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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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이자 음식 평론가인 몰리 레인의 장례식에 두 명의 남자가 온다. 유명 작곡가 클라이브 린리와 중앙 일간지의 편집국장인 버넌 핼리데이다. 각자 다른 시기에 몰리의 연인이었던 클라이브와 버넌은 몰리가 부유한 출판업자 조지 레인과 결혼한 후에도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장례식에는 클라이브와 버넌 외에 몰리가 사귄 또 다른 남자가 와 있었다. 그는 바로 줄리언 가머니. 보수당 출신 외무장관이자 차기 총리로 예상되는 유명 인사다. 


클라이브와 버넌은 오만불손한 데다가 정치 성향도 안 맞고 자신들보다 훨씬 유명한 가머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버넌의 신문사 사주인 조지가 버넌에게 비밀스러운 자료를 건넨다. 생전에 몰리가 찍은 가머니의 사진인데, 사진 속 가머니는 여장을 하고 있다. 사진이 공개되면 가머니의 정치적 생명은 끝이 나고 신문은 날개 돋은 듯 팔려나갈 거라고 직감한 버넌은 신문사 내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특종 보도를 준비한다.


한편 클라이브는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한 교향곡을 의뢰받아 작업 중인데 좀처럼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골치가 아프다. 머리를 식힐 겸 호수 지대로 여행을 떠난 클라이브는 그곳에서 한 여자가 남자에게 위협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그 순간 그토록 떠오르지 않았던 악상이 떠오르고,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어렵게 떠올린 악상이 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선 클라이브는 현장을 뒤로 하고 작업실로 돌아간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암스테르담>은 사회적 지위도 높고 경제적 안정도 이룬 엘리트 계급의 두 남자가 내면에 어떤 모순과 허위를 감추고 있고 그로 인해 어떻게 파멸을 맞는지를 보여준다. 클라이브와 버넌은 직업적 성공을 위해 도덕적 의무나 사회적 책임을 저버린다. 클라이브는 여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버넌은 성소수자를 공격하는데, 이는 클라이브와 버넌으로 대변되는 이성애자 남성 집단이 여성과 동성애자 집단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희생해 왔음을 암시한다. 


소설의 제목이 <암스테르담>인 것은 소설 초반 몰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클라이브와 버넌이 한쪽이 사리분별이 안 되는 상황이 되면 다른 한쪽이 암스테르담으로 데려가 안락사를 시켜주자고 약속한 것과 관련이 있다. (소설에 총이 등장하면 적어도 한 번은 총성이 울려야 하듯이) 결국 이들은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데, 절친했던 두 친구가 서로의 가장 큰 적이자 원수가 되는 과정이 우스우면서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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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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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일하는 민에게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취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매물을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임대인의 디지털 도어 비밀번호를 알거나 열쇠를 복사해 임대인이 없을 때 그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장소 중 하나가 수호를 만난 가구점이다. 오래된 쇼핑센터에 있는 폐업한 가구점에 종종 들러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곤 했던 민은, 그곳에 자신 말고 또 다른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게 바로 수호다. 


수호는 가구점 주인의 아들이다. 가구점이 망하고 빚더미에 앉은 아버지가 집에만 있게 된 이후로 수호네 가족은 전부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신용불량자라서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일용직을 전전하던 중, 수호는 우연히 습득한 신분증을 이용해 쇼핑센터 옥상에서 운영하는 놀이동산의 피에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러다 혼자서 놀이동산을 운영하고 있다시피 한 실장 연주에게 호감을 느끼는데, 위조한 신분과 가난한 처지 때문에 좀처럼 다가가지 못한다. 


조해진 작가의 <여름이 지나가다>의 초판은 2015년에 나왔고, 내가 읽은 버전은 2022년에 나온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리뉴얼 판이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에는 인물들이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에 점유하는 설정이 자주 나온다. <단순한 진심>에선 나나가 서영의 방을 빌려서 살고, <완벽한 생애>에선 시징이 윤주의 방을 빌려서 산다. <여름이 지나가다>에선 민이 수호의 방, 은 아니지만 가족과 관련이 있는 공간에 몰래 머문다. 


이에 대해 조해진 작가는 "도시에 살면서 느꼈던 거주지의 불안함"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조해진 작가의 소설을 쭉 따라 읽어온 내가 보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설 속 인물이 내 방보다 남의 방을 더 편하게 느끼는 마음은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고, 남의 방에 살면서 방의 주인이 어떤 사람일지 추측해 보고 확인하는 과정은 타인이 입장이 되어 봐야 비로소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실제로 소설에서 민은 폐업한 가구점에서 지내며 자신의 과거를 천천히 돌아본다. 파혼 후 직장을 그만두면서까지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수호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의 마음을 멈추고 자신의 현재를 살핀다. 가난하다는 핑계로 스스로 미래를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추한다. 결국 각자의 잘못이 드러나고 또 다시 모든 걸 잃을 위기에 놓였을 때, 이들은 두려워하기 보다는 차라리 속 시원해 한다. 마침내 한 시절이 끝났다는 듯이. 


민과 수호에게 폐업한 가구점에서 보낸 그 시절은 누구에게 쉽게 말할 수도 없고 공감을 얻을 수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각자의 삶에서 가장 고독하고 비루했던 시절에 모든 걸 내려놓고 자기 자신마저 잊은 채 온전히 쉴 수 있었던 시간과 공간은 더없이 소중하고 필요했던 것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그런 시간이 나에게는 언제였는지, 그런 공간이 나에게는 어디였는지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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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 파티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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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 작가인 올리버 부인(아리아드네 올리버)는 그리스 여행에서 만난 친구 주디스 버틀러의 집에 머무는 중이다. 마침 핼러윈 때라서 마을 아이들을 위한 핼러윈 파티가 열리고, 올리버 부인은 주디스와 함께 파티 준비를 거들게 된다. 올리버 부인이 유명한 추리 소설 작가라는 걸 안 사람들이 올리버 부인에게 말을 거는데, 그 중 한 명인 조이스라는 소녀가 신경 쓰이는 말을 한다. 몇 년 전에 자신이 살인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조이스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허풍 떨지 말라며 조이스를 혼낸다. 그도 그럴 게 조이스는 전부터 거짓말쟁이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올리버 부인도 마을 사람들을 따라 조이스의 말을 흘려 듣는다. 그러나 그 날 밤 핼러윈 파티 도중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올리버 부인은 조이스를 무시한 것을 후회한다. 올리버 부인은 곧바로 오랜 친구인 푸아로를 부르고, 푸아로는 올리버 부인의 부탁에 따라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핼러윈 파티>는 올해 9월 공개된 영화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의 원작이라고 해서 읽어 보았다. <핼러윈 파티>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작 <오리엔트 특급 열차>,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에 비해 덜 알려진 작품인데,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재미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최근에 일어난 한 건의 살인 사건이 과거에 일어났던 여러 건의 살인 사건과 연결되는 방식이 복잡하면서도 세련되어 그 자체로 흥미롭다. 


푸아로는 조사를 통해 이 마을에 수상한 죽음이 여러 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단한 부자였던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이 갑자기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외국인 오페어가 도망 간 사건, 16세 점원 샬럿 벤필드가 남자 둘에게 살해당한 사건, 여교사 재닛 화이트가 목졸려 죽은 사건, 법률 사무소 서기였던 레슬리 페리어가 불륜을 저지르고 살해당한 사건 등이다. 살인 사건 한 건을 조사하러 온 푸아로는 졸지에 네 건을 더 조사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마을 사람들은 조이스의 말은 전부 거짓이라고, 그 애의 말만 믿고 옛날 일을 들추는 건 시간 낭비라고 말한다. 하지만 푸아로는 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며 의문점을 차례로 해소하고 결국 사건의 진상을 밝힌다. 푸아로의 추리 과정 자체도 재미있지만,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사연도 소설 여러 편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흥미롭다. 1969년작인데 어른들이 '요즘 애들 문제야'라며 혀를 끌끌 차는 모습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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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소설Q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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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의 소설 <두고 온 여름>은 부모의 재혼으로 형제가 된 기하와 재하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기하가 열아홉 살, 재하가 열한 살 때다. 기하는 어릴 때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사진관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왔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재하 모자를 집으로 데려오기 전까지는 완전하지는 않아도 불만 없는 나날을 보냈다. 


기하는 재하 어머니가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를 닮은 것도 기막힌데, 생전 처음 보는 남자애를 친동생처럼 여기며 잘 돌보라고 하니 황당하다. 재하는 재하대로 기하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상처 주는 모습을 보기 싫고, 아토피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갈 때마다 기하의 도움을 받는 게 불편하다. 기하 아버지와 재하 어머니는 첫 번째 결혼의 미완 또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새롭게 이룬 가족을 더 잘 꾸려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기하는 더 엇나간다. 


결국 이들 가족은 헤어지게 되고, 기하와 재하는 한동안 서로를 잊고 지낸다. 이따금 함께 살았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도 꾹꾹 누른다. 그러던 어느 날 기하가 재하를 발견한다. 마지막 만남 이후 십오년이 흐른 시점에 '스트리트 뷰'를 보다가 우연히 재하 모자의 모습을 찾은 것이다. 기하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재하 모자의 근황이 궁금하기도 해서 그들이 운영하는 중식집을 찾아간다. 무슨 말을 하거나 듣고 싶은지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채로 무작정 간다. 


같이 살았을 때에도 끝내 친해지지 못했던 기하와 재하는 여전히 서먹서먹하다. 한쪽이 용기를 짜내 말을 해도 좀처럼 길고 진지한 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짧은 대화와 단절된 문장을 통해 두 사람은 같은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런 사람은 서로 밖에 없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는다. 젊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어렸던 기하와 재하가 함께 지냈던 날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온 세상에 단 둘뿐인 것이다. 


기하와 재하는 혈연이 아니므로 형제도 가족도 될 수 없다고 믿었지만, 돌이켜보면 두 사람은 한 집에 살면서 같은 부모를 공유하고 형제나 가족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과 기억을 가졌다는 점에서 진짜 형제, 진짜 가족과 다름 없다. 기하와 재하가 이후에 다시 만날지 연락을 주고 받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진짜 형제, 진짜 가족의 그것이기에 결말을 읽고 마음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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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8
강화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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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 살 싱글인 지수는 자취를 하다가 전세 사기를 당한 후 엄마 집에 얹혀 살고 있다. 지수는 오래 전부터 밤마다 악몽을 꿨다. 꿈에는 중학교 때 지수를 때린 선생님, 지수의 전 재산을 들고 사라진 집 주인, 헤어진 전 남자친구 등이 나온다. 그리고 지수의 엄마와 여동생 미수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수에게 가족은 엄마와 여동생뿐이다. 지수는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지만, 엄마와 여동생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늦된 지수와 달리 동생 미수는 모든 것을 제때에 완벽하게 해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언니보다 먼저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이뤘다. 엄마는 그런 미수를 더 예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사는 동안 내내 엄마와 여동생에게 한심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살아온 지수는 전부터 지켜본 여자를 따라 갔다가 그 여자가 다니는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한다. 그 운동이 지수의 인생을 조금씩 바꾸는데... 


강화길 작가의 소설 <풀업>은 'K-장녀'에 대한 고정관념 또는 편견을 깨는 내용이다. K-장녀 하면 보통 맏딸로서 부모를 챙기고 동생들을 돌보는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똑부러지며 책임감이 강하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 소설의 K-장녀 지수는 또래보다 늦될 뿐 아니라 동생보다도 부모에게 미더운 존재가 못 된다. 지수는 그런 자신을 책망하며 더 깊은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빠지는데, 그런 악순환을 끊는 것이 바로 운동이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지수는 난생 처음 헬스클럽에 등록해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으며 몸만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단단해진다. 예전에는 엄마와 여동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고 상황을 모면하는 일에 급급했는데, 운동을 시작한 후로는 남들이 자신을 무시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할 말이 생기면 꼭 한다. 그런 지수의 변화를 놀라워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과 보람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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