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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평점 :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지금의 미국을 세우고 만들었으며, 지금도 많은 외국인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며 미국으로 간다. 미국은 이주민들의 나라이기도 하다. 고향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업이나 취업, 결혼 등을 계기로 원래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니며 산다. 그만큼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높기 때문에 주변인들과 나를 구분하는 척도로서 인종, 국적, 종교, 성적 지향 등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재미작가 이창래의 신작 장편 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의 주인공 틸러는 원래 가지고 있던 정체성이 너무나 평범하고 특별하지 않아서 스스로 비범하고 특별한 정체성을 만드는 인물이다. 틸러는 한국인의 피가 조금 섞였으나 겉보기에는 누가 봐도 백인인 20대 청년이다. 명문 대학교가 있는 던바라는 도시에서 자랐고, 대기업 관리직인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싱글 대디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원만했다. 친구들은 부유하고 유쾌했다. 불만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틸러의 삶은 대체로 만족스러웠으나 무엇 하나 틸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도 친구들과의 우정도 피상적이었다. 그러다 틸러는 지인의 대타로 캐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자수성가한 아시아계 사업가 퐁을 만난다. 틸러는 퐁의 불안정하지만 모험적이고 야망이 있는 면모에 끌리고, 퐁 역시 틸러를 좋게 보고 같이 외국에 가자고 한다. 그렇게 틸러는 일 년을 퐁과 함께 하와이, 마카오, 선전에서 보내고, 여행의 끝에서 밸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틸러는 한참 연상인 밸과 사귀게 되고, 밸의 집에서 밸의 아들인 빅터 주니어와 함께 살게 된다. 틸러에게 퐁과 지내는 날들이 모험과 광기의 시간이었다면, 밸과 지내는 날들은 은둔과 단련의 시간이다. 밸은 남편의 범죄를 연방 정부에 고발한 후 목격자 보호를 받고 있는 중이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빅터 주니어가 어린데도 요리 솜씨가 수준급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지역의 유명 인사가 되고, 밸의 집이 빅터 주니어의 음식을 맛보러 온 손님들로 붐빈다. 틸러는 이들 중에 위험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커진다.
틸러는 밸의 젊은 연인일 뿐 그들 모자에 대한 아무런 의무나 책임이 없으므로 그들이 위험에 처하든 말든 무시하고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떠나지 않고 더욱 열렬히 밸과 빅터 주니어를 붙잡는다. 소설 초반의 무기력한 틸러에게선 상상하기 힘든 변화다. 익숙한 곳을 떠나서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야 그들과 내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고 비로소 진정한 나를 알 수 있다는, 떠남과 만남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소설로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