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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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범>의 주인공 고다이 형사가 <백조의 박쥐>에도 나온다고 해서 뒤늦게 읽기 시작했다. <가공범>과 마찬가지로 초반 전개가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도쿄의 공사 중인 도로변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 그의 죽음을 알리자 그의 가족과 의뢰인들은 그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리가 없다고 말한다. 사건을 맡은 고다이 형사는 범인을 잡기가 쉽지 않겠다고 예상하는데, 얼마 안 있어 한 남자가 자신이 시라이시 겐스케를 죽인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사건의 세부 사항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은 그를 진범으로 보지만 고다이의 생각은 다르다. 


시라이시를 죽인 범인이라고 자백한 남자 구라기 다쓰로의 아들인 가즈마는 은퇴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인을 저질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피해자인 시라이시의 외동딸 미레이 또한 언론이 보도하는 사건 속 아버지의 모습과 자신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아버지의 모습이 다르다고 느낀다. 가즈마와 미레이는 각자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이 사건에 휘말려 한 사람은 살인자, 다른 한 사람은 피해자가 되었는지 알아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가즈마와 미레이, 그리고 고다이는 이 사건과 33년 전 아이치 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백조와 박쥐>를 읽기 전에 <가공범>과 <숙명>을 읽어서 그런지 두 소설과의 유사점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일단 세 소설 모두 현재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단서가 과거에 있고, 과거의 사건에 중심에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 세 소설 모두 남성 캐릭터들이 (모르는 사람의 죄를 덮어줄 정도로) 인정도 많고 자식 사랑이 대단하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일본 작가들에 비해 '핏줄'이나 '혈통' 같은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가족 간에도 개인주의가 강한 일본 소설답지 않은 느낌이, 한국에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 많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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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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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범>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눈에 들어온 소설이 <숙명>이다. 크레마클럽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검색했을 때 <가공범> 다음으로 나오는 소설이라서 골랐는데 무려 1990년 작이라고. 1990년에 나온 소설이 그 후에 나온 소설들보다 인기가 있다니. 대체 얼마나 재미있기에 그럴까. 읽어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데렐라 결혼,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등 90년대에 유행한 드라마에서 본 듯한 설정이 이어져 요즘 독자들의 눈높이에는 안 맞을 수도 있지만, 결말을 보기 전까지 책장을 덮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은 부정하기 어렵다.


소설은 유사쿠라는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유사쿠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외관이 인상적이었던 집 근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나에라는 여성과 가깝게 지냈다. 어느 날 사나에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유사쿠는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내내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현재. 대기업 UR전산의 사장 우류 나오아키가 지병으로 사망한다. 나오아키의 장남 아키히코의 아내인 미사코는 아버지의 후계 자리를 거부하고 의사가 된 남편의 선택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지만, 결혼 전에도 왠지 모르게 멀게 느껴졌던 남편이 결혼 후에도 여전히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것에 불만이 많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키히코를 대신해 UR전산의 후계자로 낙점 되어 있던 스가이 마사키요가 살해당한다. 검시 결과 살해 도구는 우류 가에 보관되어 있던 석궁으로 밝혀진다. 경찰은 우류 가의 일원 중 한 사람이 범인이거나 범인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탐문을 시작한다. 어느덧 어른이 되어 경찰이 된 유사쿠는 우류 가의 사람들을 탐문하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한 명은 학창 시절 내내 유사쿠와 악연이었던 아키히코이고, 다른 한 명은 유사쿠의 첫사랑 미사코다. 유사쿠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니 운명이 참 얄궂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의 얄궂은 운명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야기 자체는 앞에도 썼듯이 90년대에 유행한 드라마에서 본 듯한 클리셰 범벅인데 그렇다고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애초에 재밌으니까 클리셰가 된 거니까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점은 뇌의학이라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낯선 의학 분야를 이때 벌써 소설에 등장시킨 점과, '전뇌(電腦)'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 또는 기업이 개인의 신체와 정신을 사유화, 자본화하는 문제를 지적한 점이다. 이 소설에서는 '전뇌'를 컴퓨터와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지만 내 생각에는 인공지능, AI와 더욱 비슷한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 선생은 요즘의 AI 발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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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범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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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쓴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세요......>라는 글에도 썼지만, 오랫동안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 최근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가공범>을 읽고 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소설을 읽은 건 크레마클럽 인기 순위 1위인 걸 보고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키메라의 땅>, <먼저 온 미래> 등 요즘 인기 있는 책들을 제치고 오랫동안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읽어보니 과연 그럴 만하다. 일단 도입부부터 흥미진진하다. 


일본 도쿄의 고급 주택가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불이 난 집은 전소되고 그 집에서 시체 두 구가 나온다. 시체의 주인은 그 집에 살던 부부인데, 남편은 현역 정치인 도도 야스유키이고 아내는 은퇴한 배우인 도도 에리코이다. 경찰은 부부가 화재로 인해 질식사한 것으로 예상했지만, 검시 결과 부부의 몸에서 타살의 흔적이 발견된다. 부부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방화만 해도 충분한데 왜 범인은 살인을 한 후에 방화를 하는 수고를 들인 걸까. 애초에 살인범과 방화범이 한 사람이기는 한 걸까. 사건을 맡은 형사 고다이 쓰토무는 새로운 파트너인 야마오와 함께 피해자인 부부의 주변인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이 소설에서 좋았던 점 하나는 고다이 형사의 캐릭터이다. 이제까지 내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유카와 마나부 교수 같은 이른바 천재 타입의 인간이 보통의 지능을 가진 형사보다 우월한 능력을 뽐내며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에 반해 고다이 형사는 천재의 능력에 기대지 않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점이 좋았다. (고다이 형사의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서 고다이 형사가 처음 나온 <백조와 박쥐>도 뒤늦게 읽었는데 이 소설도 좋았다.)


이야기 자체도 흥미진진했다. 처음에 고다이 형사는 피해자 부부의 지인 중에 범인이 있을 것으로 보고 피해자 부부의 주변인들을 탐문한다. 그러나 남편이 현역 정치인이고 아내가 오래 전에 은퇴한 배우인 만큼 두 사람 모두 주변 정리를 잘 하고 살아서 원한 관계로 짐작되는 사람이 전혀 안 보인다. 그러다 고다이 형사는 수사 중에 느낀 사소한 불편함, 꺼림칙함 등을 단서로 부부의 과거를 캐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수사가 급물살을 탄다.


소설의 결말은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사건의 진상을 알았을 때 내 머릿속에는 사필귀정, 인과응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남성 작가의 한계가 드러나는 대목이 몇 군데 있었던 점은 아쉽지만(이 또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밝힐 수 없다), 이 소설을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는 점에서 수작(秀作)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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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날들이 단단한 인생을 만들지
임희재 지음 / 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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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보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미국이나 유럽에서 일어난 인종 차별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보다 보면 외국으로 나가는 게 무서워지고 한국에서만 살아야 할 것 같고, 아무도 믿을 수가 없고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그런 마음일 때 읽고 싶은 책을 만났다. 임희재의 산문집 <다정한 날들이 단단한 인생을 만들지>이다. 


저자 임희재는 스물두 살 때 대학을 졸업하고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에는 독일로 건너가 총 14년을 유럽에서 보냈다. 저자도 처음에는 낯선 외국에서 사는 게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다. 언어도 익숙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곳에서 혼자 살려고 하니 답답하고 불안했다. 막상 살아보니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늦은 밤 전기가 끊기거나 변기가 막혀서 난처할 때 저자는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 때마다 이웃들은 흔쾌히 도와줬다. 모르는 사람과도 눈이 마주치면 인사하고 숨쉬듯 감사하고 사과하는 문화는 오히려 한국보다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느껴졌다.


책에는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한 저자의 학교 생활 팁도 실려 있다. 프랑스 대학의 교수들은 교수의 말에 무조건 수긍하는 학생보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묻고, 불편하거나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학생을 더 좋게 평가한다. 학생들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각자 자신이 할 일에만 열중한다. 낯을 가리고 누군가에게 선뜻 말을 못 거는 내향인인 저자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플러스로 작용했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안 쓴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게 훨씬 쉽게 느껴졌고, 그 결과 어릴 때부터 동경한 메탈 밴드의 보컬이 되어 프랑스 전역으로, 유럽으로 공연을 다녔다.


유럽에서 14년이나 생활한 만큼 연애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책에는 프랑스 남자와 독일 남자의 차이가 자세히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건 팬데믹 이후 유럽 젊은이들의 연애 트렌드이다. 요즘 유럽에 사는 20대 젊은이들은 상대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아예 물어보지 않는다. 나와 상대의 성정체성이 무엇이든 간에 좋으면 예스, 싫으면 노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별이나 성정체성 등을 따지지 않고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하는 것이 오히려 더 깔끔하고 산뜻하지 않은가. 이 밖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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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도시여자의 주류 생활 - 미깡의 술 만화 백과
미깡 지음 / 이야기장수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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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라서 술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는 한두 잔 마시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서서 술을 즐기지는 않는다. 이제는 건강 상의 이유가 더해져서 아마 앞으로 술을 즐기는 사람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이따금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술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인간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를 놓치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나 만화를 읽을 때 느끼는 쾌락에 가까운 감정을 그들은 술 한 잔에 느끼고 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부럽고 아쉬운 일 아닌가 싶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끈 만화 <술꾼도시처녀들>의 원작자 미깡의 신작 만화 <술꾼도시여자의 주류생활>을 읽으면서 든 감정도 그것이다. 저자 미깡은 <술꾼도시처녀들>의 작가답게 오랫동안 술 애호가로 살아왔다. 그런 그가 일종의 '주류 생활 가이드'로서 쓴 이 책에는 그동안 그가 애정하며 마셔 온 수많은 술 이야기가 서양술 편과 동양술 편으로 나누어 실려 있다. 다양한 술의 종류와 맛있게 마시는 법뿐만 아니라 술의 기원과 역사, 경제, 사회적 영향 등 다양한 배경 지식도 실려 있어서, 저자처럼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이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겠지만 나처럼 술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새롭게 배울 점도 많다.


그중 하나가 '에일와이프'이다. 중세 초기 유럽 여성들 중에는 양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에일을 만드는 여성을 '에일와이프(alewife)'라고 불렀고 이들이 에일을 파는 곳을 '에일하우스(alehouse)'라고 불렀다. 그러다 에일에 홉을 넣은 '맥주'가 발명되고 이것이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남자들이 에일와이프들을 몰아내고 양조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역사학자 조앤 서스크가 말한 "어떤 사업이 번성하면 거기 있던 여성은 서서히 사라진다."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다. 당시 에일와이프들은 눈에 잘 띄기 위해 뾰족하고 기다린 모자를 쓰고, 에일하우스 앞에는 기다란 빗자루를 내걸었는데 이는 중세에 유행한 마녀 사냥을 연상시킨다. 


한국의 술 문화 하면 과음, 회식, 폭탄주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이런 부정적인 술 문화 대신 '세시주', '절기주' 같은 아름답고 운치 있는 술 문화를 제안한다. '세시주', '절기주'란 이름 그대로 세시풍속이나 계절에 맞는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이다. 겨울을 지나 차츰 하늘이 맑아지는 청명에는 청명주, 진달래꽃 만개한 춘분에는 면천두견주, 향긋한 쑥의 계절이는 쑥 막걸리 쑥크레를 마시는 식이다. 한국에는 또한 전국 각지에서 난 고유의 재료로 대를 이어 기능을 보유한 장인이 만드는 전통술이 존재한다. 그냥 술이 아니라 역사이고 문화라는데 안 마시는 쪽이 손해 아닐까. 술 안 마시는 나도 마셔보고 싶다. 어쩐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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