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문학동네 플레이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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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시험에 응시한 지 5년에 넘었지만 이번에도 불합격한 은미는 이제 그만 포기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운영하는 갈빗집에 나와 일하라는 말을 듣는다. 속이 상한 은미는 죽으려고 결심하고 죽는 방법을 알아보는데, 우연히 은미의 노트를 본 할머니가 은미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다. 할머니가 그동안 할아버지 몰래 모아둔 돈이 있으니, 그 돈으로 친구 민이와 함께 오래 전 미국으로 간 고모를 만나고 오라는 것이다. 


학창 시절 내내 이과 1등이었고 대학에서는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던 고모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여성 과학자로서 장래가 촉망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임신하고, 아이 아버지가 되어주겠다는 미국인 남자를 만나 도망치듯 이민을 가면서 가족과 연락을 끊었다. 은미는 그 후로 고모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할머니만은 편지로 고모의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고모는 무려 NASA에 취직해 우주비행사가 되었다고! 


얼마 후 은미는 할머니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 반, 취업이고 뭐고 다 잊고 놀고 싶은 마음 반으로 미국으로 떠난다. 은미의 여행 파트너인 민이는 은미의 오랜 남사친인데, 사실 요즘 은미와 민이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 전에는 성별을 의식하지 않고 무엇이든 공유하며 노는 친구 사이였는데, 최근에 민이가 정신과 상담을 받고 트랜지션(성전환)을 결심하면서 은미는 민이와의 관계가 그저 친구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정한아 작가의 <달의 바다>는 2007년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이다. 16년 전에 출간된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낡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5년째 낙방한 기자 시험을 계속 볼지 말지 고민 중인 은미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요즘 청년들의 모습과 닮았다. 2대에 걸쳐 갈빗집을 운영하는 은미의 가족은 겉보기에는 화목하고 유복해 보이지만, 사실은 강압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가부장(할아버지) 때문에 식구들 모두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다. 


할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물인 고모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이고, 이는 고모의 자식인 찬이 아니라 조카인 은미에게 전해진다. 고모와의 만남을 통해 어떤 이야기는 현실보다 아름다울 수 있고, 어떤 거짓말은 진실보다 참될 수 있다는 걸 배운 은미는 여행의 마지막에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깨닫는다. 결말은 다소 씁쓸하지만, 억지로 움켜쥐기보다 마음을 비우고 놓아줄 때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 같아서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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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마감식 : 내일은 완성할 거라는 착각 띵 시리즈 22
염승숙.윤고은 지음 / 세미콜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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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라디오 <윤고은의 EBS 북카페>를 종종 듣는다. 모든 코너를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소설을 소개해 주는 <소설 북클럽> 코너를 가장 좋아한다. <소설 북클럽> 코너지기 중 한 분이 염승숙 작가님인데, 윤고은 작가님과 염승숙 작가님이 함께 쓴 책이 나와서 읽어보았다. 제목은 <소설가의 마감식 : 내일은 완성할 거라는 착각>. 같은 음식도 소설가가 먹으면, 그것도 마감을 앞두고 먹으면 뭔가 다른지 궁금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이 책은 공복, 차, 식탁, 펑크, 작업실, 전투식량, 냉장고, 만찬 - 이렇게 총 8개의 키워드에 대해 두 명의 작가가 각각 한 편씩 글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염승숙 작가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에 즐겨마시는 음료는 차, 그중에서도 보이차다. 보이차는 카페인 함량이 미미해서 물 대용으로 마시기에 좋고, 마시면 허리부터 아랫배까지 따뜻하게 데워져 오랫동안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도 이제 커피 대신 보이차를 마셔볼까. 


윤고은 작가가 아침에 거르지 않는 습관은 따뜻한 물 한 컵 마시기이다. 그다음에는 유산균, 홍삼, 들기름, 블루베리, 꿀, 오트밀 등등 그 계절에 나고 몸에 좋다는 음식을 '공복 친구' 삼아 먹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정하는 '친구'는 포도다. 포도철이 되면 매일 아침 한 송이씩 먹는다. 무항생제, 유기농, 무설탕 같은 단어에 약하지만, 마감이 가까워지면 정크푸드도 잘 먹고 배달 주문할 때 디저트도 꼭 챙기는 모순적인 식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고...(작가님 저도요 ㅎㅎㅎ) 


염승숙 작가는 공복을 선호할 정도로 음식을 잘 안 드시는 분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건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윤고은 작가는 지방에 있는 맛집도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찾아가서 먹을 만큼 음식을 좋아하는 분 같은데, 웬만해선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아 큰맘 먹고 산 냉이를 냉장고에서 키웠을(?) 정도다. 비슷한 나이대의 같은 소설가라도 다른 점이 재미있다. 다른 소설가분들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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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뭐 먹지? - 권여선 음식 산문집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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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작가의 첫 산문집인데 주제가 음식이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꼭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안녕 주정뱅이>라는 제목의 소설집을 내기도 했다) 권여선 작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술인데, 그래서인지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책 제목이 원래는 <오늘 안주 뭐 먹지?>인데 '안주'가 생략된 거라며 어떤 음식이 나오든 곁들여 먹는 술을 떠올려 달라고 한다. (이 정도면 후속편으로 <오늘 뭐 마시지?>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ㅎㅎㅎ) 


이제는 술도 잘 마시고 술과 함께 먹는 음식 모두를 사랑하는 저자이지만, 어릴 때는 편식이 아주 심한 편이었다. 고기 특유의 냄새를 못 참아서 순대는 물론이고 만두나 고깃국물도 못 먹었다. 그랬던 저자가 대학에 입학해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식성이 급격히 변했다. 고기는 물론이고 순대나 만두는 없어서 못 먹는다. 반대로 어릴 때 저자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부단히 애썼던 어머니는 종교적인 이유로 엄격한 채식을 하고 계시다니 모녀간의 역전이 놀랍다. 


저자는 음식을 잘 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잘 해먹기도 한다. "오늘 뭐 먹지?"라는 즐거운 고민이 "오늘 뭐 해 먹지?"로 바뀌는 순간 무거운 부담이 되지만, 잘 해먹는 사람 치고 잘 먹지 않는 사람도 없다. 저자는 주로 한식을 즐겨 해먹고, 젓갈도 직접 담가 먹는다. 봄에는 제철 바지락을 사서 조개젓을 만들고, 가을에는 천연 생굴을 사다가 어리굴젓을 만든다. 낙지젓, 오징어젓도 직접 만들고, 앞으로 명란젓, 멸치젓, 갈치속젓에도 도전할 거라고.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돈다. 


음식에 얽힌 추억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가족이다. 이 책에도 저자의 가족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버지 월급날이 되면 어머니가 식구 수에 맞춰서 사 왔던 고로케 맛도 궁금하고, 어디서도 맛보기 힘들다는 마른 오징어튀김 맛도 궁금하다. 단식의 경험도 나온다. 단식을 하고 나면 미음조차 꿀맛이고, 간장만 먹고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입맛이 새로워진다니 이 또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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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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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지금의 미국을 세우고 만들었으며, 지금도 많은 외국인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며 미국으로 간다. 미국은 이주민들의 나라이기도 하다. 고향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업이나 취업, 결혼 등을 계기로 원래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니며 산다. 그만큼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높기 때문에 주변인들과 나를 구분하는 척도로서 인종, 국적, 종교, 성적 지향 등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재미작가 이창래의 신작 장편 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의 주인공 틸러는 원래 가지고 있던 정체성이 너무나 평범하고 특별하지 않아서 스스로 비범하고 특별한 정체성을 만드는 인물이다. 틸러는 한국인의 피가 조금 섞였으나 겉보기에는 누가 봐도 백인인 20대 청년이다. 명문 대학교가 있는 던바라는 도시에서 자랐고, 대기업 관리직인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싱글 대디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원만했다. 친구들은 부유하고 유쾌했다. 불만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틸러의 삶은 대체로 만족스러웠으나 무엇 하나 틸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도 친구들과의 우정도 피상적이었다. 그러다 틸러는 지인의 대타로 캐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자수성가한 아시아계 사업가 퐁을 만난다. 틸러는 퐁의 불안정하지만 모험적이고 야망이 있는 면모에 끌리고, 퐁 역시 틸러를 좋게 보고 같이 외국에 가자고 한다. 그렇게 틸러는 일 년을 퐁과 함께 하와이, 마카오, 선전에서 보내고, 여행의 끝에서 밸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틸러는 한참 연상인 밸과 사귀게 되고, 밸의 집에서 밸의 아들인 빅터 주니어와 함께 살게 된다. 틸러에게 퐁과 지내는 날들이 모험과 광기의 시간이었다면, 밸과 지내는 날들은 은둔과 단련의 시간이다. 밸은 남편의 범죄를 연방 정부에 고발한 후 목격자 보호를 받고 있는 중이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빅터 주니어가 어린데도 요리 솜씨가 수준급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지역의 유명 인사가 되고, 밸의 집이 빅터 주니어의 음식을 맛보러 온 손님들로 붐빈다. 틸러는 이들 중에 위험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커진다. 


틸러는 밸의 젊은 연인일 뿐 그들 모자에 대한 아무런 의무나 책임이 없으므로 그들이 위험에 처하든 말든 무시하고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떠나지 않고 더욱 열렬히 밸과 빅터 주니어를 붙잡는다. 소설 초반의 무기력한 틸러에게선 상상하기 힘든 변화다. 익숙한 곳을 떠나서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야 그들과 내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고 비로소 진정한 나를 알 수 있다는, 떠남과 만남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소설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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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 - 세계적 지성이 들려주는 모험과 발견의 철학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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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가을의 기본자세는 수직이라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의 두 작가님들(김하나, 황선우)의 말씀에 따라 주말마다 열심히 돌아다니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서울숲에 다녀왔는데, 서울 사람 다 여기 왔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나무도 많고 새도 많고 호수에 물도 많고... 오랜만에 힐링하는 시간이었다.


집순이답지 않게 열심히 나돌아다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책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이다. 이 책을 쓴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르도노상과 메디치상을 수상했고,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인정받는 공쿠르상의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인 프랑스 대표 석학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철학, 문학, 사회학적 지식과 통찰을 기반으로 우리가 왜 집에만 있지 말고 부지런히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실내에 머무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야외로 나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철학계에서도 오랫동안 논쟁이 있어 왔다. 플라톤은 "가장 용감하고 대담한 자들만이 동굴의 환상에서 눈을 돌려 별이 빛나는 밤하늘, 태양, 천체들을 감히 쳐다본다."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 역시 동굴 밖 하늘이야말로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선과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했다. 반면 이마누엘 칸트는 "집은 허무, 어둠, 모호한 근원의 공포를 막아주는 유일한 방벽이다."라고 했다. 


랑스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실내 생활을 찬양한 작품으로는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꼽을 수 있다. 드 메스트르는 42일간의 가택 연금형을 받고 자신의 집에만 머무르며 집 안의 가구, 책, 옷 등에 관한 책을 썼다. 그의 책은 영웅의 정복이나 순례 이야기가 대부분이던 당시 흐름과 정반대였으나 큰 성공을 거뒀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도 자기 방에서 영감을 받아 <사형수 최후의 날>을 썼다. 


사실 실내에 머무르든 야외로 나가든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현대인들이 야외 활동보다 실내 활동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고, 팬데믹이 이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20세기가 성장과 확장을 숭배하고 과도한 경쟁이 팽배한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정체와 축소를 추구하고 패배주의와 극단적 비관론이 넘쳐나는 시대다. 팬데믹은 역경에 맞서기를 꺼리고 모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핑계가 돼주었다. 


야외 활동에 따른 비용이 증가하면서 "진짜 활동다운 활동은 특권층의 호사가 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부자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집에서 OTT로 철 지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유튜브 먹방을 보면서 가공식품을 먹는다. 서핑이나 스키 같은 운동을 실제로 하면 많은 돈이 들지만 실내에서 온라인 게임으로 즐기면 돈도 절약되고 다칠 위험도 줄어든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현실에서의 사교 활동이 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현상도 언급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SNS에 자신의 실물보다 훨씬 잘 나온 사진을 올린다. 그런 사진에 익숙해질수록 실제 사람은 더욱 못생기고 불완전하고 흠 많은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구독하는 SNS, 내가 속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나를 닮은 타자들 밖에 없다. 그런 모임에 친숙해질수록 나와 다른 사상과 취향을 가진 사람을 대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일부러라도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는 도전과 모험이야말로 "삶이 제공하는 최선을 온전히 누리는" 행위이고 "우리의 두려움이 실상은 망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진짜로 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식물의 생장에도 바람이 필요하듯이 인간의 성장과 성숙에도 바람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메시지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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