넣은 다음, 수초가 자라기 시작하면 물고기 몇마리를 넣어주라고 한다. 그때 주의할 점은 너무 많은 물고기를 넣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적정한 숫자의 물고기가 있다면, 수족관은 다른 장치 없이도 생명이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노련한 수족관 애호가들은 인공적인 공기주입기를 통해 공기를 넣음으로써 이 위험에 대처한다. 그러나 이 기술적인 보조수단은 수족관의 매력을 감소시킨다. 수족관의 물 속 세계는 스스로 유지되도록 되어 있고,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수조의 앞면 유리를 닦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생물학적 보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p.29)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수족관은 <우리>다. -중략- 수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특정 동물의 사육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p.32)

 

저자는 동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동물을 집에서 기르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집에서 기르거나 함께 살기는 하되, 그 동물의 생활환경 혹은 기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부합하는 동물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함께 사는 동물도, 그 동물을 기르는 사람도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동물을 사육하려는 욕망은 문화를 갖게 된 인간이 잃어버린 낙원인 대자연을 동경하는 데서 온 것이다. 모든 동물은 자연의 일부다. 그러나 모든 동물이 자연의 대표로서 당신의 집에 같이 살기에 적당한 것은 아니다.](p.164)

 

결국 동물을 기르는 것도 동물을 사랑하는 한가지 방법이기는 하되, 어떻게 기르는 것이 동물을 더욱 사랑하는 방법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솔로몬의 반지가 없는 우리는,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저자와 같은 사람을 통해 연구되어진 결과를 잘만 이용하면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그런 우리의 믿음을 배반하는 상상으로 쓰여진 동물행동에 대한 책과 지식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의 이미지는, 이미 우리 머리 속에서 하나의 정답으로 인식되어 있다. 동물은 인간의 하위개념으로, 인간의 나쁜 행동은 동물적인 행동으로 정의내려버린다. 그러나, 동물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보고 연구한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되어 있음을 안다. 동물적인 폭력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육식동물에게서는 강력한 폭력성을 초식동물 혹은 조류(특히 인간의 주위에서 사는)에게서는 비폭력성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시각인지는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의 비인간성은 인간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지 그것이 동물적인 행동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나름대로의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기를 만드는 것과 우리의 파멸을 막아 줄 책임감이나 자제력을 형성하는 것,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용이할까?] (p.221)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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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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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자들의 도시를 읽을 때처럼, 쑥 쑥 읽히는 맛은 없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대로 편집된 것이겠지만, 인용부호가 전혀 없는 대화체들이, 문단의 나뉨도 거의 없이 나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말꼬리잡기나 하고 있는 인물들의 갑갑한 대화를 효과적으로 드러낸 장치일지도 모른다. 언론을 통해 익히 봐왔던 정치인들의 말바꾸기와 말꼬리잡기는 이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게다가, 권력을 쥔 자가 공공의 이익과 권익 운운하며 휘두르는 방망이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것인가 하는 것을 절로 느끼게 해 준다.

 

 

4년전 눈먼자들이 다시 눈을 떴지만, 그들의 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원상복귀되었다. 눈먼자들을 백색전염병 운운하며 정신병원에 가두고 이후로 속속 눈이 멀고 사회 체제가 엉망이 되었지만, 그들이 눈을 뜬 뒤, 눈먼 상태에서의 모든 일을 덮어버렸다. 그것이 그들 사회의 가장 썩은 부분이었는데도 말이다. 결국은 눈뜬자들의 도시에서 벌어진 백지투표를 통한 선거는 그들이 4년전 눈이 멀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아무도 그 원인이나 이유는 모르지만, 합법적인 방법으로 사회에 대한 반기를 든 것인데 주동자도 드러나 음모도 전혀 없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하나의 희생양을 통해 모든 걸 덮어버렸다. 이것은 현실세계에서도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이던가? 희생양이 되는 대상은, 단 하나,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결정된다. 이 책에서는 모두 눈멀었을 때 눈을 뜨고 있던 여자가 희생양이 되었다. 사회 전체가 어떤 이념, 혹은 사건 속에서 갈팡질팡할 때 한 사람의 희생양은 사회전체의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은 떳떳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필이면 그 희생양이, 다른 사람을 위해 그토록 온 힘을 다했던 그 여자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결국은, 눈먼자들이 행한 모든 사실을 눈으로 본 여자를 없애버림으로써 4년 전의 사실은 암묵적인 비밀 속으로 다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뭘까? 이젠 아무것도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 이 책을 덮는 순간, 너무나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진실도 권력 앞에서는 한낱 불온한 징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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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과 미술 사계절 Art Library 10
조용진 지음 / 사계절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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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몸에 대한 세번째 책을 읽었다. 어린이책인 [머리부터 발끝까지](길벗어린이)를 통해 과학적 생물학적인 몸을 알았다면, 샤오춘레이의 [욕망과 지혜의 문화사전 몸](푸른숲)을 통해 문화적 의미로서의 몸을 알았고, 이제는 [우리 몸과 미술](사계절)을 통해 미술적인 관점으로 몸을 읽었다. [몸]이라는 주제가 막연했던 처음과는 달리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아주 낯익은 것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욕망과 지혜의 문화사전 몸]에서 읽었던, 혹은 언급되었던 예들이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이 다시 등장하는데 미술적, 美의 관점에서 이야기한 점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예술가로서 [몸]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연구한 흔적이 역력한 이 책은, 미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기초적인 공부로, 나처럼 단순한 호기심으로 보는 이에게는 또다른 몸에 대한 지식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미술학도를 위한 전문서적처럼 어려운 것은 아니다. 내게는 이 책이 오히려 앞서 읽었던 샤오춘레이의 책보다 더 쉽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어쩌면 샤오춘레이의 책을 먼저 읽었기에 이 책이 쉽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생물학자로서 몸을 바라보는 관점과 예술가로서 몸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라야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일반인인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유를 분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생존, 생활, 번식]의 유용성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이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 정말 그럴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한국인의 미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우려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국사람이면서 서양의 것에서 미의 기준을 찾는 것에 대한 우려다. 그러나, 어쩌면 세계화-정말 이 단어, 이제는 쓰기 싫지만-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익숙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한국적인 美를 지키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서양의 것을 숭배(?)하는 시대인 만큼 젊은이들의 관점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인 듯 하다. 우리의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우리의 것을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인 美의 관점을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람의 관점이 변한데에는 한국사람의 외형적인 변화-체형, 식생활 등-가 있었기 때문이고, 내적인 변화-국제화/세계화-도 있었기 때문이므로 잘못된 것이라 말할수는 없다는 뜻이다.

 

끝으로, 이 책의 초판이 쓰여진 지 20년이 다 되어가기 때문에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산아제한정책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으나 그것은 걸러서 읽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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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지혜의 문화사전 몸
샤오 춘레이 지음, 유소영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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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춘레이, 이 책의 저자는 [몸]에 대해 의학적, 생물학적, 과학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전문지식을 대하는 강박관념에서 조금은 벗어나도 된다. 대신, 다양한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것과의 만남을 기대하라.

요 며칠 사이에, 몸과 관련된 책을 연거푸 읽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길벗어린이에서 나온 [머리부터 발끝까지]라는 어린이지식그림책이다. 어린이책이라고 얕보아서는 안된다. 생물학적, 과학적 지식이 거의 전무한 나에게는 어린이책이지만 상당한 지식을 알려주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이루고 있는 몸에 대해 알고 난 뒤, 이 책을 읽으니 그 느낌이 또 다르다. 대상독자층이 다른 책이긴 하지만.

자, 우리 몸을 이루는 구조에 대해선, 얄팍하나마 알아두었고, 이제 문화적으로 알아보는 [몸]을 읽을 차례다. 샤오춘레이도 사람의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그리고 겉과 속(피부와 뼈)까지 차례차례 이야기한다.

저자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 서양의 문학작품과 예술품을 책 속으로 끌고 들어와 인간의 몸을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서양인이 쓴 책에는 아시아 쪽 이야기가 아무래도 가볍게 다루어지는데 반해 이 책은 저자가 중국인이기 때문인지 중국의 다양한 문헌들의 내용을 접할 수 있다. 또한 옛 문헌을 비롯하여 현대의 이미지 자료까지 다양한 자료를 만나 볼 수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일본의 자료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는데 비해 한국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지만 이는 이해해야 할듯하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몸]에 대한 자료를 얼마나 많이 제시하고 있는지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청나라가 머리카락을 자르려 하자 목을 내놓을지언정 머리카락을 자르려 하지 않았던 한족에게 머리카락은 한족의 문화적상징으로 보아야한다고 했는데, 이는 단발령이 시행되었을 때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자르려 하지 않았던 우리의 의식과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행위는 같은데 그 의식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책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데, 그런 것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또한 물리적인 육체 뿐만 아니라, 눈빛, 냄새, 체취, 섹스와 같은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그 재미가 독특하다. 인간의 몸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인간의 몸에 대해 한번쯤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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