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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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 12월 어느 늦은 오후. 스물한 살 대학생 샘 매서는 매직아이로 만든 광고판을 보는 군중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다. 한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전우'였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멀어진 세이디 그린이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옛 친구를 만난 반가움에 샘은 세이디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다시 만난 샘에게 세이디는 디스켓 한 장을 준다. "이거 내가 만든 게임이야. 혹시 시간 나면 한번 플레이해봐. 네 의견이 무척 듣고 싶거든."이라는 말과 함께. 


<섬에 있는 서점>, <비바, 제인>의 작가 개브리얼 제빈의 신작 장편소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어린 시절 친구였던 샘과 세이디가 대학생이 되어 재회한 후 함께 게임을 만들면서 성공과 실패, 인정과 상실, 우정과 사랑 등을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이들이 처음 만난 건 샘이 열두 살, 세이디가 열한 살 때다. 교통사고를 당해 발에 장애가 생긴 샘이 입원해 있던 병원이 마침 세이디의 언니가 암에 걸려 입원한 병원이었다. 


언니를 보러 병원에 온 세이디는 휴게오락실에서 자기 또래 남자애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게임이라면 세이디도 제법 잘하는 편인데 남자애의 실력도 상당했다. 그렇게 서로를 알게 된 샘과 세이디는 하루가 멀다 하고 휴게오락실에서 게임을 했다. 병원에선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자신도 장애를 얻은 후 성격이 어두워졌던 샘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며 세이디를 칭찬했다. 그러나 얼마 후 둘은 멀어졌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말도 하지 않았다. 


게임으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을 다시 연결해준 것 역시 게임이다. 세이디가 건네준 게임 디스켓을 플레이한 샘은 어릴 때 함께 게임을 하면서 놀았던 친구가 이제는 스스로 게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실력이 상당하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는다. 전공인 수학을 계속 공부하거나 졸업생들의 전철을 밟아 금융계에 취직하는 것보다 세이디와 같이 게임을 만드는 편이 훨씬 더 즐거운 인생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함께 게임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한 샘과 세이디는 샘의 룸메이트 마크스까지 더해 셋이서 그들의 인생 첫 게임 '이치고'를 완성한다. 이치고가 예상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두면서 샘과 세이디는 순식간에 게임 업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고 했던가. 샘과 세이디의 사회적 입지가 높아지는 것과 개인적인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둘은 각각 일과 사랑, 우정, 가족 등 다양한 면에서 실패를 겪고, 그 때마다 서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이 소설은 샘과 세이디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두 사람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장애 때문에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던 샘, MIT 전공 수업에 단 둘뿐인 여학생 중 한 명이었던 세이디,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연극에서 주연을 맡지 못했던 마크스, 게이인 사이먼과 앤트 등 사회적으로 약자, 소수자 취급 당하던 이들이 게임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바꾸고 마침내 세상을 바꿔가는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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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꽃은 늠름하게 핀다 1
미카미 사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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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부잣집 아가씨 학교 '키쿄 여고'와 바보들만 모이는 양아치 남학교 '치도리 고교'는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여학교와 남학교가 붙어 있으니 두 학교 학생들끼리 연애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을 법한데, 두 학교 간의 차이가 워낙 커서 그런지 오히려 학생들은 서로를 원수 보듯 경계한다. 


치도리 고교에서도 인상이 험하기로 소문난 2학년 츠무기 린타로는 사실 케이크 가게를 하는 엄마를 열심히 돕는 착한 남학생이다. 언제나처럼 방과 후 케이크 가게를 지키던 린타로는 앳된 인상의 소녀가 혼자 와서는 엄청난 양의 케이크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다. 소녀의 이름은 와구리 카오루코. 언제부터인가 린타로는 카오루코가 가게에 오는 날만을 기다리는데... 


미카미 사카의 만화 <향기로운 꽃은 늠름하게 핀다>의 설정 자체는 새롭지 않다. 부잣집 여학생과 양아치 남학생의 연애는 로맨스 장르의 단골 소재 아닌가. 그런데 이 만화, 결코 식상하지 않다. 양아치처럼 생긴 린타로가 양아치가 아닌 건 만화 초반부터 나오고, 부잣집 딸 같은 카오루코가 부잣집 딸이 아니라는 사실은 1권 후반에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이 만화는 세간의 편견이나 눈에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고, 대상의 실체는 직접 만나서 겪어 보면서 판단해야 한다는 걸 알려준다. 린타로가 카오루코의 순수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반한 것처럼. 카오루가 린타로의 사려 깊고 자상한 면에 반한 것처럼. 이미 서로에게 반한 두 사람이 각자의 친구들로부터 반대를 당하는 모습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닮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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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야가의 밤 - 각성하는 시스터후드 첩혈쌍녀
오타니 아키라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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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여기저기 맞고 엉망인 상태로 차에 태워져 끌려간다. 도착한 곳은 도쿄에서도 부자들이 살기로 유명한 동네에 있는 저택. 차에서 끌어내려진 여자는 힘이 없는 척하다가 기회를 봐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남자들을 때려눕힌다.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보다 못해 성질 나쁜 도베르만 한 마리를 데려온 후에야 여자는 겨우 진정한다. 도베르만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도베르만을 죽이겠다고 남자가 협박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이름은 신도 요리코. 끌려온 곳은 야쿠자 조직 회장의 자택이다. 끌려온 이유는 회장의 금지옥엽 외동딸 쇼코의 운전사 겸 보디가드가 되기 위해서다. 며칠 전 거리에서 요리코에게 시비를 건 남자들을 혼내준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눈여겨 본 모양이다.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인 요리코. 그런데 주인으로 모시게 된 쇼코가 상당히 까다로운 캐릭터다. 나이는 열여덟 살인데 입고 다니는 옷은 옛날 아가씨 같고, 신부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매일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한다. 외모는 고운데 미운 말을 잘한다. 


오타니 아키라의 소설 <바바야가의 밤>은 이렇게 만난 요리코와 쇼코, 두 여자가 거칠다 못해 잔혹한 인성을 지닌 남자들의 세계인 야쿠자 조직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결국 서로를 구하는 과정을 그린다. '서로 말을 나누며 각종 사건에 적극적으로 다가가 해결하는 두 여성 주인공의 활약이 담긴 작품들'을 엮은 북스피어 첩혈쌍녀 시리즈 제2권인데, 소설의 내용과 시리즈의 성격이 잘 어울린다. '결혼 제도, 가부장제 등 다양한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는 글을 쓴다'는 작가 소개와도 맞아떨어진다. 


주인공 요리코는 다양한 싸움의 기술을 섭렵하고 폭력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의 '조각'과 닮았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요리코는 웬만한 남자들이 겁을 낼 정도로 몸이 크고 단단하고 식사량도 엄청나고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행동을 일절 안 한다는 것이다. 반면 쇼코는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의 총합과도 같은 인물인데, 그런 쇼코가 요리코를 만나 변화하고 성장하며, 요리코 또한 쇼코를 만나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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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같은 글쓰기 -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와의 대담
아니 에르노.프레데리크 이브 자네 지음, 최애영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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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글은 솔직하다. 그동안 많은 글을 읽었지만, 아니 에르노의 글만큼 솔직한 글을 본 적이 없다. 그저 솔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과거에 직접 경험한 어떤 사건에 대해, 작가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에 걸쳐 반추하고 또 반추하면서 그것의 인과 관계와 의미를 분석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이 단순한 정신분석에 그치지 않고 사회학적 글쓰기로서 평가받는 이유다. 


<칼 같은 글쓰기>는 프랑스 태생의 멕시코 작가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가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를 주제로 아니 에르노 본인과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대담집이다. 인터뷰에 앞서 자네는 "일부 독자들로부터 거북함과 몰이해라는 반응을 이끌어낼 만큼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글로 쓰는 이유, 내적 동기를 탐구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는데, 나 역시 아니 에르노의 전 작품을 읽으면서 비슷한 의문을 품었기 때문에 인터뷰의 내용이 매우 기대가 되었다. 


인터뷰 시작에 앞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을 작가로 칭하는 것과 자신의 글을 작품으로 칭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밝힌다.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 또는 책 쓰기는 '현재 진행형'이지 '완성형'의 활동이 아니다. 아니 에르노는 열여섯 살 때부터 내면일기, 외면일기 등 다양한 형식의 일기를 써왔고, 이를 바탕으로 책을 구상하고 발표해 왔다. 즉,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는 일기의 연장 내지는 확장이며, 책의 본문 앞뒤에 날짜를 표기하는 것은 집필 또는 출간 당시의 관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는 일기의 연장 내지는 확장이지만, 일기를 그대로 엮어서 책으로 출간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니 에르노가 글을 쓰는 이유 또는 목적은 지극히 사회적, 정치적이다. 작은 도시 이브토에서 식당 겸 상점을 운영하는 중소상인 계급의 딸로 자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피지배 계급 출신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교육을 통해 지배 계급에 편입된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아니 에르노는 이러한 인식에 기반해 자신의 경험을 사회적, 정치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연구해 책으로 발표한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글이 사회와 성이라는 두 차원에서의 금기를 넘기 때문에 더 심한 거부와 비난을 받는 거라고 설명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영향은 크게 받았으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향은 거의 받지 않았고, (현실과 무관하고 순수 미학만 추구하는) 기존 소설을 거부하는 초현실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오직 삶만이 있는 삶. 그 삶은 충분하지 않아요."(208쪽)라는 작가의 말이 다양한 의미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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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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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작가(셰한 카루나틸라카)의 소설을 읽는 건 처음인데, 한국어판 서문에서부터 충격받았다. "1950년대에 나의 할아버지 세대는 판자촌과 빈민가를 '코리야와스(Koreyawas)'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전쟁 직후의 한국은 콧대 높던 실론(스리랑카의 전 이름) 사람들에게 빈곤의 상징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러분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스리랑카가 30년간 계속될 전쟁에 휘말려 있던 1988년, 나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는 모습을 보았지요. '코리야와스'라는 경멸적인 표현이 더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되는 것도." (9-10쪽) 


'코리야와스'라는 단어가 있었을 정도로 과거의 스리랑카 사람들이 한국을 가난한 나라로 여겼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이후 한국은 빠른 속도로 경제 성장과 문화 발전을 이루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반면 스리랑카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빈국이며 팬데믹 이후 경제 붕괴 직전이라는 것이 훨씬 더 놀랍다. 같은 글에서 작가는 한국이 교육과 기술, 노력에 대한 투자를 하는 동안 스리랑카는 분열과 전쟁을 거듭한 것이 현재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2022년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말리의 일곱 개의 달>에도 명확하게 반영되어 있다. 


1990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 사진작가 말리 알메이다(말린다 알메이다 카발라나)가 살해된다.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어떻게 자신을 살해했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는 채로 눈을 뜬 말리는 자신이 저승 카운터 앞에 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다른 망자들과 함께 안내원에게 설명을 듣는 알리는 '일곱 번의 달이 뜨고 지기 전' 즉 7일이 지나기 전에 지난 생을 정리하고 '빛'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단, 자신의 몸이 있었던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장소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과연 말리는 죽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누가 죽은 말리의 이름을 불러줄까. 


이렇게 시작된 소설은 말리를 살해한 범인을 찾는 스릴러 소설처럼 진행되는 동시에 파란만장한 스리랑카의 현대사를 보여준다. 말리는 생전에 정부군과 반군, 외신 등의 의뢰를 받아 각종 사건 현장을 찍는 사진작가였다. 정파나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의뢰가 들어오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그중 어떤 사진이 문제가 되어 결국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사진은 26년간 7만 명 이상이 사망한 아시아 사상 최장기 내전으로 기록된 스리랑카 내전과 관련이 있다. 내전의 신호탄이 된 1983년 폭동 현장을 찍은 사진작가가 말리였던 것이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주인공 말리 알메이다의 모델이 된 이는 스리랑카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배우, 인권운동가였던 리처드 드 소이사다. 스리랑카 내전의 원인은 다수이며 불교를 믿는 싱할라족이 소수이며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을 차별, 박해한 것이다. 싱할라인 아버지와 타밀인 어머니를 둔 소이사는 무장 괴한에 의해 납치, 살해되었는데, 나중에 소이사의 어머니가 납치범 두 명이 경찰의 고위 간부라고 주장했으나 사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설 초반에 남자 두 명이 호수에 시체를 유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는 소이사가 실제로 어떻게 죽었는지를 묘사한 것 같다) 


<말리의 일곱 개의 달>는 스리랑카의 실제 역사에 기반한 소설이지만, 판타지를 가미해 몽환적이면서도 코믹하고 드라마 또한 풍부하다. 말리는 전쟁 사진작가인 동시에 못 말리는 도박꾼이자, '여사친'과 커플인 척 하면서 같이 살고 있지만 사실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완벽하지 않아도 나름 즐겁게 살고 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더 깊은 공감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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