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집 아이들이 달라졌어요
김정희 지음 / 알마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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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도 유행이다.

요즘, 아이들이 있는 집에 [서재 만들기]가 유행인 것 같다. [독서]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부모의 욕심이 만들어낸 유행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온 이야기지만, 무엇이든 강제로 하게 해서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학교에서는 [독서]라는 대유행에 뒤질세라 학생기록부에 독서기록장을 넣는다는 말까지 있으니 과히 전 국민적인 이슈가 될 만하다. 게다가 ‘거실을 서재로’라는 이벤트의 여파까지 더해져 너도나도 집안에 아이들을 위한 서재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 옛날 보지도 않는 전집이 장식처럼 꽂혀 있던 것과 뭐가 다를까? 거실을 서재로 바꾸기만 하면 아이들은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버리고 책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책을 손에 들고 제목과 목차를 보고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럼 이 책에서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지(??) 한번 볼까? 미리 말하지만, 혹여 이 책을 읽을 다른 이들을 위해 조언을 한다면,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알마), [하루15분, 책 읽어주기의 힘](북라인)과 같은 책을 읽은 분이라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책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게 될까를 고민하는 분보다는, 태교부터 시작해서 유아교육을 실천하다 지치신 분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책은 독서교육이나 서재 만들기가 주 내용이 아니라 엄마로서의 욕심이 내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는지, 가족이 텔레비전에 의해 얼마나 해체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해결과정을 보여준다. 이때 책이 있는 집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아이들을 기르고 키우는 과정에서 간접 체험을 하거나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하는 데 있어서 [독서]도 아주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다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독서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이다. 중요한 것은, 내 아이를 위한 서재 만들기가 아니라 나(부모) 스스로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환경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김정희 씨 역시, 아이가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텔레비전 앞에서 대화 없는 가정을 경험하고 난 후 결심을 통해 책이 있는 집을 만들게 되었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책을 친구로 여길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방법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책을 통해 가족 간의 대화도 더 풍부해졌고, 남과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치영이에게도 아주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이러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자. 책은, 아이들의 친구는 될 수 있지만, 독서라는 행동이 아이들의 짐이 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서재 만들기 같은 열풍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반대로 하기 싫은 것은 무엇인지 왜 그런지 하는 것을 서로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눔으로써 가정의 해체를 막고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찾아주는 것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제목이나 앞뒤 표지를 통해 [독서와 서재 만들기]라는 유행에 휩쓸린 듯한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교육환경을 바꿈으로써 아이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교육관에 대해 더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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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
박상진 지음 / 김영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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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식물과 관련된 몇 가지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물론, 어린이 책을 포함하여..

사실, 내 관심분야가 아닌 책을 읽을 때는, 어린이 책만큼 편안한 책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 책을 읽은 다음에는 성인을 대상으로 쓴 가벼운 서적을 읽고, 거기서 관심이 더 생기면 약간 전문적인 책을 읽기도 한다. 이번에 읽은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는 식물인 나무를 다룬 책이면서 내 관심분야인 역사가 포함된 책이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대만족이다.

1. 나무와 문화재의 인연

저자는, 과연 나무와 역사, 문화재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먼저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에서 가장 딱딱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장을 읽고 나면,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나무는 종류에 따라 어느 정해진 지역에만 분포하여 자라는 특성이 있다. 나무의 재질을 분석해보면 나라와 나라 사이 혹은 특정 지역 간의 교역 범위를 추정할 수 있”(p.13)기 때문에 저자는 나무로 된 문화재의 재질 분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이것을 확인함으로써 나무에 새겨진 역사를 읽어낸다.

2. 역사가 담겨진 나무 이야기

2장이 이 책의 중심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스쳐지나간 오래된 사찰의 나무기둥, 무덤 발굴을 통해 나온 관재, 나무를 깎아 만든 불상, 숯, 나무활자, 무적함대 거북선 등은 물론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나무는 세월이 지나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썩거나, 불이나 천재지변에 의해 사라지기 쉬운 소재인 탓에 역사적인 유물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소외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란 것은 이럴 때 더 다가온다. 나무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그 특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국가 간 혹은 지역 간의 교류를 증명해낼 수 있다하니 신기하다.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문헌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수많은 증거자료로 사용되지만, 나무의 특성을 비교/대조하는 것만큼 확실한 물증이 또 있을까?

또, 저자는 나무학자로서의 우려 섞인 충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무의 재질 조사를 통해 일본의 반가사유상을 한반도에서 만들었을 거라는 한반도 제작설에 대해 “재질이 소나무라는 것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를 추정하는 참고인자이지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소나무는 우리나라와 일본 모두에서 자라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지식으로는 우리 소나무인지 일본소나무인지를 밝혀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p.66) 라고 말한다. 즉, 나무의 재질조사를 통해 얻은 정보의 객관성이 필요하다. 정확하게 앞뒤 인과관계를 살펴보아야 하고, 다른 조사결과까지 모두 취합하여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살펴보았던 나무문화재의 역사적 의의들이 얼토당토않은 주장으로 들리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학적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연구과정 중에 도움을 준 대학원생의 이름을 밝혀 적음(p.81 참조)으로써 자신만의 연구성과로 포장하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기초연구를 다 해놓고도 논문이며 저작물에 이름한자 못 실린 한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부분은 상당히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었다.

3. 사람살이 나무 살이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재미있고 흥미롭지만, 3장의 내용도 그러하다. 고전문학이나 종교, 예술 문화에 이르기까지 나무와 관련이 있는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풀어놓고 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그림 속 “사이프러스”가 그렇고, 인도의 나무를 대체할 나무들을 찾아낸 조상들의 기발함이 그렇고, 연리지의 특별함이 그러하다. 또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유적지의 나무들 이야기도 있다. 뭐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무슨 나무를 심어놓은들 어떻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저자처럼 나 역시 이왕이면, 유적지에 어울리는 나무를 조경할 수 있는 감각~!! 정도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나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읽고 나니, 이제는 나무와 얽혀있는 문학작품은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나의 관심 영역 상, 식물학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고(고등학생 시절 생물 점수가 영~ 꽝이었던 기억이 ㅠ.ㅠ) 문화․예술적으로 나무와 친해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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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의 의미 - 어느 재일 조선인 소년의 성장 이야기 카르페디엠 14
고사명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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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내게는 재일조선인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일본에서 짧은 기간 체류하면서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아이들(그 당시 고등학생들)이 재일조선인이었고, 나의 첫 아르바이트 장소였던 곳의 주인이 재일조선인이었다. 그들은, 민단게열은 아니었지만, 그들과의 만남에서 얻은 것이 많다면 많다고 할까? 우선 고등학생이었던 그 아이들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들과의 만남이 나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그 아이들은, 조선인학교에서 조선말로 공부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한국어로 언어소통이 가능했는데, 주로, 일본인이 듣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를 할 때 주로 한국어를 사용했다. 우연한 기회에 중국의 조선족 동포와 재일조선인과 내가 함께 지낼 일이 생겨서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이 책<산다는 것의 의미>의 작가와는 조금 다르긴 하다. 이 작가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자란 세대이므로 굳이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할 이유가 없었지만, 내가 만난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한국인(정확하게는 조선인)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들로 인해 해외교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직업을 갖고 싶었고, 그것은 내 진로를 결정했었다.

어쨌든 그렇게 재일조선인은 내게 의미가 있다. 요즘같은 세상에 "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보인다. 대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재일조선인의 경우에는 "민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천삼]이는 조선인이라는 의식 없이 살아오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속하면서부터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자각을 한다. 그것은, 조선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기폭제로서의 자각이었다.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사건은, 그가 자라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천삼]이는 조선인이면서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겪게 되는 굴곡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침묵하고 있는 아버지보다 적극적으로 그의 삶에 끼어든 일본인들이다. 천삼이의 아버지는 [조선인이기 때문에 일본의 일에 무관하게 살아오려고 노력]한 반면 그 침묵으로 인해 오히려 아들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물론, 나중에 아버지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된 천삼이는 아버지의 침묵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재인조선인이 일본에서 살아가며 겪은 고생담이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읽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작가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조건때문에 겪은 일이긴 하지만, 인간으로써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지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피해나,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이야기들은 읽거나 들을 때 나는 공감을 느끼지 못한다. 일본 애미메이션 반딧불의 묘 같은 경우도 슬픈 이야기지만 나는 오히려 반감을 느꼈었으니까. 그러나, 그 시각을 조금 더 확대해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에 일본인보다 억울할 수는 있으나, 인간이라는 대명제를 놓고 바라본다면 모두 피해자로 인식되는 것이다. 물론, 천삼이가 죽음의 문앞까지 가게 된 이유가 애초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조선인일수도 일본인일수도 없었던 천삼이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자기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그는, 인간의 상냥함만이 그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 게 일본인이라면,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닦아준것도 일본인이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상냥함이 가져온 결과라고 천삼이는 이야기한다.

천삼이가 살아온 방식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반감을 느끼게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최소의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반감도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 가서야 인간에 대한 상냥함을 알게 되는 탓에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계속되었었다. 그리고, 문체가 조금 지루한 감이 있어 맥이 빠지기도 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과연 인간의 상냥함에 대해 공감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도저도 아닌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재일조선인의 삶을 한번더 생각하게 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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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03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하양물감 2007-08-04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엔드 게임 도코노 이야기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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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책 [빛의 제국]에서 이야기했던 도코노 일족의 이야기가 [민들레공책]과 [엔드게임]으로 확장되었다. 개인적으로는, 3권의 책 중에서 [엔드게임]이 가장 마음에 든다. [빛의 제국]이 짧은 단편 형식으로 도코노 일족의 이야기를 주워 모았다면, [민들레공책]은 도코노 일족의 곁에서 그들을 지켜본 사람이 회상형식으로 써내려간 일기 같은 이야기이고, [엔드게임]은 도코노 일족인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엔드게임]은 그들의 심리적 상태랄까? 도코노 일족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의심한다. 심지어, 에이코는 자신의 뒤집는 능력이 뇌의 질환이 아닐까 의심까지 한다.




뒤집히거나, 뒤집는 일을 하는 도코노 일족의 이야기인만큼, [엔드게임] 역시 뒤집고 뒤집히기를 반복한다. 읽는 동안 어느 것이 진실일지, 누구의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모르는 체, 독자인 나 역시도 뒤집거나 뒤집힌다. 그래서,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지는 소설이다. 불안에 의해 키워진 공포를 이겨내느냐, 아니면 거기에 잠식당하느냐 하는 것이 이들 도코노 일족의 운명이다. 빨래꾼이 ‘그것’이 왜 생겨났는지 원인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을 보면, 현대인들이 겪는 정신적인 고통 역시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의 원인을 밝혀내고 ‘그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크기의 공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뒤집히지 않고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도코노 일족의 특별한 능력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현대인들의 정신세계를 비유적으로 이야기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아주 뻔한 결말을 아주 맛깔나게 요리한 책이면서 환상소설이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오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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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임의 비밀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6
로버트 오브라이언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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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비 부인은 들쥐다. 들쥐와 시궁쥐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고, 까마귀와 올빼미도 찬조 출연하는 “니임의 비밀”은, 마치, 예전에 읽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떠올리게 한다. “개미”가 개미들의 이야기였다면, “니임의 비밀”은 쥐들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란 것이 다르다면 다를까?




프리스비 부인은 여느 들쥐와 다를 바 없이 힘든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 늘 약해서 걱정인 아들 티모시까지 병이 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티모시의 약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프리스비 부인의 모습은 우리 인간과 별다를 바 없는 모성을 보여준다. 사실, 모성본능은 인간만이 가진 성정이 아니기에, 우리는 자주, 동물들의 모성애를 보게 된다. 에이지스 씨의 처방을 받아 티모시에게 먹이고 증세가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봄이 오고 있는 길목의 농장은 위험하기만 하다. 곧 쟁기질이 시작되면 프리스비 부인도 이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다 낫지 않은 티모시와 함께 이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프리스비 부인은 까마귀 제레미의 도움을 받아 올빼미를 만나고, 그리고 시궁쥐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까마귀 제레미와 프리스비 부인의 만남은, 옛날 우화를 읽는 것처럼 익숙한 장면이었지만, 이야기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시궁쥐와 프리스비부인의 만남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장치인 것이다. 프리스비 부인이 시궁쥐들을 만나 숨겨진 비밀, 그러니까 “니임의 비밀”을 듣게 된다. 니임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책의 번역자는 자신이 쥐띠이고 쥐에 대한 편견으로 살아왔음을 번역후기에 써놓았다. 나는 이 책의 번역자와 같은 나이이다. 나 역시, 쥐 하면 불결하고 더러운 이미지만 떠올랐다. 실험실의 하얀 쥐는 쥐라고도 생각되지 않았고 어릴 때 쥐를 잡기 위해 쥐약을 놓곤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쥐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가끔 도로변 하수구에서 쥐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쥐는 더럽고 불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에서 시궁쥐들은 쥐에 대한 인간의 오해는 바로 쥐들이 인간의 물건을 훔쳐서 생활하게 되면서부터라고 이야기한다. 쥐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진 이유에는 그것도 있을 테고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전염병을 퍼뜨린 동물이라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십이지에도 쥐가 들어가는 걸 보면 예전에는 쥐가 그렇게 나쁜 이미지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실험실의 흰쥐들을 텔레비전을 통해 자주 보았다. 인간을 대신하여 수많은 실험에 사용되고 있는 쥐들을 보면서 감정적인 느낌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간이 실험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달라질 것이다. 비록 약간 공상적인 부분이 많긴 하지만 수많은 인간의 실험에 동원되고 있는 동물들의 의식세계를 우리 인간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동물들이 인간들처럼 문명을 이루지 않고 생활하는 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아서였을 수 있다. 필요가 발명을 부르는 법이니까. 인간들이 이룩한 문명이란 것이 생활을 더 편리하게 해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로 인해서 잃은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보자. 누군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또다른 누군가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을 하고 있다. 그것을 인간 스스로 느끼지 못할 뿐. 문명의 발달은 인간을 편안하게 하는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 이 책 속의 쥐들이 인간의 문명을 이용할 수 있게 된 후 더 편안하고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반면에 불평불만도 생겨났다. 아마도 그 불평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또 더 많은 노동이 필요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쥐들이 인간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의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가정은, 가정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동물들이 우리보다 못한 존재라고 규정한 것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신이 아닌 이상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니임의 비밀”을 읽는 동안, 스스로 겸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더 겸허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험실에서 수없이 죽어 간 쥐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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